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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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 No. 2

[ RESEARCH PAPER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No. 2, pp. 32-44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Feb 2016
Received 10 Sep 2015 Revised 09 Dec 2015 Accepted 04 Jan 2016
DOI: https://doi.org/10.7233/jksc.2016.66.2.032

프랑스 패션 파워 형성의 배경이 된 사회·문화적 요인
조경숙
성균관대학교 예술대학 의상학과 교수

What Makes France a Fashion Power: A Socio-historical Approach
KyeongSook Cho
Professor, Dept.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KyeongSook Cho, e-mail: kcho@skku.edu


Abstract

Having set a trend for luxury fashion brand markets since the 17th century, France has established the norms and the forms of the fashion business. In addition, it has maintained its status as a leading fashion power by discovering economic value from the intangible value of design and brand, and developing fashion into a high value-added industry.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socio-cultural factors that have exerted a positive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fashion power” in France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It will focus on four major external historical factors that made France the top fashion power: 1) insights and innovation of French leaders as well as their constant concerns and efforts for the promotion of fashion, 2) a tradition of experimental cultures and arts, 3) open and the public-centered social environment and an atmosphere of cherishing the values of creation, and 4) the establishment of a legitimate system that protects them.


Keywords: fashion power, French and industrial revolution, French mercantilism, intellectual property, luxury goods industry, socio-cultural factor, the spirit of the times
키워드: 패션 파워, 프랑스 이중혁명, 프랑스 중상주의, 지식재산, 사치재산업, 사회ㆍ문화적 요인, 시대정신

Ⅰ. 서론

본 연구는 ‘패션 파워를 형성하는 외부적 요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패션 강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패션 선진국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들이 지닌 패션산업의 경쟁력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는 패션 강국의 위상에도 지역적 공간 이동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서구 유럽의 패션과 취향은 1600년대 초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등에 의해 선도되다가,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가 등장하면서 1700년대 이후 서양복식 유행의 발원지는 바야흐로 프랑스로 전환되었고, 프랑스는 그 후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 동안 세계 패션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Pratt & Woolley(2005)가 소개한 역사의 기록들은 루이 14세 당시 이미 프랑스의 패션이 영국에서 일상이 되었고,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모든 것이 프랑스 취향이어서 프랑스에 가보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 아주 많았다고 보고했을 정도이다. 프랑스의 패션 파워는 현대에 와서도 어렵지 않게 증명되고 있는데, 세계 최대 브랜드 컨설팅 그룹 Interbrand(n.d.-a)가 발표한“Best Global Brands 2015”자료는 프랑스가 단연 세계 최고의 패션 브랜드 파워 국가임을 말해 주고 있다. Interbrand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의류(apparel)와 사치품(luxury) 카테고리를 아우르는 패션분야 브랜드 중 글로벌 상위 100개 브랜드 안에 랭크된 프랑스 국적 브랜드들(Louis Vuitton, Hermes, Cartier)은 미국(Tiffany & Co., Ralph Lauren)이나 이탈리아(Gucci, Prada)보다 두배가 넘는 브랜드 가치 총액(프랑스 411억, 미국 109억, 이탈리아 150억 USD 달러)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패션 파워를 형성하는 요인의 탐색’이라는 본 연구 과제의 수행을 위해 연구자는 세계 최고의 패션 강국 ‘프랑스’에서 패션산업이 성장해 온 역사를 추적하면서 그 성장의 배경이 된 외부의 사회 문화적 요인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고자 한다. 연구자가 프랑스 패션 파워를 형성해 온 사회 문화적 요인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고자 하는 이유는 패션은 결코 환경과 분리하여 이해될 수 없으며, 패션 강국으로서 프랑스의 오늘의 현실은 과거로부터 축적되어 온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의 추적을 통해 그들의 패션 파워를 설명하는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한다.

본고에서의 역사 추적은 프랑스가 유럽의 무대에서 패션과 취향의 선도국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루이 14세 시대 전후부터 현대까지를 포함하였으며 역사, 문화사, 미술사, 복식사 등 다양한 관점의 관련 문헌 및 선행 연구를 비롯하여 통계자료의 정성적 분석을 통해 수행하였다. 본 연구는 패션 왕국 프랑스의 패션산업이 성장해 온 연원과 그 문화적 배경을 탐색해 봄으로써 프랑스 패션 파워의 요체를 깊이 파악하게 할 것이며, 이는 분명 국내 패션산업의 진흥 구상에 있어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Ⅱ. 고부가가치 사치재 패션의 산업화
1. 국가 주도적 혁신

프랑스는 국가 주도적으로 사치재 패션산업을 장려해 온 나라로, 이러한 전통은 ‘프랑스는 패션, 명품은 프랑스’라는 인식 아래 패션과 명품이 결부된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힘이 되었다. Kim(1996)은 프랑스가 국가적 차원에서 사치를 장려한 배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루이 13세(Louis XIII, 재위 1610~1643)의 재상 리쉬리외(Armand Jean du Plessis de Richelieu, 1585~1642, 재상 취임 1624)를 인용하였다. 외교관으로서 사망할 때까지 루이 13세의 재상을 맡았던 리쉬리외는 왕가의 사치는 외국인에게 존경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책략은 사치스러운 왕가의 이미지를 통해 왕국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그 배경에는 루이 13세가 어린 나이로 등극함에 따라 왕권이 불안정하고 갈등과 음모로 왕국이 큰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왕국과 왕의 권위가 신성함을 가시적인 방법을 통해 각인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왕의 즉위식, 왕가의 결혼식, 축제 등의 행사에 동시대 예술의 모든 현란함을 동원해 약화된 권력을 강화하고 위엄을 갖추기 위해 과시 전략을 폈던 것이다.

프랑스는 절대왕정 루이 14세의 등장을 계기로 유럽인들의 생활 감각과 미적 취향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했던 바로크(Baroque) 예술 양식은 왕국과 왕권의 위엄과 절대 권력의 과시 외에 그 동안 상실되었던 가톨릭 교회의 영광과 지위 회복을 위해 극적인 감동에 호소하는 형식으로서 건축물의 앞면(facade)을 웅장하게 장식하는 양식을 취했다.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으로 꼽히는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은 루이 14세의 정치적 야망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럽의 정치, 문화예술, 사교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는 궁전이 완공되기도 전에 왕궁과 정부(政府)를 베르사유로 옮겨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그의 정치적 이념에 반대하는 귀족들까지도 궁전으로 이주시키고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통제하는 고도의 정략을 취했다. 궁전의 공간과 구조와 실내장식을 비롯한 궁정에서의 모든 일상생활은 권력의 과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배치되었고, 왕을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서열에 따라 일명 “귀족 길들이기로 일컬어지는 궁중의례”를 통해 절대군주에게 복종이 종용되었다(Lee, 2010, p. 157). 봉건 귀족들은 지방의 영지를 떠나 궁정 귀족으로 변질되면서 호사스런 치장으로 그들의 잃어버린 권력을 보상받고자 하였으며, 겉모습만이 그들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루이 14세는 요즘의 표현으로 ‘체험 마켓팅’을 시도한 인물로, 상품의 소비 상황과 분위기, 브랜드, 제품의 상징성 이 모든 것들을 통합하여 소비를 미적 경험의 수준으로 승화시키면서 파리를 사치재 시장의 중심지로 조성하였다. 그는 파리 패션의 마켓팅 전략으로 산책길에 인공섬을 만들어 수입산 백조를 풀게 하는가 하면, 밤거리 가로등이나 남자들이 신는 부츠 같은 디테일까지도 신경을 쓸 정도였다(Kim, 2008). 궁전 내에서는 누구든 모두 “공적인 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에 관심을 두었으며, 루이 14세는 물론 왕후와 귀족들이 스스로 이러한 사치 산업의 대소비자가 되어 화려한 의상과 가발 등 화장품을 이용해 대단한 멋을 부렸다(Yamada, 2007). 그들은 기꺼이 스타일의 모델을 자처하면서 위로부터 의도된 이미지를 구현하고, 귀족과 평민의 일상과 소비생활을 전략적으로 조종함으로써 ‘사치재 경제’를 창조하였다.

2. 프랑스식 중상주의 콜베르티즘 정신 계승

루이 14세의 이러한 정책은 당시의 재상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 1619~1683, 재상 취임 1665)가 “Fashion is to France what the gold mines of Peru are to Spain”의 신념하에 프랑스 패션 리더쉽의 잠재적 가치를 인식하고 실시한 프랑스식 중상주의 정책으로, 콜베르는 특히 견직물과 패션산업의 진흥에 매진하였다(Steel, 1988, p. 21). 콜베르는 프랑스를 무역 대국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수입 억제와 수출 촉진을 통한 무역 차액에 의한 국부 증대를 꾀하였으며, 관세 설정을 통한 무역 진흥과 국내 산업의 육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직물의 수출 촉진을 위해 생산 규정과 법령을 제정하고 조합(guild)과 유통 등의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검열 표지(inspection marks)를 획득하도록 하는 중앙 통제적 시스템을 운용하여 철저히 품질을 관리하면서, 우수한 품질로 해외 시장에서 신뢰를 구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중앙 통제적 검열 시스템의 운용은 콜베르가 추구한 시장이 가격 경쟁에 의해 좌우되는 시장이 아닌 고정된 수요의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최고급품 시장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Minard, 2000).

콜베르의 기획에 따라 루이 14세 때 프랑스에서는 견직물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서 견직물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벌인 국가 주도적 육성 노력은 15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 11세(Loius XI, 재위 1461~1483)는 리옹(Lyons)시에 견직물업을 진흥시키라는 칙령을 내렸다. 프랑수아 1세(Francoir I, 재위 1515~1547)는 리옹이 견직물 생산의 본고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에서 견직공을, 인도에서 염색 기술자를 궁정으로 데려와 리옹 시내에 견직물 공방을 창립하는 특권을 주면서 그들에게 견과 목면의 고급 직물을 생산토록 하고 프린팅을 활성화하도록 하였다(Yang & Lee, 1999). 이와 같은 견직물 진흥 정책은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에 이르러 더욱 강력하게 실시되었는데, 1598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에 따라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게 된 위그노파(Huguenots)에 속한 직공들에게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여 리옹에만 수천대의 방직기가 가동되도록 한 것이 그 하나의 예이다. 그 후 콜베르의 재상 시절 길드의 조직, 생산 체제의 정비, 그리고 균일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규정의 제정 외에도 외국산 견직물에 고액의 관세를 부과하는 사실상의 수입 금지 조치를 추진함에 따라 결과적으로 프랑스 리옹은 18세기에 유럽의 직물 디자인 중심지가 되었고, 그 산물을 전 유럽에 수출하면서 오늘날에도 유럽 제일의 고급 견직물 산지로서 명성을 지니게 된 전통을 형성할 수 있었다. 리옹 실크의 명성은 1770년대에 당시 유행한 의상 스타일에 따라 장식이 적고 심플한 직물이 선호되면서 잠시 타격을 입었으나, 나폴레옹 1세(Napoleon Bonaparte, 재위 1804~1814, 1815)는 새로운 궁전의 개장을 앞두고 장식용 직물을 리옹에 주문하여 실크산업을 부활시키고 프랑스 경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Lee, 2002).

산업왕으로 불리우는 나폴레옹 3세(Charles Louis Napoleon Bonaparte, 재위 1852~1873) 시절은 프랑스가 경제 번영을 기초로 평화를 누린 시기였다. 그는 대대적으로 파리시가의 개조 사업을 추진하는가 하면, 귀족들에게 축제 참가를 의무화하면서 사치품 제조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황후 외제니(Eugenie de Montijo)는 크리미아전쟁(Guerre de Crimee, 1853~1856)의 여파로 불황에 빠져있던 섬유산업을 자극하기 위해 리옹산 면 의상으로 치장하는 등 부군의 뜻을 받들어 사치의 모델이 되는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였다(Yamada, 2007). 정치적 의도의 표현인 황실의 사치는 겔랑(Guerlin), 까르띠에(Cartier), 에르메스(Hermes), 루이비통(Louis Vuitton)과 같은 황실 상인들과 외제니의 의상 디자이너인 워스(Charles Frederic Worth, 1826~1895)를 시작으로 오트꾸튀르(haute couture)를 등장케 하면서 오늘날 세계 패션시장을 주도하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기원이 되었다.

당시의 파리 만국박람회는 국제 상품 전시 대회로 나폴레옹 3세가 세계 여러 나라에 자국의 위신을 과시하고 자국의 소비재 산업, 특히 패션과 사치재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꾀하는데 활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던 정치적 국가 이벤트였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겔랑과 오피게즈(Opigez)전이 기획되었고, 이후 이어진 파리박람회에서 보석 장식의 보체론(Boucheron, 1867), 에르메스(1878), 그리고 루이비통(1889)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는 박람회를 통해 당시 영국이나 미국 등의 주변국들과 차별적으로 패션 악세사리, 고급 의상, 직물, 란제리, 보석 장신구 등으로 전시장을 세분화하고, 자국의 중요한 상업적 자산으로서 위상을 부여하면서 자국의 패션과 사치재 산업에 대한 긍지를 과시했다(Finamore, 2003).

프랑스식 중상주의로 표현되는 콜베르티즘(colbertism)은 1954년 콜베르위원회(Comité Colbert)라는 이익단체의 사상적 토대로 부활되었다. 콜베르의 위업을 받들어 설립된 콜베르위원회는 회원 업체들의 명품 수출 지원 및 전 세계로 프랑스의 문화적 메시지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프랑스 명품업체들의 압력 단체로서 명품 브랜드의 보호와 활성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Park, 2008).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500여년 전 당대 국가지도부의 정치·경제적 전략과 리더쉽이 프랑스라는 국가가 고부가가치 사치재 시장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일관된 신념과 정책이 지속되어 오면서 결과적으로 고부가가치재 패션 국가라는 이미지를 브랜드화하여 산업적으로 성공을 성취하였다.


Ⅲ. 미학적 내실에 기반한 패션 조형미의 추구
1. 신 시대정신과 예술 조형의 실험 무대

이탈리아는 예술에서 그리고 독일은 기술에서 신화를 만들어 왔다면, 프랑스는 예술을 정치 현실에 연계시켜 국가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Woo(2010)는 라스코(Lascaux), 퐁드고므(Font-de-Gaume), 레콤바레(Les Combarelles), 니오(Niaux), 레 트루아 프레르(Les Trois-Freres)를 포함하는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의 북부 알타미라(Altamira) 지역을 구석기시대의 예술의 중심지로 소개하였다. 이 지역에는 구석기인들의 동굴벽화가 분포되어 있는데,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어 인류 최고(最古)의 회화라 일컬어지는 라스코 동굴벽화는 남프랑스 도르도뉴(Dordogne)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프랑스는 환경적 요인에 의해 석회암 동굴이 많았고, 이러한 동굴들이 화가의 캔버스로 기능하면서 후기 구석기인들의 예술 표현 장소가 되었을 것(Park, 1993)으로 추측되고 있다. 프랑스는 중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프랑스로 옮겨 온 이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예술사조의 중심지로 기능하면서, 그 후 20세기 초 미국으로 예술의 중심지가 옮겨 가기 전까지 회화는 물론 무용, 사진, 영화 등 다양한 예술의 분야를 선도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 방식과 미의 세계를 추구하여 왔다.

프랑스가 독자적인 스타일의 예술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 정복을 통해 이탈리아인의 취미를 수용하고 모방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학습한 후의 일이다. 이러한 문화적 진보는 ‘프랑스 예술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년경~1576)와 같은 이탈리아 명장들을 고용하고 그들의 예술품을 수집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후 16세기 말경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된 바로크 양식은 루이 14세 시기의 프랑스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프랑스는 서구 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어 능동적으로 표현 기법을 모색하고 창조함으로써 당대의 정신을 표현하였다.

한 시대 예술의 공통된 특징은 당시 사회의 지적·문화적 풍토와의 관계 속에서 도출되는데, 바로크 예술은 문명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지적 지평의 확대와 이로 인한 혼란, 신·구교 간의 종교 갈등, 그리고 절대왕정의 강화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유럽 문명과 천동설을 절대적 기준으로 믿었던 당시 지식층은 지구상에 또 다른 문명이 존재하고, 새로이 등장한 지동설로 인해 당시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실체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불안과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의 미술은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신앙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한 예술 계획안에 따라 감각적이면서 극적인 형식을 취했다. 바로크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도록 하는 종교탄압으로 인해 내면의 참존재와 일상의 외양이 분리되었고, 이로 인해 개개인의 인간으로서 자아를 상실하는 불안한 세태 가운데서 그 상실의 허망함을 화려한 겉모습과 환상의 세계를 통해 위로받고자 하였다. 바로크 미학은 17세기 초 당시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심리 상태가 사회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Kim, 1996). 이전의 르네상스 예술 양식이 인간의 몸에서 발견되는 조형성과 균형미를 완전한 인간의 상징으로 찬양하였다면, 바로크 양식은 구조보다는 겉모습을 과시적으로 가꾸어 가면서 장대하고 장엄하면서도 역동적인 시각적 질서를 통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권력과 영광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Burke(2001)는 꾸밈이 많았던 바로크시대의 극적인 표현에 대해 이미지 자체가 곧 메시지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바로크의 극적인 꾸밈의 양상은 보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가톨릭의 자각과 개신교들의 주장에 대한 가톨릭의 간접적 대응으로 가톨릭 교회의 ‘프로파간다(propaganda)’로 묘사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바로크인들은 내면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외면의 장식과 과시는 여러 겹의 옷을 이용한 여분의 사치나 빠니에(panier) 또는 풍성한 가발 등으로 표현되었고, 이런 과장된 의상과 가발로도 그들이 원하는 영광스러운 외양을 만족스럽게 표현하지 못할 경우에는 가면으로 이미지화 하였다. Kim(1996)은 바로크 미학을 “겉모습(appearance)의 미학”이라 명명하면서, 바로크인들의 복식 표현이 다음과 같은 의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해석하였다: 첫째, 지적 사회적 격동기를 통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체험하면서 인간의 몸은 빈약, 노쇠, 죽음 등의 공포로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수치스러운 인간의 ‘벌거벗은’ 몸을 양장사들의 기술을 이용한 정교한 장식의 의상 속으로 도피시키고자 했으며 둘째, 인간의 신체는 절대 군주나 귀족이나 평민들이나 모두 같았으므로 의상을 통해 이들의 신분적 차이, 즉 사회적 권위와 광영의 차이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루이 14세의 죽음 이후 중앙집권적 체제가 약화되면서 바로크 예술을 계승한 로코코(Rococo) 스타일의 복식 표현은 에로틱하고 화려한 색채와 장식을 이용한 감성적 감미로움과 우아함과 사랑의 향락적 이미지를 추구하였다. 로코코의 경향은 루이 14세 말기에 프랑스 귀족들이 거추장스런 격식에 사로잡힌 공적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된 나머지 아담한 살롱을 중심으로 한 조용한 사생활과 친근한 개인적 교제를 사회생활의 주요 요소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조성되었다. 이러한 취향은 왕실을 넘어 차츰 귀족들과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예술이 되면서 루이 15세(Louis XV, 재위 1715~1774) 때 그의 정부(情夫) 퐁파두르(Jeanne-Antoinette Poisson, 1721~1764) 후작 부인이 로코코 스타일의 창조에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귀족들이 여성복식에서 추구한 취향은 환상적인 거대한 머리 장식, 깊은 네크라인, 빠니에로 부풀린 스커트와 가는 허리의 대조, 꽃과 리본 등 다양한 장식적 요소로 강조되는 디테일 등으로 표현되면서 마치 하나의 예술품과 같은 형태로 구현되었다. 우아한 세련미로 요약되는 로코코시대의 모드는 오늘날 여성복식의 대명사가 된 프랑스 모드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Park, 1981).

루이 15세 재위 말기 프랑스 혁명기에 등장하여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 절정을 맞이한 신고전주의 예술사조는 복식 양식에서 전체적으로 날씬한 하이 웨이스트 실루엣의 고대 의상을 모방한 자연스러운 형태 중심의 간결한 패션으로 표현되었다. 신고전주의의 등장은 북미 식민지를 독점하게 된 영국의 귀족과 엘리트들이 로코코적인 예술 취향을 퇴폐적이고 타락한 프랑스의 철 지난 유행으로 평가절하하면서 호화스러운 궁궐 취미에 대한 반동으로써 그리스 로마의 고대미술을 동경하게 된 데서부터 유래하였다. 때마침 활발해진 고대 유적의 발굴과 고대미술에 대한 연구가 이를 더욱 촉진하였다. 합리적인 미학을 바탕으로 한 신고전주의는 고대 예술의 특징인 형태의 이성적인 단순화 즉, 인습과 형식을 고수하고 윤곽의 뚜렷함, 형태의 입체적 표현, 철저하고 엄격한 소묘, 색채보다 형태를 중요시한 균형잡힌 구성을 특징으로 질서와 이성을 선호하였다.

그 후 1830~1850년대에 등장하여 신고전주의를 대체한 낭만주의 예술풍의 복식은 어깨와 허리를 강조한 넓은 V형 토르소, 풍성한 스커트, 퍼프를 이용한 부풀린 넓은 소매, 넓은 칼라, 챙이 넓은 모자, 프릴이나 레이스, 개더 등을 활용한 실루엣이 특징이다(Chun, 1985). 이와 같이 인체의 과장적 조형의 낭만주의 복식은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면서 인간의 내부에 흐르고 있는 생명력과 감동을 지향하고 동적인 구성을 개척하면서, 신고전주의가 고대 미술을 동경함에 따라 모방했던 안정된 구도와 통일된 형식의 조형적 특징에서 탈피하고자 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을 긍정한 고전파와 달리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였는데, 그들의 공간적 도피는 이국적 취미 즉,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테마로 나타났다. 낭만주의가 쇠퇴한 이후에도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당시 회화, 사진, 문학 등의 예술에 등장하였는데, 이 동방 취향의 경향은 당시 프랑스의 지리적 확장과 무관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1815~1914년 사이 영국 다음 가는 식민제국의 필두로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지배하였고 그 면적이 상당하였다. 당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나 동양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구인들의 왜곡된 인식을 드러낸 관념으로서, 프랑스 예술가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도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스트 화가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잔인성, 관능성, 나태함 등의 부정적인 주제로 동양과 동양인을 표현하였던(Kang, 1999)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은 우끼요에(浮世繪)에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우끼요에는 특히 프랑스에서 일본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 쟈포니즘(japonism)으로 발전되면서 공예, 건축, 요리, 복식 등 19세기 중후반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일대에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이국적 취향에 대한 관심은 쟈포니즘 이전에도 로코코 양식에 중국적 취향을 결합하여 시누아즈리(chinoiserie) 스타일로 발전시킨 바 있으며, 제국시대에 도래해서는 그들의 식민정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패션에 콜로니얼 쉬크(colonial modern chic)를 창조하여 파리 박람회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Finamore, 2003).

19세기 중반 등장한 사실주의는 주관에 의한 현실의 왜곡을 피하고, 대상을 합리적 질서 위에서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사조로서 근대 과학의 성과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이 사실주의가 확산되면서 새로이 등장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포착된 대상의 시각적 인상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이는 사진의 발명과 함께 회화가 더 이상 사실의 재현에 머무를 수는 없으며 이를 뛰어넘는 창조활동이어야 한다는 당대 화가들의 새로운 인식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프랑스는 순수한 면과 선의 구성을 시도한 추상미술, 구상체를 그림으로 재현하는 기술적 행위가 아닌 정신적 행위가 예술의 본질이라는 개념예술, 강렬한 색채의 배치와 단순한 형식의 야수파 미술, 반문명적이고 반전통적인 예술 운동으로서의 다다이즘, 그리고 무의식 속의 세계를 포착해 표현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 등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서양 미술사에서 새로운 시대정신과 그에 걸맞는 새로운 미적 표현 기법을 선도하였다. 프랑스에서 여러 예술적 유파가 등장했다 사라졌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늘 새로운 미적 형상을 추구하는 프랑스 예술의 생동감과 실험정신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이원적, 다문화적, 실험적 창조 정신

예술과 패션 간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불가분의 상호 연관성에 따라 순수예술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패션디자인의 전개에 많은 영감과 모티브를 제공하였다. 즉, 예술이 인간의 정신과 문화의 변화를 반영해 왔듯이 각 나라 문화권에서의 시대정신과 예술적 표현이 변해갈 때마다 필연적으로 패션에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가 기존 예술에 도전하고 새로운 예술을 시도한 수많은 작가들을 배출하면서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어 다양한 예술 세계를 제시했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프랑스의 예술이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프랑스만의 특유한 복식 조형미 형성에 기여했으리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프랑스의 예술에는 옛 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즉,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을 아우르는 고유한 이원적 경향과 이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다문화적, 실험적 창조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 점이 바로 프랑스 문화의 특징으로, 이런 특징이 20세기 현대 프랑스 패션의 외형에 단순성과 장식성, 여성성과 남성성, 전통과 현대 등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언급한 연구도 있다. Jung & Chun(2006)은 이러한 대립이 적절히 융합되어 ‘하나’의 고유한 형상을 빚어내는데, 패션 영역에서는 다양한 문화권의 고유한 문화적 요소가 프랑스적 요소와 결합되어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어 신비감을 창출하기도 하고, 새로운 미적 가치가 신소재 신기술 등과 접목되어 미래 지향적 분위기를 창출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비록 구체제(Ancien Régime)하에서는 왕조의 영광과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의 창작이 자유롭지 못했던 제약은 있었으나, 프랑스인들은 역사를 통해 과장과 사치를 경험하였고, 이성과 절제의 가치하에 화려미와 간결미의 이상적인 조화를 꾀하는 한편 디테일과 율동감을 도입하여 감성과 개성을 표현하는 등 인간이 상상하고 추구할 수 있는 다양한 조형미를 경험해 왔다. 오늘날 현대 프랑스 패션에 투영된 이원적, 다문화적, 실험적 조형미는 당대에 수용되고 인정되던 문화예술과 미의식에 근거하여 그 시대정신을 의상이라는 오브제로 구체화하는 오랜 역사적 실험에서 형성된 힘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조형적 질서의 구성을 시도하는 가운데에서 단련되고 축적된 감수성과 기예 속에 담긴 ‘미학적 내실’에 있다. 이러한 프랑스 패션의 미학적 내실은 오늘날 주요 시점마다 새로운 패션 변화의 흐름을 주도해 갈 수 있는 패션 감각과 영감의 영양원(營養源)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Ⅳ. 현대 패션산업의 사회사상적 토양 및 구조 확립
1. 프랑스혁명

1789년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과거의 인습과 전통 위에 구축된 권위주의적인 구체제를 무너뜨리면서 프랑스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폭제가 되었다. 프랑스 시민의 사회개혁 의지가 극적으로 표출된 프랑스혁명은 정치적으로는 시민계급이 절대왕정을 타도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사회적으로는 법적인 불평등과 특권을 타파하여 민주주의적인 근대 시민사회로의 이행을 유도하였다. 대혁명 봉기 당시 루이 16세(Loius XVI, 재위 1774∼1792)의 18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는 정부의 과도한 사치와 군사비 지출로 인한 재정 궁핍과 구체제의 모순으로 핍박받는 평민들의 불만에 흉년으로 인한 기근까지 가중되어 사회적인 대변혁이 불가피하였다. 1789년 왕도 귀족도 아닌 제 3신분의 대표자들에 의해 탄생한 국민의회가 발표한 ‘인권선언’은 정치적 자유, 만민의 사회적 평등, 그리고 박애의 이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과 시민의 권리를 표명하였다. 19세기 전반, 혁명 후 수립된 공화정이 몰락하고 제정, 왕정복고, 다시 공화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면서 프랑스가 경험한 정치적 변혁과 불안정은 격심한 것이었다. 이에 못지않은 큰 변화가 경제 영역에서 일어났는데, 산업혁명에 따른 계급과 부의 사회 내재배열 현상이 그것이었다.

프랑스 사회의 이러한 혁명은 프랑스의 패션에도 다음과 같은 변화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첫째, 정치 권력이 기존의 소수 특권층 즉, 왕족과 귀족에서 일반 시민으로 이동하면서 패션도 궁정식모드에서 민주적, 부르주아적 모드로 대체되었고 둘째, 유행이 끊임없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며 셋째, 과거 겉모습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미학에서 내외면의 아름다움의 일치를 추구하면서 패션에 대한 사회적 검열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비의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이되는 사회적 명분이 확보되었다는 점이다.

혁명 이전의 프랑스 복식은 사회·정치적 역할과 신분 및 지위에 따라 철저히 구분되었다. 복식상의 이러한 구분은 의복칙령을 통해서 명료하게 정해져 있어서,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궁정의 왕족이나 귀족에 의해 새로운 모드가 창안되면, 일정 계급 안의 구성원들만 새 모드를 모방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유행이 급격히 바뀌는 일도 없었다(Hong, 1997). 그러나 1793년 국민회의가 복식제도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선포함으로써 의복을 통한 위계 질서와 지위 구분은 더 이상 법으로 규제되지 않았다. 상업경제의 확산으로 봉건 귀족들의 사회적 정당성이 약화되면서 다양한 계층에서 부르주아들이 부상하였고, 세상은 그들의 천하가 되었다. 혁명을 통해 주창된 사회적 신분의 평등 이념은 누구라도 자기의 의지에 따라 원하는 복장을 할 수 있다는 복식 표현의 자유로 확대되었고, 사람들은 복장으로써 전체의 일부가 되었으며 전체에 소속하게 되었다(Fuchs, 2001). 당시 자본주의적 대량 공업 생산방식이 국제적으로 확대되면서 대량생산에 의한 획일성은 부르주아시대 모드의 본질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확산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패션이 패션으로서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만인 평등의 실현은 곧 역설적으로 다름과 구별에 대한 새로운 욕구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유행을 끊임없이 생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혁명이 이념적으로 귀족주의를 종결시켜 귀족사회를 약화시켰으나, 가시적 표지에 따라 구별되는 귀족적 취향까지 종결시킨 것은 아니었다(Hobsbawm, 1962). 즉, 부르주아들은 구체제 지배계급이 형성해 놓은 사치와 호화로움의 표준 속에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의 상징을 추구하였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이들 부르주아들은 의복을 통한 새로운 의례를 만들고, 이를 빠르게 유행시키면서 문화를 선도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전 혁명의 시대에 상하 계급과 좌우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던 복식 형태는 사라졌으나, 재산이 새로운 평가 기준이 됨에 따라 사람들은 막대한 자산가로 보이기를 갈망하였다. 당시 부르주아들의 의복을 통한 코드와 기호에 대한 집착은 여러 자료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Fuchs(2001)는 그의 책에서 부르주아들은 섬세하고 정교한 우아함을 차별점으로 삼아 무산계급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계절마다 끊임없이 유행 의상을 바꾸거나 최상의 우아함으로 치장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를 하기도 하였고, 이로써 사치와 우아함은 곧 유산계급을 지칭하게 되었으나 우아함은 금력으로 재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행의 뉘앙스까지 달라지게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2. 산업혁명

유산계급의 ‘차별성’에 대한 욕구는 사회적으로 새로운 구별의 형성을 초래하였다. 프랑스 사회가 이 새로운 구별짓기의 전략 차원에서 추구한 우아함 즉, 올바른 처세술, 교양, 격식에 맞는 옷차림, 단정함과 같은 차별적인 풍모를 통해 끊임없이 출신과 계급을 구분하였다. 예의 교본의 출판이 증가하였고, 교본의 지침에 따라 부인들은 숙녀들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기성복 출현이 의복의 공급을 늘리면서 사회가 추구했던 청결함과 우아함, 예의 바름의 덕목은 대중의 도덕화에도 기여하였다. 겉모습과 유희의 미학을 추구하던 프랑스 사회는 내외면의 일치 즉, 외면의 아름다움이 내적인 성숙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시작된 섬세한 구별을 위한 우아함의 추구가 Lee(2004)가 표현한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는 아름다움이 지성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라는 패션 철학으로 성숙,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p. 54).

이 시기에 추진된 산업혁명은 의복 생산과 섬유산업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번영하는 시민 계층과 노동자 계급이라는 두 계층의 대비를 반영하듯 수공업과 기계생산, 오트꾸튀르와 기성복, 진품과 복제품의 대립과 혼란 속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복식 양식들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이 무렵부터 사치와 소비가 여성의 전유물로 변질되었다는 점은 현대 패션산업의 구조와 형태 확립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혁명 이후 19세기 복식의 형태 변화는 남성복의 경우 실용성을 강조한 형태의 상뀔로티즘(san culottisme)으로 발전한 반면, 여성복은 다시 신체를 인위적으로 조이는 크리놀린(crinoline)시대로 역행했던 것은 성역할의 구분이 뚜렷했음을 말해 준다. 계몽주의가 만인의 평등한 천부인권을 강조하였음에도 여성의 복식은 과도한 장식이 지속되고 신체를 인위적으로 조이는 형태로 역행하여 남성의 복식과 달리 간소화되지 못하고 과장되어 계몽주의라는 당시의 시대정신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Hong, 1997). 이에 대해 Fuchs(2001)는 여성복 과장 현상의 본질은 부르주아시대가 남성 중심의 시대라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을 추구했던 당시 산업혁명기에는 남성이 생산을 담당했기 때문에 남성의 복장은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그들의 삶을 상징해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들의 복장은 그 형태가 간소화, 획일화되고, 색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색채를 띠는 쪽으로 변화하였지만, 여성의 복식은 남성의 부를 과시하는 장식적 가치로서 더욱 여성스러워야 했던 것이다. 과거 귀족시대의 사치는 남성의 전유물로서 수행원과 하인을 부리면서 지위를 나타내고 우월성을 과시하는 기능이 우선이었다면, 부르주아시대에는 여성들이 사치의 주체가 되어 의상과 장신구, 가구 등 물건의 소비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사치의 사생활화, 그리고 실내화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Yamada(2007)는 근대 명품 브랜드들은 “여성의 영역”에서 탄생하였다고 표현하였으며, 더불어 ‘패션’은 사치스러운 것이며 여성들의 전유물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Ⅴ. 디자인과 브랜드의 상징자본화
1. 디자인의 제도적 보호

오늘날 세계 섬유패션 시장에서의 경쟁력의 축은 품질 위주의 제품 생산 및 서비스에서 디자인과 브랜드가 중심이 되는 창조적 문화컨텐츠 영역으로 이동되었다. Interbrand(n.d.-a; n.d.-b)가 발표한 2001년부터 2015년까지의 글로벌 Top 100 브랜드 리스트에 포함된 패션 브랜드(apparel과 luxury sector 포함)를 국적별로 분류해 보면, 이태리가 38, 미국 44개, 그리고 프랑스가 49개로 가장 많은 브랜드를 랭크시켰다. 100위 안에 포함된 프랑스의 패션 브랜드들은 모두 명품 메종 브랜드들로, 그 중에서도 Louis Vuitton은 2005년부터 최근 2015년까지 지속적으로 패션 브랜드 중에서 최상위로 랭크되는 등 2, 3위를 추격하는 미국, 이탈리아의 위상과 내용면에서 차별화되고 있다.

명품 메종 브랜드를 통한 프랑스의 고부가가치 창출의 원동력은 수백 년 전 프랑스 군주들의 정책적 리더쉽에서 비롯되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 중에서도 콜베르가 예술과 직업의 유기적인 결합을 구체화한 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사회적 공헌은 경제력 강화에 있다고 강조한 콜베르의 주장은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디자인 보호를 제도화할 수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프랑스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에서 더 나아가 디자인을 순수예술과 분리하여 제도적으로 보호한 최초의 국가로서 패션과 디자인의 역사에서 획을 그었다.

프랑스에서 디자인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1711년 리옹시의 집정관이 내린 직물 도안 모방 행위 금지 명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명령은 리옹 시내 견직물 업계의 경쟁업체들 간에 견직물에 사용된 도안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려진 조치로 명령의 효력은 리옹시에 한정되었으나, 그 후 오늘날과 같이 독점권을 기본으로 하는 디자인 보호가 1787년 프랑스 참사원의 명령으로 가능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참사원의 명령은 창작자의 독점권을 인정하고, 원본 또는 견본에 대한 보호 효력이 프랑스 전역에 미치도록 한 조치였다(Korea Intellectual Porperty Office [KIPO], n.d.-a).

1806년에는 직물디자인을 산업재산권의 일부로 인정하는 법을 제정하게 되었는데, 이 법은 나폴레옹 1세가 리옹의 여행 시 직물 제조업자들이 미술저작권법상 그들의 견직물 디자인에 대한 권리가 충분히 보호되지 않고 있음을 호소함에 따른 조치였다(Chung & Lee, 2012). 1793년 프랑스혁명 기간 중 제정된 저작권법에서는 문학, 예술재산권 범주 규정이 있었지만 이 법률이 산업디자인까지 보호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백한 근거가 되지 못했었다. 1806년의 새 법에서는 등록을 통한 디자인 보호 방안이 마련됨으로써 본격적인 산업디자인 보호가 시작되었고, 등록 절차와 위조물에 대한 압류 절차 등 근대적인 산업디자인법의 내용을 담기 시작했다(You, 2005).

이러한 프랑스의 산업디자인 보호는 산업혁명시대 당시 독보적인 선진적 원단 프린팅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던 영국보다 앞선 것이었다. Kim & Kim(1999)은 영국이 우수한 직물 패턴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산업상의 디자인에 대해 디자인저작권법을 적용하여 법적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안을 처리한 것은 1839년 이었고, 평면 디자인을 포함하여 제조산업의 모든 제품 디자인에 대한 소유권으로 확대한 것은 1843년의 일이었다(Kim & Kim, 1999). 산업디자인을 순수예술에서 분리하는 일반적인 기준은 이윤추구 및 공업적 양산의 여부로, 미술로부터 디자인을 분리한 것은 2차 대전 후 미국식 자본주의의 생산방식과 소비문화가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현대적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할 때, 프랑스가 디자인의 산업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세계 최초로 제도적 보호의 틀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매우 선진적인 조치였던 것이다.

2. 상표제도의 발달

오늘날 패션시장에서는 품질로는 물론 디자인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무형의 상징적 가치로서 브랜드라는 개념이 있다. 나폴레옹 3세의 집권기인 프랑스 제 2제정 시기는 섬유산업이 약진하며 소비문화가 질적 전환을 이룬 시대로, 프랑스를 효시로 오늘날과 같은 상표제도의 기틀이 다져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857년에는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상표의 사용주의 및 무심사주의를 기초로 하는 “제조표 및 상품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상표제도가 시작되었다(KIPO, n.d.-b).

상표제도의 시작을 전후로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겔랑(개점 1828), 까르띠에(1837), 에르메스(1847), 루이비통(1854) 등의 브랜드가 그리고 의상 분야에서는 영국 출신 워스(1858)를 비롯한 황실 장인으로 출발한 명품 메종 브랜드들과 파깽(Paquin 1891), 푸아레(Poiret, 1904), 샤넬(1908) 등의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하우스를 개점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오트꾸튀르와 현대 패션 비지니스의 규율과 틀을 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워스는 의상 제조 비용에 브랜드 마크인 그리프(griffe)를 창조하여 디자인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고가의 가치로 바꾸어 디자이너의 명성을 상징자본화 한 최초의 꾸튀리에(couturier)였으며, 푸아레는 의류뿐만이 아닌 패션 하우스 향수의 런칭 등 다양한 분야의 업종을 아우르며 자신의 전 제품에 상표를 붙이면서 토탈 패션브랜드의 개념을 시도한 디자이너였다.

프랑스에서의 브랜드 형성과 발달에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모방의 위험에 대응하여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사치를 통한 차별을 추구하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기여한 바가 크다. 프랑스에서 모조의 등장은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기성복 산업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은데, 제 2제정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유통 매체로서 백화점은 오트꾸튀르의 저렴한 가격의 복제품인 기성복을 취급하였고, 희귀한 원본들의 복제는 맞춤복을 입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원본의 대량 복제를 통해 파생된 2차적 가치를 소비하도록 허용하는 수단이 되었다. 모방 제품의 산업적 증가와 그 제품에로의 접근이 더 용이해지고 새로운 의복 기호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압도해야 하는 계층의 인구가 많아질수록 모방과 구별되는 희귀한 진품의 가격은 비싸지면서(Perrot, 2007), 프랑스 사회는 ‘영원성’과 ‘절대적 품질’에 가치를 두게 되었다. 영원을 보장하는 절대적 품질에 대한 동경은 그 브랜드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모조품이 양산되었으며, 모조품의 양산은 오히려 절대적 품질의 진품의 가치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는 진품 브랜드들로 하여금 싼 상품들과 차별화 하도록 노력하게 함으로써 브랜드가 출처와 지위 확인 기능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품질을 보증하는 ‘신용’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Yamada, 2007).

진품 브랜드로 대표되는 푸아레, 파깽, 비오네(Madeleine Vionnet), 랑방과 같은 오트꾸튀르 디자이너들은 자국내외에서 만연한 디자인의 모방과 복제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조합을 결성하고, 법적 투쟁과 캠페인 및 법률 개정 로비를 통해 그들의 창작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보호하고자 노력하였다. 1930년대 이들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불법행위가 결과적으로 약화되긴 하였으나, 이 무렵 꾸튀리에들은 기성복 부티끄를 추가하거나 한정판을 출시하는 등 모방과 복제에 대항하여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게 되었다. 꾸튀리에들은 패션은 본뜸이며 그래서 패션은 민주화되어 가는 것(“Fashion was about emulation and hence democratization”)임을 수용하면서 패션의 새로운 역동성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Stewart, 2005, p. 130). 이러한 새로운 접근과 인식은 프랑스로 하여금 또 다른 차원의 패션 비지니스의 국면으로 진화하는 역사적 주체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샤넬은 이러한 새 역사의 출발에 기여한 대표적인 디자이너로서, 그녀는 프랑스 브랜드 창시자 중 유일하게 대량생산을 지향하였다(Yamada, 2007). 그는 복제되지 않는 것은 유행이 아니라는 철학을 펼치며 20세기 귀족사회의 종말과 함께 미국 시장에서 민주주의와 소비력 증대에 힘입어 브랜드가 계급을 대체하는 개념임을 호소하였고, 동시에 계급의 상징으로 출발한 브랜드의 개념을 대중의 것으로 민주화하면서 명품 브랜드의 현대화 시대를 열었다.


Ⅵ. 결론

본 연구는 프랑스의 ‘패션 파워’가 형성되어 온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해 온 사회 문화적 외부 요인을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연구자가 본 연구를 통해 주목한 프랑스 패션 파워 형성에 기여한 외적 요인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첫째, 지도자들의 통찰과 혁신 의지에 따른 일관된 정책과 지속적인 추진 둘째, 실험적인 문화예술 전통에 따른 미학적 내실과 패션 조형 감각 셋째, 이중혁명 정신의 토대 위에 현대 패션산업의 사회사상적 토양 및 구조 확립, 그리고 창작적 가치를 중시하는 풍토와 이의 소유를 보장하는 합리적 제도의 정립이 그것이다.

패션은 시각을 통해 인지되는 사회적 조형 현상으로서, 착장자와 감상자 간의 ‘읽음과 읽힘’의 관계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프랑스가 향유하는 그들의 패션 파워는 바로크시대 ‘시각’을 통해 권력을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시작되었고, 패션은 당시 정부의 정치·경제적 목적에 따라 사회와 문화를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권력의 과시와 조율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과시에 가치를 두었던 바로크 예술은 상류사회를 위한 미학이었고, 그들의 이러한 바로크 미학 개념이 패션사치재 산업의 진흥으로 연결되면서 고부가가치의 국가 핵심 산업으로 설정하는 뿌리가 되었다. 이러한 프랑스 패션산업의 전통은 과거 절대왕정 시기 이래로 오랜 중앙집권적 체제하에서 국가 주도적 기획에 의거하여 위로부터의 취향과 정책의 수직적인 전달과 제도화를 통해 효율적인 산업적 구심력을 갖출 수 있었다

문화예술을 장려하는 선정원칙과 이중혁명을 거치면서 형성된 민주적이고 개방된 사회 분위기는 프랑스 패션이 그 조형과 내용에 있어 창의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였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문화예 술사를 거치면서 시도해 온 조형적 구성을 통해 축적한 미감은 프랑스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주도해 갈 수 있도록 하는 패션 감상과 영감의 보고가 되었다.

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된 계몽주의 사상에 따라 촉진된 산업혁명의 물결은 프랑스 사회 내 물신화된 패션의 모습을 창조하였으나, 프랑스 사회는 곧 외모와 내적 성숙이 일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추구하는 자정적(自淨的) 패션 문화와 철학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외연의 전통에 힘입어 패션은 프랑스 사회에서 특수한 위상을 부여받았고, 바로 이 점이 프랑스의 패션이 다른 나라와 차별되는 점이다.

여기에, 디자인과 상표 보호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다른 나라에 비해 일찍부터 창작과 창작자의 이름이 브랜드라는 상징자본으로 기능하게 될 수 있었던 점은 프랑스가 다른 나라들에 앞서 현대 패션비지니스의 세계에서도 경쟁 패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한 요인이 되었다. 프랑스의 패션 파워를 오랜 세월 동안 패션 강국의 위상을 유지해오고 있는 시장에서의 현상으로 요약할 때, 디자인이라는 창작적 가치를 중시하는 풍토와 이의 소유를 보장하는 제도의 정립은 또 다른 무형의 가치로서 브랜드가 탄생하고 지속될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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