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부인(恭慎夫人) 한씨(韓氏)에게 전달된 물품 및 출토복식 분석을 통한 15세기 조선 사대부 가 여성복식 고찰과 착장고증
Abstract
Lady Han, Gongshin-buin(恭愼夫人韓氏: 1410~1483) was Gongnyeo of Ming emperor and sister of Han Hwak(韓確:1400~1456). The aim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 of costume presents for Lady Han, and to investigate a part of Joseon women’s attire in the 15th century. Most of the presents for Lady Han were native products of Joseon to help alleviate her homsickness, but surviving relics are very rare. The costume-related presents included daily accessories and fabrics such as natural ornaments, embroidered pouch, needle case, wig, wooden comb, portable knife with multi-blades, various colored plain silk [綿紬] and ramie. Also, preceding research analysis of costume relic were combined with study of presents for Lady Han’s. The most salient costume of Joseon women in the 15th century was the symmetric collared jacket. In addition, ornamented jeogori, pouch with pine nut stitch, chima, jangot, jangsam, black veil[羅兀] made with ra or jeung, glass beads, paintings of Ming and Joseon can be references. Illustrations show 6 representative type of Joseon women’s full attires in the 15th century are as follows. First, is a combination of ‘symmetric collared jacket with peacock rank badge, jeoksam, chima, underwear’ and ‘hoa-a, janga-a, embroidered pouch, needle case, knife with multi-blades: presents for Lady Han’. Second, formal wear focusing on symmetric collared Jacket of cloud pattern. Third, formal wear focusing on multicolor ornamented jeogori. Fourth, town wear with jangot and neoul. Fifth, formal wear with jangsam. Sixth, daily wear focusing on banbi with symmetric squre collar. Accessories and underwear shown in another illustration were same as the first illustration. Results of this study can be used as content for making historically accutate costumes as well as costume education.
Keywords:
15th century, daily accessories, Joseon women’s attire, Lady Han, presents키워드:
15세기, 일상소품, 조선여성복식, 한씨, 선물Ⅰ. 서론
본 연구는 15세기 세도가 출신인 명(明) 공녀에게 보내진 조선 복식소품의 종류와 의미를 고찰하고 현존유물과 조합하여, 15세기 조선 여성복식 생활의 일부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한확(韓確:1403~1456)의 가문은 명과의 외교를 담당한 15세기 조선의 세도가였다. 한확의 막내누이인 한계란(韓桂蘭: 1412~1483)은 선덕제(宣德帝)의 후궁이었으며 사후에 공신(恭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씨는 조선의 토산품을 강하게 요구하여 많은 물품을 전달받았다. 15세기 조선여성복식과 관련된 문헌과 유물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한씨에게 전달된 조선 복식소품은 15세기 사대부 가 여성복식 연구의 주요 참고자료이다.
그러나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을 중심으로 15세기 조선 여성복식생활의 특성을 고찰한 연구는 아직 찾기 어렵다. 비교적 최근의 관련 선행연구로는 15세기 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복식의 보존처리와 복식의 직물(Lee & Bae, 2007; Jo & Bae, 2005),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 대금의의 특성 고찰(Song, 2007), 조선 전기의 장삼(長衫) 분석(Lee, 2016), 15~18세기의 조선 출토 여성복식의 시대적 특징 규명(Song, 2008), 조선과 명의 외교와 공녀의 친족관계(Lim, 2013), 염료를 포함한 조선전기의 일본무역(Lee & Park, 2003)과 관련된 연구들이 있다. 15세기 여성복식에 관한 선행연구는 아직 많지 않으나, 실록에 기록된 공신부인 한씨를 위한 복식물품은 직물과 소품 위주로 구성되었고 매우 다양하다.
본 연구를 통해 『명사(明史)』, 『성종실록(成宗實錄)』 등의 정사 중심 고문헌 및 15세기 전후의 조선 여성복식 관련 선행연구를 살펴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의 특성과 의미를 고찰한 후, 이를 적용하여 15세기 조선 사대부 가 여성복식의 착장형태 및 고증요소를 제시하려고 한다. 연구과정과 범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종실록』 및 기타 고문헌을 중심으로 하여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 중에서 15세기 조선 토산복식소품으로 여겨지는 개체를 선별하고 종류와 특성을 분석한다. 둘째, 관련 선행연구 및 15세기 무렵의 복식유물을 분석하여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에 나타난 특성과 조합한다. 세째, 조합된 결과를 전신착장상태의 도판으로 고증하여 제시한다. 이를 통해 15세기 조선의 사대부 가 여성복식과 소품의 특성을 추론하고, 명과 구별되는 15세기 조선 여성복식생활의 한 부분을 고찰할 수 있다.
한씨에게 전달된 복식물품 목록은 매우 상세하나 명칭과 재료 위주로 나열되었고, 정확한 형태는 나타나 있지 않다. 『명사』에도 이를 파악할 만한 기록은 없으며 15세기의 복식유물 수도 적다. 따라서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15세기의 현존유물을 중심자료로 하되, 시대가 다소 다른 유물과 사료도 참고하여 복식물품과 의복의 형태를 유추해야 함을 본 연구의 한계점으로 밝히고자 한다.
Ⅱ.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과 관련된 시대적 배경
한확의 가문은 15세기 명과 조선의 외교를 주도한 세도가이며, 서성부원군 한영정(韓永矴:생몰년도 불명)의 아들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한확(韓確:1403~1456)(‘Han Hwak’, n.d.), 한확의 아들인 좌참판 한치례(韓致禮:1441∼1499)(‘Han Chi Rye’, n.d.), 한확의 조카인 영의정 한치형(韓致亨:1434~1502)(‘Han Chi Hyeong’, n.d.) 등의 인물로 대표된다. 한확 가문의 권세 중 적지 않은 부분은 여성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1417년에 한확의 누이가 영락제(永樂帝: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여비(麗妃)로 책봉되었고, 한확은 명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Han Hwak’, n.d.). 1424년에 영락제와 여비가 사망한 후, 한확의 막내누이 한계란은 본인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선덕제(宣德帝:선종(宣宗))의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한계란은 4대에 걸쳐 명 황제의 신임을 얻고 1483년에 사망했으며 성화제(成化帝:헌종(憲宗))로부터 공신(恭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Wangbirok[王妃錄]’, 2001). 『헌종순황제실록(憲宗純皇帝實錄)』권 240을 보면 “병신년에 궁인 한씨를 공신부인에 추사하여 내궁에서 제를 올리고 무덤을 조성하도록 공부에 명했다(丙辰贈宮人韓氏為恭慎夫人, 命內官賜祭工部造墳).” 라 기록되어 있다(‘Gongshin-buin[恭愼夫人]’, n.d.).
한확은 계유정난에서 수양대군을 도와 서성부원군과 좌의정에 올랐고(‘Han Hwak’, n.d.), 금은(金銀) 공납 면제를 시도하고 세조의 등극을 명에허가받는 공적을 올렸으며(Lim, 2013),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아버지로서 외척의 지위도 획득하였다(‘Han Hwak’, n.d.). 한확 가문의 강한 권세는 다음 대로도 이어졌다.
그러나 명 황실에서 힘을 얻은 한계란(이하 한씨)는 성종(成宗) 재위기에 각종 물품을 조선에 요구했다. 이를 거절할 수 없었던 한확 가의 관리들과 조선 조정은 신중히 한씨의 요구를 검토했고, 황제의 진헌품과 별도로 한씨를 위한 물품목록을 만들었다. 이는 『성종실록』에 신물(信物), 인정(人情) 등의 용어로 기록되었는데, 궁인(宮人)한씨를 위한 물품이므로 공물과 성격이 다른 ‘선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Ⅲ. 한씨에게 보낸 복식물품의 특성과 15세기 조선 여성 복식소품
1. 한씨가 요구한 복식소품의 의의
『명사』 320 열전(列傳) 제 208 외국(外國) 1조선(朝鮮) 편을 보면, “조선에서 이물(異物)을 자주 보내므로, 3년 봄에 칙유하여 상공(常貢)을 갖추게 하고 진기한 것은 금했다(時朝鮮頻貢異物, 三年春, 敕諭瑈常貢, 勿事珍奇)”라는 기록이 있다(Ershiwushi-Mingshi 5, 1975, p. 3954). 이는 세조(世祖) 13년인 1467년의 기록으로서, 조선 측에서 명이 요구한 물품 대신에 구하기 쉬운 물건을 보낸 경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씨가 원했던 소품들은 명 황실로 조선 토산품이 유입되는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8년(1477년) 5월 25일에 한씨는 조카 한치례에게 매우 강한 요구를 전달했다.
Sungjong-sillok(n.d.)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한치례가 아뢰기를, 한씨가 신에게 이르길, “본국에서 차는 노리개로 반합(斑蛤), 장아(獐牙), 호아(虎牙) 같은 것은 귀천없이 다 차는데, 너는 왜 너의 가인(家人)이 차는 것을 거두어 내게 주지 않았느냐? 반드시 한비(韓妃)께 고하여 많이 준비해 오라. 안되거든 네가 마땅히 내가 준 저사로 사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韓致禮啓曰, 韓氏謂臣曰, 本國佩玩如斑蛤獐牙虎牙, 無貴賤皆佩, 汝何不收汝家人所佩以饋我乎? 須告韓妃, 多般備來. 否則汝宜以吾所與紵絲貿來)(‘Norigae’, n.d.).
15세기 후반의 조선여성들이 선호한 노리개 주체(主體)는 노루와 호랑이의 치아 및 얼룩무늬 대합조개 등의 자연물을 가공한 것이 주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장식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을 한씨가 일부러 ‘본국’의 노리개로서 요청한 것으로, 조선에서 귀천없이 찼던 장식이었다. 따라서 이는 명에서 유행하지 않았던 15세기 후반 조선의 토산 장신구로 분류될 수 있다.
한씨가 요구한 물품들은 향수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성종실록』 81권 1477년 6월의 기록을 보면, 한씨는 고국의 토물(土物)을 보면 고국을 보는 듯 하다는 이유로 "면주낭아(綿紬囊兒), 호아아(虎牙兒), 장아아(獐牙兒), 청과아(靑瓜兒), 침가아(針家兒), 호로아(葫蘆兒), 회합(回蛤), 세합(細蛤), 반합(班蛤), 중삼도자(中三刀姿), 참죽소(竹梳), 목소(木梳), 저모쇄자(猪毛刷子), 두발(頭髮)" 등을 다른 토산품들과 함께 재차 요구하였다(‘Tomul’, n.d.). 즉 여기에 열거된 물품들은 15세기 명의 복식과 다른 특징을 지녔던 조선의 토산 여성복식소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에 보내는 물건을 줄이기 위해 성종 14년(1483년)에 작성된 서계(書契)에 “호랑이는사람을 해치는 짐승이어서 포획하기 어렵고, 포획하더라도 쓸 만한 치아는 열 개에 한두 개도 못되니(虎是傷人之獸, 捕獲亦難, 雖幸捕獲, 牙之可用者, 十無一二)....”란 대목이 있다(‘Horangei’, n.d.). 이를 참고하면 15세기의 ‘호아’는 호랑이의 치아 중에서 질 좋은 개체를 선별한 것으로, 조선에서도 구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여성들도 선호했던 사치성 장신구 재료였을 가능성이 높다.
2. 한씨에게 전달된 복식물품의 종류 및 시기
한씨의 요구는 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실록』 1479년의 기록에 따르면 “전하(殿下)께서 몸소 절약하고 검소하시며 백성을 이끄셨는데(殿下躬節儉以導民)....”(‘Frugality[節儉]’, n.d.)라 하여 왕이 스스로 사치를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다량의 물품을 마련해 한씨에게 보냈다. 이는 당시 한씨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아래의 <Table 1>은 국사편찬위원회(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의 『성종실록』에 의거하여, 한씨에게 보낸 것으로 기록된 복식물품의 종류와 시대를 정리한 것이다. 복식물품을 용도에 따라 직물, 장신구, 규방용품, 생활용품으로 분류한 후, 각 카테고리 안에서 시대 순으로 정리하였다. 자수 주머니와 바늘집 및 화장용과 두발용 물품은 규방용품,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도와 부채 등은 생활용품으로 분류하였다. 규방용품과 생활용품 중 크기가 작은 것은 장신구로도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Table 1>을 보면, 각색 명주와 면포와 백저포와 흑마포, 노리개 및 장신구 재료인 호아아, 장아아, 청고아, 청과아, 호로아와 조개류, 규방용품인 자수 주머니와 바늘집, 생활용품인 삼사도자와 오사도자 류의 다양한 단도와 부채가 지속적으로 한씨에게 전달되었다. 호아, 장아, 수낭 등에는 접미어 ‘아(兒)’가 붙어 있어서 노리개 장식으로 가공된 상태를 표현한 용어로 생각된다. 화장솔로 보이는 저모쇄자, 가체와 관련된 두발, 참빗과 나무빗도 물품에 포함되어 있어, 한씨가 요구한 품목이 대부분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 황실 내부에서 비판이 나오지 않도록 회간왕비(懷簡王妃:후의 인수대비)가 고모인 한씨에게 여러 개로 별폭(別幅)을 나누어 물품을 보낸 경우도 있었고, 명의 관리정동(鄭同)이 1481년의 물품들에 사적인 선물을 더하기도 했다. 한씨가 사망한 1483년1483년에도 조선 조정은 한씨를 위한 물품을 별폭으로 마련하였고, 이는 생전에 한씨가 원한 물품과 유사한 것들이었다.
이 물품들 중 몇 가지는 명 황제를 위한 진헌물 목록에도 나타난다. 한 예로 『성종실록』 성종9년(1478년) 1월에 성화제(成化帝)가 조선의 복식소품과 규방용품들을 직접 요구했으며, 8월에 황제의 칙명에 의한 진헌물로서 아래처럼 염색 직물, 호아아, 장아아, 조개, 호로 장식, 자수주머니, 바늘집, 삼사도자와 오사도자를 포함한 각종 단도가 다른 토산품과 함께 전달되었다.
Sungjong-sillok(n.d.)에 의하면 복식관련 진헌물은 다음과 같다:
다갈면주 50필, 수록면포 50필, 저사겸직포 10필.... 세죽선 800파, 소죽선 200파....삼사도자 50파, 오사도자 50파, 대양단사도자 50파, 소양단사도자 50파, 각양(各樣) 호로아 100유, 각양 호아아 80유, 장아아 50유, 산양 뿔 100개, 세교소문합 1궤, 회합 1궤, 반합 10봉, 각양 소라 10개, 각양 수낭아 30개, 침가아 50개, 청과아 10개....(茶褐綿紬五十匹, 水綠緜布五十匹, 苧絲兼織布一十匹....細竹扇八百把, 小竹扇二百把....三事刀子五十把, 五事刀子五十把, 大樣單事刀子五十把, 小樣單事刀子五十把, 各樣葫蘆兒一百流, 各樣虎牙兒八十流, 獐牙兒五十流, 山羊角一百箇, 細巧小文蛤一櫃, 回姶一櫃, 班蛤一十封, 各樣海螺一十箇, 各樣繡囊兒三十箇, 針家兒五十箇, 靑瓜兒一十流....)(‘Osadoja’, n.d.).
다용도로 쓰일 수 있는 직물을 제외하면 이 물품들은 대부분 여성용 생활용품과 장신구 재료인 것으로 생각되나, 이와 유사한 물품은 이후의 진헌물 목록들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성종실록』을 보면 성종 12년(1481년) 12월에 한치형이 왕에게 “본국에서 바친 노리개는 황제가 직접 펴보고 보관하며 염색한 물건에 매우 기뻐하신다고 합니다(本國所獻戲玩之物, 則皇帝親自披閱封署, 且染色之物亦甚悅焉)”라 아뢰어(‘Dyeing[染色]’, n.d.), 명 황제가 조선에서 보낸 소품을 직접 점검했음을 전했다.
이를 보면 15세기 말 조선 여성복식소품이 한씨의 영향을 받아 유희성 토산물로 명 황실에 도입되었으며, 많은 물량으로 인해 조선의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씨가 사망한 이듬해인 성종 15년(1484년) 12월에 태감(太監) 곡청(谷淸)으로부터 전달된 전언을 보면, 명에 도입된 직물, 호아, 수낭의 실질적인 용도와 효용은 아래와 같았다.
Sungjong-sillok(n.d.)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녹면포(綠緜布), 다갈명주(茶褐綿紬), 초록면포(草綠綿布), 다갈면포(茶褐綿布), 저사겸직포(苧絲兼織布) 등의 염색물은 긴요한 것이 아니니 전부 감면해도 됩니다....호아(虎牙)는 마련하기 어려우나 전부 감할 수 없고 이번에 가지고 온 수에서 반을 감할 수 있습니다. 수낭(繡囊) 등의 물건은 융선(絨線)을 사용하지만 궁에서 노리개로 삼는 물건이니 역시 전부 감할 수는 없습니다....자황색(紫黃色) 명주는 용포(龍袍)를 만들어 항상 입는데 다른 색은 많이 감했으니 여유가 있으면 지금 가지고 온 수에 더 보태는 게 좋습니다(綠緜布, 茶褐綿紬, 草綠綿布, 茶褐綿布, 苧絲兼織布此羕染色, 這裏不打緊, 全減可也... 虎牙雖難備, 不可全減, 於今來數, 減半可也. 繡囊等物, 雖用絨線, 內裏戲玩之物, 亦不可全減.... 紫黃色綿紬, 做袍恒御, 他色多有減數, 若有餘於今來數, 加增可也)(‘Sunang[繡囊]’, n.d.).
호아, 수낭, 자황색 명주는 명 황실의 복식생활에도 필요한 것이었으나, 다른 직물과 소품들은 한씨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한씨의 물품에서 15세기 조선의 여성복식문화를 정확하게 유추하려면 각각의 용도와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3. 한씨에게 전달된 복식물품의 형태와 특징
호랑이의 치아는 발톱과 더불어 호부용 부적겸 노리개로 쓰였다(Yoon, 2012). 15세기 ‘호아아’의 정확한 형태는 알기 어렵지만, 자연물을 가공한 노리개 주체라면 형식 자체는 현대의 복원품인 <Fig. 1>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5세기의 ‘장아아’ 역시 현존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렵다. 사향노루(Musk deer)의 위턱 송곳니는 길게 자라 입 밖으로 나오며(‘Musk deer’, n.d.), 고라니 수컷의 송곳니도 이와 유사한 크기여서 중량감이 뛰어나므로, 이러한 재료가 장아 노리개에 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아아는 15세기 조선 토산품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는 장아아 유물을 찾기 어렵고, 오히려 <Fig. 2>와 같은 중국의 유물로 대략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Fig. 2>는 온라인 시장에 출품된 연대가 불분명한 골동품이므로, 길이가 긴노루 치아에 원통형 은모(銀帽) 세공을 더해 주체형태로 가공한 방식만을 참고하도록 한다. 반합은 얼룩무늬의 대합조개에 은세공 등을 더해 노리개의 주체로 가공한 것으로 보이나, 15세기 당시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존하는 15세기 조선의 복식유물 수가 극히 적어 한씨의 복식물품들의 형태를 모두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용어로 추론하면, ‘삼사도자’와 ‘오사도자’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Swiss army knife)처럼 다양한 도구를 엮은 생활용품으로 생각된다. 간혹 청(淸)과 조선 18~19세기 유물에서이 형식을 볼 수 있으나, 확실한 형태를 가진 15세기 명과 조선의 현존유물은 아직 찾기 어렵다. 그러나 보스턴 박물관 소장품 중에 족집게와 손톱손질 도구를 연결한 고려유물(<Fig. 3>)이 있고(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NRICH], 2004),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도 귀이개, 칼, 집게, 송곳, 족집게 5종 도구를 엮은 19세기 조선의 휴대용 장식(<Fig. 4>)이 있어(NRICH, 2013), 이러한 소품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과도기 형태를 지닌 삼사도자와 오사도자가 15세기 조선의 토산품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15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인천 석남동 회곽묘염낭(<Fig. 5>)은 “경수자 바탕직 위에 매화잎과 줄기를 자련수와 쇄수로 표현하고 가장자리에 산(山)형 편직 배편수(環編銹)를 바늘로 연결하여 뜬” 것으로(Jo & Bae, 2005, p. 100), 앞서 언급된 ‘수낭아’는 이런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Zhao Feng(1999)에 의하면 삼각형 배편수는 원대에 출현하여 명대에 유행하였고, 16세기 유물인 파평 윤씨의 바늘집과 연안 김씨의 베겟모에도 나타난다(Jo & Bae, 2005, p. 100). 시대 및 사용된 기법을 고려하면 <Fig. 5>는 한씨의 수낭아를 재현하기 위한 주요 참고유물이다.
참고유물의 연대가 다소 다르지만, 1566년 파평윤씨 묘의 누비장신구 주체(<Fig. 6>)를 통해 15세기 ‘침가아’의 형태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누비장신구는 "사다리꼴 누비판과 평직 주(紬) 덮개로 구성되었으며 연금사 징금수를 두르고 위쪽에 잣장식 8개를 실뜨기로 표현한" 것으로(Park, Park, Cho, & Lee, 2005, p. 48), 바늘을 누비판에 꽂고 덮개를 덮어 휴대할 수 있는 형태이다. 따라서 이것이 반짇고리 형식인 침가아이며, 실뜨기 잣장식(삼각형 배편수)(<Fig. 7>) 및 연금사 징금수 기법과 함께 16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천 석남동 회곽묘에서 "3×4cm 크기의 작은 박을 반으로 나누어 끈으로 연결한 장식”(<Fig. 8>)도 발견되었다(Kim & Song, 2005, p. 155). 식물의 종류는 다르지만 재료를 다룬 방식을 고려하면, <Fig. 8>은 15세기의 유물 중에서 ‘호로아’에 가장 근접한 장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Table 1>에 제시된 ‘청고아(靑苽兒)’와 ‘청가아(靑瓜兒)’는 상하기 쉬운 자연물 자체가 아니라 형태만 모방한 장식이었을 것이다. 청고아와 청과아는 서로 다른 모양이었을 수 있고, 서로 다른 한자로 혼기(混記)된 동일한 형태의 참외 또는 오이형 장식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15세기의 유물이 발견되기전까지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
Ⅳ. 한씨가 조선왕실에 보낸 복식예물
한씨가 원한 것은 조선의 토산품이었으나, 궁인인 그녀가 조선왕실에 보낸 것은 형식적인 왕실의료였다. 예를 들어 성종 11년(1480년) 8월, 한씨에게 물품이 다량으로 전달되던 무렵에 한씨가 보내온 예물은 아래와 같은 왕실용 장신구와 사라(紗羅)를 중심으로 한 각종 비단이었다.
Sungjong-sillok(n.d.)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한치형이 가지고 온 한씨가 보낸 물건은 대왕대비(大王大妃)께 대홍저사 1필, 녹저사 1필, 흑녹라 1필, 녹라 1필, 가화색라 1필, 금상보석진주기정 1근, 금상보석진주엄빈 1대, 금상보석진주규화잠 1근, 법랑진무 1준이다. 전하(殿下)께 대홍저사 1필, 녹저사 1필, 흑녹라 1필, 명녹라 1필, 명녹사 1필이다.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께 대홍저사 1필, 남저사 1필, 흑녹라 1필, 명녹라 1필, 총백갈사 1필, 금상보석진주화염 1근이다. 왕비(王妃)께 금상보석진주치자화 1근이며, 세자(世子)에게 명녹사 1필이다(韓致亨齎來韓氏所送物件, 大王大妃, 大紅紵絲一匹, 綠紵絲一匹, 黑綠羅一匹, 綠羅一匹, 茄花色羅一匹, 金廂寶石珍珠起頂一根, 金廂寶石珍珠掩鬢一對, 金廂寶石珍珠葵花簪一根, 法郞眞武一尊. 殿下, 大紅紵絲一匹, 綠紵絲一匹, 黑綠羅一匹, 明綠羅一匹, 明綠紗一匹. 仁粹王大妃, 大紅紵絲一匹, 藍紵綠一匹, 黑綠羅一匹, 明綠羅一匹, 葱白褐紗一匹, 金廂寶石珍珠火燄一根. 王妃, 金廂寶石珍珠梔子花一根. 世子, 明綠紗一匹)(‘Gahwasekra[茄花色羅]’, n.d.).
이 예물들은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으나, 감숙성 박물관 소장품인 <Fig. 9>의 명대 누사양보석금모식(累絲鑲寶石金帽飾) 및 정릉 출토품인 <Fig. 10>의 직금장화단팔보문라(織金妆花团八寶紋羅)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왕실을 위한 예물이 15세기 조선에서 사대부가의 일상 여성복식 재료로 쓰였을 가능성은 적다. 사라 직물은 왕실 친족들에게 다시 하사되어 의복에 부분적으로 쓰였을 수 있으나 관련기록이 없어 이를 입증할 수 없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왕실로 도입된 예물을 사대부 가 일상복식에 쓰는 것을 일반적인 경우로 볼 수는 없다.
한씨를 통한 복식교환은 ‘명 궁중예복과 조선일상예복의 교환’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한씨에게 전달된 복식물품은 15세기 조선 사대부 가 여성의 일상예복 차림에 필요한 물건이었으나, 한씨가 보낸 복식예물은 이와 같은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적은 왕실 의료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V. 기타 문헌과 유물에 나타난 15세기 조선 여성복식
한씨에게 보내진 복식물품은 대부분 의료로 보이는 직물과 노리개 장식, 기타 규방용품과 휴대용 생활용품이다. 15세기 조선 사대부 가의 여성복식생활을 유추하려면, 한씨에게 보내진 복식물품과 조합되었을 15세기 여성의복에 대한 분석 및 다른 문헌과 유물에 나타난 15세기 여성복식소품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1. 상의(上衣)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 30권 사소절(士小節) 6 부의 1 복식(服食)을 보면 “옛날에는 여복을 넓게 만들어서 시집올 때의 옷을 소렴에 쓸 수 있었다 한다(古者女服寬制, 故嫁時之衣, 可爲小斂之用)”라는 대목이 있다(Lee, 1795, p. 46). 이는 조선 전기 여성복식의 품이 넓었던 이유를 실용성과 연관지은 설이다.
한씨의 요구가 지속되던 15세기 말 조선 여성복식의 형태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몇 점의 출토유물에서 관찰할 수 있다. “인천 석남동 출토유물과 강릉김씨 분묘에서 공통적으로 수습된 복식은 여성 단령, 이중 겉섶 장옷, 대금형 상의(對襟形上衣), 대금형 적삼, 장저고리, 다트형 치마, 어깨 끈이 달린 단속곳형 바지"였다(Song, 2008, p. 75). 한씨가 요구한 목제 머리빗, 가체, 단도, 주체들은 이 의복들과 함께 착용되어 15세기 말 조선 사대부 가 여성들의 평상예복을 구성했을 것이다.
Song(2008)에 의하면 위의 두 분묘의 공통적인 출토복식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좌우대칭형 대금의(對襟衣)이며, 인천 석남동 회곽묘에서 출토된 3점의 대금의는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형태가 뚜렷하다. Song(2007)은 이를 15세기 여성복식으로 추정하였다. Song(2007)에 의하면 각각의 대금의들은 “운문단 길과 연화만초문단 깃의 겹옷”(p. 137), “무문단(無紋緞)에 금선공작흉배가 직성된 겹옷”(p. 138), “길이 60.5cm의 숙초 홑옷”(p. 140)이다. 이 대금의들은 “옆트임 장저고리와 적삼에 가까운 짧은 상의로 나뉘며, 공통적으로 완전히 들어앉은 목판깃, 주름잡힌 섶, 옆트임이 있는” 옷이었다(Kim & Song, 2005, p. 124).
무문단 금선공작흉배 대금의(<Fig. 11>)는 “길이 77cm이며 앞길에는 오른쪽에만 흉배가 있었다”고 한다(Kim & Song, 2005, pp. 126-127). 이는 비교적 길이가 길고 직금흉배가 부착된 옷이어서 예장용 겉옷으로 추정된다. 길이와 재료를 보면 <Fig. 12>의 운문단 대금의도 예장용 겉옷이었을 것이다. 16세기 중반의 이흠(李欽: 1522-1562)묘에서도 섶에 주름을 잡은 대금의가 발견되었으나(Gyeonggi Provincial Museum, 2008, p. 58), 이는 재질이 소색 무문직이어서 예장용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16세기 중반 것으로 추정되는 청양 안심리 무연고묘에서는 “대금형 상의가 옆이 막힌 단저고리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보이는 저고리 1점”이 출토되었다(Song, 2008, p. 76). 따라서 인천 석남동 회곽묘의 대금의들은 15세기 조선의 여성용 겉옷상의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고증자료로 분류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대금의 외에 15세기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여성용 상의 유물로 <Fig. 13>의 장씨(張氏) 불복장 회장저고리(回粧赤古里)가 있다. Sim(2006)은 복장시기와 의복형태를 조합하여 이를 세조 10년(1464년)의 유물로 보았고, 저고리의 장씨소대(張氏小對)라는 묵서를 ‘의대(衣襨)’와 관련지어 장씨를 궁중관계자로 추정하였다(pp. 216-217). 이 저고리는 “길이가 52.4cm, 뒷품 68cm이고 길은 명주, 깃과 끝동은 연화만초문단(蓮花蔓草紋段)이며, 농도가 다른 청색으로 쪽염해 구성한” 것이다(Sim, 2006, p. 217). 길이는 길지 않으나 품이 넓고 이음선이 많은 저고리인데, 보존상태가 좋아 15세기 중엽 단저고리의 실물을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Fig. 14>의 적삼은 15세기 겉옷 상의와 조합될 수 있는 밑받침옷의 예이다. 이는 “정 5품 정온(鄭溫: 1481~1538)의 부인의 것으로 길이 60cm, 화장 72cm의 연화만초문사(蓮花蔓草紋紗) 홑적삼이며, 앞뒷길과 소매에 불교문양이 찍혀 있는” 옷이다(Park et al, 2005, p. 14). 15세기 말~16세기 초 사대부 부인의 적삼이고 형태도 직선적이어서, 등길이를 조절하면 15세기 대금의 또는 회장저고리의 밑받침옷으로 활용될 수 있는 의복이다. <Fig. 15>의 인천 석남동 출토 적삼은 조선 15세기에 직조 전성기를 맞은 면포로 제작되었는데(Jo & Bae, 2005, p. 95), <Fig. 14>보다 폭은 다소 좁지만 15세기 겉옷 상의의 밑받침옷에 적합한 형태를 지녔다.
산서성(山西省) 호관현집점(壶关县集店) 명묘(明墓)에서 출토된 1530년의 <시녀도(侍女圖)>에는 구슬로 앞을 여민 홍색 방령대금(方領對襟) 반비(<Fig. 16>)가 묘사되었다. 이 여밈방식은 명의 부인 겉옷에 자주 나타난다. 시녀의 반비는 아랫배에 닿는 길이인 방령반비여서 고려양의 유풍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된 조선 학자의 견해는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5권 만물문(萬物門)에 제시되었다.
Lee(n.d.)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장광필(張光弼)의 궁사(宮詞)에도 ‘궁의로 새로 고려양(高麗樣)을 숭상하여 허리를 지나는 방령반비를 짓는다’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도 이런 제도를 따른다. 길이는 무릎에 이르지 않고 너비는 어깨에 닿지 않으며 양금(兩襟)은 서로 덮이지 않고 방령(方領)은 마주닿아 학창(鶴氅)처럼 생겼다. 양옆으로 주(珠)와 고리를 달아서 끼우며 이름은 괘배(掛背)이다. 이는 시(詩)에서 말한 것으로 이미 풍속이 되었다(張光弼宮詞云, 宮衣新尙高麗樣, 方領過腰半臂裁. 今人揂有此制. 長不至膝, 廣不及臂, 兩襟不掩方領, 適對女鶴氅, 兩邉爲珠爲彄以搭住名挂背. 此時所擧者是耳俗之)(p. 51).
<시녀도>와 『성호사설』의 기록을 참고하면, 구슬로 여미는 대금형 방령반비가 고려 말~16세기 초에 걸쳐 여성복식으로 정착되어 15세기 사대부가 여성복식으로 착용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15세기 전후의 장옷은 대부분 이중 겉섶이 부착된 포(袍) 형태이므로 상의로 분류하도록 한다. 『성종실록』에 조선의 장옷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으나, 인천 석남동 출토 장옷은 “원용문과 세화, 영지, 만초문으로 구성된 화문능으로 만들어졌고 안감과 끝동은 주로 제작된" 이중 겉섶의 포 형태였다(Jo & Bae, 2005, p. 97).
겉섶이 젖혀진 장삼도 조선 전기의 특색을 드러내는 의복이다. 용인 이씨 묘에서는 “ 『악학궤범』에 기록된 젖혀진 깃의 남초 흑장삼과 동일한 무문단 홑장삼(<Fig. 17>)과 연화문단 홑장삼”이 2겹으로 만들어진 이중치마와 함께 출토되었고(Yim, 2016), Lee(2016)은 위와 같은 형태인 일선문씨의 장삼을 반가 부인용 예복 장삼의 예로 들었다(p. 39). 일선 문씨와 용인 이씨는 16세기에 졸한 인물이지만, 겉섶이 젖혀진 장삼은 15세기에도 존재하던 의복 형태이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의 교지에 의하면 "양로연에 조사(朝士)의 처 외에 일반인의 처는 장삼을 제하고 짧고 편한 옷으로 입참하도록 허락하라(養老宴時, 朝士妻外常人妻, 除長衫, 許着短便衣服入參)"라 했으므로(‘Jangsam[長衫]’, n.d.), 15세기 초의 장삼이 관리 부인 예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Lee(2016)의 연구와 대전역사박물관 김혜영 학예사와의 인터뷰(2016)를 참고하면, 일선 문씨와 용인 이씨의 장삼에 공통적으로 주름이 잡힌 긴 옆트임이 있고 출토될 때 사각형 옆무는 안으로 접혀 있었다. 장삼이 착용될 때 이 옆무는 겉에서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2. 하의(下衣)
『성종실록』을 보면 성종 2년(1471년)에 치마와 관련된 전지가 내려졌다. “남녀의복의 포백은 13~14승, 치마폭(裳幅)이 15~16폭이나 된다....속치마는 12폭, 겉치마는 14폭을 넘기지 말아 검소한 풍습을 다듬게 하라(男女衣服布帛至十三四升, 裳幅亦至十五六....裏裳毋過十二幅, 外裳毋過十四幅, 以勵儉素之風)”라 하는데(‘Sangpok[裳幅]’, n.d.), 이전지는 사대부 가 복식에도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Jo & Bae(2005)에 의하면 인천 석남동에서 홑치마, 겹치마, 솜치마가 2점씩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형태가 가장 세밀한 다트형 치마의 예를 보면, “주(紬) 홑치마(<Fig. 18>)는 32cm 내외 13폭을 이어 만들었으며, 7폭 운문단 겹치마(<Fig. 19>)는 65cm 내외 7폭을 이어 밑단이 450cm”이다(Kim & Song, 2005, pp. 142-143). 앞서 언급된 1471년의 전지에 치마폭이 15~16폭이었다고 기록된 것은 폭이 30cm 전후인 직물로 지은 경우를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7폭 운문단 겹치마는 3~4폭 사이에 허리에서 24cm 내려온 곳을 나비 61cm가 되게 접어넣어 만들었고(Kim & Song, 2005, p. 143), 주(紬) 겹치마도 유사한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앞서 밝혔듯 이 시기의 대표적인 속바지 형태는 한쪽 어깨끈이 달린 단속곳 모양이다. 이런 형태는 <Fig. 20>의 청주 출토 순천김씨 누비속바지처럼 16세기에도 출토되며, 17세기까지 유지되었다. 또한 인천 석남동에서 발견된 말군은 숙초로 만든 홑옷의 뒤트임 바지였다(Kim & Song, 2005, p. 146). 1429년의 『세종실록』 43권에 “대소 부녀를 따르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게 하고(大小婦女從婢之服不許襪裙)....”(‘Malgun’, n.d.)라 기록되었듯 말군은 신분 높은 여성의 기마복식이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15세기 사대부 가 여성의 외출복으로 분류하였다.
3. 머리모양과 쓰개 류
한씨가 요구한 물품에 수체(首髢)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15세기 조선 여성들이 가체를 즐겨 사용했음은 확실하다. 15세기 조선 가체는 당시의 회화 및 기록에 단편적으로 묘사되었다.
명의 사신 동월(董越)은 1488년의 조선풍경을 서술한 『조선부(朝鮮賦)』에 “여자의 귀밑털이 귀를 가려 패당이 보이지 않는다(女鬢掩耳不見佩璫)”라 밝혔다(Dong, 1994, p. 48). 농암(聾巖) 종택에 소장된 <화산양로연도(花山養老燕圖)>(<Fig. 21>)는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1519년에 개최된 양로연을 묘사한 회화이다(Park. et al, 2005, p. 11). 좌석에 앉은 여성들은 가체의 일부를 좌우로 갈라서 머리 위에 얹고 나머지는 목덜미를 덮어 느슨하게 틀었다. 『조선부』에 묘사된 머리는 이처럼 비교적 느슨한 형태의 가체였을 것이다.
『조선부』를 보면 너울에 대해 “부귀한 가문의 부인은 광주리(一匡)을 썼는데 대모 같고 차양에 흑증(黑繒)을 늘여 얼굴을 가렸다(富貴家女婦戴一匡如大帽簷垂黑繒以蔽其面)”라고 기록하였다(Dong, 1994, p. 48). 실물유물인 인천 석남동 출토 너울(<Fig. 22>)은 검정색으로 추정되는 두께 0.32mm의 4경교라를 사용하였고(Jo & Bae, 2005, p. 99), 길이 59cm의 사다리꼴 6쪽을 이어 만들었는데(Kim & Song, 2005, p. 149), 착용하면 허리부근에 닿을 정도의 길이이다.
4. 장신구와 기타 소품
한씨는 성종 12년(1481년) 10월에 은(銀) 2백냥을 한한(韓僴)에게 부치면서 “전하께 고하여 노리개(玩之物)를 많이 만들어 보내주면 황제께 바치려 한다(啓殿下, 多造戲玩之物以送, 將欲獻帝所)”라고 전했다(‘Wanjimul[玩之物]’, n.d.). 한씨는 같은 해 12월에 노리개의 도안[見樣]과 거기에 들어갈 화은(花銀)까지 한치형에게 제시하며(‘Hwaeun[花銀]’, n.d.), 고국에서 제작한 은제 노리개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아래의 『청장관전서』의 기록을 참고하면, 조선 전기의 여성들이 조선 후기에 비해 보석류보다 바늘집, 붓, 향 등의 실용적인 장신구를 즐겨 착용했음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들의 양은 많았으되 종류 자체는 호아아와 은제 노리개 외에는 조개 장식, 주머니, 바늘집, 단도, 나무빗 등으로 비교적 실용적인 소품들이었던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Lee(1795)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옛 사람들이 차던 것을 보면, 바늘과 붓으로 일용(日用) 준비를 하고, 형거(珩琚)로 위의를 갖추고, 난채(蘭茝)로 악취를 제거했다. 지금 풍속에서 차는 것은 호박, 산호, 비취, 삼주(三珠), 주부(珠鳧), 금봉(金蜂), 누옥(鏤玉), 방판(方版), 유소(流蘇), 채영(彩纓)으로 가지가지이지만 하나도 실용적인 것이 없고 재전(財錢)만 허비한다(古者佩用, 鍼筆以備日用, 珩琚以叶威儀, 蘭茝以辟穢惡. 今俗所佩,琥珀, 珊瑚, 翡翠, 三珠, 珠鳧, 金蠭, 鏤玉, 方版, 流蘇彩纓, 累累若若, 無一實用, 徒費錢財)(p. 127).
<Fig. 16>의 명 시녀는 양 옆에 각 2개의 붉은 매듭술이 달린 연청색 염낭(<Fig. 23>)을 오른쪽 허리에 착용했다. 이 염낭에 문양은 없으나 인천 석남동 출토 염낭과 형태가 유사하여, 당시의 주머니 착용방식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Fig. 16>를 보면 시녀는 이목구비가 강하고 산발을 하고 있어 ‘이민족’ 출신으로 보이며, 뒷댕기가 부착된 작은 족두리형 모자를 썼다. 족두리형 모자가 16세기 초에 북방에서 명으로 도입되어 여성복식으로 착용되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Fig. 24>의 구슬은 인천 석남동 회곽묘에서 출토되었다. “구슬 3개는 끈에 꿰어진 상태였으며 그 외에 백색과 갈색 유리구슬 조각도 있었고, 지름은 2cm, 끈 길이는 22cm”였으며(Kim & Song, 2005, p. 155), 끈의 길이와 구슬의 크기를 보면 본래 팔찌였거나 손에 쥐는 염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실록』을 보면 1487년 6월에 대사헌 김승경(金升卿) 등이 “사족 여자는 초구(貂裘)가 없으면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며 사치에 절제가 없어 이 풍속을 그냥 둘 수 없습니다(士族之女, 非貂裘, 不得齒於宴席, 奢侈無節, 此風不可長也)”라는 상소를 올렸다(‘Chogu[貂裘]’, n.d.). 이를 보면 15세기 말 여성복식생활에 가죽신과 관련된 사치풍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Ⅵ. 15세기의 조선 사대부 가 여성복식 착장형태 고증
한씨에게 보낸 복식물품 분석과 출토유물의 특성 고찰을 통해 15세기 조선 사대부 가 여성복식의 고증요소를 선별하고, 착장상태의 도판을 제작하였다. 15세기에 귀천없이 착용했던 자연물 위주의 노리개 주체, 참빗과 나무빗, 단도 등은 사대부가 외에 일반여성들의 복식에도 적용할 수 있다. <Table 2>는 의복 고증 시 유의할 특징을 정리한 것으로, 한씨에게 보내진 물품목록에 포함된 면주와 저사, 출토유물에 나타난 운문단과 화문능, 겸직물을 의복의 중심재료로 선정하였다.
한씨를 위한 물품목록에 있는 직물색 중에서 명 황실에서 쓰던 자황색이 아닌 것은 녹색, 수청색, 자색, 다갈색 등인데, 궁중복색이 아닌 경우의 자색은 채도가 낮았을 것이다. 이외에 장씨 불복장 회장저고리의 쪽색 및 “인천 석남동 출토 여성단령에 배어있던 쪽염으로 추정되는 짙은 청색”(Kim & Song, 2005, p. 113)도 고증복식의 색상으로 적합하다. 또한 Lee & Park(2003)에 의하면 “조선 전기 일본에서 수입된 소목은 홍화의 대체염료로 각광을 받았고, 상색(上色)으로 간주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p. 335). Kim Byeon Ha(1969)는 소목이 왕실과 사대부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되었음을 밝혔고(Lee & Park, 2003), 한씨 가문에 준하는 사대부 가 여성들도 소목 염색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16세기에 이르러 소목에 대한 상류층의 호기심이 약화되고 유입도 원활하지 못했으므로”(Lee & Park, 2003, pp. 335-336), 소목 홍색은 15세기 조선 사대부 가의 주요 복색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소품 고증에서 유의할 점이다. <Table 3>은 장신구와 소품 고증 시 유의할 특징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에서 귀천없이 착용한 호아아, 장아아, 반합과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목록에 포함된 침가아, 수낭아, 오사도자를 주요 장신구로 선택하여 상의의 고름과 치마허리에 나누어 착용시켰다. 이 중 호아아와 장아아는 부적을 겸한 장식일 수 있고 호아아는 고가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눈에 잘 보이는 상의의 고름에 착용하도록 한다. 도자는 패용할 수 있는 크기로 설정하였다.
수낭아는 삼각 배편수가 포함된 매화 자수 염낭이다. 착장방식은 명대 시녀상에 묘사된 주머니를, 형태는 인천 석남동에서 출토된 염낭을 참조하였다.
침가아는 바늘을 보호하는 덮개가 달린 누비노리개 형태로 설정하였다. 15세기 현존유물이 없기 때문에, 15세기에도 존재했던 배편수 기법으로 장식된 16세기 파평 윤씨의 누비노리개를 참조하였다.
한씨의 물품목록에 수체(首髢)도 나타나므로, <화산양로연도>와 『조선부』의 기록에 의거해 양갈래의 느슨하고 풍성한 형태의 가체를 적용하고 참빗과 나무빗을 부속물로 추가하였다. 인천 석남동에서 발견된 구슬들은 확실한 형태로 도판에 표현하기 위해 손에 쥐는 염주로 재구성하였다.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목록에 기록된 세죽선(細竹扇) 등의 부채는 계절에 따라 사용하며, 발에는 15세기 말 사족 여성의 사치풍조였던 초구(貂裘)를 신는다.
<Table 4>는 위의 과정을 거쳐 15세기 조선 사대부 가 여성복식 일습의 형태를 총 6종으로 고증하여 전신착장 도판으로 제시한 것이다. 한씨의 물품에 포함된 조선 복식소품의 특성과 15세기 복식유물의 특성을 조합한 도판이며, 앞서의 분석결과를 고증 및 문화콘텐츠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Fig. 25>와 <Fig. 26>은 예장(禮裝)이며, 각각 15세기 복식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무문단 직금흉배 대금의와 운문단 대금의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상의의 등길이는 출토유물처럼 약 77cm로 하여 <Fig. 27>의 회장저고리보다 길게 설정하였다.
<Fig. 27>은 1464년의 복장품으로 추정되는 장씨의 회장저고리를 겉옷 상의로 활용한 예이며, <Fig. 25>, <Fig. 26>보다 격식을 다소 낮춘 일상 예복 차림이다. 실제로 제작할 때에는 재현도를 위해 쪽염을 사용하도록 한다.
<Fig. 28>은 외출복이다. 포(袍)형 장옷의 재료는 출토유물에 쓰인 화문능, 15세기의 대표직물인 면직, 한씨의 물품목록에 기록된 백저포로 설정하였다. 착장모습을 도판에 잘 드러내기 위해 백저포를 재료로 설정하여 투명한 상태로 묘사하였다. 말군은 기마 시에만 착용하므로 참고사항으로 분류했으며, 너울은 인천 석남동 출토유물의 형태를 따랐다.
<Fig. 29>는 겉섶이 젖혀진 장삼을 15세기 사대부 가 부인예복으로 가정하여 제작한 도판이다. 15세기의 장삼 실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악학궤범』에 묘사된 흑장삼과 외형이 유사한 16세기 용인 이씨의 아청색 장삼 유물 및 이중치마 유물의 형태를 참고하였다.
<Fig. 30>은 <시녀도>의 반비(<Fig. 16>) 및 『성호사설』에 기록된 ‘구슬로 여미는 대금형 괘배’를 참조한 간소예복 도판이다. 15세기에 선호되었던 소목 홍색을 반비에 적용하였다.
각 도판에서 적삼과 속바지는 모두 동일한 형태이며, 15세기에 부흥기를 맞은 면직 또는 면 겸직소재로 설정하였다. 인천 석남동 출토유물과 정온부인의 적삼 형태를 겉옷의 실루엣에 따라 일부 변형하여 적용하고, 속바지는 어깨끈이 달린 개체로 설정하였다. 치마는 솜치마, 겹치마, 홑치마를 계절에 따라 착용할 수 있으며, 예장 차림에는 다트형 치마(거들치마)를 착용한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15세기 말 사족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초구를 각 도판의 신발로 설정하였다.
Ⅶ. 결론
한확 가문의 관리들은 친족 여성들을 명의 공녀로 보내고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으나, 공신부인 한씨가 향수를 달래기 위해 요구한 물품은 조선 조정의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이 중 복식물품은 15세기 조선 사대부 가의 일상적인 여성복식 생활을 대표하는 소품으로, 호아, 장아, 반합과 기타 자연물을 이용한 노리개 주체, 참빗과 나무빗과 가체용 두발, 각종 주머니, 바늘집, 각종 날이 달린 도자, 다양한 염색명주와 면직과 모시, 한씨가 말년에 요구한 은제 노리개로 요약된다. 일부 사치품을 제외하면 한씨를 위한 복식물품은 방대한 양에 비해 비교적 실용적인 종류로 볼 수 있으며, 15세기 조선 복식소품의 특성을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본 연구에서 제시된 15세기 사대부 가 여성복식의 전신착장 형태 및 복식문화의 특성은, 공신부인 한씨에게 보내진 물품에 대한 고찰과 드물게 현존하는 15세기 출토복식 관련 선행연구의 분석을 조합한 결과이다. 반면 한씨가 보내온 복식예물은 특정계층을 위한 왕실 의료였던 것으로 판단되어 고증자료에서 제외하였다.
이상을 거쳐 가장 시대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는 복식과 장신구를 선정하고, 이를 전신 착장상태로 고증한 도판 총 6종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직금흉배가 부착된 무문단 대금의, 둘째는 운문단 대금의, 셋째는 15세기 불복장 회장저고리, 넷째는 장옷과 너울을 더한 외출복, 다섯째는 겉섶이 젖혀진 장삼, 여섯째는 구슬로 여미는 대금 방령반비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목록과 출토유물을 참고하여, 의복의 중심재료는 면, 명주, 모시, 운문단, 화문능, 색상은 녹색, 수청색, 채도가 낮은 자색, 다갈색, 쪽색과 소목 홍색으로 설정하였다. 도판들은 상의의 특징을 중심으로 구분되었고, 모두 직선적인 적삼 및 홑치마, 겹치마, 솜치마, 한쪽 어깨끈이 달린 속바지, 초구, 흑색 라 또는 증으로 만든 너울, 장옷과 조합될 수 있다.
한씨의 물품목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복식물품은 장신구와 생활소품이다. 15세기 조선에서 널리 유행한 노리개 주체였던 호아아, 장아아, 반합, 그 외에 삼사도자와 오사도자, 잣뜨기와 매화 수를 놓은 주머니, 덮개가 달린 누비 침가아와 은세공 부속물, 풍성하고 느슨한 형태의 가체를 앞서의 의복과 조합하였다.
본 연구에서 제시된 분석결과와 도판 6종은 현존유물이 적은 15세기 조선 여성복식을 고증하기 위한 보충자료이자 교육용 문화컨텐츠로 제작된 것이다. 한씨에게 전달된 복식물품 목록은 15세기 여성복식생활을 파악하기 위한 주요 분석대상이며, 명과 차별화된 특색을 보였던 15세기 조선 여성복식소품 관련 자료로서 의미를 지닌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5학년도 원광대학교의 교비연구비로 수행된 논문임.
References
- Chang, S. N. (Ed.), (2004), CORPUS OF CHINESE FABRIC, EMBROIDERY AND FINERY 4: HISTORICAL COSTUME VOLUME 2[中國織繡服飾 全集4: 歷代服飾卷下], Tianjin, China, Tianjin peoples fine arts publishing house.
- Changpingqu 13 Royal Tomb Zone Managing Department in Beijing[北京市昌平区十三陵特区办事处] (Ed.), (2006), CATALOGUE OF RELICS FROM THE DINGLING MAUSOLEUM-VOLUME I[定 陵出土文物图典-卷I], Beijing, China, Beijing Arts and Photography Publishing House.
- Chogu[貂裘],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5012_003.
- Dong, Y., (1994), Joseonbu[朝鮮賦], Yoon, H. j Trans., Seoul, Republic of Korea, Kachi Publishing Co., Ltd., (Original work published 1531).
- Dyeing[染色],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212022_002.
- Ershiwushi-Mingshi 5[二十五史-明史五], (1975), 제목, Taipei, Tiwan, Xinwen feng Chubanshe.
- Frugality[節儉],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6018_001.
- Gahwasekra[茄花色羅],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1080 17_002.
- Gongshin-buin[恭慎夫人], (n.d.), In Heonjong-sunwhangje-silrok[憲宗純皇帝實錄],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mc/id/msilok_006_2400_0010_0010_0220_0010.
- Gyeonggi Provincial Museum, (2008), Masterpieces from the Excavated Costumes of the Gyeonggi Provincial Museum, Yoongin, Republic of Korea, Ninead.
- Han, Chi Hyeong, (n.d.), In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Retrieved fro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 Han, Chi Rye, (n.d.), In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Retrieved fro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 Han, Hwak, (n.d.), In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Retrieved fro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 Horangei[호랑이],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408015_003.
- Hwaeun[花銀],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2120 22_002.
-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Ed.), (2005), The excavated costumes from lime grave of Seoknamdong in Incheon[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복식], Incheon, Republic of Korea,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 Jangsam[長衫], (n.d.), In Sejong-sillok,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8029_002.
- Jo, H. S., & Bae, S. H., (2005), A consideration of excavated costume fabric[출토복식의 직물 고찰], In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Ed.), The excavated costumes from lime grave of Seoknam- dong in Incheon[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복식], p80-104, Incheon, Republic of Korea,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 Kim, M. J., & Song, M. K., (2005), A consideration of excavated costume[출토복식의 고찰], In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Ed.), The Excavated costumes from lime grave of Seoknam-dong in Incheon[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복식], p110-158, Incheon, Republic of Korea,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 Lee, D. M., (1997), Translated Chungjanggwan-jeonseo 6[국역 청장관전서 6], Kim, D. J Trans., Seoul, Republic of Korea, Solbook, (Original work published 1795).
- Lee, E. J., (2016), A study on the use and shape of female’s jangsam in early Joseon period[조선전기 여성 장삼(長衫)의 용도와 형태에 관한 연구], The society of Korean Traditional Costume Spring Conference, p33-41.
- Lee, I., (1976), Translated Sungho-saseol II[국역 성호사설 II], Korean Classics Research Institute Trans., Seoul, Republic of Korea, Kyungin Publishing, (Original work published n.d.).
- Lee, J. Y., & Park, C. S., (2003), The influence of the trade goods between the Chosun dynasty and Japan on the costume culture of the Chosun dynasty( 1): Centered on the imported goods from Japan, Fashion & Textile Research Journal, 5(4), p331-336.
- Lee, M. S., & Bae, S. H., (2005), Preservation treatment of Excavated Costumes[출토복식의 보존처리], In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Ed.), The Excavated costumes from lime grave of Seoknamdong in Incheon[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복식], p22-61, Incheon, Republic of Korea,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 Lim, S. H., (2013), The political growth and diplomatic activity for Ming of Joseon Gongnyeo’s relatives in early Ming period: Focusing on Gwon, Young gyung and Han, Hwak, Journal of Ming-Qing Historical Studies, 39, p1-38.
- Ma, S. (Ed.), (2012), THE COMPLETE COLLECTION OF MURALS UNEARTHED IN CHINA, Beijing: China, Science Press.
- Malgun, (n.d.), In Sejong-sillok[세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2005_007.
- Musk deer, (n.d.), Doopedia, Retrieved from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6229.
-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2004), Korean Art Collection at the Museum of Fine Art, Boston, Daejeon, Republic of Korea,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2013), Korean Art Collection-GRASSI Museum für Völkerkunde zu Leipzig, Germany, Seoul, Republic of Korea, Graphicnet.
- Norigae,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5025_002.
- Osadoja,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08013_002.
- Park, S. S., Park, Cho, H. S., & Lee, E. J., (2005), The Masterpiece in Korean costume: Joseon women’s taste and attire[한국복식명품: 조선시대 여인의 멋과 차림새], Seoul, Republic of Korea, Dankook University Press.
- Paek, D. H., (2006), Clothing, letters and other artifacts excavated from the tomb of lady Kim clan originated in Suncheon, In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Ed.), Important Folk Materials 2 - clothing & embroidery, p274-281, Daejeon, Republic of Korea,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 Sangpok[裳幅],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212005_004.
- Sim, Y. O., (2006), A Jacket with decorative patches on the collar, front opening, cuffs and armpits in King Sejo’s age, In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Ed.), Important Folk Materials 2- clothing & embroidery, p214-217, Daejeon, Republic of Korea, Cultural Heritage Administra tion.
- Song, M. K., (2007), A Study on a symmetric collared jackets in early Joseon dynasty: Based on the excavated costumes of Seok-nam-dong, Incheon,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57(6), p135-144.
- Song, M. K., (2008),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each period to identify the women`s costume of the Joseon dynasty: based on the excavated costumes from 15th to 18th century,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58(5), p71-86.
- Sunang[繡囊],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512004_004.
- Tomul,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6002_003.
- Tooth of Musk Deer Pendant with Wellmade Silverwork[工好包银香獐牙]: JY5405697 (2013, June, 22), Huajiashoucangwang[華夏收藏網], Retrieved from http://www.cang.com/trade/show-5405697-2.html.
- Wangbirok[王妃錄], (2001, January, 01), Cheongjuhanssi joongangjongchinhoe[청주한씨중앙종친회], Retrieved from http://www.cheongjuhan.net/htmls/6/2-11-12.htm.
- Wanjimul[玩之物], (n.d.), In Sungjong-sillok[성종실록],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Retrieved from http://sillok.history.go.kr/id/wia_11210008_003.
- Yim, H. I., (2016, April, 28), 'Every stich', sew longing and make love, Joongdoilbo, Retrieved from http://www.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604280253.
- Yoon, Y. S., (2012, June, 01), The cultural treasure story of Yoon, Yeol Su: tiger is the spirit of national culture, The Monthly Chosun, Retrieved from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2061 00039&ctc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