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Current Issu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4 , No. 1

[ These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No. 4, pp. 86-103
Abbreviation: J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Jun 2019
Received 04 Mar 2019 Revised 29 Apr 2019 Accepted 09 May 2019
DOI: https://doi.org/10.7233/jksc.2019.69.4.086

금관가야의 복식 연구 : 상의(上衣) 길이를 중심으로
권준희
부산대학교 한국전통복식연구소 전임연구원

A Study on the costumes of Geumgwan Gaya : Focusing on the length of upper garments
Junhee Kweon
Researcher, Korean traditional costume research institute, Pusan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Junhee Kweon, e-mail: sillalal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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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length of Geumgwan Gaya's upper garments. Samgukji (三國志) mentions that people in Geumgwan Gaya wore a po (袍;robe) in the third century. A po is a long-length, Chinese style article of clothing that reaches one's feet. It resulted from the iron trade between Nakrang and Geumgwan Gaya. From Nakrang's visual materials, it is presumed that, if the people of Geumgwan Gaya wore Nakrang's clothing and hats (衣幘), po as well as yu (襦;hip-length jacket) and jangyu (長襦;calf-length long jacket) were also worn. The upper garments of the fourth and fifth centuries were found in the visual materials of Geumgwan Gaya and neighboring countries. Clay figures from Geumgwan Gaya include yu and po. Yet, in three kingdoms (Goguryeo, Baekje, and Silla), men solely wore yu, while women wore jangyu as well. According to archeological specimens such as horse harnesses, Geumgwan Gaya is similar in form to Three Yans (前燕, 後燕, 北燕) and Buyeo. Therefore, it is also necessary to consider the historical clothing materials of these regions. We can see yu, jangyu and po from Three Yans' visual materials and po from Buyeo's historical literature records. The three kingdoms, Three Yans and Buyeo are northern regions where people originally wore yu and pants that were convenient for horse riding. In the case of Three Yans and Buyeo, the Chinese influence also made them wear long, leisurely clothes, which is very similar to the style in Geumgwan Gaya. However, clothing of Geumgwan Gaya is more closely related to Buyeo and Three Yans than that of the three kingdoms because Geumgwan Gaya wore all three lengths of clothing; yu, jangyu and po.


Keywords: costume, Geumgwan Gaya, Jangyu, Po, Yu
키워드: 복식, 금관가야, 장유;長襦, 포;袍, 유;襦

Ⅰ. 서론

금관가야(金官加耶)는 서기 전후부터 532년까지 존속한 가야연맹체의 하나로 경상남도 김해를 중심지로 하였고, 본래 구야(狗邪), 가락(駕洛ㆍ伽落), 가야(加耶ㆍ伽耶)라고 불렸다. 그리고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삼국유사(三國遺事)』오가야(五伽耶)조1)의 ‘금관(金官)’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라말 고려 초에 생겨난 것으로 인식된다. 김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집단은 시기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였으나 관행적으로 금관가야로 칭하고 있다.2) 금관가야는 삼한시기에는 변한 12국 중 하나로서 오래도록 변한의 맹주국 역할을 담당하며 철 생산과 대외교역을 바탕으로 가야연맹의 중심체로 성장하게 되지만, 4세기 고구려의 낙랑군 축출과 광개토왕의 남정에 의해 교역체계의 변화, 철생산의 독점적 기능 상실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하고 끝내 532년 신라에 스스로 항복하게 된다(Ju et al., 2014).

복식사학에서 가야 복식은 가야연맹체를 이루었던 각 국의 복식에 집중하기 보다는 가야 전체를 대상으로 하거나(Chung, 2009; Kwon, 2004), 금속제 관모, 장신구 등 고분 출토 유물 중심의 연구(Kim, 2018; Lee, 2000; Lee, 1988)가 이루어졌고, 지역 연구로는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 복식 연구(Cho, Kweon, Park, Kim, & Cho, 2007)가 있을 뿐이다. 이에 김해시에서는 ‘가야복식복원사업 연구용역’을 추진하게 되었고, 본 연구는 금관가야 복식 연구의 첫 번째 작업으로 특히 상의(上衣)의 길이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시대 복식이 유고(襦袴)의 2부식 착용을 기본으로 하였음은 6세기 양 직공도에서 유고를 착용한 삼국 사신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가야의 복식도 삼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3세기 『삼국지(三國志)』한(韓)전의 ‘포포(布袍)’착용 기록은 삼한시기에는 포도 착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포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긴 상의로 인식되고, 삼국시대 기본이었던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길이의 유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은 각각 백제, 신라, 가야로의 명칭변화는 있었어도 복식의 맥락은 이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과 시각자료로 어느 정도 복식의 윤곽을 살펴볼 수 있는 백제, 신라와 달리 금관가야는 상대적으로 자료도 더 빈약하지만 변한에서 가야로 이어지며 금관가야에서 어떠한 상의를 착용하였는지, 그리고 그 변화 과정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연구의 순서는 첫째, 3세기 『삼국지(三國志)』한(韓)전의 ‘포포(布袍)’착용 기록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그런데 『삼국지』는 중국인에 의해 서술된 역사서이므로 당시 중국에서의 ‘포’에 대한 정의와 시각자료를 중심으로 포의 길이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 둘째, 3세기 금관가야에서 포를 착용하기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가야와 낙랑의 대외 관계 및 이를 통한 복식교류를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4세기 이후는 먼저 금관가야의 시각자료에 표현된 상의를 고찰하고, 다음 이웃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친연성이 인정되는 부여 및 삼연(三燕)의 복식 자료로부터 주변국에서 착용된 상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서 고찰한 바를 바탕으로 금관가야에서 착용된 상의의 길이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연구의 자료로는 금관가야와 주변국의 복식 관련 문헌사료는 물론 상의의 길이를 확인할 수 있는 회화 등의 시각자료와 기타 유물자료를 사용할 것이다.

가야 특히 그동안 제대로 언급되지 못했던 금관가야 복식에 대한 연구는 삼국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던 고대 복식의 일단을 밝히고, 최근 국정과제로 포함된 가야사 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Ⅱ. 3세기 변한에서의 상의
1. 『삼국지』의 포(袍) 착용 기록

『삼국지』한(韓)전 마한조에는 “그들은 영주를 보배로 삼아서 혹은 옷에 매달아 장식을 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걸기도 한다. 그래서 금은(金銀)이나 금수(錦繡)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괴두노계(魁頭露紒) 하였는데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다. 포포(布袍)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3) 진(晉)나라의 학자진수(陳壽: 233-297)가 『삼국지』를 편찬한 당시기록 그대로 서술하자면 마한에서 포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지』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진(弁辰) 순으로 서술되어 있고 위 기사는 마한의 국명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변진조에서 의복의 청결과 광폭세포의 존재만을 간단하게 언급4)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마한의 고지(故地)뿐 아니라 변한과 진한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 전역의 고분에서 어김없이 출토되는 구슬 장신구로부터 영주를 보배로 삼는다는 것은 삼한시기 공통된 문화요소였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상투머리를 뜻하는 괴두노계나 가죽신5)은 삼한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이 또한 마한만의 특징적인 복식 풍속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는 『삼국지』한전의 기록에서 마한 서술 중간에 삼한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대외관계 기사를 함께 기록하는 등 구성상의 혼란을 보이는 것(Shin, 2003)과 마찬가지 경우로, 영주, 상투, 가죽신 착용과 함께 기록된 포포 착용 기록은 비록 마한조에 서술되어 있지만 삼한 복식 문화의 공통요소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포는 북방계 호복에 기원을 둔 한반도 고유의 유고(襦袴) 양식과는 다른 계통으로 인식된다. 한반도 고유 양식의 유는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길이지만, 중국의 포는 『석명(釋名)』에서 ‘포는 남자들이 입는데 발등까지 이른다(袍丈夫著下至跗者也)’ 는 기록으로부터 발등까지 이르는 긴 길이의 상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본복식이 유고라면 중국 한족(漢族)의 기본복식은 의상(衣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상이 연결된 복식이 바로 포다.

그렇다면 3세기 삼한에서는 어떻게 유가 아닌포를 착용한다고 『삼국지』에 기록될 수 있었을까. 이를 낙랑과 삼한과의 교역을 통한 복식교류에서 찾아보고자 하며, 특히 금관가야가 성장하기까지 모태가 되었던 변한지역 관련 문헌과 고고 유물자료를 중심으로 복식교류의 흔적을 고찰하고자 한다.

2. 문헌에 보이는 변한과 낙랑의 교역

기원전 108년 한반도 서북지역에 중국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된 이래 삼한과 낙랑의 교섭은 조공의 형식을 빌은 교역활동이며 이를 통해 삼한의 교역집단은 부를 축적하고 정치권력을 성장시켰다고 이해된다(Yoon, 2004). 특히 김해 지역은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낙동강 중상류 각지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되는 동시에 서해 및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해로상의 요지로 대외적인 교역이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고, 경상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철 자원을 매개로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Lee, 1998). 이는 변한은 철을 매개로 낙랑은 물론 주변의 한(韓), 예(濊), 왜(倭) 각국과 교류했다는 『삼국지』기록으로부터 알 수 있는데 사고 팔 때에 모두 철을 사용하여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6) 『삼국지』한전에 보이는 지황(地皇)년간(20-22) 진한(辰韓)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 관련 기사7)에서 중국인(漢人) 1,500명이 한(韓)에 포로로 잡혀 왔고 이에 변한포 1만 5천 필로 변상한 사실은 낙랑지역과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이루어졌던 많은 인적, 물적 교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3세기 위(魏)는 낙랑, 대방군 접수에 즈음하여 유화정책을 펼치고, 한인(韓人)들과의 교섭을 이어가는데, 『삼국지』와 『통전(通典)』8)에는 낙랑의 인수의책(印綬衣幘)을 착용한 한인(韓人)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Lee(1998)는 조공과 관작(官爵), 인수(印綬)의 수여라는 공무역 형식을 띤 국가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해로 교통이 편리한 김해에는 중국과 왜인 등 각지에서 모여든 외래 상인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교역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3. 유물 및 시각자료에 보이는 금관가야와 낙랑의 복식교류

김해지역과 낙랑과의 교류는 김해 회현동 패총에서 발견된 왕망(王莽: BC 45-AD 23)시기 화폐 화천(貨泉), 김해 양동리 고분 322호에서 출토된 양기(量器)로서의 동정(銅鼎), 경남 창원 다호리유적 목관묘에서 출토된 다수의 낙랑계 유물 등에서 증명된다. 이 중 복식품목은 허리띠 장식과 옻칠신, 부채 등의 장신구를 들 수 있고 실제 유물에서 확인 가능하지만, 삼한시기 의복 착용 인물의 시각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자료에 근거한 상의 길이 논의는 불가하다.

이에 먼저 장신구 위주이기는 하나 복식 유물에 드러난 김해와 낙랑의 복식 교류 흔적을 살피고, 다음 인수의책 기록을 바탕으로 중국 시각자료에 책과 함께 착용된 의(衣)의 길이에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1) 금관가야ㆍ낙랑 간 공통양식의 복식 유물

(1) 허리띠 장식

삼한시기의 대구(帶鉤)는 봉상(棒狀)의 곡봉형(曲棒形) 대구와 호형(虎形)ㆍ마형(馬形) 등의 동물문(動物文) 대구가 있다. 곡봉형 대구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한대(漢代)에 이르기까지 유행했던 중국식 대구로 평양지역 낙랑의 목곽묘에서 많이 출토되었고, 천안 청당동 및 창원 다호리 1호분출토 유물<Fig. 1>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동물문 대구는 그 계보는 북방 유라시아의 호족(胡族)에서 찾을 수 있으나 호복과 함께 중국에서 받아들였고, 이후 낙랑을 통해 직ㆍ간접으로 한국에 유입된 것으로 이해된다. 김해 지역에서는 호형대구 2점<Fig. 2>, 마형대구 4점<Fig. 3>이 출토되었는데, Park(2012)은 "마형 대구에서 문양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호형 대구는 크기가 작아지며 눈과 입이 완전히 사라지는 등 김해 지역에서 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하였다(p. 66).


<Fig. 1> 
Curved stick type belt hook from Daho-ri (National Museum of Korea, 2008, p. 54)


<Fig. 2> 
Tiger type belt hook from Daeseong-dong tomb No.11 (Gimhae National Museum, 2018, p. 166)


<Fig. 3> 
Horse type belt hook from Gujiro tomb No.42 (Gimhae National Museum, 2018, p. 166)

(2) 옻칠신

낙랑 지역의 채협총, 석암리 201호, 205호분에서 출토된 가죽에 옻칠한 신<Fig. 4>는 창원 다호리 19호분 출토 옻칠신<Fig. 5>와 매우 유사하다. 옻칠신은 나무나 가죽, 직물 등으로 틀을 만든 후, 그 위에 옻칠한 것으로 쉽게 닳지 않고 방부, 방습성도 뛰어났다. 다호리 출토품은 잔존상태가 매우 열악하여 발등과 안창만 확인되지만, 평양 석암리 출토품은 가죽에 옻칠한 것인데 높이 6cm가량 가운데가 비어 있는 나무로 만든 굽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Bokcheon Museum, 2010).


<Fig. 4> 
Lacquer shoes from Sukam-ri 205 tomb, Pyongyang (Bokcheon Museum, 2010, p. 20)


<Fig. 5> 
Lacquer shoes from Daho-ri 19 tomb (Bokcheon Museum, 2010, p. 23)

(3) 부채

창원 다호리 1호분과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 내 3호 목관묘에서는 부채의 손잡이로 추정되는 나무 손잡이가 각각 1점, 2점이 출토되었다. 보고서(Foundation of East Asia Cultural Properties Institute, 2006)에 의하면 부채살이 있는 부분은 사다리꼴모양으로 머리부분의 끝지점인 좌우 경사진 부분에는 소형 구멍이 관찰되는데 이 부분에 새의 깃털과 같은 것을 꽂아 부채살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p. 78). <Fig. 6>과 <Fig. 7>은 현재 김해박물관과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복원 전시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채는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 태성리1호분 주인공이 들고 있는 것<Fig.8>과 유사한 형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평양지역 고구려 고분 벽화 인물들은 집안지역 벽화 인물이 고구려 고유복식을 착용한 것과 달리 낙랑의 유제를 포함한 외래복식도 다수 착용하고 있다. 따라서 평양지역 벽화 고분이 비록 4세기 이후 조성되었다고는 하나 이들 벽화에 묘사된 주인공의 부채도 낙랑시기부터 이미 사용되었던 풍속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Fig. 6> 
Fan from Daho-ri (National Museum of Korea, 2008, p. 97)


<Fig. 7> 
Fan from the Forest Developing Site of Gaya in Daeseong-dong Tombs Museum (replica) (Photographed by author. 2018)


<Fig. 8> 
Fan of Anak tomb No.3 (Chosen Gahosha, 1985, Fig.(圖)1)

(4) 인수(印綬)

『삼국지』와 『통전(通典)』9)의 한인(韓人)이 착용했다고 하는 인수의책(印綬衣幘)에서 인(印)은 인장을, 수(綬)는 인장의 꼭지에 매는 끈을 말한다. 인장은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나타내며 종이가 아직 보급되지 않았을 때 봉니에 압인하여 봉함하는 기능을 지녔다(National Museum of Korea, 2010). 그리고 수는 진한 이후부터 위진남북조시대까지 신분별로 수의 구성요소, 길이, 색, 밀도 등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Choi, 2015). 한대 화상석 중에는 옆구리에 수를 찬 관원의 모습<Fig. 9>에서 특히 수의 길이를 달리하여 신분을 표현한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Fig. 9> 
Su from huaxiangshi of the Han Dynasty (Hayashi, 1976, Fig.(揷圖) 2-170)

삼한 시기 인수를 찬 인물의 시각자료는 없지만 3세기 초 위가 공손씨 세력을 몰아낸 후 낙랑, 대방을 점령하며 한(韓)의 백장(伯長)에게 사여한 것으로 보이는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伯長)’ 글자가 새겨진 청동인(靑桐印)<Fig. 10>의 존재로부터 삼한에서 인수의 착용이 실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금관가야ㆍ낙랑의 의책(衣幘)

인수의책 기록에서 의책(衣幘)은 의(衣)와 관모의 하나인 책(幘)을 말하는 것이다. 책(幘)은 채옹(蔡邕)의 『독단(獨斷)』에 의하면 원래 관(冠)을 쓰지 못하는 비천한 자들의 쓰개였으나 원제(元帝)와 왕망(王莽)이 쓰기 시작하면서 상하 신분에서 모두 착용하며 장이(長耳)와 단이(短耳)로 나뉘었고10), 『진서(晉書)』의 기록으로부터 늦어도 진대에는 장이의 것을 개책(介幘), 단이의 것을 평상책(平上幘)으로 칭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11) 중국의 시각자료에서 개책은 관모 뒤쪽이 두 갈래로 갈라져 높이 솟은 형태인데 경우에 따라 끝이 약간 앞으로 숙인 모양을 보이기도 한다. 평상책은 관모 앞쪽과 뒤쪽이 평평한 형태에서 점차 뒤쪽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나 개책과 달리 뒤쪽이 갈라져 있지 않은 형태이다.

그런데 의(衣)는 일반적인 복식명칭으로 문헌기록만으로는 그 상세함을 알 수 없다. 이에 금관가야와 낙랑의 교류에서 금관가야인들이 책과 함께 착용한 의복을 추정하기 위해 먼저 중국의 후한(後漢; 25-220), 위(魏; 220-265), 서진(西晉; 265-316)대 시각자료로부터 책과 함께 착용된 상의를 고찰하고, 다음 낙랑에서의 의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중국의 의책

중국의 시각자료에서 개책은 후한대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개책과 평상책은 각각 독자적인 관모로도 착용했지만 개책 위에 진현관(進賢冠)을 쓰거나 평상책 위에 무관(武冠)을 쓰는 등 다른 관모와 함께 착용되기도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삼국지』가 서술된 3세기 당시 중국의 의책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漢) 이후 서진까지의 시각자료에서 개책과 평상책을 단독 관모로 착용한 경우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중국의 고분벽화에서 책은 후한의 176년 안평(安平) 녹가장(逯家莊) 벽화묘, 밀현(密縣) 타호정(打虎亭) 1호묘, 요양(遼陽) 북원(北園)3호묘, 언사현(偃師縣) 행원촌(杏園村)묘를 비롯하여 위(魏) 감로(甘露)2년(257)의 가욕관(嘉峪关) 1호묘, 서진(西晉)의 가욕관 5,6호묘, 돈황 불야묘만(佛爺廟灣) 벽화묘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자료에서 개책과 함께 착용한 의복을 보면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정확한 길이 확인은 어렵지만 발등에 이르는 긴 길이<Fig. 11, 12>에서 무릎과 발목의 중간 길이<Fig. 13>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Fig. 14>는 기마자세로 단언하기 어려우나 상대적으로 길이가 더 짧은 상의의 존재도 추정된다.


<Fig. 11> 
Man from Lujiazhuāng tomb (Zhongguo meishuquanji bianjiweiyuanhui[ZMB], 1989, Fig.15)


<Fig. 12> 
Man wearing Gaechek from Jiayuguan tomb No.1 (Hu, 2000, p. 15)


<Fig. 13> 
Man from Dahuting tomb No.1 (The Henan Provincial Institute of Archaeology[HPIA], 1993, p. 106)


<Fig. 14> 
Man wearing Gyechek from Jiayuguan tomb No.5 (E, Zheng & Gao, 2009a, p. 60)

평상책과 함께 착용한 의복도 개책과 마찬가지로 발등을 덮은 긴 길이<Fig. 15>, 무릎과 발목의 중간 길이<Fig. 16, 17, 18>, 엉덩이를 덮는 길이<Fig. 19> 이렇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그리고 평상책과 함께 엉덩이를 덮는 짧은 길이의 상의를 착용한 경우는 개책의 경우와 달리 서 있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어 그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각각의 상의는 길이에 따라 발등을 덮는 긴 길이의 상의는 포(袍), 엉덩이를 덮는 짧은 상의는 유(襦), 그리고 무릎과 발목의 중간 길이는 장유(長襦) 혹은 단포(短袍)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Fig. 15> 
Man wearing Pyoungsangchek from Jiayuguan tomb No.1 (Hu, 2000, p. 18)


<Fig. 16> 
Man in carved stone from Dahuting tomb No.1 (HPIA, 1993, Fig.8)


<Fig. 17> 
Man from Beiyuan tomb No.3 (ZMB, 1989, Fig.28)


<Fig. 18> 
Man from foyemiaowan tomb (E, Zheng & Gao, 2009b, p. 517)


<Fig. 19> 
Man from Xinyuancun tomb No. 2917 (ZMB, 1989, Fig.21)

그런데 중국의 개책과 평상책 시각자료에서 포, 유의 착용 비율이 동일한 것은 아니어서 개책은 주로 포와 함께 주로 지배층의 복식으로 표현되어 있고, 평상책은 포와 함께 착용한 지배층 인물도 있지만 포를 착용했다 하더라도 묘주의 근시(近侍), 무사, 악사와 같은 예술인의 착용예도 함께 표현되어 있으며, 평상책과 유고를 함께 착용한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인물들도 상당수 찾을 수 있다. 가욕관1호묘 연희 장면<Fig. 20>에서 평상에 올라 연주를 듣고 있는 개책, 포 착용 인물들과 평상 아래에서 동일하게 포를 착용하였지만 평상책을 쓴 연주자의 모습에서 개책이 평상책보다 상위 신분층의 관모로 구별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Fig. 20> 
Banquet drawing from Jiayuguan tomb No.1 (Hu, 2000, p. 16)

(2) 낙랑의 의책

낙랑 출토 시각자료에서 책을 착용한 인물을 표현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3세기 위진대의 의책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평양ㆍ안악 지역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비록 낙랑군이 313년 고구려에 의해 복속되었다고는 하나 장기간 중국의 군현체제를 경험하고 한화(漢化)된 토착호족집단에 의해 중국계 복식문화가 4세기까지 유지되었기 때문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평양 안악 지역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의책을 3세기 낙랑인들이 착용했던 의책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개책과 평상책이 확인되는 고분은 평양ㆍ안악지역의 안악3호분, 감신총, 덕흥리 고분, 약수리고분, 수산리 고분 등이고, 집안 지역 고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의복은 개책, 평상책 모두 땅에 끌릴 정도로 긴 길이의 포<Fig. 21, 24>, 말을 탄자세로 명확하지 않으나 바지단이 보여 포보다는 상대적으로 짧아 보이는 길이의 상의<Fig. 22, 25> 와 엉덩이를 덮는 유<Fig. 23, 26> 세 가지 경우가 모두 표현되어 있어 중국의 시각자료에서 확인된 상의와 동일하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개책은 유고보다는 포, 평상책은 포보다는 유고와 함께 착용한 비율이 더 높다.


<Fig. 22> 
Procession painting from Anak tomb No.3 (part1) (Chosen Gahosha, 1985, Fig.(圖)25)


<Fig. 23> 
Procession painting from Anak tomb No.3 (part2) (Chosen Gahosha, 1985, Fig.(圖)22)


<Fig. 24> 
Man from Susan-ri (Kim, 1974, p.30)


<Fig. 25> 
Procession painting from Anak tomb No.3 (part3) (Chosen Gahosha, 1985, Fig.(圖)23)


<Fig. 26> 
Man wearing Pyoungsangchek from Anak tomb No.3 (CCIBRK, 2000, p. 42)

이상의 고찰에서 3세기 금관가야는 『삼국지』한전의 포 착용 기록에서 출발하였다. 포는 중국식의 발등까지 이르는 긴 길이의 상의로 북방계 호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고의 복식 체계와는 다른 계통이다. 이는 삼한시기 금관가야와 낙랑 간철을 매개로 한 교역을 통해 이루어졌던 복식 교류에 영향을 받은 결과로 생각된다. 한인들이 교역시 착용했던 의책에서 의(衣)는 당시 중국, 낙랑 지역 시각자료에 근거하더라도 긴 길이의 포, 종아리 길이의 포 혹은 장유, 엉덩이 길이의 유 모두 착용 가능했을 것이다. 『삼국지』에서 포를 착용했다고는 하나 하위 신분의 일반인까지 모두 포를 착용했다고 볼 수는 없고 적어도 교역에 참여하였던 인물들 혹은 교역으로 얻은 선진물품을 향유할 수 있었던 일부 지배층을 중심으로 착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Ⅲ. 4-5세기 금관가야의 상의

『삼국지』기록으로부터 3세기 중반 금관가야의 복식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던 것과 달리 4세기 대에는 마한, 진한이 백제, 신라로 국명을 달리하여 문헌에 등장하게 되고, 가야 관련 문헌기록은 국내와 중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5세기 대 보이는 가야 관련 문헌 기록은 복식이 아닌 정치관계 기사이거나 금관가야가 아닌대가야 관련 기록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4세기 이후 금관가야의 복식은 고고자료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데 이 마저도 영성할 따름이다. 이에 먼저 금관가야 시각자료에 표현된 상의를 살펴보고, 이후 금관가야와의 대외교류가 인정되는 주변국의 복식자료 검토를 통해 4-5세기 금관가야의 상의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1. 금관가야 시각자료에서의 상의

금관가야 복식을 알 수 있는 시각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몇몇 토우 및 토기에서 간략하게 표현된 의복을 살펴볼 수 있다. 김해 출토 4세기 후반 기마인물형 토기<Fig. 27, 28>에 표현된 인물은 갑옷을 착용하고 모두 말을 타고 있지만 상의의 밑단 표현에서 유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5세기 중엽 통형기대에 부착된 소형 인물 토우<Fig. 29>에서도 명확하지 않으나 유고 착용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Fig. 27> 
Clay figure from Gimhae (National cultural heritage portal, n.d.)


<Fig. 28> 
Earthenware with mounted figure (Park, 2010, p. 481)


<Fig. 29> 
Earthenware decorated with mounted figure (Park, 2010, p. 413)

한편, 김해 봉황동 70호 저습지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토우<Fig. 30>은 생략된 표현으로 의복의 세부선은 확인되지 않으나 상의와 하의의 구분 없이 몸통을 하나의 통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형 토우에서 이러한 경우 인체 표현의 한 방법인지 아니면 실제 의복을 인식하고 표현한 것인지 구분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Fig. 30>은 일부 결실되었으나 허리에 두른 대(帶)를 표현하고 있어 의복을 인식한 후 제작된 것으로 포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Fig. 30> 
Clay figure from Bonghwang-dong, Gimhae (The Kyoungnam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2007, p. 16)

2. 4-5세기 주변국의 상의

복식사학에서 삼국시대 복식 교류에 대한 논의는 대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간의 복식 비교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한 복식의 영향관계 파악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금관가야 영역 내에서 출토된 도질토기(陶質土器), 동경(銅鏡), 마구류(馬具類), 동복(銅復)과 동세(銅洗) 등을 포함한 청동 용기류 등 고고유물 자료에 의하면 중국동북부 지역의 삼연(三燕), 부여(夫餘)와의 친연성도 인정된다(Cho, 2017; Sim, 2016). 이에 고구려, 백제, 신라 뿐 아니라 친연성이 언급되는 다른 지역에서의 상의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1) 고구려, 백제, 신라의 상의

고구려는 3세기대 편찬된 문헌에서부터 복식기록을 찾을 수 있지만 백제와 신라는 6세기 이후편찬된 문헌에서 복식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복식은 서로 유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먼저 남자의 상의를 보면 고구려는 장부의 통수삼(同袖衫)13), 귀자의 대수삼(大袖衫)14), 왕과 대신의 삼통수(衫筩袖)15) 기록에서 상의의 명칭으로 ‘삼(衫)’을 찾을 수 있다. 소매통이 넓은가 좁은가에 따라 대수냐, 통수냐의 구분이 있을 뿐 왕 이하 대신의 상의가 모두 동일하게 삼이라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는 유(襦)를 복삼(複衫)이라 한다는 기록16)에서 ‘복삼’이란 ‘겹으로 만든 삼’이라 할 수 있는데, 유와 삼이 제작상의 구성방식만 달랐을 뿐 형태적인 차이가 없었기에 유를 복삼이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신라에서 유를 위해(尉解)라 한다는 기록17)은 말을 할 때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세워야 가능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유와 위해의 형태적인 차이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언어적으로 명칭사용을 달리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에 고구려의 ‘삼’, 백제의 ‘복삼’, 신라의 ‘위해’는 ‘유’와 동일한 형태로 인식되고, 집안지역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직령(直領)교임(交衽)에 가장자리에 선 장식을 한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상의가 바로 당시의 유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고유양식을 보는 집안지역의 무용총 주인공은 시종과 동일하게 포가 아닌 유고차림<Fig. 31>을 보이고, 낙랑군을 통합한 이후 7세기 『신당서』의 기록에도 왕의 복식으로 유와 같은 삼이 보인다는 것은 고구려는 끝까지 고유양식을 지속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31> 
Figures from Muyongchong (Kim, 1974, p. 61)

그런데 『양서』와 『남사』의 기록에서 백제, 신라의 상의로 단지 유만을 언급하고, 『삼국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한 시기 마한과 진한 지역에서 가야와 함께 착용하였을 ‘포’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6세기 전반 삼국의 사신 복식을 알 수 있는 양직공도<Fig. 32>와 그 모본인 왕회도<Fig. 33>, 번객입조도에서 삼국 사신이 모두 유고 차림인 것은 문헌에 포에 대한 언급 없이 유고만 기록된 사실과도 일치한다. 이는 백제와 신라에서는 적어도 6세기 대에 더 이상 포 착용이 일반적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32> 
Envoy of Baekje (National Folk Museum, 1994, p. 118)


<그림 33> 
Envoys of Three Kingdoms (Li, 1997, p. 80)

한편, 고구려는 4-5세기 고분벽화의 인물표현에서 유고 착용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지만 백제와 신라는 문헌자료와 시각자료 모두 6세기의 것으로 4-5세기 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3세기 가야와 더불어 포를 착용하던 마한과 진한지역에서 6세기에 일반 복식으로 유고를 착용하게 되었다면 4-5세기 마한에서 백제로, 진한에서 신라로 국명을 바꾸고 고대국가로의 틀을 세우며 복식에서도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백제는 백제왕의 복식으로 『신당서』에 대수자포(大袖紫袍)를 기록하고 있다.18) 이 부분은 3세기 삼한에서 포를 착용한 그 유제로도 볼수 있지만 백제의 경우 4-5세기 중국의 남조와 직접 교류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로 볼 여지가 있다.

다음은 여자의 상의를 살펴볼 것이다. 삼국의 복식에서 주목되는 것은 백제 부인의 포와 유사한 의(衣)19), 신라 부인의 장유(長襦)20) 기록이다. 신라에서 장유라는 것은 말 그대로 길이가 긴 유라는 것인데 『說文』 ‘유는 짧은 옷이다(襦:短衣也)’라고 하였고, 『急就篇』 ‘袍襦表裏曲領裙’에 안사고(顔師古)는 주(註)하여 ‘포는 길이가 긴 옷으로 발등까지 이르는 것이고 유는 길이가 짧은 옷으로 무릎이상이다.’21)라고 하였다. 따라서 장유는 무릎 위로 올라오는 유와 발등 길이의 포 사이 즉무릎과 발등 사이에 이르는 길이의 상의로 판단된다.22) 고구려에서는 여자들의 장유 기록은 없지만 고분벽화에 남자들의 엉덩이를 덮는 짧은 유와 다르게 종아리 길이의 긴 상의도 착용한 모습<Fig. 24>를 볼 수 있어 신라 여자의 장유도 이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백제 여자의 경우 포와 유사한 ‘의(衣)’라고 칭하며 실제 ‘포’라고 하지 않았던 것은 고구려나 신라처럼 발등 길이의 포보다는 짧았지만 무릎 위 엉덩이를 덮는 일반적인 유의 길이보다는 길었기 때문에 포와 유사하다는 표현을 하였던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표현된 여자는 긴길이의 장유뿐 아니라 엉덩이를 덮는 남자의 유와 동일한 길이의 유도 함께 착용<Fig. 35>하고 있고, 신라 여인이 장유를 착용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황남동 출토 토우<Fig. 36>와 6세기 순흥 어숙(於宿)묘에는 장유가 아닌 엉덩이선 길이의 유를 착용하고 있는 여인<Fig. 37>이 확인된다. 따라서 시각자료에 근거하자면 백제나 신라 여인의 장유 기록은 그들이 장유만을 입었다기보다는 남자들이일반적으로 짧은 유를 착용하던 것과 달리 길이가 긴 장유도 함께 착용하였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Fig. 34> 
Woman from Muyongchong (Kim, 1974, p. 62)


<Fig. 35> 
Woman from Susan-ri (Kim, 1974, p. 29)


<그림 36> 
Clay figure from Hwangnam-dong (Gyeongju National Museum, 1997, p. 53)


<Fig. 37> 
Woman from Uhsook tomb (Kim, 1974, p.118; Azuma, 1997, p. 325)

2) 선비족(三燕)의 상의

금관가야의 청동제 마구류 등은 특히 삼연(前燕, 後燕, 北燕) 권역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유사함을 보이는데, 대표적인 복식품으로는 대성동 88호분 출토 진식대금구<Fig. 38>이고 삼연의 대금구유물 중 특히 라마동(喇嘛洞) ⅡM275고분 출토품<Fig. 39>와 가장 유사하다. 대성동 출토 대금구는 라마동 출토 대금구와 비교할 때 교구가 없고 과의 형태도 2종류만 출토되었으나 잔존하는 대단금구와 과에 투각된 용문 및 삽엽문의 모양, 수하식의 형태 등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Fig. 38> 
Belt ornament from Daeseong-dong Tomb No.88 (Daeseong-dong Tombs Museum, 2013, p. 74)


<Fig. 39> 
Belt ornament from lamadong tombⅡM275 (LiaoningSheng wenwu kaoku yanjiusuo, 2004, p. 73)

삼연이라 불리는 전연, 후연, 북연은 모용선비(慕容鲜卑)가 세운 국가들이다. 선비족은 북방한랭한 지역의 북방 기마민족으로 의복은 주로 동물의 털이나 가죽을 사용하였으며 넓고 풍성한 상의(上衣) 하상(下裳) 형식의 한족(漢族)과 달리 좁고 밀착된 상의(上衣)와 하고(下袴) 형식의 의복을 특징으로 한다. 탁발선비(拓跋鲜卑)계의 북위(北魏) 기록이기는 하나 효문제가 선비족 복식을 한식(漢式)으로 개혁한 이후에도 선비족 여자들이 여전히 ‘소유오(小襦襖)’23), ‘협령소수’24) 등 고유복식을 착용한 것에 그 지역 관리들을 책망했다는 기록으로부터도 선비족 고유의 복식은 좁고 밀착된 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Park & Lee, 1999).

그런데 전연의 원대자(袁台子) 벽화묘를 보면무관(武冠)과 여유있는 포 착용의 묘주<Fig. 40>, 문지기의 평상책과 종아리 길이 상의 착용<Fig. 41>, 봉식도에서 평상책과 엉덩이 길이의 유를 착용한 인물<Fig. 42>로부터 세 가지 길이의 상의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원대자묘 벽화의 시녀도<Fig. 43>과 북연의 대평방(大平房)묘 벽화에서도 넓고 여유있는 포를 착용한 여성<Fig. 44>이 확인된다. 원대자묘 묘주도에서 중국식의 무관과 조복을 함께 착용하고 있는 모습은 전연이 한화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식 관료제도 뿐만 아니라 복제(服制)까지도 도입하였음을 보여준다(Jung, 2001). 이는 비록 선비족이 좁고 밀착된 형태의 북방계양식에서 출발하였어도 한족과의 교류를 통해 4-5세기 이미 상당부분 한화된 복식양식을 보이고 있었음을 뜻한다.


<Fig. 40> 
Master from Yuantaizi tomb (LI, 1984, Fig.(圖版)5-2)


<Fig. 41> 
Doorkeeper from Yuantaizi tomb (LI, 1984, p. 41)


<Fig. 42> 
Man from Yuantaizi tomb (ZMB, 1989, Fig.55)


<Fig. 43> 
Women from Yuantaizi tomb (LI, 1984, Fig.(圖版)1-1)


<Fig. 44> 
Women from Dapingfang tomb (Xu & Sun, 1985, p. 920)

그러나 모용선비에 뿌리를 둔 하남국(토욕혼)의 왕이 소수포(小袖袍)를 착용했다는 『양서』의 기록25)에서 선비족의 고유의복이 좁고 밀착된 양식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포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탁발선비의 북위대 자료이기는 하나 효문제가 한풍(漢風)으로 복식 개혁을 한 태화(太和) 11년(487) 이전의 것으로 사령(沙嶺) M7고분(435) 칠화 잔편<Fig. 45>, 지가보(智家堡)고분 목관 잔편<Fig. 46>, 안북사원(雁北師院) M2고분과 M5고분(477)의 도용<Fig. 47, 48> 등을 보면, 선비족 고유의 복식으로 유고뿐만 아니라 장유, 포의 존재가 확인된다.


<Fig. 45> 
Man from Shaling tomb (Seo, 2010, p. 181)


<Fig. 46> 
Women from Zhijiabao (Seo, 2010, p. 195)


<Fig. 47> 
Figure from Yanbeishiyuan M2 (Liu & Zuo, 2005, Fig.(圖版)8-2)


<Fig. 48> 
Figure from Yanbeishiyuan M5 (Liu & Zuo, 2005, Fig.(圖版)11-1)

이상에서 삼연의 고유복식은 좁고 밀착된 양식의 상의와 하고인데 이때 상의는 엉덩이선 길이의 유, 무릎 아래의 장유, 발등길이의 포 모두를 의미하고, 한식(漢式)의 복제를 받아들이면서 여유있고 풍성한 의복 형태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부여의 상의

부여는 『삼국지』에 백포(白布)의 대몌포(大袂袍)를 착용26)한다고 전한다. 대몌란 소매통이 넓은 대수와 같은 용어로 따라서 대몌포는 소매통이넓은 포였다고 생각된다. 『남사』에 의하면27) 고구려는 존비에 각각 등급이 있으며 언어와 모든 일이 대부분 부여와 같았으나 성질과 의복은 달랐다고 한다. 부여는 본래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은 본래 부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는 일찍부터 왕호를 사용하는 등 중국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기본복식이 유고인 것은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삼국지』 대몌포 기록만으로 부여의 상의를 포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다. 다만 고구려와 부여의 의복이 달랐다는 것은 집안지역 고분벽화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는 모두 유고 차림인 반면 부여에서는 긴 길이의 포도 함께 착용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의 중국식 복식 양식은 낙랑을 통해 중국복식에 익숙했던 금관가야에서도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상 주변국 복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7세기 백제왕이 포를 착용했으나 적어도 6세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남자는 유, 여자는 유와 더불어 장유를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삼연의 선비족은 좁고 밀착된 의복 특징을 보이며, 유와 장유, 포 모두 착용하였는데, 중국 복식을 받아들이며 중국식의 여유있는 형식도 존재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여는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역시 유고가 기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3세기 소매가 넓은 포도 착용하였음을 알수 있었다. 시각자료의 부재로 포의 길이나 포 이외의 유, 장유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상에서 금관가야는 유를 지속적으로 착용한다는 점에서는 주변 삼국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토우에 보이듯이 3세기의 포착용이 4세기 이후까지 지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고 이는 주변 삼국보다는 삼연, 부여 복식과의 관련성이 부각되는 부분이다.


Ⅳ. 결론

본 연구는 금관가야 복식 중 상의 길이를 통시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먼저 3세기 『삼국지』한전의 포 착용 기록은 변한・낙랑 간 철을 매개로 이루어진 교역 활동과 의책의 착용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중국, 낙랑의 시각자료에 근거하자 면포를 포함한 유, 장유도 함께 착용되었고, 포는 일반인까지 모두 착용했다기보다는 일부 지배층을 중심으로 착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5세기는 토우 및 토기 자료와 함께, 고고자료에서 영향관계가 확인되는 주변국의 상의에서 유추해 보고자 했다. 먼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는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길이의 유가 기본이지만 여성에게 종아리 길이의 장유 착용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삼연의 유, 장유, 포 착용 시각자료와 부여의 포 착용 기록으로부터 삼연과 부여는 모두 북방민족으로 기마에 유리한 복식에서 출발했지만 상당부분 중국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금관가야의 복식이 유고를 기본으로 하지만, 낙랑과 철을 매개로 끊임없는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한화(漢化)된 복식 양식을 받아들인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금관가야는 첫째, 3세기 포 착용 기록, 둘째, 4세기 이후 간략하지만 토우에서 유, 포가 모두 보인 점, 셋째, 대외교섭이 인정되는 삼연과 부여에서 역시 유, 포가 모두 착용되었다는 점으로부터 금관가야는 유와 포를 함께 착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장유는 부여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삼연의 자료에서 남녀의 장유 착용이 보이고 낙랑의 유제가 지속되었던 4-5세기 평양지역 고구려 고분벽화 자료에서도 남녀의 장유 착용이 유지되었던 점에 근거하여 금관가야의 남자복식에서도 포, 유와 더불어 장유가 계속 착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고대복식 연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료의 부족이다. 특히 금관가야는 빈약한 복식 자료로 주변국의 복식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고, 논의의 전개에서 상당 부분 추정에 의존한 점은 연구의 한계로 남는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지속적인 고분 발굴을 통해 복식자료의 보완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Notes
1)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第一 五伽耶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寕 大伽耶今髙霊 星山伽耶今亰山一云碧珎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畧云 太祖天福五年庚子改五伽耶名 一金官為金海府 二古寧爲 加利縣 三非火今昌寕恐髙霊之訛 餘二阿羅 星山同前星 山或作碧珍伽耶”

2) 본 연구에서도 시기에 따른 국명을 달리하지 않고 이하에서는 금관가야로 통칭할 것이다.
3) 三國志 권30 오환선비 동이전 제30 한 “馬韓....以瓔珠 為財寶, 或以綴衣為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為珍.....魁頭露紒,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蹻蹋”
4) 三國志 권30 오환선비 동이전 제30 한 “弁辰....衣服絜清 長髮 亦作廣幅細布”
5) 『삼국지』 의 ‘足履革蹻蹋’는 일반적으로 가죽신으로 해석되지만 ‘蹻’에는 ‘초리(草履)’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혁리와 초리를 신고 걷는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Chung, 2001)도 있다. 그런데 해석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혁리와 초리 모두 삼한 공통의 양식임에는 변함이 없다.
6) 三國志권30 오환선비 동이전 제30 변진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又 以供給二郡”

7) 三國志권30 東夷傳 韓條 裴注所引 魏略

“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鑡曰 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辰鑡因將戶來 出詣含資縣 縣言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 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 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 汝還五百人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 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表鑡功義 賜冠幘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8) 三國志권30 오환선비 동이전 제30 한

“景初(237-239)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通典 185 東夷 上 弁辰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9) 주 8) 참고
10) 獨斷卷下

“幘者 古之卑賤執事不冠者之所服也 孝武帝幸館陶公主家 召見董偃 偃傅青褠綠幘 主贊曰 主家庖人臣偃昧死再拜謁 上為之起 乃賜衣冠 引上殿 董仲舒 武帝時人其上兩書曰 執事者皆赤幘 知皆不冠者之所服也 元帝額有壯髮 不欲使人見 始進幘服之 群臣皆隨焉 然尚無巾如今半幘而已 王莽無髮 乃施巾 故語曰 王莽禿 幘施屋冠進賢者宜長耳 冠惠文者宜短耳 各隨所宜"

11) 晉書권25, 志제15, 輿服, 宋書권18, 志제8, 禮5

“幘者....漢注曰 冠進賢者宜長耳 今介幘也 冠惠文者 宜短耳 今平上幘也”

12) 周書권49 열전 제41 이역상 백제, “其衣服 男子畧同於高麗”

魏書권100 열전 제88 백제, “其衣服飮食與高句麗同”

梁書권54 열전 제48 동이 백제; 南史권79 열전 제69 이맥하 백제, “言語服章略與高驪同”

隋書권81 열전 제46 동이 백제; 北史권94 열전 제82 백제 “其衣服與高麗略同”

隋書권81 열전 제46 동이 신라; 北史권94 열전 제82 신라 “風俗刑政衣服 略與高麗百濟同”

13) 周書권49 열전 제41 이역상 고려 “丈夫衣同袖衫 大口袴 白韋帶 黃革履”
14) 隋書권81 열전 제46 동이 고려; 北史권94 열전 제82 고려 “貴者... 服大袖衫 大口袴 素皮帶 黃革屨”
15) 新唐書권220 열전 제145 동이 고려,

“王服五采 以白羅製冠 革帶皆金釦 大臣靑羅冠 次絳羅珥兩鳥羽 金銀雜釦 衫筩袖 袴大口 白韋帶 黃革履 庶人衣褐 戴弁 女子首巾巾國”

16) 梁書권54 열전 제48 동이 백제; 南史권79 열전 제69 이맥하 백제 “呼帽曰冠 襦曰複衫 袴曰褌”
17) 梁書권54 열전 제48 동이 신라; 南史권79 열전 제69 이맥하 신라 “冠曰遺子禮 襦曰尉解 袴曰柯半 靴曰洗...語言待百濟而後通焉”
18) 新唐書권220 열전 제145 동이 백제, “王服大袖紫袍靑錦袴 素皮帶 烏革履 烏羅冠飾以金以金蘤”
19) 周書권49 열전 제41 이역상 백제; 北史권94 열전제82 백제, “婦人衣似袍 而袖微大”
20) 新唐書권220 열전 제145 동이 신라, “男子褐袴 婦長襦”
21) “長衣曰袍下至足跗 短衣曰襦自膝以上 一曰短而施要者襦”
22) 앞에서 중국의 시각자료에서 보이는 무릎과 발등 사이 즉, 종아리 길이의 상의를 장유 혹은 포라고 칭한바 있다. 이를 삼국시대 문헌에 근거하자면 포보다는 장유라 칭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되고 이에 연구에서는 유와 포의 중간 길이 상의의 의미로 ‘장유’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23) 魏書 列傳 卷十九中  景穆十二王列傳第七中

“高祖曰 朕昨入城 見車上婦人冠帽而著小襦襖者 若為如此 尚書何為不察 澄曰 著猶少於不著者”

24) 魏書 列傳 卷二十一上  獻文六王列傳第九上

“又引見王公卿士 責留京之官曰 昨望見婦女之服 仍為夾領小袖 我徂東山 雖不三年 既離寒暑 卿等何為而違前詔”

25) 梁書 卷五十四 列傳 第四十八 諸夷 西北諸戎 河南王國

“河南王者 其先出自鮮卑慕容氏....著小袖袍 小口袴 大頭長裙帽”

26) 三國志권30 烏丸鮮卑 東夷傳 제30 夫餘

“在國衣尚白 白布大袂袍 袴 履革鞜 出國則尚繒繡錦罽 大人加狐狸 狖白 黑貂之裘 以金銀飾帽 出名馬 赤玉貂狖 美珠 珠大者如酸棗”

27) 南史 권79 열전 제69 이맥하 고구려 “尊卑各有等級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2018.4~2019.4 김해시 ‘가야복식 복원사업 연구용역’ 과제에 의해 수행된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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