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가 유물로 보는 대한제국 전후의 복식제도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clothing system of the period around the Korean Empire through the relics of the Uichin royal family. The Korean Empire was an emperor country, that established a status order aligned with the Joseon ceremonial system, in contrast to the Ming system. There was a hierarchy of emperor, crown prince, and king, and distinctions were made depending on whether one would carry on the royal lineage. The emperor wore the Twelve Liang Tongcheongwan, whereas the crown prince and royal king wore the Nine Liang Wonyugwan, Eight Liang Wonyugwan, respectively. Regarding work clothes, there was a distinction between the emperor's purple Ikseongwan and yellow dragon danryeong, the crown prince's purple Ikseongwan and red dragon danryeong, and the royal king's purple Ikseongwan and purple dragondanryeong. Just as the princes of the Joseon Dynasty before the Korean Empire wore black danryeong with a green outer material and indigo lining, they also wore black danryeong after the Korean Empire. Unlike royal men, royal women, including the empress, crown princess, and queen, wore Hongwonsam, and the patterns on the wonsam distinguished their status. Women who carry on the royal lineage wear the Jeonhaeng Utchima skirt. However historical picture indicate that during the Korean Empire, Empress Sunheon, who inherited the lineage when the position of empress became vacant, also wore this skirt.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emperor's status was downgraded to that of a king, and everyone's status was lowered. However the formality of traditional attire remained the same as during the Korean Empire, when emperor uniforms were worn.
Keywords:
black danryeong, green wonsam, ikseongwan, king Uichin, Korean Empire, wonyugwan키워드:
흑단령, 녹원삼, 익선관, 의친왕, 대한제국, 원유관Ⅰ. 서론
가까운 과거라고 하는 백여 년 전의 일도 잘 알지 못하는 터라 근대 유물에 대한 확실한 계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과 경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친왕가 유물은 현전하는 유일한 팔량원유관을 비롯하여, 자적단령, 오조룡보가 달려있는 당의, 원삼, 원삼대, 댕기, 사진자료 등 내력을 알 수 있는 흔치 않은 유물로서 가치가 있다. 의친왕은 고종의 아들로써 조선시대,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며 살았던 인물이고, 그에 따라 왕자[군(君)], 왕, 공(公)으로 신분의 위계를 달리했던 분이기에 그 일가의 유물로 시대에 따른 복식의 변화를 살필 수가 있다. 또한 의친왕가와 관련된 『책봉의궤』, 『길례등록』, 「발기」류 등의 문헌자료를 통하여 유물과 기록을 대조함으로써 유물의 특성을 살피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에 의친왕가 유물을 통해서 대한제국을 전후한 시기에 착용하던 복식의 변화를 살피고 복식제도를 고찰하고자 한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지위가 바뀌고 그에 따라 편찬한 국가 전례서인 『대한예전』의 복식제도는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가져온듯하나 명나라의 제도와는 다른 점이 있다. 의친왕가의 유물을 중심으로 실행상황을 살펴봄으로써 『대한예전』에 나타난 대한제국 복식제도의 운영상황을 살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920년 이후에 제작된 장서각 소장 『예복』(Lee, 2019)은 일제강점기 이후 황실에서 왕실로 격하된 신분제와 그에 따르는 복식 양상을 살피는 자료로 활용하려고 한다. 사료의 기록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지만 유물과 대조함으로써 실행 여부와 기록의 진위를 판별하여 대한제국을 전후한 시기의 복식의례를 조명하고자한다.
Ⅱ. 유물 검토
1. 채색 엽서 속 의화군 상복
“(朝鮮風俗) 高官Manners Of Chosen”이라는 제목이 붙은 <Fig. 1>의 채색엽서는 상복차림의 의화군 사진을 인쇄한 것이다(National Palace Museum [NPM], n.d.-i). 엽서의 뒷면에는 불어로 “Union Postale Universelle CARTE POSTALE”라고 인쇄되어 있다. 채색엽서와 동일한 흑백사진인 <Fig. 2>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채색엽서는 색분해를 통해 색을 입힌 것으로 추정된다. 의친왕이 의화군 시절에 착용한 단령은 유록생운문사겉감에 남색운문사로 안을 받친 흑단령이므로 엽서 속 사진 역시 흑단령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조(1694~1776년)의 21살 연잉군 시절 초상화인 <Fig. 3>, 흥선대원군(1820~1898년) 초상화인 <Fig. 4>를 통해서 흑단령의 색상을 확인할 수 있다. 채색엽서에 보이는 단령은 깃, 소매, 길의 색상이 각각 다르다. 이와 유사한 유물이 숙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가민속문화재 제120-1호 흥완군가 흑단령인 <Fig. 5>이다. 남색운 보문사로 된 길과 섶, 자색운보문사로 된 깃, 소매, 무, 고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길의 소재와 색상은 상하가 동일하다. 단령은 상하가 한판으로 재단되는 옷이므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색상이 다를 수 없다. 채색사진에 길의 상하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색분해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Fig. 5>의 단령 겉감을 남색과 자색으로 섞어서 쓴 이유는 알 수 없다. 겉감에 아청색, 안감에 다홍색을 써서 자색으로 드러나는 조선시대 왕세자 상복 같은 특징이 있는 한편, 안감에 남색을 쓰는 왕자군 상복 규범도 드러나는 특이한 유물이다. 완순군이 착용한 단령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겉감에 아청색, 안감에 남색을 써야 합당하겠으나 자색을 애호하는 시대상과 왕자 신분에 맞게 규범을 지키려는 마음이 뒤섞여서 드러난다.
<Fig. 1>의 사진 속 단령에는 왕자군이 쓰는 백택흉배가 달려 있다. 의화군이 14세 되는 1891년 12월 29일에 군으로 책봉되고 그 이듬 해 1892년 7월 20일에 관례를 올렸으며, 1893년 12월 6일 인목대비 가문인 찬정 김사준의 딸 김덕수와 길례를 올렸다. <Fig. 6>은 백택흉배 수본으로 <Fig. 1>의 사진 속 흉배와 동일하다. 「계 십월길례시의화군의복긔 」 에 금탁흉ㅣ 일쌍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금수가 놓인 흉배임을 알 수 있다. <Fig. 3>의 연잉군 역시 금사가 놓인 백택흉배를 단 흑단령을 입고, 서대를 띤 모습으로 묘사되어서 <Fig. 1>의 의화군 차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 팔량원유관
대한제국에서는 조선에 없던 친왕의 제도를 마련하면서 황제, 황태자, 친왕의 서열을 구분하고 복식으로 구현했다. 친왕을 책봉할 때 대한제국은 『명집례(明集禮)』와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을 참고하였지만 조선의 의례 체제에 부합되도록 조정하였다. 명에서는 황태자와 친왕이 모두 금책(金冊)과 금보(金寶)를 받고 곤면구장복을 갖추지만(Daemyeonghoejeon [大明會典], n.d.; Myeongjimnye [明集禮], n.d.)1), 대한제국의 황태자는 구류면구장복을 갖추고 (금)책(冊)과 (금)보를 받았으며(Daehanyejeon [大韓禮典], 1898; Jeungbomunheonbigo [增補文獻備考], 1908)2), 친왕은 금책과 금인(金印), 칠장복을 받았다(The annals of the Gojong [고종실록], n.d.; Uiwang-yeongwang–chaekbong-uigwe [義王英王冊封儀軌], 1900). 보는 황제와 황후, 황태자에게만 주어졌다. 조선의왕은 금책과 금보를 받고3), 왕세자는 죽책과 옥인을 받았던 것에 비하여 대한제국의 친왕은 금책과 금인을 받았으니 새로운 위계질서가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친왕은 황태자보다 낮은 서열임을 분명히 했고 왕세자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음을 드러냈다. 『대한예전』의 책황태자의(冊皇太子儀)에는 왕태자(王太子)가 면복을 갖춘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국인 대한제국이 탄생하면서 왕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제후국이 아닌 자주국임을 드러내고 있으나 황태자라는 용어를 낯설어하는 인식체계도 보여준다.
『대한예전』에 따르면 황제는 제복(祭服)과 대례복으로 12류면 12장복, 황태자는 9류면 9장복을 착용했다. 그러나 조복에 해당하는 통천관복이나 원유관복이 없고 익선관에 강사포를 갖추는 익선관복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상복으로 익선관, 황룡포를 규정하였다(Daehanyejeon, 1898)4).
『대한예전』은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전례를 실행하기 위해 편찬한 국가전례서이지만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이 환구단에서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도 『대한예전』의 편찬이 본격화되지 못했다. 『대한예전』에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거행한 행사들의 의주(儀註)를 권1에 수록했고, 길례(吉禮)(권2~8)와 가례(嘉禮)(권9~10)가 중심을 이루며, 군례(軍禮)는 권5와 권10, 빈례(賓禮)와 흉례(凶禮)는 권10의 뒷부분에 있다. 전체적으로 편집 체제가 정비되지 못했고, 오례의 분량에서도 불균형이 나타나며, 권3~권5 부분에는 도설(圖說)이 뒤섞여있다. 이런 현상은 황제국인 대한제국이 탄생하면서 국가전례 전반에 걸친 변화가 필요했지만 『대한예전』은 편찬한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미처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한 때문으로 이해된다(Kim, 2009). 그러므로 『대한예전』의 규정을 참고 할 때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익선관ㆍ강사포로 구성되는 익선관복을 삭망(朔望)ㆍ시조(視朝)ㆍ강조(降詔)ㆍ강향(降香)ㆍ진표(進表)ㆍ조근(朝覲)의 옷(Daehanyejeon, 1898)5), 즉 조복으로 규정하고 있는 관복도설은 신중하게 살펴야 할 대표적인 사례이다. 익선관복의 구성이 명이나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착용하던 것과 다르기는 하지만 오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제하는 구성이라는 견해가 있다(Wen, & Choi, 2021). 그러나 실제 착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한예전』보다 늦게 완성된 『증보문헌비고』(1903~1908년)와 『예복』에는 통천관ㆍ강사포, 원유관ㆍ강사포를 조복으로 규정하고 있다(Jeungbomunheonbigo 1908; Yebok [禮服], 1898).
중요민속문화재 274호인 <Fig. 7>의 의친왕 원유관은 겉감 추사, 안감 검은색 갑사를 사용하여 청(靑), 백(白), 적(赤)의 세가지 구슬을 올린 8량관이며 보랏빛을 띤다. 관의 구조는 머리에 쓰는 부분인 하부와 장식부분인 상부로 나뉘는데 하부의 상하 가장자리에는 너비1cm 가량의 금선(金線)을 둘렀고 <Fig. 9-①>의 정면과 <Fig. 9-②>의 후면에 각각 가로 4.21cm 세로 2.81cm의 만초문과 용문을 새긴 금장식을 더했다. 관모의 측면 양쪽에는 <Fig. 9-③>에서와 같이 관모를 고정하는 비녀가 통과할 수 있도록 구멍을 내고 화판을 장식했으며 관모의 끈은 동다회로 하고 양 끝에 가락지매듭을 끼운 방망이술로 마무리하였다(Oryundae Korean Martyrs Museum [OKMM], 2013).
순조 원유관복본 어진에서 구량원유관을 확대한 <Fig. 8>은 <Fig. 7>의 팔량원유관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왕의 9량관은 현색(玄色)의 라(羅)로 만드는데 매량(每梁) 전후에 각9개의 옥을 황(黃), 창(蒼), 백(白), 주(朱), 흑(黑)의 오채(五采)로 꾸미고, 금잠(金簪)을 꽂으며 주색(朱色) 끈[조(組)] 둘을 관모의 양 옆에서 드리워 턱에서 묶어 내리게 되어있다(Chungwantonggo, 1899; Jeungbomunheonbigo, 1908)6). 1830년(순조 30)에 그려진 순조 원유관복본 어진인 <Fig. 8>에 묘사된 원유관에는 금잠이 보이고, 황, 창, 백, 주의 4채가 보여서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세자 8량관은 매량(每梁) 전후에 각 8개의 옥을 삼채(三采)로 꾸미고, 금잠(金簪)을 꽂는다고 했는데 의친왕 8량관은 백색, 창색, 주색의 삼채로 되어 있으며 금잠은 소실되었다(Kim, 2022). 원유관에는 <Fig. 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사포를 착용했다.
『의왕영왕책봉의궤』에 따르면 영친왕이 책봉을 받은 후에 신하들에게 하례를 받을 때 강사포를 착용하였으므로 의친왕의 원유관은 책봉 후 하례에 착용하기 위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친왕 원유관이 8량관인 이유는 대한제국의 신분질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명에서는 친왕과 황태자의 복식에 차이를 두지 않았으나 대한제국에서는 황실의 적통을 이을 신분인지의 여부에 따라서 차이를 두었다. 동일한 친왕의 지위에 있던 영친왕이 친왕 시절에는 (팔류면) 칠장복을 착용했으나 1907년 8월 7일 황태자로 책봉 받은 후에는 구류면 구장복을 비롯하여 과거 조선왕실에서 왕이 착용하던 복식에 해당하는 차림을 했다.
3. 의친왕 익선관, 흑단령
영조 27년(1751)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보서례』 전하시사복도설(殿下視事服圖說)에는 국왕이 상복에 갖추는 익선관을 모라(冒羅)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상방정례』에도 익선관의 재료를 모라로 기록하고 있다. 역대 『가례도감의궤』중 익선관의 재료를 기록한 『(현종명성후)가례도감의궤』, 『(경종단의후)가례도감의궤』에는 익선관의 재료를 당모라, 모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사용한 아청색실을 통하여 익선관이 아청색임을 알 수 있다. 상복차림의 어진에 묘사된 익선관도 검은색이다.
하지만 <Fig. 11>의 오륜대순교자박물관 소장 의친왕 익선관은 진보라빛이며, <Fig. 12>의 고궁박물관 소장 영친왕 익선관의 색상도 이와 유사하다. <Fig. 13>의 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전 고종의 익선관은 붉은 빛을 띤 자색이다.
이들 유물을 통하여 조선시대와 달라진 익선관의 색상을 알 수 있는데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조선왕조와 차별성을 두기 위하여 색조를 달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광무원년에 제정된 황제, 황태자, 친왕의 익선관을 오사모(Jeungbomunheonbigo, 1908)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규정상으로는 색상의 변화가 없으나 실행하는 과정에서 색조에 변화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곤룡포 안에 흰색의 동정을 달았으나 대한제국 고종황제 황룡포의 동정은 홍색, 영친왕 홍룡포의 동정은 짙은 옥색으로 달라진 현상과 일맥상통하는 변화다. 황제의 용보에 일월문(日月文)을 추가하여 가슴에는 붉은색 일문, 등에는 백색 월문을 추가한 것도 변화의 단면이다.
오륜대순교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친왕의 단령은 자색이다. 자색 단령은 복식 제도에는 언급되지 않으나 사람들이 고귀한 색으로 여겼다. 자라(紫羅) 단령을 대군, 왕자의 옷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Park, 1841)이 그 한 예이다. 왕세자ㆍ왕자ㆍ친왕의 관례복에 나타나는 상복을 살펴보면 <Table 1>과 같이 1882년 1월에 관례를 올린 왕세자 척[순종]을 위하여 익선관에 아청용포를 준비했고(Donggungmama-gwanrye-uidaebalgi [1882년 동궁마마 관례 의대발기], 1882), 1907년 1월에 관례를 올린 영친왕에게는 익선관에 자적용포, 홍룡포를 마련했으며(Yeongchinwang-gwanryesi-uibokbalgi [1907년1월 영친왕 관례시 의복발기], 1907), 1892년 7월에 관례를 올린 왕자 의화군을 위해서 오사모에 흑단령을 마련(Uihwagun-gwanryesi-uibokbalgi [1892년 의화군 관례시 의복발기], 1892)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세자 용포는 아청색 겉감, 다홍색 안감으로 제작되므로 시각적으로 자색으로 인식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영친왕의 자적용포는 기록을 현실화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영친왕은 아직 황태자로 책봉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친왕의 자적용포와 더불어 황태자의 홍룡포도 같이 준비했음을 「1907년 1월 영친왕관례시의 복발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은 1907년 8월 7일로 관례 후의 일이지만 이미 황태자와 같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친왕의 옷과 황태자의 옷을 동시에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의왕영왕책봉의궤』를 보면 영친왕을 이미 황태자로 지칭하는 상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강과 이은, 두 황자(皇子)을 왕으로 책봉하기로 하고 1900년 8월 17일에 의례를 거행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은을 위한 의례였다. 이강은 미국에 체류 중이어서 1906년에 귀국한 후 음력 6월 4일에 책봉의례를 거행했으니 이은을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서둘러 준비한 책봉이었음을 알 수 있다.
<Fig. 14>의 의친왕 단령은 겉감에 흑색운문사, 안감에 홍색운문사를 썼다. 『거가잡복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자적단령으로 표기할 수도 있고 복식규정에 보이는 흑단령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 영친왕 단령을 자적으로 표기한 바 있으므로 대한제국의 친왕 또는 왕자군 단령을 자적단령으로 표기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다만 일제강점기의 기록인 『예복』에는 <Fig. 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公)의 대례복과 소례복을 모두 흑단령으로 규정했다. 의친왕 단령의 제작 및 착용 시기를 단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흑단령이 가장 합당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장처에서는 의친왕의 단령을 용포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용포의 전제조건인 용 흉배가 없다. 세종 오례 흉례의식 중 습 조항을 보면 여러 벌의 원령 중 용 흉배가 있는 것만 곤룡포로 기록하고 있다(The annals of the Sejong [세종실록], n.d.).7) 용 흉배 유무가 용포의 가늠자 역할을 한 것이다. 의친왕의 신분으로 본다면 자적단령 착용시 마땅히 용 흉배를 달았겠으나 유물에는 흉배가 달려있지 않으므로 용포가 아닌 단령으로 지칭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더구나 의친왕의 단령이 대한제국기의 것인지 일제강점기의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단령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 의친왕은 공(公)의 신분이 되어 의화군 시절에 착용했던 것처럼 대례복으로 백택흉배를 단 흑단령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Yebok, 1898). 다만 『예복』에는 흑단령으로만 표기해 놓았기 때문에 겉감ㆍ안감의 색상을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에 들어가면서 황실은 왕실로 격하되었다. 서양식 복식제도는 일본의 천황보다 위계를 낮추어 왕실에 맞게 운영하였으나 조선왕실에서 착용하던 전통적인 복식제도는 황실의 위계에 맞추어 운영했다. 『예복』에 정리해놓은 복식일람표에는 황제가 없고. 왕을 최고위로 표기했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왕전하, 황제, 황태자가 나란히 표기되어 있고, 친왕비원삼을 설명하면서 현행 공비(公妃), 공자비(公子妃)로 표기해 놓아서 이중적인 신분체계를 드러낸다. 표면적으로 순종황제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은 친왕의 지위가 박탈되었으며 공(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4. 녹원삼, 남색대
의친왕비 김덕수는 1893년 12월 6일 의화군과 혼인하면서 정1품 연원군부인이 되었고, 1900년 의화군이 의친왕에 책봉된 후 1907년 10월2일 금책과 금인을 받고 왕비로 책봉되었다(Chubong-chaekbong-uigwe [追封(義王妃)冊封儀軌], 1907), (The annals of the Soonjong [순종실록], n.d.)8). 의친왕비 삶의 여정 가운데 그분을 위하여 준비한 원삼을 여러 자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Fig. 16>은 경운박물관 소장 의친왕비 원삼이다. 길과 소매는 초록색도류사, 색동은 홍색 금선단, 노랑색 금선단, 한삼은 소색 생고사로 되어 있다. 한삼은 수자(壽字)로 금박했고, 어깨의 통수스란과 길에 수복화문(壽福花紋)을 금박했으며, 깃에는 박쥐문을 금박했다. 이 원삼의 형태와 소재는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중요민속자료 제63호 녹원삼과 아주 유사하며 금박문만 다르다.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녹원삼에는 <Fig. 16>의 녹원삼의 한삼에 있는 수자(壽字)금박을 길과 소매, 한삼에 시문했으며 깃에는 금박하지 않았다.
「계사길례 의화군부인 패물의대발기」(Uihwagun-gilryesi-uibokbalgi [1893년 의화군 길례시 의복발기], 1893)에 따르면 삼간택에 초록직금전자원삼, 다홍공단봉대를 준비하고 가례에 초록직금원삼을 마련했다. 삼간택에는 보통 부금원삼을 마련하는데 직금원삼을 준비했다는 것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갑오(1894년)사월팔일츈졀 (의화)군부인의복발긔」(Uihwagunbuin-uibokbalgi [1894년 의화군부인 의복발기], 1894)에는 초록사직금원삼, 숑화색사부금져고리, 분홍생수갑사져고리일쟉, 초록사슈자원삼, 숑화색사져고리, 분홍생수갑사져고리 일쟉을 마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군부인으로서 녹원삼을 입다가 순종이 윤비를 계비로 맞아들인 가례에는 자적원삼을 입었다. 「병오십이월가례시 군부인의복발긔」(Uihwagunbuin-uibokbalgi [1906년12월 의화군 부인 의복발기], 1906)에 자뎍별문단부금원삼, 다홍별문단내쟉일쟉으로 기록하여 신분의 변화를 보여준다. 의화군부인이 친왕비로 책봉받은 것은 1907년이지만 그의 배우자인 의왕이 친왕이기 때문에 군부인보다 격을 높여서 대우한 것으로 보인다.
<Fig. 17>에 보이는 앳된 모습의 의화군부인은 원삼을 입고 있다. 의화군부인 좌우로 순헌황귀비 엄씨, 여인 3인, 일본 여인 4명, 남녀 어린이 2명이 있다. 의화군부인 오른편에 있는 일본 여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부인 이토 우메코(伊藤梅子)이다. 고궁박물관 소장품 설명에는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의 부인이라고 하였으나 잘못된 설명이다. 사람들 뒤에는 일본식 병풍과 조선식 병풍이 놓여있으며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있다. 남녀 어린이는 각각 남바위에 두루마기를 입은 한복과 일본 옷을 입고 있다. 남바위를 쓴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 겨울 같지만 의화군 부인 뒤에 서 있는 여인은 저포(苧布) 장삼을 입고, 의화군부인은 사(紗) 원삼을 입었으며, 황귀비는 단(緞) 원삼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병풍을 높이 올린 것으로 보아 층고가 높은 건물로 추정된다. 나란히 선 의화군부인과 순헌황귀비의 원삼에 보이는 색조 차이가 단과 사의 소재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의화군부인이 입고 있는 원삼은 <Fig. 18>에서 보듯이 색동의 배치로 보아 홍원삼일 가능성이 있다. 녹원삼은 녹색소매, 홍색끝동, 노랑색끝동, 한삼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자적원삼은 자색소매, 청색끝동, 노랑색끝동, 한삼의 순이다. 홍원삼은 홍색소매, 노랑색끝동, 청색끝동, 한삼의 순이며, 황원삼은 황색소매, 홍색끝동, 청색끝동, 한삼의 순이다.
순헌황귀비가 1903년에 귀비로 책봉될 때 준비한 「계묘십일월초칠일귀비자가봉비시발기」(Hwanggwibi-chaekbongsi-uibokbalgi [1903년11월 황귀비 책봉시 의복발기], 1903)에 따르면 다홍직금구봉 원삼, 금치봉흉배일쌍, 오색금의단후수, 홍공단상, 남공단부금하피, 양남별문단전행웃치마 직금구봉스란을 준비했다. <Fig. 17>의 황귀비가 입고 있는 원삼의 색을 추정해보면 다홍색이며 용흉배견화를 달았고, 대란치마, 전행웃치마를 갖추어 입었다.
황귀비 옆에 선 의화군부인은 봉황흉배를 단원삼에 두벌의 스란치마를 입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적통을 잇는 인물만 전행웃치마를 입을 수 있었는데, 대한제국에서는 순헌황귀비가 황실의 대를 잇는 모후로서 실질적인 황후의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차림으로 이해된다. 의화군부인이 입고 있는 원삼의 금박문은 <Fig. 16>의 경운박물관 소장 녹원삼과 동일하며 고궁박물관 소장 원삼용 수복자도류불수화문목판[정유신조(1897년)]문과 동일하다. 다만 사진 속 의화군부인의 원삼은 경운박물관 소장 녹원삼을 비롯한 다른 녹원삼의 끝동과 색상 배치가 달라서 녹원삼이라고 볼 수 없다. 순종의 병오(1907년) 가례에 군부인을 위하여 자적원삼을 마련하였으므로 자적원삼일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으나 이 또한 <Fig. 19> 광화군 자적원삼의 색동 배열과 다르다. 오히려 홍원삼의 색동배열과 동일하여 친왕비로 책봉된 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Fig. 20>에 보이는 의친왕비의 원삼 역시 끝동의 배치로 분별하건데 녹원삼이 아니고 자적원삼도 아니어서 의친왕비로 신분이 격상된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사진인 <Fig. 21>과 배경이 동일해 보인다. <Fig. 21>의 순종이 걸고 있는 목걸이로 볼 때 1907년 10월 17일 이후의 사진(The annals of the Soonjong [순종실록], n.d.)9)으로 추정된다. 의친왕비는 1907년 10월2일에 친왕비로 책봉을 받았으므로 홍원삼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Fig. 21>에 보이는 순정효황후 원삼에는 용흉배견화가 달렸으나 <Fig. 20>의 의친왕비 원삼에는 봉황 흉배가 달렸다. <Fig. 22>에 보이는 순정효황후와 의친왕비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통천관 강사포를 갖춘 것으로 볼 때 대례복으로 원삼을 착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의친왕비의 원삼은 끝동의 배치로 보건데 순정효황후처럼 홍원삼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순정효황후는 왕실여인의 적통을 드러내는 전행웃치마를 갖추고, 의친왕비는 갖추지 않았으며, 순정효황후는 용흉배견화를 달고 의친왕비는 봉황 흉배를 달았다.
<Fig. 23>의 『예복』을 살펴보면 원삼에는 신분별 색 규정이 없다. 황후의 원삼을 홍원삼으로 규정하고, 황태자비와 친왕비의 원삼에는 황색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홍원삼으로 유추할 수 있다. 색상에는 차이가 없으나 무늬에 차이를 두어 황후 용봉문, 황태자비 난봉문, 친왕비 화봉문으로하였다. 그러나 실제 사진자료를 검토해보면 의친왕비 원삼의 금박문양은 화봉문이 아닌 길상화문이다. 『예복』의 제도가 마련되기 이전에는 황후용봉문, 황태자비 봉황문을 쓰지만 방계 왕실여인은 길상화문을 써서 차별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복』에 따르면 원삼을 왕실의 적통을 잇는 여인들의 소례복으로 규정하고, 대군비 이하 종친 부인들의 대례복으로 규정하고 있다. <Fig. 24>와 <Fig. 25>는 1931년 의친왕의 장남 이강 공의 가례에 촬영한 사진이다. <Fig. 24>의 의친왕비는 용보를 단 명복 차림의 화봉문 홍원삼을, <Fig. 25>의 이강부인은 봉황흉배를 단 명복차림의 화봉문 녹원삼을 입었다. 왕실 여인 최고의 머리모양인 대수를 하고, 명복에 갖추는 하피와 홀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폐슬, 패옥, 후수, 대대, 서대 등은 눈에 띠지 않지만 명복에 따르는 부속품도 갖추었을 것이다.
의친왕비가 오조룡보를 달고 있는 모습은 <Fig. 24>에서 처음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왕실남자들의 전통예복을 대한제국의 황실 제도에 준해서 운영했던 것처럼 왕실 여인의 전통예복도 대한제국의 황실 제도에 준해서 운영했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왕비가 아닌 신분으로 홍원삼을 쓴 사례는 경빈김씨의 상례에서 찾을 수 있다. 1907년에 세상을 떠난 헌종 후궁 경빈김씨의 상장례 기록인 『경빈예장소등록(慶嬪禮葬所謄錄)』에 따르면 숨을 거둔 직후 망자(亡者)의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흔들며 망자의 혼을 부르는 복(復)에 홍직금단부금원삼(紅織錦緞付金圓衫)을 썼다(Park, 2009). 대한제국에서는 조선과 달리 홍원삼을 착용하는 신분의 범주가 넓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자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의친왕비 원삼은 초록원삼, 자적원삼 등이고 홍원삼을 마련한 사례는 없으나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사진자료로 홍원삼을 착용한 사례를 추정할 수 있다.
이상의 사례로 볼 때 경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부금녹원삼의 착용자에 대하여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겠다. 의화군부인은 삼간택 때부터 직금원삼을 입었던 신분이므로 부금원삼의 주인공이 의친왕비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자녀를 위해 제작해 두었던 것일 수도 있고, 의친왕의 여러 부인 중 누군가가 입었던 원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경운박물관에는 유모, 기비, 보비 등 길례에 참여한 궁녀용 대대로 추정되는 <Fig. 26>의 남색대가 있다. 대대 안쪽에 ‘계사길례시의화궁팔’이라는 묵서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길례를 위하여 마련한 궁녀의 흑장삼에 띠는 대대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발기에 따르면 의친왕비 원삼에는 다홍색 봉대를 마련했다. 왕실인물들의 의복을 마련하는 발기에는 원삼과 대대를 동시에 기록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기타발기에는 아청궁사 장삼 1죽, 남공단 금띠 3죽 등(Keundyeongogan [큰뎐고간], n.d.; Uidaebalgi [의대발기], n.d.) 많은 궁녀를 위해 대량으로 의복을 준비한 상황을 알 수 있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 반차도의 일부인 <Fig. 27>에서 궁녀가 남색대를 띤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대와 관련한 기록을 찾아보면 『상방정례』에는 대군부인의 길례에 기비4인, 유모1인을 위하여 겹할의(裌豁衣) 5차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재료로 아청면포 각1필, 내공 백면포 각1필, 대 5차용 남초각 반폭 8자를 기록하고 있다(Sangbangjeongrye [尙方正例], 1750). 『의화군가례등록』에는 유모1인, 기비 4인을 위하여 아청면포 겹활의 5차를 준비하고, 그밖에 동원되는 보비 4인, 친영시 부인차비1인, 근배차비2인, 조현례시 대전차비1인, 부인차비1인 등 여러 명의 궁녀를 위한 의복을 준비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계사길례시의화궁 팔’ 이라는 묵서는 궁녀용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5. 당의
<Fig. 28>은 경운박물관 소장 의친왕비 당의로 겉감은 연두색 생고사, 안감은 진분홍 생고사로 지었으며 운봉문을 통수스란과 길에 금박했고 오조룡 흉배견화를 달았다. 당의는 소례복으로 착용했는데 친잠례 후 촬영한 <Fig. 29>에서 당의를 착용한 사례를 볼 수 있다. <Fig. 29> 속 윤황후와 의친왕비는 화관을 쓰고 수복자가 금박된 당의를 입었으며 흉배는 없다. 다른 인물들은 금박이 없는 당의를 입고 족두리를 썼으며 계단 아래 황후의 좌우에 선 궁녀는 첩지만 있을 뿐 관모가 없으며 치마, 저고리 차림이다. 의례에 따라서 당의에 흉배를 달기도 하고 떼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6. 댕기-새앙머리용 댕기, 가래머리용 댕기
새앙머리 댕기, 가래머리 댕기는 각각 새앙머리와 가래머리[가라머리]에 드리우는 댕기이다. 새앙머리와 가래머리는 모두 혼인 전에 하는 머리모양으로 두 가닥으로 땋은 머리를 정리하는 방식이다. 어린아이의 머리를 두 가랑지게 땋아 늘인 것을 가랑머리(Nam, 1987)라고 하듯이 가래머리란 두 가닥 머리로서 가체, 가라치를 더하여 성장한 머리모양이다. 『규합총서』에는 가래머리에 대하여 “긴 머리를 좌우로 묶어 동심대를 만들어 두 어깨에 드리우고 주취를 꽂아 장식하는 머리 모양으로 당시 신부들이 하는 머리모양”(Lee, 1975)이라고 하였다. 가래머리와 유사한 머리모양인 벌생에 대하여 이여성은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아서 둥글게 머리 뒤에다 두 개를 틀고 긴 비녀(龍簪)로 꽂는데 빨간 댕기로 그 두 개의 튼 머리 사이를 장식한다(Son, 2004).”고 하였다.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Gachesingeumsamok, 1788)에서는 “낭자머리[娘子雙髻] 즉 처녀의 쌍계는 두가닥을 각각 동글게 서린 머리모양”이라고 하였다. 가래머리, 낭자머리, 벌생이 모두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동일한 머리모양에 대한 이칭으로 이해된다. 소녀의 쌍계는 오랜 세월 이어 온 전통적인 머리모양이다.
<Fig. 30>의 새앙댕기는 이해경 왕녀가 경운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제비부리 모양의 끝부분에 곡옥 장식이 달려있다. 본래 달려있던 옥장식이 없어져서 왕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유사한 옥장식을 구해서 달아 놓은 것이라고 하니 원형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발기」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새앙댕기 장식은 진주장옥반자, 진주장원반자 등이며, <Fig. 31>의 고궁박물관 소장 영친왕비 새앙머리댕기에도 진주가 장식된 옥반자가 달려있다. 조선시대에 곡옥으로 장식했던 경우를 찾을 수 없으므로 주의를 필요로 한다.
한편 박쥐 금박을 물린 자색문단 위에 5개의 자개화판을 장식한 <Fig. 33>의 댕기는 가래머리용 댕기로 추정한다. 「1893년 의화군 길례시 자장발기」에 기록된 매화판5개가 있는 자적금사이댕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래머리는 삼간택에 최종적으로 낙점된 처녀가 별궁으로 갈 때 하는 예장용 머리로서 첩지와 장잠[장돈]을 장식했다(Jeongmigaryesi-ilgi [丁未嘉禮時日記], 1847). 가래머리에는 댕기류 장식으로 이해되는 가른부전, 걸부전을 드리운다. 『복온공주가례등록』에 따르면 간택에 임하는 부마 후보자가 쌍동계를 했는데 이러한 수식(首飾)을 부전(付鈿)이라고 하고 속칭 당머리[당마리唐馬里]라고 기록했다(Bokongongju-garyedeunglok [福溫公主嘉禮謄錄], 1830). 부전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머리를 장식하는 댕기로 정리할 수 있다.
자장발기에 따르면 가래머리용으로 진주장옥장돈[장잠]과 진주를 더한 자적능금댕기, 매화판5개가 있는 자적금사이댕기를 갖춘 가른부전, 그리고 진주장밀화도화반자와 자적향직금당기도금니사장 옥반자로 이루어진 걸부전을 준비했다(Uihwagun-gillyesi-jajangbalgi [1893년 의화군 길례시 자장발기], 1893). 가래머리 부속품의 쓰임새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비녀[장잠 또는 장돈]와 첩지가 포함된다. 또한 물목을 분석해볼 때 사이댕기가 포함되는 가른부전은 앞댕기, 걸부전은 도투락댕기에 해당하는 뒷댕기로 추정된다.
『정미가례시일기』에는 사이댕기와 끝댕기를 각각 준비하여 <Fig. 32>의 앞댕기처럼 좌우가 연결되는 구조가 아니고 분리된 구조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머리를 두가닥으로 나누어 각각 둥글게 서리고 비녀로 고정시킨 후 둥글게 서린 머리 사이를 사이댕기로 꾸미고 비녀 양 끝에 진주로 장식한 끝댕기를 드리운 머리모양을 <Fig. 34>에서 짐작할 수 있다. <Fig. 34>의 여인들은 비녀를 꽂았고, 흰색 원 안의 댕기가 끝댕기이며 뒷면에 있어야 할 사이댕기는 보이지 않으나 걸부전을 드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Fig. 35>의 여인들은 비녀를 꽂지 않은 새앙머리를 하고 새앙머리댕기를 드리웠는데 이러한 댕기가 가래머리에서는 걸부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Ⅲ. 결론
대한제국은 황제국이지만 명나라의 제도와는 달리 조선의 의례 체제에 부합하는 신분 질서를 세웠다. 황제, 황태자, 왕으로 위계를 두어서 적통을 이을 신분 여부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황제는 십이량관, 황태자[왕태자] 구량관, 친왕 팔량관을 썼다. 상복의 경우 황제 자색 익선관ㆍ황룡포, 황태자 보라색 익선관ㆍ홍룡포, 친왕 보라색 익선관ㆍ자적용포로 구별하였다. 또한 단령 안에 받친 옷의 동정을 황제 붉은색, 황태자 짙은 옥색, 친왕 흰색으로 차별화하였다. 대한제국 이전 조선시대의 왕자가 유록색 겉감에 남색 안을 받친 흑단령을 입었듯이 대한제국 이후에도 왕자는 흑단령을 입었다. 겉감에 흑색운문사, 안감에 홍색운문사를 쓴 의친왕 단령은 『거가잡복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자적단령으로 표기할 수도 있고 복식규정에 보이는 흑단령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 영친왕 단령을 자적으로 표기한 바 있으므로 대한제국의 친왕 또는 왕자군 단령을 자적단령으로 표기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왕실 여성은 황후, 황태자비, 친왕비 등이 모두 홍원삼을 입었으며 원삼에 넣는 문양으로 신분을 구별하였다. 색상에는 차이가 없으나 무늬에 차이를 두어 황후 용봉문, 황태자비 난봉문, 친왕비 화봉문으로 차별화한 것이다. 황태자비 난봉문, 친왕비 화봉문의 차별화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나타나는 양상으로 추정된다. 전행웃치마는 왕실의 적통을 잇는 여인들이 입을 수 있는 치마이지만 대한 제국기에는 황후의 자리가 비어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적통을 잇게 된 순헌황귀비도 착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의친왕비 당의의 화봉문 금박, 오조룡보 등은 일제강점기의 시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추정한다. 새앙머리용 댕기, 가래머리용 댕기 유물은 여성의 머리 모양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일제강점기에는 황제의 신분이 왕으로 격하되면서 모든 이들의 신분이 낮아졌지만 전통적인 예복의 격식은 황제복을 입던 대한제국기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3년도 배화여자대학교 학술연구비를 지원 받아 수행된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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