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Current Issu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 No. 6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No. 5, pp.65-84
Abbreviation: J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Aug 2019
Received 10 May 2019 Revised 03 Jun 2019 Accepted 16 Aug 2019
DOI: https://doi.org/10.7233/jksc.2019.69.5.065

안악3호 서측실 남벽의 동수부인과 시녀복식 연구
동준희 ; 조우현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석박통합 수료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A Study on Representation of the Lady's and Her Maids of Honour, South wall Western side-chamber of the Ahn-ak Tomb No.3
Dong, Junyu ; Cho, Woo-Hyun
Ph. D Candidate, Dept.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Professor, Dept.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Cho, Woo Hyun, e-mail: joy54@hanmail.net


Abstract

Scholars who study the tombs of Goguryeo murals tend to focus on the political attributes of the murals, the religious circles, and the identity of the tomb owners, but the significance of women's clothing in murals is rarely analyzed. Therefore, this thesis explains the lady and maid costumes on the south wall of the west side of the 4th century mural tomb of Anju County, Wuyue County, Huanghai South Road, according to archaeology, literature and women in literature and art. The comparative analysis of clothing and other methods, in an objective academic position, to show a more realistic female clothing environment. The hostess's 'mixed coveted'-the ''GuiYi' system', although there is no evidence of unearthed cultural relics, but through the historical materials and the commonalities of the unearthed images in the tombs of the same period or the political background, the real existence and deification Possibilities; the maid's "upper skirt" - the skirt system, on the "Silk Road" - the grassland line seems to find unearthed costumes with common points, thus further objectively prove the commonality of the clothing culture at that time. From the study of female portraits on the south side of the west side of the room, it seems that the study of male portraits is more reproducible. The 4th-century Dafang County is a feature of the manor system that trades with the Han people as the main body of the Silk Road.


Keywords: GuiYi system, Gun&Yue Two piece Style, Simui, Boyo style, Two-tone skirt, Northern style
키워드: 규의제도, 군유2부식, 심의, 보요식, 간군, 북방식

I. 서론

19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안악3호분은,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이다.

중국의 사료는 고구려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주공 초기가 새로이 대읍(大邑)에 동락국을 세우니 사방의 민족이 대화합하였다.1) 고구려는 북방 정동에 위치하는 민족이며, 고이(高夷)2)라 하여 주나라 초에 동북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던 하나의 민족으로 기록되고 있다. 두번째는 고구려는 주몽의 건국신화 전설이 기재되어 있는 『논형‧길험편(論衡‧吉驗篇)』에 최초 기록이 있다. 그리고『위략(魏略)』,『위서(魏書)』,『양서(梁書)』,『주서(周書)』,『북사(北史)』및『삼국유사(三國遺事)』,『삼국사기(三國史記)』와『동국통감(東國通鑒)』등의 문헌은 고구려는 동북방의 민족정권이라고 소개하지만, 그 정권의 사회상태 및 각 문화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고구려 문화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후, 국제학술계는 그 가치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100여좌 벽화고분은 그 밀집 지구에 따라 중국집안 및 환인(桓仁)일대의 집안권(集安圈), 현재의 북한경내의 대동강(大同江)유역 및 황해남북도 일대의 평양권(平壤圈)으로 나누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하여, 역사학이나 고고학자들은 고분형제나 벽화복식의 표상적 기록을 주로 하고, 미술학자는 화공의 기법과 유파(流派)에 비중을 두고 있다. 복식학자들은 고분벽화 중에 출현하고 있는 인물의 복식 논증에 열중하고 있다.

김동실(2015)의 고구려 복식문양의 도안연구, 정춘녕(鄭春穎)(2015)의『고구려복식연구』, 이경희(2012)의 4~5세기 고구려 官服 연구, 장엽(2009)의 고구려고분벽화를 통하여 본 고구려인의 생활습속 및 지미화(2007)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군의 관한 연구, 정완진(2003)의 고구려 고분벽화 복식의 지역적 특성과 변천 등 각종 영역에서 집안권 및 평양권내의 복식형태에 관하여 상세한 연구가 있다.

이상의 문헌을 살펴보면, 4세기 말 이전의 집안벽화고분에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상유하군(上襦下裙), 남성은 상유하고(上襦下袴) 형식을 입고 있었다. 여밈을 보면 대금(對襟)과 좌임(左衽)이 출현한다. 그러나 4세기 말 이전 평양권은 대체적으로, 다중문화가 공존하여, 한(漢)문화 유습이 현저한 사회현상을 이루고 있어, 복식형태가 간단하지 않다.

바로 이러한 시기의 안악3호분은, 지리적 위치 및 그 벽화의 완전성에 있어, 학자들이 더욱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안악3호분의 인물도에 관한 많은 복식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대개는 묘주인, 출행도(出行图) 등에 내용이 집중되고 있을 뿐이다. 안악 서측실 남벽 동수부인의 벽화복식은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상세한 설명과 변증이 없다. 최근에는 동시기의 출토된 방직(紡織) 문물도 벽화복식에 따라 복원되고 있으나, 본 연구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를 규명함을 목적으로 한다.

① 벽화 중 부인의 발식(髮式), 잠계(簪笄), 보요관(步搖冠), 반비장유(半臂長襦), 상삼하상(上衫下裳)의 여부 ② 부인 겉옷이 심의(深衣)제에 의한 제우(褚于)와 수굴(繡镼)을 입은 의복의 가능성 ③ 부인 하상부분에 있어 섬소(襳髾)가 달린 규각(圭角)은 반비장유의 아랫단 혹은 폐슬(蔽膝)의 겹침여부 ④ 부인의 양견에 날리고 있는 끈의 모습은 문헌 중에 볼 수 있는 리대(縭帶) 혹은 천의(天衣)여부 ⑤ 부인신변에 서 있는 시녀들의 복식은 신강(新疆) 및 감숙(甘肅)등 서북지방 벽화 및 출토문물과의 관련이 있는가? 등 문제에 대하여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II. 여자복식의 배경

유교사회에서 여성들은 소위 삼종사덕(三從四德)의 사회질서를 지켜야 했고, 나아가 남편의 정치적 입장과 사상이 부인복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부인의 복식은 더욱 설득력이 있어, 안악3호분 묘주 동수(冬壽)의 출신과 정치적인 사상을 대변해 줄 수 있게 한다.

묘주 동수는 선비(鮮卑)로 귀화한 한인(漢人)이다. 4세기 동북지방은 선비 모용정권 내부에 최고 통치자 위치를 놓고 쟁탈전을 벌리는 가운데, 많은 한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중에 1인인 동수가 대방군으로 도망하고, 사망 후 훌륭한 부부합장묘가 조성된 것이 바로 안악3호분이다.

동수는 전연(前燕)왕 모용황의 사마였으나, 모용인의 공격으로 포로가 되어, 모용인의 사마가 된다.3) 모용정권은 한인 인사들을 중용하였는데, 동수묘지명4) 중에, “유주요동 평곽향(平郭鄕) 동수를 사모한다”라는 문구가 있다. 평곽(平郭)은 양한(兩漢)에서 삼연(三燕)에 이르는 사이에 군사의 중요기지였을 뿐 아니라, 소금과 철의 산지이기도 하였다.5) 동수의 도주경로는 고구려의 관할 지역만이 아니라 해로를 경유하였다. 낙랑이나 대방군(带方郡)으로 도망간 한족 인사는 동수만이 아니고 왕경(王景).6)도 있었으며, 한족 인사들이 난세를 피하여 조선반도에 은거하고자 하였는데, 당시 해로가 유일한 선택이었다. 대동강유역은 고구려 남방의 한문화 중심지로서, 낙랑‧대방군이 멸망한 후 한인 집단이 황해도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자치령을 형성하였다. 묘지명에도 영화(永和)13년(357)이라는 단서를 볼 수 있고7), 관직명과 동측 회랑상부의 행렬도를 보면 동수는 구석의 예우(九錫之礼)8)를 받기도 하였다. 동수부인도 당연히 제후부인의 예를 받았을 것으로, 벽화 중 부인의 복식도 당시 제후부인의 예복제도를 반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으로 본 논문은 동수묘 서측실 남벽 동수부인 및 3명의 시녀<Fig.1>복식의 특징을 두 방면에서 접근해 보려고 한다.

1) 사료 기록 및 여복지 중의 관련 내용.


<Fig.1> 
Dongsoo's wife and Her Maids of Honour, south wall, western side-chamber

(Cultural Assets and Sites in North Korea, p.38)



2) 후한(後漢)부터 위진(魏晉)까지 신선도를 선호하는 현학도리(玄學道理)에 이르러, 신화인물인 “서왕모(西王母)”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이 벽화복식이 우리에게 비현실과 실제의 세계를 동시에 표현하였을 것으로 기대한다.


III. 동수부인 복식
1. 동수부인의 두식(頭飾)

중국 고대에 여자는 계례(髻禮)라 하여 15살이 되면 두발을 묶어 비녀를 꽂아 혼례를 허락받았다. 다른 가족과 묶이기 때문에 계(髻)라고 하였다.『좌전·소공28년(左傳·昭公28年)』옛날에 유잉(有仍)씨가 딸을 낳았는데, 머리숱이 많고 검으며 매우 아름다워서 광택이 사람을 비추니 그 이름을 현처(玄妻)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머리가 숱이 풍성하고 긴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심지어 가발(假發)이 출현하기도 하였다.『의례·소뇌궤식례(仪禮·少牢饋食礼)』에서 피석(被裼)이라 하여, 주에서 말하길 죽은 자나 가난한 자, 죄인의 머리털을 가발로 만들어 장식하였으며, 피체(髲髢)라고도 하였다. 문헌 중에 고계(高髻)도 환경에 따라 서로 달라, 다양한 명칭과 장식기법이 출현한다.

동수부인의 두식은 고계로 올리고 위에 꽂은 비녀가 어슴푸레 보인다. 동수가 제후의 관직을 받았음으로 부인은 당연히 제후의 부인이 된다.

계(笄)는 한(漢)대후에 잠(簪)으로 명칭이 정리되었고, 갑골문(甲骨文)에서 는 고계(高髻)위에 비녀를 꽂은 여자가 제사와 관련된 행동 모습의 형태와 비슷하다.『시경·남편과 해로해야지(詩·君子偕老)』에 낭군과 해로해야지, 쪽찌고 여섯 개 구슬 박은 비녀를 꽂았으니(君子偕老,副笄六珈)의 가(珈)는 계의 화려한 장식을 더한 머리꾸미개로 보인다. 공소(孔疏)엔 다시 구슬을 비녀에 박아 정식하는 가(珈)'라 하였다. 양무제·소연(萧衍464년-549년)의 막수가(莫愁歌)에 두상금채12행 족하사리오문장(頭上金釵十二行, 足下絲履五文章.) 글귀는 머리에 금비녀를 12개를 꽂은 여섯 쌍이라 하여 부계육가(副笄六珈)에 대한 좀 더 정확한 해석이 보인다. 동수부인 벽화에는 고계위에 꽂은 비녀가 어슴푸레 보이는데 동수가 제후의 관직을 받아 동수부인도 제후부인이 되기 때문이다.『삼례도집주・주례(三禮圖集註・周禮)』에 후백(侯伯)부인은 여섯이고, 후(侯)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후백부인의 채(釵)도 열두 개로 추축된다. 이러한 부계육가의 두식은 동수부인 즉 제후부인의 신분에 맞는 두식으로 보인다.

유희(劉熙)의 『석명·식두식(釋名·釋首飾)』에 보유(步搖)에는 구슬이 드리워지고 걸으면 흔들린다. 양지수(揚之水)(2019)의 보유화과 보유관은 장사마왕퇴 1호의 한묘 출토 백화 중에 보이는 귀부인의 장신구와 고개지 열녀도(列女圖)의 귀족 여자의 머리장식 형태를 ‘보요’라고 하였다. 또한『진서·지(晉書·志)』기록에“공주、삼부인、구빈(九嬪)、세부(世婦)、제태비(諸太妃)、태부인(太夫人) 및 현향군(縣鄉君)、군공후특진부인(郡公侯特進夫人)、외세부(外世婦)、명부(命婦) 모두 보요를 사용한다.”9)고 언급한 내용은 보요를 착용한 인물상이 모두 중원지역 및 남조왕조의 지역이다. 동수부인의 장신구 특성은 중원한제에 일치하지는 않으나. 연나라(燕)지역의 북방민속의 장신구 특징이 보여진다.

북방민족의 보요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오환전(後漢書·烏桓傳)』에 여인들은 결혼할 때에 긴머리를 두가닥으로 나누어 위로 끌어올려 쪽을 지었고 10) 금과 옥으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궤보요(簂步搖)와 흡사하였다.『석명·석두식』에 궤를 회(恢)로 설명한다. 머리위에 넓게 덮어 가리는 장식물이다. 이렇게 보면 궤는 가계의 한 중류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궤'가 바로 북방민족 복식문화의 '부'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문화제도의 부계육가는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았지만 또한 다른 변화도 보이는데, 예를 들면 오환에 여인들 결혼예복중에 구결(句決)과 금벽(金碧)이 궤(簂)와 보요의 기능과 유사한 것이 이것이다. 위진시대 북방에서는 보요장신구가 유행하였다. 다만 형제는 한나라 형제와 다르며 보요관(步搖冠)으로 불렸다.『진서·모용괴재기(晉書·慕容廆载記)』중에 그때 연나라 지역에서 보요관을 썼다.11)고 하였다. 지금까지, '보요관'은 중국의 내몽골 및 요령에서 출토되어다. 위진시대 이 지역은 선비족의 정권이 활발하게 미치던 곳이다. 손국평(孫國平)은 선비의 금보요관은 화수형(花樹狀), 화만형(花蔓狀), 정화형(頂花狀)으로 구분한 바가 있는데 본 연구대상인 동수부인의 보요관이 화만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북표방신촌(北票房身村)의 진 묘에서 출토된 보요장식구 중에는 화만형 금식형제 두 개가 출토되었는데 위에 원형 금 조각이 걸려있다. 덩굴화식 장식물과 꽃나무식 비녀를 궤에 고정시켰다고 가정하면, 동수부인의 두식형태는 한(漢)의 부계육가인 귀부인의 두식 제도에 선비의 보요관의 특징도 보여 주고 있다. 본 연구에서 이러한 동수부인의 두식은 ‘복합형 보요관’이라고 설명하고자 한다. 다음 동수부인의 이마에 드리워진 장신구의 형태는 가육관(嘉峪關)의 위진묘에서 출토된 종(鐘)양식의 금조각과 다르지 않으며, 이는 만흠(萬欣)이 선비의 보요형태에 대한 분석을 증명한 바가 있다. 북방의 보요 문화는 대월지로 대표되는 서아시아의 두식문화와 관련이 있고 실크로드를 통해 북방민족 유목생활지역과 한반도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동수부인 이마의 장식물은 화전(花鈿)이 아니라 고계를 고정하는 둘레장식에 늘어진 형태이다.<Fig.2>


<Fig.2> 
Mrs. Dongsoo's Headdress

(Cultural Assets and Sites in North Korea, p.39)



위진시기에는 고계의 여러 가지 영식이 보여진다.『진서·오행지(晉書·五行志)』에 진나라 부인들은 머리를 빗질하여 비단으로 바짝 머리를 묶었는데 힐자계(擷子髻)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궁중에서 시작되어 후에 천하에서 모두 그것을 본받았다. 이 머리양식은 고계 양쪽에 환상계를 만들고 두 가닥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것이 특징이다. 한진(漢晉)시기 사람들은 흔히 물건에 달려 있는 작은 것을 자(子)라고 불렀는데, 당시 큰 방울에 아홉 개의 작은 방울이 장식된 물건을 구자령(九子鈴)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이치였다. 문헌자료 이외에 서진(西晉)의 고고학 자료에서도 힐자계의 여성 이미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간보(干寶)12)의『수신기(搜神記)』에 힐자계는 복요(服妖)라 하였으니, 진나라 말년에 회제(懷帝)와 민제(愍帝)가 흉노(匈奴)에 잡혀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후 '힐자계'가 동진십육국(東晉十六國)의 고고학 자료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전히 여성들의 힐자계 열정이 식지 않자 변형된 십자계(十字髻)가 등장하여 더욱 과장이 심하여졌다. 반면 동수부인은 여전히 '힐자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시기의 한반도는 중원문화의 융합에 비하여 한(漢)문화의 잔재가 그대로 보인다 할 수 있다.

동수부인의 살쩍머리 부분의 나뭇가지 모양에 대하여 정준영은 '사홍(斜紅)'으로 보았으나 자세히 관찰시 살쩍 부분외에 오른쪽머리 뒤에도 보이므로, 얼굴에 그려진 그림은 아니고 머리에 꽂는 장식으로 보았다. 다만, 형태와 위치가 문헌기록상의 비녀사용 경우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또 예복제도의 연구에서 흑 중양절13)에 수유 <Fig.3>를 꽂던 풍습을 연상시킨다고 하였다.


<Fig.3> 
cornus officinalis

(https://b2b.hc360.com/supplyself/412404936.html)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척부인(戚夫人) 9월9일에 수유열매를 꽂고 쑥떡을 먹고 국화주를 마시면 장수하게 한다.『후한서·방술열전八十二』에 오수유의 성숙과 음략 9월9일은 도교에서 쌍극은 극양이다. 사물의 발전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反轉)한다.14)하여 그날의 나타난 사물(邪物)인 성숙한 오수유가 사물을 제어할 수 있다. 그래서 오수유는 벽사옹(辟邪翁)이라고도 하였다. 오수유는 붉은 색, 술 냄새 및 높은 소리를 무서워하여 여자들 머리에 붉은수유를 꽂고 남자들은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풍습이 생겼다. 이 날은 여아절(女兒節)이라고 불려15). 여인들에게도 모처럼의 자유로운 유연(遊宴)의 시간이었다. 이상과 같이 동수부인의 머리장식을 보면 부인들의 중양유연뿐만 아니라 도교문화에서 중양이 장수가 의의가 있었으리라 보인다. 한대 묘실벽화에는 성인과 열녀의 교화내용보다는, 위진시기에 벽화내용이 실제 생활내용이 많았으리라 보인다. 이 중양유연도(重陽遊宴圖) 의미는 첫째는 동수부인이 친구를 만나러 가려는 순간이고 둘째는 부부의 장수와 영생에 대한 동경을 의미하였다고 보인다.

2. 동수부인의 의복

복장은 현실에 있어 사회성과 장식성을 갖추어야 비로서 완전한 효능을 갖추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먼저 당시의 계절과 기후의 특징을 밝혀야 비로서 의복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기상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210~560년은 지구가 제2차 한냉기(寒冷期)에 들어간 시기이다. 이러한 천재지변의 양상을 참고로 한다면, 동수 및 부인 화상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어깨에 걸쳐져 있는 점문양의 의물이다.

1) 점 문양과 의복의 정체

동수묘에 보이는 부인의 복식은, 머리에 수유를 꽂고, 여기에 수유문양이 있는 상의를 입고 있다. 일반적으로 벽화복식에 관한 선행 연구는, 인물의 겉옷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중의(중단)나 내의(속옷)의 형태에 관하여는 거의 언급이 없다. 아마도 가장 바깥부분의 의복이 반비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문양으로 본다면, 수호수(垂胡袖)16)의 의(衣)와 포(袍), 그리고 하 반신 옷인 치마의 문양은 매우 정성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당시대 회화의 특징은 확실하게 문양의 윤곽을 표현하고 있어, 이미 출토된 漢代 비단직물의 수유문양과 매우 흡사하다. 수유문은 한대 비단직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직물문양이다.『업중기(邺中記)』중의 석호(石虎)17)는 직금 위에 등고(登高), 명광(明光)은 문자문이며, 수유(茱萸), 교룡(交龍)등은 문양의 명칭이라고 한다. 종교와 민속의 관점에서는 영지(靈芝), 부상(扶桑), 수유(茱萸), 연화(蓮花), 인동(忍冬) 등으로 주제는 승선(升仙) 즉 신선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대부터 위진시기 출토직물에서, 수유문은 3종류의 제작방법으로 직물에 이용되었는데, 즉 자수, 직조, 인화방법이 있다. 이와 같은 문양의 출토물은 당시 중원만이 아니라 남방문화권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마왕퇴에서 자수법을 이용한 수유문 견편이 출토되었고, 신강민풍의 후한 합장묘에서 남자 바지 각대 위에 수유문의 자수편과, 하북 만성 중산정왕 유승과 처자묘에서 출토된 자수견의 문양도 매우 섬세하여, 전자병(田自秉)은『중국공예미술사(中國工藝美術史)』에서 이상의 형태를 모두 수유문 범주에 넣고 있다. <Fig.4(1\2)>(조도)



Dongsoo's wife

(Cultural Assets and Sites in North Korea, p.39)




<Fig.4.1> 
Embroidery unearthed from No.1 Han Tomb in Mawangdui,

(http://61.187.53.122/collection.aspx?id=1377&lang=zh-CN)




<Fig.4.2> 
Men's trousers embroidered edge at Minfeng Eastern Han Tomb.

(http://blog.sina.com.cn/s/blog_5958e72e01019mln.htm)



즉 4종류의 특징을 갖는 직물문양을 수유문이라 통칭하고 있다. ①여의두 및 서로 연결된 유사 콩깍지의 형상 ②만곡되어 배치된 줄기문과 잎사귀 ③꽃봉오리 ④교차형으로 된 꽃수술 등 4종류이다. 동수부인 반비상의의 문양은 그림과 같이 매우 섬세하다.

다음 안악3호묘 동수부인 의복은 당시의 기후 특징과 묘지명에 10월 무자 삭26일 계축(十月戊子朔廿六日 癸丑)으로 시간을 추측해 보면, 이 의복은 구유(裘襦)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경·소아·도인사(詩經·小雅·都人士)』피도인사(彼都人士), 호구황황(狐裘黄黄)18)을 보면 주평왕(周平王) 천도 후에 동주의 귀족들이 과거 도읍에 들어올 때는 호구(여우 털)를 입어 온통 황색 갖옷이었다. 고 하니, 당시 낙양 귀족들이 모피를 입었고, 갖옷은 털이 바깥으로 향하도록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논어·향당(論語·鄉黨)』의 치의(緇衣)에는 고구(羔裘), 소의(素衣)에는 예구(麑裘), 황의(黄衣)에는 호구를 입었다. 갖옷은 손님을 맞을 때 홑옷인 석의(裼衣)를 털옷 위에 걸치지 않으면 불경한 것으로 간주하였다.19) 그리고 석의(裼衣)와 털옷의 색은 서로 어울리도록 착용하였다. <조후음란(趙後淫乱)>의 경안세(庆安世)는 가벼운 경사리(輕丝履)를 신고 자주색 제구(綈裘)를 입고서 조후와 거처를 함께 하였다는 기록에서 자주색 '제구'가 석의의 겉에 입는 구의 형태로 설명할 수 있다.이것은 안악3호묘 동수부인 의복을 그린 화법과 비슷한 특징으로 보인다.

한나라 시기에 수굴(繡镼)”이라는 반비의 다른 명칭이 있다. 반비를 호복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 북방민족 문화의 연용이라고 한다.『후한서 광무제기』에 지나가는 여러 장수들이 여인의 제우(諸于) 즉 부인들의 관대한 상의와, 수굴(繡镼) 즉 수를 놓은 짧은 소매의 옷을 걸친 것을 보고서 웃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어떤 사람은 두려워 숨기도 하였다.20)『광운·인물(廣韻·人物)』에는 굴은 의(衣)의 단의이고,.『정자통·장부(正字通·長部)』에 굴(镼)은 부인이 입는 반비복이다. 하였으니 동수 부인화상 위에 자수 반비유는 기후적인 원인으로 구피(裘皮)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보인다.

2) 깃과 수구가 옅은 색이고 소매에 연을 두른 의복

동수부인화상 위에 자수 반비유는 기후적인 원인으로 구피로 만들었을 것이라 하면, 그 위를 자수직물로 덮어, 부인의 수굴은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부인화상 중, 반비 유 밑의 복식이 불분명한 것은, 앉아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건의 포제였는지, 유군제(襦裙製)였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황능복(黄能馥)은 이를 『중국복장사(中國服裝史)』에서 모두 부인 무릎에 그려진 규각(圭角)과 섬소(䊹髾)에 의거하여, 규의(袿衣) 혹은 잡거수염(雜裾垂髾)라고 주장하였으나. 포제 혹은 유군제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A. 심의포제 (深衣袍制)

『중화고금(中華古今)』에 포(袍)는 유우씨(有虞氏)순(舜)때부터 있었다. 그래서 『국어(國語)』에서 포를 입고 조정에서 왕을 알현하였다 하고『석명・석의복(釋名・釋衣服)』에 포는 장부가 입는 것으로 길이가 발등에 이른다. 포는 苞(내의,속옷)이다. 부인은 강색으로 만들고, 衣裳上下가 서로 연속되고 4곳에 가장자리(연)을 두른 것도 포라 한다.

그러나 왕조 부단한 전환으로 동주부터 漢代에 이르러 포제에 변화가 생긴다. 진시황(秦始皇)때 3품관 이상은 녹포심의를 입고 서인은 백포를 입었는데, 모두 견으로 만들었다. 이는 진대 조복은 포가 심의제로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기의 포제와 심의제(深衣製)는 교차하여 출현한다. 우순시기에 조복으로서 포가 출현하였는데, 진대에 이르러 서민(庶民)복이 되었다. 고관 귀족은 심의포로 바꾸어 입었다. 공씨정의(孔氏正義)에서 말하길 심의는 상의하상이 연속된 것이 아니고, 의와 상을 연철하여 만들며, 몸을 깊숙이 감싼다는 의미에서 '심의'라고 부른다. 한나라 건립 후, 복제를 개혁할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된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았다라고 하는데, 오히려 이 시대는 남북문화의 교차시기여서 그대로 위진시기에 영향을 준다.

또한 한나라 복식은 초(楚)문화의 영향도 소홀히 할 수 없어, 고고학계에서는 이 시기의 포제를 “초한(楚漢)심의”라고 한다.21)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심의는 좌우금의 여밈이 매우 좁고, 목둘레가 낮아, 속에 리의를 입고, 의복의 도련은 밖으로 노출되어, 삼중의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징이 동시에 동수부부의 복제 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심의의 최대 특징의 하나는 상의와 하상이 연속된 것이고, 둘째는 속임구변(續衽钩边)22)이다. 나아가 동주 및 전한시기에 관리의 등급과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심의를 입었다. 이후 출토된 이 시기의 목용이나 백화(帛畵)인물의 복식도 이것을 증명해 준다. 이러한 복식체계를 원건평(袁建平)의 『중국고대복식』중에 심의연구는 이것을 심의포라 칭하였다. 성별에 구분 없다고 했으나, 곡거심의가 유행했던 동주 및 서한시기에, 남자의 곡거는 단지 한 층으로 경사지게 덮었으며, 여자의 곡거는 도련의 감는 방법이 더욱 복잡하였다. 심의 밑에 늘이는 첨각형 장식물은, 전한 여자의 곡거가 변하여 뒷도련 양측이 연미상으로 변한다. 그리하여『한서·강충전(江充傳)』에 강충은 사곡단의(纱縠襌衣), 곡거식포의 후에 교수(交輸)로 만든 제비의 꼬리모양처럼 생긴 조각이다. 강충이 말한 복식의 묘사 중에 곡거는 한무제 시기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이미 남성의 정치무대에서 쇠퇴하였다. 강충이 입은 곡거 뒤에 교수(交輸)를 늘이는 것은 조복이 아니고, 일부 여복의 장식이다. 이와 같은 복식의 장식은 후에 무고의 화23)와 관련이 있어, 교수는 의복의 봉재 법으로, 고규(贾逵)가 말하길 ‘의(衣)의 규(圭)는 소임(蘇林, 한말위초)이 말하길 부인의 예복이다. 교수는 신부(新婦)의 포에 규 증(繒)을 넓은 부분이 밑에 있고, 좁은 부분이 위에 있는 규각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러한 봉재법은 한말 위초에 규복을 만드는 법으로 이것으로부터 교수 봉재법이 연미 규각을 출현시켰음을 추론할 수 있다. 여자 상복 규복제도는 문헌자료나 고고학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러한 여자 상복은 서로 다른 시기에 명칭이 변화하여 규의(袿衣), 규포(袿袍), 규촉(袿襡) 등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본문에서도 규복제도라고 통칭하기로 한다.

규복의 양식은 도템 숭배와 관계가 있다. 은상시기에는 현조(玄鳥)를 모방하여, 복장위에 연미를 가식하였다. 『시경・현조』에 천명현조(天命玄鳥), 강이생상(降而生商). 걸(契)의 어머니는 제비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보고 걸을 낳게 되었다.24) 그래서 화하족 부녀들은 고매(高禖)25)신께 제사를 올려 자손을 기원한다. 춘분날, 제비가 돌아오면 천자는 친히 후궁비빈을 대동하고 고매에 제사하여 활과 화살을 봉납하여 자손을 얻도록 기도한다. 여기서부터 여자 예복제도의 기술이 시작된다. 『후한서·예복지』에 황후 이하로 모두 고려규삼(古丽袿襂)와 규연(闺=圭,緣)장식한 예복을 입을 수 없다. 건무(建武)영평(永平) 연간에는 이를 금하여 사라졌다 하였으니, 삼(襂)자와 衫은 같의 의미이다.『중화고금주』에 삼자(衫子) 설명에 황제(黃帝)부터 윗옷과 아래옷을 만들었는데, 여인에게는 하나를 존숭한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윗옷과 아래옷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하니 여자의 심의제는 삼자에서 시작 되어, 바꾸어 말하자면 여자의 심의의 원래 형은 포제가 아니라 장유제이다.

규복(袿服)은 장유제 규의 밑에 심의제 상 또한 포제 의복이 노출되었다. 또한 군제의 가능성도 있다.『송서(宋書·志·第八·礼五)』에 황후의 알묘복은 규촉(袿襡)대의, 위의(褘衣)로 부르고.26)『자림(字林)』에 규는 부인의 상의(예복), 촉은 연유의(連腰衣)다. 촉(襡)은 포보다 짧다. 하여 단의(短衣)로 풀이하였다. 촉은 유보다 길어 장유(长襦)라 하였다.27) 그래서 최초에 삼자(衫子)는 위진시기에 촉(襡)으로 변형되었고 '규의'도 '규촉'으로 바뀌었다. 후한시기에 몸을 감싸는 곡거 심의포가 행동에 불편하다고 하여, 직거(直袪)심의포로 대체되었지만, 단지 규각은 사라지지 않았고, 게다가 남성 복제중에서 특히 무관의 복제로 대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규포(袿袍)-제우(諸于)가 있었다.『한서·원후전(元后傳)』에 정군28)이 태자 근처에 앉았는데, 강연(絳緣)이 있는 제우를 입었다. 여기서 제우는 길이가 긴 외의이며, 선명한 장식이 있었는데, 왕정군이 입은 제우를 태자가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우는 정례 모임에 입는 여자의 정복이었다. 안(顔)씨가 말하길 제우는 즉 규의류이다. 그리하여 왕정군이 제우를 입고 천자를 만났다는 것은, 제우가 일종의 규복제의 예복과 유사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漢代의 규형과 비슷한 의복의 장식물이 출토되었다. 신강루란(新疆樓蘭)03LE 북벽화묘에서 출토되었는데 백색 비단제로 4편의 삼각형은, 양편과 양편의 사이가 병봉(패치워크) 되고, 황갈색 견으로 가장자리에 장식되어 있으며, 매 삼각형 중앙에 심남색 비단 끈을 달고, 견연(絹緣)과 견조(絹條)에 원형금박을 하였고, 4편의 삼각형은 크기가 길이 79cm, 넓이20cm이다.<Fig.5>같은 묘에서 다른 삼각형 수식물이 있는 포복이 출토되었는데 <Fig.6> 고고학적인 연대는 후한에서 위진에 이른다고 하여, 출토 삼각형 의식의 사용을 실증할 수 있겠다. 이외, 漢代 기남화상석(沂南畫像石), 무악군화상석(武樂君畫像石) 중의 인물의 목둘레, 측금(側襟) 부분에 삼각형 비슷한 장식물이 있다. 또한 출토된 삼각형 실물이 있어, 한 시대에 삼각형 의식(衣飾)으로 포복을 장식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사료 기록을 종합해 보면, 삼각형 형식은 당시 일종의 정형의 복장양식이라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 특수한 연식이 있는 것은, 문헌의 규의와 서로 부합되어, 남자도 입을 수 있어, 바로 이것은 한 대에 일종의 직거심의(直裾深衣)제 예복인 제우라 할 수 있다. 이 규의와 비슷한 의복은 위진시기에 이르러도 볼 수 있다.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285굴 북벽, 선비 남자의 공양인 화상에서 볼 수 있다.<Fig.7>. 그리하여 후한에서 서위에 이르는 제우는 일종의 포제 예복의 규식으로, 규포라는 명칭에 더욱 가깝다. 이것은 바로 북방민족의 복제를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삼각형 포제를 '제우'라고 추론한다.


<Fig.5> 
A triangular ornament for clothing unearthed

(Zhao, F.,2018, p. 102)




<Fig.6> 
A robe with triangular decoration

(Zhao, F.,2018, p. 102)




<Fig.7> 
The MOGAO Grottoes cave No.285

(http://www.360doc.com/content/18/0919/00/33885274_787816682.shtml)



'규포'는 '포복'이다. 『중국고대의관사전』에 해석하기를 규포는 부녀의 포복이다. 이외 『송서(宋書)』에 3품 이하는 폐결, 작음(爵欽), 가짜 진주와 비취를 장식한 루패(縷佩), 잡색의, 모든 수불, 규포를 입을 수 있었다.2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진시기, 규복제도는 두 가지 형식으로 보이는데, 규촉과 규포이나, 규촉은 규포보다 높은 품급이 착용하였다. 류복제도는 가무기(歌舞伎)의 복제 중에 등장한다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부의(傅毅)의〔무부(舞賦)〕에 정녀(鄭女)30)출입……화규비소(華袿飛髾))라 하여 '잡거수소(雜裾垂髾)'는 동주시기의 '화규비소'를 당시의 '잡거수소'라 하었다. 상복으로는 동일하지만 이곳의 정녀는 일반적 무희가 아니고, 귀녀이다. 그리하여 이 양식도 상행하효(上行下效)의 하향전파의 유행이다. 이후 출토된 위진시대 악용과 한나라 시대 화상석 중의 무자(舞者)복식 표현은 일종의 요식에 상징성이 있는 규의이다.31)『이아·석기(爾雅·釋器)』에 의류(衣裗)는 동진·곽박주(郭璞注)에 옷이 떨어진 것을 예(䘽)라 하였다. 제(齐)나라 사람은 련(攣)이라 한다. 송·형병소(刑昺疏)는 어떤 사람은 규의(袿衣)의 꾸밈 이라 하였다. 사마표(司馬彪)는 섬(襳)은, 규의 장식이다. 수는 연미(燕尾)다.” 이선(李善)32)은 섬과 연미는 다 부녀의 규의의 장식물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규의의 수식은 대개 휘날리는 일종의 장대(長帶)이다. 그리하여 규의는 일종의 연신(連身)장포 즉 긴 외투형으로, 채색 직물을 이용하여, 위는 넓고 밑은 좁은 삼각형으로 비단을 사용하여 장식하는 것으로, 허리 주위를 빙빙 돌려 내리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 같은 장식편을 규각이며 부르는데 실재 용도는 없고, 단지 첩첩이 접어 둘러 시각적 장식효과를 낸 것이다. 이들은 문학작품 중에 표현된 규각, 섬소로 모두 신선의 복식 중에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리하여 '화규비소'라는 규복은 무의이며 가무기가 입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신분이 고귀하거나 무도 중 인물신분이 고귀한 것을 표현하여, 포제 혹은 장유제로 사용하는 화규비소를 말하는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과 같이, 규촉, 규포 모두 부인의복의 그 차이가 크다. 전자의 규각은 장유나 포위에 장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인의 규각은 폐슬에 매어단 것으로 보여 규복이란 제도는 위진시기에 변형이 또 한번 일어난다. 이러한 변형은 사회환경 변화와 긴밀하여, 한말 해마다 전란이 일어나 자원이 부족된 결과가 곡거형제의 복식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여자 의복은 포류가 섬세하게 재단을 거쳐 봉재되기 때문에, 소재를 확보하는데 더욱 비용이 많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혼란한 시대에, 예전 제도를 고수하고, 사회상황에 순응하는 것은 매우 번잡하여 임기응변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산서 대동 북위태화8년(484) 사마금용부부 합장묘 출토의 칠화병풍<열녀도>중에 ‘노사춘강가녀도(鲁師春姜嫁女圖)’ 연거(燕居)상태에 폐슬을 제외하면 상복(常服)을 입은 모습이다.33) 한성제(漢成帝)와 반첩여(班婕妤)의 출행의 반첩여는 '규각섬수'장식의 페슬을 두르고 있다. 천자의 예복 착용도에서도 규각섬소의 폐슬을 볼 수 있다.

이로서 더욱 분명하여지는 것은 , 고구려의 안악으로 도망간 동수는 마땅히 사치 낭비의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수부인 의복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한 시대적 배경은, 북방민족의 북위가 건립되고, 중원정권의 통일이라는 정치적 안정기에 들어가, 동수가 처한 상황도 정상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인의 연거복은 폐슬을 생략하고, 반비와 직거심의포(直裾深衣袍)를 착용하였을 것이다.

직거심의(直裾深衣)포에 대하여 고고 출토물에서 2건을 볼 수 있다. 1972년 호남 장사마왕퇴 1호 한묘출토의 강홍사로 만든 나염된 속임직거면 심의포가 있다. 심의포의 칫수(단위:cm)는 옷길이130 소매길이236 소매나비41 수구나비30 허리나비48 도련나비둘레57 깃선나비29 도련연식나비38 이며 교령, 우임, 수호수, 직거, 소매부리 거(袪)가 있는 형식이며, 속임과 도련 연식의 재질이 같다. 1995년 중,일 니야(尼雅)고고문물대가 신강 화전(和田)지구에서 발굴한 품목중에 직거심의로, 총길이95, 소매길이227 수구나비14 허리나비53 금연(錦緣)나비10.8-11.5 교령좌임이다. 이 직거포의 우금은 좌금보다 넓고, 도련 양측에 개차가 있다. 발견된 두 건의 직거심의포의 옷길이, 수구, 여밈 방향 및 도련의 연식, 개차 등 각 방면에서 살펴보면 초복과 북방민족 복제와 다르다. 2건 모두 출토되었을 당시 안깃이 좌측으로, 겉깃은 우측으로 향하게 여미고, 나팔모양의 도련이 특징으로, 직거심의포제의 특징을 실하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곡거와 직거심의포는 후세 심의제가 발전하는 기초가 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도상에서 보는 동수부인의 직거심의포는, 옷길이는 발등에 이르며, 양 도련의 개차에 관하여는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동수부인포는 초한심의포의 특징과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도련을 연식으로 장식한 것은 북방문화권의 포의 특징과 매우 흡사하다. 이로서 남북의 복식제도는 동수부인의 벽화인물 속에서 융합되어 그 형태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북방민족은 이미 중원정권의 문화를 추종해가면서도, 자민족 생활양식의 민족 특색은 절대로 잃지 않았다. 한편 동수부인은 혹시 선비족이었을까? 하고 의문도 품어본다.

B. 상의하상—유군(襦裙)제

유군은 백적족에서 최초로 유행이 시작되었다. 춘추전국시기 백적족은 민족정권인 중산국을 건립하였는데, 나중에 조무령왕에게 멸망되었다. 그러나 그 복식을 바로 조무령왕이 모방하게 되어 유명한 호복기사로 복제변혁의 계기가 되었다. 隋唐이전부터 유(襦)의 양식이 있어, 지금까지 많은 변증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진 시대에 여성의 유군의 형태를 묘사한 문학작품을 다수 찾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한진시기 문학작품 중 유의 묘사를 찾아 동수 부인벽화 중의 의복 양식은 유군제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 월왕은 독비(犢鼻)를 입고, 속발하여 두건을 둘렀다. 부인은 가장자리 연장식이 없는 치마와 좌측으로 여미는 유를 입었다. 여기서 월왕은 죄인이기 때문에 부인 유의 형태를 묘사하였으나, 춘추시기 유제도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즉 유는 대부분 착수, 좌임, 교령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의 옷은 아니었다. 단주(段注)에 유(襦)는 오늘날 襖의 길이가 짧아 진 것이다. 『급취편주(急就篇注)』에서 유의 장단에 대하여, 옷 길이에 따라 나눌 수 있다. 즉 장유(長襦), 단유(短襦), 요유(腰襦)이며, 무릎에 이르면 장유, 무릎 위에서 허리선 이하면 단유, 허리와 나란하면 요유라 말할 수 있었다.

漢代 악부시(樂府詩)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 속에서 여자복식에 대한 묘사를 찾아 볼 수 있다. 부인이 입은 수요유는 자수문양이 매우 아름다웠다. 허리선에 이르는 수요유는 자수 도안이 있었다. 위유(葳蕤)는 가지가 무성한 초목을 묘사한 것이다. 이 요군의 자수문양이 매우 복잡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띄었다고 한다. 맥상상(陌上桑)중 진라부(秦羅敷)가 입은 하군은 담황색비단, 상유는 자색비단이라 한다. 이곳의 진씨 라부는 제후이며34), 나중에 조왕가령35) 왕인의 처자가 된다. 일반인의 의복은 마(麻)로 만들지만, 라부는 비단 의군을 입었다. 비단 중 기(綺)는 화문을 넣은 사직품으로 당시 궁중 귀족 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귀중한 색인 자색유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일반 가정의 여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부유한 집안의 여자 평상복은 포제가 아니고, 유군제도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한진 시기 예복제도에 유군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위진 시기 복식 특징을 살펴보면, 중원정권 남하 후의 복제가 변한 것이라 생각된다. 고개지 그림의 치마 안에 유를 넣어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교령우임의 인물복식은, 안악3호묘 동수부인의 복제특징이며, 동시기의 감신총 벽화의 부분 중에도 보인다.

후한 말 중원왕조의 남천 초기의 동진 벽화중에 인물복식의 소매양식은 다양하다. <Fig.8>에서 보는 바와 같이 5종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춘추 전국시기의 마산(馬山)묘 출토의 제3종 소매 모양은 동수부인 반비 밑으로 노출된 소매형태와 비슷하다. 이러한 소매 형태는 초묘 중 포복에도 나타나지만, 남양 漢代 화상석, 낙양 주촌(朱村) 후한 말 묘 벽화 내지 평양권 대동강 유역의 동시기의 감신총 벽화분 등 인물화상 중에, 수호수(垂胡袖)양식으로 보이는 유 혹은 포가 보인다. 이들은 특히 묘주인, 부인과 그들의 근시 및 빈객과 연주자들의 의복에 나타난다. 이러한 소매형태는 한 묘실 벽화 상의 포제이후 서진시기 북방지구의 유제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단지 묘실 주인과 관계가 긴밀한 인물에 한정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소매형태는 동진후기에 북방지구에서 사용하고, 바로 뒤 남북조 시기의 묘실벽화에서 중요인물의 소매형태는 모두 광수(廣袖)로 변한다. 북위 사마금룡묘 출토의 병풍인물화상 중에 여전히 이러한 소매모양을 볼 수 있는데 확실히 유제(襦制) 위에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유군제를 입고 있는 귀부녀는 일종의 연거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이미 살펴 본 여사잠도 중에서 머리를 단장시키고 있는 여자 머리에 보요를 얹고 있어, 시녀보다는 등급이 다른 후비로 해석할 수 있어, 당시 후비의 복제는 두 종류가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Fig.8> 
Shen-i Sleeve Evolution

(Progress in Textile Science & Technology, 2017, pp.49-50.)



『천중기(天中記)』에 석명에 군을 하상이라 한다. 군의 폭을 연접하여 횡으로 이은 것을 밑에 입었다. 연군은 군에 가장자리 연식을 한 것이고, 군속에 의를 넣어 입었다. 예전에는 군은 밖으로 입지 않고 모두 의로 덮어 입었다. 한대(漢代) 사회가 더욱 혼란을 겪었던 이유는, 한랭한 기후에 원인에 있었다. 그리하여 한말에 비교적 북방과 가까운 벽화묘의 여성들은 장유를 입은 후에, 포를 덧입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해마다 계속되는 전쟁은 경제적 긴장을 초래하여, 당시 여성의 예복은 당연히 심의포제였다. 동수가 고구려로 도망 후에 부인도 외면이 화려한 반비를 입고 예복제도와 일치하지 않는 유군제를 입은 것이다. 연회나 제사에 참가할 때 단지 예제에 맞는 폐슬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의 군은 신분에 합당한 길이로서, 예제에 어긋나지는 않는 다고 생각한다.

상(裳)은 『설문·의부(說文·衣部)』에 상은 常으로, 하체를 감싸는 복장이며, 남녀 존비의 구분없이 모두 입을 수 있다. 裳 이외에, 군(帬)도 하체에 입는 군자를 지칭하는데, 여러 폭의 천을 서로 연접하여 만든다. 북경대학 소장의 진나라 목간 문서 『제의(制衣)』중에 진한시기 군상의 재단과 바느질 방법에 대한 기록이 있어, 당시에 군상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제의』중에서, 군은 대사(大衺), 중사(中衺), 소사(少衺)로 나눈다. '衺'는 '邪'라고도 한다. 『설문·의부』단옥재 주에 “사(衺)는 오늘날 '邪'로도 쓴다." 또 모든 의(衣)와 상(裳)은 사(邪)라는 개념의 재단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 연폭'幅'을 단(褍)이라 풀이한다. 그러면 군에서의 사라고 하는 것은 교유의 재단방법과 관련이 있다, 즉 사는 교유(交輸)다. 교유(交輸)는 곡거심의포제의 전면에 '연미'로 형태를 나타난 재봉방식이다. 이후 제군, 제유, 제고(袴)도 모두 이러한 재봉법에 따른다. 형주박물관(荊州博物館)의 팽호(彭浩)연구원은 사재(斜裁)라고 칭한다.36)

지금까지 기록이 있는 진한시기의 3종 치마는 사재(斜裁)의 재단방법을 사용한다. 대사는 4폭, 종사와 소사는 3폭을 잇는다. 그래도 잇은 방법이 달라서 치마형태가 “요선강곡선(腰线强曲线)”과 요선약곡선(腰线弱曲线) 두 종류 양식으로 표현되어 진다. 요선강곡선의 도련은 자연히 물결주름문을 보이고, 약곡선형태는 통치마와 비슷하다. 동수부인 벽화의 하반신에 복식의 도련에서 물결주름문을 볼 수 있다. 동수부인 외상(外裳) 밑에 길게 나온 한줄은 ‘요선강곡선’의 군을 입은 것 같지만 부인의 외상은 주름을 거의 볼 수 없다. 『제의』중에서 설명하고 있는 3종류의 군제는 입는 방법이 다르지만, 함께 입는 옷들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단지 허리 치수37)의 대소를 두고 말하고 있으며, 아울러 위진시기에 상검하풍(上儉下豐)의 유행이 출현한다. 위진시기 귀부녀들은 바닥에 끌리는 장군을 입었다. 『진동관구사(晉東官舊事)』기록에 황태자의 납비(納妃) 시에 여자의 군장(裙裝)은 “강사복군(絳紗複裙), 강벽결능복군(絳碧結複裙), 단벽사문쌍군(單碧紗雙裙), 자벽사문쌍군(紫碧紗雙裙), 자벽사문수영쌍군(紫碧紗紋繡纓雙裙), 자벽사곡쌍군(紫碧紗穀雙裙), 단벽배문라군(單碧杯紋羅裙)”이라는 치마의 종류를 볼 수 있다. 이 문헌 중에 주목할 것은, 이 시기의 군은 두 가지 색상의 수식을 갖는 것으로, 이것은 동수 부인의 상제(裳制)중에도 볼 수 있는데, 부인 시녀의 상제 상에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3) 동수부인의 의복 장식

안악3호분에서 동수부인은 소매 밑으로 반타원형 연식이 있는 의물을 늘이고 있는데, 끝단에 술여러줄의 술을 드리우고 있다. 이것은 또한 반비유의 색상과 비슷하나 그 문양이 다른 것으로 보아 반비의 재질과 다른 가죽의 폐슬(蔽膝)이라 생각된다. 우선 폐슬은 환경과 사회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명칭도 매우 많다. 필(韠), 불(帗)、시(市)、갑(帢)、위(袆)、첨(襜)、발(袚) 등이 있다. 폐슬은 근현대 학자들이 그 기능성으로 보통 사용하는 관용사이다.

우선 고시대의 예복 중 필은 가죽으로 만든 폐슬이다. 고대에 왕을 알현하거나 제사 시에 의상의 앞면을 가렸는데, 차폐의 기능에서 폐슬이라 명명된 것이다. 예복 중에는 폐슬의 재질은 당연히 가죽으로 만들었다. 『한서·왕망전(汉書·王莽传)』38)에 왕망은 모친의 병으로 공경열후의 문병을 받았다. 왕망의 부인은 바닥을 끌지 않는 포를 입고 폐슬만 두르고 방문객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귀부인의 평상시 복제는 바닥에 끌리는 군상에,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폐슬을 입는 것이었다. 당시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폐슬을 사용하였는데 그 재질과 두르는 위치가 다르고, 모두 같지 않은 표현양식이 있었다. 안악3호분과 동시기의 감신총 전실 서벽 북측에 그려진 여인의 페슬 착용을 보면, 폐슬은 중원지구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리대(褵帶)는 동수부인의 벽화복식 특징 중, 연구자들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은 장식물이 있다. 바로 부인 어깨 뒤로 보이는 한 쌍의 규각과 비슷한 섬소인데, 따라서는 익(翼)이라고도 부른다. 동수부인의 어깨와 등 위치에 피백과 유사하게 휘날리는 섬소는 양팔과 앞가슴위치에 보이지 않아, 피백(披帛)으로 볼 수 없고,『시경·빈풍·동산』에 친결기리 구십기의(亲结其缡, 九十其儀)39)라 있는데, 리대는 후대에 가서, 동수부인 벽화중에 보이는 금리(衿褵)로 바뀌어, 단지 목둘레의 장식물로 남았다. 漢代 유향의『열녀전·제효맹희(列女傳·齊孝孟姬)』에서 보면 “맹희40)의 어머니는 방 안에서 이별의 예를 행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조심하고 또 경계해야 하느니라. 궁중의 일을 어기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41) 이선(李善)은 주(注)에서 금리(衿褵)는 목에 매어 장식하는 리(褵)라고 하였다. 이것은 결혼 당일, 모친이 신부의 목에 매어주는 끈 형태의 섬소이며 리대라 하여, 자신의 딸이 결혼하여 부인의 덕을 지키고, 사리를 잘 판단하여, 예법에 어긋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 리대는 여자의 기혼을 상징하여, 혼례복 즉 예복제도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리대는 주나라 복식제도 중, 여자예복 장식에 하나의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동수부인 벽화 상에서 익(翼)의 장식과 유사하여, 문헌 중에 찾아본다면 리대일 것으로 추론된다. 이는 묘주의 정신세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속세를 버리고 신선이 된다는 우화승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동수부인 의복의 이러한 특징은, 초한심의제의 포가 위진시기에 쇠퇴하여, 중원정권하에서는 활동에 편리하고, 양식이 다변해진 유군제로 변화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안악3호묘 동수부인벽화는 부인의 겨드랑 밑과 앞가슴에 옅은 색상의 띠 모양의 장식물을 매고 있다. 명치 부위에 구슬같은 홍색의 끈 모양이 있다. 중원귀족들의 폐슬은 대대와 함께 겨드랑 밑에서 묶고 있음으로, 동수부인의 복제도 당시 귀족 여성의 예복제도에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정리하면 규복제는 서로 다른 시기에 변형을 거친 결과, 부인의 예복제도 구성은 반비, 직거심의포 및 폐슬의 조합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동수부인 출신은 동수와 같이 선비화한 한족이 아니고, 순수한 선비족이라는 추론을 조심스럽게 내려 본다.

부인의 귀걸이에 관하여 살펴보면 이를 더욱 확증한다고 볼 수 있다. 『석명(釋名)』에 구슬을 꿰어 귀에 늘이는 것을 당이라 하는데, 본래 만이에서 시작된 것으로, 지금 중국인이 그것을 모방하고 있다.『장자·덕충부(莊子·德充符)』에 위천자지제어(天子之諸御) 부조전 불천이(不爪翦, 不穿耳)의 의미는 천자의 후궁이 된 여자들은 손톱을 깍지 않고 귀를 뚫지 않는다고 하였고,『효경주소(孝經注疏)』중에 신체와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이것들은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라 하였다. 이리하여 동수는 유학사상을 준수하는 선비여서, 만일 부인이 한족이었다면 당연히 유학의 덕행을 준수하여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료가 있다. 반비유(半臂襦) 밑으로 노출된 소매의 문양이 하상의 문양과 같지 않아, 다른 옷의 종류로 보이므로, 동수부인 의상은 상의하상으로 분리된 유군(襦裙)양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원문화의 여자예복은 모두 심의제(深衣制)와 포제(袍制)라고 여복지 등에서도 분명한 기록이 있다. 요나라의 남북양반제도(南北兩班制度)42) 또한 북방민족 정권이 중원문화 중에 침투하여 점차 주요 복식제도의 형성을 이루어 온 것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IV. 시녀 복식

동수부인상을 주제로 하는 서측실 남벽 벽화 중에 시녀 3명이 있다. 동수부인 좌 후방의 2명 시녀 중, 1명은 읍수(揖手)하고, 다른 1명은 손에 부채43)를 들고 있다. 우 전방 시녀는 손에 향로를 들고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인데, 이곳에 방금 도착하여 아직 설자리를 찾지 못한 것 같다. 부인 좌 후방의 2명 시녀는 동수부인과 동일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어, 동수부인의 신분과 차이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전방의 시녀 머리모양은 완전히 달라, 이의 명칭에 대하여는 현재에도 확실치 않다. 본 연구에서는 이런 종류의 머리모양은 주천 정가갑(丁家閘)5호묘 벽화 중의 악무예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머리모양뿐만 아니리 옷차림도 좌 후방 두 명 시녀와 차이가 있다.

1. 두식

『후한서‧여복지』에 여자의 수복(首服) 즉 두식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있다. 여자 수복의 장식은 사회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요소로 발전하였다. 사회신분이 낮은 여자는 당연히 화려한 비녀를 사용할 수 없었다. 안악 벽화 중 시녀의 두식도 여기에 따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 전방 시녀발식은 『흠정사고전서·예림회고·복식편(권3)』에 서왕모가 무제궁에 강림하였을 때, 종자들은 비선계(飛仙髻)‧구환계(九環髻)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시녀 머리모양과 비슷하다. 진시황은 신선을 좋아해 항상 궁인들에게 망선구환계(望仙九鬟髻)를 하도록 하였다.

안악3호묘에서 동측회랑의 동벽행렬도 중 무기(舞妓)와 동측실 서벽북측부분 방아 찧는 홍유(紅襦)를 입은 여자는 모두 동수부인 우 전방의 향로 든 여자 머리모양과 비슷하다, 이 러한 머리모양은 연령과 신분에 따른 것은 아닌지 이후 연구가 필요하다. 단지 구환계라는 명칭을 분석하면, 후한시기에 이미 궁중에 등장하여, 서왕모 시종들이 사용하였는데, 한무제는 궁중시녀에게 이 구환계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서왕모 장생불노약(長生不老藥)의 수선지도(修仙之道)와 관련이 있는 상류사회의 영향일 것이다.

2. 시녀 의복

안악3호묘 서측실 남벽 동수부인 옆에 3명 시녀의 복식은 모두 유군(襦裙) 양식 즉 저고리와 치마 형식이다. 저고리는 깃에 선장식을 하였지만, 소매에는 없다. 저고리 밑단 도련은 요란(腰襴)이 있다. 요란은 한진(漢晉)시기 북방지방 저고리 제도의 특징이나, 문헌 중에 상세한 기록의 접근은 용이하지 않았다.

고고문물 출토물 중, 신강 니아 한묘, 감숙 화해필가탄(甘肅玉門花海畢家灘)16국묘와 감숙 무위마취자(武威磨嘴子)한진묘 중에서 모두 한진시기의 유(襦)를 볼 수 있다. 『수신기(搜神記)』권7중에 진무제 태시초, 의복은 상검하풍으로, 입는 방식은 모두 압요(壓腰)한다 고 하였다. 압요는 즉 속요(束腰)로 서진초기 유군의 복제는 치마 속으로 저고리 도련을 넣어 입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 외출용의 요란이 있는 저고리를 착용하게 되었다.

요란(腰襴)은 한진시기 황하이북에서 만이 아니고, 강소 동진묘 출토의 무사용도 요란이 있는 저고리를 입고 있다. 요란의 재질과 색상은 보통 유의 몸판과 다르다. 신강 니아 한묘와 감숙 위진시기 출토의 유는 소매와 몸판이 진동부분에 한 줄의 선장식의 견조(絹條)을 붙이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도 동수부인 좌후방 2명 시녀의 저고리 중에 나타난다.

감숙(甘肅)의 무위 한진묘의 저고리도 요란이 있지만, 양견 부위에는 견 조각이 없다. 이것은 민족에 따른 특유의 표지라고 생각되어, 이후 연구가 필요하다. 그것은 남경 동진묘 출토의 무사용의 복제에도 나타나는데 바로 호복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비단길을 타고 전파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당시대 정확한 문자기록이 있고 또한 출토실물이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안악3호묘 벽화 중 시녀 유군형태와 매우 흡사하여, 감숙 옥문화해필가탄(玉門花海畢家灘)위진묘장 출토의 간독 의물소(衣物疏)와 실물 유군이 바로 이것이다.

동수부인 좌 후방 두 명 시녀의 상유는, 어깨에서 소매사이에 서로 붙인 특징이 보여, 당시 하서지방과 복식문화의 공통점을 증명한다. 그러나 우전방 시녀의 유제는 요란을 달고 있으나 견조가 없다. 이것은 이 3명의 시녀의 복제는 두 종류 계통에 속하여, 하나는 북방민족 특징의 유제이고, 다른 하나는 한문화의 유제일 것으로 생각한다.

동수부인 좌 후방의 두 명 시녀 중 1명 시녀의 군제는 확실하지만, 다른 1명은 단지 유의 특징을 볼 수 있을 뿐으로 하반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상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한 종류는 순색 군상에 홍색 패대(佩帶)를 가하고 있는 것, 다른 한 종류는 우 전방 시녀의 양색 간군에 강색 패대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제1종류인 순색 군상은, 제일 이른 시기의 출토 실물이 보이는데, 호남 장사시 마왕퇴(馬王堆)1호 한묘의 전한시기 포제의 표의 속에 입은 친군으로, 4폭 강자색 견으로 제작되고, 치마말기 양끝에 끈이 달려있다. 이상 요약하면 원래 裙裳은 속옷이었는데, 겉옷으로 발전된 복제로 즉 순색의 속치마인 친군(襯裙)이었는데, 겉치마가 된 후에 화려한 색상으로 변환되어, 여성복제의 다변성과 심미성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간군(襉裙)의 기원은 고고실물 출토의 지역이 집중되어 있어, 사방으로 전파되지 않고, 지방 민족 특색의 복제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3. 신발

『주례‧천관‧구인(周禮・天官・屨人)』기록에 신발 바닥이 두층이면 석이고, 단층이면 구라 한다.44) 『모시정의(毛詩正義)』에 혜리의 재료는, 여름에 갈(칡)구, 겨울에는 피구를 사용하여 계절에 따른 구분이 있었다.45)

안악3호묘 서측실 남벽 벽화의 동수부인의 홍색 교두리(翹頭履)는 동수부인의 평상 앞에 놓여 있다. 시녀의 신발과 양식이 비슷하나, 기후환경 등의 요소를 고려하여, 본문에서는 동수부인의 구는 당연히 구리(裘履)이고, 시녀들은 홍색 포제의 교두리 일 것으로 생각한다.

구리(裘履)는 1995년 위리현(尉梨縣)영반(營盤) 한진묘지에서 출토의 여성 구리 한 켤레가 출토되었는데 바로 그 객관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 가죽신 피리는 둥근 발부리, 평구(平口), 운두(圓頭)와 바닥은 모두 소가죽이고, 혜면은 갈색이며, 신발 바닥의 가죽은 비교적 두껍고, 황백색이며, 신발 운두안쪽은 엷은 황색모전(펠트), 신발 입구 가장자리는 외부로 넘겨져 봉합되어져 있었다. 발부리 표면의 중앙은 엷은 황색으로 장식성이 강하여, 교두리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 또한 『석명(釋名)』에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들고, 발부리가 위로 솟은 것을 삽(靸)이라 한다고 일렀다.

본문은 동수부인과 시녀의 신발을 간단히 설명하였지만, 도상학적으로 보면, 신발의 형태는 3인이 일치하며, 재질을 분석하면 매우 한정적으로, 본문은 기본 복제에 설명을 따르고, 동수부인의 주리를 구제(가죽신)라고 추론하도자 한다. 그러나 시녀들의 주리는 당연히 직물류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V. 결론

본 논문은 안악3호분의 여성복식을 분석하여 설명하였다. 동수부인의 복제는 기본적으로 당시 사회 귀족여성의 복식특징과 부합되나, 상유하상의 의혹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단지 주요논점이 된다.

동시대 고고실물을 보면, 상유하상의 복제는 위진시기 귀족여성의 예복제 중 표의로서는 결코 출현하지 않는다. 『후한서‧여복지』에 공주 귀인 비 이상은 시집갈 때 금(錦) 기(綺) 라(羅) 곡(縠) 증(繒)을 입는데 십이채색이고 중연포(重緣袍)이다." 안악3호 묘는 부인의 복제는 한문화 계통이지만, 부인의 머리모양에서 북방민족 특유의 장식물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동시대의 부부합장묘의 부부벽화 속에서, 부부가 나란히 앉아서, 같이 마시고, 즐기는 현상은 단지 동수묘의 남녀주인공의 자화상이라고 하여도, 이것은 여주인의 사회적 신분이 동수보다 낮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동수는 선비정권하에서 변절한 입장이지만 박해를 받지 않은 것은 동수부인 신분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에 동수부인이 선비족 귀녀라면, 동수부인 신변의 시녀의 복제는, 농후한 민족특징을 띠고 있을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동수부인의 우전방에서 향로를 들고 있는 시녀는, 머리모양부터 군제가 다른 것은, 서왕모(西王母) 수선계통과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사천성 호산현(芦山縣) 출토의 왕휘석관(211)에 선인반개문(仙人半開門)이 새겨져있다. <Fig.9>


<Fig.9> 
The Motif of "Immortal Opening the Door"

(Luo, E. 2014, p.76)



이것은 높은 환계를 올린 인물이 연미포를 입고 있어, 학자들은 선인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선인의 발계는 향로를 든 여인과 비슷하여, 이러한 도상도 한묘 벽화 중에 빈번히 출현한다. 이것으로 서왕모 수선계통이 당시 사회에서 유행하였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할 수 있겠다. 나아가 반개문의 도상도 죽은 자가 선경에 이르도록 하는 아름다운 소망의 표현이라 생각된다.

동수부인벽화 속에서 향로를 든 시녀상은, 향을 들고 손님을 안내하는 소선동이라 여겨져, 이들의 머리모양도 구환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홍색 저고리에 당시에 매우 숭상되었던 간군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인을 영접하기 위하여 서왕모가 보낸 시녀로, 부인이 선경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라 생각된다.

도학수선의 사상은 한나라에서 위진으로 이어져, 동수묘 중 출현하는 불교도상과 서왕모 불로수선 사상이 중첩되었고, 불교의 성행도 북방인물 복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병영사(炳灵寺)169굴 벽화의 공양인의 형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벽화는 불교고사를 묘사하고 있지만, 공양인 복식은 오히려 동수부인 벽화 복식의 특징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안악 3호 동수부인 및 시녀의 복식은 당시 비단길의 초원문화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을 말해주고 있다. <Fig.10>


<Fig.10> 
No.169 Caves of Bingling Temple

(http://guoqing.china.com.cn/2017-08/17/content_41427939.htm)



A.D.301~376년 하서지구에서 출현한 한족 장씨의 전량 경에 위치하는 감숙성 하서회랑 중단, 남쪽은 기련, 북쪽은 합리, 흑하를 남북으로 관통하여, 고대유목민족이 천도하여 목축하던 지방으로, 흑하를 따라 북상하여, 흉노용정의 필경의 땅이며, 용성지도(龍城之道)라는 고칭이 있다. 자고이래로 중원지구와 서부변경이 연접하는 중요 통로와 고대 비단길의 중요 요충지는, 고대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발전과 동서방 문화교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안악3호 벽화의 동수부인 및 3명 시녀의 복식은, 문화 및 무역 유통의 중요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즉 벽화의 복식내용은 마치 중원, 산동과 돈황 지구 문화가 만들어낸 흡사 복식전람회를 연출하고 있다. 조기 비단길의 동방에 있던 안악군은 무역의 요충지로, 안악은 비단길 문화와 문물이 다시 조선반도의 동남방으로 운송되었고, 심지어는 일본열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Notes
1) 『尚書·周書·康詔』: 周公初基, 作新大邑於東國洛, 四方民大和會, 侯甸男采衛, 百工播民和, 見士於周.
2) 『逸周書·王会解』: 北方台正東. 高夷嗛羊.
3) 『資治通鑑·晉紀·十七』: 皝賜昭死,遣軍祭酒封弈慰撫遼東,以高詡為廣武將軍,將兵五千與庶弟建武將軍幼、稚、广廣威將軍軍、寧遠將軍汗、司馬遼東佟壽共討仁.與仁戰於汶城北,皝兵打敗,幼、稚、軍皆为仁所獲.壽嘗為仁司馬,遂降於仁.
4) 동수묘지명: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甘六日,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昌黎玄菟帶方太守都,鄕侯幽州遼東平郭,都鄕敬上里冬壽字,□年六十九薨官.
5) 『漢書·地理志第八下·遼東郡』: 莽曰桓次平郭,有鐵官、鹽官.
6) 『後漢書·循吏列传66왕경(王景)』:王景字仲通, 樂浪講邯人也.八世祖仲, 本琅琊不其人.好道术,明天文.諸吕作乱,齐哀王襄謀發兵,而數問於仲.及濟北王興居反,慾欲委兵師仲,仲懼禍及,乃浮海東奔樂浪山中,因而家焉.父闳,為郡三老.更始敗,土人王調杀郡守劉憲,自称大將軍、樂浪太守.
7) 『晉書·卷八·帝紀』: 皇帝讳聃. 永和(344~356)12年.
8) 『礼記』:車馬、衣服、樂縣、朱戶、納陛、虎賁、斧鉞、弓矢、秬鬯.
9) 『晉書』: 蠶將生,擇吉日,皇后着十二笄步搖,依漢魏故事,……公主、三夫人、九嬪、世婦、諸太妃、太夫人及縣鄉君、郡公侯特進夫人、外世婦、命婦皆步摇衣青,各載筐鉤从蠶.
10) 원문은"著句決"인데, 三國志에서는'句'자 대신'口'자를 사용하였다.
11) 『晋書·慕容廆載記』: 莫護跋魏初率其諸部入居遼西,從宣帝伐公孫氏有功,拜率義王,始建國于棘城之北.時燕、代多冠步搖冠,莫護跋見而好之,乃斂發襲冠,諸部因呼之為‘步搖’,其后音訛,遂为‘慕容’焉.
12) 干寶(283~351年)字令升,祖籍新蔡(今河南省新蔡縣),后遷居海寧鹽官之靈泉鄉,東晉文學家、史學家.
13) 홀수는 양의 숫자, 짝수는 음의 숫자로 여겼는데, 그중 양이 기운의 가장 강한 숫자는 9였다. 음력9월9일은 양의 기운이 가장 강한 날이라고 여겨重九節라고 중요한 날로 정했고, 후에 중양절重陽節로 이름이 바뀌었다.
14) 절기중에 중양은 상강(霜降)와 매우 가깝다.
15) 전설은 서한부터 중양공주와 이황후를 기리기 위해 '야아절'을 만들었다.
16) 수호수(垂胡袖) 모양이 황소 목덜미에 늘어진 고깃덩어리(호)와 같다고 하여, 중국 학자들은 그것을 “垂胡”袖라 지칭하고 있다.
17) 석호(石虎):중국 5호16국의 하나인 후조의 제3대 황제(재위 334∼349).
18) 『詩經』: 彼都人士, 狐裘黄黄.
19) 『論語』: 緇衣, 裘;素衣, 麑裘;黄衣, 狐裘.
20) 『後漢書』: 及太子朝,皇后乃見政君等五人,微令旁長御問知太子所慾.太子殊无意於五人者,不得已於皇后,强應曰:"此中一人可."是时政君坐近太子,又独衣絳緣諸于,長御即以為是.
21) 孙机先生在《中國古舆服論丛》中論述了楚漢深衣之關係
22) "속임(續衽)"은 심의의 길이에 있어서, 상의의 임은 줄어들게 되어, 하의에 연결시키게 되고, 꿰매서 앞뒤를 결합한다. 봉합을 시킨 부분은 오직 몸의 좌측 측면에 대당하다. "구변(鉤边)"은 정현의 주에서는 "오늘날의 곡거(曲裾)이다."라고 했으니 마땅히 양쪽 측면에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23) B.C.99(天漢3)농민 봉기 이후8년이 지나 B.C.91년(征和2)6월에서 8월 사이에 다시 전국을 경악시킨 무고의 화가 일어났다.
24) 『列女傳』: 契母簡狄者,有娀氏之長女也.當堯之時,与妹娣浴於玄丘之水.有玄鳥銜卵,过而墜之.五色甚好, 簡狄与其妹娣競往取之.簡狄得而含之,誤而吞之,遂生契焉.
25) '고매'는 교매(郊媒)라고도 부른다. 즉 고자와 교자는 옛 음이 같아서 가치해서 사용했다. 고대에 제왕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신이다.
26) 『宋書』: 漢制,皇后謁廟服,紺上皂下:亲蠶,青上縹下.深衣製……今皇后謁廟服袿襡大衣,謂之祎衣.
27) 『廣雅·釋器』:襡, 長襦也. 說文·衣部:短衣也,从衣蜀声,讀若蜀.
28) 정군은 왕정군을 말하고, 후에 한원제의 황후가 되며, 한성제의 황태후 즉 왕망의 고모이다.
29) 宋書: 諸在官品令第二品以上, 其非禁物, 皆得服之。第三品以下, 加得服蔽結、爵欽、假真珠翡翠校飾 縷佩、雜采衣、齊繡黻、袿袍.
30) 정녀(鄭女):1、하희(夏姬), 정나라 목공(穆公)의 딸;2、정수(鄭袖), 전국시기 초나라 희왕의 남후.
31) 安岳3號, 出行圖中腰飾為圭角的舞者.
32) 이선(李善)은 당대 유명한 학자, 문선한의 창시자.
33) 상복은 평상시 한가하게 거처할 때 착용하는 복장을 뜻한다. 또한 연회를 할 때 착용하는 복장을 뜻하기도 한다.
34) 천승(千乘):전국 시대의 제후국 가운데 소국의 군주는 ‘천승’이라 하고 대국의 군주는‘만승(萬乘)’이라 했다. 여기서는 ‘제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5) 가령: 한나라 때 황가의 속관으로, 황가의 여러 업무를 관장했다. 제후국에도 이 관직이 설치되어 있었다. 후대에는 태자가령(太子家令)만 설치되었다.
36) 사재(斜裁)는 재단의 방향과 원단의 경사방향에 각도를 만든다. 정재(正裁)는 각도가 영이 된다.
37) 진대에 1척은 약 23.1cm: 종사는 대사보다 허리에 13.8cm를 줄였고 도련에도 83.1cm를 줄였다. 소사는 종사보다 허리에 23.1cm를 줄였지만 도련에 23.1cm를 늘렸다.
38) 漢書卷九十九上・王莽傳第六十九上:母病, 公卿列侯遣夫人問疾, 莽妻迎之, 衣不曳地, 布蔽膝。見之者以為僮使, 問知其夫人, 皆驚.
39) 친결기리:리는 부인의 휘(褘)곧 작은 띠『모전』. 결혼할 때 신부의 어머니가 그것을 채워 준다 『공소(孔疏)』구십기의는 여러 가지 의(礼)는 예절로, 기집가는 여자가 갖추어야 하는 의례와 절차.
40) 제나라 효공의 부인 맹희
41) 『烈女傳』: 母醮之房中, 結其衿褵。必敬必戒, 無違宫事.
42) 南班:皇帝為代表的“漢服制”;北班:皇后为代表的“國服制”.
43) 出現於先秦兩漢时期, 形為半規形, 似單扇門, 又名“戶扇”, 最早以細竹篾為材, 都材料多變, 有布錦丝絹.
44) 『周禮』: 复下(两层底)曰舄, 單下(单层底)曰屦
45) 『毛詩正義』: 夏葛屦, 冬皮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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