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어보 영자의 특성과 양식 변화
Abstract
The royal seals of the Joseon Dynasty are stamps, which represent the royal family and their sovereign power. The Youngja(tassel) attached to the handle of these artifacts are beautiful ornaments that signify the authority of the royal seals. The Uigwe records on royal seals match the currently existing artifacts regarding the structure of these royal seals, but the details of the Youngja shapes have changed through generations. The Dahoe is round-shaped red cord that has a red core. It used to be made of 16-strands, but 24-strands became the standard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Bangwool was elliptical, but changed to a triangular shape in the early 17th century, and then gradually changed to a round shape th the 19th century. There are royal seals with two Bangwools and even with two Youngjas on one seal. In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they also used Ddalgi tassels. The Bangwool was decorated with a netting pattern which became more diverse in the latter generations. The Bangwool pillar disappeared in the mid 19th century. Hanji, the traditional Korean paper, was used for the mold at first, and was later changed to wood. Though the form of the Youngja changed over the years, there were no differences in shape depending on the status(ex. king, queen, or prince) of the owner.
Keywords:
Dahoe(braided cord), Joseon Dynasty, Royal Seals, Uigwe, Youngja키워드:
다회, 조선시대, 어보, 의궤, 영자Ⅰ. 머리말
조선의 어보(御寶)는 왕권과 왕실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인장(印章)이다. 어보는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을 책봉하거나 존호를 올릴 때 사용하는 의례용과 실제로 사용하는 행정용이 있는데, 행정용은 국새(國璽)라고도 불리었다. 어보는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만큼 금이나 옥 등으로 만들고 용이나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에 아름다운 영자(纓子)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조선시대의 의례용 어보는 종묘에 모셔져 관리되어 2012년 당시 조선 초기 태조 임금부터 마지막 순종 임금 어보까지 328과가 현존하며 실무용 국새는 4과가 전하여지고 있다(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PMK], 2012). 이후 문정왕후금보와 현종어보 등이 환수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보의 영자는 어보와 함께 제작되므로 제작시기가 분명한 유물로 후대에 보수를 하지 않는 한 제작 당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왕실에서 제작된 당대 최고의 장식물로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어보의 제작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관련 의궤가 다수 남아있어 실물과의 비교를 통해 어보를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영자는 어보뿐만 아니라 조대(組帶)와 초상화의 유소, 호패(號牌), 각종 함(函)의 열쇠 장식 등 다양한 품목에 사용된 장식물이었다. 그러므로 어보 영자의 시대별 특성변화는 조선시대의 유사 품목의 시기를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편년 자료가 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어보 영자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하여 영자의 특성과 양식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영자가 조선시대 당시에 어떤 용어로 사용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또한 영자의 세부 부분에 대한 명칭도 함께 규명해보도록 한다. 둘째, 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영자의 구조와 재료 등에 관한 내용을 분석하고 실제 유물과 비교하여 검토해보도록 한다. 셋째, 영자의 실물 유물의 형태를 조사하여 시대별 변화를 파악하도록 한다.
연구 방법은 문헌조사와 실물조사를 병행하였다. 문헌조사는 보인(寶印)이 기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의 문헌을 중심으로 영자에 관한 용어, 사용된 재료 및 물품에 대해 조사하였다. 문헌 가운데 의궤는 어보가 기록된 가장 이른 시기의 의궤인 1604년의 『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존숭도감의궤』부터 1926년의 『순종효황제어장주감의궤』까지의 의궤를 대상으로 내용을 검토하였다. 실물조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실물을 열람한 유물은 어보 21과이며 보록(寶盝)과 보통(寶筒)의 열쇠 영자가 어보의 영자와 유사하므로 12점의 열쇠 영자도 참고자료로 사용하였다. 이 외에 외형의 분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제공한 사진을 포함하여 약 300점의 유물을 분석하였다.
본 연구의 고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고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영자의 명칭, 구조와 소재에 관한 내용을 살펴본다. 그리고 실제 유물에 나타난 각 부분의 특성과 시대에 따른 변화를 분석하도록 한다.
Ⅱ. 문헌 기록상의 영자 특성
1. 영자의 명칭
조선시대의 의궤(儀軌)는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란 뜻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을 의미한다. 국가나 왕실의 주요 행사의 과정, 의례 절차와 내용, 소요 물품과 경비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는데 내용 중에는 어보의 규격, 소재를 비롯하여 장식품인 영자를 다는 위치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으며 도설(圖說)을 그려 넣어 이해를 돕기도 했다. 각 의궤에는 어보의 장식을 지칭하는 용어로 몇 가지가 사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는 ‘영자(纓子)’이며, 일부 의궤에는 ‘보영자(寶纓子)’, ‘대영자(大纓子)’, ‘방영자(方纓子)’, ‘관영자(貫纓子)’, ‘인수(印綬)’, ‘보수(寶綬)’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방영자(方纓子)’는 『희빈중궁전책례도감의궤』(1690)에 금보에 관한 ‘金寶一顆紅眞糸多繪方纓子具’라는 기록이 유일하므로 흔히 쓰이던 명칭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영자(寶纓子)’는 총 110권의 의궤 가운데 5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1686년에 편찬된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에 옥보의 소용물품에 “紅眞絲二兩一錢【寶纓子多繪次】”로 적혀있는 것을 비롯하여 1752년의『인원왕후영조정성왕후존숭도감의궤』 까지 기록되어 있다.
‘대영자(大纓子)’는 『인목왕후존숭의궤』(1624) 옥보부터 『순종순명황후가례도감의궤』 (1882)까지 21권의 의궤에 옥보와 옥인의 제작에 소용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인원왕후존숭도감의궤』(1737)를 비롯한 7권의 의궤에는 ‘多繪方兀流蘇大纓子’로 적혀있으며,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1802)에는 ‘多繪大纓子’로 명시되어 있다.
‘관영자(貫纓子)’는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1759)에 금보의 소용물품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1802)1)부터 『효명세자가례도감의궤』(1819)의 옥인,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1837), 『헌종효정후가례도감의궤』(1844), 『철종철인후가례도감의궤』(1851), 『신정왕후효정왕후철인왕후존숭도감의궤』(1866), 『순종순명황후가례도감의궤』(1882)의 7권에는 대영자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에 관영자는 일반적인 품목으로 소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대영자는 품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때에 사용된 용어이다.
‘인수(印綬)’는 의궤뿐만 아니라 여러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는 용어인데, 『국조오례의』2),『조선왕조실록』3), 『세종실록오례의』4), 『일성록』5), 『승정원일기』6) 등에 주로 보인(寶印)과 장식용 영자를 통틀어서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보수(寶綬)’도 인수(印綬)와 같이 보인과 영자를 함께 부르는 용어로 사용된 것7)으로 확인되었다. 『금보개조도감의궤』8)에는 寶綬의 소재로 ‘紅眞絲多繪’로 기록하여 ‘寶綬’는 보인과 영자를 통틀어서 일컫는 명칭이며 장식부분에 대해서는 ‘多繪’로 명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의 용어를 정리해보면 어보에 달리는 장식은 ‘纓子’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용어로 조사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영자(纓子)’로 명시하도록 한다.
2. 영자의 구조
『인원왕후존숭도감의궤』는 대왕대비인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金氏, 1687~1757)가 국모(國母)로 있은 지 50년이 된 것을 경축하여 1751년 2월 27일에 대왕대비에게 ‘정덕(貞德)’이란 존호를 올린 기록이다. 내용 가운데 이방의궤에는 옥보(玉寶)의 도설<Fig. 1>과 함께 “옥보를 완성한 후에 홍진사로 만든 다회방울술대영자 1개를 귀혈(龜穴)에 맨다”9)는 설명이 있다. 귀혈은 거북이 형태의 어보손잡이 부분을 일컫는 것으로 도설을 보면 다회를 어보손잡이 구멍에 넣고 양끝을 합한 후 영자를 달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제작된 어보<Fig. 2>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의궤의 내용과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영자의 구조를 크게 다회와 방울, 그리고 술로 구분하고 방울은 방울머리, 방울기둥으로 세분하여 설명하도록 한다.<Fig. 3>
조선시대 의궤 중 보인(寶印)이 기록된 의궤에는 소재의 크기와 양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보 손잡이에 다회를 끼우고 영자를 다는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설에 묘사된 영자와 본문의 내용이나 실물과 다소 다르게 그려있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인경왕후국장도감의궤』는 1680년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 1661~1680)의 국장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삼방의궤에 시보(諡寶)의 도설<Fig. 4>이 그려있는데 다회의 양끝에 방울술이 각각 한 개씩 달려 있다. 도설과는 달리 실물 유물<Fig. 5>은 방울술이 한 개 달려있는 구조로 제작되어 있다. 『정순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는 1787년에 편찬된 의궤로 옥보(玉寶)와 영자의 소요물품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의궤의 도설<Fig. 6>에는 다회의 짜임새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방울술에는 방울머리 2개가 나란히 달려있다. 의궤에는 영자를 귀혈에 꿰어 양끝을 합하고 방울술을 단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방울이 2개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으나 실제 유물<Fig. 7>에는 1개의 방울머리와 방울기둥이 달린 방울술이 장식되어 있다. 『정순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의 도설에서와 같이 방울이 위아래에 나란히 2개가 달려있는 구조를 본 연구에서는 ‘2단방울’로 명시하고자 한다. 2단방울이 실제 유물에 적용된 것은 조선후기로 1800년대 중반에 제작된 영자에서부터 볼 수 있다.
다음은 영자의 크기에 대한 기록이다. 영자의 크기를 나타낼 때에 대부분 포백척(布帛尺)으로 측정한 길이를 나타냈으나 간혹 예기척(禮器尺)으로의 길이를 나타낸 경우도 있다. 포백척은 의복의 제작뿐만 아니라 성벽의 거리 측정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Lee(2003: 2007)는 세종 대의 포백척 1척(尺)의 길이를 현재의 단위로 환산해보면 44.75㎝이며, 영조 26년에 세종대의 포백척을 교정한 길이는 46.80㎝로 보고 있다고 하였다. 예기척은 각종 예기(禮器)를 비롯한 다양한 물건을 만들 때 사용되었으며 조례기척(造禮器尺)이라고도 한다. Lee(2016)는 예기척은 환산하면 약 28.63㎝ 정도일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의궤에 기록된 영자의 길이를 비교해보면 조선후기로 갈수록 길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존숭도감의궤』에는 영자의 길이가 포백척으로 1척이라고 하였는데10) 이후의 의궤에는 주로 2척으로 명시되어 있다. 1690년의 『경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에 길이가 3척5촌으로 적혀있는데, 이후의 의궤에는 2척과 3척5촌이 함께 명시되다가 『인원왕후존숭도감의궤』(1747)에서 부터는 대부분 3척5촌으로 기록되었다. 『숙종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에는 영자의 길이뿐만 아니라 원둘레가 8푼[分]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11) 이것은 방울의 둘레를 나타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외에 『정종대왕국장도감의궤』(1800)에는 예기척으로 길이가 5척이라고 하며, 『효명세자왕세자책례도감의궤』(1812)와 『순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1875) 등에는 예기척으로 길이가 6척5촌이며 원둘레가 4푼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영자 길이와 원둘레 등에 관한 기록을 제외하고 의궤의 내용과 실물 유물의 기본구조는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영자 방울의 크기나 형태, 술길이 등 영자의 세부형태는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화했는데 세부 형태변화에 대해서는 Ⅲ장에서 후술하도록 한다.
3. 영자의 소재
조선시대 의궤에는 어보제작에 필요한 각 재료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영자에 사용된 끈목은 ‘동다회(童多繪, 同多繪)’ 혹은 ‘원다회(圓多繪)’로 기록하고 있다. Oh, C. M.(1997)은 다회에 대하여 “끈목의 옛말로 순수한 우리말이며, 우리말 ‘다회’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자를 차용하여 ‘多繪’로 표기하였다. ‘同多繪/童多繪/東多繪[동다회]’는 ‘단면이 둥글게 짠 끈목’을 이른다. ‘둥글다’는 뜻의 ‘동’은 ‘圓’으로 한자화하여 ‘圓多繪’로도 표기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방정례』에 금보(金寶)에 대해 ‘동다회영자의 재료는 다홍진사[童多繪纓子次大紅眞絲]’를 사용한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이외의 소요물품의 설명에도 ‘童多繪’로 명시하고 있다. 의궤에는 일부 童多繪, 東多繪, 同多繪로 기록되어 있으나 ‘多繪’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그 다음은 ‘圓多繪’이다.
다회 외에도 ‘수아(綬兒)’가 끈목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의인왕후인목왕후상존호중궁전왕세자책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옥보제작에 있어 “(어보의)거북이머리의 길이는 1촌 4푼이고 예기척을 사용한다. 홍진사 영자의 길이는 2척이고, 속심은 홍향사를 사용한다. 수아는 (길이가) 5촌이다.”12)라고 하여 영자는 장식물의 전체로, 수아를 속심을 넣고 짠 끈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둥근 동다회를 짤 때에는 안에 심을 넣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굵은 다회를 짤수록 가운데에 심을 넣어 다회가 느슨하게 되지 않도록 했다. 『임원경제지』의 섬용지에는 옷에 두르는 대(帶)에 관해 “우리나라에서 만든 둥근 조아[圜絛兒]에 술장식[綬]이 있는 것은 안에 무명실[木綿絲]을 써서 심[胎]을 만드는데 오래 가지 못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조대에 사용된 동다회의 안에 무명실로 심을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궤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회의 겉실로는 홍진사(紅眞絲)나 홍융모사(紅絨冒絲, 紅絨帽絲)를 사용하고 속심은 홍향사(紅鄕絲)나 홍면사(紅綿絲)를 쓴다고 하였다. 기록된 횟수로 보면 겉실의 소재로 홍융모사보다 홍진사로 명시한 기록이 더 많으며, 심으로는 홍면사에 비해 홍향사의 기록이 많다. 다회의 심을 홍면사로 쓴다는 기록은 『정조효의왕후가례도감의궤』13), 『숙종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14)를 비롯하여 몇 건의 의궤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홍향사에 비해 기록이 많지는 않다. 의궤에는 홍융모사가 주로 영자의 제작에 쓰이는 실로 명시되어 있는데 꼬임이 많지 않은 견사(絹絲)로 추정된다. 견사는 꼬임 정도에 따라 꼬임이 거의 없는 푼사[分絲], 반푼사[半分絲] 등으로 구분되며, 현재 매듭 혹은 다회 제작자들은 반푼사 정도의 꼬임이 많지 않은 실을 여러 올 합하여 꼬임을 주면서 합사(合絲)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상의 의궤 내용을 정리해보면 겉실로는 홍색의 견사, 속심은 홍색의 견사나 면사를 넣고 짠 둥근 동다회를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울과 술은 영자에서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의궤에 방울은 ‘方兀’로 표기되어 있으며 어보 이외에도 요여(腰輿), 악기 등에 달리는 장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술은 ‘蘇兀’, ‘綬兀’, ‘愁兀’, ‘垂兒’, ‘数兀’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술에는 금전지[紙金]을 넣는다고 하였다. 술은 ‘方兀蘇兀’, ‘紅真系多繪方兀流蘓纓子’, ‘紅真絲多繪方兀流蘓大纓子’, ‘多繪方兀数兀’, ‘紅眞絲纓子方兀蘇兀’ 등 방울과 함께 기록되는 경우가 많지만 술만 별도로 적혀있는 의궤도 있다.
방울의 크기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의궤는 앞에서 살펴본 『숙종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 이외에도 대부분 방울의 원둘레가 8푼이며 방울과 술은 홍색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Ⅲ. 영자 유형 변화
조선시대 어보의 영자는 조선시대에 걸쳐 변화가 있었는데 특히 중기 이후에 변화가 두드러진다. 본 장에서는 실물을 중심으로 영자의 각 부분의 특성과 시대별 변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1. 다회(多繪)
어보 영자의 다회는 모두 심을 넣고 짠 홍색의 동다회이다. 현재 약간 갈색 빛이 도는 다회가 있는데 제작 당시에는 홍색이었으나 갈변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회의 겉실은 모두 홍색 견사(絹絲)를 사용하였으며, 심은 조선 초기에는 홍색이 주로 조사되었는데 후기에 백색 무명실을 사용한 다회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다회의 경우 속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직조하므로 육안으로의 조사만 가능하여, 실물로 확인한 유물 수는 총 53점이다.
시대별로 1400년대는 5점으로 이 가운데 2점은 홍색, 3점은 백색의 심으로 확인되었는데 백색심을 넣은 예종금보(1470), 예종비 장순왕후금보(어보116, 1472), 예종비 안순왕후금보(어보117, 1499)는 후대에 보수하면서 새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500년대의 다회는 4점, 1600년대 14점, 1700년대 15점을 조사하였는데 모두 홍색심으로 파악되었다. 1850년까지는 총 3점에서 2점이 홍색이며 1점은 백색의 심을 사용했다. 1851~1900년까지는 11점 가운데 7점과 1900년대 이후의 다회 2점은 모두 백색 심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어보 영자의 다회는 조선후기, 특히 1850년 이후에 백색심의 사용이 증가했다고 본다.
다회는 짤 때 사용하는 실의 올수에 따라 8사, 12사, 16사 등으로 표현한다. 실물로 조사한 영자 다회는 1400년대의 것이 10점인데 1450년에 제작된 세종금보를 비롯하여 9점은 16사이며 1점만이 24사이다. 1500년대의 다회는 8점을 조사했는데 모두 16사이며, 1600년대의 다회는 30점 가운데 25점은 16사이고 5점은 24사이다. 1700년대는 94점의 영자 다회 가운데 16사는 82점, 24사는 12점이다. 1800년대의 다회를 상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살펴보면 1850년까지는 총 23점 가운데 20점이 16사이며 3점이 24사로 직조되었다. 1851~1900년까지는 113점 가운데 16사는 없고 24사가 111점이며, 32사는 1872년에 제작된 고종비 명성황후금보와 태조금보를 포함하여 2점이다. 1900년 이후의 16점의 다회에서 3점은 16사이며 13점은 24사이다. 이와 같이 어보의 다회는 초기에는 주로 16사로 짰으며 후기로 갈수록 24사의 사용이 늘고 32사는 1850년 이후의 다회에서 나타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다회를 짤 때에 16사는 2올뜀 기법으로 직조하였고, 24사는 3올뜀, 32사는 4올뜀 기법으로 직조하였다. 그러므로 <Table 1>과 같이 다회의 올수가 많을수록 뜀수도 비례하여 여러 올을 건너 띄면서 직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Ⅱ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의궤에는 조선후기에 영자의 길이가 전 시대에 비해 좀 더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실물을 조사한 결과는 시대에 따라 영자의 길이가 정해져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1524년에 제작된 인성왕후은인의 영자 길이는 171㎝, 중종금보(1545)는 97㎝, 선조금보(1608)는 186㎝, 현종어보(1651)는 93㎝, 익조비 정숙왕후금보(1705)는 159㎝, 숙종비 인원왕후옥보(1726)는 169㎝, 정조비 효의왕후은인(1762)은 154㎝, 정조은인(1776)은 177㎝, 영조비 정순왕후옥보(1802)는 182㎝, 문조비옥보(1853)는 150㎝로 측정되었다. 이와 같이 일부 실물의 측정한 길이로 보아서는 시대별로 길이가 일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2. 방울
방울은 약 480년의 기간 동안 형태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1400년대부터 1500년대까지는 대체로 위가 납작한 원반형태의 방울머리에 망수로 장식한 기둥이 달린 A유형이 주를 이룬다. 1600년대 초반부터 방울머리의 윗부분이 약간 뾰족한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는 B유형이 등장을 하다가 1700년대 초에는 방울머리가 좀 더 동그란 형태로 변화한 C유형이 나타난다. 1800년대 전기에는 C유형에 비해 방울머리가 약간 더 동그랗고 방울기둥이 가늘어지는 형태의 D유형이 나타난다. 1800년대 중기에는 전 시대에 비해 방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방울기둥 부분이 없어지면서 방울머리가 술과 바로 연결되는 E유형이 나타나는데, 방울머리의 크기가 점차 작아지므로 방울과 술길이의 비율이 높아진다. 또한 방울머리 2개를 연결한 2단방울의 F유형은 위아래의 방울크기가 거의 비슷한 것도 있고, 위에 달린 방울이 아랫것보다 작아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있다.
1900년대부터 방울 위에 금사와 각종 색사로 만든 가락지매듭을 끼워 장식한 G유형에는 방울머리가 1개인 1단방울뿐만 아니라 2단방울에도 가락지매듭을 끼워서 제작하였다. 1919년의 고종옥보는 방울은 홍색이며 다회와 술은 보라색으로 제작하여 방울과 술의 색상이 다르다. 1928년에 제작된 순종비옥보에는 청록색과 황색의 가락지매듭을 끼우고 딸기술을 달은 H유형이 장식되어 있다. 이 H유형은 조선 후기 남성들의 조대, 초상화 유소, 노리개 등에도 즐겨 사용하던 양식이다.
이상과 같이 어보의 영자는 홍색 다회가 귀혈을 통과하여 대개는 도래매듭을 1~2회 맺고, 다회의 양 끝은 함께 모아 방울술을 부착하므로 각 어보마다 한 개의 방울술을 달아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구조이다. 그런데 1830년부터 1835년에는 방울술이 다회의 양 끝에 한 개씩 달리는 영자가 등장한다. 1830년에 제작된 문조옥인과 헌종옥인, 그리고 1835년의 순조금보, 문조금보의 4과는 2개의 방울술이 달리는 독특한 구조의 영자<Fig. 8>로 이 시기에만 나타난다. 본 연구에서는 이 구조의 영자를 ‘쌍영자’로 구분하도록 한다.
3. 망(網)
영자의 방울기둥에는 가는 실로 세밀하게 다양한 무늬를 엮어서 망을 짜는데 영자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극대화시키는 부분이다. 본 장에서는 방울머리와 기둥부분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방울머리는 속틀 위에 금전지를 바르고 별도로 짠 망(網)을 위에 씌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한다. 망은 전 시대에 걸쳐 ◇ 형태가 되도록 엮었는데<Fig. 9>, 무늬에 따라 3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망사이의 간격이 좁아 내부의 금전지가 잘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Table 2>의 B유형이 이에 속한다. 둘째, 망과 망 사이에 어느 정도의 간격이 있어 내부의 금전지가 조금 보이는 유형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방법이다. 셋째, 망의 맺음부분이 사선이 되도록 짜는 기법으로 <Table 2>의 E유형과 같다. 방울머리의 망은 전기에 비해 후기에 망 사이의 간격이 넓게 제작된 경향이 있으며, 사선의 무늬가 뚜렷한 셋째 유형은 1800년대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조사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방울기둥은 1800년대 중기까지만 부착되었는데 기둥에 장식되어 있던 망이 없어지면서 정교한 아름다움은 덜해진다. 방울기둥의 망은 양 가장자리에는 가로 방향으로 선을 나타내는 일자뜨기를 하고 중간 부분에 다양한 무늬를 짜고 맨 아래에는 작은 ∇이 되도록 섬세하게 짠다. 방울기둥은 망의 무늬에 따라 크게 5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유형은 위아래에 일자뜨기를 하고 중앙에 H, X, 점무늬 등을 2단으로 구성하는 방식인데 2단에 모두 동일한 무늬를 표현하였다. ②유형은 ①유형과 유사하나 1단과 2단에 각기 다른 무늬로 구성된 형식이다. ③유형은 1681년도의 숙종금보와 같이 무늬를 3단으로 표현한 유형이다. 앞서 살펴 본 방울머리가 둥글고 방울기둥이 가늘면서 길어지는 방울머리 D유형의 경우는 방울기둥의 무늬를 4단으로 짠 ④유형과 일자뜨기 없이 세로 줄무늬를 표현한 ⑤유형으로도 제작되었다. ④유형은 1837년에 제작한 순조비순원왕후옥보에서 볼 수 있으며 ⑤유형은 1843년에 제작한 헌종비금보가 유일하다.<Fig. 10> 방울기둥에 장식된 망을 시대적으로 구분해보면 무늬를 2단으로 구성하는 ①과 ②형이 18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①유형은 초기부터 사용되었는데 ②유형이 나타나면서 혼용되어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주로 ①유형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4. 술
어보 영자의 술은 다회와 방울과 동일한 홍색견사로 제작하였다. 술의 올 수는 대략 300올 이상 많이 넣어 풍성하게 보이도록 했는데 일부는 500올 이상 넣은 것도 있다. 술의 꼬임방향은 전시대에 걸쳐 오른쪽의 우연(右撚)으로 동일하나 1850년대부터 술 끝에 동그란 구멍이 있는 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Fig. 11>
술 위에 붙이는 금전지는 <Table 2>의 A~D유형까지는 4~6 갈래 정도로 잘라서 끼웠었는데 E유형에서는 자르지 않고 한 장으로 술 위를 감싸듯이 붙였다.
5. 속틀
어보에 사용된 영자는 동다회에 방울술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방울술은 미리 제작해 놓은 속틀 위에 금전지를 붙이고 망을 씌운 후, 아래에 술을 달아 완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속틀은 방울머리와 방울기둥, 그리고 술받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쉽게 변형되지 않도록 단단한 소재로 만들었다.
어보 영자의 속틀은 크게 한지와 나무의 2가지의 재료를 사용하였다. 조선 초기의 영자를 살펴보면 대체로 한지틀을 사용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나무로 만든 목각틀을 사용하게 된다. 술받침은 술을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 내부에 부착하는 것으로 한지와 실을 겹쳐서 만들기도 하고 목각에 색지를 붙인 것 등이 있다. 1726년에 제작된 숙종비 인원왕후옥보의 방울술<Fig. 12>을 살펴보면 영자의 방울머리와 기둥은 상태가 양호하나 기둥 아래로 속틀 위에 붙였던 금전지와 한지로 만든 속틀의 일부가 관찰된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홍색실로 감아서 씌운 술받침이 있고, 술받침 가운데 구멍으로 내려온 다회를 묶어 고정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어보 영자는 한지로 만든 한지틀을 사용하다 1800년대 중반 이후에 목각틀이 등장하면서 점차 목각틀의 사용이 증가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속틀을 소재에 따라 한지틀과 목각틀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지틀은 한지로 원하는 형태가 될 때까지 여러 겹 덧붙이면서 만드는데 한지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강도를 높이기 위해 실과 한지를 교대로 겹쳐서 만든 것도 있다. 한지틀은 1800년대 중순경까지의 영자에 사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방울머리와 방울기둥, 그리고 술받침을 한지로 형태를 만들고 방울머리와 기둥의 겉에는 망을 씌우고 술받침 위에는 술을 걸어 늘어뜨린다.
한지틀로 술 안쪽에서 마무리하는 과정은 <Fig. 13>과 같이 5가지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제1유형은 별도의 술받침을 만들어 부착한 후 동다회 겉실로 묶어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세종금보(1450)를 보면 남은 겉실을 자르지 않고 길게 묶어서 마무리했다. 제2유형은 술받침의 가운데에서 동다회를 구멍보다 크게 묶어서 술받침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방법이다. 명성황후금보(1866)는 다회 2가닥을 함께 묶어 술받침의 구멍으로 빠지지 않게 고정하였다. 제3유형은 술받침을 2단으로 끼우는 방법으로 술받침 아래에 작은 술받침을 더 끼워서 고정시키는 방법이다. 정순왕후옥보(1778)가 제3유형에 속하는데 첫 번째 술받침을 한지로 만들고 실로 묶은 다음, 그 아래에는 한지틀에 홍색실로 꼼꼼하게 감싼 두 번째 작은 술받침을 끼우고 실로 묶어 고정하였다. 제4유형은 술받침을 2단으로 하되 첫 번째 술받침에 망을 씌우는 유형으로 1802년에 제작된 정순왕후옥보와 효의왕후옥보가 이런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제5유형은 술받침의 겉을 명주나 색지로 덧바르는 방식이다. 태조금보(1872)는 술받침위에는 자주색 명주로 덧씌웠고, 효정왕후옥보(1908)는 홍색의 색지로 덧발라서 마무리했다.
어보의 영자에 목각틀이 사용된 것은 1800년대 중순경의 유물에서 조사할 수 있었다. 이 당시는 술기둥이 없어진 시기로 술머리 아래에 술이 부착되는 형식으로 제작되던 때이다. 그러므로 목각틀은 방울머리와 술받침의 형태로만 깎았다. 나무로 깍은 방울머리 위에는 금전지를 붙이고 그 위에 망을 씌웠고, 술받침은 백골 상태 그대로를 사용하거나(제6유형) 혹은 붉은색의 안료를 칠하기도(제7유형) 했다. 문조비옥보(1853)는 나무로 깍은 백골의 술받침을 끼우고 다회를 묶어서 마무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Fig. 14>
이상과 같이 어보 영자는 시대에 따라 세부 형태에 변화가 확인되었으나 왕과 왕비, 왕세자 등의 신분에는 차등이 없이 동일하게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인 어보 가운데 시대의 변화에 일치하지 않는 유물이 몇 점 조사되었다. 1926년의 순종옥보는 술머리의 방울 형태와 망의 짜임새 등 전반적으로 1810년 이전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그 이전에 제작된 옥보에 비해 보존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여 어보와 함께 제작된 영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Ⅳ. 맺음말
조선시대의 어보는 왕권과 왕실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인장으로 손잡이에 아름다운 영자를 장식하여 화려함과 장엄함을 극대화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어보 영자에 대한 문헌과 실물을 조사하여 그 특징을 파악하고 시대별 변천에 대해 분석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어보 영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문헌에 영자는 주로 ‘纓子’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부 의궤에는 ‘寶纓子’, ‘大纓子’, ‘方纓子’, ‘貫纓子’, ‘印綬’, ‘寶綬’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纓子’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용어이다. 그리고 여러 의궤에는 어보의 손잡이에 다회를 꿰고 그 양끝을 합하여 방울술을 달아 장식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의궤의 내용과 현전하는 어보 유물의 구조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영자 방울의 크기나 형태, 술길이 등 영자의 세부 형태는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화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회는 의궤의 기록에 겉실은 홍색의 견사, 속심은 홍색의 견사나 면사를 사용하여 둥근 동다회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물 유물은 겉실과 속심을 모두 홍색으로 했는데 조선 후기에 백색 무명실을 심으로 사용한 것이 등장한다. 조직에 있어서는 조선 초기에는 16사로 짠 것이 주를 이루다가 후기로 갈수록 24사가 늘고 1850년 이후에 32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회를 짤 때에 16사는 2올뜀 기법으로 직조하였고, 24사는 3올뜀, 32사는 4올뜀 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다회의 올수가 많을수록 뜀수도 비례하여 여러 올을 띄면서 직조했다.
방울술에서 방울머리는 1400년대부터 1500년대까지는 대체로 위가 납작한 원반형태의 방울머리에 망수로 장식한 기둥부분이 있다. 1600년대 초반부터 방울머리의 윗부분이 약간 뾰족한 삼각형의 형태가 나타나며, 1700년대 초에는 동그란 형태로 변화한다. 1800년대에는 방울머리가 더욱 동그래지며 방울기둥이 가늘어지는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 유형의 방울이 다회의 양 끝에 각각 한 개씩 달린 쌍영자도 등장한다. 1800년대 중기에는 망수를 붙인 방울기둥 부분이 없이 방울머리가 술과 바로 연결되는 형태로 변화되면서 방울머리의 크기는 점차 작아지고, 방울과 술길이의 비율이 점차 커졌다. 또한 방울머리 2개를 연결한 2단방울의 구조가 나타났다. 1900년대부터 방울 위에 금사와 각종 색사로 만든 가락지매듭을 끼워 장식하였는데 방울머리가 1개인 1단방울뿐만 아니라 2단방울에도 가락지매듭을 끼워서 제작하였다. 또한 다회와 방울의 색상이 다른 것도 있고, 가락지 매듭을 끼우고 딸기술을 달은 영자도 있다.
방울머리는 별도로 짠 망(網)을 속틀에 씌우는데 직조 기법은 전시대에 걸쳐 동일한 방법으로 직조되었다. 망의 무늬는 대체로 ◇ 형태이나 때로는 망 사이의 간격이 좁아 무늬가 눈에 띄지 않는 경우도 있고, 망의 맺음부분이 사선이 되도록 짜기도 했다.
방울기둥은 1800년대 중기까지만 부착되었다. 방울기둥의 망은 무늬에 따라 크게 5유형으로 구분되었다. 가로방향의 일자뜨기를 하고 무늬를 2~4단으로 구성하였는데 전반적으로 2단으로 가장 많이 무늬를 표현하였다.
술은 영자를 더욱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 다는 장식으로 300올 이상 넣었는데 일부 500올 이상 넣은 것도 있다. 술 위에 붙이는 금전지는 몇 갈래로 잘라서 장식하는 기법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한 장으로 술 위를 감싸듯이 붙인 것도 있다. 영자의 속틀은 한지틀을 사용하다 1800년대 이후에 목각틀로 만든 것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술받침은 1개, 혹은 2개를 사용했는데 후기로 오면서 1개를 사용하게 되었다. 술받침은 한지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명주나 색지로 덧바른 것도 있고 목각에 칠을 하거나 색지를 붙인 것도 있다.
어보의 영자는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형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어보 손잡이에 영자를 다는 구조는 대부분 일치했으며, 왕이나 왕비, 왕세자 등의 신분에는 차이 없이 동일하게 제작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어보의 영자는 제작 년대가 분명하므로 영자에 있어서의 뚜렷한 변화는 조선 왕실의 장식문화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영자는 왕실의 어보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조대, 유소 등 복식과 각종 기물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는데, 본 연구 결과가 왕실의 장식문화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사 품목의 시대를 구분하는 편년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2016년도 단국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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