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Current Issu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4 , No. 1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2, No. 6, pp. 62-82
Abbreviation: J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22
Received 23 Sep 2022 Revised 25 Nov 2022 Accepted 27 Nov 2022
DOI: https://doi.org/10.7233/jksc.2022.72.6.062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要人)들의 복식 연구
이호정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겸임교수

The Costumes of the Leading Figure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Ho Jung Lee
Adjunct Professor, Dept.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Ho Jung Lee, e-mail: habile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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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study divided the entire provisional government era into three periods and identified dress trends in each period. The type, characteristics, and wearing styles of costumes for each period were analyzed and the role of the outfits was reviewed. Unlike the general government,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was a form of government with a unique characteristic. The era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the Shanghai period(1919-1932), the Wandering period(1932-1940), and the Chongqing period(1940-1945)), with the overall circumstances and main activities of the government varying between each period. The men were leading figures and staff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most of whom wore western clothing. Notably, the leaders of the March 1 Movement in 1919 wore western suits, helping to spread western styles among the general public. Photos show that membe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wore different styles of suits that were popular in each period. Some of them wore Chinese clothing such as Jangsam and Magua. Jangsam and Magua were often worn during the Wandering period when Japanese suppression was at its peak. Later, during the Chongqing period, some wore the Zhongshan suit (Mao suit). The women captured in photos were either warrior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or family members and staff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They dressed in western costumes, Qipao, Jangsam, or Hanbok. Women wore Hanbok more often than men, and women residing in North America and Russia donned western clothings that were popular at the time. The costumes worn by leading figures and member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reflected the struggle for independence. They provide clues to the challenges that were facing the country during those periods.


Keywords: appearance of wearing dress,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men's suits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Leading Figure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Zhongshan suit
키워드: 복식 착용양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20세기 초 남성 양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중산복

Ⅰ. 서론

지난 2019년은 3·1운동의 발발(勃發)과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였다. 이를 맞이하여 전국에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되새기고, 역사적 발자취를 돌아보는 다양한 행사 및 전시가 추진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수립된, 국가와 정부로서의 역할과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최고기구였다(Kim, 2018).

한편, 2000년대 이후 국내 학계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미비한 편이었다. 그 이유는 이미 1980-90년대에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의 형성과 임시정부의 활동이 국외에서 전개된 까닭에 국외 자료를 찾아 연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진입장벽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발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기념 논문집』(1999)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주도하에 간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2005~2011)이 있다. 그 외에 역사학계에서의 연구들은 대부분 임시정부의 수립과 운영체제, 단체와 정당조직, 정부 이념, 정부 구성 주요 인물 또는 개인별 활동에 관한 주제(Cho, 2009)로 진행되어왔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중에서 독립운동가들의 고달팠던 생활사에 관한 연구는 그 필요성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아직까지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독립운동사’라는 시기에 국한하여 생활사를 연구하거나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주변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본 구체적인 연구는 그동안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관련된 대표 연구로 Jang(2004)Cho(2009)의 것이 있으며, 현재까지 3~4편 정도에 불과하다. 더욱이 복식사학계에서는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하거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를 범위로 한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 이유는 실제 독립운동가들의 복식을 확인할 기회나 자료가 적고,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지에 산재해 있는 방대한 국외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에 활동했던 요인들과 그 주변 구성원들의 생활사 중 ‘의생활’에 주목하였다. 구체적인 연구의 목적과 내용을 정리하면, 먼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기를 크게 3기로 나누어 시기별 배경을 파악하였다. 또한, 각 3개의 시기별로 착용된(군복류를 제외한) 복식의 종류와 특징을 살펴보고, 그 결과를 중심으로 복식의 착용 양상을 시기별, 성별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복식의 착용과 변화에 영향을 준 요인을 분석하고, 이들 복식이 가졌던 역할과 의미를 논의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범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시작으로 광복이 이루어진 1945년까지를 하한연대로 하였다. 연구자료와 방법은 문헌 자료를 통한 이론적인 내용과 실증적인 시각 자료 및 유물을 고찰하는 연구가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먼저 비교적 시기를 규명할 수 있는 행사 기념 혹은 활동집, 회고록에 수록된 사진 자료를 확보하였으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되고 있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웹사이트에 소장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에서 복식과 관련된 내용을 추출하여 정리하였다. 이 두 가지 자료와 방법을 중심으로 현존하여 전해지는 복식 유물자료를 함께 실견하였으며, 그 외에 선행연구와 단행본, 박물관 도록들을 참고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주변 구성원들이 착용했던 복식은 우리나라의 독립투쟁사,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분이다. 이들의 복식은 당시 우리가 처해 있었던 정치·외교적 상황을 이해하게 하는 단서가 될 것이며,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상을 반영하여 그들의 활동과 의식을 파악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작업의 첫걸음으로써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및 독립운동사 생활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기별 배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반 정부의 개념과는 달리 특수한 성격을 가진 정부 형태였다. 임시정부는 정착했던 지역과 시기에 따라 크게 상하이 시기(1919-1932), 이동 시기(1932-1940), 충칭 시기(1940-1945)의 3개로 나눌 수 있으며, 시기별로 정부가 처한 상황과 배경, 주력했던 활동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상하이 시기(1919-1932)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내 프랑스조계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그해 9월 서울의 한성정부 및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연합하여 단일정부로 재출범하였다. 이때부터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를 떠나게 될 때까지의 시기를 ‘상하이 시기’라고 한다.

한편, 상하이 시기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일제 치하에서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고 있었다.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국민 주권론을 확고히 하는 의미의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었다(Jang, 2021). 이후 1919년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의 향방에 따른 국제 정세의 변화에 힘입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을 고발하고 한국독립이 정당하다는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은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3·1운동으로 이어졌고, 1919년 4월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제정 및 공표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화되었다. 다만, 이 시기 임시정부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정부’, 서울의 ‘한성정부’의 세 갈래로 나타나 혼선을 줄 우려가 있었다. 이에 따라 세 정부를 모두 아우르면서 한성정부의 정통을 잇는 ‘통합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재출범하면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본격적인 활동이 진행되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각 방면의 정책을 수립하면서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대비하고 민족역량의 증대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즉, 국내외 동포사회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조직을 확대 및 통할하면서 외교활동과 독립을 위한 지도에 주력하였다. 또한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 들어와 임시정부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과 대내외적인 여건의 악화로 침체되는 형국이었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이 고조되었는데, 이후에도 체제 문제는 임시정부의 골칫거리였으며,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면서 혼선이 많았다. 1927년에는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개정한다는 조건을 달고 김구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었고, 민족운동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의 협력이 모색되었으나, 이듬해엔 민족 협동전선이 무너졌다. 1929년에는 좌파 중심의 유효 동맹이 결성되었고, 1930년에 만들어진 민족주의자 중심의 한국독립당은 1931년부터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활동하였다.(Provisional Government Memorial Society of Korea & Committee for the Construc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Memorial of Korea [PGMSK & CCPGMK], 2017).

김구 등은 이러한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고 임시정부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31년 한인애국단이 임시정부의 특무공작대로 조직되면서 의열투쟁의 새로운 국면전환을 시도하였다. 같은 해 7월에 일본은 ‘완바오산 사건’을 빌미로 한국과 중국 간의 감정을 악화시켰으나, 1932년 1월 이봉창의 도쿄 의거와 4월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로 인해 극도로 악화되었던 한중간의 민족 감정은 호전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 역시 이루어졌으나, 이 사건들의 배후로 임시정부와 김구가 지목되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더는 상하이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옮겨졌으며,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2. 이동 시기(1932-1940)

이동 시기는 일제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가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지역을 순서대로 이동하면서 온갖 수난을 겪으며 독립운동 및 활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는 지속적으로 정부 체계를 정비하고, 항일독립 운동 진영과의 연합전선,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 삼엄해진 일제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 자싱으로 피신하였으며, 임시정부도 항저우로 옮겼다. 또한 완바오산 사건으로 악화되었던 한·중 사이의 민중 관계가 호전되면서, 윤봉길의 의거에 마음이 동한 중국은 육군중앙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인 특별반을 신설하여 이후 한국광복군의 근간이 된 군사간부를 배출하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에서 임시판공처를 개설하여 국무회의를 열고 개각을 단행하였으며, 1935년 11월에는 판공처를 전장으로 옮겼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1937년 7월에 군사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같은 해 11월 후난성 창사로 이전하였다. 1938년 7월에는 광저우로, 다시 10월에는 류저우로 이동하였다. 1939년 5월 쓰촨성 치장에 임시판공처를 설치한 임시정부는 국무회의에서 화북 지방에 군사 특파원을 파견하기로 하였다(PGMSK & CCPGMK, 2017). 임시정부는 이처럼 계속 피신하며 이동하는 처지였지만, 국무회의를 개최하고(1935, 1939), 임정 호구 등록 포고문을 발표하거나(1936), 3·1 독립선언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개최(1938. 3. 1)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특히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중국 내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대일항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 시기 설치된 군사위원회는 항일전의 중장기적인 군사 계획을 수립하고 예비공작을 수행하였으며, 1938년에는 김원봉의 주도 아래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고, 이 가운데 일부가 이후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3. 충칭 시기(1940-1945)

충칭 시기의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를 통로로 국제적인 외교를 강화하고, 광복군을 창설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광복된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약 8년간의 이동 시기를 끝내고 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는 헌법을 정비하고, 정당으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국가체제를 모색하면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개편하였다(Jung, 2009). 1940년 이동녕의 서거 후 김구가 주석이 되면서 조선혁명당, 재건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합당 논의가 진행되었다. 같은 해 5월,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고,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확대, 단일 지도체제의 확립, 한국광복군의 창설 등과 같은 활동을 통해 임시정부를 최고 지도부로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었다(Han, 1995). 이와 같은 노력은 1940년대 이후, 독립운동 전선에 있던 여러 단체와 연계를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중국 정부를 통한 국제 외교를 강화하였는데, 그 결과 1943년 카이로 선언 후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눈에 띄는 성과는 한국광복군의 창설이다. 광복군은 초기에는 중국의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8.15광복 직전에 소속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관되었다.

한편, 이 시기의 임시정부의 주요 과제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인 좌파와 우파의 이념 갈등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이념 갈등의 극복을 위해 중국은 우파였던 김구와 좌파인 김원봉에게 제휴를 조언하였고, 1941년 11월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이념적 차이를 좁히고자 하였다. 이후 1942년 임시의정원 선거 규정이 개정되면서 좌파의 임시정부 활동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고, 1944년에는 임시헌장 개정을 통해 여당인 한국독립당이 단독으로 운영하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여야의 여러 정치단체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되었다. 그 결과, 임시정부도 최종적으로 좌우합작의 정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PGMSK & CCPGMK, 2017).


Ⅲ.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별 복식의 종류와 특징

본 장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시기를 상하이 시기, 이동 시기, 충칭 시기의 3기로 나누어 각각의 시기에 남녀별로 착용했던 복식의 종류와 그 특징을 고찰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진행하기 위하여 다음의 3가지 조사 방법을 활용하였다.

첫 번째로 임시정부 시기의 사진 자료들을 수집하여 임정 요인들과 그 구성원들이 착용하고 있는 복식을 분석하였다. 이때 활용한 주요 자료는 박물관 도록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 근현대사 사진 모음’ 웹사이트 중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진들을 중심으로 기타 회고록 등을 참고하였다. 각각의 도록과 웹사이트에서 서로 겹치는 사진 자료들을 제외하고 수집한 것은 총 115여 점이며,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 개개인의 복식 양식을 확인하였다. 이 중 복식의 형태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진들을 중심으로 39점(상하이 16점, 이동 10점, 충칭 13점)을 다시 선별하였다. 이 사진에 나타난 인물들이 착용한 복식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당시 복식의 종류와 특징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의 기록 중 복식과 관련된 내용을 목록화하여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 작업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 웹사이트에서 복식 및 의생활과 관련된 키워드를 입력하여 나오는 결과들을 목록화하는 것이다. 입력한 키워드는 ① 의복 ② 양복 ③ 한복 ④ 중국복(중복) ⑤ 일본복(일복) ⑥ 피복 ⑦ 방한복 ⑧ 제복 ⑨ 복장과 같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양복, 한복, 중국복, 일본복의 자료만을 활용하였고, 목록 자료들의 내용을 하나씩 분석하면서 당시 각각의 복식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내용을 유추해 보았다.

세 번째로는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등의 박물관을 방문하여 직접 임정 요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착용했던 복식 유물의 실물을 실견하였다.

각 시기의 복식의 종류는 크게 서양복, 중국 양식의 의복, 한복으로 분류하였고 각각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1. 상하이 시기
1) 남자 복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부분 남자로 구성되어 있어 사진이나 기록 자료들을 통해 당시 남자 복식의 특징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要人)들과 독립운동가, 임시정부의 직원들로 파악하였다.

첫 번째로 살펴볼 복식의 양식은 재킷과 바지로 구성된 양복류이다. 191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의 양복 착용은 서서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미 1910년대 중반에는 30~40여 개의 양복점이 서울에 있었으며, 양복을 즐겨 찾는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다(Geum et al., 2015). 이 계층은 주로 공무원, 회사원, 교육자 등의 사회 엘리트 계층이었으며, 이들은 신문화에 대한 개방 풍조에 편승하면서 남성으로서의 품위를 표현하는 격식을 존중하고자 하였다(Kim, 1990). 특히 1919년의 3.1운동은 양복을 즐겨 착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양복 착용자들을 중심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즉, 3.1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요인들이 주로 착용했던 것이 양복이었으며, 다음 <Fig. 1>을 통해 당시의 양복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앞줄 가운데 안창호를 중심으로, 6명의 국무원 각료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양복을 입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투 버튼 혹은 쓰리 버튼의 재킷, 조끼, 하얀 셔츠와 넥타이, 바지, 구두를 착용하고 있다. 특히 신익희(앞줄 왼쪽 1번째)는 하이칼라의 셔츠를 입고 있으며, 현순(앞줄 오른쪽 1번째)은 커프스가 있는 바지를 착용한 점이 눈에 띈다. 또한 <Fig. 2>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양복 차림인데, 재킷과 바지의 색채가 서로 다른 편안한 스타일의 의복을 입고 있다. 위의 두 사진은 모두 1919년대에 촬영된 것이지만, 1920년대 후반까지 유행했던 양복 스타일을 잘 말해주고 있다. 당시 유행했던 양복 스타일은 격식을 갖춘 영국풍 스타일과 디자인이 다양한 세퍼레이츠(separates) 스타일의 앙상블 슈트 등이다. 먼저 상ㆍ하의가 모두 같은 색채를 가진 투버튼 혹은 쓰리 버튼의 재킷, 조끼, 셔츠, 넥타이, 바지를 착용한 스타일은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영국풍의 스타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스타일은 1920년대로 넘어가면서 재킷의 길이가 길어지고 바지의 폭이 넓어지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때 착용했던 양복 스타일을 라운지 재킷(lounge jacket)이라고 하였다(Fashion Specializes in Data Dictionary Compilation Committee [FSDDCC], 1997). 라운지 재킷은 현대 신사복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당시에는 세비로(せびろ[背広])라는 이름으로 유행하였다고 한다(Geum et al., 2015). 또한 세퍼레이츠는 디자인이 다양한 양복 스타일이다. 세퍼레이츠는 재킷과 다른 직물이나 문양으로 된 바지나 스커트를 입거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의복을 일습으로 착용하는 것을 말한다(FSDDCC, 1997; Geum et al., 2015). <Fig. 2>에서 보이는 상하의 색채가 다른 의복을 입은 모습은 당시의 전형적인 세퍼레이츠 양식은 아니지만 1920년대 후반 세퍼레이츠 양식의 인기가 정점이 되기 전에 보이던 스타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Fig. 1> 
Minister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 1919.10.11., Shanghai, China.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KPG], n.d.-a, Shanghai period)


<Fig. 2> 
6th Anniversary of the Provisional Assembly of Korea - 1919.09.17., Shanghai, China.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 National Archives of Korea [NMKCH & NAK], 2019, p. 109)

또한 1920년대에는 양복 위에 외투나 코트류를 함께 착용하고, 신사복의 착용에 따른 악세서리도 빠짐없이 갖추어 격식을 차렸다. 의복 일습과 함께 갖춘 악세서리류로는 넥타이 혹은 보타이, 모자, 구두, 지팡이, 회중시계 등이다(Kim, 1990). <Fig. 3>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미국의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구미위원회를 나서는 이승만(왼쪽)과 서재필(오른쪽)의 모습이다. 두 명 모두 매우 격식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높은 크라운과 좁은 챙을 특징으로 하는 실크 햇(silk hat)을 쓰고 있다. 이승만은 싱글 체스터필드 코트(single chesterfield coat)형으로 추정되는 전형적인 1920년대 코트를 착용하고 있으며, 서재필은 더블 체스터필드 코트(double chesterfield coat)를 입고 있다. 또한 이승만은 손에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당시 지팡이는 신사의 조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악세서리였다.


<Fig. 3> 
Rhee Syng-man and Seo Jae-pil - 1921-1922., Washington D.C., U.S.A. (PGMSK & CCPGMK, 2017, p. 88)

이 시기의 남자들의 양복 차림에 관한 내용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먼저 한인애국단 활동 관련 자료에 실린 내용 중 김구와 윤봉길이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구가 거사 당일 윤봉길이 입을 양복을 준비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NIKH], 2008). 또한, 백범 김구가 쓴 『백범일지』 중에도 비슷한 시기에 남겨진 다음의 내용을 통해 당시 양복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 일을 마친 후 나는 거지 복색인 중국옷을 벗어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양복 한 벌을 사서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엄연한 신사라(Kim, 2021, p. 333).

이 내용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위해 제조한 도시락 폭탄을 김구가 직접 윤봉길의 숙소로 배달하는데, 무기제조 공장 차로 서문로의 왕웅(王雄) 군의 집으로 가져다주고 나서 남긴 말이다. 또한,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안창호의 체포를 다룬 한인애국단 관련 보도기사 중에서, 안창호를 리유필(李裕弼)로 착각하여 체포하였고, 그가 살고 있던 하비로(霞飛路) 1014통 29호에는 낡은 양복 두 벌이 남아 있었다는 내용(An Chang-Ho was arrested, 1932)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하이 시기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부분 양복 차림을 선호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이 국내의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복식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이들이 착용한 신사복과 악세서리 일습은 클래식한 면을 강조하였으며, 복장을 통해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격식과 형식을 중요시하였다는 특징을 가졌다(Kim, 1990). 또한, 이들이 활동했던 상하이라는 공간 안에서의 양복은 독립운동가들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착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임시정부 시기의 남자들이 착용한 중국식 복식류로, 장삼, 마괘, 중산복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장삼은 청대 한족 남자의 고유한 복식으로 평상시에 입었던 직선적인 실루엣의 도련이 넓고, 좁고 긴 소매가 달린 형식의 포이다. 좌우 양쪽에만 트임이 있고 마제수가 없는 일자형의 소맷부리를 가진 의복으로, 장포라고도 하였다(Hong, Shin, & Lee, 2011). 임정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로 망명한 직후에 대부분 양복을 착용하고 있었으나, 이후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중국식 복장을 착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상하이에 망명 후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는 이숙(李淑)이 남긴 기록(Cho, 2009)을 통해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勿論 처음에는 스물이고 서른이고 모두들 누구던지 洋服이니 외투니 時計等을 안차고 안입은 사람이 없었고 안가진 사람이 없었지만 하루가고 이틀가고 하여 모두들 주머니 비게되면 할 수 없이 이 사람의 것 오늘 전당접혀 오늘 살고 저 사람의 것 내일 잡혀 내일 살고 이렇게 하다보면 弄場 넓직한 방에 전세든 數三十名食口가 거의 모두가 헐직한 中服으로 갈아입게 된다(Cho, 2009, pp. 27-28).

위의 기록처럼 상하이 시기의 중국식 의복인 장삼을 입은 모습을 살펴보면, <Fig. 4>는 1919년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기 위하여 조직된 사료편찬위원회 위원들의 모습이다. 이 중 우승규(앞줄 왼쪽 2번째), 김두봉(앞줄 왼쪽 4번째), 안창호(뒷줄 중앙)와 박현환(뒷줄 오른쪽 1번째)이 장삼을 착용하고 있다. 흑백사진이라 정확한 여밈의 형태가 보이지 않지만, 허리에 대를 하지 않은 전형적인 장삼임을 알 수 있다. 덧붙여 현재 독립기념관에는 힘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 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이회영의 장삼 유물 <Fig. 5>이 남아 있다. 장삼의 전체적인 규모는 화장 81, 길이 129, 품 51, 소매길이 54cm로 제작된 검은색 장삼이다(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IHK], 2009).


<Fig. 4> 
Members of the Interim Historical Data Compilation Committee – 1919.06., Shanghai, China. (PGMSK & CCPGMK, 2017, p. 54)


<Fig. 5> 
Jangsam of Lee Hoe-young (IHK, 2009, p. 74)

본래 중국 청대 시기, 격식을 갖춰야 할 자리에서 반드시 장삼 위 장괘를 덧입었다. 이후 1912년 민국 시기에 들어서부터 마괘를 착용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괘는 원래 청나라 초기에 군복으로 착용하던 길이가 짧은 상의였다. 제 5대 옹정제(雍正帝) 연간부터 일반인의 평상복으로 착용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Hong et al., 2011).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삼 위에 마괘를 착용한 모습은 다음 <Fig. 6>에서 볼 수 있는데, 정확한 촬영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사진상의 신채호(왼쪽)는 장삼 위에 마괘를 입고 있는데, 두툼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겨울철에 솜을 넣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앞여밈으로 매듭단추가 달려있다.


<Fig. 6> 
Shin Chae-ho, Shin Seok-woo, and Shin Kyu-sik - Presumed to be a Shanghai, China. (KPG, n.d.-a)

마지막으로 상하이 시기에 한복을 착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나 독립운동가의 자료는 극히 찾아보기가 힘들다. 확인한 자료는 대통령 국무령을 소개하는 페이지에서 찾아낸 증명사진과 같은 것으로, 제2대 대통령인 박은식만이 한복을 착용하고 있다. 박은식은 국어와 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인물로, 1925년에 임시정부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은식의 의복의 깃 부분에서만 한복임을 알 수 있어 정확하게 어떠한 종류의 의복을 착용했는지, 언제 촬영한 자료인지에 대한 정보가 명확하지 않다. 이 시기 한복을 착용한 자료는 전무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에는 한복과 관련된 기록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내용은 ‘동쪽 3성의 한인 교포에 대한 신법령 12종 64조’의 기록 중에서 7조 ‘귀화한 한국인에 대하여는 한복 착용을 절대 금지한다.’라는 기술이다(NIKH, 2006). 이 내용은 1931년쯤에 선언된 내용으로 보이는데, 당시 한복을 통해 한국인이라는 신분이 알려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착용이 금지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2) 여자 복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부분 남자로 구성되어 있어, 사진이나 기록 자료에서 여자들의 모습이 월등히 적게 나타난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있어서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여성 가족 구성원과 직원들의 복식을 주로 살펴보았다.

첫 번째로 살펴볼 복식 양식은 서양식 양장으로, 1910년대부터 양장을 착용한 여성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깁슨 걸 스타일의 원피스 드레스였는데, 가는 허리에 소매와 스커트가 풍성하게 강조되는 스타일이다. 블라우스는 전체적으로 품이 넉넉한 스타일로, 하이 네크라인에 러플 칼라나 스탠드 칼라가 달린 것이 많았다. 스커트도 플레어나 A라인의 롱 스커트가 착용되다가 1918년 이후 발목 위로 올라오는 비교적 짧은 길이의 것을 착용하였다(Geum et al., 2015). 이와 같은 양장류의 특징은 주로 미국 지역에서 활동한 여자들이나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의례 복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Fig. 7>은 1927년에 진행된 엄항섭과 연미당(중앙, 화동 어린이 뒤쪽)의 결혼식 장면인데, 서양식의 웨딩드레스를 착용한 연미당의 오른쪽 옆에 들러리로 보이는 두 명의 여성들(앞줄 오른쪽 4,5번째)은 모두 흰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피사체가 착용한 원피스의 정확한 실루엣은 알 수 없지만, 직선형으로 보이며, 길이는 다소 짧은 무릎 정도까지의 길이이다. 이처럼 당시에는 직선적인 실루엣의 원피스가 유행하였으며, 스커트의 길이는 점차 짧아져서 무릎 부위까지 오는 것이 착용되었다(Geum et al., 2015).


<Fig. 7> 
The Wedding of Eom and Yeon - 1927., Shanghai, China. (KPG, n.d.-a)

두 번째로 살펴볼 복식 양식은 중국식 여자복식이다. 당시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아 했던 김의한의 부인인 정정화(鄭靖和)가 남긴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하이에 있는 동안 한복을 입지 않고 줄곤 짱산(장삼)이라는 중국 옷을 입고 지냈고, 임정의 어른이건 아녀자들이건 모두 이 짱산을 입었다(Cho, 2009, pp. 26-27).

먼저 정정화의 기록에 나타난 짱산이 정확하게 어떤 의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짱산은 장삼(長衫)의 중국식 발음으로 보인다. 청대 이후 여자복식을 살펴보면, 장삼이라는 표현보다는 장포나 기포(旗袍[치파오])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남자의 장삼 역할을 했던 여자의 복식은 장포나 치파오였던 것이다.

그러나 1931년 상하이 시기,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들이 모여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여자들의 복식은 장포나 치파오라고 할 수 없다. <Fig. 8>에서 연미당(앞줄 왼쪽 2번째)과 연미당 어머니(뒷줄 왼쪽 2번째)는 서양식의 블라우스와 코트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명을 제외하고 연미당의 오른쪽의 정정화는 장삼을 입었고, 신명호(민필호 부인)를 비롯한 뒷줄의 여자들은 모두 상의와 하의로 나누어진 이부식(二部式)의 의복을 착용하고 있다. 이러한 스타일의 의복류는 청대시기 한족의 여자들이 착용했던 상의인 오(襖)나 괘(褂), 하의인 군(裙)으로 볼 수 있다. 오는 주로 가을이나 겨울에 착용했던, 겹 혹은 솜을 두어 비교적 두껍게 제작한 상의이고, 유사한 실루엣의 괘는 앞 중심에서 여미는 맞깃형의 상의이다(Hong et al., 2011). 즉, <Fig. 8>에서 착용하고 있는 중국식 의복은 청대 시기 한족 여자들이 착용했던 오와 군으로 볼 수 있으며, 맞깃형의 괘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개항 초기시기까지 한족의 여자들은 오군양식을 착용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무늬가 없는 직물로 만든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Hong et al., 2011). 1920년대에는 장식성이 강한 스타일로 변화하였고, 치파오는 상하이의 여학생들 중심으로 착용되었다.


<Fig. 8> 
Family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Leading Figures - 1931., Shanghai, China. (PGMSK & CCPGMK, 2017, p. 99)

마지막으로 상하이 시기의 한복 차림을 살펴보았다. 먼저 1910-20년대 여자 한복의 특징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선교사들의 옷차림에 영향을 받아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것과 하의인 치마부분에서 편안한 어깨허리말기가 소개되어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치마 길이가 짧아졌다(Geum et al., 2015). 임시정부 활동에서 여성이 한복을 착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 사진을 찍거나 기념식과 같은 행사 등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한복을 선호하여 착용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2. 이동 시기
1) 남자 복식

1920년대에 이어 1930년대에 양복은 더욱 일반화되었으며, 신문과 잡지, 해외유학생들에 의해 다양한 스타일의 양복이 착용되고, 유행속도가 빨라졌다. 또한 국내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한복과 양복을 혼용하여 착용하는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과도기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은 군복 스타일의 국민복의 착용을 강요하였다(Geum et al., 201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1932년 상하이를 떠나 1940년 충칭에 자리잡기 이전까지, 여러 지역을 이동했던 시기에 착용하였던 복식을 살펴보면, 양복류는 주로 해외 활동이나 정당 활동을 하는 장면에서 주로 입고 있었다. <Fig. 9>는 1933년에 국외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왼쪽)의 모습이다. 중절모(soft hat)을 쓰고, 코트, 재킷, 셔츠, 바지, 구두를 착용하고 있다. 1930년대의 유행했던 양복 스타일을 살펴보면, 먼저 초기에는 좁은 어깨에 몸에 꼭 맞는 스타일이 애용되었고, 20년대에 이어서 악세서리로 착용자의 품위를 강조했다. <Fig. 10>은 1937년 한국독립당 하와이 총본부 간부들의 모습으로 재킷, 넥타이 또는 보타이, 셔츠, 바지, 구두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안창호(오른쪽 2번째)라고 알려진 인물은 다른 색채의 재킷과 바지를 입고 있어, 당시 세퍼레이츠 스타일이 여전히 착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볼드룩(Bold Look)스타일이나 밀리터리 룩이 유행하였으나, 사진 자료상에서는 이러한 유행 스타일의 복식을 잘 찾기 어려웠다.


<Fig. 9> 
Rhee Syng-man - 1933.01.04., Paris, France. (PGMSK & CCPGMK, 2017, p. 132)


<Fig. 10> 
Executives of the Hawaii General Headquarters of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 1937., Hawaii, U.S.A. (KPG, n.d.-b, Wandering period)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중국식 의복인 장삼과 마괘이다. 이들은 상하이 시기부터 착용되어 왔으나, 특히 이동 시기의 임정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더욱 요긴했던 의복류였다. 사진상에서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 대부분이 장삼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이동 시기에 주요 인물들이 장삼과 마괘 차림인 이유는 경제적인 요인도 있지만, 1932년에 있었던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본이 김구와 임정요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삼과 마괘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었고, 이와 같은 이유로 자연스럽게 일상복으로 착용하게 되었던 것이다(Park, 2015).

1930년대 중국에서의 장삼은 정계 활동에서의 예복이자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즐겨 착용하는 의복이었다. 이들의 차림새를 살펴보면, 장삼에 마괘나 마갑을 덧입고, 서양식의 양복바지를 받쳐 입었으며 실크 모자와 흰색 머플러, 가죽 구두를 함께 착용하였다. 이처럼 중국식과 서양식을 접목한 스타일은 민국 초기부터 중상류층 남자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라고 한다(Hua, 2008). 마괘는 많이 착용되지 않았고(Hong et al., 2011), 중노년층에서 격식을 차려야 할 때 주로 착용하였으며, 1940년대까지 예복으로 입혀졌다(Yuan & Hu, 2017). 1930년대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장삼을 착용한 모습은 살펴보면, <Fig. 11>은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자싱으로 피신했을 때 이들을 도와준 중국인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이들과 남자들은 모두 장삼을 입고 있다. 특히 엄항섭(뒷줄 오른쪽 2번째)은 장삼 위에 마갑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마갑은 소매가 없는 조끼형의 짧은 겉옷으로 감견, 배심이라고도 한다. 마괘와 마찬가지로 단추로 여밈을 고정하였고, 깃의 형태나 여밈이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났다(Hong et al., 2011).


<Fig. 11> 
Leading Figure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Chinese Helped Kim Gu's Escape - 1933., Jiaxing, China. (KPG, n.d.-b)

한편 이동 시기에는 상황적인 요인에 따라 한복은 절대 착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이 한복을 사적인 상황에서 착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공식적인 업무나 활동에서는 신분을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2) 여자 복식

이동 시기 여자 복식에서의 서양식 양장류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서양에서 활동한 사람들에 의해 착용되었다. 국내에서는 여성의 양장 착용이 이전 시기보다 확산되었고, 그 품목이 다양해졌다. 1930년대 초기에는 보이시한 스타일이 유행하였으나 중반기 이후부터는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스타일이 선호되었다(Geum et al., 2015). <Fig. 12>는 1938년 7월, 쿠바 마탄사스에서 결성된 대한여자애국단 지부의 임원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앞줄의 앉아 있는 여성들과 뒷줄의 전신이 보이는 여성이 착용한 의복을 볼 때, 원피스 혹은 블라우스와 스커트의 투피스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원피스는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대부분 허리에 벨트를 착용한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소매 부분은 퍼프 슬리브, 래글런 슬리브형이 나타나며, 소매 끝을 레이스로 장식하기도 하였다(Geum et al., 2015).


<Fig. 12> 
Member of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Women's Patriotic Group - 1938.07.10., Matanzas, Cuba. (KPG, n.d.-b)

한편, 이동 시기의 중국 양식의 의복은 상하이 시기와는 다소 다른데, 전형적인 치파오 차림을 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인들을 볼 수 있다. 1930년대의 임시정부 자료에서 보이는 치파오는 중국에서 1920년대부터 점차 유행했던 의복이다. 1920년 초기의 치파오는 품이 넓고 직선적인 실루엣 형태로, 길이는 다소 짧아 발목 정도의 길이이며 안에 바지를 입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기에는 점차 허리선이 들어가고 옆트임이 깊어진 치파오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한시적으로 군벌통치자들에 의해 치파오 금지령이 발표되었으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에 따라 금지령은 자연스럽게 폐지되었고, 점차 폭넓게 보급되었다(Yuan & Hu, 2017). 1930년대부터 치파오는 다양한 디자인으로 발달하면서 중국 여성들의 중요한 의복이 되었다. 이때부터 치파오의 구조와 스타일은 시기에 따라 유행 양상이 변화하면서 나타났는데, 장식은 점차 간소화되었고 길이와 너비, 칼라의 높이, 단추의 수, 옆트임의 길이가 유행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Yuan & Hu, 2017).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인들이 착용한 치파오를 살펴보면, <Fig. 13>의 양우조, 최선화 부부는 1937년에 이 사진을 촬영하였다. 최선화가 착용한 치파오는 다소 타이트한 품과 옆트임이 있는 전형적인 치파오의 모습으로 서양식 구두를 착용하고 있다. 최선화는 반팔의 치파오를 입고 있는데, 칼라 부분에 3개의 단추가 있고, 옆트임 부분에도 5개의 단추 장식이 있다.


<Fig. 13> 
Yang Woo-jo and Choi Sun-hwa - 1937.03.22., Shanghai, China. (PGMSK & CCPGMK, 2017, p. 162)

이동 시기의 한복 착용은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에게는 다소 위험한 일이었다. 따라서 한복은 국외에서 활동했던 여성들 위주로 많이 착용되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Fig. 14>는 1936년 8월에 미국에서 촬영한 대한 여자애국단의 창립 17주년 기념사진이다. 4명의 여성들(왼쪽 1번째, 왼쪽 4번째, 오른쪽 1,2번째)이 한복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저고리와 치마가 동색 계열이고, 여밈은 고름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Fig. 14> 
17th Anniversary of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Women's Patriotic Group - 1936.08.05., U.S.A. (PGMSK & CCPGMK, 2017, p. 142)

3. 충칭 시기
1) 남자 복식

1940년 이후부터 1945년 광복까지, 국내에서는 국민복을 주로 착용하고 있었으며, 극히 제한된 직업을 가진 대학교수나 전문가 집단만이 정통적인 신사복을 고수하고 있었다. 또한 한복과 양복을 혼용하고 있었는데, 바지저고리 위에 오버코트나 망토를 입었고, 두루마기는 단추를 달아 활동성을 높였다(Geum et al., 2015).

한편, 이 시기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동 시기 때보다 더욱 활발하게 양복을 착용했으며, 특히 1945년 광복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처럼 많은 사람이 양복을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Fig. 15>는 3·1절 22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왼쪽부터 김구,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이 태극기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흑백사진인 관계로 김구는 정확하게 어떤 의복을 입었는지 보이지 않으나, 중국식 의복인 중산복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며, 조소앙은 어두운색의 양복 일습을 착용하였다. 신익희와 김원봉은 재킷 위에 코트를 입고 있는데, 모두 더블 체스터필드 코트를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쯤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부분이 현대의 신사복과 같은 투 버튼 혹은 쓰리 버튼의 재킷, 셔츠, 넥타이, 바지, 구두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Fig. 16>은 1945년 11월 광복 후 한국독립단 환국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맨 앞줄에 서 있는 김구(첫번째줄 왼쪽 5번째), 이시영(첫번째줄 왼쪽 6번째), 신익희(첫번째줄 오른쪽 1번째) 등은 현대적인 정장을 착용하고 있고, 왼쪽에 서 있는 신송식(첫번째줄 왼쪽 1번째), 조경한(첫번째줄 왼쪽 3번째) 등의 인물들은 다소 편안한 차림의 스포츠 재킷, 점퍼, 셔츠를 입고 있다. 특히 조경한은 노타이로 촬영에 임하고 있어 당시 격식을 차리지 않은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Fig. 15> 
After the 22nd Anniversary of March 1st - 1941.03.01., Chongqing, China. (PGMSK & CCPGMK, 2017, p. 214)


<Fig. 16> 
Celebrating the Return of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 1945.11.03., Chongqing, China. (PGMSK & CCPGMK, 2017, p. 263)

다음으로 이 시기 중국식 복식 양식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충칭 시기에도 여전히 장삼을 착용하고 있는 임정 요인들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Fig. 17>은 1940년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감찰위원이 모여 촬영한 사진이다. 김구(앞줄 오른쪽 4번째)를 비롯하여 엄창섭(뒷줄 왼쪽 1번째), 이시영(앞줄 오른족 5번째), 차리석(앞줄 오른쪽 1번째) 등의 인물들은 모두 장삼을 입고 있으며, 뒷줄 가운데의 양우조(뒷줄 왼쪽 4번째)와 김학규(뒷줄 왼쪽 4번째)만 양복 차림을 하고 있다. 이는 충칭에서의 활발한 외교 및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음을 복식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앞줄 왼쪽의 김붕준(앞줄 왼쪽 1번째)과 고운기(뒷줄 오른쪽 3번째)는 중산복을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Fig. 17> 
Central Inspectors of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 1940.05.16., Qijiang, China. (KPG, n.d.-c, Chongqing period)

중산복은 1923년에 정식으로 등장한 중국 남자들의 대표적이고 중요한 정장인데(Gi, Beak, & Bae, 2017), 중국인의 생활양식에 부합한 디자인으로 실용성과 단정한 맵시를 살린 의복이다(Hua, 2008). 민주혁명의 선도자인 손중산(쑨원)이 개혁정책의 하나로 고안해 낸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중국의 국민정부는 특히 중산복에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으며, 서로 다른 두 정당에서도 선후로 중산복을 공식 장소에 입고 나와 남자 예복으로 삼았다. 그 이후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도 중산복을 입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는 정치 관념과 상관없이 중국을 대표하는 의복이 되었다(Yuan & Hu, 2017). 중산복은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었으며, 1936년의 <복장 조례 수정초안>으로 남자 공무원의 제복이 되었다. 이 양식은 그보다 이른 1920년대 후기에 결정되었는데, 그 주요한 특징은 낮은 칼라로 끝부분이 팔(八)자형을 띤 스탠드 칼라 모양이고, 위·아래에 네 개의 덮개가 달린 주머니가 있는데, 모두 단추로 잠글 수 있었다. 앞여밈에는 다섯 개의 단추를, 소매에는 각 세 개의 단추를 달았다. 이후 중국국민정부에서는 중산복을 공식 복장으로 발표하였고, 네 개의 주머니, 앞 여밈의 다섯 개의 단추, 소매의 세 개 단추 부분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Yuan & Hu, 2017). <Fig. 18>은 차리석의 장례식 장면 중 왼쪽 뒷줄에 서 있는 세 명의 인물이 착용한 중산복의 모습으로, 윤기섭(왼쪽)과 조경한(중앙)이 착용하고 있다. 모두 밝은 색채 계열의 중산복이며, 앞여밈의 5개의 단추와 덮개가 있는 4개의 주머니가 선명하게 보인다.


<Fig. 18> 
People in Zhongshan Suits (Yoon Ki-seop, Cho Kyung-han) - 1945.09.12., Chongqing, China. (KPG, n.d.-c)

마지막으로 충칭 시기와 그 이후의 남자 한복 착용 자료를 살펴보면, 충칭시기까지도 한복을 입은 인물을 찾기는 어려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시기 임정요인들에게 있어, 한복은 시대적 흐름 및 경제적, 정치외교적인 문제들로 인해 착용이 어려운 의복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 여자 복식

1940년대 초기 국내의 여자들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몸뻬, 간단복(簡單服)을 착용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복을 많이 입었으나, 미군정 실시와 해외동포의 귀국으로 다시 양장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Geum et al., 2015).

한편, 충칭 및 국외에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의 양장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을 통해 확인하였다. 먼저 <Fig. 19>는 1943년 충칭에서 촬영한 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의 모습이다. 왼쪽부터 최선화, 김현주, 김순애, 권기옥, 방순희라는 인물이며, 가운데 김순애를 제외하고 모두 코트류를 착용하고 있다. 당시 코트류는 대부분 직선적인 스타일로, 길이는 무릎 정도까지였으며, 특히 장식이 철저하게 배제되고 칼라 부분이 털로 장식된 숄 칼라나 스탠드 칼라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특징적이다(Geum et al., 2015). 사진상에서도 김현주(왼쪽 2번째), 권기옥(왼쪽 4번째), 방순희(왼쪽 5번째)의 코트에서 털로 장식된 칼라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Fig. 19> 
Members of the Korean Patriotic Women's Association - 1943., Chongqing, China. (PGMSK & CCPGMK, 2017, p. 239)

충칭 시기의 중국식 여자 복식은 두 가지 종류의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Fig. 20>은 1942년 송병조의 장례식 장면 중에서 중국식 장삼을 착용한 여자들의 모습이다. 사진에서 왼쪽부터, 아이들을 안고 있는 인물을 시작으로 강영파, 김병인, 이숙진, 이현경, 오화영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이 착용한 것은 장삼과 유사한 형태로 된 품이 넓은 장포로 보이며, 이 의복은 임시정부의 다양한 활동을 위해 착용했던 의복이었다. 그러나 이전 시기에 이러한 장포를 입은 활동 사진 자료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Fig. 21>은 1940년 한국 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 사진이다. 정정화(앞줄 왼쪽 2번째)와 연미당(세번째줄 오른쪽 3번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사진에서 앞줄 중심의 김효숙(앞줄 왼쪽 4번째)과 방순희(앞줄 왼쪽 5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치파오와 서양식 구두를 착용하고 있다. 이들이 착용한 치파오는 장식성이 크게 가미되지 않았으며, 김정숙(앞줄 오른쪽 3번째)이 꽃잎 혹은 잎 문양과 유사한 패턴이 있는 치파오를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Fig. 20> 
Funeral of Mr. Song - 1942.02.27., Chongqing, China. (KPG, n.d.-c)


<Fig. 21> 
Revolutionary Women's Alliance Foundation of Korea - 1940.06.17., Qijiang, China. (KPG, n.d.-c)

마지막으로 충칭 시기의 한복은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국외에서 활동하는 여성 운동가를 중심으로 착용되었다. <Fig. 22>는 1942년 재미 한족연합 위원회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이다. 앞줄의 양쪽 가장자리의 심영신(왼쪽)과 민함라(오른쪽)가 한복을 입고 있으며 모두 백색의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Fig. 22> 
Leader of the Korean-American Union Committee - 1942.03., Presumed to be the U.S.A. (KPG, n.d.-c)


Ⅳ.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복식 착용 양상과 변화요인

본 장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구성원들의 복식 종류와 특징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먼저, 성별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역할을 정리하고, 서양복, 중국복, 한복이 시기별로 착용된 양상을 고찰하였다. 또한 이러한 착용 양상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변화 요인을 분석해 보았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복식 착용 양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복식 착용 양상을 정리하기 위하여, 성별에 따른 요인들과 그 구성원의 역할을 정리하면,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임시정부 요인, 직원, 독립운동가로 구성되었다. 또한 여자들은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과 직원, 독립운동가로, 일부는 임시정부의 주요한 안살림을 도맡아 활동하였다. 다음 <Table 1>은 성별에 따른 대한 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구성원의 역할과 복식 착용 양상을 정리한 것이다.

<Table 1> 
The Appearance of Wearing Dress and Role(The Member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Gender Men Women
Contents
Role * Leading Figure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Employees, Fighter for independence * Family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s leading figures, Employees, Fighter for independence
Dress
Types
Western
Dress
* In 1919, the central force of the March 1st Movement wore suits. - It was an opportunity to change the perception of wearing suits.
* 1920s - Wearing suits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wide.(Lounge Jacket _ the prototype of a modern gentleman's suit)
* 1930s - Suites showed a generalized pattern.(Separates, Bold look)
* Clothing worn mostly – one-peice, blouse and skirt
* It was worn mainly by people active in the Americas and Russia.
* The style that was popular in Europe was accepted and worn.
* In China, it was often worn for ceremonies and events such as weddings.
* During the Chongqing period, you can check the appearance of wearing it freely.
Chinese
Dress
* Clothing worn mostly - Jangsam and Magua. Zhongshan suit(Mao suit).
* Jangsam and Magua - Some of them were also worn in the 1920s, and most of the figures wore Jangsam, especially during the Wandering period.
* Zhongshan suit(Mao suit) - In the 1940s, the wearing of Zhongshan suit also increased. It is a clothing with a strong political character that Son Jung-san devised through a dress reformation in 1923.
* Clothing worn mostly - Ou-Gun style, Qipao, and Jangpo.
* During the Shanghai period - Ou-Gun style
* During the Wandering period - Wearing a Qipao style that was popular in China at the time
* During the Chongqing period - Qipao, and Jangpo.
Hanbok * They rarely wore Hanbok.
* Photos taken by leading figures the provisional government wearing Hanbok can only be checked after liberation.
* It was worn by many female activists working abroad.
* Most of the same color‘s Jeogori and Chima were worn.
* It wore a style separate from the trend of Korean Hanbok.

서양복, 중국복, 한복으로 분류하여 각 복식의 착용양상을 살펴보면, 우선 남자의 서양복은 기본적으로 재킷, 셔츠, 타이, 바지, 구두를 착용하였다. 이러한 양복은 1919년 3·1운동의 중심 세력이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로 착용함으로써, 당시 양복을 착용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많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20년대에는 양복 착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일본인과 한국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에도 당시 양복점을 운영하였거나 직원으로 일했다는 사람들의 기록이 다수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 국내에서는 양복이 더욱 일반화되었으나 주요 활동지였던 중국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거의 양복을 착용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유행했던 양복 스타일을 살펴보면, 1920년대에는 라운지 재킷이 ‘세비루’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착용되었고, 1930년대에는 풍성한 느낌의 볼드 룩이 유행하였다. 더욱 화려한 디자인으로 상하의가 서로 다른 색채나 소재의 의복을 착용했던 세퍼레이츠 스타일은 192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착용되었다. 여자의 서양복은 주로 원피스, 블라우스와 스커트가 착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미주나 러시아 등의 국외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착용하였고, 주요 활동지였던 중국 내에서는 결혼식과 같은 의례나 행사를 치를 때 서양식 복식을 입었다. 또, 1940년대 이후인 충칭 시기가 되면서 중국 내에서 여자들이 자유롭게 양장을 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착용했던 양장은 당시 유럽 등지에서 유행했던 스타일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착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특히 모자류나 코트류에서 잘 드러난다.

두 번째로 살펴볼 복식 양식은 중국식 의복류이다. 남자들은 주로 장삼, 마괘 혹은 마갑과 중산복을 착용하였다. 1920년대의 상하이 시기의 자료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장삼이나 중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대부분 양복을 입고 있다. 장삼은 특히 일본에게 쫓기던 이동 시기에 많이 착용하였으며, 1940년대 충칭 시기에는 중산복의 착용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장삼은 마괘와 함께 청대시기부터 착용했던 의복인데,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 요인 대부분은 장삼만 착용한 채 신분을 숨기며 활동하던 모습이 확인되었다. 근대 시기에는 장삼 위에 마괘를 덧입음으로서 정식 예복의 용도로 착용하였는데, 임시정부 요인들의 자료에서는 장삼 위에 마갑을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산복은 1923년에 손중산이 중국 혁명정부 대원수에 취임하면서 복식 개혁을 통해 고안해낸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의복이다. 여자들은 주로 오군 양식, 치파오, 장포를 입었다. 연구자료를 사진만으로 한정할 경우, 상하이 시기에는 청대시기 한족 여자들이 주로 착용하였던 오와 군을 입은 여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동 시기에는 당시 중국 현지에서 유행하였던 스타일의 치파오를 착용하였고, 충칭 시기에는 남자의 장삼과 비슷한 형태의 장포와 치파오를 입고 있다. 하지만 장포는 사진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하이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입혀졌으리라고 판단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던 정정화 등의 기록에서 장삼이라는 기술이 등장하기 때문이며, 장삼과 장포와 같은 중국식 두루마기 형태의 의복은 임시정부 전반에 걸쳐 착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복은 여자들이 더 많이 착용하였다. 이는 당시 남자복식에서의 시대적 흐름은 거의 영국에서 유입된 신사복이 더 성행하여 착용되었을 때였고, 또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나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는 한복의 착용은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상하이 시기부터 이동 시기까지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귀화한 한인들에게 한복 착용을 금지하는 법령이 내려진 사례는 이주한 한인들이 겪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시사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실제 한복을 착용한 사진자료 역시 광복 이후 시점의 자료들에서나 확인이 가능하다.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 한복을 더 많이 입었는데, 특히 국외에서 활동하는 여성 운동가들이나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인들에 의해 착용되었다. 이들 한복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같은 색채 계열의 저고리와 치마를 대부분 입었고, 고름으로 여밈을 처리하였다. 국내에서 나타난 한복의 유행양상과는 상관없는 스타일의 한복을 착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정리한 복식의 착용 양상에 나타나는 특징을 고찰해보았다. 먼저 남자 복식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기본적인 의복은 양복이었으며, 상황과 용도에 따라 중국 의복인 장삼과 중산복을 착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가 잘 드러나는 인물이 바로 김구이다. 김구가 등장하는 사진 자료들을 각 시기에 따라 분류하여 확인한 결과 상하이 시기에는 양복을 많이 입었고, 이동시기에는 장삼, 충칭 시기에는 중산복 차림인 것을 알 수 있었다<Fig. 23>. 김구가 착용한 복식의 양상을 통해 당시의 정치·경제·외교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즉, 일본의 압박과 감시를 피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따라 장삼을 입었고, 중국과의 협력과 정치외교적인 전략에 따라 양복과 중산복을 선택적으로 착용하였다.


<Fig. 23> 
Changes in Kim Gu's Clothing by Period (KPG, n.d.-a; KPG, n.d.-b; KPG, n.d.-c, Organized by author, 2021)

또한 여자들의 복식은 시기에 따라 특정한 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활동한 지역에 따라서 착용한 복식의 차이가 나타났다. 즉, 양장이나 한복은 주로 중국이 아닌 미주, 러시아 등지의 국외에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및 애국단체의 임원들에 의해 착용되었다. 임시정부의 요인들의 가족이나 직원들은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며 살아갔던 사람들로, 대부분 중국 복식을 입었고, 1940년대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마지막 활동을 벌일 시기에 비로소 서양식 복식을 착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현재 여자 복식의 양상을 정확하게 판단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자료의 수집이 더욱 필요한 실정이다.

2. 복식 양식별 변화 요인과 의미

앞에서 언급한 복식의 착용양상에서 보이는 변화의 요인을 서양복, 중국복, 한복으로 분류하여 분석하고, 더 나아가 각 복식 양식이 가지는 역할과 의미를 함께 고찰해보았다.

첫 번째로, 남자의 양복과 여자의 양장으로 구성되는 서양복은 당시 복식에 있어서의 시대사적 흐름을 반영한 의복이었다. 20세기 초는 동아시아의 한국·중국·일본에게 있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격정적인 변화의 시간으로, 복식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변화를 받아들인 일본에 이어 한국과 중국 모두 많은 복식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 변화에서 주목할 것이 서양복의 보급과 영향일 것인데, 이로 인해 한국 내에서도 한복에 많은 개량 및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사진 및 기록 자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상하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격식있는 양복 일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독립적인 자주국가로의 역할을 되찾기 위해 외교활동을 주요한 방략으로 내세웠다(Cho, 2009). 하나의 독립 정부로서 외교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당시 양복의 착용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이는 복식을 정치외교적인 수단으로 활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양복이 가지는 또 다른 역할 하나는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할 때 착용했던 의복이었다는 점이다. 대외적인 독립 운동이나 규모가 있는 활동을 계획하면서 양복을 착용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감시와 의심의 시야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례는 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홍커우공원에서의 거사를 준비하면서 양복을 다시 사 입었다는 김구의 기록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외지에서 독립운동을 병행하는 힘든 생활을 하면서 점차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의복을 착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선행연구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의복의 수단화로써 ‘공격적인 형태의 의생활’과 ‘방어적 형태의 의생활’을 언급하고 있는데, 양복의 착용을 ‘공격적인 형태의 의생활’로 파악하고 있다(Cho, 2009).

두 번째, 중국복은 이동 시기에 들어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용하게 된 의복류이다. 남자는 장삼을 기본으로 마괘, 마갑을 덧입거나 중산복을 착용하였고, 여자들은 오군 양식, 장포, 치파오를 주로 입었다. 이와 같은 복식은 국내에서는 거의 착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했던 사람들과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착용되었던, 상황적 특징이 가장 잘 반영된 복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중국 지역 내에서 임시정부의 주요 활동과 독립운동을 진행해야 했던 이들은 중국 정부와의 협력과 지원을 얻기 위한 교섭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친근함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중국 복식을 착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구로, 그가 충칭 시기 내내 중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당시 중국과의 친근감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중산복을 활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중국도 일본과의 국제적 관계가 좋지 않은 상태였고, 한국과 중국은 모두 ‘일본 타도’라는 동일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동지적 공통성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Park, 2015). 하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복식을 착용하게 된 다른 요인들도 살펴보자면, 경제적인 요인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중국으로 넘어가 활동과 생활을 해야 했던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은 점차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가지고 있던 양복을 처분하여 활동과 생계유지를 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중국 복식은 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사례는 당시의 정정화가 남긴 기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 신발이라고 해서 구두나 운동화 따위의 가죽, 고무 제품은 엄두도 내지 못할 실정이었고 고작해야 헌 헝겊조각을 몇 겹씩 겹쳐서 발 모양을 내고 송곳으로 구멍을 내서 단단한 실로 촘촘하고 단단하게 바닥을 누벼서 심고 다녔다(Cho, 2009, p. 28).

또 다른 요인은 감시와 핍박으로 조여오는 일본과 수많은 밀정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즉, 임시정부 요인이나 독립운동가라는 신분을 위장하는 목적으로 중국 복식을 착용한 것이다. 특히 1932년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사건을 계기로 더욱더 삼엄한 감시와 압박으로 조여왔던 일본을 피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약 8년간의 이동 시기를 지내왔다. 이 시기 동안 한국인, 특히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및 각자 본인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주로 장삼을 입고 생활하였다. 대표적으로 김구는 자싱으로 피한 후 주아이바오(朱愛寶)의 도움으로 피난 생활을 했던 기록이 있는데, 이때 김구는 내내 장삼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동 시기때,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복식을 입고 남긴 자료들이 다수 남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삼과 장포는 두루마기와 형태적으로도 유사하였기 때문에 큰 저항심 없이 착용이 가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장삼과 치파오는 편리성과 활동성을 겸비했던 의복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Park, 2015).

세 번째로 한복은 여자들만 간혹 의례나 행사 시에 착용하였다. 이는 한복 착용이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잊지 않겠다는 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외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한복은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양식으로 더욱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던 여성 독립운동가인 정정화가 국내에 잠입하기 위해 한복을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Cho, 2009). 이는 한복이 여자들에 한정해서 남자의 장삼처럼 신분 위장의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Ⅴ. 결론

본 연구는 임시정부 시기의 요인들과 그 구성원들의 의생활에 주목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시기를 3기로 나누어 시기별 복식의 종류와 특징을 고찰하고, 그 착용 양상과 역할 및 의미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연구 범위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1945년을 하한연대로 하였으며, 사진 자료를 중심으로 문헌자료와 유물자료를 함께 활용하였다.

복식에 대한 고찰에 앞서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시기를 크게 상하이 시기, 이동 시기, 충칭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 배경과 주요 활동을 살펴보았다. 임시정부는 특수한 성격을 가진 정부 형태로, 각 시기에 따라 전반적인 상황이나 주력했던 활동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하이 시기에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했던 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이 시기의 외교활동은 여러 가지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임시정부가 일반적인 정부의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이봉창, 윤봉길과 같은 한인애국단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일본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일본에 의해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자리잡기까지 여러 곳을 이동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1937년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지만, 지속적으로 정부체계를 정비하고, 항일독립운동 진영과의 연합전선,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충칭에서의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국제 외교를 강화하면서 활발한 활동과 독립운동을 통해 광복된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남녀별로 착용했던 복식의 종류와 특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크게 서양복, 중국양식의 의복, 한복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 다룬 복식의 종류별 특징을 착용양상과 함께 종합적으로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복은 당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착용되었던 복식 양식이었다. 남자의 경우, 1919년 3.1운동의 중심 세력이었던 임정요인들이 양복을 착용하고 있어, 양복 착용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양복 착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1920년대), 1930년대에는 양복이 더욱 일반화되었으나, 임시정부의 주요 활동지였던 중국에서는 활동 상황에 의해 양복을 착용하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시기별로 라운지 재킷, 볼드 룩, 세퍼레이츠 스타일 등으로 유행하였다. 여자의 경우 미주나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나 결혼식과 같은 행사가 있을 시에 양장을 입었다. 1940년대 이후에는 이전 시기보다 자유롭게 양장 차림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중국복은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구성원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의복이었다. 특히 중국 복식은 일본의 반격이 심해진 이동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용했다. 남자들은 주로 장삼을 많이 착용하였고, 그 위에 마괘나 마갑을 덧입기도 하였다. 또한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중산복을 착용하였는데, 특히 충칭 시기에 많이 착용하였다. 여자들은 주로 오군 양식, 치파오, 장포를 입었으며, 장포는 임시정부 시기 전반에 걸쳐 착용되었으리라고 추정하였다.

셋째, 한복은 국내나 중국이 아닌 국외에서 활동하는 여성 운동가들이나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인들에 의해 착용되었으며, 남자들은 거의 착용하지 않았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는 한복의 착용이 다소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복식의 착용양상에서 보이는 변화 요인과 각 복식 양식이 가지는 역할과 의미를 분석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서양복은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독립적인 자주국가의 역할을 되찾기 위한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에 반드시 필요한 의복이었다. 중국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과 독립운동을 진행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착용된, 시대상황적 특징이 잘 반영된 복식이다. 이 복식은 중국과의 협력과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친근감의 표현 수단이자 일본과 숨어있는 감시자들을 피해 신분을 숨길 수 있는 역할을 해 주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편리함과 실용적인 기능에 의해 저항심 없이 착용 가능했던 의복이었다. 마지막으로 한복은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잊지 않겠다는 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역할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는 신분 위장을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연구 진행한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에 활동했던 주요 요인들과 그 구성원들은 당시 시대적 흐름에 따른 서양복을 착용하였다. 또한 상황과 용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착용한 중국 복식은 당시 우리 민족이 겪었던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도 잘 반영된 의복이다. 또한 한복은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표현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가졌던 것으로, 광복을 맞이하면서부터는 비교적 자유롭게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구성원들이 착용하며 생활했던 의복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현대사 중 독립투쟁사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착용한 의복을 통해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의식을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자료뿐만 아니라 국외에 남아 있는 한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료들이 더해진다면 추후 이들 복식에 대한 더욱 정확하게 세밀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1년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연구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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