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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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1 , No. 2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1, No. 2, pp. 59-75
Abbreviation: J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Apr 2021
Received 09 Feb 2021 Revised 18 Mar 2021 Accepted 24 Mar 2021
DOI: https://doi.org/10.7233/jksc.2021.71.2.059

조선시대 국왕 면복(冕服) 착용 의례의 정립과 그 확장
구도영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Original rules and additional rules for the ritual of wearing Myeonbok(冕服) during the Joseon Dynasty
Koo, Doyoung
Research Professor, Research Institute of Korean Culture, Ewha Womans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Koo, Doyoung, e-mail: 0531kdy@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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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Myeonbok(冕服); ceremonial robes worn on the most formal occasions by the kings of Joseon. There has been a lot of research on the Myeonbok so far, but it is not known in detail when the Myeonbok was worn. The timing of wearing the Myeonbok can vary depending on the values and culture of the times. In this study, we reviewed the regulations on wearing the Myeonbok, which was originally established, and confirmed the range of wearing the Myeonbok that was expanded according to the period. The Joseon Dynasty systematically established the Myeonbok regulations, and the kings of Joseon maintained them. However, politics is an art that must respond to the changing complexity and diversity of social structures and plays an important role in coordinating power relations. Therefore, the wearing of certain clothes gradually deviated from the prescribed framework and was used as a political means. Kings wore the Myeonbok to rituals that were considered politically important beyond the scope of the initial regulations, thus elevating the ritual in status, to the “most important” ritual. The Myeonbok visually completed the ritual. Even if the ritual that was not legally established, or wasn’t considered to be a core ritual, the moment the king appeared wearing the Myeonbok, it was infused with special meaning.


Keywords: costumes, Joseon, Myeonbok, 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rituals
키워드: 복식, 조선, 면복, 국조오례의, 의례

Ⅰ. 서론

조선 국왕이 입는 의복 가운데 면복은 가장 격식을 갖추어야 할 시간과 장소에서 착용했던 옷이다. 면복은 신과 조우하는 순간, 즉 제례(祭禮)의 의복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면복을 제복(祭服)이라고 쉽게 정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복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제례마다 면복을 입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면복을 제례를 지낼 때만 입었던 것도 아니다. 국왕의 면복은 제례의 범위에서 나아가 가장 상위의 의례에 입는 옷이 되었다. 그러므로 면복을 입는 시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인의 가치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조선은 국초 이 면복을 언제 입을지 신료들과 수많은 논의를 진행했고, 그러한 고민들이 세종대 『오례(五禮)』 편찬을 거쳐,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정리되었다.

면복은 국가의례에서 국왕과 왕세자만 입을 수 있는 가장 상위의 의복이었기에 그 상징적 의미가 크므로 복식사 분야에서 진작부터 연구가 이루어졌다. 면복은 국초 명 황제가 조선 국왕에 내려주었고, 조선 세종의 요청으로 면복 하사 범위가 왕세자까지 확장되었다. 면복 체제에 대한 연구는 조선 초부터 국조오례의가 편찬되는 성종대까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면복 연구에서 무엇보다 중시된 것은 면복의 구성, 형태였고, 의복에 새겨진 장문(章紋)의 의미도 밝혀졌다. 이 연구들은 면복을 언제 입는지도 검토했다(e.g., Goh, 1972; Yoo, 1972; Kim, 1979; Yoo, 1998; Park, 2000; Yoo, 2002 ; Lee, 2013; Choi, 2015). 또한 조선 전기 국조오례의의 면복 그림과 후기 국장도감의궤에서 면복 도설을 비교하면서 조선 전후기의 모습을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Yoo, 1978; Kim, 1992). 역사 학계에서는 의복에 대한 관심보다 면복의 국제적 위상에 더 관심이 있었다. 명이 설정한 동아시아 세계에서 조선과 다른 외국들이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면복과 인장 등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었다(Jung, 2012; Danjo, 2013).

이와 같이 면복에 대한 연구가 두텁게 축적되었지만, 복식사학계에서는 면복의 의상 자체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역사학계에서는 동아시아적 입장에서 면복의 위상을 일부 다루었다. 그러다보니 그 사이 연구의 빈 공간이 생겼다. 조선 국왕이 실제 어떤 의례에서 면복을 입었는지는 소략하게 다루어진 것이다. 기존 다수의 연구에서는 제례(祭禮), 등극례(登極禮), 혼례(婚禮), 관례(冠禮), 책례(冊禮), 상례(喪禮) 등에 면복을 입는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면복을 착용했던 의례는 이보다 복잡하다.

면복이 제복(祭服)이라고는 하지만, 조선 시대 제례의 종류가 다양하고, 각 제례마다 성격과 예(禮)의 경중(輕重)이 달라서 제례 역시 차등을 두어 면복을 입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였다. 그럼에도 현재까지의 연구만 보면 국왕이 모든 제례에서 면복을 입었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어떤 제례에서 면복을 입었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또한 대례 시에 왜 면복을 입는지 그 설명도 불충분했다. 예컨대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 면복을 입는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중국 사신을 접할 때 면복을 입은 것은 그가 가져온 황제의 의물(儀物)때문이지 단지 중국 사신을 맞는 행사복이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 사신이 가져온 의물의 종류에 따라 조선 국왕이 면복을 입을지 아닐지도 달라진다. 더욱이 조선국왕이 제례, 등극례, 혼례, 관례, 책례. 상례 외에도 면복을 입는 의례가 더 많았다. 이에 조선 국왕이 면복을 착용했던 의례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각 의례가 어떠한 성격을 갖고 있는지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면복은 그 자체가 상징이다. 당대 이 의복을 언제 어느 공간과 의례 속에 입었는지 연구가 진척되어야 그 의례를 완성했던 면복에 대한 이해도 보다 깊어질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국초 마련된 면복 착용의 의례적 전범을 검토하고, 시기에 따라 확장되어 간 면복 착용의 범위와 그 변화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국초 정립되었던 국왕 면복 착용 의례를 각각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여 살펴본다. 이는 『국조오례의』를 통해 살펴볼 것인데, 『국조오례의』는 조선 초기 국가의례의 총정리이자 당대인들의 예치 인식이 반영된 예서(禮書)로(Han, 2007), 조선 전기는 물론 조선 후기까지 예제와 복식 문제를 두루 참고하는 첫 번째 예서였으므로 국초의 전범을 살피는 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3장에서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되지 않고도 면복을 착용했던 의례들, 그리고 조선 후기 점차 확장되어 간 면복 착용의 사례들을 고찰한다. 다만 이 논고에 스무 가지의 면복 착용 관련 의례를 모두 다루어야 하므로, 각 의례에 대한 설명은 기존에 연구가 소략하거나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분야를 중심으로 살피고, 이미 연구가 폭넓게 되어 있는 분야(등극례, 혼례, 관례, 책례, 상례)는 간단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국왕의 최고 의복이었던 면복이 어떠한 의례 속에서 자리매김했고, 당대인들이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종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조선시대 위정자들이 중시한 의례가 무엇인지 ‘면복 착용’의 유무, 그 변화를 통해 엿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Fig. 1> 
The Composition of Myeonbok [冕服] (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Arranged in Sequence, 1474)


Ⅱ.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면복 착용의 범위

면복을 글자 그대로 설명하면, ‘면관(冕冠)을 쓸 때 착용하는 복식’이다. 면복은 최고 등급의 예복이므로 면관을 쓸 때 그게 걸맞는 옷과 장신구를 성대하게 갖추었으며, 면관을 포함한 이들 복식 일체를 면복이라 하였다. 면관에서 신분을 구별하는 요소는 면관의 ‘류(旒)’의 수이다. 류는 면관 앞과 뒤에 끈으로 구슬을 꿰어 드리워져 있는 부분을 말한다. 류가 많을수록 신분이 높다. 또한 상의에 표현된 무늬 개수도 신분을 반영했다(Lee, 2013; Choi, 2015). 중국 황제는 12류관, 12장복을 입었으며, 황제의 아들인 친왕(親王)들이 9류, 9장복을 입었다. 명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 중 유일하게 조선 국왕에게만 친왕 급의 9류, 9장복을 내려주었다. 조선 초 국왕이 입은 면복의 그림은 위와 같다.

위는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의 면복 구성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 국왕은 9류의 면관을 쓰고, 중단에 현색(玄色) 상의를 입고 폐슬, 대대 등을 허리에 두르고, 붉은 신을 신은 뒤 규를 잡았다. 제를 지낼 때는 방심곡령도 걸었다. 상의에 그려진 용(龍), 산(山), 화(火), 화충(華蟲), 종이(宗彝),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 9가지 무늬는 군주의 덕목을 상징하며, 의복을 더 특별하게 했다(Choi, 2015). 『국조오례의』에서는 면복을 다음과 같은 시기에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1. 사직(社稷), 종묘(宗廟), 선농(先農), 문선왕(文宣王)의 제례(祭禮)

조선 시대 국가 제사의 종류는 수십여 가지에 이르렀다. 조선 국왕은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등으로 구분된 제례 중 ‘사직, 종묘, 선농, 문선왕(공자)’ 제례에서 면복을 입었다. 사직과 종묘는 조선에서 가중 중시한 대사(大祀)였고, 선농과 문선왕 제례는 중사(中祀)에 속했는데도 면복을 입었다. 각각의 의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사직 제사는 땅의 신(社)과 곡식 신(稷)에 제사하는 것으로, 조선의 국가 제사 체제에서 관념적으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사적인 혈연적 연대성에 기초한 종묘보다 국가의 공적 연대에 기초한 지기(地祇)를 모셨기 때문이다(Lee, 2000).

사직은 가장 중요한 대사(大祀)였지만, 국왕이 직접 사직 제사에 참여했던 것은 1455년(세조 1) 세조(世祖)가 처음이었다(Sejosillok [世祖實錄], Sejo 1 year, August 5; Sejongsillok [世宗實錄], five ceremonies [五禮], gillye’uisik [吉禮儀式], chinje’sajikui [親祭社稷儀]). 후술되겠지만 세조는 이 사직제 뿐만 아니라 여러 제례에 적극적으로 직접 참여한 국왕이었다. 그는 왜 제례 참석에 적극적이었을까. 의례 공간에는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국가 의례는 이 위계질서를 보여주고, 의례 참여자에게 질서를 수용하게 한다. 국왕이 높은 단(檀)에 오르고, 남면(南面)하여 북쪽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은 국왕이 이 공간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로 제사를 주관하는 자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Park, 2012). 사직 친제(社稷親祭)라는 이 최고의 국가 제례에서 국왕의 존엄을 명확히 드러내는데 면복이 있었다(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國朝五禮儀] No. 1, sacrificial rites [吉禮], chunchukeub’labje’sajikui [春秋及臘祭社稷儀]).

둘째, 종묘는 조선의 선대(先代) 국왕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종묘제례는 대사(大祀)이면서 사직 다음으로 주요한 제사였다(Han, 2010). 종묘제례는 조선 국왕의 선대에 대한 제사이므로 국초부터 국왕이 직접 참여했다(Taejosillok [太祖實錄], Taejo 4 year, October 7; Taejosillok, Taejo 7 year, September 12; Taejongsillok [太宗實錄], Taejong 12 year, October 7). 종묘제례에서 조선 국왕은 면복을 입고 그 선왕들에 대해 예를 표했다(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No. 1, sacrificial rites, sasikeub’labhyang’jongmyoui [四時及臘享宗廟儀]).

셋째, 선농제는 농사의 신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 지내는 제사이다. 국왕이 이 제사에 처음으로 참여한 것은 1475년(성종 6) 정월이다(Seongjongsillok [成宗實錄], Seongjong 6 year, January 25). 건국 후 80년 동안 없었던 선농 친제를 갑자기 시행한 것은 민생을 고려한 왕도정치 명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선농제는 엄숙하기만 한 사직 종묘제례와 달리, 직접 밭을 가는 친경(親耕) 의식이 있어 ‘친만민(親萬民)’ 이념을 가시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국왕의 친경 행사를 관광하려는 백성들도 많았다.

성종은 제사 중 최고의 대사(大祀)인 사직제는 1번만 참여한 반면, 중사(中祀)인 선농제는 3번이나 참여하였는데, 이는 친경이 갖는 통치 효과 때문이었다(Han, 2007). 조선 국왕은 선농 제사 의식에서 면복을 입었고, 제례가 끝나면 면복을 벗었다. 밭 가는 친경 의식에는 원유관과 강사포를 착용하였다(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No. 2, sacrificial rites, hyangseonnongui [享先農儀]).

넷째, 문선왕은 당나라 현종이 공자(孔子)에게 내린 시호이다. 조선 국왕은 국초부터 공자의 위패가 모셔진 성균관 문묘에 가서 석전제(釋奠祭) 또는 작헌제(酌獻祭)를 행했는데, 이 때 면복을 입었다(Taejongsillok [太宗實錄], Taejong 6 year, November 13; 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No. 2, sacrificial rites, hyangmoonseonwang’sihakui [享文宣王視學儀]; No. 2, sacrificial rites, jakheon’moonseonwang’sihakui [酌獻文宣王視學儀]). 석전제는 성균관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정기적인 제사였고, 작헌은 공자의 위패에 술잔을 올리는 간략한 의식이다. 문선왕 석전제는 조선이 유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의례이다. 중종대 정몽주, 광해군대 5현(賢)을 시작으로 조선인 성현(聖賢)도 문묘에 종사되었고(Joongjongsillok [中宗實錄], Joongjong 13 year, October 26; Kwanghaegoonilgi [光海君日記], Kwanghaegoon 2 year, September 5), 이후 조선은 문묘에서 조선 및 중국의 주요 성현 모두에게 제사지냈다. 선농제와 문묘제는 중사(中祀)급 제사임에도 국왕이 직접 참여하고 면복을 입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2. 등극례(登極禮), 혼례(婚禮), 관례(冠禮), 책례(冊禮)

면복은 신과 만나는 순간에 입기 시작해서, 생애 가장 빛나는 순간에 입었다. 조선 국왕은 왕세자에 책봉될 때(冊禮), 성인이 되어 관례를 올릴 때(冠禮), 혼인할 때(婚禮), 그리고 왕세자에서 국왕으로 등극하는 의식(登極禮)에서 면복을 입었다. 오직 국왕과 왕세자만 입을 수 있었던 면복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에 그 의식을 더욱 무겁고 빛나게 했다(Goh, 1972; Yoo, 2002; Lee, 2013; Choi, 2015)

3. 영조례(迎詔禮), 배표례(拜表禮), 망궐례(望闕禮)‧망궁례(望宮禮)

중국 황제에 예를 갖출 때도 면복을 입었다. 이 의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구체적으로 조서(詔書)를 받을 때, 표문(表文)을 보낼 때, 황제와 태자의 생일 등을 축하하는 의례에서 입었다.

첫째, 영조례(迎詔禮)는 중국 황제에게 조서(詔書)라는 문서를 받는 의식이다. 조선은 명으로부터 오는 문서를 크게 조서(詔書)와 그 외의 문서(칙서(勅書)가 다수였다)로 구분했다. 조서는 천자(天子)인 중국 황제가 천하(天下)에 반포한다는 의미를 갖는 문서이다. 따라서 특정 국가나 사안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 내 모든 관료와 외국에 알릴 수 있는 큰 경사(慶事)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Seongjongsillok, Seongjong 23 year, May 28; Joongjongsillok, Joongjong 17 year, June 20; Joongjongsillok, Joongjong 23 year, September 21; Joongjongsillok, Joongjong 31 year, December 7; Kwanghaegoonilgi, Kwanghaegoon 13 year, Februaryof the leap month 7; Injosillok [仁祖實錄], Injo 4 year, June 13). 칙서는 특정 국가 또는 특정 사건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조선국왕이 받는 칙서는 조선과 관련된 내용이다. 조서를 맞는 의례를 영조례, 칙서를 맞는 의례를 영칙례라고 하였다. 조선 국왕은 예(禮)의 경중(輕重)을 두어 ‘조서’를 받을 때만 면복을 입고, 칙서를 받을 때는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었다(Taejongsillok, Taejong 2 year, October 12; Sejongsillok, Sejong 6 year, October 15; Seongjongsillok, Seongjong 19 year, March 13; Seonjosillok [宣祖實錄], Seonjo 39 year, April 12; Youngjosillok [英祖實錄], Youngjo 24 year, April 24; 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No. 3, galye [嘉禮], youngjoseoui [迎詔書儀]; No. 3, galye, youngchikseoui [迎勅書儀]). 15세기 편찬된 『국조오례의』에는 조서를 맞이할 때와 칙서를 맞이할 때의 의식의 순서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칙서를 받을 때는 중간에 면복을 갈아입지 않아도 되었기에 의식이 훨씬 간단하였다.

기존 연구에서 ‘조선 국왕이 칙사(勅使, 중국사신)를 맞을 때 면복을 입었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재검토할 사항이다. 조선 국왕이 면복을 입은 것은 중국 사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 사신이 가져온 ‘황제의 조서를 예우’한 것이었다. 더욱이 중국 사신이 조서뿐 아니라 칙서를 가져오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단순히 중국 사신을 맞을 때 조선 국왕이 면복을 입는다는 설명은 곤란하다.

특히 조선 후기 칙사(勅使)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좀 더 유의해야 한다. 명대에는 사신을 명사(明使), 천사(天使), 조사(詔使), 조칙사(詔勅使), 칙사(勅使)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불렀지만, 청대에는 청사, 칙사라고 불렀다(Taejongsillok, Taejong 1 year, October 3; Sejongsillok, Sejong 31 year, October 1; Seonjosillok, Seonjo 25 year, August 22; Sookjongsillok [肅宗實錄], Sookjong 1 year, January 28; Kyeongjongsillok [景宗實錄], Kyeongjong accession year, November 26). 청나라 사신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와도 조사(詔使)라 부르지 않고 칙사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이 청 황제가 보낸 조서도 칙서라고 낮추어 부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며, 이 같은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Sookjongsillok, Sookjong 6 year, February 22; Sookjongsillok, Sookjong 8 year, February 7; Sookjongsillok, Sookjong 2 year, February 15; Youngjosillok, Youngjo 8 year, March 19).

1786년 구윤명(具允明)이 편찬한 사찬(私撰) 법제서 『전율통보(典律通補)』에는 면복 착용 원칙에 영조례(迎詔禮)를 거론하지 않았다(Jeonyooltongbo [典律通補], ritual code [禮典], ceremonial regalia [儀章], sangbok [上服]). 실제 조선 후기에도 조서를 맞이할 때 면복을 입었는데도 말이다(Youngjosillok, Youngjo 11 year, November 12).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편찬된 법전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영조례 시 면복을 착용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Chungwantonggo [春官通考] No. 46, galye, youngjoseoui). 요컨대 조선 후기 청 사신을 칙사라고 불렀던 일부 기록의 표현에 기초하여, 면복을 ‘칙서 또는 칙사를 맞을 때 입는 옷’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 조서와 칙서는 다르며, 조선 국왕은 영조(迎詔)할 때 면복을 입었고, 이는 지속적으로 지켜졌다.

둘째, 명 황제에 보내는 문서 표문(表文)에 절 할 때에도 면복을 입었다(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No. 3, galye, baepyoui [拜表儀]). 표문은 중국 황제만이 받을 수 있는 외교 문서로, 외국 사행단이 명나라에 입국할 때 반드시 소지해야 했다. 조선 국왕은 사행단이 북경으로 출발하기 전에, 면복 차림으로 명 황제에게 보내는 이 표문에 절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것이 배표례(拜表禮)다(Taejongsillok, Taejong 1 year, September 28; Sejongsillok, Sejong 23 year December 17; Seongjongsillok, Seongjong 8 year, August 17; Joongjongsillok, Joongjong 11 year, October 13). 배표례에 임금이 반드시 참여했던 것은 아니고 간소하게 치러지기도 하였다(Seongjongsillok, Seongjong 15 year, August 24; Joongjongsillok, Joongjong 10 year, July 15; Injongsillok [仁宗實錄], Injong 1 year, June 21). 배표례와 영조례를 함께 보면, 당시 조선은 중국 황제에 주거나 받는 가장 격식 있는 상위의 문서(조서, 표문)를 황제 위상으로 여겨, 그에 절하는 예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망궐례는 매년 설날, 동지, 황제의 생일에 황제가 있는 북경 궁궐 방향을 바라보며 절하는 의식이다. 망궁례는 황태자의 생일에 절하는 의식이다. 특별한 날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망궐례와 망궁례를 할 때 조선 국왕은 면복을 입고, 백관은 조복을 입었다(Sejongsillok, Sejong 1 year, November 27; Seongjongsillok, Seongjong 19 year, February 21). 조선 후기에 망궐례는 조선 전기(명대)만큼 충실히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유지되었다(Yoon, 2013).

망궁례는 조선 전기에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명대 황태자가 없던 시기가 적지 않았으며(Koo, 2020), 청은 황태자를 책봉하는 관행이 없었기에(강희제 시기 예외) 조선 후기에는 망궁례가 없어졌다. 매년 설날, 동지, 황제의 생일에 북경 궁궐 방향을 바라보며 절하는 망궐례만 그 충실도에 차이가 있었지만 조선 전 시기 동안 행해졌고(Sookjongsillok, Sookjong 35 year, March 14; Youngjosillok, Youngjo 1 year, November 18; Soonjosillok [純祖實錄], Soonjo 16 year, October 1), 이 의식에서 국왕은 면복을 입었다.

4. 조하의(朝賀儀)

조하의(朝賀儀)는 설날, 동지, 국왕의 생일 등에 왕세자와 신료들이 모여 조선 국왕에게 하례를 올리는 예식이다. 명절일에 북경의 황제에게 예를 올리는 것을 망궐례라고 하는데, 조선 국왕에게 하는 예식을 조하의라 한 것이다.

국초에는 조하의 시에 국왕이 면복을 입지 않았다. 이는 아래의 기사와 같다.

동짓날이었다.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왕세자 이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를 거행하고, 강사포와 원유관을 입고 인정전에 나아가 세자 이하 여러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았다(Sejongsillok, Sejong 6 year, November 22).

위는 1424년(세종 6)의 망궐례와 조하의를 거행하는 모습이다. 위 기사와 같이 조선 국왕은 면복을 입고 우선 북경을 향해 망궐례를 한 뒤, 옷을 원유관복으로 갈아입고 신료들에게 조하를 받았다. 같은 날 명 황제에 대한 망궐례와 조선 국왕에 대한 조하의례를 구분하는 공간에 면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규정은 국초에 한정되었다. 세종 몇 년에 바뀌었는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세종대 편찬된 『오례』와 성종대 편찬된 『국조오례의』를 보면, 국왕에 대한 조하 의례에서도 면복을 입는 것으로 규정되었다(Sejongsillok, five ceremonies, galye’uisik [嘉禮儀式], jeongji’baekkwan’johaui [正至百官朝賀儀]; 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No. 3, galye, jeongji’wangsejabaekkwan’johaui [正至王世子百官朝賀儀]). 그리고 이 의례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된다(Chungwantonggo No. 57, galye, jeongji’wangsejabaekkwan’johaui; Collecting 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國朝五禮通編] No. 8, galye, jeongji’wangsejabaekkwan’johaui). 국왕에 대한 조하 의례에서도 국왕은 면복 차림으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5. 상례(喪禮)의 대렴의(大斂衣)

면복은 국왕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 했다. 국왕이 사망하면 수의를 입히고 염을 하는데, 마지막으로 감싸는 옷이 면복이었다(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No. 7, hyoonglye [凶禮], daelyum [大斂]).

상례(喪禮)절차 중 염습의(斂襲儀)는 시신에 옷을 입히고 감싸는 과정을 말한다. 습의(襲儀)는 시신에 직접 습의(襲衣, 壽衣)를 입히는 과정이고, 소렴의와 대렴의는 습의가 입혀진 시신을 다시 여러 겹의 옷과 이불로 감싸고 교(絞)로 묶는 과정을 말한다(Soon, 2000). 습의할 때는 국왕이 평소 업무시 입는 곤룡포와 익선관을 입히고, 소렴 시에는 강사포를, 마지막 대렴할 때에 면복을 입혔다(Goh 2011; Jung, 2019).

그렇다면 조선국왕 사망시 명에게 받은 면복으로 대렴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조선 초 국왕들은 선왕(先王)이 명 황제에게 받았던 면복을 물려 입었기 때문이다.1) 따라서 조선 국왕이 사망하면, 그 뒤를 이을 새로운 국왕은 선왕이 입었던 면복을 입고 등극례를 행하게 되는 구조이다. 조선 국왕이 등극할 때마다 명나라가 책봉 고명과 함께 면복을 새로 보내주는 일은 1450년 문종대 관행화 되었으며(Moonjongsillok [文宗實錄], Moonjong accession year, May 17; Danjongsillok [端宗實錄], Danjong accession year, September of the leap month 17; The rest is omitted), 문종 이후에도 국왕들은 등극례에서 선왕이 입었던 면복을 입었다. 왜냐하면 조선 국왕 사망 소식이 명나라 조정에 접수되고, 명 조정에서 면복을 준비해 명 사신을 조선 한양까지 파견하는데, 이 기간이 최소 몇 달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종은 1450년 2월에 즉위식을 거행했지만, 그해 8월이 되어서야 명 사신으로부터 고명과 새 면복을 받았으며(Moonjongsillok, Moonjong accession year, February 22; Moonjong accession year, August 3), 성종은 1469년 11월에 즉위식을 거행했고, 이듬해 5월 명 사신에게 새 면복을 받았다(Seongjongsillok, Seongjong accession year, November 28; Seongjong 1 Year, May 1).

선왕의 상례와 새 국왕의 등극례가 동시에 벌어지는 상황에서, 명에서 받은 한 벌의 면복을 새로 등극할 국왕이 입는다면, 사망한 국왕의 시체를 감싸는 면복은 어떤 것일까. 태종, 세종대 이미 대렴할 때 면복을 활용한 것이 확인되며, 세종은 명에서 면복을 보내주면 상의원에서 그 모양과 동일하게 면복을 추가로 제작하게 하였다. 이렇게 조선 상의원에서 여분으로 제작한 면복을 국왕 사망시 대렴에 사용했다. 조선 관료들은 명 황제가 보내준 면복을 결코 염습에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Sejongsillok, Sejong 20 year, October 5; Moonjongsillok, Moonjong accession year, March 3). 청나라 황제는 면복을 착용하지 않아, 조선 후기에는 모든 면복을 상의원에서 자체 제작해 사용했다(Injosillok, Injo 26 year, August 13; Youngjosillok, Youngjo 19 year, April 14; Seungjeongwonilgi, Heonjong 2 year, October 12).


Ⅲ. 면복 착용의 확장
1. 회맹의(會盟儀)

국초부터 세종대까지 정비된 국가 의례는 『세종실록』 「오례」, 성종대 『국조오례의』로 집성되었다. 그렇지만 『국조오례의』에 일부 의례는 기록되지 않았다. 세조대 국왕친제가 시작된 회맹제(會盟祭)가 그것이다. 회맹은 임금과 공신(功臣)들이 살아 있는 짐승 희생(犧牲)을 하늘에 바치며 제사를 지내고, 희생의 피를 서로 나누어 먹거나 입가에 바르며, 충성을 맹세하고 서로 간의 의리를 지킬 것을 다짐하는 의례이다.

회맹은 국초부터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국가를 새로이 여는 상황에서 개국공신들의 충성맹세가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회맹에 국왕은 참여하지 않고 공신들끼리 모여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392년(태조 1) 9월 개국공신의 자손, 인척들이 충효계(忠孝契)를 맺고 개경의 왕륜동(王輪洞)에서 회맹하였다(Taejosillok, Taejo 1 year, September 28). 1411년(태종 11) 원종공신들은 경복궁 북쪽에서 회맹했고, 태종은 회맹하는 이들에게 술을 보내주기도 했다(Taejongsillok, Taejong 11 year, November 3). 이후에도 경복궁 북동(北洞)에서 공신의 회맹이 이루어졌다(Taejongsillok, Taejong 17 year, April 11).

회맹은 하늘 신(上帝)과 종묘사직, 산천의 신령에게 제를 지내는 것이어서 제천의식으로 볼 수도 있고 도교적 성격이 있어, 조선이 지향하는 성리학 국가에서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의례였다(Jeong, 1993). 회맹제는 태조~태종대 행해졌지만 세종, 문종대 확인되지 않는다. 맥이 끊어질 것 같던 회맹제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인물은 세조이다. 단종‧세조 시기 만들어진 회맹 의례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된다.

단종대 회맹의는 1453년 11월 20일에 행해졌다. 훗날 세조가 될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 한 달 뒤이다. 이 회맹제에서 수양대군을 비롯한 정난공신들은 역설적이게 단종에 회맹하였다. 성북단(城北壇)에서 열린 이 회맹제의 맹세문을 보면,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란의 정당성을 천지신기(天地神祈)와 종묘와 사직·산천의 여러 신령(山川百神靈)에게 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즉 단종의 회맹제는 국왕 단종에 대한 신료들의 충성맹세라기보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 세력을 공신으로 지정하고 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이 회맹제를 주목할 점은 또 있다. 회맹제에 처음으로 국왕이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국왕이 처음으로 회맹에 참여하면서, 조선의 주요 제례와 유사하게 절제된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회맹제이기에 희생의 피를 받아 마시며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도 있었지만, 그 외에는 조선의 다른 제례와 비슷했다. 기일(期日) 7일 전에 여러 공신과 집사관(執事官)·근시관(近侍官) 등은 모두 산재(散齋) 4일, 치재(致齋) 3일 동안을 행하였다(Danjongsillok, Danjong 1 year, November 20). 최고 높은 등급의 제사인 종묘와 사직 제례에서 몸을 깨끗이 하는 재계를 7일 동안 했고, 문선왕 친향 때는 5일이었다(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Arranged in Sequence [國朝五禮儀序例] No. 1, sacrificial rites, jekye [齊戒]). 그런데 회맹의 재계가 7일이었으니, 이는 국가 제례 중 최고 의례로 치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회맹 의례를 보면 회맹의식, 제의(祭儀), 조하의(朝賀儀)가 섞여 있었다(Danjongsillok, Danjong 1 year, November 20). 회맹의례의 목적은 국왕과 신료들 간의 충성맹세이지만, 의식은 신성한 제례(祭禮)에 가까웠다. 이 의식에서 국왕은 면복을 입었다.

세조는 단종을 밀어내고 즉위한 이후 회맹제를 행했고(Sejosillok, Sejo 1 year, October 23; Sejo 2 year, November 15; Sejo 13 year, October 17), 왕세자도 공신 및 그 적장자를 거느리고 회맹하였다. 세자도 회맹할 때는 면복을 입었다(Sejosillok, Sejo 6 year, November 16; Sejo 7 year, February 6; Sejo 13 year, October 27).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도 신무문(神武門)을 나서 단소(壇所)에 나아가 회맹했다(Joongjongsillok, Joongjong 1 year, October 19). 1507년(중종 2) 9월에는 회맹제와 망궐례 일정이 겹쳐서, 둘 중 하나는 정지해야 했다. 대간(臺諫)은 망궐례를 시행하고 회맹제를 중지할 것을 아뢰었지만, 중종은 회맹제를 시행했다(Joongjongsillok, Joongjong 2 year, September 17; Joongjong 2 year, September 22; Joongjong 2 year, September 25). 중종은 ‘면복을 입고 명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의식’보다, 희생의 피를 입가에 바르며 충성을 맹세하는 회맹제를 더 중시했다.2)

회맹제는 정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후 여느 왕들 모두 행하였다(Myeongjongsillok [明宗實錄], Myeongjong 2 year, September of the leap month 13; Seonjosillok, Seonjo 37 year, October 28; Kwanghaegoonilgi, Kwanghaegoon 5 year, March 12; Kwanghaegoonilgi, Kwanghaegoon 8 year, October 12). 인조대 왕세자도 면복을 입고 공신들과 북악(北嶽) 아래에서 회맹제를 거행하였다(Injosillok, Injo 6 year September 13). 숙종, 경종과 영조도 경복궁 북쪽 신무문(神武門) 밖에 위치한 회맹단(會盟壇)에서 회맹제를 시행했으며, 이때 면복을 입었다(Kyeongjongsillok, Kyeongjong 3 year, March 11; Youngjosillok, Youngjo 4 year, July 18; Seungjeongwonilgi, Jeongjo 9 year, October 19). 영조가 회맹을 실시한 시점은 이인좌의 난이 마무리된 시점이었다. 반역을 도모했던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이후 왕과 신료들은 피의 맹세를 했던 것이다.

법전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국왕이 참여하는 회맹제는 세조가 주도했던 1453년(단종 1) 이후 18세기 영조대까지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 신료들의 충성 맹세를 받는 의식에서 조선 국왕은 면복을 입어 그 맹세의 엄숙함과 약속의 무게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2. 제천례(祭天禮) : 원구제(圜丘祭)와 기우(祈雨)·기곡제(祈穀祭)

원구제(환구제)와 기우·기곡제는 제례하는 장소가 다르지만, 제천례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비슷하다.3) 원구제는 고려시대 이래로 거행되어 왔다가 조선 전기 세조대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으며, 기우·기곡제는 조선 후기에 중요한 제례가 되었다.

먼저 원구제부터 살펴보자. 원구제는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 신에게 지내는 제례로, 조선에서 원구제는 민생을 위해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祈雨)와 풍년을 바라는 기곡(祈穀)차원에서 시행되었다. 중국처럼 ‘동짓날에 상제(上帝)에 제례를 지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구제가 황제만 거행할 수 있는 천자례(天子禮)라는 점에서, 조선 초 그 시행에 대해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1412년(태종 12) 원구제가 중지되었다가, 가뭄이 극심하면 임시 차원에서 제천례를 시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1416년(태종 16) 재개되기도 하였다. 1443년(세종 25) 조공국인 조선에서는 임시적인 원구제조차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 국왕도 동조하면서 기우제를 위한 원구제는 폐지되었다(Choi, 2013).

그런데 세조는 원구제를 재개했다. 세조는 조선 전기 국왕들 중에서 제사에 가장 열심히 참여한 국왕이었다. 세종대까지 원칙적으로 국왕이 친제할 수 있는 범위는 종묘와 사직, 선농, 문선왕묘였지만, 실제 친제가 이루어진 것은 종묘와 문묘(성균관) 제사뿐이었다. 그런데 세조는 상술한 바와 같이, 즉위 후 조선 국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직에서 친제(親祭)하였으며, 회맹제에도 참여하였다. 게다가 세종대 폐지한 원구제도 다시 시행하였으며, 매년 정월 15일에 지내도록 정례화하였다.

세조는 원구제를 天子의 예로 시행하고 친제하면서, 천명을 받은 절대 군주의 모습을 강조했다(Han, 2004).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군주만이 할 수 있는 제례의 범위를 확대하고, 친제도 적극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왕위의 정당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행사에서 세조는 국왕만이 입을 수 있는 면복을 착용했다(Sejosillok, Sejo 3 year, January 15).

세조의 원구제 시행은 합당한 논리가 마련되지 않은 채 정치적으로 단행된 것이어서 세조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거행되지 않았다(Choi, 2013). 따라서 조선시대 정례화된 원구제 시행은 오직 세조의 제례(祭禮)로 남았다. 군주가 면복을 입고 원구제를 시행한 일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가 된 이후이다(Kojongsillok [高宗實錄], Kojong 34 year, August 16(a solar calendar); Kojong 36 year, December 22(a solar calendar)).

다음으로 기우제와 기곡제를 살펴보자. 기우제가 가뭄이 닥쳤을 때 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기곡제는 한 해를 시작할 무렵에 풍년을 바라는 미래적 기원의례이다(Lee, 2000). 조선 초 원구단 제례 이외의 기우제는 중사(中祀)급 제례로 신료들끼리 거행했다. 따라서 원구제가 폐지된 이후 국왕이 참여하는 기우·기곡제는 없었다.

1527년(중종 22) 중종은 신료들의 기우제가 효험이 없자, 직접 사직과 종묘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1537년(중종 32)에도 남교(南郊)의 ‘풍운뇌우단’에서 직접 기우제를 지냈다. 1553년(명종 8) 명종도 직접 기우제를 거행한 바 있는데(Myeongjongsillok, Myeongjong 8 year, April 12), 이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으며(Han, 2007), 조선 전기 중종과 명종이 기우제에서 면복을 착용했는지 여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기우제에 대한 국왕의 관심은 조선 후기 크게 증가하였고 국왕이 직접 기우제에 참여하는 일이 잦아진다. 1650년 효종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직에서 기우제를 행하였으며, 예조와 논의 후 이 기우제에서 면복을 입었다(Seungjeongwonilgi, Hyojong 1 year, July 7). 이듬해 사직단에서 행해진 기우제에서도 효종은 면복을 입었다(Hyojongsillok, Hyojong 2 year, May 25). 숙종은 처음으로 선농단(先農壇)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영조는 처음으로 북교에서도 기우제를 거행했다. 국왕이 참여하는 기우제가 점차 확대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으며(Seungjeongwonilgi, Kyeongjong 2 year, April 24; Seungjeongwonilgi, Youngjo 1 year, July 19; Youngjosillok, Youngjo 10 year, July 30), 조선 후기 국왕들은 기우제에서 면복을 입었다(Jeonyooltongbo, ritual code, ceremonial regalia, sangbok). 영조는 비가 올 때까지 여러 곳에서 기우제를 거행해서, 어느 왕보다 기우제에 적극 참여했다(W. Lee, 2020).

기곡제는 1695년(숙종 21) 숙종이 처음으로 친제하였는데(Sookjongsillok, Sookjong 21 year, November 22), 조선 후기에 대사(大祀) 중 하나로 추가되기에 이른다. 국초 『국조오례의』 체제에서 대사(사직과 종묘) 항목이 변동된 것은 기곡제가 유일하며(Lee, 2002), 조선 후기 관료들이 기곡제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기우·기곡제가 주목되는 점은 이 제례를 사직에서 시행했다는 점이다. 기곡제의 경우 농사와 관련된 후직씨(后稷氏)가 선농단에도 있었기 때문에 사직에서 기곡제를 지낸 것은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조선 시대 국가 제사에서 사직(社稷)은 원구제 폐지 이후 최고의 제사였다. 사직은 그 자체로 국가의 정치 권력을 상징하며, 기우제와 기곡제는 민생을 염려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사직단에서 제례를 행하면, 그 의례의 효과가 사직제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Lee, 2000). 또한 하늘에 기도하는 기우·기곡제가 천자(天子)만 행할 수 있는 제천례(祭天禮)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조선 후기 기우·기곡제에서 조선 국왕은 면복을 입었는데, 교단(郊壇)에서 기우제를 행할 때는 상복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었다(Jeonyooltongbo, ritual code, ceremonial regalia, sangbok). 조선 후기 최고의 제사 공간이던 사직에서 제천례를 행한 것은 풍년을 기원하는 국왕의 주권을 확고히 하는 한편, 하늘과 권력의 근원을 연결시키고 싶은 국왕의 욕망이 근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Lee, 2000).

3. 대보단(大報壇) 제례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다. 그리고 명나라 멸망 1주갑(60년)을 맞이하여, 1704년(숙종 30) 조선은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했다. 숙종은 임진왜란 시에 조선을 도와주었던 명나라 만력제(萬曆帝)의 기일(음력 7.21.)에 대보단에서 친제했다. 대보단은 멸망한 명 만력제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으로, 정규 사전(祀典)에 올라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사(大祀) 수준으로 제사가 진행되었고, 숙종은 대보단 의례에서 면복을 입었다(Sookjongsillok, Sookjong 30 year, March 19). 다만 숙종대는 명이 멸망한 일주갑을 계기로 발생한 이벤트 성격이 강했다. 그런 대보단에 영조가 새롭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임금이 원유관에 강사포 차림으로 황단(皇壇)에 나아갔다. 재전(齋殿)에 들어가 면복을 입고 규(珪)를 잡고, 단(壇)에 이르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Youngjosillok, Youngjo 32 year, March 2).

위의 기사와 같이, 영조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입고 대보단(황단)에 나아갔고, 재전에 들어가 면복으로 갈아입고 단소에 이르러 명 황제에 제사를 지냈다. 대보단 제례와 관련한 기사는 더 찾아볼 수 있다(Seungjeongwonilgi, Youngjo 3 year, March 7; Youngjosillok, Youngjo 4 year, March 3; Youngjosillok, Youngjo 17 year, March 4). 대보단에서 절(사배례)만 한다면 익선관에 곤룡포, 또는 흑단령포(黑團領袍)를 입었다(Youngjosillok, Youngjo 32 year, May 4; Youngjo 33 year, March 10).

대보단 제례는 정조대 더욱 강화되었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매년 대보단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순조 이후 점차 제사의 횟수가 감소되고 정치적 의미도 퇴색되어 가, 철종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Kye, 2010).

조선 국왕이 이미 멸망한 외국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군신(君臣) 의리는 영원하고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대보단 제례로 몸소 실천하며, 신료들에게 동일한 의리를 실천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Kye, 2010). 조선 국왕은 ‘피로써 맹세’하는 원초적인 회맹제와 다른 한편에서, 유학적 논리 위에 군신 의리를 강조하는 대보단 제례를 행했다. 그리고 이 의례에서 면복을 입었다.

4. 영희전(永禧殿)·경모궁(景慕宮) 제례(祭禮)

조선 후기 새롭게 국왕이 친행한 제례에 영희전과 경모궁 의례가 있었다. 조선시대 왕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한다. 어진은 왕과 같은 권위가 인정되었고, 어진이 봉안된 곳을 ‘진전(眞殿)’이라고 불렀다. 진전은 국왕이 선친에 정을 표하는 왕실 조상의 숭배 공간이면서, 제향(祭享)을 올리는 원묘(原廟)로도 여겨졌다. 그러나 조선 초 국가 전례가 정비되면서, 『국조오례의』에서 진전 의례는 주로 지방관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유학 이념을 내세웠던 조선에서 선왕의 신주(神主)가 있는 종묘보다 초상화가 있는 진전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라 볼 수 있다(S. E. Kim, 2013). 따라서 조선 전기 진전에서 국왕이 친제한 일은 없었다.

진전 의례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는 양란(兩亂)이었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을 제외한 모든 진전이 파괴되었다. 태조와 세조의 초상화만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친모 공빈(恭嬪) 김씨의 사당에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봉안한 뒤 남별전(南別殿)으로 이름을 바꾸고, 친제를 거행했다. 진전에서 친제를 거행한 것은 광해군이 시작했다. 숙종은 이 남별전을 대대적으로 보수 확장했다. 1688년 이괄의 난으로 강화부로 옮겨졌던 태조의 어진을 다시 봉안하고, 이 건물에 영희전(永禧殿)이라는 공식 전호를 내린 뒤, 3년에 한 번씩 작헌례 올리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숙종대 도성 안에 세워진 영희전은 국왕 친제가 거행되는 공식 진전이 되었다. 영희전의 의례 절차는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국왕이 직접 왕세자와 종친, 대소 신료들을 거느리고 화려한 의장 속에 행차하여, 조선 최고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적 공간이 되었다(Yoo, 2011; S. E. Kim, 2013). 숙종과 이후 국왕들은 영희전 제례에서 모두 면복을 입었다(Seungjeongwonilgi, Sookjong 19 year, May 9; Revised edition of records on Five Ceremonies of the country [國朝續五禮儀] No. 1, sacrificial rites, jakheon’younghuijeonui [酌獻永禧殿儀]; No. 1, sacrificial rites, chinhyang’younghuijeonui [親享永禧殿儀]; Chungwantonggo No. 24, sacrificial rites, jinjeon [眞殿], chinhyang‘younghuijeonui).

영조는 영희전 친제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작헌례를 2년마다 거행되도록 정비하고, 친향(親享)도 자주 거행했다. 그리고 영희전 친제를 종묘 제향 의례에 따라 구성하도록 했다. 진전 의례의 행차는 화려하고 장대했으며, 이 의례에 참여하는 재관의 규모와 직위는 종묘 의례에 비견될 정도였다(Yoo, 2011). 강력한 통치권을 드러내기 위하여 국왕의 초상화 같은 상징물을 중시하고, 왕실 행사를 국가 전례로 공식화하는 국정운영에서 영희전 제례가 강조되었으며(S. E. Kim, 2013), 조선 국왕은 이 의례에서 면복을 입었다.

한편 정조(正祖)는 친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 경모궁(景慕宮) 제례에서 면복을 입었다. 정조는 그의 재위 동안 영조의 처분을 준수하며, 끝까지 친부 사도세자를 왕으로 올리는 추숭(追崇) 작업을 하지 않았다. 정조는 친부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않는 원칙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오히려 그의 정당성을 지켜나갔다(J. Y. Kim, 2013). 다른 방식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영조가 사망하자마자 곧바로 친부에 대한 각종 의례를 개정했고, 사도세자 현창 사업을 숨가쁘게 진행했다. 사도세자가 14년간 대리청정(代理聽政)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국왕보다는 낮지만 다른 왕세자보다 높은 수준의 의례를 만들었다(Chung, 2014). 경모궁은 역대 국왕이 아닌 세자의 사당이므로 종묘 제사보다 한 등급 낮추어 제례가 이루어졌지만, 경모궁 제례 제도와 복식을 기록한 『경모궁의궤』는 『종묘의궤』보다도 그 형식과 내용이 상세하다. 정조는 비록 격식을 낮추더라도 사도세자에 대한 제향 의식을 의도적으로 철저히 격식을 갖추어 진행했으며,(Yoon, 2005) 경모궁에서 면복을 입고 제례를 수행함으로써 친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표현했다(Seungjeongwonilgi, Jeongjo 2 year, May 15; Seungjeongwonilgi, Jeongjo 2 year, July 16; Jeongjosillok, Jeongjo 19 year, January 17). 정조 사후 순조, 헌종도 경모궁 제례를 계속하였다. 철종과 고종은 사도세자의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고종은 1899년 사도세자의 묘호를 장종(莊宗)으로 결정하고, 사도세자의 위패를 경모궁에서 종묘로 옮겼다. 기존 국왕들이 하지 못했던 사도세자 추숭을 고종이 행한 것이다(Chung, 2014).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은 사망 후 종묘에 모셔졌고, 국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 사도세자는 경모궁에서 제례가 이루어졌다. 정조 이후 국왕들은 모두 면복을 입고 사도세자를 추모하였으며, 이는 법제화되어 조선 말까지 제례가 진행되었다(Chungwantonggo No. 15, sacrificial rites, kyeongmogoong’chinje [景慕宮親祭]; DaehanYejeon [大韓禮典] No. 6, uiju [儀註], sacrificial rites, sasikeub’labhyang’kyeongmogoongui [四時及臘享景慕宮儀]).

경모궁 제례는 공식적으로 대사(大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조는 왕세자 제례를 융숭하게 지냄으로써 친부에 대한 정성을 드러냈고, 이 경모궁 제례에서 면복을 입어 그 마음을 표현하였다. 국왕의 면복 착용이 사도세자 제례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기제 중 하나였다.


Ⅳ. 결론

본고에서 조선 국왕 복식 중 최고의 권위 있는 면복 착용 의례 20가지를 확인하였다. 각각의 성격을 검토하고, 면복 착용의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먼저 국초 국왕의 면복 착용 의례를 어떻게 정립했는지 『국조오례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째 신과 조우하는 순간에 입었다. 모든 제례시 다 입었던 것은 아니고 가장 중요한 대사(大祀)인 사직(社稷)과 종묘(宗廟) 제례, 중사(中祀)급 제사지만 문묘(文廟)·선농(先農) 제례에 국왕이 직접 참여할 경우 입었다. 국초에는 국왕의 제사 참여 빈도가 낮았으며, 세조의 제사 참여 빈도가 높았다.

둘째 국왕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주요한 시점에 입었다. 왕세자로 책봉 받고, 성인식을 하고, 혼인을 하고, 국왕으로 등극할 때, 생애 빛나는 순간에 면복을 입었다.

셋째 면복은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출 때도 입었다. 황제와 조선국왕 사이에서만 주고받을 수 있는 상위의 문서는 황제 그 자체와 동일시되어, 그 문서에 절하는 의식이 있었다. 황제는 조선에 조서와 칙서를 보냈는데, 조선국왕은 조서를 받을 때만 면복을 입고 문서를 맞이했다. 조선국왕이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에 절하는 배표례가 있었는데 이때도 면복을 입었다. 또한 황제의 생일, 설날, 황태자의 생일에 북경을 향해 의례를 행했는데 이때도 면복을 입었다. 황태자 생일에 하는 망궁례는 명대(明代) 태자가 없던 시기가 많은데다 사실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청은 황태자를 세우지 않아 사실상 없어졌다.

넷째, 조선 국왕의 생일, 설날 등에 조선 신료들이 국왕에 조하(朝賀) 의례를 행할 때도 입었다.

다섯째, 이렇듯 중요한 순간에 입었던 면복은 생애 마지막 순간 국왕의 옷이 되어 그 생명을 다했다. 국왕 사망시 면복을 대렴(大斂)할 때 사용했다. 다만 명 황제에 받은 면복은 그 다음 국왕이 등극할 때 입도록 물려주었기 때문에 대렴에 사용하는 면복은 조선의 상의원에서 제작한 것을 활용했다.

이 다섯 가지 성격의 구조는 『국조오례의』를 통해 조선 전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면복을 입는 경우가 증가했는데, 당시 조선 국왕의 정치적 의도와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첫째 회맹제이다. 회맹은 짐승의 피를 마시거나 바르며 신료들이 국왕에 충성 맹세를 하는 의식으로, 유교국가를 지향하는 조선 국가의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조는 단종의 측근을 제거한 계유정난 이후, 회맹의를 종묘례에 준하는 수준으로 의식을 만들어 거행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영조대까지 계속되었다. 신료들의 충성맹세를 받고 신에게 고하는 이 자리에서 조선 국왕은 면복을 입었다.

둘째 제천례에서도 면복을 입었다. 조선 초기 천자례라고 할 수 있는 원구제에서 면복을 입었는데, 원구단 제의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의례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합의되며 세종대 폐지되었다. 세조는 폐지되었던 원구제를 다시 거행했으나, 세조 사후에는 더 이상 거행되지 않았다. 제천례는 조선 후기 다른 방식으로 다시 거행되었다. 기우제와 기곡제가 그것이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에서 최고의 제사였던 사직(社稷)은 그 자체로 정치권력을 상징했다. 조선 국왕은 이 사직에서 기우제와 기곡제를 지냈다. 하늘의 신에게 구원하는 기우 기곡제는 제천례의 하나이고, 사직에서 제천례를 행한 것은 민생의 염원을 담아 권력의 원천을 하늘과 연결하고 싶은 국왕의 욕망이 근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거룩한 의례에서 조선국왕은 면복을 입었다.

셋째, 조선 후기 대보단 제례에서도 면복을 입었다. 대보단은 명이 멸망한 1주갑이 되던 해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원조했던 명나라 만력제를 기리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단이다. 조선 국왕은 조선을 구원했던 명 황제를 기리는 제례를 통해 신료들에게도 국왕에 대한 강고한 의리를 실천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조선 국왕은 도교적 색채가 투영된 회맹제와 다른 한편에서 유학적 논리를 갖춘 대보단 제례를 시행하며 신료들의 충성을 요구했고, 이 행사에도 면복을 입었다.

넷째, 영희전, 경모궁 제례에도 면복을 입었다. 영희전은 조선 국왕의 초상화가 모셔진 곳이며, 경모궁은 정조의 친부 사도세자를 모신 사당이다. 숙종대를 거치며 영조대 이르러 영희전 제례는 종묘례에 비준하는 제례로 격상되었다. 경모궁은 정조가 직접 친부 사도세자를 추모하면서, 면복을 입고 제례를 거행하는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사도세자는 국왕이 되지 못한 조선의 세자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제향을 받게 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미루어볼 때, 면복 착용이 확산되는 의례는 대부분 왕권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과 관련된 것이었다. 국왕의 면복 착용 범위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넓어졌다. 국왕은 면복을 입고 회맹제를 주재하면서 신료들의 충성을 피로써 맹세 받았고, 대보단 제례를 시행하면서 의리를 강조하는 유학적 이념 기반을 다졌다. 사직에서 기우·기곡제는 민생을 염려하는 성군의 임무를 다한다는 명분과 더불어, 천자(天子)례의 성격이 있는 제천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역대 국왕의 초상화를 모신 영희전 제례의 위상을 격상할 때 국왕은 면복을 착용했다.

옷은 다분히 정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와 의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던 조선의 경우 상징 언어로 옷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더욱이 고도의 상징적인 국가행사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의복 착용의 규범도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신분과 계층을 확연하게 구분 짓고, 최고 권력의 정점에서 이하 해당 인원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규정하는 질서는 정태적일 수밖에 없다. 조선은 국초 면복 규정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였고 조선 국왕들은 이를 준수했다.

그러나 정치는 변화하는 사회구조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대응하고 권력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의례에서 옷 착용은 전범적 규정의 틀을 서서히 벗어나 정치성 확대의 외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국왕들은 규범에서 정한 범위를 넘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의례에 면복을 입고 등장함으로써 해당 의례를 ‘가장 중요한’ 의례로 만들어갔다. 면복은 시각적으로 해당 의례를 완성했던 것이다. 그것이 꼭 대사(大祀)가 아니어도, 법제화되지 않은 의례여도, 국왕이 면복을 입고 등장하는 순간, 그 의례는 특별한 의미로 자리매김되었다. 옷은 메시지다.


Notes
1) 명나라는 1370년(공민왕 19) 고려 공민왕에게 처음으로 면복을 사여했고, 조선 태조는 고려 공민왕이 받은 면복을 그대로 사용했다(Jung, 2012). 태종은 명 건문제(建文帝)에게 면복 사여를 주청하여, 새 면복을 받게 되는데(太宗實錄, 太宗 1年 12月 9日; 太宗 2年 2月 26日). 이는 고려 시기 명에게 받은 면복을 받은 이후 30여 년이 지난 후이다. 명 영락제(永樂帝)가 조카인 건문제를 제위(帝位)에서 밀어내고 새로이 황제에 등극하자, 그는 조선 태종에게 새 면복을 하사했다(太宗實錄, 太宗 3年 10月 27日). 영락제에게 면복을 받은 지 40여 년이 지난 1444년(세종 26) 세종은 면복이 헤졌다는 이유로 면복을 새로 요청해서 받게 된다(世宗實錄, 世宗 25年 12月 18日; 世宗 26年 3月 26日). 즉 국초 국왕들은 선왕이 명에게 받은 면복을 물려 입었다.
2) 회맹제에서 중종의 면복 착용 여부를 직접적으로 거론한 사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중종을 기준으로 선후대 국왕이 회맹제 시 면복을 착용했던 사례를 미루어 본다면, 중종 역시도 해당 의례에 면복을 착용하였을 것이라 판단된다.
3)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 매일신문에서는 圜丘를 ‘원구’로(일신문, 1898년 12월 24일),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서는 ‘환구’로 발음하고 있다(大韓每日申報, 1907年12月22日). 당시 이 두 발음이 모두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본고에서는 원구제로 표기하도록 하겠다.

Acknowledgments

이 연구는 아모레퍼시픽재단의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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