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These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8, No. 6, pp.47-63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Sep 2018
Received 16 Apr 2018 Revised 13 Sep 2018 Accepted 15 Sep 2018
DOI: https://doi.org/10.7233/jksc.2018.68.6.047

『은언군관혼례의궤(恩彦君冠婚禮儀軌)』에 나타난 18세기 왕손(王孫) 가례 절차 및 복식 연구

이주미 ; 홍나영+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산업학과 박사수료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산업학과 교수
A Study on the wedding Procedures and Costumes of Royal Grandchildren in the 18th Century on 『Euneongungwanhonryeuigwe』
Mee, Lee Joo ; Na-Young, Hong+
Ph.D Candidate, Dept. of Fashion Industry, Ewha Womans University
+Professor, Dept. of Fashion Industry, Ewha Womans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Hong Na-Young, E-mail: nyhong@ewha.ac.kr

Abstract

In the Joseon dynasty, only the sons of the crown prince and princess were regarded as royal grandchildren; however, the royal house did not preside over their weddings. The ceremonies were more akin to a gentry wedding. In the 18th century, the weddings of the royal grandchildren, namely Prince Euneon(恩彦君), Prince Eunsin(恩信君), and Prince Eunjeon(恩全君), were presided over by their grandfather Youngjo(英祖) because their father Jangjo(莊祖) died early. Prince Euneon was the first of the three royal grandchildren to have a wedding ceremony. Prince Eunsin and Prince Euneon had the same mother; hence, both of their weddings are recorded in the 『Euneongungwanhonryeuigwe(恩彦君冠婚禮儀軌)』. As for Prince Eunjeon, his wedding ceremony was identical to that of Prince Euneon. The wedding ceremonies of the royal grandchildren started with Gantaek, which was followed by Napchae, Chinyoung(親迎), Dongroe(同牢), and Johyeonrye(朝見禮). A review of the 『Euneongun- gwanhonryeuigwe』 shows that the ceremonies were more understated than the wedding prescriptions in 『Gukhonjeongrye (國婚定例)』. The princes usually tried on additional costumes for fitting besides the ones needed for the wedding. However, the costume made for Prince Euneon’s wedding was mostly limited to the Gongbok(公服), which was required for Chinyoung. The bride also only tried on No-ui(露衣), Jeogori(赤古里), and Chima[赤亇], which were imperative for Chinyoung. This wedding ceremony reflected Youngjo’s frugality, wherein the cost was minimized while still meeting the standard of a formal royal ceremony. This study reviews the procedures and the costumes of wedding ceremonies of the royal grandchildren. Furthermore, the accounts show that these wedding customs were more understated and simpler than the weddings of the gentry. The findings can be used to assist future studies that examine the costume culture of the Joseon royal family on a broader scale.

Keywords:

royal wedding ceremony, royal grandchildren, wedding costume

키워드:

가례, 왕손, 혼례복

Ⅰ. 서론

가례(嘉禮)는 조선의 오례(五禮)중 하나로 가례와 책례(冊禮), 관례(冠禮), 연향(宴享) 등의 포함되어있는 예식이다. 그 중 가례 의식은 왕을 포함한 왕세자(王世子), 왕자(王子)1), 왕녀(王女)2), 왕손(王孫)의 결혼 예식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및 『가례등록(嘉禮謄錄)』을 살펴보면, 왕과 왕세자를 제외한 다른 왕실 인물의 결혼 예식을 길례(吉禮) 또는 혼례(婚禮)라는 단어로 기록한 경우가 많다. 길례는 사전적인 의미로 관례와 혼례의 경사스러운 의식 또는 나라의 제사의 모든 예절을 뜻한다. 『은언군관혼례의궤(恩彦君冠婚禮儀軌)』에서도 가례와 길례의 용어가 같이 사용되고 있으며, 은언군 이후에 결혼을 한 은전군의 가례는 『은전군가례등록(恩全君嘉禮謄錄)』으로 기록물이 남아있어 본 연구에서 명칭을 통일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왕손 결혼식의 경우, 혼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으나, 조선 왕실에서 주최한 왕손의 결혼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왕자ㆍ왕녀ㆍ왕손의 혼례를 가례로 통칭하도록 한다.

조선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국가 의례의 준비과정과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의식의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자세한 기록을 남겨 다음 의례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왕과 왕세자의 경우, 의례에 대한 기록을 등록(謄錄)으로 묶은 후 정리하여 의궤(儀軌)로 남겼으나, 왕자와 왕녀의 경우에는 준비 과정과 절차를 일정별로 정리한 기록물만 남아있다. 하지만 조선은 양란을 겪으면서 인조대(仁祖代) 이전의 가례에 대한 기록물들은 소실되었다. 그래서 인조 이전의 왕실 가례는 『조선왕조실록』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통해서 절차와 간단한 정보들만 알 수 있다. 왕과세자의 가례는 1627년(인조 5)에 거행된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가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다. 왕자의 경우, 인조대에서 현종대까지 가례를 올린 낙선군, 숭선군, 그리고 왕녀들의 가례와 절차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가례등록(嘉禮謄錄)』(1638-1662년)이며, 왕손의 가례 경우 영조대의 『은언군관혼례의궤』가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주관하여 올린 왕손가례는 은언군(恩彦君, 1754년~1801년), 은신군(恩信君, 1755년~1771년), 은전군(恩全君, 1759년~1778년)이 영조대에 가례를 진행하였다. 왕손은 왕자가 출합하여 사가에서 나가서 성장하기 때문에 보통은 사대부가의 혼례 절차로 진행되었다. 왕실은 의식의 날짜를 지정해주거나, 의식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했다. 영조대에 왕손 가례를 왕실에서 주관하여 준비하고 행해진 배경은 사도세자[莊祖]가 사망한 후 할아버지인 영조가 손자들의 가례를 대신 진행한 특별한 경우였다.

은언군과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이며, 숙빈 임씨(肅嬪 林氏, 양제임씨)의 아들들이다. 두 형제는 노론을 견제하는 영조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은신군은 풍토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은언군은 복귀하여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등을 역임하였다가 홍국영(洪國榮)과의 연루로 인해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보호에 의해 사형은 면하였다. 은전군은 경빈 박씨(景嬪 朴氏, 수칙 박씨)의 소생으로 어머니가 사도세자에게 살해당하였다. 노론 벽파에서 이를 계기로 삼아 정조 대신에 왕으로 추대하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이 발각되어 은전군은 정조에게 자결을 명을 받았으나, 이를 어기자 사사(賜死)를 받았다.

18세기 영조는 재위기간이 52년(1724년~1776년)으로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길게 나라를 통치하였다.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는데, 왕손의 교육을 왕실에서 직접 담당하도록 정책을 바꾼 것을(Yuk, 2006) 하나의 예로 볼 수 있다. 또한 1749년(영조 25)에 『국혼정례(國婚定例)』를 통해 왕실의 가례를 규정하면서, 그 당시 등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왕손과 군주(郡主), 현주(縣主)의 가례를 성교(聖敎)에 기초하여 정하였다.

장서각에 소장되어있는 『은언군은신군관례의궤(恩彦君恩信君冠禮儀軌)』(K2-2702)는 책의 본문 머리에 표시된 제명(題名)인 권수제로 장서각에 서명되어있으나, 책표지에는 『은언군관혼례의궤(恩彦君冠婚禮儀軌)』 『은신군관례부(恩信君冠禮附)』로 기록되어있다. 은언군과 은신군은 1767년(영조 43)에 관례 의식은 함께 진행하였고, 가례는 은언군이 먼저 행하였는데, 은신군의 경우 간택을 제외한 나머지 의식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은언군과 동일하게 의례를 치렀을 것으로 생각한다. 책 내용을 살펴보면, 관례와 간택을 제외한 모든 절차가 은언군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표지명대로 『은언군관혼례의궤』라고 정정해서 사용한다. 이후 1773년(영조 49)에 은전군의 관례와 가례를 기록한 『은전군가례등록』(K2-2703) 또한 장서각에 소장되어있다.

은언군의 기록의 경우 등록이 아닌 의궤로 명명되어있고, <Fig. 1>과 같이 어람(御覽), 동궁(東宮), 사각(史閣), 예조(禮曹)에 각각 1부씩 제작하도록 하였다.

<Fig. 1>

『Euneongungwanhonryeuigwe』's table of contents (Euneongungwanhonryeuigwe, n.d.)

『은언군관혼례의궤』의 명칭은 의궤로 기록되어 있으나, 왕과 왕세자의 의궤처럼 반차도(班次圖)가 포함되어있지 않고, 『은전군가례등록』과 비교하였을 때 관례와 가례가 구분되어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목차와 내용 구성은 동일하다. <Fig. 2>를 보면, 은언군의 경우, 관례는 은신군과 함께 진행하였기 때문에 제명에 따로 『은언군은신군관례의궤』와 『은언군가례의궤』로 나누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Fig. 3>의 『은전군가례등록』은 관례와 가례를 진행했던 인물이 동일하기 때문에 관례와 가례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Fig. 2>

『Eunjeongungaryedeungrok』's table of contents (Eunjeongungaryedeungrok, n.d.)

<Fig. 3>

number of published 『Euneongungwanhonryeuigwe』 (Euneongungwanhonryeuigwe, n.d.)

조선왕실의 가례 복식에 대한 연구로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를 통해서 왕과 왕세자의 가례복식을 고찰한 연구(An & Park, 2009; Lee, 2017; Yu, 1986), 『가례등록』에 나타난 왕자녀의 가례 복식에 대한 연구(An, 2015; Kim, 2013; Kim, 2015; Kim, 2015; Kim, 2016; Lee, 2009), 조선 궁중 발기에 나타난 가례복식을 분석한 연구(Kim, 2004; Lee, 2011), 문헌을 통해서 가례복식을 재현 또는 고증한 연구(Kim, 2016; Lee, 2015)가 있다. 『가례도감의궤』는 왕과 왕세자 가례 복식 기록만 있기 때문에 왕실 전체 가례 복식을 연구하는데 한정적이다. 『가례등록』은 왕과 왕세자뿐만 아니라 왕자녀의 가례 또한 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최근에 왕자녀의 『가례등록』을 통해서 가례복식 고증 및 재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의궤와 등록으로 남아있는 왕손 가례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다. 본 논문은 현재 남아있는 왕손 기록을 통해서 18세기 왕손 가례의 절차와 복식을 알아보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일성록(日省錄)』, 『국혼정례』 등과 함께 왕손 가례 절차와 복식을 알아보며, 왕자 가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Ⅱ. 왕손 가례

1. 왕손 가례 절차

조선은 길례, 가례,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인 오례(五禮)를 국가의 기본 의식으로 삼았다. 세종은 1444년(세종 26)에 정척(鄭陟), 변효문(卞孝文)과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에게 『오례의』 예문(禮文)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3) 이후 1451년(문종 원년)에 송(宋)의 옛 제도와 명(明) 나라의 제도를 취하여 『오례의』를 완성시켰다.

세종은 가례의식 중 친영(親迎)의 절차를 중시하였는데, 이 당시 친영의식이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례의』를 통해서 왕자와 왕손들의 가례 절차를 확립시킨 후 사대부가에도 전파되기를 원했었다.4) 왕손 가례는 종친과 문무관 일품이하의 혼례와 함께 『오례의』에 규정되었다. 『오례의』 종친 및 문무관 혼례 의식 절차는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 부 현구고(婦見舅姑), 부 현사당(婦見祠堂)의 순서로 제정되었다. 왕손 가례의 경우 왕실 종친을 관장하는 기관인 종부시(宗簿寺)에서 주관하였으나5), 절차와 형식은 『오례의』에서 규정한 사대부가의 혼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영조대의 왕손 세 명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사망한 뒤 관례와 가례를 치렀기 때문에 영조가 직접 왕실에서 주관하여 의식을 진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Table 1>은 현재 현존하는 군(君)의 가례 기록물들을 정리해놓은 표이다. 이 표를 보면, 유일하게 영조의 왕손들의 가례 절차 및 복식이 의궤와 등록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은언군관혼례의궤』와 『은전군가례등록』은 당시 왕손 가례를 살펴볼 수 있고 왕자 가례와 사대부가의 혼례를 비교하여 왕실 가례의 차별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Records on royal wedding of Prince[王子] & Royal grandchildren[王孫]

2. 은언군 가례 특징

조선 후기 왕자 가례의 절차는 가례에 대한 왕의 전교가 내려지면, 가례청이 세워지고 간택(揀擇)이 진행된다. 왕자 가례의 간택은 왕세자와 동일하게 삼간택의 순서로 진행되며, 삼간택에서 부인이 정해지면 왕자 부인은 친영의식을 할 때까지 별궁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후 납채, 납폐, 명복내출(命服內出), 친영, 동뢰(同牢) 순서로 가례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친영 다음날 왕실의 웃어른에게 인사드리는 조현례(朝見禮)를 진행하고 왕자는 왕세자와 다르게 부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왕자군현부인지부모의(王子君見夫人之父母儀)를 행한다. 왕자의 『가례등록』에는 왕자 부부가 사가로 나가는 출합(出閤)의식까지 기록되어있다. 왕손은 부인이 결정된 날 사제로 나가라는 기사6)를 참고하면 가례의식을 모두 치른 후 출합을 하여 사제로 나가는 왕자와 다르게 가례의식을 주관하는 것은 왕실이지만, 왕손은 궁에서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례 후에 출합의식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영조대의 왕손가례는 은언군이 가장 먼저 의식을 진행하였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은신군은 은언군과 같은 시기에 함께 의례를 준비하였기 때문에 은언군과 동일한 절차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은전군도 은언군 의식을 전례(前例)로 따랐기 때문에 은언군 가례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조선 후기 왕손 가례의 선례(先例)라고 할 수 있다.

<Table 2>를 보면, 은언군의 가례는 처음에는 이전 왕자의 가례와 같이 간택을 시작으로 납채, 납폐, 명복내출, 친영, 동뢰 순서로 날짜가 정해졌다. 다만, 왕손의 가례에서는 왕실의 웃어른과 왕손부인의 부모에게 인사드리는 의식들은 제외되었다. 계획되었던 의식과 다르게 은언군의 가례는 납채의, 친영의, 동뢰의 순서로 진행되어 중간에 납폐의식과 명복내출의가 생략되었다. 왕자 가례에서 친영일 다음 날 행해졌던 조현례의 기록은 없고, 친영 후 3일 뒤에 왕손 부인이 영조를 찾아뵙고 인사드렸던 것으로 대신하였다.7)

Procedure for Prince YeoningㆍPrince Euneon's wedding

『은언군관혼례의궤』를 보면, 영조가 근년[頃年]에 국혼이 있어 일이 많아 은언군의 예식을 감하라고 명한다. 예식 중에 명복내출과 납폐를 줄이고, 납채와 친영의식만 진행하라고 지시한다.8) 근년의 가례를 살펴보면, 왕세손(王世孫) 가례(1762년)를 시작으로 화길옹주(和吉翁主) 가례(1765년), 청연군주(淸衍郡主) 가례(1766년), 청선군주(淸璿郡主)의 가례(1766년)가 연이어 의식을 진행하였다. 은언군은 1767년(영조 43)에 가례를 올렸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의례 준비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근현주(淸瑾縣主) 가례(1772년)도 은언군과 동일하게, 의식 절차에서는 납채와 친영만 진행하였다. 은언군보다 먼저 가례를 올린 청연군주와 청선군주 또한 사도세자의 자녀이지만,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청근현주와 다르게 사도세자의 적녀(嫡女)이기 때문에 이들의 가례는 옹주와 동일한 절차로 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사도세자의 적자(嫡子)는 이 당시 왕세손인 정조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가례 절차를 비교할 수 없으나, 이후 현주의 가례 또한 이전 군주 가례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약소하게 진행한 것으로 보았을 때 왕실에서 주관하는 왕손의 가례에서는 적서(嫡庶)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사대부가 혼례 절차를 보면, 납폐는 친영의 전날 의식을 진행한다9)고 기록되어있다. 다만, <Table 2>의 왕손 가례 경우 친영일 전날 행해진 의식이 납채이지만, 납폐의식도 함께 진행한다는 가정 하에 일치하는 일정으로 보이며 영조 재위 당시의 특별한 상황에서 치러진 왕손 가례가 사대부가의 혼례보다도 간소화되어 진행됨을 알 수 있다.

1) 간택(揀擇)

왕의 가례에 대한 전교가 내려진 후 금혼령이 내려지게 되고 간택단자에 처녀의 성(姓)과 생년월일, 생시(生時) 그리고 아버지의 관직 및 이름을 적어 한성부에 올리는 것으로 간택이 시작된다. 『은언군관혼례의궤』에 기록된 간택은 은언군과 은신군의 간택단자를 합쳐서 그 중 두 명의 처녀가 왕손의 배필로 정해졌다. 1765년 2월 9일에 영조의 전교 후 간택단자 중 3명의 처녀를 뽑았다. 다음해 7월 10일에 이들 중 송낙휴(宋樂休)와 임용주(任龍周)의 자녀가 최종 후보로 올라 두 왕손의 부인으로 간택되었으나, 송낙휴의 자녀만 은언군의 부인으로 간택되고, 은신군 부인으로는 최종 간택단자에 오르지 않았던 홍대현(洪大顯)의 자녀로 12일에 다시 결정되었다. 은전군의 경우 1772년에 관례를 행하고, 다음 해인 1773년에 간택단자를 한성부에서 추합한 후 조성(趙峸)의 딸을 부인으로 간택하였다. 왕세자와 왕자의 경우 세 차례의 간택절차인 삼간택을 거쳐서 부인을 정하였는데, 왕손의 경우는 삼간택의 형식이 아닌 모아진 간택단자 중에서 왕의 선택으로 한 번에 간택이 이루어졌다.

2) 납채(納采)

간택을 통해서 왕손 부인이 정해지면, 가례청에서는 의식 날짜를 정하고, 전체 가례에 준비될 물목들의 제작을 각 기관에 의뢰한다. 이후 납채는 왕실에서 왕손 부인의 집에 혼인을 요청하는 채서(采書)를 보내고, 왕손 부인의 아버지는 그 요청을 받아드린다는 복서(復書)를 왕실에 보내는 순서로 진행된다. 왕손 가례에서는 납폐와 명복내출의를 따로 진행하지 않고 납채만 진행했다. 『은언군관혼례의궤』에는 각각의 의식마다 필요한 물목이 정리되어있다. 다른 왕자들의 『가례등록』을 보면 의식에 사용되어질 물목만 정리되어서 나열되어있는데, 은언군의 경우 『국혼정례』에서 정한 물목이 먼저 명시되어있고, 바로 다음에 은언군의 가례에 사용될 물목을 따로 정리하였다. 그 기록을 보면 납채ㆍ납폐 물목이 『국혼정례』에서 정해진 종류와 수량보다 축소되어서 준비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납폐의식을 따로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납채의식을 진행하면서 준비된 물목들을 함께 부인가(夫人家) 보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명복내출의(命服內出儀)는 왕자 부인이나 공주남편에게 명복함을 보내는 예로 『국조오례의』에서는 규정되어있지 않는 의식이다. <Table 1>의 왕자들의 『가례등록』 중 숭선군(崇善君)의 가례부터 이 의식이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이전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언제부터 이 의식이 추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왕세자빈의 가례에서는 친영 전 책빈의식에서 명복함을 함께 보내기 때문에 왕자의 명복내출의식이 책빈의와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종실록(顯宗實錄)』의 기록을 보면, 가례를 진행 중이던 명선공주(明善公主)가 갑작스럽게 졸기하였다. 이 당시 부마는 삼간택 후에 공주 남편의 작위를 받은 상태이며, 의식의 날짜 또한 부마의 집에 알린 상황이었다. 현종은 이를 고기(告期)의식을 진행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으며, 부마의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며, 장례 의복 또한 부마의 신분에 맞는 의복을 입도록 하였다.10) 이 기사를 참고하면, 왕자녀 가례 간택 후 군부인 또는 부마에게 미리 작위를 내려주었기 때문에 명복내출의가 왕세자 가례의 책빈 의식처럼 왕실 신분의 지위를 주는 의식보다는 가례에 필요한 물목을 왕실의 예법에 맞게 제작해서 함에 담아 보내주는 의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은언군은 가례 이전에 작호를 받았기 때문에11) 은언군의 부인도 기록에는 없으나, 왕손의 지위에 맞는 작위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왕손의 경우 명복내출을 진행하지는 않았으나 <Table 2>를 보면 의식이 계획되었던 점을 보았을 때 납채를 진행하면서 친영의식에 필요한 물목을 함에 넣어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친영(親迎)ㆍ동뢰(同牢)

친영과 동뢰 의식은 같은 날 진행된다. 친영은 신랑이 기러기를 들고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오는 의식으로 지금의 결혼식과 비슷한 예식이다. 동뢰는 친영을 치른 후, 신랑이 신부를 본인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방 안에서 술잔을 주고 받는 의식이다. 왕세자와 왕자의 가례의 경우 별궁을 미리 지정하여 삼간택이 끝난 후부터 왕세자빈이나 왕자부인이 그곳에서 생활하며 친영의식까지 진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왕손의 경우 별궁에 대한 기록이 없어, 미리 지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친영과 동뢰의 순서는 왕자가례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Ⅲ. 은언군 가례 물목과 복식

은언군이 가례를 진행할 때는 『국혼정례』가 편찬된 이후였다. 의식의 절차는 이전 왕자의 예를 참고하여 진행하였으나, 물목과 의복은 『국혼정례』에서 지정한 대로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국혼정례』에서는 왕자와 왕손의 물목은 동일하나, 세자(世子)의 서자의 경우 몇 가지 물목을 축소하여 준비하도록 정해져있다. 이는 의식 절차에서 적자와 서자를 구분한 것과 같다. 의궤에 기록된 은언군 가례 물목과 의복은 『국혼정례』의 왕손 물목보다 더 축소되어 준비되었다. 왕세손이 가례를 올린 당시에도 영조가 직접 물목을 보고 감(減)했다는 기록12)과 왕손의 관례의 폐백물목을 반으로 감하라는 기사13)를 통해서 그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1. 가례 물목 종류

가례 물목은 납채, 납폐, 전안(奠雁), 동뢰, 조현례, 빙재(聘財)로 준비되었다. 납채 물목은 채서지 1장, 복서지 1장, 흑칠함 2부(안에는 홍주(紅紬) 6폭 겹보자기, 겉에는 홍주 6폭 단보자기), 영자(纓子)가 달린 지개 2부를 왕자가례와 동일하게 준비되었다. 납폐는 『국혼정례』에서는 현아청토주(玄鴉靑吐紬) 3필, 훈대홍토주(纁大紅吐紬) 2필, 흑칠함 1부(안에는 홍주 6폭 겹보자기, 겉에는 홍주 6폭 단보자기), 영자가 달린 지개 1부, 안장을 갖춘 말 1필을 준비하도록 정해져있다. 하지만 은언군 경우 용단함(龍丹函) 1부(안에는 홍목(紅木) 6폭 겹보자기, 겉에는 홍목 6폭 단보자기)와 영자가 달린 지개 1부를 준비하였는데, 지개는 해감(該監)에서 빌려다가 사용한 후 다시 반납하도록 하였다. 납폐물목은 의식이 따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략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친영의식에서 사용하는 전안물목은 생기러기[生雁] 1수(홍주 1척(尺)으로 싸매고, 코를 꿰맬 홍사(紅絲) 1전(錢), 홍주 2폭 단보자기 1), 기러기를 놓아두는 별문석(別紋席) 1장, 채화면단석(彩花面單席) 각 1건, 별문배석(別紋拜席) 12장(각 방에서 사용), 고족상(高足床) 6좌(坐)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별문배석과 고족상은 반으로 감해서 준비했다는 기록을 참고했을 때 별문배석은 6장, 고족상은 3좌로 준비된 것을 알 수 있다. 동뢰 물목은 교배석 1입(立), 별문이십장부지의(別紋二十張付地衣) 1부(浮), 만화방석(滿花方席) 2좌, 연상(宴床) 2좌, 중홍촉(中紅燭) 2쌍(심이 있는 홍색초도 갖춘다), 홍라촉(紅羅燭) 10쌍을 준비하였다. 『국혼정례』의 왕자가례 동뢰물목 경우 새모양 등의 종이꽃이나, 항아리, 대홍촉(大紅燭) 등도 준비되었으나, 왕손가례에서는 준비하지 않고 물목을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국혼정례』에 규정된 조현례 물목은 대추와 밤각 5되, 육포 1첩, 당주홍칠을 한 아주 작은 소반[唐朱紅漆小小四盤] 2입(立)과 겉에 쌀 홍주 3폭 단보자기 2건을 준비하도록 정해져있다. 그리고 상주홍칠상(常朱紅漆床) 2좌를 홍주 4폭 복건(復巾) 2건과 함께 준비한다. 은언군의 가례에서 조현례는 친영 다음날 진행하지 않았고, 3일 후에 왕손부인이 왕을 찾아 뵈는 의식으로 대체되어 조현례 의식 물목에 대한 부분은 『은언군관혼례의궤』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2. 가례 의복 종류

왕손 가례 의복은 『국혼정례』의 가례 물목처럼 왕자 가례의복과 동일하게 준비하라고 규정되어있다. 은언군의 경우 세자의 서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국혼정례』에서 왕자 부인의 의복에서는 말군을 생략하고, 유치마[襦赤亇]를 두 벌에서 한 벌로 줄여서 준비하라고 기록되어있다. 『은언군관혼례의궤』에서는 『국혼정례』에서 정해진 물목이 먼저 정리되어있고, 뒤에 실제 은언군 가례에 준비된 의복을 다시 기록해놓았다. <Table 3>과 <Table 4>를 보면 『국혼정례』와 실제 가례에 준비된 의복의 종류나 수량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Wedding costumes of Prince YeoningㆍPrince Euneon

<Table 3>을 보면, 연잉군의 『가례등록』에 나타난 왕자의복, 『국혼정례』 왕자 및 왕손의복, 『은언군관혼례의궤』에 나타난 왕손 의복을 볼 수 있다. 연잉군의 가례에 사용된 물품 중 전립(氈笠), 초립(草笠), 서청정대(犀靑鞓帶), 서속대(犀束帶), 광다회(廣多繪), 백록피화(白鹿皮靴)를 뺀 다른 종류의 의복은 『국혼정례』에서도 약간의 수량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왕자가례 의복으로 준비되었다. 특히 연잉군 가례에서 감했던 의복들은 『국혼정례』의 물목에서 삭제 정리되어 규정된 것을 볼 수 있다. 은언군 가례복식은 『국혼정례』에서 규정된 의복보다 더 검소하게 준비되었다.

<Table 4>는 가례시 연잉군 부인 의복, 『국혼정례』의 왕자ㆍ왕손 부인 의복 그리고 은언군 부인의복을 정리해 놓은 표이다. 연잉군 부인의 가례의복과 『국혼정례』에서 규정한 의복의 종류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왕자 가례의복 물목의 변화와 다르게 부인의 가례의복은 대부분 의식에 필요한 의복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은언군 부인의 경우, 『국혼정례』에서 규정한 것보다 더 간략하게 준비되어, 좀 더 다양한 예복이 준비된 왕자부인과 다르게 친영에서 착용할 의복위주로만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Wedding costumes of Prince Yeoning wifeㆍPrince Euneon wife

1) 은언군 가례 의복

『은언군관혼례의궤』에 기록된 가례 복식은 초포(綃袍), 더그레[加文剌], 과두(裹肚), 바지[把持], 사모(紗帽), 복두(幞頭), 망건(網巾, 纓子具), 상아홀(象牙笏), 흑사피화(黑斜皮靴), 흑사피투혜(黑斜皮套鞋), 흑웅피삽혜(黑熊皮靸鞋)가 준비되었다. 은언군의 가례의복은 대부분 의식에 필요한 의복만 제작하여 검소하게 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왕자와 왕손은 공복(公服)을 착용하고, 부인가에서 친영의식을 진행한다. 은언군은 공복에 해당하는 대홍남경초포(大紅南京綃袍)를 착용하고, 복두를 쓰고 흑사피화를 신고 상아홀을 들고 친영의에 참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홍색 초포 안에는 남수주겹더그레[藍水紬裌加紋剌]와 백수주유과두(白水紬襦裹肚), 백수주겹바지[白水紬裌把持]를 착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 공복은 임금에게 알현(謁見)하거나 사은(謝恩) 또는 부임 전에 배사(拜賜)하러 뵈올 때 착용했으며, 중궁과 왕세자에게 하례를 올리거나, 사은할 때 입었다. 허리띠인 대와 의복의 색상으로 공복의 품계를 구분하였는데, 옷의 색상은 홍색, 청색, 녹색으로 홍포(紅袍)는 1품부터 정3품 이상, 청포(靑袍)는 종3품부터 6품까지 그리고 7-9품은 녹포(綠袍)를 착용하였다. 허리띠는 1품은 서각대(犀角帶), 2품이하 정3품 이상은 여지금대(荔枝金帶), 종3품 이하는 흑각대(黑角帶)로 규정되었다. 홀(笏)의 경우 4품 이상은 상아홀(象牙笏)을 들고, 5품 이하는 목홀(木笏)을 들었다. 그리고 관모로는 복두를 착용하였다.14) 그 외에도 왕세자 입학례(入學禮)와 왕자 가례, 문무과 방방의(放榜儀) 예식 등에서 착용한 것을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와 달리 후기에는 공복의 착용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나, 왕실 의례 경우 공복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조선말까지 나타난다. 왕자의 경우 가례 전에 행하는 의식인 관례에서도 공복을 착용하는데, 은언군의 경우 1765년(영조 41)에 재가복(再加服)으로 복두와 공복을 착용한 기록이 있다. <FIg. 4>는 숙종대(肅宗代)에 관례와 가례를 올린 연령군(延齡君)의 공복으로, 은언군 가례 의복으로 준비된 대홍색 초포와 색상이 일치한다. 또한 <Fig. 5>의 왕세자[효명세자] 입학도(1814년)에서 박사(博士)가 공복차림을 하고 있어 조선 후기에도 왕실 의례와 특별한 행사에서는 계속적으로 공복을 착용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Fig. 4>

Gongbok of Prince Yeonlyeong (Ryu, 1998, p. 223)

<Fig. 5>

Gongbok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d.-g)

『일성록』에 앵삼(鶯衫)이나, 전악(典樂)들의 공복으로 초포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는 초포를 사치스러운 직물로 만든 의복으로 여기고 모든 대신들에게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15) 이 기록을 참고하였을 때 정조때 관리들이 착용하는 장복(章服)인 상복이나 시복을 생초(生綃)로 만들어 착용하는 것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초포는 생초로 만든 단령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친영의식에서 왕손이 착용한 초포는 대홍색의 생초로 만든 단령의 형태의 공복으로 <Fig. 4>와 유사한 형태로 추측된다. 연잉군의 경우, 단령과 초포가 각각 준비가 되었고, 『국혼정례』에서도 왕자와 왕손 모두 대홍색의 초포와 단령을 각각 한 벌씩 준비하도록 규정되어있으나, 은언군의 경우 대홍색 초포만 준비되었다. 초포 안에는 남색 더그레를 착용하였는데, 왕자의 경우 초록색 더그레를 준비하라고 기록되어있다. 더그레는 답호의 형태로 『효종실록(孝宗實錄)』을 보면, 왕이 사신을 맞이할 때 흑단령 안에 더그레를 함께 착용했다는 기록16)과 같이 남색 더그레는 초포의 받침옷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Fig 5>의 박사의 공복과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과두는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면, 대부분 조선 초ㆍ중기에 등장하는 옷의 용어이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의 기사 중 “곤양수(昆陽守)가 과두만 입고 망건은 벗은 채 유씨와 마주앉아 있었습니다.”17))라는 기록을 통해서 겉옷이 아닌 안에 착용하는 속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두는 왕이 추운 지역의 관리와 사신들에게 하사할 때 철릭과 함께 기록된 경우가 많다. 이는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의 왕 의대(衣襨)에서 철릭 다음에 과두가 기록되어 있는 부분과 동일하다. 『은언군관혼례의궤』에서 과두가 장삼아(長衫兒) 바로 전에 물목으로 기록되어있고, 장삼아 다음 순서로 바지가 기록된 것으로 보았을 때 과두와 장삼아는 모두 안에 착용하는 속옷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은언군의 경우 장삼아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준비 물목 중에는 과두가 가장 안에 착용하는 옷으로 볼 수 있다.

공복의 관모로 착용되는 복두와 사모도 함께 준비되었는데, 사모는 의식에서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나 가례 이후 착용 빈도가 높은 관모이기 때문에 함께 준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외에 망건과 상아홀, 신발들이 함께 준비되었다.

2) 은언군 부인 가례 의복

은언군 부인 가례 의복은 대홍광적단노의(大紅廣的單露衣), 남수주겹저고리(藍水紬裌赤古里), 남수주유치마(藍水紬襦赤亇), 남수주겹치마(藍水紬裌赤亇), 흑웅피온혜(黑熊皮溫鞋)가 준비되었다. 이는 매우 간소한 수량이며, 왕자 가례에서 준비되는 속옷도 물목에서 감해져있어 친영 의식에 필요한 겉옷 종류만 준비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 왕실 가례에서 신부의 가례의복을 준비할 때 신분에 따라 물목과 종류의 차등이 나타난다. 왕자가례에서 제작된 부인 의복의 종류와 수량은 왕세자빈 가례 의대와 비교하면 구성 용품의 종류와 수량에서 차이가 난다. 왕세자빈과 왕자부인의 신분의 차이 때문에 그에 따라 준비되는 의복의 종류가 다름이 있지만 옷의 수량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반대로 왕자의 경우는 왕세자보다 가례 의복 준비 수량이 많다. 이는 왕세자빈의 경우 가례 후 궁에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궁에서 살고 있는 왕세자보다 많은 의복이 필요하며, 왕자부인은 궁 밖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의식에 필요한 의복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Lee, 2009) 왕손 부인의 물목은 왕자 부인보다 수량과 종류가 간소하게 준비되었는데, 이는 왕자와 서자인 왕손 부인의 차이를 두는 것일 수도 있다.

왕손 부인의 경우 예복으로 대홍색의 단노의가 준비되었다. 왕자 부인은 대홍색 겹장삼(裌長衫)도 가례의복으로 함께 준비가 되지만 왕손 부인의 경우 노의만 물목에 있어 친영예복으로 노의만 착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노의는 4품 이상의 정처들이 착용하는 예복18)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에서는 왕세자빈의 납징(納徵)시 명복으로 노의와 장삼을 보냈는데, 노의는 부인들이 길을 갈 때 착용하는 겉옷으로 남자의 원령(圓領)의 형태와 비슷하고, 묶는 띠가 있다고 설명되어있다.19) 또한 귀성군(龜城君)의 부인 가례의복으로 세조가 노의와 장삼 등을 만들어 하사했으며20),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는 의창군 부인의 가례예복으로 노의와 장삼의 재료인 화문홍단(花紋紅段) 2필을 요동에서 사오도록 했다.21) 조선 초의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왕실에서 가례시 예복으로 노의와 장삼을 준비한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서는 명부(命婦)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장삼을 입고 수식을 착용해야하나, 준비기간이 촉박하니 양이엄(凉耳掩)에 당의(唐衣)를 착용하고 입시하도록 했다.22) 노의와 장삼은 가례 의복이기도 하나, 명부들도 착용했던 예복으로 사대부가의 정처들도 왕실의 모임에서 착용할 수 있었던 의복이었다.

왕비부터 왕세자빈, 왕자부인의 가례에서는 노의와 장삼이 함께 준비되었는데, 『경빈 가례시일긔』를 보면 가례 당일에 입궐할 때 노의를 착용하며 장삼은 동뢰연때 착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노의가 입궐할 때 착용하는 옷이라는 것은 『세조실록』에 길을 걸을 때 착용하는 옷이라는 설명과 일치한다. 이는 왕세자빈 또는 왕의 후궁인 경빈의 신분에서는 격이 높은 예복인 적의 또는 원삼을 입기 때문에 노의가 이동시 착용하는 예복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왕손 부인은 왕세자빈 또는 후궁과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노의를 이동할 때 착용하는 예복이 아닌 의식때 착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영조대에는 왕실 가례가 많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은언군 전에는 화길옹주, 청연군주, 청선군주의 가례가 연이어 있었다. 이들 또한 가례 의복에서는 대홍광적단노의만 준비되었고, 장삼은 물목에서 빠져있다. 은언군 부인의 가례 물목의 경우 앞서 가례를 올린 옹주와 군주의 물목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 당시 국혼이 많았기 때문에 비용 절감을 위해서 의식에 필요한 의복만 준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은언군 부인의 노의는 <Fig. 6>의 청연군주 노의와 비슷한 시기에 준비되었기 때문에 의복의 형태가 유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Fig. 6>

Cheongyeongunju's No-ui (National Museum of Korea, n.d.-g)

연잉군 부인은 가례에서 황색의 원문이 있는 대홍색 노의를 착용하였다고 기록되어있으나, 『국혼정례』 이후에는 황색의 원문에 대한 부분은 제외되어있다. <Fig. 6>의 청연군주 노의에는 부금이 되어있어 은언군의 부인 또한 홍색 노의에 부금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가례를 올린 의화군 부인은 ‘다홍젼자직금홍장삼’, ‘초록직금원삼’ 그리고 ‘다홍별문단부금원앙노의’를 가례 의복으로 제작하였다.23) 『계사시월길례시 부인 의복 발긔』에 기록된 의화군 부인의 가례의복은 장삼과 원삼에 직금을 사용하고, 노의는 청연군주와 동일하게 부금을 사용하였다. 가례의복에서 장삼이 노의 보다 더 화려한 소재를 사용하였고, 그 전의 왕자부인의 가례의복 순서와 다르게 장삼이 노의보다 앞에 기록되어있다.

Kwon(2009)은 조선 초에는 실록에서 노의가 장삼보다 높은 격의 예복으로 기록되었으나, 이후 두 예복의 격식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장삼이 더 화려한 직물을 사용하거나, 왕비와 왕세자빈의 장삼에는 흉배를 달아 노의보다 격이 높은 의복으로 변화하였다고 보았다. 은언군 부인의 경우, 영조대의 1765-1767년의 왕실 가례가 많았으며, 왕세자빈과 은언군 부인의 신분차이를 생각해보았을 때 노의가 친영의식 예복으로 착용되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경빈가례일긔』와 의화군 부인의 발긔에서는 장삼이 노의보다는 격이 높은 옷으로 변화하여, 신분에 따른 노의 착용에 대한 추후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은언군 부인은 노의 안에는 남색 겹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착용하고 흑웅피온혜를 착용하였다. 이와 같이 은언군 가례에 제작한 의복은 왕실 친영의에서 가장 검소하게 준비되어 영조의 근검절약 정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다른 물목도 함께 준비된 왕자부인과 다르게 친영의식에 필요한 의복들을 알 수 있어 18세기 왕손가례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Ⅳ. 결론

본 연구에서는 18세기 왕손 가례에 대한 절차와 복식을 알아보고, 왕자 가례 복식과 『국혼정례』 에 나타난 의복 물목을 비교해보았다. 18세기 영조대의 진행된 왕손가례는 조선왕실에서 주관하여 행해진 가례로 그 당시 의식의 절차와 물목이 기록되어있다.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이며, 이들이 가례를 진행할 시기에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후였기 때문에 영조가 직접 가례를 올려준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평소에도 검소함을 추구하였고, 왕실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실의 가례의 사치를 막고자 『국혼정례』를 1749년에 편찬하였고, 이후 조선왕실의 가례 물목들은 『국혼정례』에서 정해진 대로 준비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왕자 가례의 절차와 복식은 17세기 이후부터 『가례등록』으로 기록이 남아있으나, 왕손의 가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국혼정례』에서 왕손의 가례물목을 규정하였다. 왕손의 경우 세자의 적자일 경우에는 왕자와 동일하게 준비하고, 서자일 경우에는 몇 가지 물목을 축소하도록 정하였다. 18세기 왕손의 가례는 은언군이 가장 먼저 행하였는데, 은언군과 은신군은 어머니가 같은 친형제로 같은 날 관례를 올리고, 가례 또한 같은 시기에 준비하였다. 『은언군관혼례의궤』에서는 관례에서 간택까지는 함께 기록되어있으나, 이후에는 은언군의 기록만 남아있다. 가례를 올린 은전군이 은언군의 예를 그대로 따라 진행한 것을 보았을 때 은신군도 은언군과 동일하게 의식을 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왕자의 가례 절차의 경우 간택, 납채, 납폐, 명복내출, 친영, 동뢰, 조현, 왕자군현부인지부모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반면에 은언군 가례의 절차는 간택, 납채, 친영, 동뢰의 순서로 매우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은언군이 가례를 올릴 당시에 왕세자, 옹주, 군주의 가례가 연이어 있었기 때문에 영조가 직접 가례의 절차를 간략하게 줄이라고 명한다. 은언군의 납채는 친영일 전날 행해졌고, 납폐 물목도 함께 준비되어 납폐함과 친영일에 입을 명복도 함께 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친영과 동뢰의식은 왕자 가례와 동일했고, 친영일 다음날 진행하는 조현례는 하지 않고, 3일 후에 영조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은언군관혼례의궤』에는 『국혼정례』에서 정해진 물목이 기록되어 있고, 그 뒤에 다시 은언군 가례에 사용된 물목이 수록되어 있다. 은언군의 가례 의복이나 물목은 『국혼정례』에서 정해진 규정보다 훨씬 간소화되서 준비되었다. 초포, 더그레, 과두, 바지, 사모, 복두, 망건, 상아홀, 흑사피화, 흑사피투혜, 흑웅피삽혜가 준비되었다. 사모와 신발을 제외하면 왕손이 친영시 입는 공복에 해당하는 의복으로 의식에 참여하는 옷을 중심으로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공복의 경우 조선 후기에는 착용이 줄어들지만, 왕실의 의식에서는 왕자의 관례와 입학례등에서 계속적으로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은언군의 공복은 동국대학교에서 소장중인 연령군의 공복과 유사한 형태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은언군 부인도 은언군과 마찬가지로 간략하게 가례의복이 제작되었다. 왕손 부인의 경우 대홍광적단노의, 남수주겹저고리, 남수주유치마, 남수주겹치마, 흑웅피온혜가 준비되었다. 왕자의 부인 경우 가례 예복으로 노의와 장삼을 함께 마련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가례를 올린 옹주, 군주, 왕손 부인의 예복에서는 노의만 준비된다. 이 당시 국혼이 많았기 때문에 의식에 필요한 의복만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노의는 4품 이상의 정처의 예복이며, 왕세자와 후궁의 가례에서 예식장으로 이동할 때 착용한 의복으로 기록되어있다. 고종의 아들인 의화군 부인의 가례 의복에서는 장삼, 원삼, 노의가 함께 준비되었는데 노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연군주의 노의와 같이 부금하고, 장삼은 직금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연잉군 부인 가례예복의 경우 노의에는 황사원문대홍필단을 사용하였고, 장삼에는 대홍필단을 사용하여 노의가 더 화려한 직물을 사용했던 것과 반대되는 양상이다. 왕손 부인의 경우 노의만 준비되었기 때문에 친영시 노의를 착용하고, 가례를 올렸던 것으로 보이며, 신분에 따라 노의 착용에 대한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왕손의 가례의 절차와 의복을 살펴보았다. 18세기 왕손의 가례는 재위 기간이 길었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망으로 왕실에서 주관하여 치러진 의식이었다. 왕손의 가례 복식은 당시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서 절차가 간략화되고, 복식 또한 예식에 필요한 의복들로만 구성되어 조선 후기의 왕자와 왕손의 가례 의식 재현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왕손에 대한 좀 더 많은 자료들이 나와 왕손 복식 문화를 통해서 조선 왕실 구성원의 다양한 의례복에 대한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Notes
1) 이 논문에서는 왕자를 왕의 적자인 대군과 왕의 서자인 왕자를 통칭한다.
2) 이 논문에서는 왕녀를 왕의 적녀인 공주와 왕의 서녀인 옹주 그리고 세자의 적녀인 군주, 세자인 서녀인 현주를 통칭한다.
3) 世宗實錄, 世宗 26년(1444) 10월 11일.

첨지중추원사 변효문(卞孝文)ㆍ정척(鄭陟)ㆍ성균 사예(成均司藝) 민원(閔瑗)ㆍ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하위지(河緯地)ㆍ박사(博士) 서거정(徐居正)ㆍ교서 교감(校書校勘) 박원정ㆍ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윤서(尹恕) 등에게 명하여 집현전(集賢殿)에서 오례의(五禮儀)의 주해를 자상히 정하게 하였다.

4) 世宗實錄, 世宗 12年(1430) 12月 22日.

임금이 김종서(金宗瑞)에게 이르기를, “친영의 예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실시하지 않았는데, 부윤(府尹) 고약해(高若海) 등이 고례(古禮)에 의거하여 이를 실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예법이 과연 갑작스레 실시될 수 없다면 왕실에서 먼저 실시하여, 사대부들로 하여금 본받게 한다면 어떨까.”하니, 종서가 대답하기를, “정말 말씀과 같이 하시와 왕실에서부터 먼저 실시하시고, 아래에서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죄를 주지 않으시면, 고례를 행할 뜻을 가진 사람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며, 그렇게 해서 오래되면 온 나라에서 저절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5) 世宗實錄, 世宗 21年(1439) 12月 6日.
6) 英祖實錄, 英祖 43年(1761) 7月 12日.

왕손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의 혼사(婚事)를 유학 홍대현(洪大顯)의 집에 정하라고 명하고, 홍대현에게 벼슬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왕손 형제를 사제(私第)에 나아가라고 명하였다.

7) 英祖實錄, 英祖 43年(1767) 11月 11日.

은언군의 부인에게 3일 후에 와서 절하라고 명하고, 이어 내구마(內廐馬)를 보내 주라고 명하였다

8) 恩彦君冠婚禮儀軌, 장서각디지털아카이브, 30a-31a.

丁亥七月十二日 觀象監牒呈內禮曹下帖乙用良王孫恩彦君婚禮時親迎等吉日時後錄牒呈納采十月三十日辰時納幣十一月初一 日午時命服內出同月初七日午時親迎同月十一日申時同牢同日酉時事據禮曹啓目粘連牒呈是白有亦向前王孫 恩彦君婚禮時親迎等吉日時依牒呈施行何如啓其命擇日者卽婚日也噫漢帝云豈敢比於先帝子非徒古禮洛川時 已有前例故頃者下敎時此後婚具依■■■■之云頃年只行納采親迎則況今番乎今者擇日■國婚中不過減一禮 頃年所未行之事予何敢行也命服多事納幣剩禮親迎日可同牢以此觀之本監生徒猶不能報時而使此文具一何張 大此擇日置之只磨鍊納采親迎日除單子草記以入.

9) 與猶堂全書, 第三集禮集第二十三卷, 嘉禮酌儀, 冠婚禮, 婚禮.
10) 顯宗實錄, 顯宗 14年(1673) 8月 2日.
11) 英祖實錄, 英祖 40年(1764) 6月 14日.
12) 承政院日記, 英祖 37年(1761) 10月 8日.

삼백 년의 종사(宗社)를 계승할 사람은 바로 세손이다. 백발이 된 만년에 어찌 이러한 일을 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먼저 검소함을 보인 뒤에야 열조(列朝)에서 검소함을 숭상한 덕의(德意)를 체행할 수 있다. 그래서 특별히 세손의 가례 정례(嘉禮定例)를 가져다가 손수 ‘감(減)’ 자를 써서 모두 감등(減等)하였다. 무릇 가례에 주(註)를 단 것 이외에 ‘이번에 감한다〔今減〕고 쓴 것은 차등을 둔 뜻이니, 잘 알아서 거행하라. 단지 ‘감’ 자만 쓴 것은 이번의 가례를 막론하고 모두 이 예(例)를 준수하라.

13) 英祖實錄, 英祖 41年(1765) 6月 21日.

왕손이 관례를 행할 때에 폐백을 10필(匹)로 하던 것을 반(半)으로 감하게 하고, 여러 집사(執事)들도 역시 전에 비하여 감등(減等)하라고 명하였다.

14) 世宗實錄, 世宗 8年(1426) 2月 26日
15) 日省錄, 正祖 11年(1787) 3月 15日.

“장복(章服)으로 말하면 당하(堂下)의 문관ㆍ음관이 입는 녹초 장복(綠綃章服)은 대단히 사치스러운 것인데 며칠도 안 가서 곧바로 찢어져 버린다. 심지어 요즘은 안감까지도 초(綃)를 사용하고 무신도 모두 그것을 따라서 하므로 일찍이 없애버리라고 신칙하였다. 몇 년 전부터 처음 벼슬하는 선전관마저도 주(紬)ㆍ저(紵)ㆍ견(絹)ㆍ라(羅)를 버리고 생초(生綃)를 쓰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생초라는 명색이 우리나라에만 있고 사용하는 곳은 사마(司馬)의 앵삼(鸎衫)이나 전악(典樂)의 공복(公服)일 뿐이었지만, 근래에는 연경에서 사오는 물건에도 들어 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매번 이것을 반드시 금지하여야 중단될 것이라고 하니, 복식을 바꾸는 시기부터는 초포를 다시 새로 만들지 못하도록 문신ㆍ음관ㆍ무신의 당하 관에게 신칙하라.“

16) 孝宗實錄, 孝宗 1年(1650) 3月 3日.
17) 中宗實錄, 中宗 16年(1521) 4月 11日.
18) 太宗實錄, 太宗 12年(1412) 6月 14日.
19) 世祖實錄, 世祖 6年(1460) 4月 9日.
20) 世祖實錄, 世祖 13年(1467) 10月 22日.

귀성군(龜城君) 이준(李俊)이 아내를 얻으니, 대홍단자 노의(大紅段子露衣)ㆍ대홍단자 겹장삼(大紅段 子裌長衫)ㆍ백단자 겹말군(白段子裌襪裙)ㆍ생초 말군(生綃襪裙)ㆍ면주 한삼(綿紬汗衫)ㆍ남초 겹단오자 (籃綃裌短襖子)ㆍ면주 유호수(綿紬襦好袖) 각각 1령(領), 면주 유단오자(綿紬襦短襖子)ㆍ면주 유군(綿紬 襦裙)ㆍ면주 단이의(綿紬單裏衣)ㆍ면주 겹군(綿紬裌裙) 각각 2령(領), 홍라 자황 획대(紅羅雌黃畫帶) 1요 (腰), 단자 오지(段子五指) 1벌을 만들어 주라

21) 宣祖實錄, 宣祖 36年(1603) 3月 18日.
22) 光海君日記, 光海君 2年(1610) 5月 7日.
23) 계사시월길례시 부인 의복 발긔,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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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Fig. 1>
『Euneongungwanhonryeuigwe』's table of contents (Euneongungwanhonryeuigwe, n.d.)

<Fig. 2>

<Fig. 2>
『Eunjeongungaryedeungrok』's table of contents (Eunjeongungaryedeungrok, n.d.)

<Fig. 3>

<Fig. 3>
number of published 『Euneongungwanhonryeuigwe』 (Euneongungwanhonryeuigwe, n.d.)

<Fig. 4>

<Fig. 4>
Gongbok of Prince Yeonlyeong (Ryu, 1998, p. 223)

<Fig. 5>

<Fig. 5>
Gongbok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d.-g)

<Fig. 6>

<Fig. 6>
Cheongyeongunju's No-ui (National Museum of Korea, n.d.-g)

<Table 1>

Records on royal wedding of Prince[王子] & Royal grandchildren[王孫]

Book title Year of issue Ceremony Holding Institution
- Kyuganggak, Jangseogak
Garyedeungrok 1638-1662 Prince Inpyeong Chulhap(出閤) Prince Sungseon & Prince Naksseon Garye Jangseogak
Wangjagaryedeungrok gwanryebu 1703-1712 Prince Yeoning Gwanrye, Garye Jangseogak
Yeonryeonggungaryedeungrok gwanryebu 1706 Prince Yeonryeong Gwanrye, Garye Jangseogak
Gukhonjeongrye 1749 Royal Garye of Joseon Dynasty Kyuganggak Jangseogak
Euneongungwanhonryeuigwe 1767 Prince Euneon & Prince Eunsin Gwanrye, Garye Jangseogak
Eunjeongungaryedeungrok gwanryebu 1773 Prince Eunjeon Gwanrye, Garye Jangseogak
Wanhwagungwanryedeungrok 1877 Prince Wanhwa Gwanrye Kyuganggak
Uihwagungwanryedeungrok 1893 Prince Uihwa Gwanrye, Garye Kyuganggak Jangseogak

<Table 2>

Procedure for Prince YeoningㆍPrince Euneon's wedding

Prince Yeoning wedding ceremony Prince Euneon wedding schedule Prince Euneon actual wedding ceremony
- Wangjagaryedeungrok, Euneongungwanhonryeuigwe
Gantaek[揀擇] Gantaek Gantaek
Napchae[納采] Napchae
Oct. 30, 1767.
Napchae Nov. 10, 1767.
Nap-pye[納幣] Nap-pye
Nov. 1, 1767.
-
Myeongboknaechul[命服內出] Myeongboknaechul
Nov. 7, 1767.
-
Chinyeong[親迎] Chinyeong
Nov. 11, 1767.
Chinyeong
Nov. 11, 1767.
Dongroe[同牢] Dongroe
Nov. 11, 1767.
Dongroe
Nov. 11, 1767.
Johyunrye[朝見禮] - Joheon to Youngjo three days after Chinyeong
Wangjagunhyeonbuinjibumo
[王子君見夫人之父母]
- -

<Table 3>

Wedding costumes of Prince YeoningㆍPrince Euneon

Prince Yeoning(1704) Gukhonjeongrye(1749) Prince Euneon(1767)
- Wangjagaryedeungrok, Gukhonjeongrye, Euneongungwanhonryeuigwe
Chopo[綃袍] 1 Red 1 Red 1
Danlyeong[團領] Lined clothes 1, Unlined clothes reduce Red lined clothes 1 Red lined clothes reduce
Deogeure[加文剌] Lined clothes 1, Padded clothes reduce Green lined clothes 1 Navy lined clothes 1
Cheollik[帖裏] 1 Green padded clothes 1 Green padded clothes reduce
Aekjoreum[腋注音] Padded clothes 1, Lined clothes reduce Green padded clothes 1 Green padded clothes reduce
Gwadu[裹肚] Padded clothes 1,
Lined clothes 1
White padded clothes 1, White lined clothes 1 White padded clothes 1,
White lined clothes reduce
Jangsama[長衫兒] 1 White 1 White reduce
Baji[把持] Padded clothes 1,
Lined clothes 1,
Unlined clothes 1
White padded clothes 1,
White lined clothes 1, White unlined clothes 1
White lined clothes 1,
White padded clothes reduce,
White unlined clothes reduce
Hoseul[護膝] 1 White 1 White reduce
Heukjeonrip[黑氈笠] 1 - -
Heukchorip[黑草笠] 1 - -
Morasamo[毛羅紗帽] 1 1 1
Bokdu[幞頭] 1 1 1
So-ogeon[小烏巾] 1 1 Reduce
Mang-geon[網巾] 2 1 1
Seocheongjeongdae
[犀靑鞓帶]
1 - -
SeoSokdae[犀束帶] 1 - -
Hongsa-gwangdahoe
[紅絲廣多繪]
1 - -
Sangahol[象牙笏] 1 1 1
Heuksapihwa
[黑斜皮靴]
1 1 1
Baeknokpihwa
[白鹿皮靴]
1 - -
Heuksapituhye
[黑斜皮套鞋]
1 1 1
Heukungpisaphye
[黑熊皮靸鞋]
1 1 1

<Table 4>

Wedding costumes of Prince Yeoning wifeㆍPrince Euneon wife

Prince Yeoning wife (1704) Gukhonjeongrye (1749) Prince Euneon wife (1767)
- Wangjagaryedeungrok, Gukhonjeongrye, Euneongungwanhonryeuigwe
Danno-ui[單露衣] Hwangsawonmun daehongpildan[黃絲圓文大紅匹段] 1 Daehonggwangjeok[大紅廣的] 1 Daehonggwangjeok [大紅廣的] 1
Gyeopjangsam
[裌長衫]
daehongpildan [大紅匹段] 1 Daehonggwangjeok
[大紅廣的] 1
-
Malgun[襪裙] 1 Prince wife: White neung[白綾] 1,
White cho[白綃] 1
-
Royal offspring wife: White neung[白綾] 1
Jeogori[赤古里] Padded clothes 3,
Lined clothes 1
Green padded clothes 2, Navy lined clothes 1 Navy lined clothes 1
Hosu[胡袖] Padded clothes 1 Green padded clothes 1 -
Chima[赤亇] Padded clothes 2,
Lined clothes 1
Navy padded clothes 1, Navy lined clothes 1 Navy padded clothes 1, Navy lined clothes 1
Sama[衫兒] 2 White 2 -
Ni-ui[裏衣] 2 White unlined clothes 1 -
Oji[五脂] Hongra[紅羅] 1 Hongra[紅羅] 1 -
Doda-ikdae[都多益帶] Hongrajahwang[紅羅雌黃] 1 Hongrajahwang[紅羅雌黃] 1 -
Heukungpi-onhye[黑熊皮溫鞋] 1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