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7, No. 8, pp.20-33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Dec 2017
Received 26 May 2017 Revised 27 Nov 2017 Accepted 12 Dec 2017
DOI: https://doi.org/10.7233/jksc.2017.67.8.020

통신사 樂人의 服飾연구

박주현 ; 조우현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석박사통합수료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A Study on the Musician’s costume of Tongsinsa
Park, Ju Hyun ; Cho, Woo Hyun
Completion of Master and Doctoral integration course, Dept.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Professor, Dept.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Cho, Woo Hyun, e-mail: whjoy@skku.edu

Abstract

The Joseon dynasty established Confucianism, a systemized form of the Ye-Ak ideology of Confucius, as the basic ideology of the country. In diplomatic encounters with neighboring countries, the ideology of the dynasty was signified through Ye(禮), which was then expressed through Ak(樂).

The musicians(Ak-in) who accompanied the Korean envoys to Japan during the Joseon dynasty were Yang-in or Cheon-in, like the musicians at Jang-ak-won, meaning that they were of low social status. The Ch’wisu were dressed in black straw hat with peacock feather, red robe, blue belt, and black shoes, while the Ta-su were dressed in red felt hat with sang-mo, resembling a military uniform of the time, red robes, pale blue jeon-bok on blue dongdari, a belt, and black shoes.

Keywords:

Ak-in, Chisu, Chigosu, Pungaksu, Tongsinsa, Ta-su

키워드:

樂人, 吹手, 吹鼓手, 風樂手, 通信使, 打手

Ⅰ. 서언

조선후기 12회에 걸친 통신사 파견은 조ㆍ일간 선린관계의 상징을 나타내는 막부의 새로운 장군 취임 축하와 함께 그 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의미 또한 부수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행의 특이점은 중국에 파견된 연행사와는 달리 문화교류를 담당하는 인원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문창수(詩文唱酬)를 담당한 제술관(製述官)과 서기(書記), 양의(良醫), 의원(醫員), 화원(畫員), 사자관(寫字官), 마상재(馬上才), 악인(樂人) 등 문화교류를 담당하는 인원들이 다수 편제 되었다. 연행사행에는 마상재를 담당하는 무예별감과 악인이 전혀 편성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행에는 80여명에 달하는 악인들이 행렬 중 조선의 음악을 연주하며 위엄을 과시하였다. 조선의 주변국과의 외교정책은 크게 중국과는 사대정책, 그리고 일본 및 유구, 여진 등 주변국과는 교린정책으로 구분된다. 조선후기 조ㆍ일 외교정책으로 파견된 통신사행(通信使行)은 명ㆍ청 교체라는 격변하는 국제상황 속에 정례화 되면서 독자적인 선린우호(善隣友好)의 교린관계 유지를 위한 외교 사행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조선왕조는 공자의 예악사상(禮樂思想)을 체계화한 유교를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 윤리를 보급하고 국가질서를 세우기 위해 오례(五禮)를 국가전례로 규정하고 국가의식으로 수행하였다. 주변국들과 외교 의례 절차에도 왕조의 이념을 예(禮)로서 나타내고 그 예(禮)를 표현함에 악(樂)을 중시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간행하고 국가의례를 행할 때 지침서로 사용하였다. 주변국과의 외교와 통상 실무를 담당한 사역원관리들은 사대ㆍ교린에 대한 제반사항이 실린 실무지침서인 『통문관지(通文館志)』를 펴냈다.

이제까지 통신사에 관한 선행연구는 통신사 수행원들의 사행록이나 관련회화를 분석한 사학계나 미술학계의 연구중심으로 진행되어왔다. 최근 복식학계에서는 통신사 일행에게 지급한 복식지원 배경과 내역에 관한연구(Lee, 2015),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조선신사래빙기록(朝鮮信使來聘記錄)』을 통해 본 통신사 복식에 관한연구(Lee, 2014), 회화 사료를 통해 본 통신사 금관조복을 비교한 연구(Jung, 2014), 18세기 통신사 사행일정에 따른 구성원들의 복식 연구(Park, 2011), 통신사 기록에 나타난 단령의 착용실태 연구(Park & Shin, 2007), 학창의와 편복 그리고 관모에 관한연구(Park & Hong, 2011a, 2011b), 18세기 통신사행에서의 삼사신, 상상관, 상관 복식연구(Lee, 2008), 1711년 통신사행의 의례와 연회 등에 참석할 때의 삼사신 복식연구(Lee, 2003) 등 주로 삼사(三使)를 중심으로 상관(上官) 이상의 지배층 계급복식을 연구하였다. 통신사를 수행한 악인들에 대한 선행연구는 조선시대 풍속화에 나타난 세악수(細樂手) 복식연구(Kim, 2007)와, 취고수(吹鼓手)와 세악수의 연주악대의 종류와 역할에 관한 연구(Lee, 2004) 등에서 일부 언급할 뿐 통신사를 수행한 악인에 관한연구는 미흡한 편이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사회 내에서 지배층 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신사행을 수행하는데 주요한 일원이었던 악인의 역할에 따른 구성원과 그에 따른 복식을 고찰하고자한다. 첫째, 악인의 조선 사회에서의 사회적 신분과 통신사 일원으로서 구성을 알아보도록 한다. 둘째, 통신사가 사행 여정에서 행한 의례를 고찰한 후, 악인의 의례 시 역할에 따른 착용 복식을 고찰하고자한다.

연구방법으로는 유사한 시기의 문헌과 기록화 형식을 갖춘 두 점의 회화를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한다. 문헌 자료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통문관지(通文館志)』,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그리고 통신사 수행원으로서 일본에 다녀온 기록들을 모은 『해행총재(海行摠載)』를 활용하고 회화 자료는 의궤 반차도와 유사한 기록화 형식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통신사행렬도≫와 일본 화공이 그린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1711년 통신사행렬도≫ 중 [등성행렬도(登城行列圖)]의 악인들이 연주하는 악기의 구성에 따른 착용 복식을 비교 고찰해 보고자한다. 최근 학계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통신사행렬도≫는 제술관과 양의 명칭이 있는 점과 행렬도 말미에 등장하는 수역(修譯)이 3명인 점 등으로 최소 1719년(숙종 45) 이후의 사행을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Park, 2011). 따라서 두 회화 자료는 비슷한 시기 조ㆍ일 양국의 작가시점에서 복식과 문화를 전달하는 표현방법을 문헌의 기록과 비교 분석한 자료로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본다.


Ⅱ. 통신사 악인의 신분과 구성

조선 사회는 양반, 중인, 양인, 천민으로 이루어진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관직 또한 철저하게 사회신분계급에 의하여 나뉘어졌다는 점에서 관직이 사회신분계층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문(文), 무(武)산계(散階)에 속하는 경관직(京官職)은 양인(良人)출신의 관리들이 받을 수 있는 관직이며, 잡직계(雜職階)는 잡직에 종사하는 천인(賤人)출신 유직자(有職者)를 위한 계급으로(Jung, 1994, p29) 악인들의 조선 사회에서의 관직과 당시 사회적 지위를 살피는 것이 조선시대 통신사 수행원으로서 악인의 역할에 따른 착용복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이상의 악인복식의 연구 성과는 이후 조선 통신사 축제를 구성하고 있는 전시, 체험, 공연 콘텐츠의 스토리텔링 전략 수립에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 문화사업 네트워크를 활용함에 크게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1. 조선시대 악인의 신분

조선은 건국 원년(1392) 문무백관(文武百官)의 관제를 발표하면서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의 악인들을 악공직으로 삼았다. 도감에 소속된 악공이 부족할 때는 보충군(補充軍)과 공사비(公私婢)의 자식으로 양부(良夫)에 출가하여 낳은 사람을 선택하여 증원하였다.(『세종실록(世宗實錄)』, 1438) 악인은 종5품에서 종9품까지의 품계를 받았지만 문무의 유품(流品)과는 다른 별도의 집단이었다(Jung, 1994, p.31).

양인출신 아악서 녹관들은 양인과 천인 신분을 관료사회에서 동등하게 대우하는데 점차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천인출신 전악서 악공과 신분의 구별을 짓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종 12년(1430)에 잡직을 담당하는 천인신분의 관직을 가진 자와 양인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잡직계의 설치가 처음으로 논의되었다.(『세종실록』, 1430) 아악서 악공은 양인이고, 전악서의 악공은 천인신분인데 관직의 호칭이 같아 사람들이 악공직을 회피한다는 이유로 아악서 녹관의 양계(郞階), 관직의 호칭을 개칭한다.(『세종실록』, 1448) 이후 세조는 악서(樂書)를 편찬하거나 연주되는 음악을 악보화 하는 업무 및 음악이론과 역사, 악인들의 관복ㆍ의례(儀禮) 등에 관한 고증, 그리고 이론에 맞는 악기 제작의 감독, 마지막으로 악공의 선발과 습악(習樂) 등의 음악에 관한 주요 업무를 보는 악학(樂學)과 음악의 행정사무의 관장업무를 보던 관습도감(慣習都監)을 하나로 합하여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개칭하였다.(『세조실록』, 1457) 세조 4년(1458)에는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통폐합하여 장악서를 설립하였다. 전악서와 아악서, 봉상시(奉常寺) 등의 장악기관을 장악서로 통합함으로서 재랑(齋郞), 무공(武工), 악생(樂生)은 좌방(左坊)에, 악공(樂工)은 우방(右坊)에 속하게 하였다. 즉 아악서의 아악(雅樂)을 연주하는 악인을 ‘악생’으로, 전악서의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연주하는 악인을 ‘악공’으로 명칭을 다르게 하였다. 1466년 장악서가 악학도감의 업무를 흡수하면서 궁중음악 및 무용에 대한 행정ㆍ연주활동 등이 일원화되었다. 세조가 일원화 시킨 장악서는 후에 장악원(掌樂院)으로 개칭되었으며 정확한 연대는 남아 있지 않다. 장악원은 예조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례, 연회, 조의(朝儀), 대사객(待使客) 등에서 실제적인 음악활동을 하였다. 궁중의 여러 의식 행사에 따르는 음악과 무용은 장악원 소속의 악공(樂工)ㆍ악생(樂生)ㆍ관현맹(管絃盲)ㆍ여악(女樂)ㆍ무동(舞童)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아악(雅樂)을 담당하는 악사와 악생은 좌방에 소속되며 양인으로 충원하였으며 속악(俗樂)을 담당하는 악사, 악공, 가동(歌童)은 우방에 소속되며 공천(公賤)으로 충원하였다. 아악을 담당한 양인신분의 악인은 잡직계를 받지 않고 1품계 낮은 정직(正職)을 주었으며, 속악을 담당하는 천인신분의 악인은 최대 오를 수 있는 품계를 종6품으로 규제하였다(『경국대전』, 1485).

조선의 악인들은 사회적 신분에 의해 연주음악과 악기 그리고 의례에 있어서도 역할과 업무가 나뉘었다. 악인의 이러한 사회적 지위는 고려시대부터로 유추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오역(五逆), 오천(五賤), 불효, 향부전악공(鄕部典樂工), 잡류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고 되어있다. 악공을 오역(五逆), 오천(五賤)과 같이 취급하며 천인 시(賤人視) 한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법령이 그대로 조선에 이어져 내려오면서 조선시대 모든 궁중음악은 천인이든 양인이든 사회적으로 그리 높지 않은 신분의 악생과 악공에 의해 주도 되어왔다. 조선 초 법제화된 제도는 정치적으로 안정화되어가고 지배계급인 양반의 지위가 확고해짐에 따라 양(良), 천(賤)의 신분적 구별을 요구해오지만 17세기이후 잦은 전쟁으로 국가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점차 양인과 천인의 사회적 대우와 급료에 차이가 없어진다.

조선후기 통신사를 수행한 악인들은 장악원 악공의 신분처럼 양인 또는 천인 출신으로 조선사회에서 높은 신분은 아니었다. 이러한 출신신분에도 불구하고 통신사 일원으로서 격에 맞추어 복식을 착용하고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유교와 예라는 정신문화를 내포한 음악문화를 선보이며, 조선왕조의 위엄과 예악사상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타국에 전파하는 외교사절이었다.

2. 통신사 악인의 구성

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대규모 외교사절로서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등 삼사(三使) 이하 수백 명의 수행원들로 구성되었다. 수행원의 구성과정은 막부정권의 요청에 의해 대개 사행출발 5~12개월 전 조선의 외교를 담당했던 대마도주가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정부에 보낸다. 다음 삼사 선정은 예조에서 의정부와 의논하여 각각 3명씩의 후보명단을 왕에게 올리면 이 중에서 낙점한다.(Nam, 1655) 삼사 선정 후에는 사절단구성에 필요한 인원을 직무별로 선출하였다.

<Table 1>은 영조 40년(1764) 통신사 구성원과 각 구성원에 따른 인원을 표로 나타낸 것이다. 매회 통신사사행은 실제 인원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300~500명이었다. 일본에서는 통신사 수행원을 삼사, 상상관, 상관, 차관, 중관, 하관으로 크게 나누어 접대에 차등을 두었다.

The name and number of people for the Tongsinsa

이 중 통신사를 수행한 악인들만 <Table 2>로 구분하였다. 통신사를 수행하는 악인의 구성은 차관급에 속하는 가장 우두머리 격인 전악과, 중관에 해당하는 취수, 마상고수, 동고수, 태고수, 삼혈총수, 세악수, 쟁수, 가장 낮은 하관에 속하는 풍악수로 나뉜다.

The musician’s organization of Tongsinsa

악인 중 가장 높은 직급인 차관급에 속하는 전악은 정6품의 잡직벼슬을 가지고 장악원에서 음악교육과 연습의 책임을 맡았던 전문음악인이다. 전악은 장악서의 전악이라 칭하여 좌방과 우방을 총괄하도록 하였고, 양인에서 선발하도록 제도화 하였다.(『세조실록』, 1458) 『해행총재』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기예(技藝)가 남의 나라에 뒤지지 않게 하려고 전악을 데리고 갔으며 각 전문가들 중에 율려(律呂)에 익숙한 자를 포함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율려에 익숙한 자’도 전악을 일컫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조선사회 내 양반이나 양인출신에서 선출된 전악은 통신사 수행에서 조선의 수준 높은 음악을 선보이며 80여명의 악인들을 진두지휘한 총 책임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다음 중관에 해당하는 취수는 나팔 2인, 나각 2인, 태평소 2인 으로 구성된다. Kim(2011)에 의하면 나팔은 1480년 명나라 사신에 의해 전해진 악기이며 군영에서 대열을 배치할 때 쓰였기 때문에 대열의 선두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나각은 소라껍데기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악기이며 1876년(고종 13) 통신사로 다녀온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遊)』에 ‘각수(角手) 2명과 나수(螺手) 2명과 동행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나와 각은 구분되어야하며 ‘나각’은 ‘나수’로 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한다. 태평소는 『세종실록』1430년(세종 12)에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 이상 삼군(三軍)에 취라치(吹螺赤)와 태평소를 각각 배치하여 군대의 신호와 지휘에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취수는 삼사신이 각각 6명씩 거느려 총 18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상고수는 삼사신이 각각 2명씩 거느려 총6명이며 말 위에서 북을 치는 역할을 맡는다. 동고수 또한 삼사신이 각각 2명씩 거느려 총6명이며 꽹과리를 연주하는 악인이다. 태고수, 쟁수, 세악수는 삼사신이 각각 1명씩 거느리며 각각 총인원은 3명이다. 태고수는 큰 북을 연주하는 악인, 쟁수는 징을 치는 악인이다.

세악수의 ‘세악’은 악기명칭보다는 피리2, 대금1, 해금1, 장고1, 북1로 구성된 악단명칭으로 알려진 용어이다. ≪1711년 통신사행렬도≫에 ‘세악’ 이라고 기록된 악기에 관해 Kim(2011)은 유사한 모양의 악기를 ‘1719년 종가기록’에는 ‘쟁(錚)’이라 명기하는 등 일관성 없이 일본화공이 임의로 ‘세악’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조선 전기부터 정조 때까지 지속적으로 사용한 ‘요발(鐃鈸)’로 명칭하고 세악수가 아닌 요발수(鐃鈸手)로 명칭을 제안했다.

삼혈수는 삼혈총인 무기를 다루는 사람이다. 조선에서는 임란직후부터 사용한 총으로 삼안총 혹은 삼혈포라 불렀다. 『정조실록』(1790)에 의하면 어가가 나아갈 때 포성을 울렸고, 배치된 군사들이 다 같이 총을 세 번 쏘고 그 후에 취타(吹打)를 연주했다고 한다. 군악인 취타를 연주하기 전신호하는 역할로 총과 취타는 어가행렬에서 짝을 이룬 관계였다. 통신사행렬에 있어서도 연주하기 전 총을 세 번 쏘아 신호를 알리면 악인들의 연주가 시작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유추하여 악인의 구성원에 포함시켰다.

다음 풍악수는 하관에 속하며 삼사에게 각 4명씩 총12명이다. 마상고수 6명’, ‘쟁수 3명’ 등 북과 징은 구체적으로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만 피리, 대금, 해금, 장고 이상 4종의 연주자는 별도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피리1, 대금1, 해금1, 장고 1명으로 추측 가능하다. 『증정교린지』에는 삼사가 각각 6명씩 거느리는 이전보다 6명이 추가된 총18명으로 기록되어있다.

Song (2007)에 의하면 세악은 피리2, 대금1, 해금1, 장고1, 북1로 구성된 악단 명칭으로 알려진 용어로 통신사를 수행한 악인의 구성원 중 세악수는 다른 악인들과 편의상 구분해서 임의로 붙인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동일한 악기를 연주하면서도 중관과 하관으로 나뉘어 일본 측으로부터 다른 예우를 받은 세악수와 풍악수가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풍악을 ‘삼현풍악(三絃風樂)’이라하고 삼현이 세악을 의미함으로 세악수를 통신사행렬 수행 시 풍악수라고 지칭한 경우가 있다.(Lee, 2004) 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서 두 악인의 접대등급이 나뉜 이유는 조선사회 내에서 세악수와 풍악수가 같은 의미로 혼용되는 분위기에서 그들의 사회적신분인 양인과 천인 기준으로 구분지어진 것으로 유추 할 수 있다.


Ⅲ. 통신사 의례에 따른 악인의 역할과 복식

조선에서는 상대국의 경조사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 외교라 생각하였고 그 외교를 예조(禮曹)에서 담당하였다. 예악을 전담하는 기관에서 외교와 의례를 담당했다는 것은 악으로서 상대에 대한 예를 나타내고자 한 조선의 외교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본 장에서는 우선 문헌에 근거하여 통신사가 행한 의례를 고찰하고 ≪통신사행렬도≫와 ≪1711년 통신사행렬도≫중 [등성행렬도]에 표현된 악인의 구성과 역할에 따른 착용복식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통신사 행렬도

임진왜란이후 통신사는 1607년(선조 40) 국교회복을 위해 처음 파견된 이래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己酉約條) 체결로 대마번과 조선 사이에 도항(渡航)규정이 본격화되었고 1811년(순조 11)을 마지막으로 총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Jung, 200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통신사행렬도≫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711년 통신사행렬도≫는 총12회의 통신사행 중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든 비슷한 시기의 사행을 기록화한 것이다.

≪1711년 통신사행렬도≫는 대마종가(對馬宗家)에서 보관하던 것을 조선총독부가 국사편찬위원회로 이관한 것이다. [도중행렬도], [귀로행렬도], [등성행렬도], [귀국행렬도] 등 전체 4권으로 구성된 기록적 성격을 띤 반차도(班次圖)형식으로 일본에서 통신사 행렬의 순서와 배치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여러 명의 일본 화원들이 141일 동안 대마도주의 에도 저택에서 공동 작업을 통해 제작한 회권(繪卷)으로 전체 인물이나 기물의 묘사는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지만 세부적인 인물수와 착용한 복식의 채색과 문양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Jung, 200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통신사행렬도≫는 Hong(1995)에 의하면 처음에 ≪병자통신사행렬도≫라고 명칭 되었지만 이 회권의 명칭은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신뢰도가 낮고 행렬의 순서와 배치 등 양식 면에서는 1711년 행렬도와 유사하기 때문에 1636년 행렬도가 아닌 1711년 통신사행렬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또한 500명이 넘는 인물을 그려 넣는 작업은 방일기간의 바쁜 여정 속에서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행 중에 초본(草本)을 마련한 후 귀국하여 제작 했을 것으로 유추했다. 최근 학계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통신사행렬도≫는 제술관과 양의 명칭이 기록되어있고 행렬도 말미에 등장하는 수역(修譯)이 3명인점 등으로 최소 1719년(숙종 45) 이후의 사행을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Park, 2011). 정확한 사행 시점에 관한 논의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지만 500여명의 통신사 의장행렬 모습은 실제 사절단의 행렬은 일본인들에게 큰 볼거리이자 관심대상이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통신사행렬도≫는 통신사 사행원들이 에도성으로 진입하는 행렬의 모습으로 그림이 우측에서 시작하여 좌측으로 전개되는 조선의 의궤 반차도와 유사형식을 취하고 있다. 반면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711년 통신사행렬도≫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전개되는데 이 점은 일본 화원의 입장에서 통신사 일행이 부산진을 출발하여 최종 목적지인 에도를 향해 이동한 노정의 방향성을 의식하여 좌측에서 우측으로 그린 것으로 본다(Hong, 1995).

2. 의례에 따른 악인의 역할

통신사를 수행했던 악인들의 역할은 크게 행렬할 때와 일본 관리들이 초청한 잔치에서 연향활동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한다.

1) 행렬할 때

1711년 임수간의 『동사일기(東槎日記)』에 의하면 관문(官門) 5리 밖에 부사 이방언(李邦彦)이 장막을 치고 국서를 맞이하는데, 국서를 용정자(龍亭子)에 담고 의장(儀仗)을 갖추어 풍악을 울리며 앞에서 인도하였다. 김인겸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에서도 ‘어지러운 생소(笙簫) 고각(鼓角) 산악을 진동하고’ 라며 국서를 맞이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Park, 2011).

김세렴의 『해사록(海槎錄)』에 “일행이 관대를 바로잡고 기고(旗鼓)와 의종(儀從)을 갖추어 부중으로 갔다”1)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는 “신 등이 절월ㆍ기독과 고각(鼓角), 삼현을 갖추고 일행의 상하관이 각각 위의를 갖추어서 가니”2)

위 기록에도 나타나듯이 일본에 도착한 후 사신일행들은 하선연 이나 각 지역의 일본 관리들에 의해 연향에 초청되어 이동 시에도 지위에 맞는 복식을 갖추고 악인들 또한 복식을 갖추고 음악을 연주하며 행렬하였다.

통신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는 조선국왕의 국서를 막부장군에게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이다. 조선의 사신과 일본의 관백 양측이 좋은날을 합의하여 택하고, 미리 의주와 지형도를 통해 내용을 점검확인한 후 의례가 행해진다(Song, 2008). 『증정교린지』에 의하면 대마 도주와 관반 등이 청하면 의장기를 갖추고 고취(鼓吹)를 연주하는 가운데 사신일행이 출발한다. 먼저 행렬이 지나갈 길을 정화한다는 상징적의미를 지닌 청도기(淸道旗)가 앞장서고 이어 순시기(巡視旗), 영기(令旗)가 뒤따른다. 다음 절월(節鉞)ㆍ독기(纛旗)ㆍ대기(大旗)에 이어 고취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며 따라가는데 이상은 말을 타고 간다. 절월은 군령을 어긴 자에 대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하는 것이고 독기는 군대를 움직일 때 제사를 지낼 만큼 중요한 상징이므로 말을 타고가고 악대의 경우 국서를 모신 용정(龍亭)을 위한 것으로 말을 타고 간다. 각종 의장기 및 의물은 각각의 상징을 지니고 의례의 격에 따라 순서가 정해져있다. 이들 행렬은 왕을 대신하는 ‘국서’의 전달을 위한 것이므로 왕이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위용을 갖추었으므로 복식 또한 최고의 격을 갖추었다. 악인들은 국서를 옮길 때마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서 임금의 친서에 대한 예를 갖추어 조선의 왕명을 공경한다는 의미와 또한 타국에서 외국 사신으로서 위상을 지키고자 하는 복합적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연향 활동

통신사는 각 지방의 관소에 머무는 동안 일본 관리들이나 문사의 초대에 의해 외부 행차가 있었다.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에 “삼사신 이하가 흑단령에 사모관대를 하고 .....군의(軍儀) 와 군악(軍樂)을 갖추고서 정청(正廳)에 당도하자.”3)
홍우재의 『동사록(東槎錄)』에는 “사신 이하 관복을 정제하고 의장대를 앞세우고 군악 을 울리며 길을 인도하게 하고..”4)

위 사행록 모두 사신들이 대마도 관소에 머무는 동안 연회에 초청되어 갈 때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관복을 차려입고 의장과 악인들의 연주와 함께 행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악인들은 통신사 사행 중 주요 의례 외에도 통신사의 위상과 예를 나타내는 표현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악인 복식

<Fig. 1>, <Fig. 2>, <Fig. 3>, <Fig. 4>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통신사행렬도≫로 삼사가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에도성으로 가는 행렬도의 악인들 모습이다.

<Fig. 1>

Part of Tongsinsahaengryeoldo(National Museum of Korea, 1986)

<Fig. 2>

Jeonak of Tongsinsahaengryeoldo, (National Museum of Korea, 1986)

<Fig. 3>

Chisu of Tongsinsahaengryeoldo, (National Museum of Korea, 1986)

<Fig. 4>

Gosu of Tongsinsahaengryeoldo, (National Museum of Korea, 1986)

<Fig. 5>, <Fig. 6>, <Fig. 7>은 다수의 일본 화원이 모여 완성한 것으로 알려 진 ≪1711년 통신사행렬도≫의 [등성행렬도] 일부이다. 등성행렬은 삼사가 조선 왕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에도성으로 가는 행렬이다. 정사, 부사 행렬 앞에 위치한 악인과 종사관 앞에 구성된 악인의 형태와 규모가 다르다. 일본인이 그린거지만 연주자 위에 악기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비교적 구체적으로 복식도 묘사되어있다. 행렬도 속 악인들은 총 13명으로 기본 2열로 보행하고 있다.

<Fig. 5>

Part of Tongsinsahaengryeoldo(1711)(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Fig. 6>

Chisu Part of Tongsinsahaengryeoldo(1711)(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Fig. 7>

Jaegsu Part of Tongsinsahaengryeoldo(1711)(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 전악

통신사 악인들의 최고 책임자격인 전악의 복식은 <Fig. 2>와 같이 짙은 색의 포위에 청색 전복을 착용한 후 대를 두르고 흑화를 신었다. 언뜻 기수 등 하관의 복식과 동일하게 보이지만 머리에 쓴 전립의 장식이 다르고 회화에는 표현되지 못하지만 복식소재에 차이가 있을 것으로 유추한다. 중앙에서 선발되는 차관급인 전악은 장악원에서 전(錢), 목(木)을 빌려주어 복식 마련자금을 대여해주고 사행에서 돌아온 뒤에 회례은자로 상환하도록 하였다.

『통문관지』에는 통신사일행에게 지급한 의자(衣資) 내역 중 전악에게 천익차 초록면주(天益次 草綠綿紬) 45척, 목면(木綿) 2필, 포자(布子) 2필, 장미(腸米) 5석의 의자 내역이 기록되어있다. Lee(2015)는 통신사 절목에 ‘조급(措給)’, ‘조비(措備)’, ‘조급(造給)’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어 장복용이나 철릭용 옷감이 아니라 단령이나 철릭을 제작하여 지급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장복용 옷감의 색상과 소재에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2) 취수

<Fig. 1> 에 등장하는 악인은 나팔, 나각, 태평소 연주자인 취수로 구성되었다. 취수는 공작우 장식의 흑립을 쓰고, 홍색 포를 입고 대를 허리에 두르고 리(履)를 신은 것 같다. <Fig. 6>의 취수는 농담(濃淡)의 차이는 있지만 <Fig. 1>의 취수 복식과 유사한 붉은색 포에 공작우 장식을 한 넓은 챙의 흑립을 쓰고, 대를 허리에 두르고 흑화를 신었다. 『신미통신일록』기록에 의하면 <Table 3>은 저포로 만든 홍철릭을 착용한 것으로 소재에 차별을 두었지만 조선 내 사회적 지위보다 상급인 복식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The musician’s organization of Tongsinsa

3) 마상고수, 동고수, 태고수, 세악수, 쟁수

그 외 마상고수, 동고수, 태고수, 세악수, 쟁수는 <Fig. 4>와 같이 붉은 상모가 달린 전립을 쓰고 청색 포위에 담청색 전복을 착용한 후 대를 두르고 흑화를 신었다. 이들 악인들의 복장은 기수 등 하관의 복식과 동일하다. <Fig. 7>의 악인은 붉은 모가 달린 넓은 챙의 전립에 푸른 계열의 전복을 입고 흑화를 신었다. 대를 두른 것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 <Fig. 5>의 동고 연주자는 <Fig. 7>의 쟁 연주자보다 짙은 계열의 전복을 입었다. <Fig. 5>와 <Fig. 7>는 일본 화원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실제 색상의 차이가 있었는지 단지 약간의 농담 차이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형태는 동일함을 알 수 있다.

Yeom(2013)의 연구에 따르면 취고수는 악기를 연주하는 군악대이며 훈련대장 직속 또는 협연 시에는 전립, 목면으로 된 황색 호의[木綿黃號衣], 흑삼승겹협수[黑三升甲挾袖], 홍면주전대(紅綿紬戰帶), 흑수화자(黑水靴子)를 착용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군정편(軍政篇) 훈련도감과 순조대 『훈국등록(訓局謄錄)』의 각색군(各色軍)에 취고수와 취수가 제색표하군(諸色標下軍)에 포함되어 있는 점 등으로 비추어 전립과 협수에 전복이나 쾌자를 입는 차림에 대해 군복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군복은 전립(氈笠)을 쓰고 전복(戰服)이나 괘자(掛子)를 협수(挾袖)위에 입은 후에 허리에는 요대(腰帶)와 전대(戰帶)를 두르고 수화자(水靴子)를 신은 차림이다. 계급에 따라 전립에 장식된 공작미등 수식과 상모의 크기에 차이가 났으며, 전복과 쾌자는 무수대금의(無袖對襟衣)형, 협수는 소매통이 좁은 포로 계급에 따른 형태적 차이는 없었다. 기본적인 군복 소재는 목면(木棉)이지만 왕을 시위할 때 등 호위 대상의 신분에 따라 군복의 색상과 소재를 달리 사용하는 규칙이 있었으며 이는 국말까지 유지되었다. Yeom (2013)의 연구와 <Fig. 4>, <Fig. 7> 의 마상고수, 동고수, 태고수, 삼혈총수, 세악수, 쟁수의 복식을 비교한 결과 색상의 차이는 있지만 형태는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중관에 해당하는 취수, 고수, 세악수, 동고수, 쟁수, 태고수, 그리고 하관인 풍악수는 지방 원역에서 선발되어 항해나 행렬시 착용 복식을 지급받았다. <Table 3>는 순조10년(1810) 『신미통신일록』에 경상감영이 각 관포에 보낸 관문에 첨부된 원역의 복식 내역을 정리하였다.

<Table 3>의 『신미통신일록』에 기록된 협수는 저고리 위, 전복 아래에 착용하며 형태는 무가 있고 옆에는 트임이 있다. 소매가 좁은 착수(窄袖) 형이며, 길과 다른 색의 소매끝동이 달려있는 袍의 일종이다. 동다리와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Nam, 2003) <Fig. 8>은 홍우협(洪禹協1655~1691)의 협수로서 같은 재료로 만든 전복이 협수 위에 입혀져 있었다. 이 포의 소매는 착수(진동 30cm, 수구 16cm)이며, 고름은 겉고름 2개, 안고름 2개이며 배래선이 약간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또한 옆과 뒤의 트여있는 점은 같고 포의 양옆에는 무가 달려 있으며, 뒤 중심선의 54cm 아래에는 뒤트임이 있다.(Kim, 1993) <Fig. 9>의 『순조진작의궤(純祖進爵儀軌)』의 협수와 소매 형태가 약간 차이가 느껴지지만 수구가 좁은 것이 특징이다.

<Fig. 8>

Hyeopsu Hwangsaekchilbounmundan-Hyeopsu(Clothing Excavated the Tomb of Hong Uhyeop in the 17th Century)

<Fig. 9>

Hyeopsu 1828, Sunjojinjakuigwe

<Fig. 10>

Houi 1808, (Gwanbokdoseol, Muyedobotongji)

<Fig. 4>과 <Fig. 7>에 보이는 괘자는 협수 위에 입은 소매가 없는 옷으로 형태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Fig. 11>의 괘자와 소매, 고름이 없이 길만 있는 유사한 형태이다. 따라서 통신사행렬 속 괘자는 『순조진연의궤』의 괘자와 유사한 형태의 소매, 무, 양옆과 뒤 솔기가 터져 있는 4자락의 옷으로 유추 할 수 있다.

<Fig. 11>

Gwaeja 1828, Sunjojinjakuigwe

<Fig. 4>과 <Fig. 7>의 악인 착용한 전립은 전란(戰亂)중에는 모(毛)로 만들어 군모(軍帽)로써 이용되었다. 『헌종실록(憲宗實錄)』에 따르면 “근래 장신(將臣)이 모두 죽전립(竹戰笠)을 사용하고 있으니 지금부터 구례에 의하여 모전립(毛戰笠)을 착용하라”는 기록이있다. 또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의하면 전립이 병자, 정묘호란이후 군사와 평민들 사이에 유행하여 군복 중에 말꼬리와 돼지털로 만든 갓에 호랑이수염과 푸른 깃으로 장식하는 것을 개정해야하며 서민들이 봄과 여름에는 새끼나 대로 중국의 야립(野笠)처럼 만들어 쓰도록 전립의 재료와 형태를 명령 내렸다.(Nam, 2003) 무관용 전립의 장식은 모자꼭대기에 금속이나 옥석으로 장식을 다는데 품계에 따라 금(金), 은(銀), 옥(玉), 석(石)등 장식을 달리했다. 이를 증자 또는 징자라 하고 한자로 금증자(金曾子), 정자(頂子), 금징자(金徵子)라 적고 있다. 정자, 상모, 공작우와 같은 장식물을 부착하여 계급을 나타내는 신분체계에 이용되었다.


Ⅳ. 결언

이상에서 통신사 일원으로서 악인의 조선사회 내에서 사회적신분과 연주악기, 그리고 역할에 따른 착용 복식을 고찰하였다. 조선사회에서 비록 상류층에 속하지는 않지만 타국에서 조선의 이념과 왕조의 위엄을 예로서 나타내고 악으로 표출하는 존재로서 악인은 통신사 외교의례 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통신사 사행문헌에 기록된 내용은 대체로 삼사를 중심으로 상관 이상의 지배층에 집중되어 차관 이하 사행원인 악인의 복식에 대한 기록은 미흡하다. 그러나 ≪1711년 통신사행렬도≫중 [등성행렬도]부분과 최근 학계에서 1719년(숙종 45) 이후의 사행을 그린 것으로 발표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통신사행렬도≫에 묘사된 악인들이 연주하는 악기에 따른 복식을 비교 고찰하는 것은 첫째, 비슷한 시기 각기 다른 나라의 화원이 그렸다는 점, 둘째 기록화형식으로 연주하는 악기나 관직을 함께 인물 위에 기록한 점, 셋째 실제로 착용한 느낌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자료이다. 문헌의 기록과 두 회화를 비교 분석하고 선행연구를 보완하여 다음과 같은 연구를 고찰할 수 있었다.

첫째, 통신사 수행원으로서 악인의 구성은 조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차관급에 속하는 정6품 전악은 장악원에서 음악교육과 연습의 책임을 맡았다. 통신사가 행렬할 때도 80여명 이상의 악인들을 인솔하고 의례를 행할 때 진두지휘하는 총감독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다음은 중관에 해당하는 취수, 마상고수, 동고수, 태고수, 세악수, 삼혈총수, 쟁수 그리고 가장 낮은 하관에 속하는 풍악수로 나뉜다.

둘째, 일본 측 요청에 의해 수행원들 접대 등급을 분류한 기록에서 중관인 세악수와 하관에 속하는 풍악수는 동일한 악기를 연주하고 복장도 유사하다. 예로부터 풍악을 ‘삼현풍악’이라 칭하고 삼현은 세악을 의미하기도 했으므로 조선후기 통신사 수행 악인인 세악수를 풍악수라고 지칭하기도 하는 두 용어의 혼용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일본 측 접대등급에서 나뉜 이유는 악인으로서 역할은 같지만 조선의 사회적 신분인 양인과 천인 기준으로 분류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셋째, 통신사 악인 중에는 중앙관청인 장악원소속의 악인과 지방군영소속의 악인들이 섞여 선발되었다. 관청(官廳)이나 각 군영(軍營)에 소속되었던 악인들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방에서 차출하는 경우가 늘어나는데 그 이유는 점차 지방의 예인(藝人)들 실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넷째, 악인들이 통신사행에서 의례의 격을 갖추기 위하여 착용한 복식은 조선사회 내에서의 그들의 사회적 신분보다 더 상급의 소재와 색상을 사용한 복식을 착용하였다. 전악은 장악원에서 복식을 마련 할 자금을 대여해주고 회례은자로 상환하도록 하였다. 또한 <Table 3>와 같이 지방원역에서 선발된 취수, 고수, 세악수, 동고수, 태고수, 쟁수는 통신사 수행 시 착용할 복식을 지급받기도 했다.

다섯째, ≪통신사행렬도≫와 ≪1711년 통신사행렬도≫에 묘사된 악인들이 연주한 악기와 복식을 비교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나팔, 나각, 태평소 연주자인 취수는 공작우 장식을 한 립(笠)을 쓰고, 홍색 포를 입고 허리에 대(帶)를 둘렀다. 마상고수, 동고수, 태고수, 삼혈총수, 세악수, 쟁수 연주자들은 붉은 모가 달린 립(笠)을 쓰고 바지와 저고리위에 흑색이나 청색 전복(戰服)을 입었다. 이들의 복장은 기수등 하관의 복장과 동일하였다. 이는 곧 나팔, 나각, 태평소 연주자인 취수가 마상고수, 동고수, 태고수, 세악수, 삼혈총수, 쟁수 연주자 보다 직위가 높거나 서민음악보다 궁중 음악인 아악을 연주한 악인이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여섯째, 통신사 악인구성은 조선후기 군악대와 유사한 구성을 갖추었다. 군영소속의 악인들은 임금이 성문을 출입할 때나 공식적 의례나 사연에서 주로 행진음악을 연주하였다. 통신사를 수행한 악인 역시 행렬할 때 악기를 연주하여 지휘와 통신을 수행하며 행진분위기를 복 돋아 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연주자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Notes

1) Kim, Se Ryeom (1636). Haeyurok 食後一行正官帶具旗鼓儀從.
2) Cho, Myeong Chae (1748). Bongsailbonsimungyeonrok 臣等具節鉞, 旗纛, 鼓角, 三絃一行上下官各備威儀而行
3) Shin, Yu Han (1719). Haeyurok. 於是三使臣以下黑團領帽帶.....軍儀鼓吹而行至正廳
4) Hong, U. Jae (1682). Dongsarok. 使臣以下整齊章服例儀仗作軍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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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Fig. 1>
Part of Tongsinsahaengryeoldo(National Museum of Korea, 1986)

<Fig. 2>

<Fig. 2>
Jeonak of Tongsinsahaengryeoldo, (National Museum of Korea, 1986)

<Fig. 3>

<Fig. 3>
Chisu of Tongsinsahaengryeoldo, (National Museum of Korea, 1986)

<Fig. 4>

<Fig. 4>
Gosu of Tongsinsahaengryeoldo, (National Museum of Korea, 1986)

<Fig. 5>

<Fig. 5>
Part of Tongsinsahaengryeoldo(1711)(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Fig. 6>

<Fig. 6>
Chisu Part of Tongsinsahaengryeoldo(1711)(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Fig. 7>

<Fig. 7>
Jaegsu Part of Tongsinsahaengryeoldo(1711)(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Fig. 8>

<Fig. 8>
Hyeopsu Hwangsaekchilbounmundan-Hyeopsu(Clothing Excavated the Tomb of Hong Uhyeop in the 17th Century)

<Fig. 9>

<Fig. 9>
Hyeopsu 1828, Sunjojinjakuigwe

<Fig. 10>

<Fig. 10>
Houi 1808, (Gwanbokdoseol, Muyedobotongji)

<Fig. 11>

<Fig. 11>
Gwaeja 1828, Sunjojinjakuigwe

<Table 1>

The name and number of people for the Tongsinsa

Classification Name/ The number of people Total
(Cho, 1763)
Samsa(三使) Jungsa(正使) 1, Busa(副使) 1, Jongsagwan(從事官) 1 3
Sangsanggwan
(上上官)
Dangsang(堂上) 3 3
Sangpansa
(上判事)
Sangtongsa(上通事) 3 3
Haksa(学士) Jesulgwan(製述官) 1 1
Sanggwan
(上官)
Yangui(良医) 1, Chasangtongsa(次上通事)2, Ammulgwan(押物官) 4, Sajagwan(寫字官) 2, Euwon(醫員) 2, Hwawon(畫員) 1, Jajegungwan(子弟軍官) 5, Gwan(軍官) 12, Seogi(書記) 3, Beolpagun(別破陣) 2 34
Chagwan
(次官)
Masangjae(馬上才) 2, JeonAk(典樂) 2, Ima(理馬) 1, Suk su(熟手) 1, Bandang(伴倘) 3, Seonjang(船將) 3 12
Jungwan
(中官)
Doseonjang(卜船將) 3, Amsodong(陪小童) 19, Nohja(奴子) 52, Sotongsa(小通事) 10, Dohundo(都訓導) 3, Yedanjik(礼單直) 1, Cheongjik(廳直) 3, Banyeongjik(盤纓直) 3, Saryeong(使令) 18, Chisu(吹手) 18, Jeolwolbongji(節鉞奉持) 4, Posu(砲手) 6, Docheok(刀尺) 7, Sagong(沙工) 24, Hyeongmyeongsu(刑名手) 2, Doksu(纛手) 2, Woldosu(月刀手) 4, Sunsigisu(巡視旗手) 6, Yeonggisu(令旗手) 6, Cheongdogisu(淸道旗手) 6, Samgi-changsu(三枝槍手) 6, Jangchangsu(長槍手) 6, Masanggosu(馬上鼓手) 6, Donggosu(銅鼓手) 6, Taegosu(太鼓手) 3, Samhyeolchongsu(三穴銃手) 3, Seaksu(細樂手) 3, Jaegsu(錚手) 3 233
Hagwan
(下官)
Pungaksu(風樂手) 18, Doujang(屠牛匠) 1, Gyeokgun(格軍) 270 289

<Table 2>

The musician’s organization of Tongsinsa

cassification title/no. part total no. status
(Cho, 1763)
Chagwan
(次官)
Jeonak(典樂)/2 Command & Teach 2 Yangban(兩班) or Yangin(良人)
Jungwan
(中官)
Chisu(吹手) 18, Masanggosu(馬上鼓手) 6, Donggosu(銅鼓手) 6, Taegosu(太鼓手) 3, Samhyeolchongsu(三穴銃手) 3, Seaksu(細樂手) 3, Jaegsu(錚手) 3 Music performance 42 Yangin(良人) or Chunin(賤人)
Hagwan
(下官)
Pungaksu(風樂手) 18 Music performance 18 Chunin(賤人)

<Table 3>

The musician’s organization of Tongsinsa

cassification status title name of musical instrument part the no. total no dresses recorded in 『Sinmitongsinilrok』(1810)
hat dress belt
* Pungaksu ( ) the number of people based on 『Jeungjeonggyorinji』
Chagwan
(次官)
Yangban(兩班) or Yangin(良人) Jeonak(典樂) Command & Teach 2 2
Jungwan
(中官)
Yangin(良人) or Chunin(賤人) Chisu(吹手) Napal Music performance 6 42 Hosu(虎鬚)
Gongjaku
(孔雀羽)
Hongcheonrik
(紅天翼):
Jeopo(苧布)
Dae(帶)
Nagak 6
Taepyeonso 6
Masanggosu(馬上鼓手) Buk 6 Naegongjeonrip
(內工戰笠)
Jeungja(鏳子)
Sangmo(象毛)
Hyeopsu(挾袖)
Gwaeja(掛子)
Hwangsuhoui
(黃袖號衣)
Jeondae
(纏帶)
Donggosu(銅鼓手) Kkwaenggwari 6
Taegosu(太鼓手) Buk 3
Samhyeolchongsu(三穴銃手) Chong 3
Seaksu(細樂手) Daegeum,Haegeum, Janggo, Buk 3
Jaegsu(錚手) Jing 3
Hagwan
(下官)
Chunin(賤人) Pungaksu(風樂手) Daegeum, Haegeum, Janggo, Buk Music performance 4(12)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