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Current Issu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4 , No. 1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2, No. 4, pp. 90-107
Abbreviation: J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Aug 2022
Received 11 Jul 2022 Revised 08 Aug 2022 Accepted 12 Aug 2022
DOI: https://doi.org/10.7233/jksc.2022.72.4.090

17세기 초 조선 왕비 대삼(大衫)·하피(霞帔) 연구
김지원
단국대학교 전통의상학과 박사수료

A Study on Daesam and Hapi for the Queens of Joseon in the Early 17th Century
Jiwon Kim
Ph.D. Candidate, Dept. of Traditional Costume, Dankook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Jiwon Kim, e-mail: jwkim2594@hanmail.net


Abstract

There has been active research on a set of Daesam(大衫) for queens in Joseon with abundant research results accumulated. However, there has been insufficient work on the context of the early 17th century when they had to make the wedding costumes for queen with almost all of the materials including Uigwe(儀軌) destroyed during Imjinwaeran(壬辰倭亂). There remain questions about how patterns were expressed in a set of Daesam, what colors and shapes were used to make Daesam, when the decoration of Daesam with rank badges began, and what comprised a set of Daesam.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situation in the early 17th century when the wedding costumes for queen were made following Imjinwaeran based on the Seonjo Sillok(宣祖實錄), which includes records about the preparation of the wedding ceremony between King Seonjo and Queen Inmok in 1602, and Uiin Wanghu Inmok Wanghu Sang Jonho Junggungjeon Wangseja Chaekryedogam Uigwe(懿仁王后仁穆王后上尊號中宮殿王世子冊禮都監儀軌), which contains records about the investiture ceremony of Queen Yu(King Gwanghae's wife) in 1610. According to the records in the Seonjo Sillok, the wedding costumes of Queen Inmok were made based on Garyesik(嘉禮式), records of regulations for the wedding costumes of a king and his queen before Imjinwaeran, the Gwanbok(冠服) received from the Ming(明) emperor and enshrined at Hyogyeongjeon(孝敬殿), and the Lifu(禮服) system for Qinwangfei(親王妃) and Gunwangfei(郡王妃) in Daminghuidian(大明會典). These three materials had impacts on a set of Daesam for Queen Inmok, which were verified by the costumes worn in the investiture ceremony of Queen Yu. Queen Inmok's set of Daesam was the first Gwanbok for a queen made after Imjinwaeran, becoming the first such precedent in the Gwanbok system for queens during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Keywords: Daesam, Gwanbok, Hapi, Queens of Joseon
키워드: 대삼; 大衫, 관복; 冠服, 하피; 霞帔, 조선 왕비

Ⅰ. 서론

대삼(大衫)은 하피(霞帔)와 조합을 이루어 착용된 조선 왕비의 최고 예복이다. 국내 문헌에서 대삼과 하피는 『태종실록(太宗實錄)』 1403년(조선 태종3, 명 영락원년) 10월 27일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Taejong sillok, 1431a). 1370년(고려 공민왕19, 명 홍무3), 명의 효자황후(孝慈皇后)가 고려왕비에게 적의(翟衣) 일습(一襲)을 사여한 것을 시작으로(Goryeosa, 1451a) 왕비 책봉 때마다 관복(冠服) 사여가 이루어지는데, 조선 왕비에게 사여된 관복은 적관(翟冠), 대삼(大衫), 하피(霞帔), 추자(墜子), 배자(褙子), 원령(圓領), 오(襖), 군(裙), 홀(笏)로 구성된 대삼 일습이다. 1403년부터 명 멸망 때까지 대삼 일습을 사여 받았으나, 조선에서는 명으로부터 사여 받은 왕비 관복을 적의라 칭하였다. 따라서 현재 학계에서는 조선 왕비 관복을 대삼제(大衫制) 적의라 부르기도 한다.

대삼 일습은 조선 왕비의 최고 예복이라는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의 사여 관복 기록을 바탕으로 『대명회전(大明會典)』 , 『명사(明史)』 와의 비교를 통해 왕비 관복의 면모를 파악하려는 연구들이 진행되었다(Hong, 1983; S. Kim, 2017; Park, 1985). 이에 더해 2001년 명대 영정왕(寧靖王) 부인 오씨(吳氏) 묘에서 대삼과 하피가 출토됨에 따라 명대 대삼과 하피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큰 진전이 있었고, 선행연구에서 추정에 그쳤던 사여 받은 대삼과 하피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Kim, 2002). 조선후기 왕비 관복에 대한 연구 또한 이루어져 왔다. 상황에 따라 법복용(法服用)과 상복용(常服用)으로 구분하여 착용한 것에 대해 고찰한 연구가 있었고(Kim, An, & Jang, 2007), 흉배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Y. Kim, 2017; Song, 2019). Park(2011)의 「대한제국 황실의 적의제도(1)」 에서 고려 말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의 관복 제도가 종합적으로 정리되었다.

중국에서 이루어진 대삼과 하피에 대한 연구는 Zhao(2005)Gao & Wang(2019)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모두 2001년 명대 영정왕 부인 오씨 묘에서 출토된 대삼과 하피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출토 직후 중국 실크박물관에서 보수, 복원이 이루어진 후 Zhao(2005)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2013년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방직고고부에서 보수, 복원이 이루어진 후 Gao & Wang(2019)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명대 대삼은 현재까지 영정왕 부인 오씨 묘 출토유물이 유일하기 때문에 중국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조선 왕비 대삼 일습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고,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궤 등의 자료가 거의 소실된 상황에서 왕비 복식을 제작해나가는 17세기 초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비 대삼 일습의 무늬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대삼의 색과 형태는 어떠했는지, 언제부터 대삼에 흉배·견화를 장식하기 시작했는지, 대삼 일습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점이 남아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7세기 초의 상황을 알려주는 실록과 의궤의 기록을 통해 이 문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자료는 『선조실록(宣祖實錄)』 으로, 1602년 임인년(壬寅年) 7월 13일에 행한 선조(宣祖)와 인목왕후(仁穆王后)의 혼례 준비 기록을 담고 있다. 임인년 혼례가 본 연구에서 중요한 까닭은 혼례 때 착용할 왕비의 대삼 일습을 임진왜란 이후 처음 제작했기 때문인데, 선조와 인목왕후의 혼례를 기록한 의궤나 등록이 현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왕비 혼례복 제작 당시 참고한 자료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두 번째 자료는 『의인왕후인목왕후상존호중궁전왕세자책례도감의궤(懿仁王后仁穆王后上尊號中宮殿王世子冊禮都監儀軌)』 (이하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로, 1610년 4월 22일 거행된 광해군비 책례 기록을 담고 있다. 의인왕후(懿仁王后)와 인목왕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고, 광해군비를 왕비로 책봉하고, 광해군의 장자 이지(李䃽)의 관례(冠禮)를 시행한 기록을 함께 담고 있어 그동안 왕비 복식 연구 자료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 의궤에는 책례 때 착용할 광해군비의 대삼 일습 제작을 위해 왕과 신하가 주고받은 여러 논의 및 1602년 인목왕후의 관복에 의거해 제작한 광해군비의 대삼 일습이 기록되어 있어 17세기 초 왕비 관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송, 명대 복식을 통해 조선 왕비 대삼·하피의 연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여 임진왜란 후부터 명 멸망(1644) 전까지 조선에서 왕비 관복을 제작해나가는 상황과 17세기 초 대삼·하피의 특징에 대해 중점적으로 알아보려 한다. 위의 두 자료 외에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 (1628)와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1638) 또한 함께 다루고자 한다.


Ⅱ. 조선 왕비 대삼·하피의 연원(淵源)
1. 송대 대수(大袖)와 하피(霞帔)
1) 남송 건도(乾道)7년(1171) 후비(后妃)의 상복(常服)으로 제도화된 대수·하피

조선 왕비의 대삼에 영향을 준 복식은 남송 황실 후비(后妃)의 상복으로 제도화된 대수(大袖)에서 확인된다. 『송사(宋史)』 「여복지(輿服志)」 에 따르면, 남송 건도7년 황후는 예복으로 휘의(褘衣), 예의(禮衣)를, 비(妃)는 예복으로 요적(褕翟)을 갖추고, 상복으로 대수(大袖), 장군(長裙), 하피(霞帔), 옥추자(玉墜子), 배자(背子)를 갖추도록 하였는데, 대수와 하피가 황실 여자 관복으로 『정사(正史)』 「여복지」 에 기록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송사』 「여복지」 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도7년에 정한 것이다. 옷은 황후는 오직 휘의, 예의를 갖추고, 비(妃)는 요적을 갖추어 무릇 3등급이다. 상복은 후비는 대수【생색화문(生色花紋)으로 깃을 장식함.】, 장군, 하피, 옥추자, 배자【생색화문으로 깃을 장식함.】인데, 모두 강색 라[絳羅]를 쓰며 대개 아랫사람과 다르지 않다(Tuoketuo, 1346, Vol. 151).

그런데 대수는 남송 건도7년에 황실 후비의 상복으로 제도화되기 이전 북송대부터 황실에서 착용된 것으로 보인다. 『송사』 「예지(禮志)」 ‘가례(嘉禮)’에는 북송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이 직접 『관례연혁(冠禮沿革)』 11권을 지어 황태자, 황자의 관례의(冠禮儀)와 공주의 계례의(笄禮儀)를 제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공주의 계례는 초가(初加)에 배자[背]·군(裙), 재가(再加)에 대수·장군, 삼가(三加)에 요적을 입는 순으로 복식의 등급이 높아진다(Tuoketuo, 1346). 북송대에 제도로 규정되지 않았을 뿐, 대수는 북송대부터 황실에서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상화를 통해 북송대에 황실에서 착용된 대수·하피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Fig. 1>.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송선조후좌상(宋宣祖后坐像)은 송대 개국 군주 조광윤(趙匡胤, 927-976)의 모친 두씨(杜氏, 902-961)를 그린 것으로, 송대 황후 좌상 대부분이 휘의 차림인 것과 달리, 두씨는 직령(直領), 대금(對襟), 광수(廣袖)의 옷을 입고 있다. 좌우 옆선은 트여있고, 앞길보다 뒷길이 긴 전단후장형(前短后長型)이다. 어깨에 두 가닥으로 이루어진 긴 띠를 두르고 있다(Gao & Wang, 2019). 이어서 서술하겠지만 두씨의 복식은 명대 대삼·하피의 도식(圖式) 및 출토유물과 일치한다. 따라서 두씨의 복식은 명대 대삼·하피에 영향을 준 송대 대수·하피로 판단 가능하다.


<Fig. 1> 
Seated Portrait of Xuanzu[宣祖]'s Empress of the Song (National Palace Museum [NPM], n.d.)

2) 남송 순희(淳熙)연간(1174-1189) 사대부가 부인의 성복(盛服)이 된 대수·하피

대수는 남송 순희연간에 또 한 번 제도로 규정되는데, 『송사』 「여복지」 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희연간에 주희(朱熹)는 또 제사, 관혼(冠婚)의 복식을 정하여 특별히 세상에 널리 반포하였다. 무릇 사대부가의 제사, 관혼에는 곧 성복(盛服)을 갖춘다. ⋯⋯부인은 곧 가계(假髻), 대의(大衣), 장군이고, 여자 재실자는 관, 배자이고, 여러 첩은 곧 가계, 배자이다(Tuoketuo, 1346, Vol. 153).

즉 건도7년 남송 황실 후비의 상복으로 규정된 대수는 순희연간에 사대부가 부인의 성복으로 제도화되었고, 이 내용은 『주자가례(朱子家禮)』 에 기록된다. 송대 문헌에 따라 대수, 대의 등의 명칭이 두루 쓰이나, 동일한 의복을 가리킨다.

남송 사대부가 부인의 성복으로 착용된 대수와 하피는 출토유물을 통해 당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복주(福州) 다원촌(茶園村) 송묘(宋墓)[1235, 묘주:장군의 처]에서 대수 1점, 추자 1점(Fuzhou Administration of Cultural Relics [FACR], 1999), 복주(福州) 남송(南宋) 황승묘(黃昇墓)[1243, 묘주:송 태조 제11세손 조여준(趙與駿)의 처]에서 대수 5점, 하피 2점, 추자 1점(Fujian Provincial Museum [FPM], 1982), 덕안(德安) 남송(南宋) 주씨묘(周氏墓)[1274, 묘주:신태평주(新太平州) 통판(通判)의 처]에서 대수 2점, 하피 1점, 추자 2점이 출토되었는데(Zhou, Zhou, & Yang, 1999), 대수는 보고서에 광수포(廣袖袍)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직령, 대금, 광수의 형태를 하고 있고 하피와 함께 출토되어 송대 대수로 판단되며, 묘주와 연대가 분명한 출토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원촌 송묘 출토 대수는 전단후장형이고, 좌우 옆선이 트여있다. 앞길 아랫단은 직선이나 뒷길 아랫단은 역삼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고, 역삼각형의 뾰족한 부분에 매듭단추가 있으며, 깃 좌우에 고리가 달려있다(Zhao, 2005)<Fig. 2(a)>. 황승묘출토 대수는 앞길과 뒷길의 길이가 같고, 좌우 옆선이 트여있으며, 뒷길 아랫부분에 삼각형으로 재단한 직물을 덧붙인 것이 특징이다<Fig. 2(b)>. 그리고 황승묘 출토 대수의 특징은 이후 주씨묘에 그대로 이어진다<Fig. 2(c)>. 황승묘와 주씨묘에서 출토된 하피는 두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쪽 끝은 뾰족하고 다른 쪽 끝은 직선이다. 두 가닥에 가로로 끈이 달려있고, 뾰족한 부분에 추자가 달려있다(Zhao, 2005).


<Fig. 2> 
Excavated Daxiu[大袖], Xiapei[霞帔], Zhuizi[墜子]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a: FACR, 1999, p. 80, p. 65; b: FPM, 1982, p. 12, p. 78; c: Zhou et al., 1999, p. 2, p. 5)

2. 명대 대삼(大衫)과 하피(霞帔)
1) 『대명회전』 만력본(萬曆本)과 『명사』 「여복지」 의 대삼·하피 제도

명대 황후, 황태자비, 황제와 친족관계에 있는 신분(친왕비, 군왕비 등), 내외명부의 관복은 남송제도의 영향으로 예복과 상복으로 구성된다. 『대명회전』 만력본 권60·61(Shen, 1587), 『명사』 「여복지」 (Wan, 1739)에는 신분별 여자 예복과 상복제도가 실려있다. 『대명회전』 만력본의 관복제도는 크게 ‘홍무3년定’과 ‘영락3년定’으로 구분되는데, ‘홍무3년定’은 홍무3년(1370) 편찬된 『명집례(明集禮)』 에 수록된 홍무원년(1368)에 제정한 제도를 뜻하고, ‘영락3년定’은 제도 제정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영락3년(1405) 예부(禮部)에서 영락제(永樂帝)에게 올린 『면복노부의장도(冕服鹵簿儀仗圖)』 의 내용일 것으로 중국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면복노부의장도』 는 홍무연간 확립된 복식제도의 최종본일 가능성이 크며, 홍무연간에 시행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Li, Chen, & Kong, 2014; Wen, 2020).

『대명회전』 만력본과 『명사』 「여복지」 에 실린 신분별 여자 예복과 상복 제도를 제정 시기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홍무원년(1368), 황후는 예복으로 심청색 12등(等) 휘의 일습을, 황비, 황태자비, 친왕비, 공주는 청색 9등 적의 일습을 입도록 하였고, 상복으로 무늬를 수놓은 단삼(團衫)을 입도록 하였다. 외명부는 예복으로 품계에 따라 9등부터 3등까지 등수를 달리한 자색과 비색의 적의를 입도록 하였다.

홍무4년(1371), 남송대 후비의 상복으로 규정되었던 대수가 ‘대수의(大袖衣)’라는 명칭으로 하피와 함께 등장한다. 황후, 황비, 황태자비, 친왕비, 공주는 상복으로 진홍색 대수의에 하피를 두르도록 하였는데, 황후의 대수의에는 용봉문(龍鳳紋)을, 황비, 황태자비, 친왕비, 공주의 대수의에는 봉문(鳳紋)을 직금하고 수를 놓도록 하였다. 외명부는 예복으로 진홍색 대수의에 하피를 두르도록 하였는데, 품계에 따라 무늬를 달리하여 대수의에 수를 놓거나 금박장식을 하도록 하였다.

홍무5년(1372), 적의는 3품 이상 내명부의 예복으로 등급이 상승하였고, 내명부 4품 이하는 대삼을 예복으로 착용하도록 하였다. 내명부는 상복으로 국의(鞠衣)를, 외명부는 상복으로 원삼[단삼]을 입도록 하였다. 외명부의 하피 무늬가 제정되었는데, 1·2품은 운하적문(雲霞翟紋), 3·4품은 운하공작문(雲霞孔雀紋), 5품은 운하원앙문(雲霞鴛鴦紋), 6·7품은 운하연작문(雲霞練鵲紋), 8·9품은 전지화문(纏枝花紋)으로 하였다.

홍무24년(1391), 외명부 대수삼(大袖衫)의 척수(尺數), 형태, 착용 방법, 하피, 추자의 제도가 확립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깃의 너비는 3촌이다. 양쪽 깃은 곧게 1척 내려오고, 사이에 매듭단추[紐子] 3개를 꿰맨다. 앞길의 길이는 4척 1촌 2분이고, 뒷길의 길이는 5척 1촌이다. (앞길보다 긴) 9촌 8분은 걸을 때 접어 올리는데, 끝에 매듭단추 2개를 꿰매어 매듭단추가 엄뉴(掩紐) 아래에 있게 하고, 절을 할 때 풀어 놓는다. 소매의 길이는 3척 2촌 2분, 진동[根]의 너비는 1척, 수구(袖口)의 너비는 3척 5분, 떨어져 접히는 부분[落摺]은 1척 1촌 5분이다. 엄뉴는 2개인데, 대수삼의 원단을 쓴다. 뾰족하게 이어지는 부분의 길이는 2촌 7분이고, 너비는 2촌 5분이다. 각각 깃 아래 1척 6촌 9분 되는 곳에 꿰맨다. 엄뉴 아래에 각각 고리[紐門] 1개를 꿰매어, 접어 올리는 뒷길의 남은 부분을 고정한다. 두자(兜子)도 대수삼의 원단을 쓴다. 두 조각을 사선으로 재단하여,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평평하게 한다. 뾰족하게 이어지는 부분의 길이는 1척 6촌 3분이고, 각 조각 아래쪽 평평한 곳의 각 너비는 1척 5분이다. 봉합하여 (뒷길의) 깃 아래 1척 7분 되는 곳에 꿰매는데, 위에 꿰맨 뾰족한 부분을 모두 봉합하여 뒤쪽에 드리우는 하피의 끝을 감춘다.
하피는 2가닥이다. 각각 길이는 5척 7촌이고, 너비는 3촌 2분이다. 각각 새[禽] 7마리를 수놓는데, 품급에 따라 쓴다. 앞에 4마리, 뒤에 3마리를 각각 수놓는다. 끝부분에서 좌우를 뾰족하게 하는데, 길이는 2촌 7분이다. 앞뒤로 나누어 드리우고, 가로로 청색 라로 된 끈[襻子]을 꿰매어 서로 끌어당겨 이어지게 한다. 앞쪽으로 3척 3촌 5분을 드리우고, 뾰족한 부분에 추자 1개를 단다. 뒤쪽으로 2척 3촌 5분을 드리우고, 끝부분은 두자 안에 끼워 감춘다.
추자는 가운데에 새 1마리를 새기고, 사면은 운하문으로 한다. 새는 하피와 같이 품급에 따라 쓴다(Shen, 1587, Vol. 61).

제도에 따르면, 대수삼은 직령, 대금, 광수, 전단후장형으로, 하피와 조합을 이룬다. 대수삼의 형태, 뒷길의 삼각형 두자, 하피의 두 가닥에 가로로 꿰매는 끈, 하피의 뾰족한 부분에 다는 추자 등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송대 대수·하피의 맥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

‘영락3년定’ 제도에서 황후는 예복으로 12등 적의 일습, 황태자비는 예복으로 9등 적의 일습을 입도록 하였다. 대삼은 신분에 따라 상복으로 착용되기도 하고 예복으로 착용되기도 하였는데, 황후는 상복으로 황색 대삼 일습을, 황태자비는 상복으로 홍색 대삼 일습을 입도록 하였고, 이외 나머지 신분은 예복으로 홍색 대삼 일습을 입도록 하였다. 황후 이하 군주까지 하피와 추자 무늬가 제정되었는데, 하피 무늬는 황후는 운하용문(雲霞龍紋), 황비 이하 세자비까지는 운하봉문(雲霞鳳紋), 군왕비와 군주는 운하적문(雲霞翟紋)이고, 추자 무늬는 하피 무늬와 같게 하였다. 신분별 예복과 상복 제도는 홍무연간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영락3년定’ 제도로 일단락되었다.

홍무원년(1368)부터 ‘영락3년定’ 제도까지 여자관복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첫째, 적의를 착용할 수 있는 신분 범위가 점차 축소된다. 이는 홍무4년(1371) 외명부의 관복 개정 시 논의된 내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명사』 「여복지」 에 따르면, “옛 천자와 제후는 곤면(衮冕)을 입었으므로 왕후와 부인 또한 휘의, 적의를 입었으나, 오늘날 군신은 면복을 입지 못하므로 외명부 또한 적의를 조복(朝服)으로 입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Wan, 1739, Vol. 67).”라고 하며 적의 대신 대수의, 하피, 추자를 외명부의 조복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적의는 홍무5년(1372) 3품 이상 내명부의 예복으로 등급이 상승하였고, ‘영락3년定’ 제도에서 황후와 황태자비만이 착용할 수 있는 예복이 된다

둘째, 적의를 예복으로 착용할 수 있는 신분 범위가 축소됨에 따라 대삼을 예복으로 착용하는 신분 범위가 확대된다. 홍무4년(1371) 황후, 황비, 황태자비, 친왕비, 공주의 상복이었던 대수의는 ‘영락3년定’ 제도에서 황후, 황태자비의 상복으로, 나머지 신분의 예복으로 규정된다. 남송 황실 후비의 상복이었던 대수는 명 황실에서 신분에 따라 상복과 예복으로 분화되었으며, 이어서 서술하겠지만 조선 왕비는 예복으로서의 대삼 일습을 관복으로 받아들인다.

셋째, 홍무4년(1371) 황후, 황비, 황태자비, 친왕비, 공주의 상복으로, 외명부의 예복으로 하피와 함께 등장한 ‘대수의’는 홍무24년(1391) 외명부 예복제도에서 ‘대수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영락3년定’ 제도에서 ‘대삼’으로 명칭이 확정된다.

넷째, 홍무4년(1371) 제도에서는 대수의에 무늬를 표현하여 신분을 구별하였으나, 점차 옷 대신 하피와 추자에 무늬를 표현하여 신분을 구별하게 된다.

다섯째, 홍무4년(1371) 황후부터 외명부까지 모두 진홍색 대수의를 착용하도록 하였으나, ‘영락3년定’ 제도에서 황후만 황색 대삼을 착용하도록 한다.

2) 『명궁관복의장도(明宮冠服儀仗圖)』 의 대삼·하피 도식(圖式)

명대 대삼, 하피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도식 자료를 『명궁관복의장도』 에서 찾을 수 있다. 『명궁관복의장도』 는 영락3년(1405) 예부(禮部)에서 영락제에게 올린 『면복노부의장도』 와 관련된 것으로 중국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는데, 잔편(殘編)으로 전해오던 것을 2015년에 출판하였다. 『명궁관복의장도』 는 「관복권(冠服卷)」 , 「길례권(吉禮卷)」 , 「군례권(軍禮卷)」 , 「의장권(儀仗卷)」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관복권」 은 ‘명홍무년관복도(明洪武年冠服圖)’와 ‘명영락년관복도(明永樂年冠服圖)’로 구분되어 있고 각각 제도와 도식이 실려있는데, 제도와 도식은 『대명회전』 만력본 ‘홍무3년定’, ‘영락3년定’과 대부분 일치한다. 잔편으로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명궁관복의장도』 출판 당시 제도만 있는 경우 도식을 보충해 넣었는데, 『명궁관복의장도』 에 기록된 제도와 상응하는 도식을 『명집례』 와 『대명회전』 에서 선택해서 보충해 넣거나, 『명궁관복의장도』 원본 안에 같은 품급, 같은 관복의 도식이 존재하는 경우 상응하는 도식을 보충해 넣었고, 도식 위에 보충하였음을 미주(眉注)로 명시해 놓았다(Beijing Municipal Cultural Heritage Bureau [BMCHB], 2015).

‘명영락년관복도’에는 『대명회전』 만력본에 실려있지 않은 황후부터 군주까지의 대삼 도식이 있다. 대삼 도식 위에 아무런 미주가 없는 것으로 보아 『명궁관복의장도』 에 실려있던 원본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Fig. 3>. 『대명회전』 ‘영락3년定’ 제도와 같이 황후만 황색 대삼이고, 그 외 신분은 모두 홍색 대삼이다. 대삼의 형태, 하피의 색과 무늬, 하피의 두 가닥에 가로로 꿰매어진 끈, 추자 등은 홍무24년(1391) 제도와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두자는 뒷길 아랫부분에 위치하여 뒷길 중간에 두자가 위치하는 홍무24년 제도와 차이가 있다.


<Fig. 3> 
Dashan[大衫], Xiapei[霞帔], Zhuizi[墜子] (BMCHB, 2015, Vol. 2·3)

3) 대삼·하피 출토유물

명대 대삼과 하피는 2001년 12월 중국 강서성(江西省) 남창시(南昌市) 신건현(新建縣)에서 발굴된 영정왕 부인 오씨(1439-1502) 묘의 출토유물로도 확인된다. 영정왕은 홍무제(洪武帝)의 17번째 아들 영헌왕(寧獻王)의 손자이다. 오씨 묘에서 40점 이상의 복식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발굴 당시 대삼은 가장 겉에서 묘주를 감싸고 있었다(Jiangxi Institute of Cultural Relics and Archaeology[JICRA], 2003). 2013년부터 2차례에 걸쳐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방직고고부에서 보수 및 복원을 진행한 대삼과 하피의 모습은 <Fig. 4-5>와 같다.


<Fig. 4> 
Excavated Dashan[大衫] from Wu[吳]’s Tomb (Gao & Wang, 2019, pp. 248-251)


<Fig. 5> 
Excavated Xiapei[霞帔] from Wu[吳]’s Tomb (Gao & Wang, 2019, p. 254)

출토 대삼은 직령, 대금, 광수, 전단후장형이고 옆선이 트여있다. 오씨의 키는 약 160cm이며, 앞길의 길이는 123cm, 뒷길의 길이는 145cm이다. 좌우 겨드랑이 밑과 깃 좌우에 고리가 1개씩 있다. 뒷길 아랫단 중간에 매듭단추가 1개 달려있고, 뒷길 중간에 삼각형 두자가 있으며, 두자의 좌우에 엄뉴가 있고, 엄뉴 밑에 고리가 있다(Gao & Wang, 2019).

출토 하피는 2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길이는 245cm이고, 뾰족한 부분에서 120.5cm 되는 곳 안쪽에 매듭단추가 각각 있다. 반대쪽 끝부분은 직선이며 끝부분에서 90cm 되는 곳 안쪽에 각각 길이 20cm의 끈이 꿰매어져 있다. 앞으로 드리워지는 부분에 꿩 4마리, 뒤로 드리워지는 부분에 꿩 3마리가 각각 있고, 꿩 주위로 운하문이 수놓아져 있다(Gao & Wang, 2019). 매듭단추는 대삼의 깃 좌우에 하피를 고정하기 위한 용도였을 것으로 보이고, 끝에서 90cm 되는 곳에 있는 끈은 홍무24년(1391) 제도에 기록된 대로 하피의 두 가닥이 서로 이어지게 하기 위한 부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삼의 형태, 뒷길 아랫단의 매듭단추, 엄뉴와 엄뉴 밑 고리, 뒷길 중간의 삼각형 두자, 하피 무늬의 배치, 두 가닥이 서로 이어지게 하는 하피의 끈 등은 홍무24년(1391) 제도와 거의 일치한다. 단지 앞길과 뒷길의 길이, 하피의 길이 등이 차이를 보이는데, 명대 재봉척[裁衣尺]에 따라 1척을 34cm로 보고(Qiu, Qiu, & Yang, 2001) 홍무24년 제도의 대수삼과 하피 척수를 환산했을 때, 출토대삼은 홍무24년 제도에 비해 뒷길의 길이는 줄었고, 하피의 길이는 오히려 늘어나 뒷길에 드리우는 하피의 끝이 두자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하피의 끝이 두자 아래로 내려오는 것에 대해 Zhao(2005)Gao & Wang(2019) 모두 정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3. 명으로부터 사여 받은 조선 왕비의 대삼 일습

명의 고려 왕 책봉은 1370년(고려 공민왕19, 명홍무3)에 행해졌다. 고려는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맺기 위해 1369년 명에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리고 제복(祭服)을 요청하였고, 홍무제는 그해 8월 공부(工部)에 명해 관복을 제조하게 하여(Taejogohuangje sillok, 1418a), 1370년 5월 고명(誥命), 금인(金印)과 함께 왕의 구장면복(九章冕服)과 원유관복, 왕비의 적의(翟衣), 배신(陪臣)의 배제관복(陪祭冠服)을 사여하였고, 공민왕(恭愍王)을 고려 왕으로 책봉하였다(Goryeosa, 1451b).

고려 왕비에게 사여된 관복은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 청색 9등 적의(翟衣), 중단(中單), 폐슬(蔽膝), 대대(大帶), 혁대(革帶), 패옥(珮玉), 수(綬), 말(襪), 석(舃)으로 구성된 적의 일습이다. 명은 1368년(홍무원년) 11월 황제, 황태자, 친왕, 문무관의 관복과 황후, 황비, 황태자비, 친왕비, 외명부의 관복제도를 제정하였는데(Taejogohuangje sillok, 1418b), 고려 왕비는 1368년에 제정한 제도에 따라 친왕비 복식에 준하는 예복 일습을 사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조선 왕비에게 사여된 관복을 살펴보겠지만, 명으로부터 ‘적의’가 사여된 것은 1370년의 사례가 유일하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건국 후 태조는 표전문제(表箋問題) 등의 갈등으로 인해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했다. 정종 또한 홍무제의 사망과 2차 왕자의 난 등의 혼란으로 책봉을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왕비 또한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했고, 조선에서 1392년 8월 현비(顯妃, 태조의비 신덕왕후)의 책봉(Taejo sillok, 1413a), 1398년 11월 덕비(德妃, 정종의 비 정안왕후)의 책봉이 이루어졌다(Taejo sillok, 1413b). 태종대에 들어서도 1401년 1월 정비(靜妃,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책봉이 자체적으로 이루어졌다(Taejong sillok, 1431b). 이후 명의 건문제(建文帝)와 연왕(燕王, 이후 영락제)이 대립할 때 1401년 2월 고명을 신청하여(Taejong sillok, 1431c), 1401년 6월 건문제로부터 그동안 얻지 못한 고명과 금인을 받게 되었고(Taejong sillok, 1431d), 그 다음 해 2월 명으로부터 친왕의 예에 의거한 구장면복을 사여 받았다(Taejong sillok, 1431e). 1403년(조선 태종3, 명영락원년) 또 한 번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게 되는데,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영락제는 4월 새로운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Taejong sillok, 1431f), 10월 태종과 정비의 관복을 사여하였다(Taejong sillok, 1431a). 왕비 관복은 조선이 건국된 후 처음 사여 받은 것으로, 칠적관, 대삼, 하피, 원령, 추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의 왕은 친왕의 예에 의거하여 계속해서 구장면복을 사여 받은 반면, 왕비 관복은 1370년에 사여 받은 것과 1403년에 사여 받은 것 간에 차이를 보인다. 1370년에는 적의 일습을 사여 받았고, 1403년에는 대삼 일습을 사여 받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홍무원년(1368)의 제도는 황비 이하 외명부까지 모두 적의를 예복으로 착용하는 것이었으나, 홍무연간에 여러 차례 관복제도의 개정을 거쳐 영락원년(1403)에는 황후와 황태자비만이 적의를 예복으로 착용할 수 있었으므로, 1403년 조선 왕비에게 사여된 관복은 이러한 제도의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1403년 이후 약 200년 동안 조선 왕비는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을 때 칠적관, 대홍색 대삼, 청색 적계문 하피, 무늬 새긴 금추자, 청색 적계문 배자, 색 있는 원령[단삼], 오, 군, 상아홀을 사여 받았다. 홍무24년(1391) 제정된 외명부 관복인 대수삼 일습은 적관, 대수삼, 하피, 추자, 배자, 원령[단삼], 상아홀이고, ‘영락3년定’ 군왕비 이상의 예복 일습은 적관, 대삼, 하피, 추자, 사규오자, 국의, 대대, 옥곡규, 옥혁대, 옥화채결수, 계대, 옥패, 석, 말이다. 조선 왕비가 사여 받은 예복은 명의 외명부 관복 구성이다. 외명부의 관복이지만, 칠적관은 세자비, 군왕비, 군주 등급에 해당되고, 그 외는 하피의 무늬, 배자의 색과 무늬를 보았을 때 외명부 1·2품의 등급에 해당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 (Sejong sillok-orye, 1454)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Gukjo-oryeui, 1474)에 조선 왕비 복식이 규정되어 있다. 왕비는 가례(嘉禮) 의식 중 ‘중궁정지명부조하의(中宮正至命婦朝賀儀)’, ‘중궁정지왕세자조하의(中宮正至王世子朝賀儀)’, ‘중궁정지백관조하의(中宮正至百官朝賀儀)’, ‘납비의(納妃儀)’, ‘책비의(冊妃儀)’, ‘책왕세자의(冊王世子儀)’, ‘빈조현의(嬪朝見儀)’에서 최고 예복인 적의, 곧 대삼 일습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Ⅲ. 17세기 초 조선 왕비 관복의 제작 상황과 대삼·하피의 특징
1. 1602년 인목왕후의 혼례와 1610년 광해군비의 책례

1602년(선조35), 선조는 인목왕후를 계비(繼妃)로 맞았다. 임진왜란 이후 왕실에서 처음 행해진 혼례였다. 전란으로 인해 의궤가 거의 소실된 상황에서 몇 가지 자료를 참고해 왕비 혼례복을 마련하였고, 1610년(광해2) 광해군비의 책례복, 1627년(인조5) 소현세자빈의 혼례복, 1638년(인조16) 장렬왕후의 혼례복을 제작하며 점차 조선후기 왕실 여자 관복제도를 형성해 나간다.

먼저 실록의 기록을 통해 17세기 초 전반적인 상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피난 중 면복을 잃어버렸다(Seonjo sillok, 1616a). 1600년에 선조의 정비(正妃)인 의인왕후가 승하하여, 1601년에 왕의 면복만 추가로 하사해줄 것을 명에 주청하였으나(Seonjo sillok, 1616b), 의인왕후가 사망한 사실이 명에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1602년 2월 8일 선조의 면복과 함께 의인왕후의 고명지복(誥命之服) 또한 사여 되었고, 사신은 ‘의인왕후께서 이미 승하하셨지만 고명지복은 종묘에 모셔두어도 괜찮을 것이다.’하여 해명도 하지 않고 함께 받아가지고 돌아왔다(Seonjo sillok, 1616c). 1602년 선조와 인목왕후의 혼례 때 효경전(孝敬殿)에 봉안된 관복을 취품(取稟)하여 제작한 것을 볼 때(Seonjo sillok, 1616d), 이때 받아온 의인왕후의 관복은 혼전(魂殿)인 효경전에 봉안되었을 것이다. 선조는 1602년 7월 13일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았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의궤가 거의 소실되어 왕비 혼례복에 대해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으므로, 임진왜란 전 어느 왕과 왕비의 혼례복 규정인 <가례식(嘉禮式)>(Seonjo sillok, 1616e), 효경전 봉안 관복, 『대명회전』 의 친왕비·군왕비 예복제도를 참고하여(Seonjo sillok, 1616d) 인목왕후의 혼례복을 제작하였다. 1608년 2월 2일 선조가 승하하여 광해군이 즉위하였고(Gwanghae-gun ilgi, 1633a), 1609년 6월 2일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으며 면복과 채폐(綵幣)를 사여 받았다(Gwanghae-gun ilgi, 1633b). 광해군비의 책봉은 선조의 3년상이 끝난 후 1610년 4월 22일 거행되었다(Gwanghae-gun ilgi, 1633c). 광해군비의 책례복을 제작하며 왕과 신하가 논의한 내용 및 최종 결과물은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일방(一房)의궤」 에 기록된다.

인목왕후의 혼례복 제작을 위해 참고한 <가례식>, 효경전 봉안 관복, 『대명회전』 의 친왕비·군왕비 예복제도는 조선후기 왕비 대삼 일습의 무늬표현 방식, 대삼의 색, 형태, 흉배·견화, 대삼 일습의 구성 등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인목왕후의 혼례복에 의거해 제작된 광해군비의 책례복을 통해 확인된다. 『선조실록』 과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17세기 초 왕비 관복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2. 17세기 초 실록과 의궤에 기록된 조선 왕비의 대삼과 하피
1) 대삼 일습의 무늬와 색

대삼 일습의 무늬에 대한 내용은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일방의궤」 1610년 2월 24일 논의에 보인다.

2月24日: 도감에서 아뢰기를, “상의원의 업무인 적의를 도감으로 하여금 제조하도록 하는 일에 대해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적의는 이미 흠사 받은것이 있어 책례 때 마땅히 이것을 사용해야 하므로 도감에서 마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상의 원의 계사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도감에서 마련하겠습니다. 다만, 적의 제구(諸具)가 하나둘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옥대, 패옥, 옥규, 석, 말 등이 있습니다. 지금 만약 모두 차비한다면 상황이 쉽지않을 듯하니, 적의 옷감만 이전의 전교에 의거해 들이겠습니다. 또 그 무늬 짜는 방법을 아는 장인이 없어, (임인년에) 가례도감에서도 그리는 방법만 써서 무늬를 완성했다고 하니, 이번에도 이에 의거해 하는 것을 감히 여쭙니다.”라고 하였다.

전교하시기를, “이번에는 흠사 받은 적의가 있으니 마땅히 이 옷으로 해야 한다. 다만 흠사 받은 것의 장단(長短)의 제도가 몸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그대로 입을 수 없어 부득이 다른 것으로 다시 갖추어야 하니, 임인년의 예에 의거해 만들어 들이라.”라고 하였다(Uiin wanghu, 1610, pp. 108-109).

논의에 따르면, 광해군비 책례 때 명으로부터 흠사 받은 적의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흠사 받은 옷이 몸에 맞지 않아 임인년 혼례의 예에 의거해 새로 제작하기로 한다. 실록에서는 광해군비가 명으로부터 흠사 받은 관복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1609년 6월 2일 명 황제가 광해군을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면서 고명과 면복, 채폐 등을 사여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광해군비가 사여 받은 관복은 『영접도감군색등록(迎接都監軍色謄錄)』 (1610)에서 그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영접도감군색등록』 은 1609년 6월 광해군의 책봉을 위해 명에서 파견된 책봉천사(冊封天使)의 영접을 위해 설치된 영접도감(迎接都監)의 공문서를 모아 놓은 등록으로, 1609년에 광해군비 유씨는 칠적관, 대삼, 하피, 배자, 단삼, 오, 상아홀을 사여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王妃柳氏, 珠翠七翟冠一頂, ⋯⋯象牙笏一枝, ⋯⋯大紅素紵絲夾大衫一件, 青紵絲彩繡圈金翟雞夾褙子一件, 青線羅彩繡金翟雞霞帔一幅, 綠晴花紵絲綴絲彩繡翟雞補子夾團衫一件, 紅暗花紵絲夾襖兒一件.”](Youngjeop dogam, 1610, pp. 1011-1012). 따라서 2월 24일 논의에서 말하는 흠사 받은 적의는 1609년에 사여 받은 대삼 일습을 말하는 것이 된다.

책례도감에서 왕비 관복을 새로 제작하려고 1602년 임인년 혼례의 예를 보니, 인목왕후의 관복은 명으로부터 사여 받은 효경전 봉안 관복을 봉심(奉審)하여 제작하였는데, 효경전에 봉안된 관복의 무늬 짜는 방법을 아는 장인이 없어 가례도감에서 그려서 무늬를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610년에도 임인년의 예에 의거해 제작하기로 하는데,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일방의궤」 ‘적의소입(翟衣所入)’에 따르면, 광해군비의 대삼 일습은 대삼, 배자, 단삼, 오, 군, 하피, 수, 대대, 패옥, 폐슬, 석, 말로, 이 중에서 아청색 배자의 36개 소원문(小圓紋)에 니금으로 봉문을 그렸고[“背子次, 鴉靑無紋匹段代毛段二匹, 內拱藍綃二匹. ⋯⋯背子小圓紋畵金鳳三十六處, 泥金六錢二分, 一圓金絲一尺式, 合三十六尺, 貼金七貼, 帽段一尺五寸.”], 대홍색 하피에 니금으로 적계문을 그렸으며[“霞帔次, 無紋大紅匹段一匹, 內拱大紅綃一匹.⋯⋯霞帔畵金翟鷄, 泥金五錢.”], 대홍색 대삼의 흉배·견화에 니금으로 운룡문을 그렸고[“大衫次, 大紅無紋匹段一匹, 內拱紅綃一匹. ⋯⋯多紅匹段胷背肩花四, 畵雲龍【泥金六錢一分.】.”], 연초록색 단삼의 흉배·견화에 니금으로 운룡문을 그렸다[“團衫次, 軟草綠花紋匹段一匹, 內拱紅綃一匹. ⋯⋯草綠匹段胷背肩花四, 畵雲龍【泥金六錢一分.】.”](Uiin wanghu, 1610, pp. 147-149). 광해군비의 배자, 하피, 대삼과 단삼의 흉배·견화 무늬는 임인년 혼례의 예에 의거해 그려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대삼의 색을 살펴보면,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일방의궤」 3월 1일 논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3月初1日: 도감에서 아뢰기를, “적의에 들어가는 단자(段子)는 ‘임인년 의궤를 따라 마련하여 내전에 들여 만들게 하라.’라고 하신 전교에 의거해야 합니다. 다만, 적의는 그때 가례도감이 아뢰어 홍색을 쓰도록 명을 받았으니 이번에도 또한 이전대로 홍색을 쓰는 것이 마땅한데, 임인년에는 홍색 사(紗)로 했으나 지금은 아직 초여름이니 단자(段子)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Uiin wanghu, 1610, p. 113).

논의에 따르면, 광해군비 대삼은 임인년 의궤의 내용에 따라 홍색으로 제작하기로 하는데, 인목왕후의 대삼은 홍색 사(紗)로 했으나 광해군비의 대삼은 계절을 고려하여 홍색 단(段)으로 제작하기로 한다.

이처럼 1602년과 1610년에 제작된 왕비의 대삼은 무늬 없는 홍색이었다. 그런데 1638년 장렬왕후의 혼례 때부터 왕비의 홍색 대삼에 무늬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일방의대색(一房衣襨色)> ‘중궁전의대물건소입질(中宮殿衣襨物件所入秩)’에 왕비 관복 도식이 실려있는데, 도식에 대삼이라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대삼과 조합을 이루는 하피의 도식이 바로 다음에 등장하므로 대삼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Fig. 6>.


<Fig. 6> 
Daesam(大衫) and Hapi(霞帔) (Injo-Jangryeol, 1638, p. 153)

도식에 따르면 왕비 대삼의 앞뒤에 36개의 무늬를 표현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왕세자빈의 최고 예복인 아청색 적의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왕세자빈의 최고 예복을 ‘적의’라는 명칭으로 기록한 것은 1611년 광해군의 장자 이지(李祬)의 혼례때부터이다. 『세종실록』 「오례」 및 『국조오례의』 에 따르면, 조선전기에는 왕비의 최고 예복을 ‘적의’라 하였고, 왕세자빈의 최고 예복을 ‘명복(命服)’이라 하였다. 그런데 1652년에 편찬된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顯宗明聖王后嘉禮都監儀軌)』 에 따르면, <신해년가례시등록부조비물목단자(辛亥年嘉禮時謄錄付措備物目單子)>에 왕세자(현종)의 혼례를 준비하며 참고한 신해년(1611) 가례등록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빈궁적의(嬪宮翟衣)” 일습으로 아청색 배자, 대홍색 대삼, 단삼, 오, 군, 패옥, 석, 말이 기록되어 있다(Hyeonjong-Myeongseong, 1652, pp. 36-37). 이를 통해 1611년에 왕세자빈의 최고 예복을 적의라 칭한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기록된 아청색 배자를 왕세자빈의 적의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조선전기 왕세자빈의 명복인 아청색 대의(大衣)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 1460년 4월 9일 기록에 따르면, 왕세자(예종)의 혼례 때 납징 명복으로 대홍단자노의(大紅段子露衣), 아청단자대의(鴉靑段子大衣), 금배·견화대홍단자장삼(金背肩花大紅段子長衫)이 사용되었는데(Sejo sillok, 1471), 조선전기 왕세자빈의 아청색 대의는 조선후기 왕세자빈의 혼례 법복인 아청색 적의로, 노의와 흉배겹장삼은 조선후기 왕세자빈 혼례 의대로 나뉘어 정착되어 나간다. 이는 1750년 상의원에서 편찬한 궁중 의복에 관한 정례(定例)를 기록한 『상방정례(尙方定例)』 의 빈궁 법복과 의대 물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Sangbang-jeongrye, 1750).

1602년 인목왕후의 혼례복을 제작할 때, 임진왜란 전 어느 왕과 왕비의 혼례 의대 기록인 <가례식>과 함께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혼례 의대 기록인 <세자가례(世子嘉禮)>를 함께 기록하여 계품(啓稟)하였는데(Seonjo sillok, 1616e), 이를 통해 1602년 당시 <세자가례>라는 임진왜란 전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혼례복 규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세자가례>를 근거로 조선전기 왕세자빈의 아청색 대의는 아청색 배자를 왕세자빈의 적의로 삼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611년 혼례 때 왕세자빈의 아청색 적의[배자]에 모단을 재단해 만든 여관자수(如貫子繡) 36개를 부착하였고[“裌背子一, 無紋鴉靑匹段. ⋯⋯如貫子繡三十六片, 波湯冒段.”](Hyeonjong-Myeongseong, 1652, pp. 36-37), 이는 1627년 소현세자빈의 혼례복에 영향을 미쳐 소현세자빈의 아청색 적의[배자]에 모단을 재단해 쌍봉(雙鳳)을 그린 여관자수 36개를 부착하였다[“無紋鴉靑匹段長二十五尺六寸, 內拱藍熟綃長二十尺, 如貫子繡三十六片, 波湯冒段全廣一尺五寸【畵雙鳳.】.”](Sohyun seja, 1628, p. 103).

1611년과 1627년 혼례 때 왕세자빈이 36개의 여관자수로 장식된 아청색 적의를 착용하게 되자 1638년 장렬왕후의 혼례 때부터 왕비의 적의인 대홍색 대삼에도 36개의 무늬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일방의대색> ‘직조질(織造秩)’에 궐내 시민당(時敏堂)에서 적의 견본을 그릴 때 들어가는 재료가 기록되어 있는데[“闕內時敏堂翟衣起畵時所入.”](Injo-Jangryeol, 1638, p. 185), 삼청(三靑), 이청(二靑), 대청(大靑), 주홍(朱紅), 황단(黃丹), 동황(銅黃), 대록(大綠) 등의 안료와 명교(明膠) 등이 있는 것을 볼 때, 여러 색의 안료를 명교에 섞어 대삼에 무늬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2) 대삼의 형태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일방의궤」 1610년 3월 1일 논의에 따르면, 1609년에 흠사 받은 적의는 효경전에 봉안된 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봉심하지 않고, 임인년 등록에 기록된 효경전 봉안관복의 모양을 참조해 광해군비 책례복을 만들기로 한다. 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月初1日: 도감에서 아뢰기를, “⋯⋯신(臣) 등의 처음 뜻은 임인년의 것을 봉심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전교 내에 ‘밖으로 내어가는 것은 편안하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1609년에) 흠사 받은 것은 필히 효경전에 소장된 것과 다름이 없고, 효경전의 제도는 전에 이미 봉심하여 등록에 기록하였으니, 이것으로 모양을 참조해 만들 수 있습니다. 이번에 흠사 받은 것을 다시 봉심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Uiin wanghu, 1610, pp. 113-114).

1602년 인목왕후의 대삼과 1610년 광해군비의 대삼은 명으로부터 사여 받은 효경전 봉안 대삼에 의거해 제작하였으므로, 모두 명대 영정왕 부인오씨 묘 출토 대삼과 같이 직령, 대금, 광수, 전단 후장형의 형태였을 것이다.

1638년 장렬왕후의 대삼 도식은 광수, 전단후장형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깃의 모양과 길의 여밈은 생략되어 있다<Fig. 6>. 그런데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10월 9일 도감의 계사(啓辭)에 전란 후 가례등록은 『임인등록』 1권뿐이라는 내용이 있고[都監啓曰, “亂後無嘉禮謄錄, 只有壬寅謄錄一卷⋯⋯.”](Injo-Jangryeol, 1638, p. 30), <일방의대색> ‘계사질(啓辭秩)’ 10월 16일 논의에 『임인등록』 에서 상고해보니 교명축 및 적의체제는 당시 흠사받은 제도를 봉심하여 그 모양에 의거해 직조하였으니, 이번에도 전례를 따라 봉심 후 제작하기로 하는 내용이 있다[都監啓曰, “今此嘉禮時所用敎命軸及翟衣體制, ⋯⋯考諸壬寅謄錄, 則其時亦不能觧知, 都監啓請, 令尙衣院看審欽賜誥命軸及冕服制度, 依樣織造以用, 今亦依前規, 令尙方奉審體制後, 依倣織成, 何如?” 傳曰, “依啓.”](Injo-Jangryeol, 1638, p. 102). 따라서 1638년 장렬왕후 대삼의 깃의 모양과 길의 여밈도 직령, 대금의 형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 「길례(吉禮)」 ‘왕비예복제도(王妃禮服制度)’에 18세기 적의 형태가 기록되어 있는데, 적의는 직령·대금[“前面左右相對直下, 不相掩.”], 광수[“左右袂廣齊衣之前長.”], 전단후장형[“前長齊裳端, 後長過裳端尺餘.”]으로(Gukjo-sokoryeuibo-seorye, 1751, Vol. 1), 17세기 초 대삼의 형태는 18세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3) 대삼의 흉배·견화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일방의궤」 ‘적의소입’대삼차(大衫次)에 따르면, 대홍색 대삼의 가슴과 등, 양어깨에 다홍필단을 재단해 운룡문을 니금으로 그린 흉배·견화 4척(隻)이 부착되어 있다[“大衫次, 大紅無紋匹段一匹, 內拱紅綃一匹. ⋯⋯多紅匹段胷背肩花四, 畵雲龍【泥金六錢一分.】.”](Uiin wanghu, 1610, pp. 147-148). 대삼에 흉배·견화를 장식하는 것은 조선 왕실에서 제작한 대삼에서만 보이는 특징으로, 광해군비 대삼에서 처음 확인되며, 장렬왕후 대삼에서도 확인된다. 광해군비의 책례복은 1602년 인목왕후의 혼례복에 의거해 제작하였으므로, 인목왕후의 대삼에 흉배·견화를 장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목왕후의 대삼에 흉배·견화를 장식한 계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왕비의 흉배겹장삼(胷褙裌長衫), 금원문노의(金圓紋露衣)와 같은 예복에 흉배·견화를 부착하는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602년 혼례 당시 임진왜란 전 어느 왕과 왕비의 혼례 의대 제작 규정인 <가례식>을 참고하여 선조와 인목왕후의 혼례복 의대를 제작하였는데(Seonjo sillok, 1616e), <가례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례식>과 비슷한 용어를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가례의대식포진질계하단자(嘉禮衣襨式鋪陳秩啓下單子)>라는 것이다. Oh(2019)의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에 따르면, 1602년 임인년 혼례 때 <가례식>의 내용을 『임인등록』 에 기록하였고, 1638년 무인년(戊寅年) 인조와 장렬왕후의 혼례 때 『임인등록』 에 기록된 <가례식>을 참고하여 혼례복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가례의대식포진질계하단자>는 ‘임인감질(壬寅減秩)’, ‘금감질(今減秩)’, ‘실용질(實用秩)’로 구성되어 있는데, 임인감질은 <가례식>의 물목 중 임인년 혼례 때 감한 것, 금감질은 <가례식>의 물목 중 무인년 혼례 때 감한 것, 실용질은 <가례식>의 물목 중 무인년 혼례 때 사용한 것으로, 결국 임인감질, 금감질, 실용질의 물목을 모두 합한 것이 <가례식>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가례의대식포진질계하단자>는 임진왜란 전 왕비 혼례 의대를 알 수 있는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자료이다. 실용질 물목에 흉배겹장삼, 금원문노의, 흉배 8척이 기록되어 있는데[“胷褙裌長衫壹, ⋯⋯金圓紋露衣壹, ⋯⋯胷背捌隻.”](Injo-Jangryeol, 1638, pp. 129-130), 흉배 8척은 조선전기 왕비의 흉배겹장삼과 금원문노의에 각각 4척씩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 왕세자빈의 장삼에 흉배·견화를 장식한 기록은 있으나, 왕세자빈의 노의에 흉배·견화를 장식한 기록은 없다(Sejo sillok, 1471). 조선전기 왕비의 장삼과 노의에 흉배·견화를 장식하여 왕비의대와 왕세자빈 의대 간에 차이를 두었을 것으로 보이며, 1602년 인목왕후의 혼례 때 <가례식>에 의거해 왕비의 장삼과 노의에 흉배·견화를 부착함에 따라 최고 예복인 대삼에도 흉배·견화를 부착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1610년 광해군비 대삼의 흉배·견화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4) 대삼 일습의 구성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일방의궤」 ‘적의소입’에 대삼 일습이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비의 대삼일습은 대삼, 배자, 단삼, 오, 군, 하피, 수, 대대, 패옥, 폐슬, 석, 말로, 이 중에서 수, 대대, 패옥, 폐슬은 명으로부터 사여 받은 적이 없는 부속이고, 폐슬은 명의 대삼 일습에 포함되지 않는 부속이다.

의궤에 기록된 광해군과 신하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 광해군비의 대삼 일습은 1602년 인목왕후의 대삼 일습에 의거해 제작되었다. 그동안 조선 왕비는 관을 제외하면 명의 외명부 1·2품에 해당하는 예복 일습을 사여 받았으나, 임인년 당시 관료들은 효경전 봉안 관복이 『대명회전』 친왕비·군왕비 예복제도에 비해 미비한 구성이라 여겼다(Seonjo sillok, 1616d). 따라서 『대명회전』 ‘홍무3년定’ 친왕비 적의 일습(적의, 중단, 폐슬, 대대, 옥혁대, 패옥, 수, 석, 말)과 ‘영락3년定’ 친왕비·군왕비 대삼 일습(대삼, 하피, 추자, 사규오자, 국의, 대대, 옥곡규, 옥혁대, 옥화채결수, 계대, 옥패, 석, 말)을 참고하여 미비한 구성을 보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1610년 광해군비 대삼 일습의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5) 하피의 무늬와 형태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일방의궤」 ‘적의소입’ 하피차(霞帔次)에 따르면, 광해군비의 하피는 대홍색 단에 니금으로 적계문을 그려 제작하였다[“霞帔次, 無紋大紅匹段一匹, 內拱大紅綃一匹. ⋯⋯霞帔畵金翟鷄【泥金五錢.】.”](Uiin wanghu, 1610, p. 148). 이후 소현세자빈의 혼례 때는 아청색 하피를 제작하였는데, 무늬에 대한 기록은 없다[“霞帔, 雅靑羅半骨長十尺.”](Sohyun seja, 1628, p. 104). 장렬왕후의 혼례 때는 모단 한 폭을 나누어 두 가닥을 만들고, 한 가닥에 14개씩 총 28개의 적계문을 니금으로 그렸다[“鴉靑無紋紗霞帔壹副次代冒段陸尺【分作二隻, 泥金貳錢, 畫金翟鷄, 每隻拾肆式.】.”](Injo-Jangryeol, 1638, p. 153). 이처럼 1602년 혼례 때 무늬를 그려서 표현한 예는 이후 하피 무늬 표현 방식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에 실린 하피 도식에 따르면, 장렬왕후 하피의 형태는 명대 하피와 차이를 보이는데, 명대 영정왕 부인 오씨 묘 출토하피와 같이 두 가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단 한 폭을 반으로 나누어 두 가닥을 만들고, 두 가닥을 다시 하나로 길게 이어붙인 것으로 보인다<Fig. 6>. 따라서 하피의 총 길이가 명대 하피의 2배로 늘어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무늬의 개수도 늘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대학교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에 대한제국시기 하피가 소장되어 있는데, 명대 영정왕 부인 오씨묘 출토 하피의 길이가 245cm이고, 3점의 대한제국시기 하피의 길이가 495cm, 492cm, 498.8cm로 오씨 묘 출토 하피 길이의 약 2배임을 볼 때, 17세기 초 정해진 하피의 길이는 대한제국시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Ⅳ. 결론

본 연구에서는 송대 대수와 하피, 명대 대삼과 하피를 통해 조선 왕비 대삼과 하피의 연원을 살펴보고, 1602년 인목왕후 혼례 준비 기록을 담은 『선조실록』 과 1610년 광해군비 책례 기록을 담은 『광해군비책례도감의궤』 를 통해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왕비 관복을 제작해나가는 17세기 초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연구를 통해 알아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남송대에 황실 후비의 상복으로 제도화된 대수·하피는 명대에 황후와 황태자비의 상복이자 황제와 친족 관계에 있는 신분(친왕비, 군왕비 등)과 내외명부의 예복인 대삼·하피로 이어진다. 조선 왕비는 1403년(태종3)부터 약 200년간 명의 외명부 1·2품의 예복에 해당하는 대삼 일습을 관복으로 사여 받는다.

임진왜란 이후 의궤 등의 자료가 소실된 상황에서 1602년 임인년 선조와 인목왕후의 혼례 때 <가례식>, 효경전 봉안 관복, 『대명회전』 의 친왕비·군왕비 예복제도에 의거해 인목왕후의 혼례복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1610년 광해군비의 책례 때 임인년 혼례를 기록한 의궤와 등록에 의거하여 광해군비 책례복을 제작하였다.

광해군비 책례복 제작을 위해 1602년 혼례의 예를 보니, 당시 인목왕후의 대삼은 명으로부터 사여 받은 효경전 봉안 관복을 봉심해 제작하였는데, 효경전에 봉안된 관복의 무늬 짜는 방법을 아는 장인이 없어 가례도감에서 그려서 무늬를 완성한 사실을 알게 된다. 광해군비 대삼 일습의 무늬 또한 니금으로 그려서 표현하였는데, 배자의 36개 소원문에 봉문을 그렸고, 하피에 적계문을 그렸으며, 대삼과 단삼의 흉배·견화에 운룡문을 그렸다. 대삼의 색은 인목왕후의 대삼과 같이 홍색으로 하였다. 인목왕후와 광해군비의 대삼에는 무늬를 표현하지 않았으나, 1611년과 1627년 혼례 때 왕세자빈이 36개 여관자수로 장식된 적의[배자]를 착용함에 따라, 1638년 장렬왕후의 대삼에 36개의 무늬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1602년 인목왕후의 대삼, 1610년 광해군비의 대삼, 1638년 장렬왕후의 대삼은 모두 봉심한 제도에 의거해 제작하였으므로, 명대 영정왕 부인 오씨 묘 출토 대삼과 같이 직령, 대금, 광수, 전단후 장형이었을 것이다. 『국조속오례의보서례』 「길례」 ‘왕비예복제도’에 따르면, 적의는 직령, 대금, 광수, 전단후장형으로, 17세기 초 대삼의 형태는 18세기 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비의 대삼에는 운룡문 흉배·견화가 장식되어 있다. 흉배·견화를 장식하는 것은 조선 왕실에서 제작한 대삼에서만 보이는 특징으로, 1602년 혼례 때 <가례식>에 의거해 왕비의 흉배겹장삼, 금원문노의와 같은 예복에 흉배·견화를 부착함에 따라 최고 예복인 대삼에도 흉배·견화를 부착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1610년 광해군비의 대삼, 1638년 장렬왕후의 대삼으로 이어진다.

광해군비의 대삼 일습은 대삼, 배자, 단삼, 오, 군, 하피, 수, 대대, 패옥, 폐슬, 석, 말로 이는 1602년 인목왕후의 대삼 일습에 의거한 결과물이다. 1602년 당시 효경전 봉안 관복이 『대명회전』 친왕비·군왕비 예복제도에 비해 미비하다 여겨, 『대명회전』 ‘홍무3년定’ 친왕비 적의 일습과 ‘영락3년 定’ 친왕비·군왕비 대삼 일습을 참고하여 미비한 구성을 보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1610년 광해군비 대삼 일습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광해군비의 하피는 대홍색 단에 니금으로 적계문을 그려서 제작하였고, 장렬왕후의 하피는 모단에 니금으로 적계문을 그려서 제작하였다. 이처럼 1602년 혼례 때 무늬를 그려서 표현한 예는 이후 하피 무늬 표현 방식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도식에 표현된 하피의 형태는 두 가닥으로 이루어진 명대 하피와 달리 두 가닥을 하나로 길게 이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제작 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길이와 무늬의 개수 또한 달라진다.

실록과 의궤의 기록을 통해 17세기 초 왕비 복식을 추론해 보았다. 1602년 임인년에 제작한 인목왕후의 대삼 일습은 임진왜란 이후 왕비 관복의 첫 선례(先例)가 되어 조선후기 왕비 관복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임인년 혼례를 기록한 의궤와 등록이 현전하지 않으므로, 이후의 문헌 기록을 통해 추측하여 결론지은 부분도 있다. 향후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이러한 부분을 확증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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