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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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7 , No. 8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7, No. 8, pp. 114-132
Abbreviation: 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Dec 2017
Received 11 Oct 2017 Revised 24 Nov 2017 Accepted 28 Nov 2017
DOI: https://doi.org/10.7233/jksc.2017.67.8.114

조선시대 여인의 장삼에 대한 연구
김소현
배화여자대학교 패션산업과 교수

Study of Women’s Jangsam in the Joseon Dynasty
Soh Hyeon Kim
Professor, Dept. of Fashion Industry, Baewha Women’s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Soh Hyeon Kim, e-mail: shekim1004@hanmail.net


Abstract

In this study we consider the literature study and excavated relics concerning the Jangsam, an important female robe in the Joseon dynasty and how it succeeded to our own costume tradition. We also check the case of wearing, and to define the various names by which the robes are recognized. Jangsam was identified as the Daesu, Baeja, Bonguk Mongdueui, and Haleui, etc. Daesu, also called the Bonguk Jangsam, was a high-class garments, enough to be defined as the mourning robe of a female officer under the queen. Additionally, the Jangsam was also called as Bonjo Myeongbok and worn as a ceremonial robe of the queen with the Paeoks. The double-layered Jangsam with the Hyungbaes was only worn by the queen and crown princess. The double-layered robe without the Hyungbaes was worn by the queen to other ladies. The Baeja, mourning robe of a female officer under the six high officer, that is, Bonguk Mongdueui, was called the Jangsam, and its morphological feature is characterized by daegum with a sheer adjust, unlike the Daesu. There is also a case where it is recorded as a Haleui, among the costumes of female officers, and worn as a Jangsam, so we can confirm that the Jangsam is recognized as an important robe. The red Jangsam of the bride is the representative wedding robe, and leads to the tradition of Hwarot continuously up to now. In addition, it was used as mourning clothes, robe for burial, etc., in funeral rites. Mongdueui was the representative clothes for female performance artists. For important royal events such as royal celebrations, royal dinners, and royal banquets, etc., female officer wore Jangsam depending on their duty and position to make the ceremony magnificent.


Keywords: Baeja, Daesu, Haleui, Mongdueui, Jangsam, Joseon
키워드: 배자, 대수, 할의, 몽두의, 장삼, 조선

Ⅰ. 머리말

조선시대 여인의 예복은 여러 가지가 있다. 왕실의 적통을 잇는 여인이 입는 법복으로서의 적의, 명부의 혼례복인 홍장삼, 명복으로서의 원삼, 노의, 할의(割衣), 활옷 등 다양한 예복이 존재했다. 하지만 국말에 대부분의 예복이 원삼 유형으로 일원화된 까닭에 각 예복의 이름만 남고 그 특징을 확인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동안 여러 선행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확보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미진한 채 남아있다. 남자의 복식이 의례와 신분에 따라 제도화되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여자의 경우, 성복(盛服), 예복(禮服) 등으로 기록되어 구체적인 의복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의례를 묘사한 반차도, 행사도병 등에 명부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 앉은 자리만 그려놓아서 궁금증을 더한다. 또한 명칭은 같지만 신분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하는 의복이 있어서 혼란을 초래한다.

그 가운데 장삼은 개념을 정리하기가 더욱 모호하다. 왕실여인으로부터 반가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에서 착용하던 여자예복이지만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장삼이라는 동일한 명칭을 가졌지만 왕실여인에게는 명복으로, 시녀에게는 할의 또는 몽두의 등으로 착용자와 상황에 따라 이칭을 갖고 있으며 소재에도 구별이 있다. 또한 본국 장삼이라는 기록도 있어서 장삼의 갈래가 한가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에 장삼의 종류, 특징, 용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조선시대 여성 예복으로서의 장삼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한다. 무복(巫服), 승복(僧服), 도사복(道士服) 등의 장삼은 논외로 한다.

여성예복에 대한 선행연구(Chang, 2014; Cho, 2012; Kim 1984; Kim 2010; Kim, 2013; Kwon, 2009; Lee, 1997; Lee, 2003; Lee, 2006; Lee, 2016; Lim, 2012; Park 2005; Song 2009)를 검토하고, 조선왕실의 여성 예복이 총망라되어 있는 역대 『가례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등을 살피며, 등록류, 발기류, 여러 가지 전례서(典禮書)에 나타난 착용사례를 확인하고, 출토유물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Ⅱ. 장삼의 종류와 특징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여자예복이 노의, 장삼, 몽두리였음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노의는 4품 이상 정처의 예복이고, 장삼은 5품 이하 정처의 예복이며, 궁녀, 상기(上妓)[무녀(舞女)], 서인(庶人)의 부녀, 여종, 천민은 몽두리를 입었다”(Taejong sillok[태종실록], 14 June 12Year). 한편 상을 당하여 입는 상복(喪服)에 관한 기록에는 동일한 의복에 대한 다른 명칭이 보인다. 세종 오례 흉례 의식 복제에는 “왕비, 대비, 숙빈의 상복인 대수(大袖)를 본국 장삼이라고 하고, 궁주, 옹주, 각전시녀의 상복인 배자(背子)는 본국 몽두의(蒙頭衣)”라고 하여서(Sejongsillok[세종실록], vol. 134, Bokje[복제]) 장삼과 몽두의를 구별하는 한편 장삼과 몽두의가 중국에서 전래한 것이 아님을 기록하고 있다. 의관(衣冠)과 예도(禮度)를 중국 제도에 따랐지만 여자의 복식은 고래의 전통을 따랐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Taejongsillok[태종실록], 14 June 12Year).

정미년(1848)에 치러진 헌종과 후궁 경빈의 가례를 기록한 『정미가례일기』에는 기행내인의 복식을 몽도리로 기록하고 있으나 동일한 기록의 한문본인 『헌종 경빈김씨 순화궁 가례시 절차(憲宗慶嬪金氏順和宮嘉禮時節次)』에는 홍장삼, 황장삼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대 『가례도감의궤』에도 기행내인의 복식을 장삼으로 기록하여서 동일한 의복에 대한 이명(異名)을 보여준다(Kim, 2009, p. 106).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대수, 장삼, 배자, 몽두리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며 신분에 따라 소재로 구별하고 명칭에 차이를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 장삼

우리 고유의 복식전통을 계승한 장삼은 조선시대의 중요한 여성예복이다. 신분에 따라 착용하는 예복에 구별을 두는 것은 태종이래로 계속되었다. 왕실 혼례에는 흉배겹장삼, 겹장삼 등을 마련했다. 흉배겹장삼은 왕비와 세자빈에게만 해당되는 옷으로 적의, 노의에 버금가는 예복이고, 숙의, 군부인, 공주를 위해서는 흉배가 달리지 않은 겹장삼을 준비했다. 신분에 따라 흉배의 유무로 구별을 둔 것이다. Regulation of royal family costume[상방정례](1750, In[人])에 나타난 신분별 겹장삼의 소요량을 정리한 <Table 1>에서 보면 형태 자체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Table 1> 
Requirements of Jangsam in regulation of royal family costume[尙方定例]
kinds of
Jangsam
queen crown princess concubine wife of prince princess
doublelayered
Jangsam
with the
Hyungbaes
[胸背裌
長衫]
outer
fabric
daehong hyangjik
[大紅鄕職]
1roll[匹]
daehong hyangjik
20.5ruler
- - -
lining daehong silk
[大紅紬] 1roll
blue cho [藍綃]
21ruler
cuff white twill
[白無紋綾]
3.6ruler[尺]
white twill
3.6ruler
collar white twill
length 1.5ruler
width 0.2ruler
white twill
length 1.5ruler
width 1.5ruler
(Hyungbae) daehong silk thread
12ryang [兩]
blackish blue silk
thread
12ryang
thick goldpaper
[厚貼金]
1bundle [束]
thick goldpaper
1bundle
threads daehong silk thread
0.16ryang
daehong silk thread
0.08ryang
blue silk thread
0.08 ryang
doublelayered
Jangsam
[裌長衫]
outer
fabric
- - daehong gwangjeok
[大紅廣的] 1roll
daehong gwangjeok
1roll
daehong gwangjeok
1roll
lining daehong jeongju
[大紅鼎紬]
32.5ruler
daehong suju
[大紅水紬] 1roll
daehong jungju 1roll
cuff white twill
4.7ruler
white twill
3.6ruler
white twill
3.6ruler
collar white twill
length1.5ruler
width0.2ruler
white twill
length1.5ruler
width0.2ruler
white twill
length1.5ruler
width0.2ruler
(Hyungbae) - - -
threads daehong silk thread
0.2ryang
daehong silk thread
0.5ryang
daehong silk thread
0.16ryang

세종 15년에 “양로연을 할 때 품계가 있는 조정관원의 아내는 장삼을 입고, 일반부인은 장삼을 제외한 짧고 편한 옷을 입고 들어와 참예하는 것을 허락하라”고 했으며(Sejongsillok[세종실록], 29 August, 15Year), 광해 2년에는 “명부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은 장삼을 입고, 머리는 수식(首飾)을 해야 하나 기일이 촉박하여 형편상 구비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임인년 가례 때에 행했던 예에 따라 양이엄에 당의를 입고 입시하도록 하라”고 했다(Gwanghaegunilki[광해군일기], 7 May 2Year). 이들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 장삼은 명부 여부를 구분하는 의복이었다.

『세종실록』과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Fig. 1>과 <Fig. 2>의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1605년 4월에 서병부원군 한준겸(1557~1627)의 제의로 70세 이상 노모를 모시고 있는 13명이 계를 결성하여 노모[대부인]를 모시고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선조는 특명을 내려 팔도에 연수(宴需)를 보조하게하고 장흥동의 갑제(甲第-잘지은집)[혹은 삼청동의 공해(公廨)-관아)에서 경수연(慶壽宴)을 열도록 했는데 이 잔치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 바로 <선묘조제재경수연도>이다(Park, J. H. & Lee, Y. S. & Yang, B. K., 2005, pp. 120-131).


<Fig. 1> 
Banquet for the aged mothers of ministers at king Seonjo’s court

(Korea University Museum, 2001, p. 19)




<Fig. 2> 
Banquet for the aged mothers of ministers at king Seonjo’s court

(Park1 et al., 2005, p. 136)



<Fig. 1>과 <Fig. 2>는 각각 고려대학교 소장본과 장서각 소장본 <선묘조제재경수연도>로서 자손들이 당(堂)에 올라 대부인에게 배례 헌수하고 두 명씩 짝지어 춤추는 모습을 그린 5번째 장면이다. 그림의 원작은 소실되고 1655년 개모된 것(Park et al., 2005)이라고 하지만 <Fig. 1>이 그에 해당되고 <Fig. 2>는 머리모양, 옷차림의 특징으로 볼 때 영・정조 시기의 것으로 여겨진다. <Fig. 1>에 묘사된 명부 예복을 살펴보면 어여미를 얹어서 수식을 했으나 장삼이 아닌 당의 차림이다. 잔치가 열린 시기는 전술한 『광해군일기』의 기록(광해 2년, 1609)보다 4년 앞선 것으로 당시의 현실적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장삼이 명부의 예복이지만 명부의 모임에 늘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면 갖추기가 쉽지 않은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Fig. 2>의 명부들은 남치마 위에 녹색계열의 포를 붉은 색 대로 여몄다. 기록에 준한다면 옆 트인 녹색계열의 포가 장삼인 것이다. 장삼의 형태적 특징은 상장례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상례의 보수성과 왕실복식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상장례에 입는 의복은 조선 전 시기를 통하여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Table 2>는 역대 『국장도감의궤』와 『예장도감의궤』의 복완도설에 보이는 겹장삼을 정리한 것이다. 겹장삼은 국장 의례에서 부장용으로 마련되는 복식 일습인 복완(服玩)의 하나이다.

<Table 2> 
double-layered Jangsam of red twill in Gukjangdogamuigwe[國葬都監儀軌] & Yejangdogamuigwe[禮葬都監儀軌] of past generations
1674, queen Inseon 1681, queen Ingyeong 1684, queen Myeongseong 1689, queen Jangryeol
1702, queen Inhyeon 1718, crown princess Danui 1731, queen Seonui

<Table 2>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겹장삼의 특징은 붉은색, 긴 길이, 안팎 주름이 잡힌 듯한 옆선, 직선형 소매 등이다. 또한 흰색 동정이 달려있는 5건의 겹장삼 중 2건은 동정사이가 벌어져 있고, 1건은 안깃의 동정이 겉깃 동정 위로 놓였고, 1건은 동정과 같은 효과를 보이지만 흰색의 받침옷으로 보이는 등 깃과 동정과의 관계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옷들과 다르다. 전체적인 비례로 볼 때 대수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소매통이 크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편 7건 중 5건의 옆선을 3자락으로 묘사한 점, 2점은 앞길과 뒷길 사이를 벌려놓고 비대칭적인 선으로 그린 점 등으로 볼 때 안팎주름이 달렸다고 추정된다. 노의로 추정되는 기성군부인(1502~1579)의 복식유물(Gyeonggi Provincial Museum, 2014), 조선전기의 출토원삼 및 여성 단령은 대개 안팎 주름의 무가 달려있어서 안팎 주름의 무는 조선전기 여성예복의 특징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역대 『국장도감의궤』 『예장도감의궤』에 나타난 복완용 겹장삼의 소요량을 <Table 3>으로 정리하였다. <Table 1>에 보이는 소요량에 비하여 매우 적은 양이다. 복완용으로 만든 겹장삼의 크기는 길이 1척 3촌, 품[요광(腰廣)] 7촌 5푼으로 착용실물보다 훨씬 작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완은 부장용이기 때문에 생전에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작게 제작되었다. 겹장삼의 소재는 겉감이 다홍대단(多紅大緞), 안감이 남초(藍綃), 동정감이 백능(白綾)으로 가례에 소요되는 겹장삼의 소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능(綾)은 동정감으로 쓰였을 뿐이며 겉감에는 홍단을 썼음에도 홍릉 겹장삼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Table 3> 
Requirements of double-layered burial Jangsam of red twill in Gukjangdogamuigwe[國葬都監儀軌] & Yejangdogamuigwe[禮葬都監儀軌] of past generations
1674, queen
Inseon
1681, queen
Ingyeong
1684, queen
Myeongseong
1689, queen
Jangryeol
1702, queen
Inhyeon
1718, crown
princess Danui
1731, queen
Seonui
outer
fabric
dahong daedan
[多紅大緞]
6ruler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red satin
6ruler
dahong
daedan
6ruler
lining blue cho
5.9ruler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cuff white twill
length0.8ruler
width0.1ruler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collar red silk thread
0.03ryang
green silk thread
0.03ryang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same as
left

한편 왕실 여인이 상례에 입는 대수를 본국 장삼이라고 하였다.

대수는 본국 장삼으로 포(布) 2폭을 쓴다. 가운데를 접어서 의신(衣身)으로 삼고 그 길이는 무릎까지 오게 한다. 쓰는 포의 거칠기와 가늘기, 변의 재봉 여부는 최복과 동일하다. 장군(長裙)도 동일하다. 수(袖)는 포 2폭을 쓰는데, 길이는 4척 4촌이다. 주척(周尺)을 쓴다. 이하 동일하다. 가운데를 접어 의(衣)의 좌우에 덧대어 최의의 제도처럼 소매[몌(袂)]를 만든다. 별도로 넓이 9촌, 길이 3척 5촌되는 포를 사용하여 가운데를 접어서 깃[령(領)]으로 삼는다(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2008, 59).

위의 기록은 대수의 구성적 특징을 알려준다. <Table 4>는 1744년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서례(國朝續五禮儀序例)』(1744)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1752/2008)에 수록된 대수(大袖)로서 왕비, 대비, 숙빈의 상복이다. <Table 2>에 보이는 겹장삼처럼 옆트임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도련이 둥글고, 진동에서 도련으로 내려갈수록 옆선이 넓어지고, 직령의 깃이 달려있다는 점은 동일하며, 소매통은 넓어 보인다.

<Table 5> 
daesu
from Gukjosogoryeuiseorye[國朝續五禮儀序例] vol. 1,
illustration of mourning
from Gukjosangryebopyeon in korean translations
[국역 국조상례보편], p. 59

『사례편람(四禮便覽)』(Lee, 1844)에 의하면 대의, 대수, 원삼을 동일한 의복으로 보고, 오례의의 기록을 인용하여 본국 장삼이라고 했다.

대의(大衣)는 색주(色紬)로 만들며 그 제도는 속칭 당의와 같고 넓고 크다. 길이는 무릎까지 오며 소매가 크고 주척(主尺)으로 2척 2촌이며 둥글다. 일명 대수 또는 원삼이라고 하며, 오례의(五禮儀)에서는 본국 장삼이라고 했다.(vol.8, Sacrificial rites[祭禮])

한편 상례용 원삼과 세속 원삼과의 차이를 밝혀서 상례에 쓰는 원삼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깃이 맞닿고 뒤가 길고 앞이 짧고, 소매 끝에 색동을 단 원삼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vol.3, funeral manual[상례(喪禮)]). 대수에는 대대를 하는데(Youngjosillok[영조실록], Gyeongja[경자] 2nd article, 30 August, Year of accession to the throne), 대대를 띠는 방식을 <Fig. 2>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장삼은 혼례, 상장례, 잔치 등의 일상의례에 착용하는 예복으로 위로는 왕비로부터 아래로 명부가 착용하는 신분 상징성이 높은 의복이었다. 직령의 깃이 달려있으며, 당의처럼 도련이 둥글고, 진동에서 도련으로 내려갈수록 옆선이 넓어지고, 소매가 넓다는 점을 특징으로 삼을 수 있다. 다만 복완용 겹장삼에서 보는 것처럼 대수에 안팎 주름무가 달려있는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재가 상례용 원삼과 세속 원삼의 형태차이를 밝혔듯이 동일한 의복 명칭을 가졌다고 해서 동일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오례의에서 대수를 본국 장삼이라고 설명했듯이 동일한 의복을 다른 명칭으로도 부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2. 몽두의

왕실여성의 상복(喪服) 중에 상궁 이하는 배자(背子)를 착용하는데 이를 본국 몽두의(蒙頭衣)라고 했다(Youngjosillok[영조실록], 30 August, Year of accession to the throne). 몽두의는 몽도리, 몽두리 등으로도 불리었는데, 본고에서는 몽두의로 칭하고자 한다.

배자는 중국명칭으로, 송제를 따른 명나라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며(Park, 2005, p. 61), 영조 즉위년에 배자를 대와 함께 상정하여(Youngjo Sillok[영조실록], 30 August, Year of accession to the throne), 배자에 대를 띠었음을 알려준다. 『사례편람』(Lee, 1844)에 “배자는 빛깔 있는 비단으로 만들며, 길이는 치마와 같고 깃이 맞닿아 있으며 곁은 트이고 소매는 둥근데, 반소매이기도 하고 소매가 없기도 하다. 오례의(五禮儀)에 따르면 우리나라 몽두의라고 했다(vol.1, Coming Of Age Rituals[관례(冠禮)]).” 몽두의는 태종 때에 서인(庶人)의 부녀(婦女)와 종비(從婢)ㆍ천례(賤隷)의 예복으로 상정한 옷이기도 하다(Taejongsillok[태종실록], 14 June 12Year). 『사례편람』 관례 에 따르면 배자, 즉 본국 몽두의는 맞깃, 민소매 또는 반소매, 앞뒷길이가 동일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사례편람』 상례 에서는 소매 있는 배자의 존재도 알려준다. 『사례편람』에서 여자의 예복을 배자로 인식하는 이유는 송대에 저술된 『주자가례』(Ju, 2005)를 기본 틀로 삼고 있어서 송대 여인의 보편적 의복인 배자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본다.

조선시대에 착용하던 기혼 및 미혼 여성 배자의 차이점은 『병와집(甁窩集)』(Lee, 1774)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형상에 의하면 “실녀[미혼녀]배자는 신부가 착용하는 홍장삼과 유사한 것으로 대수(大袖), 단령(團領), 무[衩兒]가 있고, 저금(底襟)이 없으며, 단수(短袖)이고, 중첩[기혼녀]의 배자는 관기가 착용하는 황색 몽두의 같은 것으로 소매가 짧고, 직령을 달고, 저금(底襟)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vol.5 Seo[서(書)] Answer to YunJinsa hyoun[답윤진사효언(答尹進士孝彦)]). Lee(2006)는 저금을 뒷자락이라고 해석했고(p. 141), Park(2005)은 『훈몽자회(訓蒙字會)』,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 저금을 안자락으로 언해하는 것을 근거로 섶이 없는 것으로 해석했다(p. 62). 저금이 없다는 것은 안자락이 없는 대금의 특징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정리하자면 배자의 특징은 섶이 없는 것이며, 착용자에 따라 신부 홍장삼과 기혼녀의 몽두의로 구분되어 색상, 깃의 형태, 무의 유무, 소매 너비 등에 차이를 보이며, 단수이고 섶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섶이 없으므로 『사례편람』에서 언급했듯이 맞깃을 특징으로 한다.

1887년,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팔순에 열린 정해진찬에서 춤을 추는 <Fig. 3>의 정재여령의 복식을 『정해진찬의궤』(In, 1887/2004)에는 황초삼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옷이 바로 몽두의이며, 이보다 시기가 앞서는 1535년 중묘조서연관도인 <Fig. 4>에 묘사된 기녀의 복장에서도 몽두의를 볼 수 있다. 몽두의의 특징을 『정해진찬의궤』의 여령복식 도식인 <Fig. 5>에서 확인할 수 있다.


<Fig. 3> 
Painting of a feast in Jeonghae year

(Korea University Museum, 2001, p. 96)




<Fig. 4> 
Painting of a banquet for the teachers of the crown princess at king Jeongjong’s court

(Park1 et al., 2005, p. 125)




<Fig. 5> 
Yellow cho robe

(In., 2004, p. 800)



『정미가례일기』에는 기행내인 4인의 의복을 홍몽도리 1쌍, 황몽도리 1쌍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동일한 기록의 한문본인 『헌종 경빈 김씨 순화궁 가례시 절차』에는 기행내인 4인의 의복을 홍장삼(紅長衫), 황장삼(黃長衫)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다. <Fig. 6>은 『숙종인현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에 보이는 기행내인의 홍장삼과 황장삼이다. 문서를 기록하는 언어에 따라 동일한 착용자의 동일한 의복에 대한 한글과 한자의 표기가 다르다. 그러나 동일한 의복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장삼(長衫)과 몽도리[몽두의(蒙頭衣)]는 다른 의복이 아니고 동일한 의복을 가리키는 것이다. 장삼이라는 동일한 용어를 가졌다고 해서 동일한 의복이 아니고, 신분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 기행내인의 장삼은 몽두의인 것이다. 태종실록에서 “궁녀는 몽두의를 쓰도록 한다”(Taejongsillok[태종실록], 14 June 12Year)는 기록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Fig. 6> 
Court ladies in Garyedogam uigwe of queen Inhyeon

(Korea University Museum, 2001, p. 47)



3. 할의(割衣)

역대 『가례도감의궤』에는 상궁과 시녀, 유모의 복식을 할의로 기록하고 있으며 17세기 전반 『소현세자 가례도감의궤』부터 18세기 중반 『장조헌경후 가례도감의궤』를 마지막으로 후반기부터는 할의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Cho, 2012, p. 46). 18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할의 외에 장삼이 상궁과 시녀, 유모의 복식으로 기록되어있어 할의와 장삼이 각기 다른 옷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할의가 장삼보다 격이 큰 옷으로서의 기능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후에 할의가 사라지면서 장삼과 할의는 동일한 옷으로 다루어진다.

『상방정례』에는 가례에 참여하는 상궁, 시녀, 유모의 복식을 아청색 할의로 기록(Royal Clothing Office, 1750, vol. In[人])하고 있으나,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1759년) 이후로 아청색 장삼 또는 흑장삼으로 기록했다. 번령형 흑장삼인 아청필단 할의를 착용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한동안 아청필단 할의를 기록으로 남기다가 18세기 후반부터 아청색 장삼 또는 흑장삼으로 기록하게된 것이다. 『상방정례』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모두 영조 재위 중에 편찬한 기록물이기 때문에 관습적인 기록 패턴을 현실화한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가례를 다룬 『(장조헌경후)가례도감의궤』에는 간택된 세자빈 어머니의 복식을 아청필단 할의로 기록하고 있지만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모친이 원삼을 입고 큰머리를 얹었다고 하여 기록과 실행의 차이가 드러난다. 『정미가례일기』에는 경빈의 어머니 복식을 다홍공단으로 안을 받친 초록 향직 원삼으로 기록하고 있다. 할의는 특정한 옷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점차 신분에 따라 최고로 입을 수 있는 예복을 뜻하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말 어원사전』에 의하면 ‘할’의 어원은 ‘할아버지’의 어근인 ‘하[大]’와 같이 ‘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접두어 ‘한’은 명사 앞에 붙어서 ‘크다’라는 뜻을 나타내며, 할(割)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부 홍장삼을 활옷이라 부르게 된 것은 혼례라는 대례에 갖추어 입는 큰옷으로서의 할의 개념을 한자어 표기 대신 한글 표기로 부르면서(Kwon, 2009, p. 53) 일반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Ⅲ. 착용자별 장삼의 용도
1. 혼례복

홍장삼은 신부 혼례복으로 착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왕실의 적통을 잇는 여인은 적의를 입지만 내외명부 및 사대부가의 여인들은 홍장삼을 혼례복으로 입었다. 붉은 색은 붉은 피, 태양 등을 상징하는 생명의 색으로 여겨서 많은 문화권에서 신부의 복색을 붉은 색으로 택하듯이 조선에서도 홍장삼을 신부옷으로 입은 것이다.

『묵재일기』(Lee, 1535-1567)에는 “손녀 숙희의 정혼일인 11월 5일까지 혼례를 거행하기 위한 준비로 온 집안이 분주한 가운데 혼인을 준비하면서 신부장삼, 대대, 말군, 수식 등을 빌려왔다”고 하여서 16세기 조선 양반가의 신부복의 양상을 알려준다.

왕실가례에 장삼을 명복으로 준비하는 것은 조선의 오랜 전통이다. 세조 때에 “세자빈 한씨의 가례에 명복(命服)으로 대홍 단자 노의(大紅段子露衣) 1벌, 아청 단자 대의(鴉靑段子大衣) 1벌, 금배 견화 대홍 단자 장삼(金背肩花大紅段子長杉) 1벌 등을 보냈고”(Sejosillok[세조실록], 9 April 6 Year), “귀성군(龜城君) 이준(李俊)의 가례에 대홍단자 노의(大紅段子露衣)ㆍ대홍단자 겹장삼(大紅段子裌長衫)ㆍ백단자 겹말군(白段子裌襪裙)ㆍ생초말군(生綃襪裙) 등을 내리도록 하였다”(Sejosillok[세조실록], 22 October 13Year). 선조 때에는 “의창군(義昌君)의 가례에 신부의 노의(露衣)와 장삼(長衫) 감 화문홍단(花紋紅段) 2필, 말군(袜裙)감 화문백단(花紋白緞) 1필 등을 내렸다” (Seonjosillok[선조실록], 18 March, 36Year). 1884년의 정미가례에는 경빈의 동뢰연 복식으로 직금 홍장삼, 수식, 패옥, 수정대, 청옥규를 갖추었다. 역대 『가례도감의궤』에는 동뢰연에 명복을 갖춘다고 했으니 왕실 가례에 홍장삼을 신부의 명복으로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왕녀의 혼례복 물목에도 여전히 대홍필단, 또는 대홍광적 겹장삼이 오르고 있어서 장삼이 조선의 전 시기를 통하여 중요한 예복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Kim & Choi, 2014, pp. 61-62). 한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상례[殮]에는 녹색 원삼을 쓰고 혼례[醮] 때는 홍색 원삼을 사용한다고 기록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신부의 홍장삼을 원삼이라고도 지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Lee, 2006, p. 141).

조선의 대표적인 혼례복은 우리에게 활옷이라는 명칭으로 더 익숙한 홍장삼이다. <Fig. 7>은 덕온공주의 활옷 수본으로 ‘홍장삼 수초 저동궁 덕온공주 활옷’이라는 글이 있어서 홍장삼이 활옷임을 알려준다. 덕온공주의 길례가 있던 183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언제부터 혼례에 수놓인 홍장삼을 착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출토유물 중에 성청공 심익창 부인 성주이씨(1651~1671)묘 출토 자수치마가 있고, 영평현령(종5품)을 지낸 이형보(1659~1719)의 부인 해평윤씨(1660~1701)의 화문단 자수저고리 등이 있어서 부녀가 착용하던 수 옷의 실체를 알 수 있다.


<Fig. 7> 
Embroidery pattern of princess Deokon’s hwarot

(Seok, 1971, p. 672)



숙종 32년에 편찬된 『전록통고(典錄通考)』(Jeolloktonggo, 1706)에 “사족(士族) 부녀가 수의상(繡衣裳)을 입으면 그 가장에게 죄를 묻겠다”는 금제가 있고(Hyeongjeon[형전(刑典)]), 이러한 종류의 금제는 고종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Daejeonhoetong, 1865)에 “사족(士族) 부녀는 그 남편의 관작(官爵)과 품계에 따라 입도록 하되 그 외에 대단(大緞), 금수(錦繡), 봉채(鳳釵), 금비녀, 옥비녀, 주전(珠鈿), 가환(假鬟) 등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오직 신부는 금하지 아니한다”(Hyeongjeon[형전])고 하여 신부의상에 수놓은 옷이 일반화되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왕실 가례, 길례, 사대부가의 혼례에 장삼을 중요한 예복으로 준비하고 착용했다. 홍장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대홍(大紅), 홍(紅) 등 붉은색 장삼을 마련했다. 혼례에는 신분의 제한 없이 최고의 의복을 착용할 수 있었으므로 형편이 되는 모든 계층에서 홍장삼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놓은 신부의상으로 전해지는 최고(最古)의 옷은 활옷이라고도 부르는 복온공주 홍장삼이며, 지금까지 신부 혼례복으로 사랑받고 있다.

2. 상장례복
1) 상복

『세종실록』 오례의의 상복 규정은 조선왕조 전시기를 통하여 실행되던 것인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실여성의 상복에는 우리나라 고래의 전통이 이어졌다.

왕비는 참최 삼년(斬衰三年)이니, 대수(大袖)ㆍ장군(長裙) 【아주 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대수(大袖)는 본국(本國)의 장삼(長衫)이요, 장군(長裙)은 곧 치마이다】ㆍ개두(蓋頭)ㆍ두수(頭수 )ㆍ죽차(竹釵)ㆍ포대(布帶)ㆍ포구(布屨)를 착용(着用)하고,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 대수(白布大袖)ㆍ장군(長裙)ㆍ개두(蓋頭)ㆍ두수(頭 )와 대(帶)ㆍ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한다. 25개월의 대상(大祥) 후에는 진하게 물들인 옥색 대수(玉色大袖)ㆍ장군(長裙)ㆍ흑개두(黑蓋頭)ㆍ두수(頭 )와 대(帶)ㆍ피혜(皮鞋)를 착용(着用)하고, 금(金)ㆍ주(珠)ㆍ홍수(紅繡)를 사용하지 아니한다. 27개월의 담제(禫祭) 후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내명부(內命婦)의 빈(嬪) 이하 여관(女官)의 상복(喪服)왕비의 상복(喪服)과 같다. 육상(六尙) 이하의 여관(女官)은 참최 삼년(斬衰三年)이니, 배자(背子)【본국(本國)에서 몽두의(蒙頭衣)를 사용하는데 아주 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한다】개두(蓋頭)ㆍ두수(頭 ) 포대(布帶)ㆍ소혜(素鞋)를 착용(着用)하고,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 배자(白布背子)ㆍ개두(蓋頭)ㆍ두수(頭 )와 대(帶)ㆍ백피혜(白皮鞋)를 착용(着用)한다.
왕세자빈(王世子嬪)은 참최 삼년(斬衰三年)이니, 대수(大袖)ㆍ장군(長裙)ㆍ개두(蓋頭)ㆍ두수(頭 )ㆍ죽차(竹釵)ㆍ포대(布帶)ㆍ포구(布屨)를 착용(着用)하고,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 대수(白布大袖)ㆍ장군(長裙)ㆍ개두(蓋頭)ㆍ두수(頭 )와 대(帶)ㆍ백피혜(白皮鞋)를 착용(着用)한다. 양제(良娣) 이하의 궁녀(宮女)의 상복(喪服)왕세자빈(王世子嬪)의 상복(喪服)과 같다. 사규(司閨) 이하의 여관(女官)은 참최 삼년(斬衰三年)이니, 배자(背子)ㆍ개두(蓋頭)ㆍ두수(頭 )ㆍ포대(布帶)ㆍ소혜(素鞋)를 착용(着用)하고,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배자(白布背子)ㆍ개두(蓋頭)ㆍ두수(頭 )와 대(帶)ㆍ백피혜(白皮鞋)를 착용(着用)한다(Sejongsillok[世宗實錄], vol. 134, orye hyungnyeuisik bokje[五禮凶禮儀式服制]).

보수성이 강한 상장례에 착용하는 왕실여인들의 복식은 우리 고유의 복식전통을 따랐다. 왕이 승하한 흉례에 왕비이하 내명부는 본국 장삼을 입고, 상궁(尙宮) 이하는 본국 몽두의를 입었다.

2) 염습의

염습의란 사자에게 입히거나 싸는 옷을 말한다. 사자가 생전에 입던 의복 중 좋은 옷을 염습의로 썼기 때문에 고인이 생전에 입던 의복의 종류와 착용사례를 알려준다. 장삼은 대표적인 염습의로 쓰였다.

(1) 왕실 염습의

장삼은 왕실 여인의 염습의 중 가장 겉에 입히는 옷으로 쓰였다. 본조명복(本朝命服)이라고 하여 염습의대에서 왕의 곤룡포, 강사포, 면복에 대응하는 왕비의대로 기록되고 있다(Park. 1991, p.62). 왕실 상장례에 쓰인 장삼의 사례를 왕비의 『빈전혼전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국장도감의궤』 등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인왕후(1600년 승하)의 습의로 가장 겉에 입힌 옷은 대홍운문사 장삼[외비의대(外備衣襨)]이며 남유문필단 대대로 여민다. 소렴에는 황사(黃紗) 장삼[內用衣襨], 아청필단 겹장의(長衣)[외비의대]을 쓰며 대렴에는 대홍금(大紅錦) 장삼을 썼다(Bincheondogamuigwe of queen Uiin[의인왕후빈전도감의궤], 1601, Uiju[儀註]).

인목왕후(1632년 승하)의 목욕의대로 대홍화문사 장삼을 준비하고, 습의대로 대홍운문사 장삼[외비의대]과 흉배를 갖춘 대홍금선 적의(的衣)[내비의대(內備衣襨)]가 대홍필단 도다익대와 함께 있으며, 소렴에 내비의대로 자적필단 적의, 초록필단 적의를 마련하였다. 대렴의대는 내비의대로 각각 흉배를 갖춘 대홍광지아(大紅廣池兒) 적의, 아청광지아 겹적의, 흉배를 갖춘 초록필단 겹적의를 마련했다. 내비의대로 대홍광지아 원문노의도 준비되었다(Bincheondogamuigwe of queen Inmok[인목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1632, Uiju[儀註]).

의인왕후 이전 시기의 의궤는 전하는 바가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의 상이 있던 시기(1600~1673년)에는 염습의대를 구체적으로 기록했고, 이후 인선왕후로부터 인원왕후의상(1674~1804년)에 이르기까지는 『국장도감의궤』에 복완질을 세밀하게 기록했으며, 정순왕후 이후 국말(1805~1903년)에는 형식적인 기록에 그쳐서(Kyo, 2015), 『빈전도감의궤』를 살피는데 유념해야 한다.

인선왕후(1674년 승하)의 『빈전혼전도감의궤』에는 목욕의대 중 장삼을 시신에게 입힌다고 하였다. 습의로 기록된 청라대대는 장삼용으로 이해된다. 소렴의대와 대렴의대는 각각 19칭, 90칭으로 총칭에 대한 기록만 있고 구체적인 의복의 종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복완질(服玩질)의 채색도설에는 태의(苔衣), 수건(手巾), 수식(首飾), 홍릉 겹장삼, 분홍 저사수보로(紵絲繡甫老), 홍저 사의(絲衣), 남라 상(裳), 백릉 겹말군, 청라대, 백말(白襪), 청리(靑履), 수의(手衣), 부동화(副同靴), 온혜(溫鞋), 고비롱(高飛籠) 등이 있으며 홍릉겹장삼은 대홍대단으로 겉을 하고, 남초로 안을 넣으며, 백릉으로 별령[동정]을 한다(Bincheonhoncheo ndogamuigwe of queen Insun[인선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1632, Uiju[儀註]).

인경왕후(1680년 승하)의 『빈전혼전도감의궤』에는 목욕의대로 대홍화문단으로 된 장삼이 하나있으며, 남합사(藍合絲)로 만든 가옥대(假玉帶)가 있다. 장삼에 대홍화문단 23척5촌이 소요되어 생전에 입던 옷의 치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소렴의대와 대렴의대, 복완질은 인선왕후의 경우와 같다.(Bincheon honcheondogamuigwe of queen Ingyeong[인경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1681, Uiju[儀註]). 복완질이 기록된 시기 중 선의왕후의 소렴의대에는 남필단 겹장삼이 포함되어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장삼은 목욕의대, 습의대, 소렴의대에 쓰였으며, 홍색이 주류를 이루지만 황사장삼, 남필단 겹장삼 등 홍색 외에 황색과 남색의 장삼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효현왕후, 철인왕후, 신정왕후, 명성황후의 『빈전혼전도감의궤』의 소렴에 장삼과 화패옥(畵佩玉)을 기록하여 본조명복으로서 장삼의 일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장삼의 형태적 특징은 <Table 2>로 제시한 바와 같다. 왕비의 법복인 적의를 우리나라 장삼과 병행했으므로(Korean history DB) 의궤에 기록된 명복은 적의로 추정된다. 한편 본조명복인 장삼은 왕의 익선관, 곤룡포에 대응하는 복식으로 파악되는데 본조명복을 왕비가 생전에 언제 착용하였는지, 그 구체적인 착용 사례를 찾아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복완질이 기록된 시기 중 선의왕후 시기를 제외한 모든 습의대에 철릭, 답호, 단령이 포함되고, 정성왕후(1757년 승하), 인원왕후(1757년 승하)의 『빈전도감의궤』, 『국장도감의궤』에 소렴의대에 강사포가 포함되면서 이후 명성왕후, 장렬왕후, 인현왕후, 선의왕후의 상에 쓰인 염습의가 모두 대동소이하며, 정순왕후(1805년 승하)로 부터 국말효정왕후(1903년 승하)에 이르기까지는 형식적인 기록만 남겼다.

(2) 사대부가 염습의

예서에 나타난 여자의 상례복식은 원삼, 몽두의, 장의, 장삼, 현색심의 소색심의, 단의 등 포류(袍類)가 습의로 쓰였다(Song, 2009, p. 71). 예서가 아닌 장례일기에 나타난 실행사례를 인목왕후의 모친, 『광산부부인 노씨(1557~1637년)장례일기』에서 살펴보면 12벌이 습의로 사용되었다. 심초록단□ 저고리, 심초록주 소저고리, 백화주 누비바지, 대홍단 대대, 심초록운문단 장삼, 남운문단 솜치마[襦裳], 백초 적삼, 백화주 겹바지, 남향직단 웃치마[上裳], 백화주 누비저고리, 백화주 겹저고리, 백화주 홑바지 등이다. 심초록운문단 장삼을 대홍단 대대로 여미고 웃치마까지 더하여서 예복 일습을 갖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소렴에도 초록사대홍작(綽) 장삼이 쓰였다(Kim, 1637/2006, p. 161).

『광산부부인노씨장례일기』를 쓴 노씨의 손자 김천석은 어머니의 장례일기, 『숙부인(淑夫人)초계정씨(草溪鄭氏1575-1640)장례일기』도 기록하였는데 초계정씨의 상에는 대홍대단 원삼, 대홍단 대대를 기록하고 있다(Kim, 1640/2006, p. 205). 광산부부인의 심초록 장삼은 장삼의 다양한 색감을 알려주는 바이나 대홍색 원삼을 3품 숙부인이 입는다는 사실에는 의문이 간다. 『임원경제지』에 “상례에는 녹색 원삼을 쓰고 혼례에는 홍색 원삼을 사용한다”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16~17세기의 원삼은 조선후기, 또는 대한제국기의 원삼과 다르며, 상례용 원삼은 조선후기의 세속 원삼과 다른 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광산부부인의 장삼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유물로 대전 금고동에서 출토된 16세기 안정나씨 일가묘 중 용인이씨 묘의 습의와 소렴의로 쓰인 2점의 장삼을 들 수 있다. <Fig. 8>은 갈변한 화문단으로 된 습의용 장삼이고, <Fig. 9>는 소렴의로 쓰인 쪽색 무문단 장삼이다. 번령 형태를 지녀서 겉깃이 없고 앞길 좌측의 고대위치까지 섶과 길이 이어져있으며, 뒷고대부터 안깃이 놓이는 자리에 목판깃 형태의 깃이 장옷처럼 섶 쪽으로 들어와 달려있다. 2벌의 장삼 모두 고대의 중심에 등솔이 놓이지 않고, 왼쪽에 치우쳐 있다. <Fig. 8>의 홑장삼은 18.5cm의 고대에 등솔의 위치는 입어서 왼쪽에서 10cm, 오른쪽에서 8.5cm에 있으며, <Fig. 9>의 홑장삼은 20cm의 고대에 등솔의 위치는 입어서 왼쪽에서 12cm, 오른쪽에서 8cm에 있다(Lee, J. Y. 2016, p. 106, 108). 번령이라는 깃의 특성이 고려된 것으로 생각된다. 무는 따로 달지 않고 길에서 접어서 만들었다. <Fig. 9>는 소매가 달린 어깨선에서 36cm 내려와 진동위치를 정하고 중심선 쪽으로 17cm 가위집을 넣어 무를 만들고 17cm를 4등분하여 주름너비가 4.25cm 되도록 2개의 주름을 잡아 길 안쪽으로 넣었다. 뒷무도 동일하다. 고름을 달았던 흔적은 없고 동정도 달리지 않았다. <Fig. 8>의 무 역시 치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제작방식은 동일하다(Lee, J. Y. 2016, pp. 106-107).


<Fig. 8> 
Excavated shroud from Daejeon Geumgodong, Jangsam

(Daejeon History Museum, 2016, p. 36)




<Fig. 9> 
Excavated shroud from Daejeon Geumgodong, Jangsam

(Daejeon History Museum, 2016, p. 29)



두벌의 홑장삼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기록된 여기(女妓) 복식인 <Fig. 10>의 흑장삼과 유사하다. 흑단으로 짓고 소매 끝은 남초(藍綃)를 댄다는 흑장삼의 기록(Sung, 1493/1956)을 연상케하는 장삼을 완형실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Fig. 10> 
Black Jangsam

(Seong, 1493/1956, p. 641)



<Fig. 11>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신공주(慶愼公主? ~ 1426년) 상으로 왼쪽은 원본이고, 오른쪽은 경기도박물관에서 복원한 초상이다. Lee, E. J.( 2016)는 조선 전기 여인이 장삼을 착용한 방법과 사례에 주목하였다(pp. 38-39).


<Fig. 11> 
(left)Original portrait of princess Gyeongsin, (right)recovered portrait of princess Gyeongsin

(http://www.yongin21.co.kr, retrieved July 11, 2017)



한편 전술한 16세기 안정나씨 일가묘 출토 장삼과 유사한 16세기 일선문씨 출토 장삼에 대하여 Lee(1999)

모시로 된 홑장삼으로 팔을 끼우지 않은 채 시신을 싸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명주대대를 동심결로 맺고 있었다. 깃 일부와 오른쪽 앞길 부분의 훼손이 심하지만 발굴 당시 앞길의 젖혀진 깃이 악학궤범의 흑장삼과 아주 흡사하다. 겨드랑 아래 옆선은 남자 단령이나 직령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길게 트여있고 길에 연결되어 있는 대형 사각무가 안으로 접혀 맞주름으로 정리되어 있다. 당시 남성의 단령이나 직령의 무와는 다르지만 무의 존재로 볼 때 이 옷의 용도가 범상치 않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p.161)

고 하였다. 무의 형태는 <Table 2>에서 보는 바와 유사하다. 16세기의 여성용 단령과 번령형 장삼과의 관계가 흥미로워 보인다. 단령은 선비족에게서 비롯된 옷으로 점차 착용 범위를 넓혀가고 착용자의 지위를 높여가면서 조선에서 관직자를 대표하는 옷이 되었다. 선비족이 착용하던 단령의 초기 형태는 기후, 환경에 따라서 깃을 벌려서도 입고, 닫아서도 입던 것이었으나 차츰 지금과 같은 단령의 형태로 정형화되어 깃을 닫아 입는 형태가 되었다. 여성의 염습의로 출토되는 장삼은 <Fig. 10>에서 보는 것처럼 단령의 초기 형태와 유사하다. 당나라를 거쳐서 신라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여성예복이 되었으며, <Fig. 11>에서 보는 것처럼 팔을 끼우지 않고 걸쳐 입기도 하고, 대대로 여며 입기도 하는 착용방식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흑장삼의 번령은 본국 장삼의 깃과 구별되는 요소라고 본다.

정리하자면 염습의로서 장삼은 왕비의 목욕의대, 습의대, 소렴의대에 쓰였으며, 홍색이 주류를 이루지만 황색과 남색의 장삼도 쓰였다. 왕비 소렴에는 본조명복으로서 패옥을 갖춘 장삼 일습의 사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사대부가의 염습의에 대하여 예서에는 원삼, 몽두의, 장의, 장삼, 현색심의 소색심의, 단의 등의 포류(袍類)를 기록하고 있지만 예서는 이상적 사례를 담은 것이어서 실행 사례와 반드시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17세기의 장례일기를 통하여 장삼, 원삼 등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출토유물에 근거하여 번령형 장삼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의례복

조선 초기에 “궁녀, 상기(上妓)[무녀(舞女)], 서인(庶人)의 부녀, 여종, 천민은 몽두의를 쓰도록 한다”(Taejongsillok[태종실록], 14 June 12Year)는 상황이 조선 후기에도 지속되었다.

1) 여기복(女妓服)

세종 때 복식에 관하여 의정부에 전하는 사항을 보면 기녀의 옷은 장삼이었다. 『세종실록』 기사에 의하면

고려(高麗) 때에 기생이 모두 황장삼(黃長衫)을 입었는데, 사신이 이를 보고 그르게 여겨서 모두 검은장삼(皂長衫)을 입도록 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다…지금 기생의 장삼은 청색과 현색(玄色)이 서로 반반인데, 현색은 비록 마땅히 금하여야 하나, 사신이 본 지가 이미 오래니 아직은 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만일 반드시 금해야 한다면 모두 청색을 쓰는 것이 가할 것이다. 의논하여 아뢰라고 하였다(Sejongsillok[세종실록], 6 August 27Year).

여기복은 고려시대와 변함이 없는 장삼이지만 색상에 변화가 있었다. 황장삼에서 검은 장삼으로 바뀌었다가, 세종 때에는 청색 장삼과 현색 장삼이 되었다. 전술했듯이 『악학궤범』의 여기복식 중에 “잠, 유소, 차, 대요, 수화(首花), 단의(丹衣-앞뒷길 길이가 다른 단령), 상[속칭 보로라 한다], 대[홍초], 흑장삼[흑단으로 짓고 소매끝은 남초를 댄다]으로 구성되는 것” 중 <Fig. 10>이 바로 흑장삼이다. 여기복은 무대의상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상류사회의 예복을 착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흑장삼이 상류사회의 예복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흑장삼은 <Fig. 3>과 <Fig.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몽두리와는 차별화되는 옷이지만 몽두리 역시 여기복으로 착용되었다.

2) 여관예복(女官禮服)

역대 『가례도감의궤』에는 상궁과 시녀, 유모의 복식을 장삼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Fig. 12>에서 보는 바와 같은 흑색의 홑장삼이 특징이다. 기행내인의 복식을 <Fig. 13>에서 보는 것처럼 홍장삼과 황장삼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 옷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몽두리이다. 그러나 차츰 몽두리가 색동소매 달린 원삼처럼 변해간다. <Fig. 14>의 『철종철인후가례도감의궤』[Garyedogamuigwe of king Cheoljong & queen Cheorin](1851) 반차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그 이전 『정조효의후가례도감의궤』[Garyedogam uigwe of king Jeongjo & queen Hyoui](1762)에서도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19세기의 연향관련 의궤에는 의식(儀式)을 장엄(莊嚴)하게 하기 위하여 참여하는 여관의 복식을 임무에 따라 흑원삼, 초록원삼으로 기록하고 있다. <Fig. 12>는 원삼처럼 색동소매가 달리기는 했지만 『사례편람』에서 본국 몽두의를 앞뒷길이가 똑같은 것으로 정리했던 것처럼 앞뒷길의 길이가 동일하다.

3) 명부예복(命婦禮服)

장삼은 5품 이하 정처의 예복으로서 명부 여부를 구분하는 의복이었다. 남자의 단령이 백관을 구별하는 가늠자였던 것처럼 여인의 장삼은 남자의 단령에 준하는 신분 상징성이 높은 의복이었다. 장삼이 명부의 예복이지만 명부의 모임에 늘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면 갖추기가 쉽지 않아 간편한 당의로 대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국말에 거의 모든 예복이 원삼으로 일원화되면서 장삼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Ⅳ. 결론

장삼의 종류를 장삼, 몽두의, 할의로 구별하여 특징을 살펴보고, 착용자별 장삼의 용도를 혼례복, 상장례복, 의례복으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장삼은 위로 왕비로부터 아래로 명부가 착용하는 신분 상징성이 높은 의복이었다. 왕비, 대비, 숙빈 이하 여관의 상복으로 규정될 만큼 격이 높은 옷으로 대수라고도 했다. 또한 본조 명복이라고 하여 패옥과 일습을 이루는 왕비 예복으로 착용되었다. 흉배가 달린 흉배겹장삼은 왕비와 세자빈에게만 해당되는 의복이었으며, 흉배가 달리지 않은 겹장삼은 왕비로부터 명부에 이르기까지 착용되었다. 직령의 깃이 달려있으며, 당의처럼 도련이 둥글고, 진동에서 도련으로 내려갈수록 옆선이 넓어지고, 소매가 넓다는 점을 특징으로 삼을 수 있다. 다만 복완용 겹장삼에 안팎 주름무가 달려있는 것처럼 대수에 안팎 주름무가 달려있는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몽두의는 섶이 없어서 대금과 맞깃의 형태를 가진다. 배자의 특징도 이와 같으므로 몽두의와 배자가 동일시되었다. 왕실 상례에 상궁이하 여관이 입는 상복인 배자를 본국 몽두의라고 하였고, 『사례편람』에서는 『국조오례의』를 인용하여 배자를 본국 몽두의라고 하였다. 『병와집』에서는 기혼 및 미혼 여성 배자의 차이점을 기혼녀의 몽두의와 미혼녀의 신부 홍장삼으로 구분하면서 색상, 깃의 형태, 무의 유무, 소매 너비 등의 차이에 주목하였다. 여기에서 몽두의, 배자, 장삼의 상관관계를 볼 수 있다. 몽두의는 정재여령 및 기녀의 의복인 동시에 기행내인의 의복이기도 하다.

할의는 특정한 옷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점차 신분에 따라 최고로 입을 수 있는 예복을 뜻하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장삼은 중요한 예복인 만큼 관혼상제의 중요한 의례에 빠질 수 없는 의복으로 착용되었다. 신부 홍장삼은 대표적인 혼례복으로 지금까지 활옷이라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상례에는 상복, 염습의 등으로 쓰였다. 16세기 출토유물인 번령형 장삼에서 사대부가 염습의에 쓰인 여성예복의 다양성을 볼 수 있다. 번령형 장삼은 여기복으로도 착용되었다. 몽두의라고도 하는 황색 장삼은 정재여령의 대표적인 의복이었다. 가례, 진찬, 진연 등 중요한 왕실 행사에 의식을 장엄하게하기 위하여 여관은 직무와 신분에 따라 장삼을 착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원삼이 점차 여성예복을 대표하는 의복이 되면서 장삼, 몽두리 등의 명칭은 남아 있으나 형태는 원삼과 유사해졌다. 원삼은 여전히 규명되어야할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는 의복이어서 원삼에 대한 논의는 본고에서 제외하였다. 또한 할의의 색상이 아청색이고, 16세기의 번령형 흑장삼 출토물이 이후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며, 문헌에서 할의 기록이 사라지는 것 등을 고려할 때 번령형 흑장삼이 할의였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차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하여 장삼의 명칭을 갖는 다양한 종류의 의복과 특징 및 장삼의 용도를 고찰하였다. 동일한 의복 명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동일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의복이지만 다른 명칭으로도 부른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이 연구의 주요 성과이다. 그러나 세밀하게 논증해야할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다. 추후 연구를 통하여 해결해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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