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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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 No. 5

[ RESEARCH PAPER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No. 5, pp. 149-162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Aug 2016
Received 06 Jul 2016 Revised 02 Aug 2016 Accepted 06 Aug 2016
DOI: https://doi.org/10.7233/jksc.2016.66.5.149

최경선(1561~1622) 묘 출토복식 연구
송미경 ; 진덕순 ; 김진경
서울여자대학교 의류학과 부교수
서울여자대학교 의류학과 석사
서울여자대학교 의류학과 석사

Excavated costume from the tomb of Choi Kyung Sun (1561~1622)
Song, Mi Kyung ; Deok Soon Jin ; Jin Kyung Kim
Associate Professor, Dept. of Clothing Science, Seoul Women’s University
Master, Dept. of Clothing Science, Seoul Women’s University Graduate School
Master, Dept. of Clothing Science, Seoul Women’s University Graduate School
Correspondence to : Song Mi Kyung, e-mail: mksong@swu.ac.kr

Funding Information ▼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costume artifacts discovered in the burial site of Choi Kyung Sun(1561~1622), which was moved from Gangwon in Gangrung Province. About 30 artifacts, including costumes, were recovered from Choi Kyung Sun’s grave. The collection of men’s coats discovered in the grave consisted of a Dallyeong (Official’s robe), Jing-nyeong(Man’s coat), Jungchimak( Man’s coat), Cheolrik(Man’s coat), Chang-ui(Man’s coat), Gwang-su-ju-ui(Man’s coat), and Do-po(Man’s coat). Han-sam(Undershirts), Jeo-go-ri(Jacket), and trousers were also recovered, along with several items made of textiles, such as the cloth used to shroud and wrap the body. The costume artifacts recovered from Choi Kyung Sun’s grave have several characteristics that distinguish them from other early 17th-century costume artifacts. Firstly, the body had a hairband made from horsehair. Secondly, the men’s trousers were of the type worn before the Japanese Invasion(1592~1597). Thirdly, the style of the coats’ sleeves, when compared with artifacts from other regions, was from an earlier era. Through these costume artifacts, it can be inferred that people who lived in the Gangwon Province, which was far away from Seoul, continuously wore outfits from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and trends spread slowly.


Keywords: early 17th century, excavated costume, fashion trend, Joseon Dynasty
키워드: 17세기 전기, 출토복식, 유행의 전파, 조선시대

Ⅰ. 서론

이 연구는 최경선(崔景璿, 1561~1622)묘에서 출토된 복식을 연구한 것이다. 최경선 묘 출토복식은 2007년 11월 9일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향호 1리에 있었던 강릉최씨 진사공 휘호파 7세조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최경선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최경선 묘에서는 복식류와 치관제구(治棺諸具)를 비롯한 30여점이 수습되었다.

최경선은 미라 상태였고, 염습상태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상장례 풍습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Shin, Song, Lee, & Yoon(2014) 연구에서는 최경선 묘 출토복식과 연관하여, CAD를 사용하여 최경선 미라 상태에서 해부학 연구자와 함께 도포를 입은 생시의 상반신 모습을 재현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최경선 묘 출토복식을 통해, 첫째 17세기 초기의 조선시대 남자복식의 종류를 알아보고, 둘째 최경선 묘 출토복식의 조형적 특징을 살펴보고, 셋째 최경선 묘 출토복식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다.

최경선이 살았던 16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는 조선시대의 정치와 경제 및 복식의 변화가 많았던 시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복식의 종류와 형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17세기 전기 조선시대 남자 복식은 다수 보고되었다. 최경선과 동시대인 17세기 전기 남자 묘에서 복식이 출토된 사례는 조경(1541~1609)묘, 강대호(1541~1624)묘, 이응해(1547~1626)묘, 선언(1580~1628)묘, 신경유(1581-1633)묘, 김확(1572~1633)묘, 한준민(1570~1638)묘 등의 경우가 있다(ChungJu Museum, 2004), (Gyeonggi Provincial Museum, 2007), (Seok Juseon Memorial Museun Dankook University, 2005), (Seok Juseon Memorial Museum Dankook University, 2008), (Seok Juseon Memorial Museum Dankook Univesity, 2009), (Seok Juseon Memorial Museun Dankook University, 2013), (Seoul Museum of History, 2003). 연구방법은 선행연구를 참고하여, 최경선 묘에서 출토된 복식을 조사ㆍ분석하였다.


Ⅱ. 최경선 묘 출토복식
1. 복식의 종류

최경선 묘의 출토유물은 복식 16종 29점과, 치관제구 5종 11점<Table 1>으로 이 가운데 복식류는 포류 7종 14점(단령 2점, 직령 2점, 중치막 2점, 철릭 3점, 창의 1점, 광수주의 1점, 도포 3점)과 상의류 2종 2점(저고리 1점, 한삼 1점), 바지류 2종 6점(개당고 4점, 합당고 2점), 버선 1쌍, 망건 1점, 광다회 1점과, 치관제구로는 악수 1쌍, 모 1 점, 멱목 1점, 대렴 횡교 1점, 대렴 종교 1점, 소렴 횡교 1점, 소렴 종교 1점, 대렴금 1점, 소렴금 1점, 충이 1쌍, 구슬 3개가 있다.

<Table 1> 
List of costume artifacts recovered from Choi Kyungsun’s grave
Relics No. Relics title type of cloth fabric (outer/lining) purpose
unlined clothes Lined clothes Padded clothes Quilted clothes
1 trousers cotton Coffin lining and stuffing
2 socks cotton/hemp
3 trousers plain silk/cotton
4 trousers hemp
5 trousers hemp
6 horizontal tie cloth hemp Burial clothes-outer layers
7 vertical tie cloth hemp
8 duvet Satin Damask/cotton
9 Dallyeong Official’s robe silk and cotton blended weaves
10 Jing-nyeong Man’s coat ramie
11 Do-po Man’s coat ramie
12 Cheolrik Man’s coat ramie
13 Chang-ui Man’s coat plain silk
14 Cheolrik Man’s coat plain silk
15 horizontal tie cloth hemp Burial clothes-inner layers
16 vertical tie cloth hemp
17 duvet cotton
18 Gwang-su-ju-ui Man’s coat plain silk
19 Dallyeong Official’s robe silk and cotton blended weaves
20 Cheolrik Man’s coat plain silk
21 Do-po Man’s coat plain silk
22 Jing-nyeong Man’s coat ramie
23 Gwang-da-hoe Waist cord silk thread Innermost layers, dressed when cleaning and preparing the body for burial
24 sleeve of No. 18 plain silk
25 Do-po Man’s coat ramie
26 Jungchi-mak Man’s coat Satin Damask
27 Jungchi-mak Man’s coat ramie
28 Jeo-go-ri Jacket plain silk
29 Han-sam Undershirts ramie
30 wraps for hands Satin
31 trousers cotton/hemp
32 trousers cotton
33 Headgear silk
34 Face mask Satin
35 Headband horsehair
36 fill ears with cotton floss silk
37 bead glass

2. 염습의(殮襲衣)

최경선 묘 출토복식은 습의(襲衣)가 그대로 입혀져 있어 습의 착장 순서와 염의(殮衣)와 보공(補空)의 구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말총으로 짠 망건을 염습상태에서 착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최경선 묘 출토복식은 습의(襲衣)의 착용순서는 <Table 2>로 나타내었다. 습의는 속으로 부터 한삼(No. 29)ㆍ저고리(No. 28)ㆍ중치막 2벌(No. 27ㆍNo. 26)ㆍ도포(No. 25)를 입고 홍색으로 추정할 수 있는 광다회(No. 24)를 착용하였다. 바지는 속에서부터 합당고(No. 32)ㆍ개당고(No. 31)를 입었다. 머리에는 망건(No. 35)이 씌워져 있었는데, 망건의 당줄에 구슬 3개(No. 37)가 꿰어져 있었다. 충이(No. 36)은 수습하지 않았다.

소렴에 사용된 복식은 직령(No. 22)으로 머리를 감쌌고, 도포(No. 21)로 등부터 발끝을 펴서 감쌌다. 철릭(No. 20)은 허리부터 머리를 감싸는 용도였고, 단령(No. 19)은 허리부터 머리를 감싸고, 광수주의(No. 18)는 등부터 발끝을 감쌌다. 이 광수주의의 좌측소매를 절단하여 베개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소렴에 사용된 복식 위에 소렴금(No. 17)과 소렴 횡교(No. 15)와 소렴 종교(No. 16)로 감쌌다.

대렴에 사용된 복식은 철릭(No. 14)으로 등부터 발끝을 감쌌고 깃이 발끝을 향했다. 창의(No. 13)로 얼굴부터 등을 감싸고, 철릭(No. 12)과 도포(No. 11)로 등부터 발끝을 감싼 후 직령(No. 10)으로 등부터 머리를 감싸고 분홍색 단령(No. 9)으로 등부터 얼굴로 감쌌다. 그 다음에 대렴금(No. 8)과 횡교(No. 6)와 종교(No. 7)로 대렴하였다.

보공으로 사용된 것은 발밑에 개당고(No. 5)를 접어 넣었고, 합당고(No. 4)와 개당고(No. 3)를 발등에 접어 넣었고, 버선1쌍(No. 2)과 개당고(No. 1)로 발등을 덮었다.

<Table 2> 
Layering order of shrouds from Choi Kyung Sun’s grave
drawing
title Han-sam (No. 29) Joe-go-ri (No. 28) Jungchi-mak (No. 27) Jungchi-mak (No. 26) Do-po (No. 25)
drawing (Illustration by researcher)
title trousers (No. 32) trousers (No. 31)

3. 복식의 고찰

최경선 묘에서 출토된 복식은 복식 16종 29점과 치관제구 5종 11점 <Table 1>이다. 치관제구를 제외한 복식을 종류와 용도에 따라 분류하면 <Table 3>으로 정리할 수 있다. 포류(袍類)는 7종 14점으로, 단령 2점(No. 9ㆍNo. 19), 직령 2점(No. 10ㆍNo. 22), 중치막 2점(No. 26ㆍNo. 27), 철릭 3점(No. 12ㆍNo. 14ㆍNo. 20), 창의 1점(No. 13), 광수주의 1점(No. 18), 도포 3점(No. 11ㆍNo. 21ㆍNo. 25)이다. 상의류는 2종 2점으로 저고리 1점(No. 28), 한삼 1점(No. 29)이다. 하의류는 2종 6점으로 개당고 3점(No. 1ㆍNo. 3ㆍNo. 31), 합당고 3점(No. 4ㆍNo. 5ㆍNo. 32)이다.

<Table 3> 
Costume types and uses of artifacts recovered from Choi Kyung Sun’s grave
Type Name Number recovered Use
Coat Dallyeong 2 Burial clothes-inner layers Burial clothes-outer layers -
Jing-nyeong 2 -
Jungchi-mak 2 -
Cheolrik 3 Burial clothes-outer layers
Chang-ui 1 -
Gwang-su-ju-ui 1 -
Do-po 3 Innermost layers, dressed when cleaning and preparing the body for burial Burial clothes-inner layers Burial clothes-outer layers
top Joe-go-ri 1 -
Han-sam 1 -
trousers Divided 4 Coffin lining and stuffing
Closed 2 Coffin lining and stuffing -

1) 단령

<Fig. 1> 
Collar of Dallyeong (No. 19)

(Photography by researcher)



단령은 2점(No. 9ㆍNo. 19)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홑이며, 소재는 1점은 면포(No. 9), 1점(No. 19)은 사면교직이다. 1점(No. 9)는 대렴에, 1점(No. 19)은 소렴에 사용되었다. 단령이 습의(襲衣) 상복(上服)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최경선 묘 출토복식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단령 2점 모두 흉배는 없다. 단령(No. 9)은 훼손이 심하다. 단령(No. 19)의 경우에는 홍단령으로 추정할 수 있을 정도의 붉은색 기운이 남아 있다.

단령의 무와 소매의 형태는 2점 모두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무는 넓은 사각무로 1600년대 초반의 출토복식 단령이나 직령의 무가 끝이 뾰족한 것과 비교하면, 1500년대 후반의 직선형 무로 추정한다. Lee(1988)의 ‘대소 안팎주름형 무’와는 다른, 안으로 접혀 들어가지 않는 맞닿는 직사각형의 무이다. 최경선묘 출토 단령의 소매 형태는, 최경선 묘 출토 다른포 종류에서 보이는 소매와 같다. 진동에서부터 점차 넓어져 첫 번째 연결 소매 동부터 두 번째 소매 동에는 직선 배래이며, 수구에서 약 10cm 정도부터 둥글게 굴린 두리 소매이다. 단령의 겉섶에는 고름 바대가 달려있고, 겨드랑이 진동에는 쌍밀이 형태로 바대가 달려 있다. 이러한 형태의 바대는 독특한 형식이다. 옷고름은 자주색으로 추정되며 간접부착형 형태이다. 홑옷이라 바대와 선단이 있다. <Fig. 1>은 단령(No. 19)의 깃 모양이다. 이 단령은 깃을 사선으로 마름질하여 늘여 깃 모양을 만든 것이 아니라, 깃 모양인 U자 형으로 파서 만들었다. 겉깃의 끝에는 쌍밀이로 바느질한 매듭단추의 흔적이 있다.

2) 직령

<Fig. 2> 
Jing-nyeong (No. 10)

(Illustration by researcher)



직령은 2점(No. 10ㆍNo. 22)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홑이며, 소재는 2점 모두 모시로 만들었다. 1점(No. 10)는 대렴에, 1점(No. 22)은 소렴에 사용되었다. <Fig. 2>는 직령(No. 10)으로 훼손이 매우 심하다.

직령의 무와 소매의 형태는 2점 모두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무는 넓은 사각무로, 최경선 묘 출토 단령(No. 9ㆍNo. 19)의 무와 같은 형태이다. 출토 직령의 소매 형태는 최경선 묘 출토 단령의 소매와 같다. 즉 진동에서부터 넓어지다가 소매통에서는 직선이며, 수구 끝에서 둥글게 굴린 전형적인 17세기 초반 출토 복식에서 보이는 두리소매 형이다.

3) 중치막

<Fig. 3> 
Jungchi-mak (No. 27)

(Illustration by researcher)



중치막은 2점(No. 26ㆍNo. 27)이 출토되었는데, 중치막(No. 26)은 겉감은 사계화(四季花)무늬의 화문단으로 만들었고 안감은 주(紬)로 만든 겹 중치막이고, 중치막(No. 27) <Fig. 3>은 고운 삼베로 만든 홑 중치막이다. 2점 모두 습에 사용되었다. 2점 모두 훼손이 없는 완전한 형태로 수습되었다.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목판깃이다. 중치막의 소매는 진동에서부터 넓어지다가 소매통은 거의 직선형이며 수구의 소매통을 굴린 두리소매이다. 겨드랑이 삼각무가 달려있으며, 중치막의 특징인 진동 아래 옆선에는 길이 57.5~62.5cm의 트임이 있다. 동정은 중치막(No. 26)에는 달려있고, 중치막(No. 27)에는 달려 있지 않다. 옷고름은 중치막(No. 27)에는 속고름 1개만 있고, 중치막(No. 26)은 겉고름과 속고름 모두 뗀 상태이다.

4) 철릭

<Fig. 4> 
Cheolrik (No. 20)

(Illustration by researcher)



철릭은 3점(No. 12ㆍNo. 14ㆍNo. 20) 이 출토되었다. 철릭(No. 12ㆍNo. 14)은 대렴에 사용되었고, 철릭(No. 20)은 소렴에 사용되었다. 철릭(No. 12)은 모시홑 철릭이고, 철릭(No. 14)은 면주로 만든 겹철릭이며, 철릭(No. 20) <Fig. 4>는 면주로 만든 홑 철릭이다. 철릭(No. 12)과 철릭(No. 20)은 훼손이 된 상태이고, 철릭(No. 14)은 완전한 형태이다. 3점 모두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목판깃, 소매는 두리 소매이고, 겨드랑이 삼각무는 철릭(No. 12)은 훼손이 심해 알 수 없고, 나머지 2점은 달려있다. 치마 주름 너비는 3~3.5cm이다. 상의와 하상의 비율은 1:1.34~1:1.65 이다. 3점 모두 깃의 형태는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목판깃의 형태이다. 모시 홑 철릭은 제외하고 나머지 2점은 동정이 있고, 철릭(No. 12ㆍNo. 14)에는 옷고름 1쌍이 달려있고, 나머지 2점은 고름은 뗀 흔적이 있다. 치마폭은 철릭(No. 12)은 훼손이 심해 전체 너비를 알 수 없지만, 철릭(No. 14)은 12폭을 이어 477.5cm이다. 철릭(No. 20)의 치마 너비는 12폭을 이어 429.5cm이다. 철릭(No. 14)은 겹철릭으로, 안감의 주름을 각각 잡지 않고 겉감과 안감을 한꺼번에 주름 처리한 것도, 철릭의 안감 주름 잡는 방법과 구별된다.

5) 창의

<Fig. 5> 
Chang-ui (No. 13 )

(Illustration by researcher)



창의는 1점(No. 13)이 출토되었고, 명주로 만든 겹옷으로 대렴에 사용되었다. 이 창의의 특징은 왼쪽소매가 착탈식으로 추정되는 형태로 반소매만 남아있다. 완전한 소매의 형태는 진동에서부터 서서히 넓어지는 두리형 소매이다. 훼손이 없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창의는 뒷 트임이 있는 옷으로, 창의는 뒷 중심에서 52.5cm 내려온 곳에서부터 트임이 시작되며 트임의 길이는 70cm이다. 뒷 트임에는 쌍밀이 장식을 하여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Fig. 5> 창의(No. 13)는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목판깃으로 2/3 내어 달린 형이다. 겨드랑이에는 사다리꼴의 큰 무와 접음 사각형무가 합쳐진 형태의 무가 달려 있다. 옷고름은 모두 떼어낸 상태로, 겉깃과 안길 그리고 안섶에는 옷고름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겉고름은 짙은 자색으로 짐작된다. 동정이 달려 있다.

6) 광수주의

<Fig. 6> 
Gwang-su-ju-ui (No. 18)

(Illustration by researcher)



광수주의는 1점(No. 18) <Fig. 6>이 있다. 소렴에 사용되었고 왼쪽 소매 1폭(No. 23)을 찢어 베개를 대신하여 시신의 머리에 괴었다. 겉감은 다갈색 면주, 안감은 푸른색이 묻어 있는 소색 면포로 만들었고, 솜과 저주지가 들어간 누비옷이다. 누비 간격은 8.5~9cm로 넓게 누볐다.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목판깃으로 1/2 내어 달린 형이다. 소매는 진동에서 중심부까지 조금씩 넓어지다가, 수구 가까이에서 조금 굴린 두리 소매이다. 겨드랑이에는 사다리꼴의 큰 무와 접음 사각형무가 합쳐진 형태의 무가 달려 있다. 옷고름은 모두 떼어낸 상태로, 겉깃과 안길 그리고 안섶에는 옷고름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겉고름은 짙은 자색으로 짐작된다.

7) 도포

<Fig. 7> 
Do-po (No. 21)

(Illustration by researcher)



도포는 3점(No. 11ㆍNo. 21ㆍNo. 25)이 출토되었다. 도포(No. 11)는 대렴에, 도포(No. 21)는 소렴에 사용되었고, 도포(No. 25)는 습에 사용되었다. 도포(No. 11)는 모시 촡 도포이고, 도포(No. 21)는 아청색 사면교직으로 만든 겹 도포이며, 도포(No. 25)는 모시로 만든 홑 도포이다. 도포(No. 11ㆍNo. 25)는 훼손이 된 상태이고, 도포(No. 21) <Fig. 7>는 완전한 형태이다. 3점 모두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목판깃이다. 도포 소매의 형태는 두리 소매이나 도포(No. 25)는 소매가 훨씬 더 풍성하여 마치 18세기 남자 포에 나타나는 소매와 비슷하다. 모시 홑 도포(No. 11ㆍNo. 25)는 동정이 없고, 도포(No. 21)는 동정이 있다. 도포(No. 11)는 겉고름과 속고름이 모두 남아 있으나, 도포(No. 21)는 겉고름은 자주색으로 추정되나 떼어진 상태이고 소색 주로 만든 속고름 1개만 있고, 도포(No. 25)는 고름이 떼어진 흔적만 남아 있다. 최경선묘 출토 도포의 특징은 3점 모두 뒷자락이 앞자락보다 크다. 이는 17세기 초반이 생몰년인 김확, 신경유, 이응해 묘에서 출토된 도포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도포의 앞자락 무가 뒤로 넘어가 뒷자락에 직접 부착이 되는 형태로, 무를 고정하는 한판은 없지만 홑옷인 도포(No. 11ㆍNo. 25)의 경우는 앞자락 무를 뒷자락을 고정하기 위한 바대가 뒷 중심에 있다. 무를 고정하기 위한 바대는 너비 2.5cm로 뒷 중심에서 31.5cm 내려 온 곳에 있어 진동과 나란하게 달려 있다. 도포(No. 21)는 겹 도포로 앞자락 무를 등에 직접 부착하였다. 도포(No. 11)는 훼손되어 무는 없고, 무를 고정하기 위한 바대만 남아 있다. 도포(No. 21)의 뒷자락 좌우 무는 13cm 떨어져 고정되어 있고, 도포(No. 25)는 20cm 벌어져 있다.

8) 한삼

<Fig. 8> 
Han-sam (No. 29)

(Illustration by researcher)



한삼(No. 29) 1점 <Fig. 8>이 있다. 습에 사용되어 제일 속에 입은 옷이다. 조금 거친 모시로 만든 홑옷으로, 모시 위에 주(紬)로 만든 한삼을 거칠게 홈질하여 부착하였다.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목판깃으로 완전 들여 달린 형태이다. 길에서 겨드랑이는 둥글게 팠으며 16cm의 옆트임이 있는 부분은 식서로 바느질없이 그대로 두어 직선이다. 겉섶과 안섶 모두 어슨올이 섶선에 달렸다. 옷고름은 모두 떼어낸 상태로, 겉깃과 안길에 옷고름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겉고름은 길과 같은 옷감으로 너비는 1.5cm로 추정한다.

최경선 묘에서 수습된 한삼은, 옷 길이는 차이가 있지만 사천 무연고 여자 묘 출토 한삼과 형태는 비슷하다(Song & Lee, 2013).

9) 저고리

<Fig. 9> 
Jeo-go-ri (No. 28)

(Illustration by researcher)



저고리 1점(No. 28) <Fig. 9>는 겉ㆍ안감을 명주로 만든 겹옷이다. 습에 사용되어 한삼(No. 29) 위에 입은 옷으로, 여자 저고리 형태이다. 겉깃은 목판깃, 안깃은 완전 들여 달린 목판깃 형태이다. 겨드랑이에는 큰 삼각형무와 접은 사각형무가 합쳐진 형태의 무가 있다. 사면교직으로 만든 동정이 달려 있고 옷고름은 뗀 흔적이 잇다. 안감은 여러 조각의 옷감을 이었다. 이 저고리에는 길과 동일한 옷감으로 너비 10.5cm의 끝동이 있다. 저고리의 겉섶선은 뒷 중심에서 위쪽은 4.5cm, 아래에서 1.5cm 길 쪽으로 옮겨져 섶선이 비스듬하다. 옷고름은 모두 떼어낸 상태이다.

10) 바지

6점의 바지가 수습되었다. 바지는 2종류로 개당고 3점(No. 31ㆍNo. 1ㆍNo. 3)과 합당고 3점(No. 32ㆍNo. 4ㆍNo. 5)이 있다. 바지(No. 32ㆍNo. 31)는 습용으로, 나머지는 모두 보공으로 사용되었다. 바지의 구성은 홑 4점(No. 32ㆍNo. 1ㆍNo. 4ㆍNo 5), 겹 1점(No. 31), 솜 1점(No. 3)이고, 소재는 면포(No. 32ㆍNo. 31ㆍNo. 1ㆍNo. 5), 주(No. 3), 삼베(No. 4)이다.

개당고형 <Fig. 10>은 부리 쪽이 약간 좁아지는 형이고, 합당고형 <Fig. 11>은 넓게 퍼진 형이다. 왼쪽에 트임이 있다. 트임에는 작은 삼각형무가 있어 트임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Fig. 10> 
trousers (No. 31)

(Illustration by researcher)




<Fig. 11> 
trousers (No. 32)

(Illustration by researcher)



11) 기타

그 외 버선 1점, 악수 1점, 모 1 점, 멱목 1점, 망건 1점, 광다회 1점과 소렴 교포, 대렴 교포, 소렴금, 대렴금이 있다. 충이(No. 36)는 수습하지 않았다.

(1) 버선

버선은 1켤레(No. 2)가 수습되었다. 수습된 버선은 보공으로 사용되었다. 겉감은 고운 면포, 심감은 한지, 안감은 삼베를 사용하였으나 겉감은 거의 삭아서 없어진 상태이고 안감도 일부만 남아 있다. 버선의 형태는 뒷축이 거의 없는 편평한 상태이다. 버선은 요즈음 겹버선을 만드는 4겹 버선바느질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버선목에는 겉감을 안감보다 4cm 길게 하여 안으로 넘겼다. 버선은 길이 25~26.5cm, 높이 27.5cm이다.

(2) 악수(幄手)

악수는 습을 할 때, 시신의 손을 감싸는 것이다. 예서(禮書)에 의하면 겉감은 현(玄)색, 안감은 훈(纁)색의 옷감을 사용한다. 최경선 묘 출토 악수(No. 30)는 겉감은 아청색 무문단, 안감은 홍색 주(紬)를 사용하였다. 바느질은 매우 거칠다. 형태는 사각형에 손의 두께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적당히 한쪽을 팠고, 네 귀퉁이에 끈을 달았다. 너비 19.5cm, 높이 11.5cm, 끈 너비 1~1.5cm, 끈 길이 21~22cm이다.

(3) 모(帽)

모는 시신의 머리 부분을 감싸는 것이다. 최경선묘 출토 모(No. 33)는 악수와 멱목에 사용한 동일한 감으로 겉감과 안감을 썼다. 겉감은 짙은 청색 무문단, 안감은 홍색으로 추정하는 매우 고운 세주(細紬)로 만들었다. 너비 60cm, 높이 30cm 옷감을 직사각형으로 만든 후 한쪽을 접은 후 바느질하여 완성된 모는 너비 30cm, 높이 30cm의 정사각형 원통이다.

(4) 멱목(幎目)

멱목은 시신의 얼굴을 덮어 감싸는 것이다. 예서에는 악수와 함께 겉감은 현, 안감은 훈을 사용한다고 한다. 형태는 사각형에 네 귀퉁이에는 좁고 긴 끈이 달려있어 얼굴을 가린 후 묶는다. 최경선 묘 출토 악수와 모에 사용한 옷감과 같은 것으로, 겉감은 짙은 청색 무문단, 안감은 홍색으로 추정하는 주(紬)이다. 악수와 마찬가지로 바느질은 거칠게 적당하게 하였다. 멱목의 크기는 너비 28cm, 높이 27.5cm, 끈 너비 1.5cm, 끈 길이는 33cm이다.

(5) 광다회


<Fig.12 > 
waist cord of Choi Kyung Sun’s

(Photography by researcher)



<Fig. 12>는 광다회(No. 24)로 1점이 수습되었고 비단실[眞絲]로 짠 것이다. 습에 사용되었고, 습용상복(上服)인 도포에 둘러져 있었다. 색상은 푸른색으로 짐작한다. 너비 2cm, 길이는 250cm에 양 끝에 6cm 길이의 망 장식과 16cm의 술이 달려 있어 광다회 총 길이는 294cm이다. 망 장식은 술 쪽으로 갈수록 넓어져 망의 너비는 2.5cm이다.

(6) 교포(絞布)

교포는 소렴과 대렴을 할 때 시신을 종과 횡으로 묶는 옷감이다. 소렴을 할 때 종(縱)로 묶는 교포를 소렴 종교(縱絞), 횡(橫)으로 묶는 교포를 소렴 횡교(橫絞)라고 한다. 대렴을 할 때 종으로 묶는 교포는 대렴 종교, 횡으로 묶는 교포를 대렴 횡교라고 한다.

최경선 묘 출토 소렴 횡교는 모시로 만들었고 시신을 감싸는 곳의 너비는 40cm 가량 되는 것 같다. 모시 1폭의 너비는 33.5cm로 3갈래로 찢어 사용하였다. 소렴 종교는 소렴 횡교에 사용한 것과 같은 옷감을 사용하였고, 길이는 160cm 정도 남아 있다.

최경선 묘 출토 대렴 횡교는 삼베로 만들었고, 시신을 감싸는 곳의 너비는 43cm 정도이다. 삼베 1폭의 너비는 32.5cm로 소렴 횡교와 마찬가지로 3갈래로 찢어 사용하였다. 대렴 종교는 횡교와 같은 감으로 길이는 166cm 정도 남아 있다.

(7) 소렴금(小殮衾)

소렴금은 소렴을 할 때 시신을 감싸는 이불이다. 소렴 때 시신을 대각선으로 모셨다. 최경선 묘 출토소렴금은 거친 무명으로 만든 홑이불이다. 이불의 너비 197cm, 길이 204cm이다.

(8) 대렴금(大殮衾)

대렴금은 대렴을 할 때 시신을 감싸는 이불이다. 시신을 대각선으로 모셔서 대렴금을 사용하였다. 최경선 묘 출토 대렴금은 겉감은 길은 모란문단, 깃은 모란문단, 동정은 면포, 안감은 거친 면포로 만들었다. 안감의 안쪽에 ‘최복나미’라는 묵서가 있다. 속에는 솜을 둔 솜이불인 것 같지만, 솜은 거의 삭아서 남은 것이 일부이다. 이불의 너비는 211cm이다. 이불의 길이는 길은 173cm, 깃은 33cm, 동정은 9.5cm로 총길이 215.5cm이다.

12) 망건

<Fig. 13> 
Hairband of Choi Kyung Sun’s

(Photography by researcher)



<Fig. 13>는 최경선 묘 출토 망건으로 말총으로 만든 것이다. 가로 60cm, 세로는 가장자리가 10.5cm, 중앙이 14cm로 가장자리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다. 머리를 감싸는 ‘당’과 ‘앞’이 매우 넓고 신축성이 있는 조직으로 되어있어 머리를 감쌀 때 편리하다. 당줄은 너비 0.2cm, 길이는 당줄에 구슬이 3개 꿰어져 있어 측정 할 수 가 없다. 끈도 묶인 상태로 길이는 알 수 없고, 너비는 0.1cm이다. 이 망건에는 구슬 3개가 당줄에 달려있는데, 상투 안쪽에 넣어 상투를 풍성하게 보이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것 같다(Kim, 2014).

무덤에서 말총으로 만든 망건이 보고된 것은 경기도박물관 소장 능창대군 망건(The Gyeonggi Provincial Museum, 2004)과 최경선 묘 출토 망건이 있다. 형태도 능창대군 망건과 최경선 묘 출토 망건이 비슷하다. 이 외에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박물관 소장 이익정(1699~1782)묘 출토 망건은 진사로 엮어 짰으며 형태는 비슷하다(Chae & Ryu, 2009).


Ⅲ. 최경선 묘 출토 복식의 조형적 특징

1. 최경선 묘 출토 복식의 구성은, 단령은 2점에 홑옷이고, 직령은 2점에 모두 홑옷이고, 중치막은 2점에 1점은 겹, 1점은 홑이다. 철릭은 3점으로 홑 2점과 겹 1점이다. 창의는 1점으로 겹옷이며, 광수주의는 1점으로 솜누비 옷이다. 도포는 3점으로 홑옷이 2점, 겹옷이 1점이다. 한삼은 1점으로 홑옷이다. 저고리는 1점으로 겹옷이다. 바지는 홑옷이 3점, 겹옷이 1점, 솜누비가 2점이다. 버선은 겹버선으로 심감으로 한지를 넣었다.

치관제구를 제외한 복식은 총 23점으로 홑옷이 13점으로 56.6% , 겹옷이 7점으로 30.5%, 솜옷이 2점으로 8.6%, 솜누비 옷이 1점으로 4.3%이다. 누비옷은 광수주의에만 사용되었다.

2. 옷감은 복식류에는, 단령은 사면교직과 면포가 각각 사용되었고, 직령에는 모시, 중치막에는 문단과 모시, 철릭에는 모시와 면주, 창의에는 면주, 광수주의에는 면주, 도포에는 모시와 면주, 한삼에는 모시와 면주, 저고리에는 면주, 바지에는 삽베와 면포, 그리고 면주가 사용되었다. 화문단이 사용된 것은 중치막 1점이 유일하다. 17세기 전반에 유행한 사계화문단이 사용되었다.

치관제구에 사용된 옷감은 악수와 멱목의 겉감에는 무문단, 안감에는 면주가 사용되었고, 모에는 겉감과 안감 모두 면주를 사용하였다. 대렴금에는 겉감에는 화문단과 안감에는 면주를 사용했고, 소렴금에는 면포를 사용했다. 대렴교와 소렴교에는 마포가 사용되었다.

3. 깃은 둥근 깃과 곧은 깃 2가지이다. 둥근 깃은 2점이 있으나, 1점은 훼손이 심하여 치수를 알 수 없다. 둥근 깃으로 된 단령 1점은 단령의 깃은 일반적으로 바이어스방향으로 옷감을 재단하여 늘려 깃 모양을 잡지만, 최경선 묘 출토 단령(No. 19)은 U자형 깃 모양을 곧은 올 방향으로 판 것이 독특하다. 이와 같은 깃 파임 방식은 대전역사박물관 소장 송효상 묘 출토 단령(No. 2)에서도 보인다(Daejeon Prehistoric Museum, 2009).

단령을 제외한 나머지 옷들은 모두 곧은 깃으로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목판깃이다. 깃 너비는 10~12cm로 평균 11.1cm이다. 깃 길이는 93~104.5cm이며 평균 95.5cm이다. 안깃은 목판깃으로 직령 1점은 1/3 들어 달린 깃이고, 1점은 훼손이 심해 알 수 없다. 중치막 2점 가운데 1점은 1/5 들여 달린 깃이고, 1점은 4/5 들여 달린 깃이다. 철릭 3점 가운데 2점은 1/2 들어 달린 깃이고, 1점은 2/3 들여 달렸다. 창의 1점은 1/4 들여 달린 깃이고, 광수주의 1점은 1/2 들여 달렸다. 도포 3점 가운데 2점은 1/2 들여 달린 깃이고, 1점은 완전 들여 달린 깃이다. 포류의 안깃의 앉힘은 공통점은 없다.

저고리는 겉깃은 목판깃으로 안깃은 완전 들여 달린 깃이고, 한삼은 겉깃은 칼깃이고 안깃은 완전 들여 달린 깃이다.

4. 동정은 홑옷인 철릭(No. 20)을 제외하고, 그 외 홑옷에는 달려 있지 않고, 겹옷에는 모두 달려 있다. 이는 철릭(No. 20)은 아청색 주(紬)로 만든 홑옷이고, 그 외 홑옷은 모두 모시나 삼베로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정을 달지 않고도 소색 모시나 삼베로 만든 옷의 깃 자체가 동정의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정의 유무와 습과 소렴ㆍ대렴과 같은 염습의 용도에 따른 구별은 없었던 것 같다. 겹옷에 달려 있는 동정은 포류는 너비 8~9cm이고 길이는 60.5~67cm이다. 저고리의 동정은 너비 7.8cm 길이는 51cm이다. 깃너비와 동정 너비의 비율은 평균 1: 0.74이다.

5. 옷고름은 단령 2점은 모두 떼어진 상태이고, 직령 2점은 1점은 모두 떼어져 있고 1점은 겉고름의 일부와 속고름은 2개 모두 남아 있다. 중치막 2점 모두 고름은 뗀 상태이나, 습에 사용된 1점은 속고름 1개만 남아 있다. 철릭 3점은 모두 겉고름은 상하 1쌍의 고름이 있었던 것으로 이 가운데 2점은 겉고름 1쌍과 속고름이 모두 달려 있는 상태이고, 소렴에 사용된 철릭(No. 20)은 아청색 주로 만든 홑 철릭으로, 겉고름과 속고름을 모두 뗀 상태이다. 창의와 광수주의 1점은 겉고름과 속고름 모두 뗀 상태이다. 도포 3점 가운데 도포(No. 11)은 겉고름과 속고름 모두 달려 있고, 도포(No. 21)은 속고름 1개만 남아 있고, 도포(No. 25)는 겉고름과 속고름 모두 뗀 상태이다. 한삼과 저고리는 모두 고름을 모두 제거한 상태이다. 최경선 묘 출토 복식의 고름은 고름 너비를 2.5~3cm로 만들어 1/2 정도로 접어 1.5cm 너비로 달았다. 고름의 길이는 겉고름이 45cm 내외이고, 속고름이 37cm 내외이다.

6. 단령과 직령의 무 모양은 복식의 시대 구분에 중요한 지표이다. 최경선 묘 출토 복식 가운데 단령은 2점, 직령은 2점이며, 무 모양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옷의 훼손이 심하여 무의 형태가 완전한 것은 직령(No. 22) 1점이었다. 이 1점을 참고해서 무의 상단을 살펴보면 17세기 초기에 보이는 접음 사각형 무로 끝이 뽀족한 형태가 아닌, 직사각형 무이고, 뒷길에 무를 고정하지 않았다. 물론 직령(No. 22)을 제외한 나머지 단령과 직령의 무가 뾰족할 수도 있다. 최경선과 동시대에 생존했던 17세기 전기의 인물인, 강대호, 이응해, 신경유, 김확, 한준민 묘에서 출토된 단령이나 직령의 무의 상단은 모두 뾰족하다.

최경선 묘 출토 복식 가운데, 중치막과 철릭, 창의, 광수주의에는 겨드랑이에 접음 사각무가 달려있다. 이는 17세기 초기 복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단, 홑 모시 철릭(No. 12)은 훼손이 심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겨드랑이 삼각무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7. 포류의 옷 길이는 116~126.5cm이다. 화장은 94~128cm, 품은 54~68cm, 진동은 28.5~33.5cm, 수구 18.5~23cm이다. <Table 4>는 포류의 치수이다.

<Table 4> 
Sizes of coats recovered from Choi Kyung Sun’s grave
Type Number recovered garment length (cm) arm length (cm) 1/2 chest (cm) 1/2 neck girth (cm) 1/2 arm hole (cm) cuffs length (cm) width of collar (cm) length of collar (cm)
Dallyeong 2 124 112 none 18 none 20 4~5 none
Jing-nyeong 2 none 108 59~68 18 none 20.5 11.5 none
Jungchi-mak 2 116.5~123.5 94~109 50~58 19~20 30~32 20~21.5 10.5 96.5~99
Cheolrik 3 117~126.5 119.5~127 63~76 19~21 32~33 23 11~12 95~100
Chang-ui 1 122.5 108 60 21 33.5 23 11 104.5
Gwang-su-ju-ui 1 120 107.5 61 19 30.5 19 10.5 101.5
Do-po 3 97~128 54~67 19~20 19~20 28.5~33.5 18.5~22 11~11.7 95.5~97.5

소매의 형태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동에서 소매 길이의 1/3 정도는 완만한 사선을 이루고, 소매통을 유지하다가 수구 가까이에서 둥글어지는 두리 소매의 모양이다.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철릭(No. 14ㆍNo. 20), 창의(No. 13), 중치막(No. 26), 도포(No. 11) 도포가 있다. 둘째는 진동과 소매통의 길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경우로 수구에서 굴려지는 두리소매로 광수주의(No. 18), 도포(No. 21), 중치막(No. 27)이 있다. 셋째, 18세기에 나타나는 두리 소매 형태로 진동에서 바로 굴려지고 수구에서도 굴려지는 도포(No. 25)가 있다. 그 외 훼손이 심하여 소매 모양을 알 수 없는 것에 철릭(No. 12), 직령(No. 10ㆍNo. 22), 단령(No. 19)이 있다. 이는 최경선 묘 출토복식은 직배래에서 두리 소매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8. 최경선 묘 출토복식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도포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최경선 묘에서는 도포가 3점 수습되었다. 다른 17세기 도포와 달리 최경선 묘출토 도포는 3점 모두 뒷자락이 앞자락보다 크다. 즉 뒷자락이 앞무 보다 좌우 17cm 가량 크다. 이러한 형태의 매우 드문 경우이다.

9. 최경선 묘에서는 습의와 보공으로 사용된 바지는 개당고와 합당고이다. 일반적으로 17세기에는 사폭바지가 수습된다. 최경선과 동시대 인물인 신경유(1581~1633)묘, 김확(1572~1633)묘에서 각각 사폭바지가 수습되었고, 이응해(1547~1626)묘에서는 바지가 수습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Seok Juseon Memorial Museun Dankook University(2005)는 강대호(1541~1624)묘에서는 개당고와 합당고가 수습되었고 개당고의 경우에 “오물이 묻은 것으로 보아 수의일 확률이 많다”고 했다(p. 102). 그 외 Seok Juseon Me- morial Museun Dankook University(2013)에서 보고된 충남 연기군 한준민(1570~1638)묘의 경우에도 첫 번째 수의는 합당고를 입었고 그 위에 솜 개당고를 입었는데, 최경선 수의와 같은 모양의 바지를 같은 순서로 입고 있다. 이는 지역에 따라 17세기 전기에도 개당고와 합당고가 입혀진 또 다른 사례라고 할 것이다.


Ⅳ. 결론

2007년 강원도 강릉에서 최경선(1562~1622)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복식과 치관제구를 포함한 30여점이 수습되었다. 이를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경선과 동시대에 생존했던 17세기 전기의 인물인, 강대호, 이응해, 신경유, 김확, 한준민 묘의 출토복식과 비교하면, 공통으로 수습된 포류는 단령ㆍ직령ㆍ철릭ㆍ도포ㆍ창의ㆍ중치막이다. 포류에서 보이는 소매의 형태는 이들 묘에서 수습된 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최경선 묘 출토복식 중 포류의 소매 형태는 수구에서는 모두 둥글어지는 두리소매이나, 진동에서는 직선형ㆍ사선형ㆍ둥근형의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전기의 묘에서 수습되는 포류의 소매 모양은 대부분 진동에서 소매통으로 급격한 사선을 그리고, 수구에서는 두리 소매형이 대부분이다.

둘째, 최경선 묘에서 단령과 직령은 모두 홑옷으로 수습되었다. 답호가 수습되지 않은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전기의 단령은 겹단령이 나오기도 하지만, 최경선 묘에서는 홑옷만 수습되어, 단령과 직령을 홑으로 겹쳐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최경선 묘에서 출토된 직령의 무는 16세기 말출토복식에서 보이는 직선형으로 앞뒤를 접어 넣은 직사각형으로, 17세기 전기의 단령과 직령에서 흔히 보이는 무의 상단이 위로 올라가는 뾰족한 형태와는 구별되어, 직선형 무를 고수하고 있다.

셋째, 철릭은 상ㆍ하 비율이 1:1.5 내외이고, 주름의 너비는 3~3.5cm로 17세기 전기 철릭의 일반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겹철릭 치마주름을 겉감과 안감을 함께 주름잡는 방법을 사용한 것은 매우 특이하다.

넷째, 최경선의 습의로 사용된 저고리 또한 특이하다. 목판깃 저고리로 형태가 마치 17세기 초의 여자저고리와 매우 유사하다.

다섯째, 17세기 전기 조선시대 남자복식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바지형태이다. 임진왜란 이후 남자묘에서는 사폭바지가 수습된다. 그러나 최경선 묘에서는 개당고와 합당고가 수습되었다. 이는 17세기에 사폭바지로 옮겨가는 이행기(移行期)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섯째, 최경선 묘에서 수습된 도포의 구성도 독특하다. 도포 3점 모두 앞무가 뒷자락보다 14cm 정도 더 좁아 앞자락과 뒷자락의 차이가 크다. 이러한 도포의 양식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일곱째, 최경선 묘 출토복식은 사면교직도 여러점 사용되었지만, 무늬가 있는 직물은 중치막과 대렴금에 사용된 화문단, 그리고 치관제구에 사용된 무문단을 제외하면 거의 평직물이 사용되었다. 이는 활동지와 벼슬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덟째, 습 상태에서 말총으로 만든 망건을 착용하고 있어 17세기 전기 남자머리 모양과 망건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말총망건을 착용하고 있는 것은 첫 사례이다. 또한 염습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홉째, 소렴과 대렴 때 시신을 소렴금과 대렴금으로 쌀 때, 두 번 모두 대각선으로 시신을 모셨다.

이러한 특징을 살펴보면, 강원도 강릉지역에서 거주했던 최경선 묘 출토복식은 동시대 경기지역에서 출토되는 다른 복식과 비교해 볼 때 옷감의 사용은 소박하고, 포류의 무 형태로 보면, 당시의 유행에서 뒤졌다는 것을 결과로 추출해 낼 수 있다. 이는 서울과 경기지역에 비해 복식의 형태가 전반적인 것은 같았더라도 세부적인 것은 달랐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주목할 만 한 것은 1622년의 몰년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사폭바지가 수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대호(1541~1624)묘와 한준민(1570~1638)묘 출토 바지도 같은 경우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에는 남자 사폭바지를 착용하였다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연고 묘에서 남자바지가 개당고와 합당고 함께 수습되거나, 습용으로 착용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임진왜란 이전의 생몰년 추정이라는 등식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점이다.

최경선은 무관으로 활동하였는데 이와 연관한 복식으로는 왼쪽 소매가 반수(半袖)인 창의(No. 13)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속연구로 동시기의 무관과 문관 복식을 비교하여 살펴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4학년도 서울여자대학교 연구년 연구비의 지원을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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