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長衣)의 시기별 변화 : 문헌자료와 출토유물 중심으로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origin of the Jangui(長衣) and the process of its Korean traditionalization(國俗化) through analyzing the excavated costume and Korean confucian scholar's collections(文集). The results are : Korean Jangui originated from the Chinese Jangui in its role and name. but the Korean Jangui created its own characteristics regarding construction through blending Chinese Jangui and Korean Jangyu(長襦, Three Kingdoms period coat). The role of Jangui was to be worn as an undergarment called a Jooui(中衣), inside ritual clothes like Jaebok(祭服) or Joebok(朝服) or Sangbok(喪服) which were constructed in a two-piece style. The Jangui provided cover for exposed parts of the body which explains its lack of slits. The Jangui can be characterized as a one-pieced style with a square collar called Mokpangit(목판깃), straight sleeves, trapezoidal gussets and triangular gussets, White cuffs called Geodulji(거들지) no slits. We postulate that the square collar, straight-sleeve, the one-piece style originated from Jangyu and Geodulji and trapezoidal gussets were originated from the Chinese Jangui. There are three changes in the Jangui in wearing and constructions in Josean Dynasty. Theses changes were due to desires to conform to confucianism, which had gende-specific.
Keywords:
geodulji, Jangui, jooui, Korean traditionalization, trapezoidal gussets키워드:
거들지, 장의, 중의(中衣), 국속화, 사다리꼴무Ⅰ. 서언
장의(長衣)는 한자가 말하듯 긴 옷을 뜻하며 유사한 어휘에 장오자(長襖子) 혹은 장유(長襦)가 있다. 상대(上代)시대 의복명칭인 장오자는 단오자, 장유는 단유(短襦)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긴 옷을 말하는 것으로, 같은 맥락의 옷이라 할 수 있다. 장유에 대하여 이재는 사례편람(四禮便覽) 세주에 …長襖子…俗稱長衣…라 하였으며 또 …袍襖…(韻書)袍長襦…如俗(中赤莫)… 라 하여 중치막이라 설명했다.(Lee, 1680-1746). 이로 보아 장오자 혹은 장유는 특정 의복의 명칭이 아니라 저고리에 비해 긴 옷을 통칭하는 어휘로 사용된 듯하다.
반면 송문흠은 한정당집에 …衫子之不開骻者。卽今之長衣也…(Song, 1710-1752)라 하여 장의를 트임이 없는 옷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하였다. 이밖에도 장의는 조선전중기 역어유해(譯語類解)와 노걸대(老乞大) 혹은 순천김씨 간찰 등 언문기록에 ‘장옷’으로 기록되었다. 더욱이 ‘장의’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사용되고 있어 두 나라의 장의가 동일한 옷인지 혹은 명칭만 같은 옷인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장의는 출토복식을 통하여 조선전기부터 남녀의 옷이었음이 이미 확인되었다(Chang, 1995; Park, 1992), 이상은ㆍ김민정은 최근까지의 출토된 장의는 약 51건이며 그 수는 165점에 이른다고(Lee & Kim, 2012)하였다. 그에 따르면 장의는 출토 포류 가운데 단일 항목으로는 그 수가 가장 많은 옷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의에 관한 연구는 여자 장의에 국한된 경향이 강하며 포에서 쓰개로 변화한 시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대부분이다. 그 시점에 대하여 김미자는 조선후기로 추정하였고(Kim, 1988) 안명숙은 17세기까지 포의 구성을 하고 있음을(An, 2015) 또 쓰개로의 전환시점에 대하여 송미경은 18세기로 추정한(Song, 2003) 반면 이해영ㆍ남선화는 19세기(Lee & Nam, 2005)로 추정하였고 류보영과 임상임은 전세 장옷을 통하여 19세기에 쓰개장옷의 구성이 완성되었음을(Ryou & Lim, 2002) 밝혔다. 즉 여자장의는 적어도 17세기까지는 포로, 19세기이후에는 쓰개로 용도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남녀 출토 장의의 현황과 구성을 조사ㆍ분석하여 시기별 변화와 전개과정을 좀 더 근접하여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장의는 목판깃, 직선 소매, 사다리꼴무, 삼각형무, 거들지와 트임이 없이 구성된 옷이다(Park. 1992, Chang. 1995). 이러한 장의의 구성은 단령, 도포, 대창의, 중치막, 소창의 등 조선시대 대부분 포류와 차이를 보이며, 특히 소매끝의 흰색장식을 원삼의 경우는 한삼이라 칭하는 것과 달리 연구자에 따라 ‘태수’ 혹은 ‘거들지’라 칭하여(Park, 1992, Ann, 2007) 한삼과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왜 장의는 포 가운데 유일하게 목판깃과 사다리꼴무 그리고 흰색 거들지 등으로 구성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중심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또 조선전기 양성지가 장의에 복요(服妖)라 한 기록을 조선후기 송문흠과 이유원도 언급하고 있어 그 사회적 배경 역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출토장의는 발굴보고서와 실물을 대상으로 직간접 조사를 통하여 진행하였으며,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문집과 관찬사료에 언급된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이에 따라 기록과 출토 장의를 살펴 착용과 구성의 시기별 변화를 파악하고 이를 통하여 국속화 과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Ⅱ. 남녀 장의 관련 기록과 출토 현황
본 장에서는 기록과 출토유물을 통하여 장의의 현황을 조사하여 그 변화시기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1. 문헌기록
조선시대 기록에서 장의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 <Table 1>과 같다. 이에 의하면 장의는 15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기록 에 나타나고 있어, 조선시대 전시기에서 착용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여자 장의에 대한 내용은 16ㆍ17세기 가례서(家禮書)에 집중된 반면 남자장의에 대한 내용은 18ㆍ19세기 관찬사료(官撰史料)에서 확인되는 차이를 볼 수 있다.
2. 출토유물
출토장의의 발굴빈도와 착용자 성별, 추정연대, 구성유형 그리고 재질 등을 정리하면 <Table 2>와 같다. 이에 의하면 부부합장묘인 이응태ㆍ전박장군ㆍ김첨ㆍ장흥임씨의 분묘에서는 남녀 장옷이 함께 출토되었으며, 남자 장의는 15ㆍ16세기의 홍계강ㆍ이언웅의 묘와 16ㆍ17세기의 김덕령ㆍ김함ㆍ홍극가ㆍ김위ㆍ정휴복ㆍ이휴정ㆍ진주류씨의 묘, 그리고 17ㆍ18세기의 홍우협ㆍ김덕원ㆍ홍진종의 묘에서 출현하였다. 또 여자 장의는 15ㆍ16세기의 석남동ㆍ양천허씨ㆍ장택고씨의 묘와 16ㆍ17세기 출토지 가운데에서는 약 24여 곳에서, 또 17ㆍ18세기 출토지 가운데에서는 약 11여 곳 그리고 19세기 안동김씨 일가 등 조선시대 전시기 출토유물뿐 아니라 근대 전세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장의의 출토빈도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남자장의는 17ㆍ18세기 이후 출토가 감소하는 것과 달리 여자 장의는 전세유물에 이르기까지 전시기에 걸쳐 확인된다.
또 출토지별 장의의 출토량을 살펴보면, 남자장의는 중기이전 출토지인 이언웅 유물에서 5벌, 이응태와 김덕령의 유물에서는 4벌, 석남동ㆍ전박장군ㆍ김함의 유물에서는 3벌 혹은 2벌이 출토되는 경향을 보이나 중기이후로 내려올수록 각 출토지에서 1벌 혹은 2벌로, 출토량이 감소하는 변화를 보인다. 또 여자장의는 여흥민씨(1586-1656)와 전주이씨(1634-1704) 유물에서 10벌 전후 출토되고 있으며, 고성남씨(16세기 추정)ㆍ안심리(16세기 중반추정)ㆍ장기정씨(1565-1614)ㆍ양천허씨(1450)ㆍ동래정씨(1567-1631)ㆍ연암김씨(16세기 추정)ㆍ진주하씨(17세기 중반)ㆍ남양홍씨(1584-1654)ㆍ진성이낭(17세기추정)ㆍ양천허씨(1630-1660)ㆍ안동김씨(17세기중반)ㆍ전주이씨(1634-1704)와 청송심씨(1683-1718) 유물에서 5벌 전후로, 17세기 중반이후 출토지에서도 다수가 출토되고 있어, 남자 장의와는 차이를 보인다.
장의의 크기
출토 남자장의의 구성과 크기는 전시기에서 유사하나, 김덕령과 홍우협 장의에서만 다른 장의들과 일부 구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김덕령 출토장의는 다른 장의들에 비하여 길이가 짧으며(Important Folk Materials, 1997), 홍우협 출토장의는 안깃은 목판깃이나 겉깃이 칼깃이며 사다리꼴무와 삼각형무로 구성되어 기존의 장의구성과 차이를 보인다(Kim, 1999). 또 김동욱 박사가 ‘동방형포’로 명명한 충북대학교 박물관 전박장군 출토 동방형포형 역시 길이가 짧은 누비포이나 칼깃과 삼각형무로 구성되어 홍우협의 출토장의와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Kim, 1987). 이 두 옷은 칼깃과 삼각형무로 구성되어 소창의의 구성과도 연관성을 보이나 트임이 없는 구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장의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어진다.
청주출토 김원택 일가의 청송심씨, 한산이씨, 그리고 전주이씨 출토장의를 통하여 18세기 장의 구성을 살펴보면 <Table 3>과 같다.
18세기 출토 여자장의의 품나비는 17세기에는 62(31)㎝ 전후이나 18세기 이후는 44(22)㎝ 전후로, 시기가 내려올수록 확연히 좁아지고 있는 반면 사다리꼴무 윗나비는 17세기 전후에는 3㎝ 전후이나 18세기 이후에는 약 8㎝ 전후 크기로, 확대되는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류보영과 임상임이 언급한 쓰개장의의 구성인 백비나 매듭단추 및 완전한 맞깃 구성은 확인되지 않고 있어, 18세기 여자장의는 포의 구성에서 벗어나 쓰개구성으로 전개되는 과도기적 포의 구성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출토빈도와 출토량을 살펴보면 남자장의는 17ㆍ18세기를 기점으로 그 수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여자 장의는 17ㆍ18세기 이후에도 여러 출토지에서 다량 출토되어 남녀장의의 착용에서의 변화를 암시한다. 특히 18세기 출토 여자장의는 품나비는 축소되는 반면 섶 그리고 사다리꼴무의 윗나비는 확대되는 구성변화를 보여 착용에 이어 구성에서의 변화를 통하여 남녀장의가 차별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착용변화에 이어 구성변화가 이루어졌으며 남자장의에서의 변화가 여자장의보다 선행된 것으로 유추된다.
Ⅲ. 장의 착용 및 구성 관련 기록과 출토유물
앞의 <Table 1>에 의하면 장의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착용과 구성을 다루고 있으며 이를 남자 장의와 여자의 장의의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1. 장의의 착용
남자 장의의 관한 기록은 무명 장의, 소장의 그리고 어린이 장의에 관한 것이었다. 군복에 관하여 강재항, 승정원 일기, 최익현의 기록에서 보인다. 무명장의에 대하여
승정원일기에 “…이수림은 화살을 맞은 것이 부지기수인데, 그가 속에는 장의를 입고 겉에는 단의를 입었으므로 화살을 맞은 것이 매우 많았더라도 죽거나 다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Sungjungilgi, 1636)라 하였으며 강재항은 입재유고에 “…옛날 승지를 지낸 고조할아버지가 평창의 수령일 때, …… 감영에서 하나의 검은색 목면장의를 만들어 낮에는 입히고 밤에는 덮어주게 하며, 별도로 이불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지금 내나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어 어찌 감히 너희들의 이불을 만들어 주어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가의 검약하는 법도를 훼손하겠는가…“1)(Kang, 1689-1756)
라는 기록에서 남자의 무명 장의의는 군인들의 옷으로 착용되었으며 이러한 무명 장의의는 이불의 대용품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7ㆍ18세기 인물인 강재항이 고조할아버지의 일로 기록하고 있어, 이러한 군인들의 장의는 적어도 17세기 이전부터 착용되었으며 18세기에서도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소장의에 대하여
일성록에 “…이 외에 손정일이 입은 소장의는 참으로 김상복의 말과 같으니…”(Ilsunglok, 1797)의 기록과 최익현은 면암집에 “…소장의만 입고 있으니, 사람들이 혹 시골의 궁한 선비로 잘못 아는 일이 많았다…2)”(Choi, 1833-1906)는 기록과 승정원일기에 “…역소의 모정배들이 혹 의관을 벗어부치고 혹 소장의를 입은 채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탓으로 대궐문의 중요함을 모르고 무리를 따라서 멋대로 들어갔다가 잡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Sungjungilgi, 1888)
라는 기록에서 ‘소장의’는 19ㆍ20세기 기록에서 적지 않게 언급되고 있어, 그 착용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앞의 김덕령, 홍우협, 전박장군묘에서 출토된 짧은 장의가 소장의일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서 소장의는 시골의 빈궁한 선비 혹은 모정배의 옷이라 하여 중인의 옷으로 착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출토 소장의가 17세기 전후의 유물인 점과 19ㆍ20세기 기록을 보면 소장의는 적어도 17세기 이후부터 착용되어 후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남자어린이의 장의 착용에 대하여
이익은 성호사설에 “… 그는 일찍이 어떤 집에 이르러 어린아이가 장옷 입은 것을 보고, “이는 성인의 옷이다.”…3)“(Lee, 1681-1763) 라 하였고 홍대용은 담헌서에서 보령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에서 “…또 기러기 털이 두어 상자 있었고 벽 위에는 한 흑장의가 걸렸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4)”(Hong, 1731-1783a)
는 기록에서 성인의 옷으로 어린이의 착용이 제한되었던 장의가 17ㆍ18세기 이후는 남자 어린이들의 옷으로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 장의에 대한 기록은 홑겹 장의, 녹색면포장의, 백포(삼베) 장의, 제복 등에 관한 것이다. 홑겹 장의에 대하여
연산군 실록에 “… 원삼 홑겹 장의는 거행하지 말 것이며…”(Yeonsangun Sillok, 1498)…라는 기록과 중종때 사치풍조에 대하여 예조에서의 복제를 아뢰는 상소에서 “…서인 여자가 백저포로 장의와 치마 만드는 것이나 짙게 물들인 아청색으로 치마 만드는 것을 아울러 금하고…”(Jungjong Sillok, 1522)
의 기록에서 조선전기에 홑겹 장의는 원삼에 준하는 예복인 동시에 서인 여자들의 착용이 제한되는 사치 품목의 의복이었음을 알려준다. 서인 여자들의 장의착용에 대하여
이호민은 오봉집에서 “…한 관찰사가 경포호를 유람하다 물에 빠져 기녀의 장옷을 빌려 입었으며, 이를 들은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고 …“5)하는 기록(Lee, 1553-1634)과 구용의 죽창한화에 “… 석경일은 황급히 놀라 일어나느라고, 잘못 첩의 자주빛 장의를 입고 머리에는 침모를 쓴 채 몸소 쫓아갔다. 말은 달려서 중학 속으로 들어갔다. …”6)(Koo, 1569-1601) “…
는 기록에서 16ㆍ17세기에 여자 장의는 기녀와 첩의 옷으로까지 그 착용계층이 확대되어 여자들의 보편적인 옷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포장의에 대하여
송익필은 구봉집에서 “…시집 간 딸의 기년상이 끝나는 달이라, … 백포로 만든 장의를 만들어 상복과 바꾸어 입고 곡하려고 합니다. … 이런 옷을 입는 것이 예에 크게 어긋나는지 알지 못 하겠습니다…”7)라는 질문에 “… 보내주신 글을 보니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어찌 다른 옷을 만들어 상복으로 입을 수 있습니까…”8)(Song, 1534-1599a)라 하여 여자들이 상기간 동안 상복 대용으로 착용할 수 있는 의복으로 장의가 ‘온당치 못하다’하여 부정의 뜻을 밝히고 있다. 반면 장현광은 여헌집에 “… 출가한 여인들은 비록 상복을 벗더라도 마땅히 삼베로 만든 장의를 입고 3년을 마쳐야 하니, 어찌 길복을 입을 수 있겠소…”9)(Jang, 1554-1637)라하였으며, 송준길은 동춘당집에 “…부인의 초상 때 상복의 중의를 세속의 장의처럼 지어 최복에 받쳐 입는 옷으로 삼았습니다. …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 이복초와 택지의 질문에 “… 편지의 말씀이 모두 옳네. … 부인의 포장의는 남자의 생포 직령처럼 지어,…그대로 입는 것이 마땅하네 …”10)(Song, 1606-1672) 17ㆍ18세기 박필주는 여호집에서 윤사빈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不應在中間忽然揷入長衣中衣攙雜爲言。上下語脉。一成不倫。高明所改訓義。以文理則誠亦不免於艱晦。…” 11)(Park,1680-1748)
라 하여 장의를 여자 상복의 받쳐 입는 중의로의 착용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김간은 후재집에 “…관아의 경비를 줄이는 방안으로 사치를 제거하고 검약할 것을 주장하면서 세주에서 선왕시대 사대부가의 딸을 결혼시키면 신부는 녹색으로 염색한 면포로 만든 장의를 입었으며…12)“(Kim, 1646-1732a) …라 하고, 정조때 김정국은 상소에 “… 사대부 집 여인의 혼례에는 푸른빛을 물들인 면포 장의를 쓰도록 하였다고 간하였다…”(Ilsunglok, 1795)
라 하여 김간은 검소한 사대부 신부 옷으로 녹색면포장의를 착용한다고 세주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김간은 혼례복으로 착용하는 장의에 대하여 앞시기 ‘先’을 기록하고 있어 적어도 김간의 생졸시대인 17ㆍ18세기 이전부터 녹색 장의를 혼례복으로 착용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김정국의 상소를 통하여도 18세기에서도 녹색 면포장의는 여자들의 혼례복으로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명흠은 역천집에 “…모든 제복에서 장부는 심의로 성복을 삼는다. …… 부인은 가계와 장의를 한다.…”13) (Song, 1705-1768)라 하였고 장의의 대대 착용에 관한 황종해의 질문에 이황은 “…중국의 여자 관복제도를 대신하여 부인들에게 장의에 대대를 두르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하는 질문에 일개 선비가 제도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듯싶다…”14)(Hwang, 1579~1642)라 하여 장의는 대대를 두를 수 없는 옷이며 그 근거로 중국제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 하였다.(이황, 1501-1570) 송문흠은 “…국속에 장의와 당의는 대를 사용하지 않으며…”15)(Song, 1710-1752)
…라 하여 장의는 원삼이나 대수와는 달리 대대의 착용을 불가한 것으로 보아 일상의 예복으로 제한한 것으로 보여준다. 쓰개에 대하여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
“…어떤 사람은 길에서 고운 옷 입은 부인을 만나면 반드시 머리를 돌리어 주시하고, 심지어는 궁인(宮人)의 유모(帷帽) 드리운 것이나 여염집 여인의 규의(袿衣 긴 저고리인데, 속명(俗名) 장의(長衣)이다…”(Lee, 1741-1793)
2. 장의의 구성
앞의 출토 장의에 나타난 장의의 형태와 재질 그리고 색상의 측면에서 구성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Table 2>에 의하면 출토장의는 솜누비, 솜, 두 겹누비, 두겹, 홑겹 등 다양한 구성유형으로 출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남자 장의는 솜장의, 솜누비 장의, 겹누비 장의, 두겹 장의 등이었으나 홑겹장의는 출토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여자 장의는 솜장의, 솜누비 장의, 두겹 장의(14곳), 두겹 누비 장의(6곳)와 홑겹 장의 등으로 다양하며 그 가운데에서도 솜장의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으며 홑겹 장의는 가장 적게 나타난다. 이러한 여자 장의는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두 겹 장의와 두겹누비 장의가 주로 출토되는 변화를 보인다. 또 <Table 2>에서 장의의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전시기에서 남녀 장의 모두에서 목판깃, 직선소매, 거들지, 사다리꼴무와 삼각형무, 고름, 겉섶과 안섶 등의 구성요소를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장의의 구성은 시기와 착용자 성별과 무관하게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장의의 형태구성은 조선 전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장의의 삼각형무는 사각형 1장으로 재단되어 반으로 접어 삼각형 형태를 이루는 구성이 전시기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Table 2>에 의하면 석남동, 해평윤씨(1660-1701)와 전주이씨(1722-1791)의 출토 장의 3벌의 삼각형무는 2장으로 재단되어 다른 장의들과 차이를 보인다. 이를 피장자의 생졸연대와 비교해 보면 석남동 장의는 15세기 장의이며 나머지 두벌의 장의는 18세기 전후로, 시기적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앞시기 석남동 장의의 무구성은 장의의 초기 단계에서의 불완전한 구성일 가능성을, 뒷시기 해평윤씨와 전주이씨의 장의의 삼각형무는 조선후기의 4겹 봉제방식으로 제작에 따른 결과로 추정된다. <Table 3>에 의하면 장의의 구성요소별 크기를 살펴보면 품나비는 17세기 중반 이전 유물에서는 32㎝에서 20㎝ 전후이나 18세기 이후 출토 장의에서는 13㎝에서 17㎝로 축소되고 있다. 반면 삼각형무는 18세기 이전 유물에서는 3㎝ 혹은 4㎝이었으나 18세기 이후 유물에서는 약 8㎝ 전후로 확대되는 변화를 보인다. 또 겉섶나비와 안섶나비도 18세기 출토장의에서부터 약 65㎝ 전후의 크기로 확대될 뿐 아니라 겉섶과 안섶의 크기가 유사해 지는 변화를 볼 수 있다.
남자 장의의 재질은 <Table 2>에서와 같이 15세기 홍계강의 출토 장의만 단(緞)직물이며 이를 제외한 대부분 남자 장의는 주직물로 구성된 반면 여자 장의는 주직물이 가장 많으나 단, 면, 능과 사, 초 그리고 모시 등 다양한 재질구성을 볼 수 있다. 특히 17세기 이후 출토 장의에서는 단, 사, 초 등의 고급직물로 구성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 이러한 직물이외에도 모피 장의에 대하여
구용은 죽창한화에 이덕형에 보내는 서신에서 “…과 김성일의 일화를 보내는 내용에서 김성일이 선조에게 영상 노수신이 남에게 담비가죽 장의를 받았다하여 이를 고하니, 노수신이 늙은 어미가 병이 많아 겨울이면 추위를 참지 못하여 변방의 일가에게 구해다 어미에게 주었다…”(Koo, 1569- 1601)
는 기록에서 모피 장옷의 착용을 알려주며 담비장의는 상소에서 비난을 받을 정도로 사치품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러한 노수신의 일화를 18세기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도 답습되고 있어(Lee, 1736-1806) 그 경중을 엿볼 수 있다. 또 여자 무명장의에 대하여
윤추는 농은유고에 “…“참판댁 숙모가 어찌 존귀하지 않으랴마는 항상 면포로 만든 장의를 입으시니, 그 검소한 덕을 너희들이 본받아야 한다.”.…16)고 며느리들에게 말하였다(Yoon, 1632-1707), 기록이 있으며 윤동수는 경암유고에 “…일찍이 며느리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참판댁 숙모가 어찌 존귀하지 않으랴만 항상 면포로 만든 장의를 입고 계시니, 숙모의 꾸밈없고 검소한 행실을 너희가 본받아야 한다.…”17)(Yoon, 1674- 1739)
는 기록들에서 여자들의 무명 장의는 검소한 생활의 상징이었음을 의미한다.
출토 장의는 발굴이후 퇴색과 변색으로 대부분 갈색계통이나 그 원색은 현재까지는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여자 장의의 색상에 대하여
김세렴은 동명집에 “…우리나라 여인들이 장의를 만드는 제도는 청색, 남색, 붉은색, 흰색, 자주색, 다갈색 등을 사용하며, 간혹 색동옷을 입고 여러 가지 색으로 화초의 모양을 그리는데 소매가 매우 넓다. 단지 한 폭만을 사용하며…”18)라는 기록(Kim, 1593-1646)과 김간이 후제집에서 “…덕계 오건19)의 부인이 남의 집에 잔치가 있으며 감찰장의에 거친 포로 …만든 쪽빛 치마를 입고 간 것을 보고…“20)(Kim, 1646-1732b)
라는 기록들에서 조선 중후기 여자 장의는 청색, 남색, 붉은색, 자주색, 다갈색과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상의 옷으로 착용되었을 뿐 아니라 색동과 그림 등으로 장식되는 등, 그 의장이 다채로웠음을 보여준다. 이해영ㆍ남선화는 영조, 정조, 순조실록에 기록된 왕의 습의 가운데 장의 색상이 보라, 두록, 옥색, 초록, 자적, 유록, 분홍, 침향, 남, 연남, 흑색 등이며 이 중 보라, 초록이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고 밝히고 있다(Lee & Nam, 2005). 또 이러한 왕의 염습 기록에서 장의는 곤룡포ㆍ답호ㆍ장의의 순으로 또 면복ㆍ중치막(도포, 배자) 다음으로, 예복(上服) 속에 입는 받침옷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여기서 여자장의의 색상은 자주색, 다갈색의 간색(間色)이외에 청, 홍, 백, 흑의 정색(正色)도 확인되는 반면 왕의 장의임에도 불구하고 색상은 대부분 간색임을 볼 때, 일반 여인의 장의는 겉옷으로도 착용되었으나 왕의 경우는 철저히 받침옷으로만 착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상과 같이 착용과 구성을 통해 볼 때 출토남자 장의는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급격히 감소하나 기록에서는 지속적으로 볼 수 있어 그 착용은 후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다만 남자 장의의 출토가 감소한 것은 착용에 있어서 지방의 사대부 혹은 군인과 모리배 등 중인과 남자어린이의 옷으로 착용자가 확대되는 변화를 볼 수 있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출토 여자 장의는 구성유형이 두겹 혹은 두겹 누비 중심으로 또 재질이 단, 사, 초 주 등의 고급재질로 제작되는 변화를 보인다. 이는 기록에서 여자 장의가 혼례복, 제복, 등 일상의 예복으로 착용역할이 상향되고 확대된 것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보인다. 또 출토 장의를 통해 볼 때, 18세기 전후 장의부터 품나비가 좁아지고 섶나비와 사다리꼴무 윗나비가 확대되는 변화를 <Table 3>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Fig. 1>과 같이 앞자락이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장의의 쓰개로의 착용변화는 18세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Ⅳ. 장의와 복요 및 국속화 논의
조선시대 장의와 ‘복요’와 관련된 기록은 3번 확인된다. 첫번째 기록은 세조때 양성지(1415-1482)의 것이며 두번째 기록은 18세기 송문흠(1710-1752)의 것이고 세번째는 19세기 이유원(1814-1888)의 것이다. 송문흠과 이유원은 양성지의 상소 내용을 그대로 답습(踏襲)하여 장의 착용이 ‘복요’임을 지적하고 있다. 양성지는 1456년 세조에게 올린 상소와 본인의 문집 눌재집에 여자 장의에 대하여
“…여자들의 장의 착용은 복요…”라 기록하고 여기서 “…의상 제도는 남녀와 귀천을 분별하려는 소이이니, 하민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합니다…” “… 기한을 정하여 금지하게 하고, 그래도 여전히 입는 자는 그 옷을 거두어 동서 활인원에 나누어 두었다가 가난하고 병든 자의 옷으로 쓰소서…” “…장의를 의상 사이에 입어 3층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 따서 온 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에 이른바 ‘복요’입니다…” “… 여자는 상의와 하상을 입는 것이 가장 고법에 가깝게 되는데, 만약 이와 같이 마음대로 한다면 남녀의 의복은 스스로 제도를 같이하여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지금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21)(Yang, 1415-1482)
라는 기록에서 양성지는 의복의 사회적 역할이 계층을 유별하기 위함이라 하여 여자들의 장의착용을 금하는 이유가 남녀유별에 있음을 밝히고 그 착용 금지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여자들의 장의 착용을 적극적으로 제지하고자 한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의도와는 달리 앞의 <Table 2>에 의하면 시기를 내려오면서 여자 장의의 출토빈도와 출토량이 증가하고 있어 여자 장의는 ‘복요’라는 사회적 거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예복으로 그 착용이 확대된 반면 남자 장의는 착용자가 중인으로 확대되어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양성지는 상소에서 장의의 3층 착장 즉 상의와 하상 사이에 장의를 착장한 모습을 복요라 하였다. 현재 이러한 복요 착장상태의 장의는 17세기 장기정씨와 18세기 전주이씨묘 유물에서 출현하고 있어, 조선전기뿐 아니라 조선후기에도 착용된 것으로 보인다. 양성지는 이러한 착장상태를 복요라 한 근거로 상하의 착장비율을 지적하였다. 이는 상의와 하의를 음양 원리 측면에서 해석하면 의천상지(衣天裳地) 즉 상의는 양(陽)이며 하의는 음(陰)으로, 양인 남자의 착장은 상의가 확장된 상장하단(上長下短)이어야 하며 음인 여자의 착장은 하상이 확장된 상단하장(上短下長)의 착장이어야 할 것이다. 장의의 3층 착장은 상의가 길어지게 하여 상장하단의 남성의 착장 모습을 이루기 때문에 복요라 한 것으로 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장의의 3층 착장은 장의의 의복 역할이 중의(中衣)인 사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당저고리와 당의는 모두 옆트임이 있는 옷으로 배자류 옷에 속하는 예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받침옷이었던 장의는 트임이 있는 옷의 받침옷(褻衣, 中衣)으로서 그 안에 착용하게 되었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실제 앞에서 살펴 본 17세기 중반이전 출토 남녀장의 모두 받침옷(중의)의 구성인 점과 숙종실록에 “…장의(長衣) 또는 설복(褻服)에 가까우니 지극히 미안합니다. …”(Sookjong Sillok, 1593)… 한 기록은 조선전기 여자 장의가 예복(上服)의 받침옷이었던 점을 뒷받침한다.
송익필(1534-1566)은 구봉집에 예기의 세주를 인용하여 중국 장의 구성에 대하여
“…예기 주에 이르기를 “조복 제복 상복은 모두 상의와 하의가 떨어졌는데, 오직 심의만은 떨어지지 않으니, 곧 몸을 가리는 것이다.…” 또 “…조복이나 제복 안에 입으면 ‘중의’라고 하며 상복에도 중의를 착용한다.…” “…○ 채색된 천으로 가선을 달면 ‘심의’라고 부르고, 흰색의 천으로 가선을 달면 ‘장의’라고 부르고…” 중국 심의의 상의 구성을 김장생의 상례비요를 인용하여 “…그 재단은 6폭의 직물을 폭마다 2폭으로 나누며 한 폭은 넓고 다른 한 폭은 좁게 하여 좁은 폭의 나비는 넓은 폭의 반이 되도록 한다…”22)(Song, 1534-1599b)
…고 하여 여기서 송익필은 중국 장의는 심의의 일종이며 다만 흰색 가선 구성이 심의와 구별된다고 하여 중국 장의의 구성상 특징이 흰색 가선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 장의의 거들지 역시 흰색임을 볼 때 중국 장의구성과 관련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송익필은 김장생의 상례비요에서 예기의 주를 재인용하여 심의의 상의 구성이 한 폭을 3등분 하여 넓은 폭 나비가 좁은 폭의 2배가 되도록 재단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심의의 치마는 식서부분은 직선이며 절개된 부분은 사선으로 사다리꼴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국 심의의 상은 우리나라 장의의 사다리꼴무와 그 형태와 재단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다만 상(裳)과 무(襠)라는 구성요소의 성격에 따라 크기 차이를 보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 장의와 중국의 장의는 트임이 없는 구성의 옷이라는 공통점 이외에 흰색 가선과 흰색 거들지 그리고 심의 상의 한 폭과 사다리꼴무의 유사성은 ‘우리나라 장의 구성이 중국 장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조선후기 송문흠은 한정당집에서 장유와 장의의 관련성에 대하여
“…신라의 전하는 말에 ‘부인은 장유를 입는다…”고 했으며, 수십 년 전에 듣기로 모두 장의를 입는다고 했는데 이들은 모두 옛 풍속이다…”라 하고 또 “…삼자는 개과 즉 사타구니를 트지 않았으니 곧 지금의 장의이다…23) (Song, 1710-1752)
라 하여 장의의 구성상 특징은 트임이 없는 것이며 삼국시대 장유로부터 유래된 것이라 하여 우리의 고유옷임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장의의 직선형태의 목판깃과 삼국시대 장유의 선의 직선형태의 유사성과 장의와 목판깃저고리(3형)의 형태 유사성은(Chang, 1995) 상대시대 장유와 단유의 관계와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어, 송문흠의 의견에 무게를 실어준다.
18세기 송문흠(1710-1752)은 장의 자체의 착용보다는 착장에 더 비중을 두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어, 이 시기에 있어서 장의의 착장이 문제시 되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또 19세기 이유원은 그의 문집 임하필기에24)(Lee, 1814-1888)는 세조에게 올린 양성지의 상소문 내용을 다시 기록하고 있다. 송문흠과 이유원의 기록을 볼 때, 18세기 이후는 여자장의가 예복으로 착용된 시기이며 착장에서의 복요와 남녀유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결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8세기 장의구성이 쓰개구성으로 점차 변화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Ⅴ. 결언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문헌기록과 출토실물을 통하여 장의의 착용과 구성의 시기별 변화를 확인했으며 그 유래와 국속화 과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장의는 트임이 없는 상하연의(上下連衣)형 의복으로 상하가 분리된 예복(祭服, 朝服, 喪服)의 받침옷(中衣)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중국 장의와 유사하여 그 명칭과 역할이 그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장의의 목판깃과 직선소매는 삼국시대 장유로부터, 사다리꼴무와 흰색 거들지는 중국 장의의 구성과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유사성은 장의가 중국으로 유래했다고 본 송익필과 삼국시대 장유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설명한 송문흠의 주장 모두와도 일맥상통한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장의는 장유와 심의의 구성이 절충된 옷으로 고유 구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중국 장의와 명칭은 동일하지만 형태구성이 다른 옷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출토 장의를 토대로 보았을 때, 장의의 형태적 구성이 완성된 시기는 적어도 조선전기 이전인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기록과 출토실물을 통해 드러나는 장의의 변화는 시기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구별 할 수 있었다. 17세기 중반 이전까지 장의는 남녀 동복(同服)으로 착용되었으며 구성은 솜·누비·두겹·홑겹 구성과 주와 면의 보통 재질로 구성된 받침옷(중의)이었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18․19세기 이전까지 남자 장의는 성인 남자의 일상복에서 중인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착용자가 하향 확대되었고 솜과 누비구성으로 받침옷(褻衣)으로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여자 장의는 혼례복(婚禮服)을 비롯해 제복, 상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복으로 활용되었고 단과 사 등의 고급재질에 2겹 구성으로 전형적인 예복구성이었다. 착용 계층과 구성 면에서 상향된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남녀 장의의 상반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18·19세기 이후 여자장의는 포에서 쓰개로 변화되어 포의 역할이 명확한 남자 장의와 착장방식과 구성에서 뚜렷한 차이를 나타냈다.
장의와 관련된 ‘복요’의 기록은 3번 확인된다. 조선 전기 양성지와 조선 중기 송문흠, 조선 후기 이유원의 문헌기록으로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었음을 직ㆍ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러한 기록은 장의의 시기별 변화와 유사하여 ‘복요’를 비롯한 사회적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 전기 여자의 장의 착용을 금지하고자 한 양성지의 주장은 남녀 이복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중기 이후 후기까지 남자 장의의 착용이 격하되고 여자 장의가 격상된 것 역시 남녀유별의 문제와 연결된 문제로 볼 수 있다. 결국 후기 이후 여자장의가 포에서 쓰개로 그 착용방식과 구성을 달리함으로써 비로소 남녀 장의의 이복화(異服化)가 완성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장의는 예복의 중의로 착용한 중국과 달리 착용범위가 확대되었으나, 남녀동복(男女冬服) 착용이 문제시되어 ‘복요’라는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착용과 구성에서 드러난 장의의 시기적 변화는 남녀이복(男女異服)의 우리나라 복제의 틀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의생활 영역까지 확장된 유교 이념 실천의 한 유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인천대학교 2016년도 교내연구비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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