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Current Issu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4 , No. 1

[ These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No. 7, pp. 18-33
Abbreviation: J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Nov 2019
Received 01 Apr 2019 Revised 23 Aug 2019 Accepted 13 Oct 2019
DOI: https://doi.org/10.7233/jksc.2019.69.7.018

17-18세기 학창의(鶴氅衣)에 대한 연구 : 장만(張晩, 1566~1629) 유복본 초상화를 중심으로
김다은 ; 조우현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석사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A Study on Hakchanguis between the 17th and 18th Century : Focused on Confucian Clothing Portraits by Jang Man
Da Eun Kim ; Woo Hyun Cho
Mater, Dep.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Professor, Dep.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Woo Hyun Cho, e-mail: whjoy@skku.edu


Abstract

The current study aims to summarize the symbolism of the Hakchangui and its features based on the portraits of Jang Man and references published on the Joseon Dynasty and establish criteria to classify 17th-century Hakchangui and 18th-century Hakchangui.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categorized into five groups. First, the Confucian clothing portraits by Jang Man depicted people holding portable fans with white feathers while wearing Hakchangui and represented Jang Man, who opposed the uprising of Igwal by riding on a carriage like Zhuge Liang. According to portraits and collections of poetry published during the Joseon Dynasty, portable fans with white feathers and Hakchangui served as the representative clothing of Zhuge Liang, hermits, and scholars who observed Taoism. Second, Chinese collars featured an opposite collar shape. The method for fastening a Hakchangui is to bind it with a single strand of beads. Third, Joseon Hakchanguis' collars made in the 17th century can be recognized by their Y shape and reversed collar that converges in the center. Considering the method of connecting collars by lines, it can be observed that the lines on the collar section and both left and right lines on the front are connected as shown in the Joseon Hakchangui. Generally, Hakchanguis were fastened by tying them with small strings and using a single bead to secure them. Fourth, Joseon Hakchanguis made in the 18th century are assumed to have changed to the square-shaped Bangryeong Hakchangui through the influence of Chinese collars. After bead-type buttons and knotted buttons were interchangeably used between the late 17th century and the early 18th century, it is believed that knotted buttons were adopted in some cases. Fifth, the wearing of belts between the 17th and 18th century depended on the formality of a given situation. A variety of official hats including Yoongeon(輪巾), Danggeon(唐巾), and Hwangyanggeon(華陽巾) were also worn.


Keywords: Baeguseon, Geumlyongseon, Hakchangui, Jang Man, Ya-Bok
키워드: 백우선, 금룡선, 학창의, 장만, 야복

Ⅰ. 서언

장만(張晩, 1566-1629)은 조선시대 문무를 갖춘 인물로 외교력과 국방 대책 능력을 인정받아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에 무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인조(仁祖)는 장만이 이괄의 난(1624년, 仁祖3)을 진압하면서 진무공신(振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옥성 부원군에 봉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 1624). 영조(英祖)는 장만의 사후(死後)에 그의 공로를 상기시키며 치제(致祭)와 함께 후손을 조용(調用)하였고(『영조실록(英祖實錄)』, 1738), 정조(正祖)는 모든 신하들 중에 장만을 원공(元功)이라며 높게 평가하였다(『정조실록(正祖實錄)』, 1797). 이는 장만이 조선시대에 활약한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이다. 그러나 장만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최근 조선시대 인물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장만에 관한 관심도가 증가하고 있다. 후손들에 의해 봉행되던 장만장군 추모제는 2009년부터 매해 김포시가 주관하여 지내고 있으며, 2010년에는 제1회 장만장군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장만에 관한 서적은 『장만장군(2009)』, 『명장열전(2011)』, 『조선시대 인물사 연구(2015)』, 『장만 평전(2018)』, 『낙서집(번역본, 2018)』, 『참모로 산다는 것(2019)』 등 2019년 초까지 지속적으로 발간되었고, ‘장만 문화제’가 추진되는 등 그에 관한 문화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의 정장관복본(正裝官服本)과 유복본(儒服本) 초상화는 1991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어 이미 그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았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극사실주의적 미술기법인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一毫不似便是他人)’라는 일호불사(一毫不似)론에 의해 제작되어 복식을 연구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장만의 정장관복본 초상화에는 천연두의 흔적을 얼굴에 자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최명길의 『지천집(遲川集)』권19, 장만행장(張晩行狀)에 장만이 아홉 살에 천연두에 걸렸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이는 장만의 초상화가 17세기 복식을 고찰 할 수 있는 객관적인 회화 자료임을 확인하는 단서이다.

장만의 유복본에 그려진 의복은 구슬로 두 옷깃을 여민 대금형(對襟形)의 학창의(鶴氅衣)이며, 그는 손에 백우선(白羽扇)을 들고 있다. 현재 장만의 의복 명칭은 ‘학창의’와 심의‘(深衣)’ 두 가지로 혼용되고 있다. 경기도박물관과 경기일보 2012년 12월 1일 ‘[장덕호의 보물읽기]장만초상’ 기사에서는 ‘심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경기일보의 2012년 11월 6일 ‘국내 최초 장만 장군 초상공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학창의’로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박물관과 신문기사에 기재된 잘못된 의복명은 일반인들의 개인 홈페이지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어 시급히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학창의(鶴氅衣) 연구를 보면, Lee(2005, 2006)는 권섭(權燮)의 『옥소고(玉所稿)』를 통해 18세기 학창의에 관하여, Park & Hong(2011)은 17, 18세기 학창의에 대해 고찰하였다. 위의 선행연구를 통해 학창의의 상징적 이미지와 형태를 알 수 있었으며, 특히 Park & Hong(2011)의 연구에서 김육의 학창의가 중국에서 만들어 온 것일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다만, 학창의에 대한 문헌자료 및 회화자료가 부족하여 이들의 연구 이후에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본 연구자는 학창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를 바탕으로 학창의에 대한 연구가 추가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진행하였다. 2장에서는 장만이 착용한 의복의 시대별 특징과 명칭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초상화 도상의 시대별 특징을 통해 장만의 초상화 제작시기를 확인한다. 3장에서는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에 착용한 학창의와 백우선, 관모를 분석한다. 4장에서는 문헌자료와 초상화를 바탕으로 17-18세기 학창의의 형태적 특징과 깃의 변화 과정, 여밈 방법을 고찰한다.


Ⅱ. 장만의 초상화

장만의 초상화는 정장관복본(正裝官服本)<Fig. 1>, 무관복본(武官服本)<Fig. 2>, 유복본(儒服本) 총 3점이 있었으나 무관복본은 일제강점기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Fig. 1> 
The Official Uniform Version Portrait of Jang Man, 1625 (Gyeonggi Provincial Museum of Korea)


<Fig. 2> 
The Confusian Clothes Version Portrait of Jang Man (Gyeonggi Provincial Museum of Korea)

관복본은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난 이듬해인 1625년, 인조(仁祖)가 도화서 화원을 불러 제작한 뒤 장만에게 하사한 공신상(功臣像)이다. 얼굴에 안대를 착용한 초상화는 조선시대 초상화 중 장만의 것이 유일한데, 이괄의 난으로 실명한 눈을 안대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공을 더 돋보이도록 의도한 것으로 해석된다. 제작시기가 정확히 밝혀진 관복본과 달리 유복본 초상화의 제작 시기는 안대가 그려지지 않아 이괄의 난 이전에 제작되었다는 설과 관복본과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을 것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장만의 관복본과 유복본 초상화의 차이점은 의자에 깔린 호피(虎皮)의 유무, 바닥의 자리(席)이다. 호피를 걸친 의자는 중국 화가가 그린 김육(金堉)의 초상화(1650년경)에서 볼 수 있다. Cho(2009)에 따르면, 김육의 초상화는 중국에서 유행한 초상화 도상(정면상, 호피를 걸친 의자)으로 조선에는 1680년경 제작된 김석주(金錫胄, 1634-1684) 초상에서 처음으로 호피가 보인다. 『정조실록(正宗實錄)』부터 『순종실록(純宗實錄)』까지의 기록과 초상화를 통해 호피는 명에서 요구할 만큼 고급 품목이자 임금의 하사품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Choi(2018)의 연구에는, 호피는 숙종대 보사공신(1680)의 녹훈으로 공신상에 함께 그려졌고, 이와 함께 17세기 전반까지 공신상에서 나타났던 채전(彩顫, 초상화 바닥에 까는 자리)은 사라졌다.

또한, <Table 1>1)에 의하면, 16세기 초에 그려진 공신상들은 신숙주의 초상화를 제외하고 장만의 관복본과 동일한 도상(채전, ‘八’자로 벌린 鞋)을 갖고 있다. 그리고 호ㆍ표피(虎ㆍ豹皮)와 천판(天板)의 무문(無紋) 화문석은 보사공신상(保社功臣像, 1680)들과 1728년에 제작된 초상화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족좌대(足座臺)의 천판은 18세기 초부터 화문석이 나타나며, 18세기말에는 바닥에 화문석이 깔려있다. 이를 통해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의 제작시기는 17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되며, 다음으로 족좌대를 통해 제작시기를 확인하고자 한다.

<Table 1> 
Characteristics of the Portraits in the Joseon Dynasty
15th century Early 16th century Late 16th century 17th century Early 18th century Late 18th century 19th century
Tiger/Leopard skin (虎ㆍ豹皮) none of skin none of skin Tiger/Leopard skin Tiger/Leopard skin Tiger/Leopard skin Tiger/Leopard skin Tiger/Leopard skin
Direction of shoes Same direction Different directions (八字形) Different directions (八字形) Different directions (八字形) Different directions (八字形) Different directions (八字形) Different directions (八字形)
Cheonpan (天板) none of Cheonpan Hwamun seok without pattern (無紋花紋席, except Sin Suk-ju portrait) Hwamun seok without pattern (無紋花紋席) Hwamun seok without pattern (無紋花紋席) Hwamun seok without pattern & with pattern (無紋&有紋花紋席) Hwamun seok with pattern (有紋花紋席) Hwamun seok (花紋席)
Jogjwadae (足座臺) Jogjwadae with legs Jogjwadae with legs Jogjwadae with legs Jogjwadae with legs Jogjwadae without legs Jogjwadae without legs Jogjwadae with legs (short- legs)
Mat (席) none of Mat Chaejeon (彩氈) Chaejeon (彩氈) Chaejeon (彩氈) none of Mat Hwamun seok (花紋席) Hwamun seok (花紋席)

Bang & Choo(2013)의 연구에 따르면, 장만의 족좌대 <Fig. 3>, <Fig. 4>에 그려진 머름칸의 내부도형은 1620년에 제작된 초상화 중 박유명, 정충신, 남이흥, 이중로와 17세기 초 이성윤의 초상화와 같은 형태이다. 또한 박유명(1623), 이중로(17세기 초), 구인후(17세기 초)의 족좌대의 다리 형태와 머름칸의 칸수(정면 5칸, 측면2칸)는 장만의 것과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부터 족좌대의 형태는 달라지므로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는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Fig. 3> 
Part of Jogjwadae (足座臺) of Jang Man's the confusian clothes version portrait, 1625 (Gyeonggi Provincial Museum of Korea)


<Fig. 4> 
Part of Jogjwadae (足座臺) of Jang Man's the confusian clothes version portrait (Gyeonggi Provincial Museum of Korea)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 제작시기를 고찰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는 1680년대 공신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제작시기는 17세기 인조 재위기에 공신상 형식을 갖추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화문석 자리는 18세기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Cho(2009)에 의하면, 유순정(柳順汀, 1459-1512)의 초상화는 이모된 작품으로 1476년에 제작된 적개공신상과 1604년 삼공신상 양식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이모된 초상화들은 복합적인 양식을 갖고 있으며, 도상 및 소품에서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 역시 이모되면서 18세기말의 혼합적 양상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실록(英祖實錄)』(1747)에 의하면, 영조는 장만의 치제(致祭)를 지내라고 하였으며, 본 연구자는 기록을 통해 이 시기에 장만의 초상화가 이모되면서 화문석 자리가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이모본의 의복은 대부분 미술기법의 변화 외에 의복 형태에서의 큰 변화는 보이지 않기에 장만의 의복은 17세기의 형태로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복식사 분야의 연구를 위해서 초상화 제작시기에 관하여는 추후 미술사분야와 보존과학분야의 연구가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Ⅲ. 유복본 초상화에 그려진 장만의 의복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에 그려진 의복은 학창의로, 심의(深衣)의 유형 중 직령심의(直領深衣)의 형태와 유사하여 명칭을 혼돈하기 쉽다. 본 연구자는 장만의 의복이 심의가 아님을 주장하는 근거를 조선시대 심의제도(深衣制度)가 기록된 문헌들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직령심의가 기록된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서(禮書)는 송익필의 『상례비요(喪禮備要)』, 김장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 이재의 『사례편람(四禮便覽)』이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심의의 소매 너비는 2尺2寸이며 수구로 가면서 그 너비는 1尺2寸으로 좁아진다<Fig. 6>. 그러나 장만의 학창의 소매부리의 너비 <Fig. 2>는 그 안에 입은 의복의 소매가 확연히 보일 정도로 넓다. 또한, 『가례집람』의 착심의전양금상엄도(着深衣前兩襟相掩圖) <Fig. 6>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심의는 착용 시 앞자락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심의의 명칭은 ‘깊이 여미어지는 옷’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둘째, 『가례집람』과 『사례편람』에 의하면, 심의는 복건(幅巾)<Fig. 5>, 대대(大帶), 조대(條帶), 흑리(黑鯉)<Fig. 8>를 그 구성 일습으로 한다. 다만, 『퇴계집(退溪集)』에 따르면, 이황(1501-1570)은 복건이 승건(僧巾)과 같다며 심의에 정자관(程子冠)을 착용하였고, 이채는 초상화에서 직령심의에 동파건(東坡巾)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 직령심의제도가 기록된 예서에는 심의와 함께 복건을 착용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Fig. 5> 
Bokgeon of Garyejipram (Kim, J, S., 1685)


<Fig. 6> 
Shim-Ui of Garyejipram (Kim, J, S., 1685)

셋째, 심의는 허리에 대대와 조대를 함께 사용한다<Fig. 7>. 대대는 허리에 둘러지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검정 비단으로 가선을 단다. 조대는 유학자들의 심의설에 따라 착용 유무가 달라졌으나 대대는 심의 구성의 필수품으로 항상 착용한다.


<Fig. 7> 
Belt of Garyejipram (Kim, J, S., 1685)

이상의 고찰을 통해 장만의 의복은 수구의 너비가 넓으며, 앞이 벌어지고, 대대가 없는 등 심의 와 확연히 다른 구성과 형태를 갖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장만의 의복과 구성품을 자세히 고찰하고자 한다.


<Fig. 8> 
Black shoes of Garyejipram (Kim, J, S., 1685)

유복본 초상화에서 장만은 하얀 깃털로 만든 ‘백우선(白羽扇)’을 손에 들고 있다. 우선(羽扇)은 조선시대 시문집들 속에서 왜란, 호란 등의 전쟁과 난이 많았던 시기에 주로 나타난다. 먼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의 『양촌문집(陽村文集)』에서 백우선을 찾을 수 있다. 권근은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을 위해 “풍진 속의 백 번 싸움 사방을 안정했네. 사제의 높은 의는 백우선을 휘두르고(百戰風塵靜四邊辭第義高揮白羽)”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Kwon, 1674). 차천로(車天輅)의 시문집인 『오산집(五山集)』에 따르면, 고영이 우선으로 지휘한 것 같으니 제갈의 윤건을 쓰더라도 괜찮다네(政似顧榮揮羽扇不妨諸葛戴綸巾)라고 씌여있다. 또한 중국 동진(東晉)의 배계(裴啓)가 지은 『語林(어림)』에는 제갈량(諸葛亮, 181-234)과 사마의(司馬懿, 179-251)가 위수(渭水)에서 싸울 때 제갈량이 수레를 타고 갈건(葛巾)을 쓰고 학우선으로 삼군(三軍)을 지휘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중국과 조선의 문헌2)에 기록된 우선은 무관이 군사를 지휘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소재이자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인 제갈량을 상징하고 있다.

장만의 저서인 『낙서집(洛西集)』卷之五, 附錄, 박미(朴瀰, 1592-1645)의 만사(挽詞)에서 백우선을 찾을 수 있다. 박미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장만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어찌하여 주인을 향해 짖는 개가 나와
    • 如何吠主犬
  • 감히 하늘을 향해 활을 쏠 꾀를 내었나
    • 敢試射天謀
  • 용과 범이 그 개를 막 잡아먹으려 하는 순간
    • 螭虎方將噉
  • 흉악한 그 개가 스스로 뛰어들었네
    • 豹狼漫自投
  • 처음에 백우선을 한번 휘둘렀고
    • 初揮白羽扇

실제로 이괄의 난 당시 장만은 안질(眼疾, 눈병)로 인해 말 대신 가마를 타고 지휘하였다고 한다. 이 모습은 수레를 탄 채 백우선으로 군사들을 지휘하는 제갈량을 연상시킨 것으로 보인다. 『낙서집』의 만사에 기록된 이경여(李敬輿, 1585-1657)와 박의(朴漪, 1600-1644) 의 글에서도 장만의 활약을 백우선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장만의 백우선 <Fig. 9, 10>을 조선시대의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1695 <Fig. 11>와 제갈량 초상 <Fig. 12> 의 백우선과 비교하면, 그의 부채는 보기 드문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백우선은 용의 형상을 한 금색 자루로 만들어졌으며, 『낙서집』, 권1, 정식시(程式詩)에 씌여진 금룡선(金龍扇)으로 추정된다.


<Fig. 9> 
The Fan of Jan Man (Gyeonggi Provincial Museum of Korea)


<Fig. 10> 
The Handles of Jan Man's Fan (Gyeonggi Provincial Museum of Korea)


<Fig. 11> 
Part of Jegalmufudo , 1695 (National Museum of Korea)


<Fig. 12> 
Part of Portrait of Jegal Ryang (National Museum of Korea)

장만의 『낙서집』에 기록된 시의 내용에 의하면, “금룡선은 서촉(西蜀)에서 만들었다.(中官傳詔賜金龍...還將一扇寵錫予綵練團團月一片...皎皎新裁西蜀絹...入手翻敎感淚濺非汝爲美美人貽)”하여 금룡선도 제갈량의 부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Jang, 1730). Choi(2018)의 연구에서, 조선시대에 금색은 ‘니금(貼金)’이라는 안료를 사용하였고, 니금은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귀한 안료라고 하였다. Kwon(2008)에 의하면, 『昭武寧社錄勳都監儀軌(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를 통해 니금은 인조 재위기에 처음 공신상에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장만의 백우선에 채색된 니금을 통해 유복본 초상화는 궁궐에서 공신상 형식을 갖추어 17세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만의 모습은 글뿐만 아니라 유복본 초상화 <Fig. 2>에서도 백우선(금룡선)을 들고 있는 학창의 차림으로 그려졌다. 장만의 학창의는 깃, 섶, 수구, 도련에 선(縇)이 둘러져 있으며, 깃은 좌우에서 곧게 내려온 Y자형으로 한 개의 구슬로 여민 형태이다. 장만은 머리에 제갈량의 윤건(輪巾, 諸葛巾) 대신 상투관을 동곳으로 고정시킨 뒤 그 위에 당건(唐巾)을 착용하였다<Fig. 13>. 그의 건(巾)은 명나라 왕기(王圻)의 『삼재도회(三才圖會, 1609)』의 당건<Fig. 14>과 동일한 형태로, 당건의 재료는 그 안의 상투관이 잘 비추어질 만큼 얇은 소재임을 알 수 있다.


<Fig. 13> 
The Hat of Jan Man (Gyeonggi Provincial Museum of Korea)


<Fig. 14> 
Danggeon (Wang Gi, 1906 『Samjaedohoe』)

학창의(鶴氅衣)와 함께 착용하는 관모에 대한 중국의 자료를 보면,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사가시집(四佳詩集)』3)과 『삼재도회(三才圖會, 1609)』에 그려진 제갈량<Fig. 15>의 초상화에서 학창의에는 윤건을, 사마의<Fig. 16>와 마옥(馬鈺, 1123-1183, 금나라) <Fig. 17>의 초상화에서는 천으로 둘러쓴 후 뒤에서 묶는 건(巾)을 착용하고 있다.


<Fig. 15> 
Portrait of Jegal Ryang (Wang Gi, 1906, 『Samjaedohoe』)


<Fig. 16> 
Portrait of Sama Jungdal (Wang Gi, 1906, 『Samjaedohoe』)


<Fig. 17> 
Part of portrait of Ma Ok (Wang Gi, 1906, 『Samjaedohoe』)

중국 북송 왕우칭(王禹偁, 954-1001)의 시(詩)인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에는 “하루의 일을 끝낸 여가시간에 학창의에 화양건을 착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Wang, 2019, p. 264-265). 조선의 경우, 권섭(權燮, 1671-1759)의 『옥소고(玉所稿)』에 의하면 “그 옷에 그 건이라는 것을 증명할 길은 없다...혹 복건이나 관모와 립을 사용해도 된다.”라며, 학창의와 화양건 제도를 <Fig. 18>과 같이 도식화하였다.


<Fig. 18> 
Hwayanggeondo (Kwon Seop, 1938, 『Ogsogo』)

Lee(2017)는 『강도지(江都志, 1694-1696)』에 1695년 9월 강화도에 숙종 영정을 봉안했는데, “영정 속의 숙종 임금께서는 학창의를 입고 역괘고후관(易卦高後冠)을 머리에 쓰셨고 당혜(唐鞋)를 신으셨다.

대개 임금의 평상시 옷차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p. 32). 이처럼 장만을 비롯하여 중국과 조선에서는 학창의에 윤건, 당건, 화양건, 역괘고후관 등 다양한 관을 착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Ⅳ. 17-18세기 학창의(鶴氅衣)

본 장에서는 17-18세기 중국과 조선의 학창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여 조선의 학창의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도록 한다.

1. 17-18세기 중국의 학창의

17-18세기 중국의 학창의는 앞 장에서 언급된 삼재도회의 제갈량 <Fig. 15>과 마옥의 초상 <Fig. 17> 그리고 조선의 『송하한유도(松下閒遊圖, 1637)』 <Fig. 19>에서 찾아 볼 수 있다.


<Fig. 19> 
Songhahanyudo, 1637 (Photo by author, 2018)

『송하한유도』 <Fig. 19>는 김육(金堉, 1580-1658)이 사행(使行) 중에 중국 화가 호병(胡炳)에 게 의뢰하여 제작된 초상화이다. 초상화에 씌여진 ‘윤건과 학창의를 입고 송풍에 기대어 서있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잠곡 김공이다.(綸巾鶴氅倚立松風是誰之像潛谷金公)'라는 영조의 어제찬(御製贊)을 통해 김육의 의복이 학창의임을 알 수 있다. 김육의 학창의는 Y자로 곧게 내려와 가운에서 한 개의 구슬로 여미었으며 깃머리는 네모난 형태이다. Park & Hong(2011)에 의하면, 그의 학창의는 『한수재집(寒水齋集)』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중국에서 만들어 왔다는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본 연구자 또한 『삼재도회』에 그려진 제갈량 <Fig. 15>과 마옥의 초상화 <Fig. 17> 그리고 『십로도(十老圖, 명말청초)』 <Fig. 20>에서 김육의 학창의 와 동일한 깃 형태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김육의 학창의는 중국에서 제작된 학창의로 사료된다.


<Fig. 20> 
Sibnodo (Nanjin Museum of China)

이와 같이 17-18세기 중국의 학창의는 Y자형을 이루는 대금형이다. 다만, 깃의 형태와 제작 방법에서 조선의 학창의와 차이점을 보인다. 이는 <Table 2>에서 중국의 학창의 깃 부분을 통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학창의 깃 머리는 네모난 형태이며, 구슬형태의 단추로 여미었다. 제작 방법은 의복의 가장자리에 먼저 가선을 단 뒤고대를 중심으로 바느질하여 대금형이 되도록 몸판 위에 깃을 달았음을 알 수 있다.

<Table 2> 
Characteristics of the China ‘Hakchangui’ in the 17-18th Century
China 17-18th century
Part of Kim Yuk's Hakchangui (1637, Silhak Museum of Korea) Part of Jegal Ryang's Hakchangui (Wang Gi, 1906 『Samjaedohoe』) Part of Ma Ok's Hakchangui (Wang Gi, 1906 『Samjaedohoe』) Part of Sibnodo‘s Hakchangui (Nanjin Museum of China)

2. 17세기 조선의 학창의

17세기 학창의가 그려진 조선의 회화는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1695)』 <Fig. 21>, 장만 <Fig. 2>과 김선의 유복본 초상화 <Fig. 22>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제갈량초상』 <Fig. 23>이다.


<Fig. 21> 
Jegalmufudo (1695, National Museum of Korea)


<Fig. 22> 
Portrait of Siseo (Kim Seon), 1626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Fig. 23> 
Portrait of Jegal Ryang (National Museum of Korea)

제갈량 초상화는 조선시대 제갈량을 모시는 사원들이 생겨나면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그 중 『제갈무후도』 <Fig. 21>는 숙종 재위기에 그려진 제갈량 초상으로, 『삼재도회』에 그려진 제갈량의 얼굴 <Fig. 15>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제갈량의 이미지가 중국에서 조선으로 전해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무후도』에 씌여진 ‘윤건과 학창의는 옛 법도와 비슷하다(綸巾學氅彷佛夙儀).’라는 숙종(肅宗)의 제찬(題賛)은 제갈량의 옷이 학창의임을 확인시켜준다. 다만, 『제갈무후도』 <Fig. 21>에 그려진 학창의는 중국의 삼국지 관련 서적에 그려진 삽화 속 제갈량의 의복 형태와 다르기에 조선의 학창의를 참고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제갈무후도』를 통해 조선시대의 학창의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다. 그의 학창의는 장만 유복본 <Fig. 2>과 동일한 형태이며, 중국의 학창의처럼 Y자로 내려온 대금형 깃에 구슬(珠)로 여미었다. 그러나 깃 형태는 곧은 깃으로 중국의 학창의 방령 깃 형태와 차이점을 보인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학창의는 “도사(道士)는 대(帶)가 없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다. 생각해보면 학창(鶴氅) 같은 종류가 도가(道家)의 평상복(常服)인데 양쪽 옷깃을 가리지 않고 여미는 부분에 구슬(珠)로 위아래를 건다. 『가례(家禮)』의 사계삼(四䙆衫) 또는 무사(武士)들의 전복(箭服)도 대(帶)를 사용하지 않는다(道士無帶不知何故意者如鶴氅之類即道家之常服而兩襟不掩適對扵任脉只用彄珠上下鉤掛如家禮四䙆衫又如武士箭服亦然而不用帶也).”라고 기록되어있다(Lee, n.d.). 이와 같이 『제갈무후도』의 제갈량과 장만의 학창의에 사용된 단추는 『성호사설』에서 언급되었던 구슬(珠)로 추정되며, 그 모양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아 대금형 깃에 조각이 가능한 소재의 구슬을 사용하여 여민 것으로 보인다.

김선(金璇, 1568-1642)의 초상화 <Fig. 22>는 인조 4년(1626) 이응하가 그린 것으로 시서영정(市西影幀)으로 알려져 있다. Kim(2011)에 의하면, 장만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김선은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회의를 느끼며 조정을 떠나 나주에 은거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재야에 있을 때 적합하다는 『송자대전』의 기록처럼 김선은 초상화 제작 시 학창의를 착용함으로써 그의 삶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선처럼 벼슬에 뜻을 버리고 은거적 삶을 살고자 한 권섭<Fig. 24>과 남도진<Fig. 25>도 18세기에 학창의를 착용하고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2장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 학창의는 제갈량을 상징하기도 하였지만 문집4)에는 풍류를 즐기는 유유자적한 삶을 표현하는 의복이기도 하였다.


<Fig. 24> 
Portrait of Kwon Seop, 1724 (Chuncheon National Museum of Korea)


<Fig. 25> 
Portrait of Nam Dojin, 1728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김선의 초상화 <Fig. 22>는 족좌대와 옷의 여밈방법의 차이점 외에 장만의 초상화 도상 및 제작시기, 학창의 형태가 유사하다. 김선의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의 족좌대는 공신상에서 사용되는 것이기에 그의 초상화에서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선은 학창의에 대(帶)를 착용하였는데, 조선시대 『제갈량초상』 <Fig. 23>에 그려진 학창의처럼 가는 대(帶)로 묶었다. 이러한 착용법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주자(朱子)가 만년에 집에 있을 때 야복(野服)5)을 입고 손님을 만나 설명하기를 웃옷과 아래의 치마와 큰 대(帶), 네모난 신은 양삼(凉衫)과 비교해 간략하지 않다. 다만 편한 것은 대를 묶음으로써 예(禮)를 갖출 수 있고 연거(燕居)시 대를 풀면 된다(朱子晩年家居用野服見客謂上衣下裳大帶方 比之凉衫自不爲簡其所便者但取束帶足以為禮觧帶足以燕居).”라고 하여 학창의에 대를 착용하는 상황 및 형식을 알 수 있다(Lee, n.d.).

<Table 3>에 정리한 바와 같이 17세기 조선의 학창의는 중국과 동일한 Y자형태의 대금형 깃이다. 학창의를 여미는 형식은 단추나 대(帶)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깃 부분을 확대하여 확인한 결과, 초상화에 그려진 학창의 깃의 너비는 중국과 달리 깃과 몸판의 가선 너비가 동일하며, 몸판 위에 깃과 가선을 하나로 연결하여 바느질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초상화에 그려진 의복이 ‘일호불사론(一毫不似論)’에 의해 실물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전제하에 가정하였다.

<Table 3> 
Characteristics of the Joseon Dynasty's ‘Hakchangui’ in the 17th Century
Joseon Dynasty 17th century
Part of Jang Man's Hakchangui (National Museum of Korea) Part of Jegal Ryang's Hakchangui, 1695 (National Museum of Korea) Part of Jegal Ryang's Hakchangui (National Museum of Korea) Part of Kim Seon's Hakchangui (1626, Yeongam-gun, Jeollanam-do, Republic of Korea)

3. 18세기 조선 학창의(鶴氅衣)의 변화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학창의 깃은 ㅁ자모양의 방령 깃 형태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학창의 의 방령 깃 형태는 권섭의 『옥소고』와 그의 초상화 <Fig. 24> 그리고 남도진(南道振, 1674-1735) <Fig. 25>, 남구만(南九萬, 1629-1711) <Fig. 26>의 초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Fig. 26> 
Portrait of Nam Guman, Early 18th century (Cho, 2009, p. 203)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는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방령이 마주대어 양쪽 깃이 서로 덮이지 않고 심의(深衣)와 같이 검정 단이 둘러진 학창의를 기록하여 방령학창의에 형태에 대해 기록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1625)에 조사(詔使)가 학창의를 착용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조선에서도 중국의 네모난 깃의 학창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18세기 조선의 학창의 깃은 중국에서 들어온 김육의 학창의와 중국에서 온 조사(詔使)의 학창의를 접하게 되면서 조선의 학창의 깃은 중국의 학창의의 깃 형태에 영향을 받아 방령 깃 형태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학창의에 관한 자료를 좀 더 살펴보면, 권섭은 초상화 <Fig. 24>에서 매듭단추로 여민 방령학창의에 화양건(華陽巾)을 착용하였다. Lee(2005)에 의하면, 권섭은 『옥소고』에 “대(帶)를 묶지 않는 것이 불변이다.”라고 하여 대를 착용하지 않는 학창의를 소개하였다(p. 275). 남도진 <Fig. 25>은 초상화에서 두 개의 매듭(紐)단추와 가는 대(帶)로 옷깃을 여미고 윤건을 쓰고 부채를 들고 있다. 남구만 <Fig. 26> 의 초상화에서도 두 개의 매듭단추로 여민 방령학창의를 착용했다. 다만, 남구만의 학창의는 깃 모양과 관모형태가 독특한 것을 볼 수 있어 추후 그의 관모에 대하여 복식사 분야의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송자대전(宋字大全)』의 부록(附錄)에서 최진(崔愼, 1642-1708)은 학창의에 대해 좌우의 옷깃은 암수의 매듭(紐)이 두서너 개(數箇)가 있다(不爲內外衽而合襟於前故左右襟有數箇牝牡之紐矣)고 설명하고 있다(Song, 1787). 이를 통해 기록과 초상화에 그려진 학창의의 여밈 방법과 매듭의 수가 서로 일치하는 것이 확인된다. 최진의 기록이 씌여진 시기와 초상화의 제작시기를 보았을 때,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의 학창의에 사용된 단추의 형태는 구슬(珠)형에서 매듭(紐)형으로 바뀌는 과도기적 시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18세기 학창의의 방령 깃은 앞서 고찰한 17-18세기 중국의 학창의 깃처럼 좌우 앞길의 선 위에 따로 깃을 단 것을 권섭의 학창의 깃 <Fig. 2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18세기 학창의의 깃 형태와 여밈 수단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도록 초상화의 일부분을 확대하여 <Table 4>에 정리하였다. 즉, 조선의 학창의는 17세기에는 깃 제작방법이 달랐으나 18세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중국과 동일한 깃 제작 방법 및 깃 형태를 사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Table 4> 
Characteristics of the Joseon Dynasty's ‘Hakchangui’ in the 18th Century
Joseon Dynasty 18th century
Part of Kwon Seop's Hakchangui (Chuncheon National Museum of Korea, 1724) Part of Nam Dojin's Hakchangui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1728) Part of Nam Guman's Hakchangui (Cho, 2009, p. 203)


Ⅴ. 결언

조선시대 무관인 장만(張晩, 1566-1629)은 가마를 타고 이괄의 난(1624년, 인조 3)을 진압한 계기로 『洛西集(낙서집)』에 ‘제갈량(諸葛亮)’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유복본 초상화에도 장만은 전쟁을 이끄는 무관이자 제갈량으로 상징하기 위해 ‘학창의(鶴氅衣)와 백우선(白羽扇)’라는 의복 구성을 갖추어 그려졌다. ‘학창의’는 김선, 권섭, 남도진의 초상화와 문헌자료를 통해 권력에서 벗어나 속세의 삶을 사는 학자를 상징하는 의복으로도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만이 유복본에 착용한 학창의는 깃, 섶, 도련, 수구를 선으로 두르고, 두 옷깃이 앞 중심선으로 곧게 내려와 한 개의 구슬(珠) 단추로 여민 대금형(對襟形)이다. 유복본 초상화의 도상과 니금(貼金)으로 채색된 부채 손잡이를 살펴보았을 때 장만의 유복본 초상화와 학창의는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만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초상화 및 문헌기록의 자료를 종합하여 학창의 형태적 특징을 정리하고, 17세기와 18세기 학창의의 구분 기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에서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7-18세기 중국의 학창의 깃은 대금형이며, 깃머리의 형태는 네모난 형태이다. 깃과 선(縇)을 연결하는 방법은 좌우 앞길의 선을 먼저 바느질하고 깃을 그 위에 재봉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17세기 조선의 학창의 깃 형태와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학창의는 구슬로 앞을 여미었으며, 구슬의 모양이 각양각색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조각된 구슬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17세기 조선의 학창의 깃은 두 옷깃이 가운데에서 만나 Y자 모양을 이루는 대금형이다. 이 형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본 연구자는 ‘직령학창의’로 가칭한다. 학창의 착용 초상화에서 깃 부분을 확대하였을 때 재봉선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깃 너비는 좌우 앞길의 선 너비와 동일하게 하여 깃과 가선이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17세기 조선의 학창의 깃은 17-18세기 중국의 학창의 깃과 확연히 다른 형태임을 확인하였다. 여밈 방법은 작은 고름으로 묶거나 한 개의 구슬(珠)로 여미었으며, 조선의 학창의에 사용된 구슬은 중국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구슬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학창의는 중국 학창의의 깃머리 형태에 영향을 받아 ‘방령학창의’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밈 수단으로, 『송자대전(宋子大典)』 최진(崔愼, 1642-1708)의 ‘암수의 매듭(紐)이 두서너 개(數箇)’라는 기록으로 통해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학창의 단추는 구슬(珠)형 단추와 매듭(紐)형 단추가 혼용되다가 이후 두서너개의 매듭(紐)단추가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넷째, 조선과 중국의 학창의 대(帶)는 17-18세기 격식에 따라 착용 유, 무(有, 無)가 다르며, 관모는 윤건(輪巾, 와룡건), 당건(唐巾), 화양건(華陽巾) 등으로 다양하게 착용되었다. 본 연구가 조선시대 학창의의 형태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기회가 되어 복식사 분야의 학창의(鶴氅衣) 연구에 보탬이 되길 기대한다.


Notes
1) <Table 1>은 본 연구자가 조선시대 공신상과 관복상 48점과 초상화 분야의 선행연구를 종합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도상의 특징을 시대별로 분류하여 표로 정리한 것이다. 단, 공신상 중 정곤수, 김육, 남발의 초상화는 17세기 중국에서 그려진 초상화로 공신상이 아니기에 고찰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표본자료로 사용한 초상화 48점은 15세기 오자치ㆍ손소ㆍ신숙주ㆍ장말손, 16세기 강현ㆍ송언신ㆍ유순정, 17세기 권협ㆍ박유명ㆍ남이웅ㆍ남이흥ㆍ신용개ㆍ신용구ㆍ신잡ㆍ심희수ㆍ유숙ㆍ윤급ㆍ윤효전ㆍ윤휴ㆍ이성윤ㆍ이수일ㆍ이시방ㆍ이중로ㆍ이충원ㆍ임장ㆍ정충신ㆍ황성원ㆍ황진, 18세기 강세황ㆍ강현ㆍ김중만ㆍ남구만ㆍ박문수ㆍ서매수ㆍ심환지ㆍ안윤행ㆍ오명항ㆍ오재순ㆍ이길보ㆍ이성원ㆍ이정보ㆍ이주국ㆍ이창운ㆍ정일태ㆍ채제공, 19세기 김정희ㆍ이하응ㆍ신홍주의 초상이다. 자료가 부족한 시기의 초상화 도상에 대해서는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2007), National Museum of Korea(2011)Cho(2002), Cho(2009), Bang & Choo(2013), Choi(2018)의 연구를 참고하여 보완하였다.
2) Kim, J. J. (1497). 『Jeompiljaejib』, Kim, S. I. (1640). 『Hagbongjib』, Lee, H. B. (1629). 『Baegsajib』, Lee, J. G. (1636). 『Wolsajib』, Seo, G. J. (n.d.). 『Sagasijib』, Seong, H.(1842). 『Heobaegdangjib』, Shin, G. (1693). 『Jaejobeonbangji』, Yu, H. C. (1869). 『Miamjib』, Yun, D. S.(1635). 『Oeumyugo』, Yun, G. S. (1648). 『Woljeongjib』
3) Seo, G. J. (n.d.). 『Sagasijib』 弟四十五券, 時流, ...英雄勳業一綸巾...
4) An, J. B. (1778). 『Dongsagangmog』, Choi, L. (1631). 『Ganijip』, Hwang, H. (1911). 『Maecheonjib』, Hwang, J. R. (1911). 『Geumgyejib』, Jang, Y. (1643). 『Gyegokjip』, Jeong, Y. Y. (1865). 『Dasansimunjib』, Kim, J. J. (1497). 『Jeompiljaejib』, Kwon, H. M. (1679). 『Songamjib』, Kwon, S. H. (1761). 『Hansujaejib』, Lee, G. B. (1241). 『Dongkukisanggugjib』, Lee, G. I. (1776). 『Yeonlyeosilgisul』, Lee, I. (n.d.). 『Seonghojeonjib』, Lee, S. G. (1634). 『Jibongjib』, Seong, D. J. (1964). 『Cheongseongjabgi』, Seong, H. (1841). 『Heobaegdangjib』, Shin, H. (1630). 『Sangchonjib』, Shin, I. S. (1654). 『Nagjeon-dangjib』, Yoon, S. D. (1791). 『Gosanyugo』
5) 『宋子大典』에 “선생(송시열)은 만년에 주로 학창의라 일컫는 야복을 입었다.(...晩年多着鶴氅衣曰。此野服也。宜於在野...)”라고 하여 야복(野服)은 학창의를 지칭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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