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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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 No. 6

[ These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No. 6, pp. 46-66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Sep 2016
Received 09 May 2016 Revised 01 Jun 2016 Accepted 14 Jun 2016
DOI: https://doi.org/10.7233/jksc.2016.66.6.046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통한 사상적 조류 변화에 따른 복식 변화 고찰
배수정
전남대학교 의류학과 교수

A Review on the Costume Changes According to Ideological Transition through the Portraitures of Napoleon
Bae, Soojeong
Professor, Department of Clothing & Textiles, Chonnam National University Research Institute for Human Ecolog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Bae, Soojeong, e-mail: sjbae@chon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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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thesis aims to analyze the costume changes according to the ideological transition through the portraits of Napoleon Bonaparte. This study selected 32 color pictures of Napoleon, which was taken during his time as a general to his ascension as Emperor (1785-1815). The study qualitatively analyzed the traits and costume elements in view of the items, color and ornaments of the costume, while studying the effects of the ideological transition. The costumes of Napoleon were categorized into three parts: general, governor and Emperor. Firstly, Napoleon most frequently wore the navy uniforms when taking the portraits as a general. The uniform gave Napoleon the image of strength, youth and intelligence, which reflected the ideology of enlightenment. Secondly, the red-colored administrator uniform, combined with a military coat with culotte, was worn to make the governor look intelligent, which would ascribe to the ideological demand of the enlightenment. Lastly, his portraits as emperor showed him in long white tunica, combined with red-colored coronation cape ornamented with embroidery, ermine fur, and the crown of laurel. This costume denoted both the enlightenment and also the neoclassical trend aspiring for the return to the Greek and Roman era. In this way, the portrait of Napoleon might be expected to reflect the periodical change of the ideology through describing the transition of the costumes. It might be evident that his image of the strong general changed to that of an intelligent governor, which was in demand when the enlightenment idea became popular. When Napoleon became the emperor, his image changed into that of a Roman emperor, which implies that neoclassical ideas were used as source of influence.


Keywords: Enlightenment, Napoleon, Neoclassicism, portraiture
키워드: 계몽주의, 나폴레옹, 신고전주의, 초상화

Ⅰ. 서론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은 사후 이백여 년이 지났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철학자 니체(Friedrich W. Nietzsche, 1844-1900)는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이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하였다(Kim, 2003). 프랑스 혁명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 못했을 영웅 나폴레옹은 역사적으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계몽주의와 만나게 된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시민 의식이 변화되었고 이것이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면서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769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Corsica)의 아작시오(Ajaccio)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파리(Paris)의 사관학교를 다닌 후 1785년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793년 툴롱(Toulon) 공략의 포병 사령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은 영국으로부터 툴롱을 되찾는 승리를 거두었고, 1795년 파리 시민들의 폭동인 ‘방데미에르의 13일(13 Vendémiaire)’을 진압함으로써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Song, 2002). 이후 19년 동안 제1통령, 종신통령을 거쳐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이와 같은 급속한 신분 상승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인한 대중의 인식 변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브루봉 왕가의 루이 14세(Louis ⅩⅣ, 1643-1715) 통치 하에 절정기를 맞이하였으나 루이 15세, 16세를 거치면서 점차 재정적 몰락과 더불어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하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 절대군주의 공식 초상화는 강한 현존의 성격을 지니므로 인물의 실제크기를 반영하여 대부분 2미터가 넘는 방대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루소와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 사상을 접한 나폴레옹은 미술의 도덕적, 교육적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로 과감한 미술정책을 추진하였다. 수많은 미술가들을 동원하여 초상화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투와 승리, 의식과 축제를 그리게 하였고, 이를 자신의 정치 선전에 활용하였다(Song, 2002).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의 통치권자로써, 시민의 대표자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데 자신의 초상화를 잘 활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 급격히 성장한 부유한 시민 계급은 자신의 초상화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였고, 그 결과 18세기 프랑스 화단에서는 사적 초상화가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초상화에도 계몽주의의 도덕적 관점에서 인간적 측면과 개성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이는 인간의 외면 보다 내면에 치중하여 기존의 과장된 형식적인 초상화에서 벗어나 점차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성향으로 변화되었다(Song, 2002).

바로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관점으로 제작된 나폴레옹의 초상화에서 본 연구는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초상화에 사실대로 묘사된 복식에는 인간 나폴레옹이 지향하고자 했던 형식을 배제한 내적인 의미와 사상적인 측면이 내재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18세기말과 19세기 초의 사상적 조류 변화에 따른 세부적인 복식 변화를 조망 할 수 있는 좋은 복식사 연구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분야의 선행연구는 H. Song(2002)의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정치 선전의 관점에서 다룬 연구와 Y. Lee(2001)의 화가 다비드의 회화를 중심으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포함한 동시대 예술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다룬 연구가 있다(Lee, 2001; Song, 2002). 복식의 관점에서 다룬 연구는 S. Bae(2013b)의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1세와 19세기 나폴레옹 1세의 복식 비교를 통한 영웅 이미지를 다룬 것이 있으며(Bae, 2013b), 저서로는 미술과 정치를 접목시켜 저술한 K. Kim(2003)의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을 들 수 있다(Kim, 2003). 역사적으로 근세와 근대를 가르고, 서양복식사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나폴레옹 시대의 복식을 통하여 사상적 조류 변화가 복식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세부적으로 조망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통하여 18세말과 19세기 초의 사상적 조류 변화에 따른 복식 변화를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의 범위와 방법은 나폴레옹의 장교시절부터 황제시절(1785-1815) 사이에 제작된 초상화 중에서 상반신 이상의 복식 묘사가 뚜렷한 컬러 도판 32점을 선정하여, 의복 아이템, 색, 장식 중심으로 복식 요소를 정성적으로 분석하고 사상적 조류 변화에 따른 복식 변화 양상을 고찰한다. 단, 나폴레옹 사후에 제작된 초상화 및 동시대에 제작 되었어도 동일한 회화의 사본일 경우는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Ⅱ. 이론적 배경
1. 프랑스 혁명과 사상적 배경

프랑스 혁명은 일반적으로 1789년 5월 삼부회의 소집으로 시작하여 1799년 11월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끝나는 10년간을 가리킨다. 혁명은 단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절대군주제가 입헌군주제로 바뀌는 것을 시발로 군주제가 공화정으로 바뀌고, 다시 부르주아 체제를 거쳐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帝政)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을 경험하였다(Bae, 2000). 이로 인해 왕과 왕비가 처형당하고 많은 귀족과 왕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수많은 농민과 민중들 심지어 혁명가들조차 정치적 입장에 따라 희생을 당하였다.

1789년 당시 2800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 인 가운데 농촌인구가 85%에 달하였고, 이중 농민은 68-9%를 차지하였으나 이들은 봉건제와 영주제에 짓눌려 자유도 평등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생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특권계급이 전 토지의 3분의 1을 소유한 상황에서 18세기 후기 프랑스의 경제적 팽창과 인구증가의 결과 장기적인 물가상승이 이어지자(Bae, 2000),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 계층과 농민이 구체제의 비합리적인 신분구조를 무너뜨리고자 시작된 혁명이 프랑스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의 금융업자, 법률가, 도매상인, 중하위층 관료 등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는 귀족도 평민도 아닌 혼합계급이자 과도기적 존재로, 장기적으로 다른 형태의 생산관계를 지향하였고 이 근저에 계몽주의 사상이 존재하였다(Bae, 2000).

계몽주의 사상은 많은 선행연구에서 다루어진 바와 같이 이성을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은 사상이었다(Bae, 2012). 영어의 계몽주의(Enlightenment)와 한자어 계몽(啓蒙)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의미이고, 프랑스어로는 ‘Siècle des Lumières, 빛의 세기'를 뜻하는 말로 17, 18세기에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지적 사상운동을 지칭한다(’Enlightenment’, n.d.). 계몽주의는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 도덕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하였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 볼테르(Voltaire, 1694-1778), 몽테스키외(Baron de La Brdt et Montesqu, 1689-1755)로 대표되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서로 상충된 주장을 하는 등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계몽주의가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Enlightenment’, n.d.). 따라서 전통과 관습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고, 이것은 전 유럽과 신대륙 민중의 인식을 바꾸었으며 더 나아가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결국 프랑스 혁명을 촉발시켰다(Bae, 2012).

이것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로 이어지면서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와 장자크 루소의 업적,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시장경제론,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 등 새로운 이론이 더해져 후기계몽주의를 꽃피웠다. 특히, 18세기 후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르네상스로부터 싹텄던 인간 중심의 사고가 그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절정에 있는 프랑스 혁명은 근세와 근대를 가르는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의 여파는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고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서구의 현대 문화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Lee, 2007). 즉, 근대시민사회로 나아가는 초석을 다졌던 시기에 있어서 계몽주의는 현대문화의 요소들이 잉태될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으며, 특히 복식 문화에 있어서는 복식 스타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하나의 전환점을 야기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Bae, 2012).

프랑스 혁명기에 착용된 상큐롯(sans-culotte)이나 장식 없이 단순한 실루엣의 남, 여 복식은 변화된 민중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고,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는 인간평등의 개념이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Bae, 2013a). 이러한 점은 나폴레옹이 통령이나 황제의 신분에서도 군복 차림의 초상화를 많이 제작한 데에도 잘 나타난다. 통령이나 황제라는 특별한 지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일반인도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군인이라는 신분을 더욱 강조하고자 하는 의지가 초상화에 묘사된 복식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접어들자 계몽주의 사상의 내면적 결과물이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라는 외연을 갖추고 등장하였다. 신고전주의는 역사상 1770년부터 1830년 사이에 걸쳐 전개된 예술양식으로, 고전·고대에 대한 새로운 부활을 의미한다(Janson, 1994). 계몽주의가 정신적인 측면의 사상이었다면 신고전주의는 이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술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의 귀족 중심의 향락 생활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이성과 자유, 평등을 기본으로 한 시민사회에 맞는 새로운 예술양식이 신고전주의였다(Yoon, 2006). 즉 신고전주의는 계몽주의에 그 뿌리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는 나폴레옹에 열광하였고, 파리의 건축 장식 계획을 포함한 미술의 모든 부분과 황제의 초상화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에는 상당한 고전적인 암시가 내재되었다. 다비드가 1805년에 시작하여 1807년에 완성한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회화의 예라고 할 수 있다. 1804년부터 1년여 간의 준비 끝에 제작된 이 초상화는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을 묘사한 것으로, 성당 내부는 신고전주의 건축가인 샤를 페르시에(Charles Percier, 1764-1838)와 피에르 프랑수와 레오나르 퐁텐(Pierre-Françoise-Leonard Fontaine, 1762-1853)이 장식하였고, 특별히 장식된 네 개의 승리의 아치 중에 두 개는 카롤링거 왕조와 프랑크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Irwin, 2004). 의상 역시 고대 로마 황제의 복장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로 이어지는 1789년부터 1815년 사이는 대혁명과 잦은 전쟁, 혁명파와 반혁명파의 분열에 의해 전 세기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기둥들이 흔들리면서 경제와 정치가 극적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시민의식을 변화케 한 사상적 조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Table 1>에는 이상에서 다룬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 사상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였다.

<Table 1> 
Key word and concept of Enlightenment and Neoclassicism
Ideology Period Main concept Key words Philosopher & Artist
Enlightenment Beginning of 17th century to end of 18th century A concept in spirituality, philosophy and psychology related to achieving clarity of perception, reason and knowledge -freedom
-equality
-reason
-knowledge
-Rousseau
-Diderot
-Voltaire
-Kant
-Siméon Chardin
-Jean-Baptiste Greuze
Neoclassicism End of 18th century to beginning of 19th century Any of several movements in the arts, architecture, literature and music that revived formality of Greek & Roman style -harmony
-balance
-formality
-reason
-Jacques-Louis David
-Jean-Auguste-Domini que Ingres

2. 나폴레옹의 사회적 지위 변화

18세기말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에 등장한 전술의 천재 나폴레옹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불과 19년 만에 평민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Kim, 2003). 그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당시 프랑스 사회 변화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 장교 나폴레옹(1785-1799)

1785년 16세의 나이로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동부 론알프스(Rhône-Alpes)지역의 도시인 발랑스(Valence)에 주둔한 군대의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789년 나폴레옹 자신도 프랑스 혁명에 참가하여 자코뱅당을 지지하였다. 1793년 말 프랑스 군의 대위로 근무시절, 영국으로부터 툴롱을 탈환하는데 무훈을 세워 24세에 대위에서 준장으로 진급하고, 1795년 왕당파를 중심으로 한 파리 시민들의 폭동인 ‘방데미에르의 13일(13 Vendémiaire)’을 진압함으로써 프랑스 민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총재 정부의 총재였던 파울 바라스(Paul Barras, 1755-1829)에게 등용되었고, 바라스의 애인이자 미망인인 조세핀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1814)와 만나게 되었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된 27세의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함락하면서 향후 20년 동안 펼쳐 질 전쟁의 시작을 예고하였다.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을 함락하였고, 1798년에는 이집트의 카이로(Cairo)에 입성하였다(‘Napoleon Bonaparte’, n.d.).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위협하자, 급히 이집트에서 귀국한 나폴레옹은 1799년 오백인회를 해산하여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나폴레옹은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 1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프랑스 역사에 기록된 18일의 브뤼메르 쿠데타(18 Brumaire)였다. 사실상 제 2통령과 제 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 하므로, 30세의 나폴레옹이 쿠데타의 성공으로 프랑스 정권을 장악하였다고 할 수 있다(‘Napoleon’, n.d.). 이 시기는 군인의 신분이었으므로 장교의 군복을 착용한 젊은 나폴레옹의 모습이 묘사된 초상화가 대부분이다.

2) 통령 나폴레옹(1799-1804)

통령시절 제 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제 2통령은 법무, 제 3통령은 재정을 책임졌으므로, 제1통령인 나폴레옹의 권한은 막강하였다. 그는 1800년 다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켜 1802년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을 체결하였고, 10년만에 정치적 안정을 맞이하였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자 내정 면에서 개혁을 시작한 나폴레옹은 행정의 통일, 전국 공통의 도량형 제정, 합리적인 세제와 단일한 교육 제도를 통해 지방주의를 타파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No, 2011).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하였고, 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O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을 창설하였다. 1804년에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은 프랑스 여러 지역의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법전이었다(Kim, 1998).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의 탄압을 받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도 모색한 나폴레옹은 1801년에 교황 비오 7세(Pope Pius VII)와 정치 및 종교 조약을 맺어,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하였다. 또한 당파와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끈 한편, 자신의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은 탄압하였다. 1802년 8월 2일에 그는 종신통령이 되었고, 튈르리(Tuleries)와 말메종(Malmaison)은 통령궁이 되었다. 동전의 양면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제1통령’과 ‘프랑스 공화국’이 새겨졌고, 그는 자신의 독재권을 더욱 강화하였다(Seo, 2015).

3) 황제 나폴레옹(1804-1815)

종신통령이 된 이후에도 나폴레옹은 계속하여 강력한 내정 개혁을 실시하였고, 그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다. 이에 측근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나폴레옹은 그것을 국민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이 제정(帝政)을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인 1804년 12월, 마침내 나폴레옹은 즉위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Napoleon Bonaparte’, n.d.).

나폴레옹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후손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Reims Cathedral)대신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 of Notre-Dame)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Kim, 2003).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기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서 자신이 직접 황제관(皇帝冠)을 썼는데, 이는 바로 계몽주의 시대의 평민 출신 황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황제가 되고 나서 프랑스의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도시 곳곳에 동상과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광장과 회관, 시장, 강변 정리, 제방 및 교량 등 공공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Napoleon Bonaparte’, n.d.).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후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고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도버해협에 접한 브로뉴(Boulogne)에 대군을 집결시켰고,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교묘한 작전 덕분에 프랑스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에서 완승을 거두었으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항복을 선언하였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Arc de Triomphe)을 세웠고, 두 나라를 제압한 프랑스군의 용맹함은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 대륙의 중앙부를 제압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Joseph Bonaparte, 1768-1844)를 나폴리 국왕으로, 동생 루이(Louis Bonaparte, 1778-1846)를 네덜란드 국왕에 각각 임명하고, 자신은 라인 동맹을 발족시켜 이들을 보호국으로 선언함으로써 독일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Napoleon Bonaparte’, n.d.).

이에 불안감을 느낀 프로이센은 1806년 영국·러시아·스웨덴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하였다. 나폴레옹은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Battle of Jena- Auerstädt)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이후 1807년, 나폴레옹이 폴란드로 진격하자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과 격돌하였으나 승리하여,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키고 폴란드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 바르샤바 대공국을 형성하였다. 남동생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 1784-1860)를 베스트팔렌의 왕으로 임명하여 두 나라를 프랑스 제국의 보호 국가로 지정하였다(Bordonove, 2008). 같은 해 스웨덴과 스페인을 침공하여 속국으로 만드는 등 전 유럽을 <Fig. 1>에 제시된 바와 같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의 역할 역시 주로 주변 유럽의 국가들을 침공하여 속국 혹은 보호국으로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황제로서 뿐만 아니라 장군으로서 강력한 리더십과 전투력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부각시킨 초상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Fig. 1> 
French Empire Territory in 1811

(Napoleon, n.d.-a)




Ⅲ. 나폴레옹의 초상화에 묘사된 복식 요소 분석
1. 장교시절 초상화(1796-1799)

나폴레옹의 장교시절은 시기가 짧은 까닭에 복식의 묘사가 분명한 초상화 5점을 선정하였다. <Fig. 2, 3, 4, 5, 6>을 보면 3점은 전투 장면이 배경이고 2점은 일상에서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전투 장면을 묘사한 <Fig. 2, 3, 4>에서는 남색 장교군복 상의와 흰색의 큘로트(culotte) 혹은 상의와 같은 색의 남색 큘로트, 부츠와 바이콘 햇(bi-corn hat), 삼색 새시벨트를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Fig. 3>은 화가 그로(Antoine-Jean Gros, 1771-1835)가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기 위해 1796년에 제작한 것으로, 화려한 자수 장식의 군복(general’s uniform)(Shedden & George, 1992)상의와 큘로트,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새시벨트, 검정색 장갑이 자새하게 묘사되었다. 이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이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삼색기를 높이 들고 결연한 표정으로 뒤따르는 병사들을 돌아보는 모습은 아르콜 전투(Arcole battle)에서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의 패기와 탁월한 전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과 실제 상황을 연결한 측면에서 계몽주의적 관점의 디드로 회화론과 일맥상통한다. 디드로에 따르면 초상화의 인물은 과장된 포즈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실제 상황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도덕적 행위로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인데(Song, 2002), 이 초상화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나폴레옹의 영웅적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됨으로써 분명한 계몽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


<Fig. 2> 
Napoleon at the Siege of Toulon, 1793 Edouard Detaille

(Napoleon, n.d.-b)




<Fig. 3> 
General Bonaparte at Arcole, 1796 Antoine-Jean Gros

(Napoleon, n.d.-c)




<Fig. 4> 
Napoleon at Battle of Pyramids, 1798 Antoine-Jean Gros

(Napoleon, n.d.-d)




<Fig. 5> 
Josephine de Beauharnais and General Napoleon Bonaparte, 1796-1799, Isola Bella

(ladyreading.net, n.d.)




<Fig. 6> 
General Bonaparte surrounded by Members of the Council of Five Hundred during the 18 Brumaire Coup D'état, 1799 François Bouchot

(Napoleon, n.d.-e)



<Fig. 5>는 나폴레옹이 장교 시절 만난 죠세핀과 함께 한 모습이 묘사되었는데, 여기에서 착용한 복장은 <Fig. 3>에 묘사된 장군복과 같은 복장이고 단지 큘로트의 색이 흰색으로 묘사되었다. <Fig. 6>은 오백인회에 둘러싸인 나폴레옹으로, 나폴레옹칼라의 자수 장식 장군복, 부츠와 새시벨트를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모자를 착용하지 않은 3점의 초상화에서는 당시에 유행하던 부르투스 헤어스타일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묘사되어 젊고 패기에 찬 젊은 장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나폴레옹 초상화에는 젊은 장교가 자신의 탁월한 군사력을 발휘하여 국가에 헌신하는 계몽주의의 덕목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면서 시민의 덕목으로 부각된 애국심과 조국을 위해 투쟁하는 희생정신(Song, 2002)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통령시절 초상화(1799-1804)

나폴레옹의 통령시절 역시 시기가 짧은 까닭에 현존하는 초상화가 많지 않아서 복식의 묘사가 분명한 초상화 4점을 선정하였다. 2점은 장군복을 착용한 모습이고 2점은 집무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Fig. 7>은 매우 유명한 나폴레옹의 초상화 중 하나로, 이 작품의 배경은 나폴레옹이 제2 이탈리아 원정길에서 넘어야 했던 험난한 알프스의 생 베르나르 고갯길(St. Bernard Pass)을 넘는 모습이 묘사된 것이다. 이 결과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군대를 피해 마랭고 전투(Marengo battle)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화가 다비드가 제작한 이 초상화에는 화려한 자수 장식의 장군복 코트와 베이지색 큘로트, 부츠, 바이콘 햇, 흰색 장갑, 술장식 새시벨트에 주황색 망토를 휘날리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듯 오른쪽 팔을 높게 치켜든 결연한 표정의 용맹한 장군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Fig. 7> 
Bonaparte crossing the St. Bernard Pass, 1800-1 Jacques-Louis David

(Kim, 2003, p. 277)



1802년 5월의 국민투표를 통하여 종신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은 화가 그로, 메이니에(Charles Meynier, 1763-1832),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등을 동원하여 관공서를 비롯한 여러 공공장소에 게시할 통령의 공식 초상화를 제작하였다(Song, 2002). 대표적인 초상화로는 <Fig. 8, 9>에 제시된 프랑스 통령의 공식 집무복을 착용한 나폴레옹의 초상화이다. 두 초상화 모두 집무실을 배경으로 비슷한 구도로 제작되었는데, 오른손은 국가 정책을 결정할 서류에 손을 올려놓아서 결단력 있게 국가 정책을 추진하는 젊은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착용한 복장은 자수 장식의 빨간색 벨벳 코트와 큘로트, 흰색 셔츠, 검정색 크라바트, 무릎길이의 스토킹과 구두 혹은 흰색 큘로트와 검정 부츠가 묘사되어 있는데, 장교시절 초상화에 비해 차분한 표정과 단정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한 손을 코트 안자락에 넣은 특이한 손동작이 묘사되어 있다. 집무실에서도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이 여전히 장군으로서의 황제를 암시하는 듯하다. 여기에는 젊고, 지적이며, 결단력 있는 통령이 자신의 능력으로 신분이 상승하였다는 계몽주의적 암시가 다분히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Fig. 8> 
First consul Bonaparte, 1802, Antoine-Jean Gros

(Napoleon, n.d.-f)




<Fig. 9> 
Napoleon in the Uniform of the First Consol, 1804 Dominique Ingres

(Kim, 2003, p. 261)



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이 시기부터 장군으로서의 모습과 동시에 자비로운 통치자로서의 모습도 초상화에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없었던 주제, 즉 자파(Jaffa)의 역병 환자의 집을 방문한 자애로운 통령을 묘사한 <Fig. 10>의 복장은 자수장식 장군복, 흰색 큘로트, 흰색 장갑, 부츠, 빨간색 깃털이 장식된 바이콘 햇으로 <Fig. 6>의 복장과 유사하지만 보다 부드러운 표정과 제스처가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다. 적군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키면서 동시에 결단력 있고 자애롭게 시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Fig. 10> 
Bonaparte Visiting the Plague House at Jaffa, 1804 Antoine-Jean Gros

(Napoleon, n.d.-g)



3. 황제시절 초상화(1804-1815)

황제시절부터 나폴레옹의 초상화에 묘사된 복식은 두 가지로 양분된다. 하나는 황제의 공식복을 착용한 대관식 복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과 유사한 장군복장이다. 본 연구에서 선정한 황제시절 제작된 초상화 23점 중 황제의 공식복장을 착용한 초상화는 6점이고, 집무복 2점, 나머지 15점은 모두 군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먼저 대관식 복장의 황제를 묘사한 초상화는 <Fig. 11, 12, 13, 14, 15, 16>에 제시된 다비드, 말베스트와 두프레(Georges Malbeste & Jean-Baptiste-Michelle Dupre), 앵그르, 프랑스와 제라르(François Gerard, 1770-1837)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특히 <Fig. 12>에 제시된 프랑스와 제라르가 1810년경 제작한 초상화는 고위관리와 군주들에게 보내기 위해 많은 사본이 제작되었고 현재까지 약 20여개의 사본이 존재한다(Kim, 2003). 이 황제의 케이프와 튜니카(tunique)는 나폴레옹의 신임을 받던 화가 장-밥티스트 이사베이(Jean-Baptiste Isabey, 1767-1855)가 디자인 하였고, 머리에 쓴 황금 월계관은 금세공가 마리텡-기욤 비엔나이(Martin-Guillaume Biennais, 1764- 1843)가 디자인한 것으로 마치 로마의 황제가 착용한 월계관을 연상하게 한다(Kim, 2003).


<Fig. 11> 
Detail of the Coronation of Napoleon, 1805-7 Jacques-Louis David

(Oh & Park, 2004, p. 17)




<Fig. 12> 
The Emperor in His Coronation Robe, 1st Reign Georges Malbeste & Jean-Baptiste-Michelle Dupre

(Kim, 2003, p. 299)




<Fig. 13> 
Napoleon I in a Coronation Robe, 1810 François Gerard

(Kim, 2003, p. 327)




<Fig. 14> 
Napoleon in Imperial Costume, 1805 Jacques-Louis David

(Kim, 2003, p. 328)




<Fig. 15> 
Napoleon I on His Imperial Throne, 1806 Dominique Ingres

(Napoleon, n.d.-h)




<Fig. 16> 
The Distribution of the Eagle Standards, 1808-10 Jacques-Louis David

(Kim, 2003, p. 320-1)



발목길이의 흰색 튜니카에는 칼라와 소매, 햄라인에 금색 자수 장식이 되어 있고, 빨간색 벨벳케이프의 가장자리는 월계수 잎과 줄기들이, 전체적으로는 황제의 상징인 황금 꿀벌, 독수리, 나폴레옹의 이니셜 N이 금색 자수 장식 되었다. 또한 케이프의 안쪽과 가장자리에는 공평무사의 상징인 담비털이 장식되었고, 19세기의 것으로는 유일하게 크라바트를 목에 착용하고 있다. 또한 크라바트와 더불어 16세기의 러프칼라도 묘사되어 있으며 담비털의 가슴을 덮는 짧은 케이프에는 레종-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이 장식되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의 지위에 오른 나폴레옹은 오랜 프랑스 왕가의 상징인 백합 문장을 버리고 꿀벌 문장을 사용하였는데, 이 꿀벌 문양은 5세기 메로빙 왕가의 킬데리히(Childerich)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제복에 황금 꿀벌이 장식되었다는 것에서 연유했다고 한다(Song, 2002).


<Fig. 17> 
Napoleon at the Senate House, 1804 Georges Rouget

(Bordonove, 2008, p.vii)




<Fig. 18> 
Napoleon as an Italian Emperor, 1805 Andrea Appiani,

(Napoleon Bonapart, n.d.)




<Fig. 19> 
Napoleon Grants First Légion-D’honneur, 1804 Debré

(Kim, 2003, p. 285)




<Fig. 20> 
The Persian Envoy Mirza Mohammed Reza Qazvini Finkenstein Castle, 1807 Francois Mulard,

(Napoleon, n.d.-i)




<Fig. 21> 
Napoleon Visiting the Palais Royal, 1807 Merry- Joseph Blondel

(Napoleon, n.d.-j)




<Fig. 22> 
Napoleon Visiting the 1808 Salon, 1808, Antoine-Jean Gros

(Kim, 2003, p. 314)



이처럼 황제의 공식복을 착용한 초상화는 모두 유사하게 로마식 복장으로 묘사되었는데, 황제의 복장 이외에도 황제를 상징하는 정의의 손, 독수리 깃대, 검, 신성로마제국을 상징하는 십자가 달린 보주(orb), 월계관 등 다양한 로마식 상징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다. 나폴레옹은 평소에 로마 지배권을 인정받은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를 계승하고자 하였는데(Irwin, 2004), 부패한 부르봉 왕가의 후신이 아닌 로마의 적통을 이어받은 황제로 인정받고자 한 점이 초상화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혈통과 무관하게 황제가 되었던 초기 로마시대처럼 평민도 누구나 자신과 같은 신분 상승이 가능한 평등한 계몽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초상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 한 점은 앵그르의 초상화에 나타나는데, 이는 마치 말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신을 신격화, 영웅화한 초상화를 즐겨 제작하였던 것처럼(Bae, 2011; Bae, 2013b) 나폴레옹의 황제 초상화에도 옥좌 뒤의 둥그런 선이 후광과 같이 처리되어 황제가 마치 전지전능한 신과 동격인 것처럼 묘사된 측면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계몽주의적 사상과 당 시대를 풍미했던 신고전주의가 조우하여 로마식 복장과 상징으로 가득한 황제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Fig. 23> 
Napoleon with His Son King of Rome, unknown

(Bordonove, 2008, p. 61)




<Fig. 24> 
Napoleon I on Horseback 1st Reign, Charles-Francios Levachez,

(Kim, 2003, p. 338)




<Fig. 25> 
Napoleon at the Battle of Wagram, 1809 Horace Vernet

(Napoleon, n.d.-k)




<Fig. 26> 
Napoleon on the Isle of Lobau, 1809 Charles Meynier

(Napoleon, n.d.-l)




<Fig. 27> 
Napoleon's Fontainebleau Farewell, 1814, Antoine Alphonse Montfort

(Napoleon, n.d.-m)



다음으로 황제시절 착용한 집무복을 들 수 있다. <Fig. 17>의 초상화는 프랑스 원로원에서 나폴레옹이 황제임을 선포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Fig. 8>에서 착용한 것과 같은 집무복 상의와 흰색 큘로트, 수대와 부츠, 통령 시절과 마찬가지로 칼을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탈리아 황제로 등극한 기념으로 제작한 <Fig. 18>의 초상화에는 19세기 당시 복장이 묘사되어 있는데, 화려한 자수 장식의 코트와 수대, 커다란 크라바트와 새쉬 벨트, 자수 장식된 케이프를 착용하고 흰장갑을 낀 왼손을 왕관 위에 올려두어 프랑스에서의 황제 즉위 시 착용한 로마식 복장과 차이를 두고 있다.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이탈리아는 당시 프랑스의 속국이었으므로 프랑스 황제 즉위와 동등한 복장을 착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Fig. 28> 
The Emperor Napoleon in His Study at the Tuileries, 1812 Jacques-Louis David

(Oh & Park, 2004, p. 4)




<Fig. 29> 
Napoleon Takes Wien’s Key 1805 Girodet Trioson

(Bordonove, 2008, p. vii)




<Fig. 30> 
Napoleon at Battle of Jena 1806, Charles Thévenin

(Bordonove, 2008, p. xiii)




<Fig. 31> 
Injured Napoleon at Ratisbonne 1809, Pierre Gautreau

(Bordonove, 2008, p. 59)




<Fig. 32> 
Napoleon at Battle of Austerlitz, 1805 Carle Vernet

(Bordonove, 2008, p. xi)




<Fig. 33> 
Napoleon with Austrian Ambassador, 1808 Nicolas Goth

(Bordonove, 2008, p. 58)



다음으로 황제시절 착용한 장군복장을 들 수 있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어서도 장교시절과 통령시절에 착용하던 군복을 여전히 즐겨 착용하였고, 이를 착용한 모습으로 초상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 착용한 군복은 장교시절과 통령시절에 나타난 군복에 견장과 훈장이 장식된 같은 유형의 것으로 남색 혹은 녹색의 군복 상의와 흰색 큘로트, 흰색 베스트(vest)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겉옷으로 프록코트(froc coat)를 착용하고 부츠, 바이콘 햇이 경우에 따라서 추가되었다.

이 군복은 당시 프랑스 보병의 군복과 구성이 같고, 어깨의 견장과 가슴의 훈장으로 계급이 구분되었다. 가슴 부분의 흰색 라펠, 빨간색 스탠딩칼라와 커프스는 프랑스 보병의 특징적인 부분으로(Shedden & George, 1992) 나폴레옹도 같은 구성의 군복을 착용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라펠이 몸판과 동일한 색이거나 칼라가 빨간색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인 군복의 구성은 모두 같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예는 <Fig. 19>부터 <Fig. 33>까지 일관되게 나타난다. 황제 시절 제작한 초상화 23점 중에서 15점의 초상화에서 군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심지어 <Fig. 29>의 로마왕(King of Rome)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에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보다는 군복을 착용하여 용맹한 군인인 점을 부각시킨 것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초상화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Fig. 19, 23, 29>에 묘사된 바지는 무릎길이의 큘로트라는 점이다.


<Fig. 34> 
From left General, Line cavalryman, infantryman, 1795

(Braun & Schneider, n.d.)




<Fig. 35> 
Napoleon in the Uniform of the First Consol, 1804 Dominique Ingres

(Kim, 2003, p. 261)




<Fig. 36> 
Louis XVI, Antonie-Françoise Callet, 1786

(Napoleon, n.d.-n)




Ⅳ. 사상적 조류 변화에 따른 복식 변화

앞장에서 다룬 내용을 종합하면 나폴레옹의 초상화에 묘사된 복식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 번째는 19세기 프랑스 군복차림이고 두 번째는 집무복 차림, 세 번째는 로마의 황제와 같은 차림의 나폴레옹이다. 군복과 집무복 차림의 초상화는 거의 장교와 통령 시절에 집중되어 있고 황제복은 황제 즉위 이후에 나타나는데, 이 시기는 사상적 조류가 계몽주의에서 신고전주의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19세기 프랑스 군복을 착용한 상태로 묘사된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총 32점의 초상화 중에서 22점으로 나타났다. 남색 혹은 녹색의 군복 코트에 화이트 베스트와 판탈롱으로 구성된 군복에는 기후 및 상황에 따라서 외투와 바이콘 햇, 부츠가 추가되었다. 황제 즉위 이후의 초상화에도 군복을 착용한 초상화가 대부분인 것은 그가 자신의 이미지를 프랑스를 지키는 전쟁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자 한 것 때문으로 해석된다. 또한 군복을 착용하였을 경우 동시에 묘사된 소품과 배경 역시 프랑스 국기 혹은 전쟁터를 배경으로 말을 탄 매우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젊고 패기에 찬 군주의 이미지를 부각 시키고 있다. 이 초상화에는 평민도 한 국가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계몽주의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상징으로 착용된 긴바지인 판탈룬이 아닌 반바지 형태의 큘로트 군복 바지도 초상화에서 3점이 관찰된다. <Fig. 19, 23, 29>에 묘사된 큘로트는 <Fig. 34>에 제시된 18세말 군복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제시된 장군복은 <Fig. 10>에 제시된 1804년 나폴레옹의 장군복과 거의 일치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이 도판이 1795년의 프랑스 군복인데 이때까지도 반바지 형태의 큘로트와 긴바지 형태의 판탈룬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폴레옹의 초상화에서도 큘로트 형태의 바지가 관찰되는 점 역시 공통적이다. 이는 여타 분야 보다 복식 분야에 사상적 영향이 늦게 나타난 것 때문으로 해석된다.

반면 집무복은 나폴레옹이 당시 통령의 공식 집무복을 착용한 상태로 묘사되었는데, <Fig. 35>를 보면 역설적으로도 프랑스 혁명을 통해 구 왕조를 몰락시키고 집권한 통령이 무릎길이의 큘로트를 착용한 상태로 묘사되어 있다. 이 통령의 공식 집무복은 전례가 없으므로 아마도 전시대 왕인 루이 16세의 일상복에서 차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Fig. 36>에 제시된 루이 16세의 복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라와 더블 브레스티드 여밈은 밀리터리 코트(Lee, 2009)와 같지만 빨간색 벨벳 바탕에 금색 자수 장식과 단추 등의 복식 요소가 루이 16세의 일상복과 매우 유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ig. 35>의 초상화에는 복식 이외의 배경부분에 계몽주의적 요소가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다.

집무복을 착용한 초상화는 대부분 실내에서 차분하게 서있는 자세로 묘사되었는데, 이 초상화의 배경과 소품에는 테이블과 서류, 깃털 펜 등이 등장한다. 나폴레옹의 손이 국가보조금 관련 단어가 적힌 서류(Song, 2002) 위에 올려있고 그 옆에 펜이 놓여 있음으로써 신중하고 이성적인 통령의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부터는 초상화에 계몽주의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과학과 이성이 중심이 된 계몽주의 시대에 통령의 지적인 능력은 매우 중요한 업무능력이었으므로, 군인의 이미지에 집중되어 있던 선전초상화의 초점이 달라진다. 나폴레옹의 헤어스타일도 보다 잘 다듬어진 형태로 묘사되어 신중하고 지적이며 고뇌에 찬 통령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도 계몽주의에서 요구하는 이성적인 면모의 부각과 더불어 평민 출신 통령도 프랑스 일반시민과 다름없이 고뇌하는 한명의 인간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제복을 착용한 6점의 초상화는 대형으로 제작된 특징이 있다. 황제로써의 권위와 위엄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초상화의 크기부터 압도적이었으며, 여기에 묘사된 인물들의 복장도 나폴레옹 황제의 복장에 초점을 두어 신중히 계획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 권좌에 앉은 초상화는 단한 점이고 모두 서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이전의 부르봉 왕가의 복장과는 전혀 다른 로마황제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Fig. 37>과 <Fig. 38>을 보면 복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Fig. 37>의 섬세한 레이스와 무릎길이 큘로트, 크라바트(cravat)는 모두 사라지고, 발목길이의 흰색 튜니카, 꿀벌 자수 장식과 공평무사의 상징인 담비털(Bae, 2011)이 장식된 대관식케이프, 그리고 왕관은 금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월계수 관으로, 이전 시대 왕들이 착용하였던 가발이 아닌 로마 황제의 월계관을 착용하였다. 여기에는 평민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평등사상의 암시와 더불어 당시를 풍미했던 신고 전주의의 형식이 내재된 것을 볼 수 있다. 대중 위에 군림하는 황제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와는 반대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나폴레옹이 황제로써 택할 수 있는 것은 평민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로마 황제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로마의 황제는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장군이자 통치자였으니 군인 출신인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당시를 풍미하던 고대 그리스·로마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신고전주의에도 편승하는 것이었으므로 매우 편리한 해결책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복식 요소와 변화 그 근저에 내재된 사상적 조류는 다음의 <Table 2>에 정리하였다.

<Table 2> 
Costume Changes According to Ideological Transition through the Portraitures of Napoleon
Attire Costume elements Costume Changes Ideology
Military uniform 22 -Military coat, vest, shirt, pantaloon
-navy, white, green, black
-boots, bi-corn hat, sash belt
-Enlighten-ment (freedom, equality)
Administer uniform 4 -Administer coat, vest, shirt, culotte
-red, white, black -shoes, baldric
-precedent none (transition period)
Emperor costume 6 -Tunica, Coronation robe with ermine fur
-red, white, gold
-crown of laurel, sash belt
-Enlighten-ment (equality)
-Neo-classicism (formality)


<Fig. 37> 
Coronation of Louis XVI, 1779 Antoine-François Callet

(Napoleon, n.d.-o)




<Fig. 38> 
Detail of the Coronation of Napoleon, 1805-7 Jacques-Louis David

(Oh&Park, 2004, p. 17)




Ⅴ. 결론

인류 역사상 국민이 중심이 된 국민 국가의 역사는 300여년에 불과하다. 국민 국가의 탄생을 촉발한 사건 중 하나로 프랑스 혁명을 들 수 있고, 프랑스 혁명을 전 유럽으로 확대한 인물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걸쳐서 불과 19년 사이에 평민 출신에서 장군, 통령을 거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혁명 직후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이룬 장군 나폴레옹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 배경에는 18세기말과 19세초를 풍미했던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 사상에 기초한 대중의 인식전환도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급진적인 혁명의 성과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노예제도를 부활하고, 자신이 스스로 황제의 왕관을 쓰고 구체제로 복귀함으로써 나폴레옹 체제의 계몽주의적 측면을 무시하였다. 평민도 황제가 될 수 있고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자신의 후손이 황제를 대물림하게 함으로써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였고 결국 전쟁의 거듭된 패배와 더불어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에는 이러한 그의 인식을 반영하듯 변화하는 사상적 조류에 따른 복식 변화가 표현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에 묘사된 복식은 크게 19세기 프랑스 군복, 집무복, 황제복으로 구분되었다.

첫째, 19세기 프랑스 군복을 착용한 상태로 묘사된 초상화는 총 32점 중 22점으로, 장교시절부터 황제 즉위 이후의 초상화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군복을 착용한 초상화가 대부분인 것은 그가 자신의 이미지를 프랑스를 지키는 용맹한 군인으로 부각시키고자 한 것 때문으로 해석된다. 군복과 더불어 초상화에 묘사된 소품과 배경 역시 프랑스 국기 혹은 전쟁터를 배경으로 말을 탄 매우 역동적이고 가끔은 흐트러진 복장의 젊고 패기에 찬 군주의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었다. 초상화에 묘사된 복식은 혁명의 상징인 긴바지 판탈롱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큘로트도 관찰된다. 당시의 다른 회화를 보면 일반 병사들도 반바지 형태의 큘로트를 착용한 사례가 있으므로 나폴레옹도 예외 없이 일반 병사와 동일한 군복 체계를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여타 분야 보다 복식 분야에 사상적 영향이 늦게 나타난 것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군복 차림이 묘사된 초상화에는 나폴레옹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젊고 강한 군주의 이미지가 부각되었고, 평민도 한 국가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계몽주의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둘째, 집무복을 착용한 초상화는 주로 통령 시절에 제작되었으며 단 4점으로 그다지 많이 존재 하지 않는다. 대부분 집무실의 실내에서 차분하게서있는 자세로 묘사되었으며, 금색 자수와 단추가 장식된 밀리터리 코트 형태의 빨간색 벨벳 통령제복과 큘로트를 단정하게 착용한 나폴레옹이 묘사된 초상화는 통령이라는 직책이 이전에는 없었으므로 전례가 없어서 복식 변화를 알아 볼 수는 없으나, 루이 16세의 집무복에서 차용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복식의 변화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초상화의 배경에는 테이블, 서류, 깃털 펜 등이 묘사되어 신중하고 지적인 통령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과학과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 시대에 통령의 지적인 능력은 매우 중요한 업무능력이었으므로 초상화의 초점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신중하고 지적이며 고뇌에 찬 통령의 모습으로 변화된 초상화에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계몽주의에서 요구하는 이성적인 면모와 더불어 통령도 평민과 다름없이 고뇌하는 한명의 인간이라는 측면이 부각됨으로써 계몽주의 사상이 내재된 것으로 분석되지만, 복식의 관점에서는 계몽주의에서 신고전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써 오히려 전시대의 복식을 차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황제 즉위 이후에 제작된 황제 복장의 초상화는 6점인데, 황제로써의 권위와 위엄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초상화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큰 특징이 있다. 이 중 권좌에 앉은 초상화는 단 한 점이고 모두 서있는 모습으로 웅장하게 묘사되었으며, 이전 왕의 복장과는 전혀 다른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로마 황제 복장으로 묘사 되었다. 섬세한 레이스와 무릎길이의 큘로트, 크라바트는 모두 사라지고, 발목길이의 흰색 튜니카, 자수와 담비털이 장식된 빨간색 대관식 케이프, 금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월계관으로 로마 황제 혹은 개선장군의 월계관과 유사한 관을 착용하였다. 이러한 로마식 황제 복장에는 평민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평등의 암시와 더불어 당시를 풍미했던 그리스·로마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신고전주의의 형식이 내재된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통하여 그 복식에 묘사된 변화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반의 평범한 군복이 점차 계몽주의에서 요구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고뇌하는 통령의 제복으로 바뀌고, 황제 즉위 이후에는 장군이자 통치자인 로마 황제의 복장으로 바뀜으로써 계몽주의 사상에서 신고전주의 사상으로 복식에 변화된 시대상이 반영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이러한 연구가 복식이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거울로 작용한다는 관점에서, 복식 이면에 내재된 사상적, 상징적, 사회적, 정치적 측면을 다각도로 조망함으로써 복식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데 일조하기를 기대해 본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전남대학교 학술연구비(과제번호: 2012-0758)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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