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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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 No. 8

[ RESEARCH PAPER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No. 8, pp. 123-137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Dec 2016
Received 30 Sep 2016 Revised 05 Dec 2016 Accepted 15 Dec 2016
DOI: https://doi.org/10.7233/jksc.2016.66.8.123

『사례편람(四禮便覽)』에 기초한 남자 상복(喪服)의 고증제작에 관한 연구
조우현 ; 김혜경 ; 동준희 ; 박민재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박사과정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석박통합과정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박사과정

Historical Investigation and Production of Men’s Mourning Dress Based on Sa-ryae-pyeonram [四禮便覽]
Cho, Woo Hyun ; Hye Gyeong Kim ; Jun Hui Dong ; Min Jae Park
Professor, Dep.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Ph.D Course, Dep.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Combined Master's and Doctorate Program Course, Dep.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Ph.D Course, Dep.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Cho, Woo Hyun, e-mail: whjoy@skku.edu


Abstract

Sa-ryae-pyeonram [四禮便覽], which was publish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representative reinterpretation book of Ga-ryae [家禮] and it was a widely used and cit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book contains Confucian values about the ritual of Confucian scholars of Joseon Dynasty. This study is a description of historical investigation and production of men’s mourning dress based on Sa-ryae-pyeonram [四禮便覽] the result, of the study shows empirical attitude of Confucian scholasr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industrialization, traditional culture has been able to survive through preservation. Wearing the traditional mourning dress is not the only way to embody the traditional values in the modern society. It is will be necessary to study contemporary mourning dress as a reflection of traditional value.


Keywords: mourning dress, Obok, Sa-ryae-pyeonram
키워드: 상복, 오복, [四禮便覽]사례편람

Ⅰ. 서론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통과과정을 의례행위로 표현한 것을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라고 한다. 이 중 상례(喪禮)는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겪는 의례 행위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시 되었다.

유교문화권에서 의례행위는 인간관계에서의 예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의례의 의미, 절차, 방법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의례복식(儀禮服飾)이다.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다’라는 표현에서처럼 복식은 예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으로 상례의식에서도 상복(喪服)은 상례 행위가 갖는 의미를 가장 축약하여 표현해준다.

Cho(1990)에 의하면 유교식 상례는 고려 말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전래된 이후 조선조 오백년간에 걸쳐 사대부(士大夫)는 물론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지켜졌으며 조선 중기 현종(顯宗) 연간에는 조대비(趙大妃)의 상복착용문제로 여러 차례 예송(禮訟)이 있었고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주요한 쟁점(爭點)이 되었었다. 또한 천주교 전래 시에는 상제례(喪祭禮)문제가 크게 갈등(葛藤)을 일으켜 심지어 유혈참사(流血慘事)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유교를 국가의 기본 통치 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 상복이 갖는 의미는 실로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례를 포함한 사례의 의례행위를 정리한 많은 예서(禮書)가 출간되었는데 이중 조선 후기 가장 널리 읽혀지고 참고 된 예서가 바로 『사례편람(四禮便覽)』이다.

따라서 『사례편람』을 기초로 전통 유교식 상복을 고증제작해보는 것은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삶의 내면적 가치관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며 또한 실리와 실용주의에 의해 간소화된 현대의 상례의식에서 퇴색되어지고 있는 그 본연의 의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전통 상복에 관한 연구는 상복의 조직 원리와 구성 및 구조, 유물조사 등으로 이루어진 Cho(1990)의 연구에 의해 본격적으로 다루어졌으며, 고증제작에 관한 선행연구로 Kim(2006)의 광주지역의 현대 상복과 『사례편람』의 상복제작법을 비교한 연구와 Kim(2014)의 사례복식을 재현한 연구가 있었다. Kim(2006)의 연구에서는 『사례편람』에 나타난 척(尺)을 조선시대에 사용된 포백척(布帛尺)으로 해석하여 실물 제작을 하였다. 그러나 Song & Seo(2012)의 연구에 따르면 포백척은 정세한 작업에는 쓰이질 못했으며 예학생활을 중시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주척(周尺)과 조례기척(造禮器尺)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또한 세종 때 제정된 척도들을 미터법으로 환산해 보면,1척당 주척은 약 20.8cm, 포백척은 약 46.7cm로 포백척과 주척은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상복의 치수를 포백척으로 환산할 경우 화장의 길이가 206cm정도로 산출 되어 착용하기 힘든 매우 광대한 옷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복을 포백척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은 해석상의 오류로 보인다. Kim(2014)의 연구에서는 『사례편람』에서 제시한 사례 복식을 각각 실물제작 하였으나 상례복은 최의(衰衣), 최상(衰裳), 대수장군(大袖長裙)만을 제작하여 남자 상복의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남자의 상복 중 최의(衰衣), 최상(衰裳), 최관(衰冠), 효건(孝巾), 수질(首絰), 요질(腰絰), 교대(絞帶), 행전(行纏) 등을 『사례편람』을 기초로 하여 오복(五服)제도에 따라 고증제작해보고자 한다. 중의(中衣)는 조복(朝服), 제복(祭服) 등의 중단(中單)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사례편람』에서는 심의(深衣)와 그 형태가 같으며 제도는 세속의 중단과 같고 일명 한삼(汗衫)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의 경우 대부분 두루마기의 형태를 띠고 있어 중의는 세속에서 입혀지고 있는 일반적인 포(袍)와 형태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의와 신발인 상구(喪屨), 지팡이인 상장(喪杖)의 제작은 본 연구에서는 제외하였으나 차후 진행되는 연구에서 다루어 상복의 일습(一襲)을 전반적으로 갖추어 보고자 한다.


Ⅱ. 『사례편람』의 배경

Lee(1992)에 따르면 『주자가례』는 고려 말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유교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주자가례』의 수용은 조선에 있어서 사회 윤리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만들었고 고려와 조선의 사회구조를 구분 짓는 분기점이며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Lee(1996)에 의하면 관혼상제에 관한 예서인 『주자가례』는 조선 초부터 왕실과 사대부가는 물론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으나 당시 조선의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이에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보완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러한 관혼상제에 관한 예서들이 많이 저술되었는데 이 중 조선 후기에 편찬된 이재(李縡, 1680~1746)의 『사례편람』은 『주자가례』에 근거하여 각 부분에 고증(考證)을 덧붙이고 쉽게 풀이하면서 실제 행해지는 절차에 맞도록 개편한 대표적인 예서이다.

황필수(黃泌秀), 지송욱(池松旭) 등이 보정하여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을 1900년에 다시 간행하였다.


Ⅲ. 남자 상복의 고증제작
1. 구조 및 필요치수

『사례편람』에는 <Table 2>의 <Fig. 1>, <Fig. 2>와 같이 상복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각 부분의 치수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치수 들이 척촌(尺寸)으로 표시되어 현대에 사용하고 있는 미터법으로 어떻게 환산하느냐에 따라 상복의 크기가 달라질 것이다.

주척(周尺)은 시대에 따라서도 약간씩 변화가 있었다. Kim(2009)의 연구에 따르면 주척은 한국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양전척(量田尺)으로 사용되었으며 신라와 고려시대의 표준양전척은 19.423㎝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 12년 주척의 길이는 20.81㎝이었다고 고증되었다. 이후 홍이섭은 20.66㎝로 양상현은 19.1~21.79㎝로 고증하여 주척의 길이는 20㎝내외로 판단하고 있다. Cho(1990)는 그의 연구에서 조선 및 중국에서 생산되는 삼베의 폭을 감안하여 1척을 23cm로 환산하고 있다.

대략 주척으로 1척이 20cm 내외인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이며 삼베의 폭을 감안하여 계산한 23cm를 기준으로 상복을 고증제작 하고자 한다.

1) 최의(衰衣)

최의는 남자 상복의 상의로서 Cho(1990)에 의하면 최의는 상장례 복제 중 표현성이 가장 큰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이유는 최의에 망자에 대한 슬픔을 상징하는 적(適, 辟領), 최(衰), 부판(負板)의 세 가지 상징물이 부착되기 때문이다. 적은 어깨에 달린 것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슬픔을 상징한다. 최는 애최(哀摧)를 의미하는 것으로 최복의 명칭은 여기서 온 것이다. 이는 눈물받이를 상징하며 심장이 위치한 왼쪽 가슴에 부착하였는데 양쪽 가슴에 달기도 하였다. 또한 오른쪽 가슴에 달기도 하였는데, 이는 고종 대의 의복제도 변용 시 그릇되게 답습되었던 것으로 백삼이 청삼으로 바뀌었듯이 폐슬이 폐흉으로 변하여 왼쪽 가슴에 부착되던 이후의 제도로 보인다. 부판은 등에 짊어진 슬픔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상징물은 참최와 재최에만 부착 하였고 대공, 소공, 시마에는 제거된다. 이 외에 가령(加領), 겁(袷), 임(袵), 대하척(帶下尺) 등이 부착된다. 가령은 최의의 깃으로 활옷의 깃과 그 구성 형태가 유사하다. T자모양이며 가운데를 접어 좌우 양쪽은 앞길의 좌우에 붙이고 뒷부분은 활중(闊中)이라고 하는 사각형으로 파여진 목둘레의 뒷부분에 부착한다. 겁은 가령 속에 들어가는 속 깃으로 가령과 활중의 크기가 같아 봉제하기 어려우므로 덧대는 것이다. 임(袵)은 제비꼬리 형상으로 양 쪽 겨드랑이 밑에 부착되는데 최상의 벌어진 옆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대하척은 몸판의 길이가 짧아 몸판 아래 부착하는 것이다.

각각의 치수는 다음의 <Table 1>과 같다.

<Table 1> 
Size of Choe-eui
part cheok. chon cm part cheok. chon cm
B/4 2. 2 50.6 C.B.W.L 2. 2 50.6
Hwajang 4. 4 101.2 armhole 2. 2 50.6
Godae 0. 8 18.4 collar 4. 0 x 1. 6 9.2 x 36.8
Jeok 0. 8 x 0. 8 18.4 x 18.4 sleeve wrist 2 27.6
Daehacheok 0 x 8. 8 23 x 202.4 Im widths of cloth x 2. 5 widths of cloth x 57.5
Bupan 8 x 1. 8 41.4 x 41.4 Choe 0. 6 x 0. 4 13.8 x9.2
Hwaljung 0. 8 x 0. 8 18.4 x 18.4 seam allowance 0. 1 2.3

『주자가례』에 따르면 의신(길), 소매, 임의 제도에 있어서 베 1폭을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사례편람』 관례(冠禮)편에 따르면 심의(深衣)의 제작 시 베1폭을 사용하는데 의신의 4폭 전체 너비가 시접을 포함하여 8척 8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상복이 구체적으로 성립하던 시기의 중국에서 생산되던 삼베의 폭이 2척 2촌이었음을 뜻하며 현대의 치수로 약 50cm전후였음을 말해준다. <Fig. 1>, <Fig. 2>를 살펴보면 의신과 소매에 이음선이 없다. 그러나 조선에서 생산되던 삼베의 폭은 좁아서 『주자가례』의 도식대로 제작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분량을 이어서 제작할 수밖에 없었고 『사례편람』에서도 이를 인식하여 옛날에 생산된 베의 폭은 2척 2촌인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베는 폭이 좁아 반드시 이어서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시된 치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의신도 폭을 이어야 되는데 폭을 잇지 않고 그대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점은 현재 남아 있는 최의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임의 경우에도 삼베의 폭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실물 제작품에서는 너비가 35cm 전후로 좁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부판은 크기가 사방 1척 8촌(41.4cm)로 정사각형의 모양이지만 삼베의 폭이 좁아 직사각형으로 재단하여 부착한다.

<Table 2> 
Image of Choe-eui
Choe-eui

<Fig. 1> Choe-Eui Jeondo
(Sa-ryae-pyeonram [四禮便覽])

<Fig. 2> Choe-eui Hudo
(Sa-ryae-pyeonram [四禮便覽])

<Fig. 3> Front of Choe-eui(1/27 scale)
(Illustrated by author, 2016)

<Fig. 4> Back of Choe-eui(1/27 scale)
(Illustrated by author, 2016)

이를 치수의 비율에 맞게 도식화로 그리면 <Fig. 3>, <Fig. 4>와 같다. 『사례편람』에 나온 최의도(<Fig. 1>, <Fig. 2>)는 임의 길이가 짧게 표현되어 있어 비율적인 면에서 실제 제작 도식화와 비교해보면 <Table 2>와 같이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사례편람』의 도식만을 참고하여 제작한다면 각 부분의 비율이 실제 사이즈와 달라 오류가 생길 우려가 있다. 또한 <Fig. 2>의 최의후도를 살펴보면 임에 사선이 그려져 있어 자칫 최의 양쪽 진동 밑에 임이 각각 한 짝 씩만 부착되어있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임의 부분적인 모양을 설명하려고한 의도로 보인다.

또한 Cho(1990)의 연구를 참조하여 전ㆍ후와 부속 부분도 함께 볼 수 있는 최의의 전개도를 그리면 <Fig. 5>와 같다.


<Fig. 5> 
Planar Figure of Choe-eui

(Illustrated by author, 2016)



2) 최상(衰裳)

최상은 조복과 제복등의 예복에 착용하는 상(裳)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앞 3폭, 뒤 4폭 총 7폭으로 구성된다. 각 폭마다 3개의 주름을 잡는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가운데를 비우고 안쪽으로 마주보는 맞주름 두 개를 잡아 3개의 주름처럼 보이게 제작한다. 최상의 길이는 착용자의 키에 따라 적당히 한다. 『사례편람』에 나온 최상도와 실제 제작 최상의 도식화를 비교하면 <Table 3>과 같다.

<Table 3> 
Image of Choesang
Image of Choesang

<Fig. 6> Choesangdo
(Sa-rye-pyenram [四禮便覽])

<Fig. 7> Choesang
(Illustrated by author, 2016)

3) 최관(衰冠)

최관은 예관(禮冠)으로 양관(梁冠)과 제관(祭冠)에서 보이는 줄이 표현되어 있다. 오복이 모두 세로로 3개의 주름(三辟積, 三梁)이 잡혀 있으며 줄의 방향이 참최, 재최, 대공의 경우 오른쪽으로 향하며 소공, 시마의 경우 왼쪽으로 향하고 있다. Cho(1990)는 최관의 형태에 관하여 “관(冠)의 꼭대기를 반으로 접은 후 접은 선이 똑바로 상향(上向)하도록 썼으므로 굴건(屈巾)이라고도 하였는데 다산(茶山)은 관(冠)은 응당 둥근 모양 그대로 써야하며 꺾어서 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라고 다산의 문장을 인용하였다. 이는 최관의 윗부분이 접힌 꺾인 형태와 둥근 형태가 함께 통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관을 고정하는 목적으로 무(武)가 달리는데 삼끈을 꼬아 만들며 최관의 아랫부분을 통과하여 머리에 두르고 남는 끈을 귀 위치에서 늘어뜨려서 영(纓)을 만들고 이를 턱 아래에서 묶어 최관을 머리에 고정시킨다. 『사례편람』에 나타난 도식은 <Fig. 8>, <Fig. 9>와 같다.

<Table 4> 
Image of Choe-gwan Do & Sujil Do
Choe-gwan Do & Sujil Do

<Fig. 8> Chamchoe Choe-gwan

<Fig. 9> Jaechoe Choe-gwan

<Fig. 10> Chamchoe Sujil

<Fig. 11> Jaechoe Sujil
(Sa-ryae-pyeonram [四禮便覽])

최관은 폭이 5촌 2푼 반 정도 되는 심지에 베를 싸서 만들며 길이는 머리 크기에 따라서 머리 위를 충분히 씌울 수 있는 길이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 위에 3개의 주름을 잡아 봉제한다고 되어있다. 5촌 2푼 반은 12.075cm로 약 12cm이다. 최관은 효건 위에 착용하기 때문에 효건의 높이인 30~35cm보다 높아야 하므로 양 끝에 접히는 부분을 포함하여 약 90~100cm로 한다.

최관을 고정하는 목적으로 무(武)가 달리는데 삼끈을 꼬아 만들며 최관의 아랫부분을 통과하여 머리에 두르고 남는 끈을 귀 위치에서 늘어뜨려 영(纓)을 만들고 이를 턱 아래에서 묶어 최관을 머리에 고정시킨다.

4) 효건(孝巾)

효건은 내관(內冠)의 역할을 하는데 함께 입는 최복 보다 고운 삼베를 사용하여 제작한다. 효건은 삼베 한 폭을 사용하여 제작하기 때문에 효건의 높이는 삼베의 폭인 30~35cm가 된다. 둘레는 머리둘레를 감안 하여 50~55cm로 한다.

5) 수질(首絰)

수질은 최관 위에 두르는 일종의 머리띠로서 두 가닥의 삼끈을 꼬아 만든다. 오복에 따라 그 굵기를 달리하여 만드는데 참최의 경우 9촌이며 그 다음 단계로 갈수록 5분의 1씩 줄어든다. 『사례편람』에 나타난 도식은 <Fig. 10>, <Fig. 11>과 같다. 수질의 오복에 따른 단계별 둘레는 <Table 5>와 같다.

<Table 5> 
Diameter of Sujil & Yojil by Obok
Item Sujil Yojil
Obok chon cm chon cm
Chamchoe 9 20.7 7.2 16.56
Jaechoe 7.2 16.56 5.9 13.57
Daegong 5.9 13.57 4.6 10.58
Sogong 4.6 10.58 3.5 8.05
Sima 3.5 8.05 2.8 6.44

6) 요질(腰絰)

요질은 대대(大帶)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수질과 마찬가지로 삼끈 두 가닥을 꼬아 제작한다. 참최의 요질은 그 굵기를 7촌 2푼으로 하며 그 다음 단계부터는 5분의 1씩 줄어든다. 요질은 허리에 묶어 양끝을 늘어뜨리며 각각의 끝에 산수(散垂)라고 하는 3척 길이의 뿌리가닥을 부착한다. 50세 이상인 사람, 부인들, 소공이하는 산수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질의 도식은 <Fig. 12>, <Fig. 13>과 같으며 오복에 따른 단계별 둘레는 <Table 6>과 같다.

<Table 6> 
Image of Yojil Do & Gyodae Do
Yojil Do & Gyodae Do

<Fig. 12> Chamchoe Yojil

<Fig. 13> Jaechoe Yojil

<Fig. 14> Chamchoe Gyodae

<Fig. 15> Jaechoe Gyodae
(Sa-ryae-pyeonram [四禮便覽])

7) 교대(絞帶)

교대는 혁대(革帶)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요질 아래에 착용하며 혁대처럼 한쪽을 접어 고리를 만들어 묶는다. 참최의 경우 삼끈을 고아 제작하고 재최 이하는 너비 4촌의 베로 제작하며 다음단계로 갈수록 그 폭을 조금씩 줄인다. 교대의 도식은 <Fig. 14>, <Fig. 15>와 같다.

8) 행전(行纏)

행전은 일반적인 남자 한복에서 보여 지는 형태와 같으며 삼베로 제작한다. Cho(1990)의 연구에 따르면 효건과 함께 상복의 국속화된 요소로 보고 있다.

2. 재료

Cho(1990)의 연구에 따르면 상복은 절제(節制)와 문식(文飾)의 두 가지 효용을 겸비하고 있으며 문식은 내적인 슬픔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며 절제는 이러한 감정의 표현방법이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함을 뜻한다고 하고 있다.

Kong(2013)에 의하면 상복이란 망자를 애도하기 위하여 착용하는 복식과 장식을 말한다. 상복제도는 산자와 망자의 관계 즉 친소(親疎), 원근(遠近)에 따라 제정한 일련의 엄격한 상장등급 제도이다. 따라서 유가에서는 망자와 복자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슬픔의 크기를 다르게 상정하였고 그에 따라 상복의 형태를 다르게 구분하였다. 슬픔의 크기에 따라 참최(斬衰), 재최(齋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의 다섯 단계로 상복을 구분하였는데 이를 오복제도(五服制度)라 한다.

오복제도는 망자와 복자 사이의 관계에 따라 상복의 형태, 제작방법, 상기, 소재 등에서 차등을 둔 것이다. 이러한 단계를 구분 짓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것이 상복의 재료이다. 참최 부터 시마 까지 재료의 거침과 부드러움에 차등을 두어 제일 거친 삼베로 참최를, 제일 고운 삼베로 시마를 제작하였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참최는 3승(升), 재최는 4ㆍ5ㆍ6승(升), 대공은 7ㆍ8ㆍ9승(升), 소공은 11ㆍ12ㆍ13승(升), 그리고 시마는 15승(升)의 삼베를 사용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사례편람』에서는 삼베의 정련 유무와 거친 정도에 따라 구분하였는데 참최는 정련하지 않은 가장 거친 극추생포(極麤生布), 재최는 정련하지 않은 그 다음으로 거친 차등추생포(次等麤生布), 대공은 정련한 그 다음으로 거친 초숙포(稍熟布), 소공은 정련한 부드러운 초숙세포(稍熟細布), 시마는 정련한 그 다음으로 부드러운 세숙포(細熟布)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오복에 따라 달리 사용된 삼베의 차이를 표로 정리하면 <Table 7>과 같다.

<Table 7> 
Classification of Coarse Hemp Which the Mourning Dress’s Material
Obok Yegi[禮記] Sa-ryae-pyeonram[四禮便覽]
Chamchoe 3 seung Geuk-chu-saengpo[極麤生布]
Jaechoe 4ㆍ5ㆍ6 seung Cha-deung-chu-saengpo[次等麤生布]
Daegong 7ㆍ8ㆍ9 seung Cho-sukpo[稍熟布)
Sogong 11ㆍ12ㆍ13 seung Cho-suk-sepo[稍熟細布]
Sima 15 seung Se-sukpo[細熟布)

『예기』에서는 승수의 차이를 제시하고 있지만 『사례편람』에서는 삼베의 정련 유무와 거친 정도에 의한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Cho(1990)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과 조선의 기후, 풍토 등 지리적 조건이 달라 마섬유의 재배, 제직 등의 제조과정의 차이에 의해 중국의 승수와 조선의 승수가 꼭 같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1승은 경사 80올을 뜻하는데 3승 삼베의 경우 경사 240올로 제직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생산된 삼베의 경우 조선에서 생산된 것보다 폭이 넓었는데 『사례편람』에서는 원래 삼베의 폭이 2자 2치 이었으나 우리나라의 삼베는 폭이 너무 좁아 이어 붙여 사용해야 한다는 언급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Sim & Keum(2016)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삼베는 주로 35~38cm의 폭을 이루고 있으며 Park(2010)의 연구에 의하면 출토된 조선시대 마직물의 너비는 평균 32~34.5cm로 조사되었다.

현재 이처럼 다양한 승수의 삼베는 제작되지 않고 있으며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삼베는 대공에 해당하는 8ㆍ9승포가 대부분이며 안동, 보성, 남해 등지에서 10승 이상의 삼베가 제작되기는 하지만 굉장히 고가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참최용 삼베로 의류 제작용이 아닌 3승에 해당하는 <Fig. 16>의 거친 삼베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재최용 삼베는 재고로 남아 있던 <Fig. 17>의 경상남도 남해(南海)산 6승 삼베를 구입할 수 있었다. 대공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Fig. 18>의 8승포를 구입했으며 소공과 시마의 경우 11승에서 15승에 해당하는 곱고 부드러운 삼베가 굉장히 고가였기 때문에 그 보다는 저렴한 <Fig. 19>, <Fig. 20>의 모시로 대체 하여 제작하였다. 모시는 저마로 제직된 마섬유로 삼베를 대체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복제도에 따른 전통 남자 수의를 고증제작하기 위한 삼베의 샘플은 <Table 8>과 같다.

<Table 8> 
Material Sample of Obok
Material Sample of Sangbok

<Fig. 16> Chamchoe, 3 seung po

<Fig. 17> Jaechoe, 6 seung po

<Fig. 18> Daegong, 8 seung po

<Fig. 19> Sogong, 11 seung po

<Fig. 20> Sima, 15 seung po
(photographed by author, 2016)

3. 마름질

각 구성의 길이는 정해진 치수를 적용하지만 너비는 삼베의 폭에 따라 결정된다. 각각의 삼베 폭이 똑같지 않으므로 오복의 크기가 약간씩 달라질 수 있다.(<Fig. 21>)


<Fig. 21> 
Cut Out a Pattern of Choe-eui and Choe-sang
(Illustrated by author, 2016)


상복의 마름질시 원단의 온폭을 다 사용하며 곡선 부분이 없어 <Fig. 21>에서 빗금친 부분만큼만 자투리가 생기며 남은 자투리도 모두 상복에 부착되는 각종 끈이나 고름으로 사용되어진다. 이러한 마름질법은 현대 패션에서 지향하고 있는 친환경트렌드 중 하나인 제로웨이스트(zero waste)를 일찍이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봉제

상복은 오복제도에 따라 봉제방법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둔다. 『의례』에 의하면 참최를 가리켜 참최상(斬衰裳)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참(斬)이라 함은 밑단을 풀어 놓은 것, 즉 꿰매지 않는 것을 의미 하여 참최는 밑단을 정리하지 않는 봉제 특징을 갖고 있다. 재최의 재(齋)는 상복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지런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상복의 밑단을 꿰매어 정리하였음을 뜻한다.『의례』에 따르면 대공은 만든 솜씨가 거칠고 성글다고 하였으며 소공은 대공에 비하여 다듬는 것이 곱고 세밀하다고 되어 있다. 공(功)이 튼튼하거나 정교함의 의미를 갖고 있으니 대공은 소공에 비하여 만든 솜씨와 재료가 덜 정교함을 뜻한다. 시마의 시(緦)는 뜻을 나타내는 실사(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思(사→시)가 합(合)하여 이루어진 한자로 가는 삼실로 짠 고운 베를 뜻한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참최와 재최는 제작 방법에서, 대공과 소공, 시마는 재료의 구분에서 그 명칭이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참최의 최의와 최상은 오복이 모두 가장자리와 밑단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반면 재최 이하부터는 최상의 밑단을 모두 호아서 정리한다. 시접의 방향은 최의는 모두 바깥쪽을 향하고 최상은 모두 안쪽을 향한다. Chung(2003)의 연구에 의하면 이를 내외의 구분을 위한 바느질법으로 추론하며 시접의 방향을 바깥으로 꺽은 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을, 시접의 방향을 안으로 꺽은 것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안으로 가린다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상의인 최의는 오복의 다섯 종류 모두 시접의 방향을 바깥쪽으로 두는 반면 하의인 최상은 모두 안쪽으로 둔다. 이는 상의는 하늘인 아버지를 의미하고 하의는 땅인 어머니를 의미하는 것으로 상의와 하의의 시접의 방향을 다르게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례편람』에 정확한 바느질법과 시접의 방향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Cho(1990)의 연구에 의하면 여러 상복유물의 바느질법과 시접의 방향 등을 분석한 결과, 기본적인 바느질법으로 성근 홈질이 주로 쓰였으며 부분적으로 휘감치기의 바느질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등솔과 진동의 경우 주로 가름솔이었다. 시접의 분량은 유물마다 0.5~2.2cm 정도의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사례편람』에는 1촌, 약 2.3cm로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바느질법으로 약 1cm간격의 홈질을 사용하였으며 시접의 분량은 2.3cm로 두었다. 등솔과 진동의 시접 방향은 가름솔로 하였다.

1) 최의

먼저 길이가 4척 6촌(101.2cm)인 베 두 폭의 중심을 접으면 접힌 부분이 어깨 중심선이 되고 각각 좌ㆍ우 길이 된다. 어깨 중심에서 각각 4촌(9.2cm)씩 잘라 이를 양쪽어깨 쪽으로 접는데 이것이 적(벽령)이 되고 잘라져 없어진 부분이 <Table 9>의 <Fig. 22>의 활중(闊中)으로 활옷의 고대와 그 구성이 같다. 대공 이하부터는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을 잘라 버린다. 뒤 중심을 연결한 후 소매를 단다. 소매는 길이 4척6촌(101.2cm)인 베 두 폭의 중심을 접어 길의 좌ㆍ우에 바느질하여 붙이고, 배래를 바느질 하여 붙이고 소매 끝 아래에 1척(23cm)을 바느질 하여 1척2촌(27.6cm)의 수구를 만든다.

<Table 9> 
Image of Hwaljung & Im
Diagram of Hwaljung & Im

<Fig. 22> Hwaljung

<Fig. 23> Im
(Illustrated by author, 2016)

임은 각각 3척5촌(80.5cm)의 베 두 폭으로 만드는데 재단법은 <Table 9>의 <Fig. 23>과 같다. 오른쪽은 위에서 1척(23cm)을 내려와 안쪽으로 6촌(13.8cm)을 들어가고 왼쪽은 아래쪽에서 1척을 올라가 안쪽으로 6촌을 들어가 서로를 사선으로 이은 후 잘라 각각 넓은 쪽을 위쪽으로 향하게 겹치면 제비꼬리 모양이 된다. 이를 옷의 양쪽 겨드랑 밑에 부착 하는데 참최는 앞자락이 뒷자락을 덮고, 재최 이하는 뒷자락이 앞자락을 덮게 한다. 최는 길이 6촌(13.8cm), 너비 4촌(9.2cm)의 직사각형으로 의(衣)의 앞쪽 가슴에 부착하는데 대공 이하는 부착하지 않는다. 부판(負版)은 사방 1척 8치(41.4cm) 정사각형으로 등 쪽의 깃 아랫부분에 바느질하여 늘어뜨리는데 역시 대공이하는 부착하지 않는다. 의계(衣繫)는 고름으로 4개를 부착하는데 2개는 각각 몸판의 앞 중심선 허리부분에 달고 나머지 2개 중 1개는 바깥쪽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 달고 1개는 안쪽에서 왼쪽 겨드랑이 밑에 달아 서로 묶을 수 있게 한다.

2) 최상

최상의 재료는 최의와 동일한 것으로 베 7폭을 사용하는데 길이는 입는 사람의 키에 맞게 하고 앞은 3폭, 뒤는 4폭을 바느질 한다. 솔기 마다 좌우에 각 1촌씩 시접을 두고 폭을 연결한다. 폭마다 주름을 3개 잡는다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가운데를 비워 두고 맞주름 2개를 잡는 것이다. 이렇게 주름잡은 앞 3폭, 뒤 4폭의 치마를 약간 겹쳐 허리말기에 단다. 양 쪽에 허리끈을 다는데 4폭이 달린 쪽에 짧은 끈을 달고 3폭이 달린 쪽에 긴 끈을 달아 긴 끈이 허리를 한번 둘러서 짧은 끈과 묶는다.

3) 최관

최관은 폭이 5촌 2푼 반(12.075cm) 정도 되는 심지에 베를 싸서 만들며 길이는 머리 크기에 따라서 머리 위를 충분히 씌울 수 있는 길이로 만든다고 되어 있으며 이 위에 3개의 주름을 잡아 봉제한다고 되어 있다. 최관은 효건 위에 62a착ø용하기 때문에 효건의 높이인 30~35cm보다 높아야 하므로 양 끝에 접히는 부분을 포함하여 약 90~100cm 길이로 한다. 한지를 이용하여 12cm폭의 배접지를 만들고 그 위에 최의의 삼베보다 고운 삼베를 배접하여 붙인다. 여기에 3줄의 주름을 잡는데 『사례편람』에서는 폭을 7로 나누어 한 칸씩 건너 주름을 잡아 3줄의 주름을 잡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참최, 재최, 대공의 최관 주름은 오른쪽으로 향하게 잡고 소공, 시마의 최관 주름은 왼쪽으로 향하게 잡는다. 이러한 주름의 방향은 Choi & Lee(2000)의 연구에 따르면 음양체계의 영향으로 좌측은 양(陽)과 남자를 뜻하며 우측은 음(陰)과 여자를 뜻하는데서 파생한 것으로 좌측이 보다 길한 것으로 보고 있다.

4) 효건

효건은 삼베 한 폭을 사용하여 제작하기 때문에 효건의 높이는 삼베의 폭인 30~35cm가 된다. 먼저 폭의 끝부분을 봉제하여 중심선을 만들고 이중심선이 뒤로 오게 한다. 윗부분의 폭을 4등분하여 양끝이 각각 중심으로 오게 접어 봉제한 후 뒤집어 완성한다.

4) 수질

수질은 최관 위에 쓰는 것으로서 참최의 경우는 씨 있는 삼(苴麻: 有子麻)으로 만들고 재최 이하는 씨 없는 삼(枲麻: 無子麻)으로 만든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 이를 구분하여 재료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짚과 삼껍질을 이용하여 만든다.

참최 수질의 둘레(굵기)는 9촌(20.7cm)이며, 재최 이하는 5분의 1씩 줄어든다.

5) 요질

참최의 요질은 수질과 같이 씨 있는 삼으로 만든다고 되어 있으나 역시 이를 구할 수 없어 수질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짚과 삼껍질로 제작한다. 굵기는 수질보다 5분의 1을 줄인 7촌 2푼으로 한다고 하였으니 약 16.56cm이다. 재최 이하는 여기에서 5분의 1씩 줄어든다.

6) 교대

참최의 교대는 씨 있는 삼을 사용하며 굵기는 요질보다 줄어든 5촌 7푼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역시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삼껍질을 이용하여 제작하며 굵기는 약 13.11cm이다.

재최 이하의 교대는 삼베로 제작한다. 재최의 교대(絞帶)는 너비 9.2cm의 베를 호아 제작한다. 혁대처럼 한쪽에 고리를 만들어 다른 쪽을 여기에 묶는다. 베의 폭은 대공 이하로 차차 좁아지게 제작한다.

7) 행전

행전은 베 한 폭을 써서 만드는데 행전의 길이가 삼베의 너비가 된다. 홑으로 만들었으며 일반적인 행전을 제작하는 것과 같다.

<Table 10>의 <Fig. 24>는 전통 상례에 관한 시연회에서 오복을 실제 착용한 모습으로 중의, 상장, 상구를 제외하고는 본 연구자에 의해 제작되었다. <Fig. 25>, <Fig. 26>은 최의와 최상의 오복에 따른 다섯 가지 종류를 함께 촬영한 것으로 상복의 재료에 따른 차이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상복의 재료에 따른 차이가 상복을 착용한 복자와 망자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며 그에 따른 슬픔의 크기차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able 10> 
Image of Obok
Image of Sangbok

<Fig. 24> Image of a demonstration of wearing Obok

<Fig. 25> Choe-eui of Obok

<Fig. 26> Choesang of Obok
(Illustrated by author, 2016)


Ⅲ. 결론

조선 후기에 편찬된 『사례편람』은 『주자가례』를 그 근거로 하여 이재가 각 부분에 설명을 덧붙이고 당시 조선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 한 대표적 예서로서 실제 그 의례를 행함에 있어 가장 널리 사용되었고 다른 예서에도 많이 인용되었다. 그러므로 『사례편람』에는 당시 조선 유학자들의 의례에 관한 유교적 가치관이 나타나 있다. 지금까지 『사례편람』을 기초로 하여 오복제도에 따른 남자 상복을 고증제작해 본 결과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1. 『사례편람』에서는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오복제도에 따른 삼베의 승수를 정조(精粗)의 차이로 대체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급박하고 슬픔이 극에 다른 상중에 상복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겪어야 할 어려움을 해소시켜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복식 유물의 고증제작시 가장 먼저 겪는 어려움은 원단의 수급 문제일 것이다. 유물의 형태와 구성은 물론 원단의 고증도 당연하나 원단을 고증하여 제직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어 일일이 원단을 고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도 고민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삼베의 승수단계를 정조단계로 대체하여 오복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무조건적인 격식의 추구가 본질을 흐릴 것을 염려하여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2. 당시 조선과 중국에서 생산된 삼베 폭의 차이로 인하여 『사례편람』에서는 상복을 여러 폭을 이어서 제작할 것을 추천하고 있다. 이에 소매를 이어서 제작하였는데 이는 보통 저고리나 포 등에서 소매를 제작하는 방법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나 의신의 경우, 한 폭의 삼베를 사용하여 의신의 폭이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상복에 비해 다소 좁은데 이는 한 폭을 이용하여 제작하는 원칙에 따른 것으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상복유물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의신까지 여러 폭을 이어서 상복을 제작할 경우 자칫 장식적으로 보일까 하는 염려에서 기인 한 것으로 사료된다.

3. 상복의 각 부분의 패턴은 모두 직선 형태로 원단의 온폭을 사용하며 재단할 시 버려지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패션 트렌드 중 하나인 친환경 콘셉트와 부합되는 면으로 볼 수 있다.

Kong(2013)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상복의 모습은 그 유래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2000여 년 전에 완성된 이러한 상복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재해석이 필요하거나 그대로 실행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이를 어떻게 조선의 상황에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있었고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실증적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우리사회는 산업화를 겪어오면서 실용주의를 신봉한 나머지 전통사회와는 거의 단절되었으며 전통문화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삶속에 있지 못하고 보존해야 할 존재가 되었다. 상례의 전통 또한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편리함과 실용성에 밀려 간소화되었고 그 속에 품고 있는 ‘효(孝)’의 가치마저 사라지고 있다. 물론 과거 유교사회의 상복을 현대 우리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만이 그 가치를 구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복이 지나고 있는 ‘효’에 대한 유교적 가치만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전통 상례와 상복에 대한 관심이 환기 될 것을 기대하며 아울러 현대 사회에 어울리면서도 그 가치를 담고 있는 새로운 현대적 상복에 관한 연구 또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산학협력선도대학육성사업의 LINC-GRP연구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게재되었습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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