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 『호토토기스(不如帰)』(1900)를 통해 본 복식문화
Abstract
This study was conducted to gain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 costume culture at the time the modern Japanese literary work, Hototogisu, was written. The study analyzes costumes described in the novel and considers the contexts in which they are expressed, along with the contemporary costume culture. The following findings have been verified. The traditional knot, a kind of female hairstyle, varied depending on the age or marital status of the wearer: short hair for childhood, Osage[垂髪] for students, Shimada[島田] before marriage, and Marumage[丸髷] after marriage. It was impossible to infer the marital status of any females from the Western roll-up hairstyle. Kimonos worn by upper-class females were divided between modest and gorgeous ones. Dignified figures were often described to wear the former, while rich or young women with strong characters were often depicted wearing the latter. On the other hand, farmers were often described as wearing coarse cloth. Western clothing was not yet introduced for females; only Western hairstyles and some items were imported. The engagement ring culture was introduced and shawls were added to Kimonos. Males wore suits or the traditional costumes as their outdoor clothes, depending on their jobs. The representative traditional costume for going out was Haori-ha-kama[羽織袴]; whether they wore suits was important, but a common understanding of the details had not yet been established. When they returned home, they usually work Kimonos as roomwear. They often wore hats, bags, and shoes and carried walking sticks. Even people who wore the traditional costumes for going out had disheveled hairstyles and used some Western items, such as hats and bags. The social status of the wearers of such traditional costumes was determined by the clothing materials, and there were rain outfits used only for a specific job class.
Keywords:
Hototogisu, Japanese costume culture, traditional costumes, western costumes키워드:
호토토기스, 일본 복식문화, 전통복식, 서양복식Ⅰ. 서론
동양의 근대는 전통복식과 서양복식이 만나 복식문화의 변용이 모색되고 새로운 복식문화가 생성되는 지점이다. 때문에 근대 시기는 전통복식의 변용과 서구화된 현대복식의 원류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시기이다. 또한 복식제도는 시대적 문화현상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복식 연구에 있어서 복식 자체에 대한 물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복식을 둘러싼 문화적 측면에 대한 고찰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는 일본 근대소설을 당시 일본의 복식문화를 알기 위한 자료로 활용해 보고자 한다. 소설이 개인의 창작물이란 점과 시각자료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은 소설을 복식연구의 자료로 활용할 때 가장 큰 한계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복식을 둘러싼 맥락이 자세히 제공된다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을 뛰어넘을 만한 장점이 있다. 즉, 특정한 복식이 착용되는 TPO(시간ㆍ장소ㆍ상황), 인물의 연령, 성별, 성격, 성장과정, 직업 등의 정보가 제공되므로 눈에 보이는 복식 자체에는 다가갈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복식문화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동시대의 현실세계를 무대로 한 소설이라면 당시의 복식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 또한 소설에 그려진 당시의 복식문화에는 당시 사람들의 복식에 대한 공통이해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소설 속 복식 묘사를 통해 시간적 격차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소설을 단서로 하여 근대 일본의 복식문화와 공통이해를 풀어보고자 한다.
본고에서 선택한 자료는 도쿠토미 로카[德冨蘆花](1868-1927)의 장편소설 『호토토기스(不如帰)』(1900)이다. 『호토토기스』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복식묘사가 많기 때문이다. 선행연구에서 지적되었듯이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 소설은 등장인물의 복식 묘사가 옷의 무늬까지 상세하게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Nakamura, 1952). 그러한 메이지시대 소설 중에서도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것이 『호토토기스』이다. 『호토토기스』는 1898년부터 1899년까지 「고쿠민신문(國民新聞)」에 연재된 신문소설이며, 1900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된 지 9년 만에 100판을 찍었으며 저자 도쿠토미가 세상을 떠난 1927년까지 190번 재판되었다. 결국 50만권 이상이 팔리면서 당대의 일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Fujii, 1990).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청일전쟁(1894-1895) 전후이며 신문연재와 출판 시기가 가깝기 때문에 당시의 복식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추론된다. 또한 많은 독자들에게 수용된 베스트셀러 소설인 만큼 당시의 복식 공통이해를 잘 내포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연구자료로 선택하였다. 본고에서 인용한 원문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 소장 『호토토기스』 1903년판을 사용했다.
한국에서 수행된 근대 일본복식사 연구는 개론서 번역작업(Koike, 2005; Izutsu, 2004), 남성 제복에 관한 연구(Lee, 2010; Nomura & Lee, 2015), 양복화에 관한 연구(Lee & Lee, 2000; Lee, 2012a), 신여성 복식에 관한 연구(Lee, 2011; 2012b; 2012c; 2013; 2014; 2015), 여성 양장화에 관한 연구(Hwang, 2002), 한국과 일본의 여성 복식을 비교한 연구(Nam, 1992; Yoo, 2007; Hasegawa, 2007) 등이 있다. 그런데 일본 근대소설 속의 복식을 분석한 연구는 없는 상황이다. 일본에서 소설을 자료로 복식을 연구한 성과가 몇 편 있지만 중국과 프랑스, 영국 등 일본 이외의 외국소설을 자료로 그 나라 복식을 연구하거나 복식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논한 것이다(Yamauchi, 2019; Niimi, 2009; Koda, 2007 등). 이른 시기의 연구로 『호토토기스』와 복식에 대해서 언급한 연구(Nakamura, 1952)가 있지만, 제2차 대전 후의 현대소설에 비해 그 이전 시기의 근대소설에는 복식 묘사가 많았던 것을 논하기 위한 것으로, 각 등장인물의 복식 묘사 부분을 발췌하는 데 그쳤다. 한국에서 소설을 자료로 복식을 연구한 성과로 염상섭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여성상과 복식에 관해 고찰한 연구가 있다(Hong, 1992). 부정적인 여성상은 양장으로 묘사되며 긍정적인 여성상은 한복을 착용하고 있다고 논하고 있어서 본고의 관심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나 한국 소설을 자료로 일제강점기 한국 여성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본고와 차이가 있다.
본 연구는 일본 근대소설 『호토토기스』를 통해서 당시의 일본 복식문화의 일부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이며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토토기스』의 개요와 한국어 번역판에 대해 살펴본 다음, 소설 원문에서 묘사된 복식을 추출하고 분석하여, 소설에서 묘사되었을 때의 맥락과 함께 고찰한다.
Ⅱ. 『호토토기스』와 한국어 번역
소설의 제목인 호토토기스[不如帰]는 두견새를 뜻한다. 두견새는 유난히 입 안쪽이 붉은 색이어서 피를 토하면서 운다고 여겨지는데, 소설의 제목은 이러한 두견새의 특징을 가져와 결핵을 앓고 피를 토하는 주인공 나미코[浪子]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나미코[浪子]는 육군 중장의 딸이며 경제적으로 풍족했지만 여덟 살 때 친어머니가 병사해 차가운 새어머니 밑에서 억압을 받으면서 자랐다. 해군 소위인 다케오[武男]와 결혼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신혼생활을 잠시 보냈지만 남편 다케오는 선상 근무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 나미코는 까다로운 시어머니 밑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나미코는 결핵을 앓게 되는데 시어머니는 원정 복무 중인 다케오의 동의 없이 다케오와 나미코를 이혼시켜서 나미코를 친정으로 보냈다. 그사실을 알게 된 다케오는 분노하고 괴로워했지만 마침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최전선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자포자기한 상태의 다케오는 크게 부상을 당해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미코는 다케오 앞으로 익명으로 기모노와 과일 등을 보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나미코의 병세가 점점 심해지자 나미코의 아버지는 딸과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나미코를 교토[京都] 여행에 데려간다. 이때 다케오는 부상이 완쾌되어 도쿄로 돌아갔다가 다시 대만을 향해 남행하는 중이었는데, 반대 방향으로 각각 나미코와 다케오가 탑승한 기차가 지나가면서 그 두 사람은 차창 넘어 우연하고도 짧은 재회를 갖는다. 도쿄에 돌아간 후 나미코는 다케오를 그리워하면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대만에 원정 중이던 다케오는 끝내 나미코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대만에서 돌아온 후다케오가 나미코 묘소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나미코의 아버지와 만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난다.
『호토토기스』는 책뿐만 아니라 신파극을 비롯해 여러 가지 장르에서 수용되었다. 연극, 신체시, 강담, 가요, 도상, 청소년용 텍스트, 영화 등 『호토토기스』는 다양한 장르 텍스트의 총칭이기도 하다(Kido, 2014). 『호토토기스』는 일본의 가정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지만, 가족제도의 이슈뿐만 아니라 군부와 정상(政商) 비판까지도 포함한 사회소설로서의 측면도 지적되고 있다(Kandatsu, 1991).
한국에서는 1912년 8월 조중환에 의해 『불여귀』가 원제 그대로 번역되어 전 2권으로 출판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2월과 9월에 선우일(鮮于日)에 의해 번안된 『두견성』이 보급서관에서 전 2권으로 출판되었으며, 김우진(金宇鎭) 역시 같은 해 9월 동양서원에서 원작의 주요 모티프를 따서 활용한 『유화우(榴花雨)』를 내놓았다. 요컨대 『호토토기스』는 1912년에 번역, 번안, 개작이라는 세 갈래의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근대 소설사에 개입했다(Park, 2010).
『불여귀』의 번역에 대하여 Park(2010)은 “인명을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방식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이자 독창적인 것이었으니 그만큼 『불여귀』가 투철한 번역 의식에 의거했음을 뜻한다”(p. 188)고 하였으나, Kwon(2003)은 “불여귀는 원문의 한자 한 자를 철저히 그대로 옮기려는 ‘직역’이 아닌 원문을 소화해서 설명하는 ‘의역’에 가까운 편”(p. 233)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복식 묘사 부분은 상세하게 번역되지 않았던 것을 원문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다. Kwon(2003)의 연구에서 원문과 번역판, 번안판의 차이를 논하기 위해 소설 첫머리의 주인공 나미코를 묘사한 부분을 예로 들고 있다. Kwon(2003)이 제시한 ‘직역’은 다음과 같다.
上州伊香保의 3층 미닫이문이 열리고, 저녁풍경을 바라보는 부인. 나이는 십팔구. 품위 있게 머리를 올리고, 풀빛의 띠를 맨 자잘한 무늬의 겉옷을 입었다.(밑줄은 논자) 하얀 피부의 갸름한, 눈썹 사이가 조금 좁고, 뺨의 살이 터질 듯한 것이(논자 주: ‘홀쭉한 볼이’의 오역), 흠이라면 흠이지만, 부드럽고 날씬하고 정숙한 인품. (…중략…) 여름의 저녁 어스름에 희미하게 향기 나는 달맞이꽃의 품위를 드리우는 부인이러라1) (p. 231).
위에서 복식 묘사에 해당되는 부분이 “품위 있게 머리를 올리고, 풀빛의 띠를 맨 자잘한 무늬의 겉옷을 입었다”이다. 이 부분을 일본어 원문에 따라 더 엄격하게 직역하면 “품위 있는 마루마게[丸髷]로 머리를 올리고 녹색의 끈을 단 고몬[小紋] 지리멘[縮緬]의 히후[被布]를 입었다2)”가 된다. 원문에는 구체적인 복식 명칭이 제시되었으며 ‘풀빛’인 것은 ‘띠’가 아니라 ‘히후’의 장식 끈이다. 이와 같이 Kwon(2003)에서 ‘직역’한 부분도 복식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명칭이 생략되었거나 오역이 나타기도 했다. 직역이 아닌 ‘번역’과 ‘번안’에서는 더욱 내용이 달라진다.
번역판인 『불여귀』(1912)에서는 해당부분이 “몸에는 능라를 감았으나 번화한 것을 피하고 극히 검소하게 장속하였는데”3)라고 번역되었다. 비단을 가리키는 ‘능라(綾羅)’ 이외에는 구체적인 복식 명칭이 제시되지 않았고 복식의 이미지만 표현되었다. 번역이 아니라 번안인 『두견성』에서는 “흑운 같은 머리를 서양제로 틀어 올리고 맵시 있는 반양복치마를 반쯤 걷어잡고”4)라고 되어 있다. 머리모양이 서양식이고 복식은 ‘반양복치마’를 입은 것으로 원문과 전혀 다르게 묘사되었다.
이와 같이 『호토토기스』는 다양한 한국어판이 존재하지만 복식 묘사는 원문과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원문을 사용해서 복식 묘사를 수집하고 분석할 필요와 의의가 있다.
Ⅲ. 여성 등장인물 복식
『호토토기스』에 등장하는 여성은 주인공 나미코를 비롯해 나미코의 계모, 나미코의 시어머니, 나미코의 이모, 그 딸인 치즈코[千鶴子], 상인 야마키의 딸이며 다케오를 짝사랑했던 도요코[豊子],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한 나미코를 구한 오가와 기요코[小川清子], 나미코의 여동생 등이다. 이 장에서는 여성 등장인물의 복식을 머리모양, 전통복식, 소품의 순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1. 머리모양
주인공 나미코가 처음 등장할 때 머리모양은 마루마게[丸髷]5)<Fig. 1>이고, 가장 친한 사촌동생인 치즈코는 시마다[島田]6)<Fig. 2>였다. 나미코의 남편인 다케오를 짝사랑하는 도요코도 첫 등장 시 시마다였는데7), 그 후 아버지인 상인 야마키의 계책으로 자택으로 초대한 다케오를 안내할 때는 다카시마다[高島田]8)<Fig. 3>였다. 이들 머리모양은 모두 전통식 결발(結髮)이다.
일본의 여성들은 고대부터 머리를 올렸는데, 야요이[弥生]시대(B.C.200-A.D.300)에 이미 머리를 묶은 흔적이 보인다. 남성은 중국의 관위(冠位) 제도를 도입한 후 관에 맞게 상투를 틀었으나 여성은 관이 없었고 나라[奈良]시대(710-794)에는 당나라식으로 의례 시에 머리를 올렸지만 헤이안[平安]시대(794-1185) 이후는 긴 머리[垂髪]를 늘어뜨렸다. 가마쿠라[鎌倉]시대(1185-1333) 이후는 등 뒤에서 느슨하게 묶게 되었으며, 무로마치[室町]시대(1336-1573) 이후에는 서민들 사이에서 묶은 머리를 고리모양으로 땋거나 천으로 싸기도 했는데, 모모야마[桃山]시대(1573-1615)가 되자 무사계급의 시녀들도 머리끝을 말아 고리처럼 만들기도 했다. 유녀(遊女)들이 머리를 높게 올려 묶거나 그것을 고리로 만들어서 마게[髷]를 만들게 되면서 그것이 에도[江戶]시대(1603-1867) 여자 결발의 기원이 되었다(Tannno, 1980). 18세기말부터 결발이 더욱 복잡해짐에 따라 결발을 전문적으로 하는 일종의 미용사인 가미유이[髪結い]에게 의뢰하는 것이 서민들 사이에서도 일반화되어 가미유이는 도구를 들고 집집을 돌았다. 에도시대의 결발은 현재 이름이 알려진 것만 해도 300종을 넘는다고 한다. 같은 머리모양이라도 조정(朝廷)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공가(公家), 무사계급의 무가(武家), 일반시민[町人]에 따라 마게 형태와 머리장식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머리모양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과 연령, 결혼여부 등을 알 수 있었다(Tanaka, 2016). 메이지시대(1868-1912) 이후는 에도시대에 비해 그 종류가 줄었는데, 기혼자는 마루마게, 미혼자는 시마다와 모모와레[桃割れ], 상가(商家) 기혼자의 이쵸가에시[銀杏返し] 등으로 한정되었다(Endo, 1970).
일본 전통식 결발은 머리를 마에가미[前髪], 빈[鬢], 다보[髱], 마게[髷]로 나누고 마게의 토대가 되는 네[根]라고 불리는 부분에 모든 머리를 모아서 올리는 방식이 기본이 된다<Fig. 4>. 마게 형태에 따라 효고마게[兵庫髷], 시마다마게[島田髷], 가쓰야마마게[勝山髷], 고가이마게[笄髷]의 네 가지 계통으로 분류되며 <Fig. 5>에서 볼 수 있는 형태는 그들의 초기 모습이다. 주인공 나미코의 마루마게는 가쓰야마마게 계통으로 마게를 부채를 핀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치즈코와 도요코의 시마다마게는 마게 부분 중간을 끈으로 묶은 것이 특징이다. 도요코가 꽃단장을 했을 때의 다카시마다는 시마다마게의 마게 부분을 높이 올리고 장식을 더한 것으로 현재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전통결혼식 신부 머리모양으로 사용하고 있는 화려한 스타일이다.
주인공 나미코는 처음 등장할 때에는 전통식 결발이었으나, 중간부터 아게마키[揚巻]로 바꾸었다9). 아게마키는 메이지시대 중기부터 도입된 머리모양으로 기존의 전통식 결발을 대신할 서양식 결발인 소쿠하쓰[束髪]의 일종이다. 처음에 소쿠하쓰는 로쿠메이칸[鹿鳴館]이라고 하는 1883년 세워진 근대 사교시설에 출입하는 상류층 부인들이 주로 애용하던 것으로 이들의 전유물과도 같았지만, 메이지시대 생활개량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의 실용적이고 보편적 헤어스타일로 권장되었다. 1885년(明治18) 의사인 와타나베 가나에[渡辺鼎]와 경제기자 이시카와 에이사쿠[石川映作] 등이 ‘일본부인속발회(日本婦人束髪会)’를 결성하여 여성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머리모양을 보급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들은 소쿠하쓰가 전통식 결발에 비해 위생적이고 경제적이며 활동적이라고 선전했다. 곧 소쿠하쓰는 전통복식에도 잘 어울리면서도 실용적이라는 점에서 일반 부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Tannno, 1980). 소쿠하쓰의 예는 <Fig. 6>과 같다.
‘일본부인속발회’의 취지문에서는 위생ㆍ경제ㆍ편익의 세 가지 면에서 소쿠하쓰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종래의 결발은 빈[鬢]을 만들고 머릿기름을 발라서 마게[髷]를 만든 다음 빗과 비녀 등을 꽂기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숙면을 취할 수 없다. 머리를 쉽게 감을 수 없어서 위생상 좋지 않으며 가미유이[髪結]를 불러서 3일에 한 번씩 틀어 올려야 하므로 비용이 많이 들고 외출할 때마다 가미유이[髪結]를 부르게 된다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번거롭게 된다. 이에 비해 서양의 여성은 매일 밤에 머리를 풀고 자기 때문에 깊이 잘 수 있고 옷과 침구가 더러워질 일이 없으며 자유롭게 머리를 감을 수 있다고 장점을 논하고 있다(Osakabe, 2015).
나미코의 계모는 전통식 결발이 아니라 소쿠하쓰로10) 앞머리를 잘라서 웨이브를 주며 이마에서 두 갈래로 나누었다11). 일본에 파마 기술이 들어온 것은 1930년 무렵이므로(Endo, 1970) 이때 나미코 계모의 헤어스타일은 인두를 사용해서 웨이브를 주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나미코의 큰 여동생은 15살로 사게가미[垂髪]에 리본을 장식했다12). 나미코도 화족여학교(華族女學校) 시절에 오사게[垂髪]를 했었다는 묘사가 있다13). 스이하쓰/오사게[垂髪]는 틀어 올리지 않은 머리모양의 총칭으로(Suihatsu, n.d.) 일부를 묶고 나머지를 그대로 늘어뜨리거나 땋아서 내린 머리모양이다. 나미코의 어린 동생은 늘어뜨린 머리모양이었다14).
2. 전통복식
여성 등장인물들의 의복은 모두 전통 기모노차림이다. 일반적으로 기모노라고 불리는 의복의 정식 명칭은 고소데[小袖]이지만, 본 연구에서는 일반적인 호칭을 따라서 ‘기모노’라고 부르기로 하고 양장(洋裝)과 대비되는 일본 전통 차림새인 화장(和裝)은 ‘전통복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기모노의 원류인 고소데는 헤이안시대(794-1192) 이래 장속류의 표의(表衣)인 오소데[大袖]와 대비되는 작은 소매의 간단한 의복이었다. 당시는 오소데의 내의(內衣)였으며 서민들의 일상적인 의류였다. 그 후 왕조복식이 간략화되고 하층 무사계급이 대두하면서 내의가 표면으로 나와 길이가 길어지고 소매도 넓어진 독립된 표의로 완성되었다. 16세기 이후 일본의 복식은 이 완성된 표의로서의 고소데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오늘날 기모노라고 불리는 것이 되었다. 17세기말에는 당시의 각종 문양염색 기술을 결집한 유젠조메[友禅染]가 완성되었으며 그림을 그려 장식한 고소데[描き絵小袖]도 유행하여 다채롭고 자유로운 문양 표현이 가능해지자 복식이 화려해졌다. 에도막부가 검약령을 자주 실시하여 화려한 복식을 금지한 결과 에도시대 중기(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부터 다채로운 색상을 피해 적은 색상으로 미세한 무늬를 넣은 고몬[小紋]과 옷자락에만 문양을 집중시킨 수소모요[裾模様], 안감에만 문양을 넣은 우라모요[裏模様] 등이 나타났다(Tannno, 1980).
친정에서 새해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나미코는 검은색 기모노를 두 겹 겹쳐 입었으며 문양은 나미니치도리[浪に千鳥]의 수소모요이다15). 문양에 나타난 치도리는 특정한 새 종류는 아니며 물가에 살며 떼 지어 나는 물떼새과 새의 총칭이다. 자유롭게 떼 지어 나는 모습이 운치가 있고 소리가 슬프게 들려서 고대부터 시문학에 등장하였으며 문양으로서 공예품과 의상에 표현되었는데, 주로 물과 조합된 문양이 많다(Yumioka, 2005).
<Fig. 7, 8>은 1913년(大正2) 시기의 수소모요 기모노 유물이다. 지리멘 소재이고 원앙새 수소모요의 우스이로이쓰쓰몬[薄色五つ紋]이며 오비는 긴토시[金通し]의 대나무 문양의 마루오비[丸帶], 머리모양은 나미코와 같은 마루마게[丸髷]이다. 나미니치도리[浪に千鳥]의 문양 예는 <Fig. 9>와 같다.
나미코의 기모노차림이 다시 묘사되는 장면은 아버지가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나미코를 데리고 교토[京都]여행을 갔을 때이다. 후쓰오메시[風通御召]의 홑옷[單衣]에 회색을 띤 남색[御納戸色]의 슈친[繻珍] 마루오비[丸帶]를 매고 있다16).
오메시란 오메시지리멘[御召縮緬]의 약칭으로 실을 정련하고 염색한 후에 직조한 고급 기모노감이다. 지리멘은 견직물의 일종으로 꼬임을 강하게 준 우연사와 좌연사를 위사에 교대로 넣고 짠 다음 물에 담가서 정련하여 실을 수축하게 만들어서 잔주름을 내게 한 직물이다. 후쓰오메시[風通御召]는 경사와 위사를 이중으로 짜기 때문에 겉과 안의 문양이 반대 배색이 되는, 오메시 중에서도 특히 고급품이다(Tannno, 1980). 당시 일반적인 기모노는 오메시와 후쓰의 고몬[小紋](자잘한 무늬), 안에는 같은 품질의 기모노를 두 겹으로 입고 오비는 회색을 띤 남색 옷감[御納戸地]에 중소 문양의 슈친[繻珍]이었다고 하니(Endo, 1970) 나미코는 당시의 일반적인 기모노차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모노를 입고 허리에 매는 오비[帶]는 16세기 이후 고소데 차림이 일반화되면서 오비의 장식적 중요성이 커져 현저하게 발달했다. 특히 에도시대에는 오비의 길이와 폭이 늘어나 질도 향상했으며 묶고 남은 부분의 처리 방법이 다양하게 고안되면서 유행을 만들었다. 오비의 겉과 안을 다른 천으로 만든 것이 구지라오비[鯨帶]이고 같은 천으로 만든 것이 마루오비[丸帶]이다. 메이지시대 이후에는 매는 방법이 거의 오타이코[お太鼓]로 정착되면서 오비 중앙부의 장식인 오비지메[帶締め]에 다양성을 주게 되었다(Tannno, 1980). 오타이코는 <Fig. 8>에서 볼 수 있다.
1889년의 기록에 의하면 “오비는 모두 흑수자(黒繻子)와 슈친[繻珍]의 두 가지”라고 있어서(Endo, 1970) 나미코의 담갈색[白茶] 슈친과 회색을 띤 남색[御納戸色] 슈친의 오비도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슈친[繻珍]은 ‘朱珍’, ‘七糸’라고도 표기되며 금실ㆍ은실과 여러 가지 색실로 무늬가 도드라지게 짠 수자직(繻子織)을 말한다. 나미코의 계모도 오비는 흑수자[黒繻子]였다17).
나미코가 비교적 수수한 색상의 기모노를 착용했는데 비해 계모는 “화려한 오메시[お召]의 홑옷(單衣)”18)으로, 색상과 문양은 묘사되지 않았지만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미코의 남편 다케오를 짝사랑하는 도요코는 “소치쿠바이[松竹梅]의 수소모요가 있는 연보랏빛[藤色] 지리멘 세 겹[三枚襲]”19)을 입은 모습이 묘사되고 있는데, “눈부시게 화려한 복장을 할수록 더 허점이 들어나”20)라고 서술하고 있어 원래 가진 외모와 의상이 맞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1892년(明治25)경부터 1894-1895년(明治27, 28) 경에 걸쳐서 연보랏빛의 기모노가 유행이었고 고소데를 세 벌 껴입는[三枚襲] 것이 1895년(明治28) 경의 유행이었다고 하니(Endo, 1970) 도요코는 최신 유행의 차림이었던 것이다. 수소모요[裾模様]인 쇼치쿠바이[松竹梅]는 소나무ㆍ대나무ㆍ매화나무로 중국에서 ‘세한삼우(歳寒三友)’라고 불리는 절조와 청렴의 상징이긴 하나, 용과 봉황처럼 강한 길상의 뜻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송(松)ㆍ죽(竹)ㆍ매(梅)가 가지는 이러한 좋은 이미지가 확대 해석되어 특히 근세 이후 길상문양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Yumioka, 2005). 쇼치쿠바이[松竹梅] 문양의 예는 <Fig. 10, 11>와 같다.
여성의 의복은 기모노 외에도 기모노 위에 입는 히후[被布]와 아즈마코트[吾妻コート]가 묘사되었다. 히후는 나미코 첫 등장 시21)와 나미코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여 바다로 몸을 던지려고 했을 때 나미코를 구한 오가와 기요코[小川清子]가 착용했다22). 히후는 에도시대 후기 교와[享和](1801-1804) 연간에 고안되었다고 하는 외의(外衣) 중 하나로 목둘레가 네모나게 파여 있고 좌우의 넓은 섶이 더블식으로 겹치며 매듭장식으로 고정한다. 처음에는 다도(茶道)나 하이쿠[俳句](시(詩))를 즐기는 풍류인들의 차림이었지만 분세[文政](1818-1830)경부터 시중의 예기들도 입기 시작하면서 보급되어 메이지시대 이후에도 부인과 여아용으로 착용되었다(Tannno, 1980). 나미코의 히후는 초록색 매듭장식이 있는 자잘한 무늬[小紋]의 지리멘이었고 오가와 기요코의 히후는 검은색이었다.
아즈마코트[吾妻コート]는 나미코가 외출 시23)에, 그리고 나미코를 병문안하러 온 사촌 동생 치즈코가 착용했다24). 아즈마코트는 부인용 방한코트로 1891-1892년(明治24-5) 경에 시라키야[白木屋]가 고안해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으로 소재는 사지, 라사 등의 모직물이 주류였지만 크게 유행한 1897년(明治30) 경에는 오메시[御召]와 하부타에 [羽二重](직조한 다음에 정련한 부드럽고 얇은 비단), 1907년(明治40) 경에는 지리멘 등의 기모노 감으로도 제작되어 겉옷으로 애용되었다(Tannno, 1980). 치즈코의 아즈마코트는 감색의 능직[斜綾]이었다. 히후와 아즈마코트는 형태가 유사하지만, 아즈마코트는 초기에는 양복감을 사용했다는 점과 히후에 비해 길이가 길어서 발목 길이까지 내려온다는 점이 특징이다. 히후와 아즈마코트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Fig. 12>이다. 왼쪽 인물이 입고 있는 길이가 짧고 전통적인 무늬가 있는 겉옷이 히후이고, 오른쪽의 어두운 색에 길이가 긴 것이 아즈마코트이다. 인물 옆에는 각각 ‘요즘 메이지 아가씨[明治近世娘]’라고 적혀 있는데 오른쪽 인물에는 괄호를 추가해서 ‘아즈마코트 착용’이라고 되어 있다.
3. 소품
나미코25)와 계모26), 사촌동생 치즈코27)는 반지를 끼고 있으며 나미코는 남편 다케오가 선물해준 브로치를 달고 있다28). 반지는 야요이[弥生]시대(B.C.200-A.D.300) 유적에서 청동제품 몇 개가 출토되었는데, 고분시대(3세기 중반-7세기 말)의 유물은 신라에서 건너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반지에 관한 자료는 많이 찾아 볼 수 없고 에도시대 후반의 우키요에[浮世絵]에 유녀가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이 드물게 나타나지만 메이지시대까지도 반지는 거의 유행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Kawabata, 1969). 목걸이 등의 보석류는 주로 서양복의 부속품이었지만 반지는 단독으로 착용할 수 있었으므로 메이지시대 이후 착용이 많아졌다. 1873년(明治6)에는 도쿄에서 금반지를 끼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보고가 있으며, 특히 소위 ‘인게이지링’이라고 하는 약혼반지의 풍습이 일찍 들어왔다. 반지를 착용하는 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했으며 중류층 이상이면 한두 개를 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성은 순금이 많았고 여성은 수입품인 보석이 박힌 것이 유행했다(Endo, 1970).
나미코는 기모노 차림이지만 남편 다케오가 미국에서 사온 브로치를 달고 있다. 기모노 차림에 브로치를 착용한 예가 <Fig. 13>으로 옷깃 여밈 부분 가운데에 브로치를 달고 있다.
나미코29)와 계모30)는 숄을 걸치기도 했다. 숄은 1889년(明治22) 경에 코트 대용으로 기혼여성과 미혼여성, 소녀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는데 초기에는 주로 큰 숄을 착용했다. 숄 주위에 긴 술 장식을 단 것이 많았고 부인용은 캐시미어, 처녀와 소녀의 숄은 물결모양으로 짠 것이 많았다. 1891-1892년(明治24-25) 경 시라키야[白木屋]의 아즈마코트 판매를 계기로 대형 숄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에 장식적인 숄이 많아졌다(Tannno, 1980). 숄의 다양한 형태와 착용법을 볼 수 있는 것이 <Fig. 14>이다.
그 외 서양식 소품으로 나미코31)와 이모32)는 외출 시에 양산을 들고 있다. 나미코는 손수건33)을 사용하고 있으며 계모는 향수34), 이모는 안경35)을 쓰고 있다.
위와 같이 다양한 서양식 소품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신발과 가방은 전통식이었다. 나미코는 외출 시에 삼실로 엮은 끈목을 바닥에 댄(Tannno, 1980) 아사우라조리[麻裏草履]36)를 신고 있으며 도요코는 통나무를 깎아 만든 높은 나막신인 고마게타[駒下駄]37)를 신고 있다. 가방으로 나미코38)와 치즈코39), 이모40)가 신겐부쿠로[信玄袋]라는 전통식 주머니를 사용하고 있다. 치즈코는 나미코를 병문안하러 왔을 때 오코소즈킨[御高祖頭巾]을 쓰고 왔다41). 오코소즈킨은 방한용 또는 머리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니면 얼굴을 가릴 필요가 있을 때 착용한 것으로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시대 말(1912)까지 볼 수 있었다(Tannno, 1980). 1878년(明治11) 경부터 보라색 지리멘[紫縮緬]을 사용한 오코소즈킨이 유행하여 방한구의 하나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Endo, 1970).
Ⅳ. 남성 등장인물 복식
『호토토기스』에 등장하는 남성은 나미코의 아버지, 나미코의 남편 다케오, 나미코를 짝사랑하다가 나중에는 나미코를 이혼시키도록 시어머니를 선동한 치지와[千々岩], 다케오를 짝사랑한 도요코의 아버지이며 치지와와 한 파인 상인 야마키[山木], 다케오 친가의 집사 다자키, 나미코의 어린 남동생 등이다. 이 장에서는 남성 등장인물의 복식을 머리모양, 서양복식, 전통복식, 소품의 순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1. 머리모양
남성등장인물들의 머리모양은 나미코의 남편 다케오의 묘사42) 이외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케오의 머리모양은 고부가리[五分刈り], 즉 약 1.5cm(五分) 정도의 길이로 머리카락을 깎는 스타일이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산발(散髪)을 하기 전까지 남성도 결발을 했었다. 고분시대(3세기 중반-7세기말)의 토기인 하니와[埴輪]에서 결발을 볼 수 있으며, 608년부터 견수사(遣隨使)를 파견하여 수나라의 문화 전반을 모방하여 관복(冠服)제도를 도입하면서 조관들이 관을 쓸 때 상투를 만들게 되었다. 결발 방법이 무로마치시대(1336-1573)부터 차차 복잡해졌으며 이마로부터 정수리까지 머리털을 깎은 사카야키[月代]도 하게 되었다. 사카야키는 투구를 쓰면 땀이 차므로 정수리를 둥글게 깎은 것이 시작이었는데 전국시대(15세기말-16세기말)가 되자 상시 사카야키를 깎게 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에도 무사 정신과 풍습을 모방하면서 에도시대 내내 남자의 보편적인 머리모양이 되었다(Tannno, 1980).
Osakabe(2015)는 산발의 도입이 기존 신분 차이를 표출하지 않기 위해 유효했다고 논했지만 Ryu(1990)는 산발을 메이지 일본이 외국에게 보여주는 허세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당시 일본의 가장 큰 과제는 치외법권(治外法権)을 철폐하여 동양에서 독립된 근대국가의 형태를 정립하는 일이었다. 메이지정부는 일본이 전근대를 벗어나 문명국가로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열강들에게 어필할 필요를 통감하여 유럽풍 보급에 주력했다. 습속의 변혁은 가장 눈에 띄며 무도회 등의 문화행사는 일본인의 문명도를 나타내는 절호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산발은 메이지유신보다 앞선 시기인 에도시대 말에 서양식 훈련을 받은 병사들을 대상으로 하여 편의상의 목적으로 처음 시행되었다. 1869년(明治2)에는 도쿄에서 결발이 70%, 산발 30%였다고 하는데 1876년(明治9)이 되자 산발 60%, 결발 40%로 역전했으며 1887년(明治20) 이후에는 도시에서 거의 모두가 산발이 되었다(Ryu, 1990).
2. 서양복식
나미코의 아버지와 남편 다케오의 양복 착용은 ‘양복’ 내지 ‘양장’, ‘평복’으로 표현되었다43). 일본에서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에 걸쳐서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불리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사람들의 도래로 인해 남만복식이 권력자층을 중심으로 일부 보급되었으나(Tannno, 1980), 서양복의 본격적인 도입은 메이지유신(1867) 이후의 일이다. 1870년(明治3) 11월 5일에 문관(文官)이 비상시와 해외 도항 시에 착용하는 의복인 ‘비상병여행복(非常並旅行服)’이 제정되었다. 같은 해 12월 22일에는 육해군의 군복도 제정되었다. 1871년(明治4) 8월 9일에는 산발과 제복(制服)・약복(略服) 착용, 칼을 소지하지 않은 것[脫刀]이 허용되었으며 관원들의 집무 시에도 양복 착용은 임의대로 하게 하였다. 같은 해 9월 4일 ‘복제변혁내칙(服制変革内勅)’으로 통수(筒袖), 세고(細袴)의 고대 관복(官服)은 양복과 유사하다고 하면서 왕정복고(王政復古)의 복제로 돌아갈 것이 시사되었다. 본격적인 복제개혁은 봉건적 영주제도를 없애는 폐번치현(廃藩置県)을 단행하여 유신 관료들이 정치 운영을 장악한 이후 가능해졌다. 메이지 신정부에서 정치의 실무를 맡은 유신관료들은 지방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위계가 없었기 때문에 위계를 기준으로 규정되어 있는 기존의 복식제도가 불편했다. 그러나 양복을 입고 산발을 하면 외견으로 공가(公家)・제후(諸侯)・번사(藩士)・평민(平民)의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1871년(明治4)에는 문관대례복이 제정되었으며 1872-1873년(明治5-6)에는 메이지천황의 양복착용과 산발이 진행되었다. 육해군 군복에 이어서 우편, 철도, 세관 등에도 각종 서양식 제복이 도입되었으며, 메이지 10년대(1877-1886) 후반부터 20년대(1887-1896) 초기 사이에는 공식 의례 장소에서 착용되는 화려한 복제뿐만 아니라 학생복까지 정비되었다. 또한 여자의 양장을 장려하는 등 서양복식제도의 대상은 넓어졌다(Osakabe, 2015). 양복의 재킷은 도입 초기 품이 넉넉하고 바지도 넓었지만 메이지 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에는 품이 좁은 실루엣으로 변화하였고 여밈 부분에 4개에서 5개 단추를 달았으며 깃은 작고 가슴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메이지 30년대(1897-1906)에 양복 재킷이 일상복으로 보급되면서 프록코트는 예복이 되었으며 재킷은 길이가 짧고 넉넉한 박스형이 되고 깃도 넓어졌다(Kawabata, 1969).
나미코의 남편 다케오는 외출 시에 외투를 착용했다는 묘사가 있다44). 당시의 외투는 소매가 없는 외투에 케이프를 두른 형태가 많았으며, 메이지시대 초기에는 돈비[とんび]라는 명칭으로 불렀고 무릎정도의 길이었는데 나중에 발목길이가 되면서 주로 니주마와시[二重廻し]라고 불렀다. 소재는 무늬가 없는 모직물이 많았다(Kawabata, 1969).
나미코의 아버지는 육군 중장, 다케오는 해군 소위, 치지와는 육군 중위이지만 군복 착용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으며 치지와의 첫 등장 시 유일하게 “육군중위의 옷을 입었다”45)고 서술되었다. <Fig. 15>는 육군 중위가 1886년(明治19)에 개정된 군의(軍衣)와 제일종모(第一種帽)를 착용한 모습이다.
에도시대 말에 서양식 군복의 기능성을 도입한 일본식 군복이 처음 착용되었으며(Tannno, 1980) 메이지유신 후 1870(明治3)에 육군 군복이 제정되었다. 제정 초기에는 프랑스식이었으며 1886년(明治19)에 독일식으로 개정되었다. 러일전쟁(1904-1905) 중인 1905년(明治38)에 카키색인 육군전시복복제(陸軍戦時服服制)가 제정되었으며 다음해 1906년에 전시복이 정식으로 육군군복이 되었다. 해군은 1870년(明治3)에 영국식 군복이 제정된 이후 1872년(明治5)에 하사졸의 상복(常服)으로 세일러복이 제정되었으며 1873년(明治6)에 해군문ㆍ무관, 하사관 이하, 해병대 복제 제정, 1887년(明治20)에 장교 약복제정과 모자, 금장, 수장, 깃 형태 개정을 거쳐 1945년(昭和20)에 폐지되었다(Tannno, 1980).
3. 전통복식
외출 시에 군복과 양복을 착용하는 남성들도 귀가하면 모두 전통복식으로 갈아입었다는 것을 나미코 아버지와 다케오의 묘사에서 알 수 있다46). 상인인 야마키는 외출 시에도 전통복식이었고, 귀가하여도 역시 실내복으로서 기모노를 갈아 입었다47). 나미코 아버지의 기모노는 네르[ネル]의 홑옷[單衣], 다케오는 류큐쓰무기[琉球紬]의 솜옷 두 겹이다.
네르는 플란넬을 말하며 모사(紡毛絲)로 짠 털이 보풀보풀한 모직물이다. 쓰무기[紬]는 쓰무기이토[紬糸]로 짠 견직물을 말한다. 쓰무기이토는 찌끼고치로 만든 솜에서 뽑은 실로 굵기가 일정하지 않아 이것을 평직으로 짠 쓰무기에는 독특한 결이 있다(Tsumugiori, n.d.). 류큐쓰무기는 오키나와[沖縄]에서 생산하는 쓰무기로 류큐는 오키나와의 옛 지명이다. 감색 바탕에 갈색 줄무늬가 많다(Ryukyu-tsumugi, n.d.).
오비[帶]는 모두 헤코오비[兵兒帶]로 소재는 지리멘[縮緬]인데, 나미코 아버지의 오비는 쥐색[鼠色]이고 다케오와 야마키는 흰색이다. 헤코오비는 하부타에[羽二重]와 지리멘 등으로 만든 폭이 넓은 오비로 봉제하지 않은 천을 졸라서 맨다. 메이지유신 경에 사쓰마[薩摩](현재 가고시마[鹿兒島]현, 메이지 신정부의 주요 인사를 다수 배출한 지역)의 병사들이 닥나무 껍질의 섬유로 만든 흰 베[白木綿]의 오비를 맸었는데 이것이 보급되어 헤코오비가 되었다. 헤코오비는 1871-1872년(明治4-5)에는 기모노의 오비로 사용하게 되었지만 통속적이라는 이유로 품격이 있는 복식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주로 평상복에 쓰였다. 가쿠오비[角帶]에 비해 부드럽고 매기 쉬운 것이 특징으로 1882년(明治15) 경부터 사용이 증가해 남자와 어린이의 오비로 정착되었다. 가쿠오비는 딱딱한 남자 오비의 총칭으로 너비 6-9cm, 길이 4m정도인 것이 일반적이다. (Tannno, 1980)
나미코의 남편 다케오는 도테라[褞袍]를 입었다는 묘사도 있다48). 도테라는 두껍게 솜을 넣은 방한용의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기모노로 단젠[丹前]이라고도 불린다. 줄무늬 쓰무기[縞紬]나 줄무늬 면직물[縞木綿]로 만들며 검은색의 덧깃[掛衿]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쉴 때 착용하는 의복이다(Tannno, 1980).
다케오와 나미코 아버지는 근무 시에 군복을 입고 사적으로 외출할 때는 양복을 입지만, 상인인 야마키와 다케오 친가의 집사 다자키 등은 외출 시에도 전통복식을 착용했다. 그 때 착용된 것이 하오리하카마[羽織袴]이다. 하오리하카마는 근세 이후의 남자 정장 중 하나로 고소데 위에 하카마[袴]를 입고 하오리[羽織]를 걸친 차림이다. 하오리는 무로마치시대 후기(16세기경)에 나타난 외의(外衣)로 섶이 없어서 앞길이 겹치는 부분이 없으며 고소데 위에 걸쳐 입는 길이가 약간 긴 곧은 깃의 의복이다(Tannno, 1980). 하오리는 당초 외출용 겉옷이나 집에서 입는 외의였지만 차차 일반적인 의복이 되어 에도시대 중기 경부터 하카마와 함께 서민 남자의 예장이 되었다. 하오리하카마는 무가(武家) 복식제도에도 편입되어 1862년에 무사 평복(平服), 1867년에 무사 공복(公服)이 되었다. 메이지시대 이후에도 남자의 일반적인 예장으로서 현대까지 계승되었다(Tannno, 1980).
<Fig. 16>은 1890년(明治23)의 그림으로 상등 관리와 의사, 법학박사, 호상신사, 대의사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 앞의 사람, 맨 왼쪽 아래 사람의 차림이 하오리하카마이다. 야마키가 입은 하오리하카마의 소재와 색상에 대한 묘사가 없지만49) 다사키의 경우는 검은 쓰므기[紬]의 하오리였다50).
4. 소품
다케오는 처음 등장할 때에 전통식 버선인 다비[足袋]와 짚신인 와라지[草鞋]를 신었지만51) 그 후에는 구두를 신고 있다52). 일본에서 서양식 구두는 1870년(明治3)에 도쿄 쓰키지에 제화공장이 설립되면서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당시 군복과 관공서의 제복, 예복 제정 등으로 구두의 수요가 증가되면서 일반서민들에게도 서서히 보급되었다. 메이지시대 말(1912년 경)에는 백화점에서도 판매되었다(Tannno, 1980).
서양복식을 착용한 외출 시에는 모자를 쓰고53) 스틱을 들었다54). 그리고 다케오는 장갑을 꼈다는 묘사도 있다55). 전통복식을 갖추었던 야마키도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56) 장식품으로 금사슬과 반지도 착용했다57).
인력거꾼의 묘사에는 만주가사[饅頭笠]와 도유가파[桐油合羽]가 나온다58). 만주가사는 대나무 골조 위에 종이나 가죽 등을 발라서 만든 갓으로 주로 하급무사의 쓰개였지만 메이지시대 이후에는 인력거꾼이나 우편배달부가 주로 사용하였다(Tannno, 1980). 도유가파는 가파의 일종으로 가파는 포르투갈어 capa에 유래한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에 걸쳐서 도래한 포르투갈인이 가져온 것으로 영어의 cape에 해당된다. 펼치면 반원 내지 3/4원 형태가 되므로 마루가파[丸合羽](동그란가파)라고도 불렸다. 마루가파 중 동유를 바른 동유지(桐油紙)로 만든 것이 도유가파이다(Tannno, 1980).
Ⅴ. 『호토토기스』를 통해 본 복식문화
1. 여성 머리모양
주인공 나미코와 가장 친한 사촌 동생인 치즈코가 여학교 동창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오쿠보씨도 혼다씨도 기타코지씨도 모두 마루마게로 올리고 사모님 티를 내는 게 이상해요. … 호호, 치즈코가 마루마게로 올린 모습을 빨리 보고 싶네. 시마다도 아쉽지만”59)라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나미코 주변의 여성들은 모두 전통식으로 결발했으며, 기혼여성은 마루마게이고 미혼여성은 시마다로 올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식 결발은 그 모양으로 신분과 연령, 혼인 여부 등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상징적 의미와 정보를 내포한다. 그러나 서양식 결발인 소쿠하쓰는 머리모양으로 혼인 여부도 알 수 없었다. 그 예로 나미코가 소쿠하쓰의 일종인 아게마키로 바꾸었을 때는 인력거꾼에게 아가씨라고 불리기도 했다60).
한편 나미코의 계모는 계속 소쿠하쓰였으며 마루마게로 올렸다는 묘사가 없다. 계모가 소쿠하쓰였던 이유는 당시 지식계급이 소쿠하쓰를 선호했다고 하므로(Izutsu, 2004) 영국 유학경험이 있는 계모의 합리적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미코가 결핵을 앓고 요양하게 된 뒤에는 머리를 소쿠하쓰 중의 아게마키로 바꾸었으며 다시 마루마게로 올렸다는 묘사가 없다. 나미코는 모든 일에 옛날식을 좋아했다고 하므로61) 소쿠하쓰를 선택한 이유는 사상적인 부분보다는 위생적이고 숙면을 취할 수 있어서 환자 몸에 부담이 적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2. 여성의 전통복식
나미코가 당시 일반적이었던 수수한 기모노를 입었는데 반해 계모와 도요코는 화려한 기모노를 입었다. 화려한 기모노는 계모와 같이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나 호상의 딸인 도요코와 같이 부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나미코도 어렸을 때는 화려한 기모노를 입었으며62) 나미코가 교토여행을 갔을 때 여동생에게 남기기 위해 특별히 화려한 기모노를 골랐다63)는 묘사가 있듯이 나이가 어린 사람 또한 화려한 기모노를 입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묘사에서는 기모노가 물려줄 재산으로서 가치가 있으며 기모노를 물려받은 사람이 그것을 착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미코가 교토여행에서 사이가 좋은 농민 부부를 보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이 있는데, “즐거운 껄끄렁베[粗布]에 비해 근심을 감싼 후쓰[風通]의 소맷자락이 미워서”64)라며 농민부부를 “껄끄렁베”, 불행한 자신을 고급 비단옷감인 “후쓰[風通]”로 표현하고 있다. 메이지유신 후에 사민평등이 되어도 경제적인 면을 포함해서 신분차이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 유학경험이 있고 집안 살림도 서양식으로 하는 계모65)도 아직 서양복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의 양장이 도입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생활개선운동의 성과가 유행처럼 들어온 1918-1919년경의 일이었다. 또한 1923년(大正12) 9월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기존의 생활양식이 무너진 후, 재해 복구 과정에서 합리적인 양장과 단발이 수용되었다(Endo, 1970). 여성의 서양복은 1885년(明治18년)에 화족여학교(華族女學校)에서 공인되었고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가 1886년 9월 25일에 정식으로 도입한 후 지방에 있는 여자사범학교들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당시 서양복은 버슬스타일로 코르셋이 필요한 답답한 것이었으며 제작도 어려웠고 보기에도 예쁘지 않았다. 그래서 1889-1891년 사이에 다시 전통복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88년(明治21년) 고고학자 쓰보이 쇼고로[坪井正五郎]의 복식조사에 의하면 1월 1일-5일 도쿄에서 남자 양복 20%, 산발 100%, 여자 양복 1%, 소쿠하쓰 14%였다. 1월 1일-3월 오사카에서 남자 양복 36%, 산발 100%, 여자 양복 2%, 소쿠하쓰 19%였다(Osakabe, 2015). 이 결과로 남성에 비해 여성의 양장화가 상당히 늦었으며, 남성과 여성 모두 의복보다 머리모양의 변화가 선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조사보다 37년 후인 1925년(大正14)에 도쿄 긴자[銀座]에서 실시된 조사에서도 기모노 차림 여성 99%에 비해 양장 여성은 불과 1%였다(Artwords)고 한다. 당시 유행의 중심지였고 모던걸로 유명했던 긴자거리에서도 그 정도였다고 하니 여성의 양장화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나미코의 어린 동생들 묘사에서도 8살의 남동생은 세일러복을 입고 편상화(編上靴)를 신었는데 5, 6살의 여동생은 기모노를 입고 있다66).
3. 여성의 서양식 소품
나미코와 지즈코는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는데 모두 약혼반지로 받은 것이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에서는 반지의 문화가 없었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 시기에는 약혼반지의 문화는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문화요소임을 알 수 있다. 나미코의 계모는 값비싼 반지를 좌우 손에 끼고 있으므로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진보적인 사상, 또는 화려한 것을 선호하는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나미코가 결핵을 앓고 나서 하얀 숄을 걸친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서 나미코의 사랑의 순수함과 병을 앓은 사람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손수건도 소설 첫 부분에서 다케오와 행복한 외출을 할 때는 연분홍색(ときいろ, 桃紅色)67)이었지만 환자가 되고 나서 기침을 막을 때는 흰 손수건68)으로 묘사되었다.
반대로 계모는 “화려한 캐시미어 숄”로 묘사되었다. 철도역에서 치지와가 계모와 나미코 여동생과 만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묘사를 “화려한 캐시미어 숄과 다홍색의 리본을 맨 사게가미[垂髪]가 멀리 상등실로 들어가는 것을 목송하며”69) 라고 하며 인물명칭을 숄과 머리모양으로 대신했다. 그것으로 독자들은 계모와 나미코의 여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당시의 복식문화에 대한 공통이해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나미코는 외출 시 양산을 지팡이처럼 쓰거나 얼굴을 가리기 위해 폈다. 나미코의 이모도 양산을 쓴 묘사가 있으므로 나이에 상관없이 여성 외출 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모의 안경은 “눈이 아프기 때문일까”70)라고 묘사되었듯이 패션으로서가 아니라 병 때문이라고 서술되었지만 나미코의 계모의 향수는 첫 등장 시에 묘사되어 특징적이다. 이 소설 중에서 다른 인물 묘사에 향수가 사용된 예가 없다. 그래서 당시 향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계모와 같이 상류이고 진보적이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4. 남성의 서양복식과 전통복식
다케오와 나미코의 아버지, 치지와 등 직업이 서양식 군복을 착용하는 군인일 경우, 군복을 착용하지 않는 외출 시에도 양복을 입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평상복으로 착용하는 기모노로 갈아 입었다.
호상인 야마키는 외출 시에도 전통복식인 하오리하카마 차림이다. 야마키는 군복을 군에 납품하는 일도 하고 있어서71) 양복을 접하는 기회도 많았을 것이며 경제적으로 양복을 마련하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키는 전통복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당시 양복 착용 여부를 결정하는데 직업이 큰 요인이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다케오 친가의 집사인 다자키도 외출 시 하오리하카마를 입었다. 하오리하카마 착용 시 모자를 썼으므로 머리모양은 산발이었을 것이며 서양식 가방을 들었다.
같은 전통복식이라도 외출용의 하오리하카마와 집에서 지낼 때 기모노는 달라서 야마키도 집에 돌아가면 보다 편한 기모노로 갈아입었다. 다케오가 해전에서 부상을 입어 입원했을 때 나미코가 익명으로 보낸 의류는 모두 편한 차림의 전통복식이었다72). 나미코가 바느질을 하는 묘사도 있으므로73) 이들은 나미코가 손수 만든 것으로 보여 당시의 바느질 문화도 엿볼 수 있다.
다케오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 중에서 치지와와 다케오의 다른 처지가 의복을 통해 묘사된 부분이 있다. 어린 시절 치지와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다케오 집에서 자랐다. “다케오가 센다이히라[仙台平]의 하카마[袴]를 입고 의식 자리에 앉았을 때, 고쿠라바카마[小倉袴]가 후줄근해진 것을 입고 말석에 앉게 된 치지와”74). 센다이히라는 하카마 옷감으로 최상급이었으며 고쿠라는 학생들이 주로 착용하였다(Kawabata, 1969). 의식 자리에서 정장으로 착용되는 하카마의 소재 차이로 두 인물의 처지 차이가 표현되었는데, 하카마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공통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묘사이다. 또한 인력거꾼의 묘사에 만주가사와 도유가파가 있는데 노동자계급의 전통적 우비임을 알 수 있다.
남성 복식에 대한 묘사 중에서 액세서리가 묘사된 것은 야마키의 금사슬과 반지뿐이다. 만약 이러한 금장식이 경제적인 풍요로움의 상징이라면 나미코의 아버지와 다케오가 착용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는 것은 군인이라는 직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야마키가 신분에 맞지 않는 부를 누리고 있는 것을 야유한 듯하다.
남성 등장인물에서 의복의 색상과 무늬, 소재가 묘사되는 것은 전통복식일 경우이며 군복과 양복차림일 때는 그러한 묘사가 없다. 군복은 직책에 따른 복식이 상세하게 법령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인물의 계급만 제시하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러나 양복은 색상과 무늬, 소재로 선택지가 다양하다. 그래도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았던 이유는 특정 색상과 무늬, 소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공통이해가 아직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외출시에 전통복식을 착용하는 사람에 비해 양복을 착용하는 사람이 아직 적었으므로 양복을 입었다는 서술만으로 그 인물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미코의 아버지가 눈에 띄지 않는 간소한 복식으로 산에서 사냥을 했을 때 육군중장인줄을 모르는 할머니한테 일자리를 권유받는 장면이 있는데75) 당시 직업과 신분을 나타내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복식이었던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다.
5.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과 복식
주인공 나미코는 옛날식을 좋아하고 영리하지만 약간 소극적이며 단아한 여성이다. 전통식 결발에 수수한 기모노를 입었으며 반지와 브로치, 숄, 양상 등 일부 서양식 소품을 사용하였다. 나미코의 계모는 서양식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남성과 논쟁해서 이길 정도로 기가 센 여성이다. 서양식 결발로 머리를 올리고 화려한 무늬의 기모노를 입었다. 반지를 양손에 끼고 향수를 뿌렸으며, 외출 시 화려한 숄을 둘렀다. 호상 야마키의 딸이고 나미코의 남편 다케오를 짝사랑한 도요코는 어리광쟁이고 약간 둔하고 외모에 아쉬움이 있는 여성이다. 전통식 머리모양 중에서도 화려한 스타일에 화려한 최신유행 기모노를 입었다.
나미코의 남편 다케오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애교가 많은 사람이고, 나미코의 아버지는 도량이 넓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한편 어렸을 때 다케오 집에서 자랐고 나미코를 짝사랑한 치지와는 냉혹하고 교활한 성격이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군인이고 양복차림으로만 묘사되어 성격 차이가 복식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호상 야마키는 양심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물욕이 넘치는 성격으로, 금반지와 금사슬을 두른 묘사가 인상적이지만 전통복식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었으며, 집에 돌아와서 갈아입는 실내복으로서의 전통복식은 군인인 앞의 세 사람과 차이가 없었다.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과 복식을 남녀별로 정리한 것이 <Table 1>, <Table 2>이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복식묘사를 보면 복식으로 성격이 묘사되는 것은 주로 여성인 것을 알 수 있다. 남성 등장인물의 경우 직업 등 사회적인 위치를 묘사하면 등장인물의 성격을 비교적 쉽게 전달할 수 있으나 당시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래서 여성들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복식이 활용되어서 남성에 비해 여성의 복식묘사가 많고 비교적 자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Ⅵ. 결 론
본 연구는 일본 근대소설 『호토토기스』를 통해서 당시의 일본 복식문화의 일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소설에서 묘사된 복식을 추출하여 분석한 다음 복식이 소설에서 묘사될 때의 맥락과 함께 당시 복식문화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여성등장인물 복식에서 머리모양은 마루마게[丸髷], 시마다[島田], 다카시마다[高島田], 소쿠하쓰[束髪], 아게마키[揚巻], 사게가미/오사게[垂髪] 등이 있었다. 의복은 기모노[着物](고소데[小袖])이고 기모노 무늬는 나미니치도리[浪に千鳥], 쇼치쿠바이[松竹梅], 소재는 지리멘[縮緬](오메시[御召し], 후쓰[風通])이 있었다. 오비는 마루오비로 소재는 슈친[繻珍]과 슈스[繻子]였다. 기모노 위에 입는 것으로 히후[被布]와 아즈마코트[吾妻コート]가 있었다. 장식품과 소품으로 반지, 브로치, 숄, 양산, 손수건, 향수, 안경이 있었다. 신은 아사우라조리[麻裏草履], 고마게타[駒下駄], 가방으로 신겐부쿠로[信玄袋], 두건으로 오코소즈킨[御高祖頭巾]이 있었다.
남성등장인물의 복식은 서양복식으로 양복, 군복, 외투, 산발이 있었다. 전통식 의복은 실내복으로서의 기모노와 헤코오비[兵兒帶], 외출용의 하오리하카마[羽織袴]가 있었다. 실내복으로서의 기모노 소재는 네르[ネル]와 류큐쓰무기[琉球紬]로 방한용인 도테라[褞袍]도 있었으며 헤코오비의 소재는 지리멘이었다. 소품으로 다비[足袋], 와라지[草鞋], 구두, 모자, 스틱, 장갑, 금사슬, 반지, 만주가사[饅頭笠], 도유가파[桐油合羽]가 있었다.
이러한 복식들이 소설 중에서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그 맥락과 함께 당시 복식문화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여성의 머리모양은 전통식 결발의 경우 연령과 결혼여부로 차이가 있었다. 어릴 때는 단발, 여학생은 오사게, 결혼 전은 시마다이고 결혼하면 마루마게로 올렸다. 그러나 서양식 올린머리인 소쿠하쓰로는 결혼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다. 소쿠하쓰는 주로 합리적인 이유로 선택되었다.
상류여성의 기모노는 수수한 것과 화려한 것이 있었으며 진중한 인물은 수수한 기모노로, 강한 성격과 부유한 인물, 젊은 여성은 화려한 기모노로 묘사되었다. 한편 농민은 거친 천으로 묘사되었다. 여성의 서양복식은 아직 보급되지 않아 서양식은 머리모양과 일부 소품으로 도입되었다. 약혼반지의 문화가 들어왔으며 숄은 기모노 위에 착용되었다. 외출 시에는 양산을 들고 향수도 일부에서 사용되었다.
남성의 경우 직업에 따라 외출 시에 양복을 입을지 전통복식을 입을지 결정되었다. 외출 시 전통복식은 하오리하카마였다. 서양복식인지 여부에 의미가 있어서 서양복식의 디테일에 대한 공통이해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외출 시에 양복을 입었든 전통복식을 입었든 귀가하면 실내복으로서 기모노로 갈아입었다. 서양복식의 경우 외출 시에 모자와 스틱, 구두를 착용했다. 외출 시에 전통복식을 입을 사람도 머리는 산발이며 모자와 가방 등 서양식 소품도 사용했다. 전통복식의 경우 소재로 높낮이가 결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인물의 사회ㆍ신분적 위계를 표현하는데 동원되었다. 또한 특정계급의 직업에서 사용되는 전통식 우비가 존재했다.
본 연구의 한계점 가운데 하나로 창작물인 소설을 연구자료로 삼다보니 그 등장인물인 군대의 고위층 주변 사람들이라는 상류계급 중심으로 대상이 한정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에 대하여 향후 연구에서 동시기의 여러 소설에 대한 다방면의 검토를 통하여 고찰 한다면 당시의 복식문화를 보다 입체적ㆍ종합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을 복식문화의 연구자료로 활용한 시도는 한정적이지만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근대 일본복식에 대해서 그 사회ㆍ문화적 맥락과 함께 국내에 소개한 부분에는 일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장안대학교 2020년도 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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