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정자관(程子冠)의 용도와 형태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applications and appearance of Jeongja- gwan worn in the 16th to 19th centuries through a review of the literature and paintings of the time. The study found Jeongja-gwan was named after a hat worn by Jeongjay, a Confucian scholar in northern Sung. During the 16th to 19th centuries, Jeongja-gwan was used as an official hat(gwanmo) usually worn by men of the noble class when going out. The hat was more often worn by Southern School Confucian scholars who respected and worshipped Lee Hwang. It was also worn during official or funeral rites and by Gyujanggak government officials. In Joseon, Jeongja-gwan was manufactured to imitate an official hat worn by Jeongja, which is illustrated in the Portraits of Kings and Subjects, Samjae Dohoe, Yijeong Jeonseo, and Seonghyeondo. The illustrated hat, consisting of an inner and outer hat, is linear-shaped. Thus, the linear shape was applied to Jeongja-gwan manufactured in the late Joseon period. It is reasonable that official hats portrayed in the portraits of Park Se-chae, Yoon Bong-gu, Lee Chae, and Hong Jik-pil are considered Jeongja-gwan because they were recognized as such when the paintings were made. The Jeongja-gwan in each of the four portraits are also linear-shaped. This study also found that Jeongja-gwan of the late Joseon period and that of the last Joseon period differed from each other in outer appearance: the former was linear in shape and the latter curved in.
Keywords:
Gwanmo, Jeongja-gwan, Jeongja portrait, late Joseon, Portrait키워드:
관모, 정자관, 정자도상, 조선후기, 초상화Ⅰ. 서론
정자관(程子冠)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편복 관모이다. 정자(程子)는 북송(北宋)의 유학자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키는데, 정자관은 정자가 쓴 관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Kang et al.(2015),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Ed.) (1995)에 따르면, 정자관은 조선말기 초상화나 전세유물을 토대로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된 이중관이고, 관의 윗부분은 산봉우리 모양으로 기복(起伏)이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조선의 정자관은 문헌기록상 16세기경에도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16세기 이후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조선후기의 정자관의 형태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관련하여 18세기의 정자관은 조선말기의 정자관과는 다른 형태였다고 본 선행연구가 있다. Park(2010)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정자관의 형태가 조선 말기의 곡선적인 형태와 달리 직선적인 형태로, 동파관(東坡冠)과 유사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하였고(p. 158), Lee(2017)는 “18세기 무렵 조선의 정자관과 동파관은 대동소이(大同小異)ㆍ사동초이(似同稍異)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p. 32)고 하여 18세기의 정자관이 조선말기의 정자관과 형태가 달랐을 것으로 보았다.
본 연구는 문헌 및 회화 자료를 통하여 조선후기 정자관의 용도와 형태를 고찰한 것이다. 편의상 16세기에서 19세기 전반까지를 조선후기, 19세기 후반 이후를 조선말기로 시기를 구분하였다. 연구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헌기록을 통하여 조선후기 정자관의 용도ㆍ제작방법ㆍ형태 등에 관하여 살펴본다. 둘째, 조선에서 정자도상을 모방하여 정자관을 제작하였다는 문헌기록에 착안하여 정자관 제작에 사용된 정자도상(程子圖像)을 검토ㆍ정리한 다음 조선후기 정자관의 형태를 추정한다. 셋째, 조선후기의 초상화ㆍ문집 삽화ㆍ통신사 관련 일본 자료 등에 묘사된 정자관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정자관 형태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 조선후기에 착용된 정자관의 형태를 제시한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의 정자관이 조선말기의 정자관과 달리 직선적인 외형이었음을 규명함으로써 조선후기 정자관의 고증과 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Ⅱ. 조선후기 문헌기록을 통해 본 정자관
1. 정자관의 용도
정자관은 조선후기(16세기~19세기 전반)의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윤경(李潤慶, 1498-1562)은 ‘구염계건(求濂溪巾)’이라는 시에서 “동파관ㆍ정자관ㆍ주자관은 시장에서 만들어 파는 이가 많고, 거리에도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고,1)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적거사미(謫居四味)’라는 시에서 “나는 정자관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다.2)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임시로 정자관을 썼다”고 하였고3),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은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서 “근년에는 경사(卿士)들이 평상시에 모두 입자(笠子)를 대신하여 관(冠) 쓰기를 좋아한다. 그 관의 제도는 정자, 주자(朱子), 염계(濂溪), 동파, 충정(冲正), 방건(方巾)으로서 그 유가 자못 많다”4)고 하였으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학봉집(鶴峯集)』에서 “연거복(燕居服)은 충정관ㆍ정자관ㆍ동파관ㆍ종립(鬃笠)ㆍ사립(絲笠)ㆍ죽립(竹笠)을 쓰고, 심의(深衣)ㆍ도포(道袍)ㆍ직령(直領)ㆍ철릭[貼裏]ㆍ방의(方衣)를 입는다”5)고 하였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담헌서(湛軒書)』에서 “집에서는 방건 혹은 복건[幅巾]을 쓰고 그 밖에 윤건(綸巾)과 정ㆍ주(程朱)의 유제가 모두 있다”6)고 하였고,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사부(士夫)는 평거시 복건, 방관, 정자관, 동파관을 많이 쓴다”7)고 하였으며, 서유문(徐有聞, 1762-1822)은 한글연행록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 “사부가 평상시 때에는 총관(驄冠)을 쓰니, 윤건ㆍ복건ㆍ정자관ㆍ동파관 등 여러 명색이 있어 쓰고자 하는 대로 쓴다”8)고 하였다.
이상의 문헌기록에 의하면, 정자관은 16~19세기에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쓰던 관모 중의 하나로, 동파관ㆍ복건ㆍ방관 등과 함께 널리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6세기에는 서울의 선비들이 립자 대신 관(冠) 쓰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정자관을 비롯하여 동파관ㆍ주자관 등을 시장에서 만들어 파는 사람도 많고, 거리에 쓰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에 사대부들은 평상시에 심의ㆍ도포ㆍ직령ㆍ철릭ㆍ방의 등을 입을 때 정자관ㆍ동파관ㆍ충정관ㆍ방관 등을 주로 썼다. 심의를 입을 때는 복건을 쓰는 것이 옷차림 공식처럼 이해되고 있으나 16세기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16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李滉, 1501-1570)은 복건이 마치 승건과 비슷하여 해괴할 뿐만 아니라 그 제도도 상세하지 못하므로 쓰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심의를 입을 때 복건 대신 정자관을 써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심의를 입을 때 정자관을 써야한다는 이황의 견해는 다음 문헌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복건은 주자대전 본전에 따라 만든다…제도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 제도가 해괴하여 이상하니 쓸 수 없다. 일찍이 정자관으로 대신한다고 하는데, 다만, 정관이 제도에 부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9)
복건은 마땅히 쓰지 말아야 한다. 비단 해괴할 뿐 아니라 그 제도도 상세하지 않으니 정자관류로 대신해도 무방하다.10)
김취려가 복건과 심의를 만들어 보내왔다. 선생이 이르기를, “복건은 마치 승건과 같아서【제도가 틀렸다는 말이다】쓰기에 마땅하지 않다”하고, 심의를 입고 정자관을 썼다. 말년에 재실에 있을 때는 이렇게 입다가 손님이 오면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김성일】경오년 9월에 선생이 도산에서 계당으로 돌아가려 할 때, 정자관을 쓰고 심의【서울에서 처음 지어 왔다】를 입고서 친히 사립문을 열고 이덕홍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은 옛사람의 의관을 시험하고자한다”하였다【이덕홍】.11)
17~18세기의 인물인 정보연(鄭普衍, 1636-1660)ㆍ심조(沈潮, 1694-1756) 등도 이황의 뜻에 따라 정자관을 착용하였는데, 다음 문헌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군 보연이 나이 24세로서 숭정 경자년12) 6월 24일에 나를 버리고 죽었다 … 때마침 유생들이 많이 모인 회합을 만났는 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런 복장으로 사당에 전알하다니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오”라고 하자, 군이 곧장 대답하기를 “퇴계 선생께서 옷은 심의를 입으셨고 복건은 모양이 승관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 대신 정자관을 착용하셨소. 지금 내가 이 복장으로 선생을 배알하면 안 될 것이 뭐 있겠소”라고 하니, 말한 자가 부끄러워 대꾸를 못하였다.13)
정자관을 새로 지었다. 기뻐서 부를 짓는다. 정자관이 가장 보기에 좋다. 더울 때는 포를 쓰고 추울 때는 비단을 써야 한다…14)
그런데 17세기 초 정구(鄭逑, 1543-1620)의 편지를 보면, 당시 성균관ㆍ향교ㆍ도내 각 서원의 유생들은 예를 행할 때 모두 두건을 착용하였는데 천곡서원(川谷書院)에서만 유독 정자관을 착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복건 대신 정자관을 착용하는 것은 주로 남인계열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된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남인 계열의 서원에서는 이황의 뜻에 따라 복건 대신 정자관을 쓰는 것이 정형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천곡서원에서 석전제를 행할 때 서원의 규약에 따라 제생(諸生)이 정자관을 썼고,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에서도 기알(祇謁)할 때 서원의 옛 규례에 따라 정자관을 썼다고 한다. 퇴계를 존모하였던 남인(南人)들은 복건 대신 정자관을 착용함으로써 옷차림면에서 서인(西人)들과 구별되고자 하는 심리를 표현하였고, 이러한 옷차림은 남인들 사이에서 이황을 존모하는 학문적 절개를 상징하는 시각적 기호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문헌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성균관과 향교에서는 다 두건을 쓰고 도내의 각 서원에서도 모두 두건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 서원에서만 유독 정자관으로 예를 행합니다. 근래에 우리 서원을 찾아온 서울 관원 중에 어떤 자는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는가 하면 어떤 자는 비웃으며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니 지금 도내 각 서원의 관례에 따라 유생은 두건을 쓰고 잔을 올리는 자는 립자를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15)
[문] 복건은 예건인데 남인들은 쓰지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생왈] 노선생이 그것이 승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쓰기를 꺼려하셔서 심의를 입고 정자관을 썼다. 노선생을 따라서 정자관을 쓰는 것이 가하다.16)
봄에 천곡서원의 이름을 퇴계 선생에게 여쭈어 정하였다 … 서원 규약을 정했으며 봄가을로 석전제를 행할 때는 제생이 정자관을 쓰고 일을 보았다.17)
함께 온 네 벗과 정자관을 쓰고 홍단령을 입었다. 조정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기알하였다. 대개 서원의 옛 규례에 정관을 쓴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18)
그러나 정자관은 18세기 중엽까지는 널리 쓰인 것 같지 않다. 1758년 4월 영조는 신하들에게 정자관의 모양을 아는지 물었는데 모두가 상세히 답하지 못하고 각이 져 둥글지 않고 관 위에 덮개가 있다는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19) 같은 해 8월에는 영조와 신하들이 정자관과 동파관은 서로 대동소이한데 정자관이 동파관보다 더 낫다는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사가 있다.20) 이후 1785년 9월에 정조는 규장각 각신(閣臣)이 입시할 때 관을 쓰도록 하교하고, 상의원에 명하여 정자관을 만들어 각신들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21)
한편, 정자관은 관례(冠禮)의 초가관(初加冠), 상례(喪禮)의 습의(襲衣)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황은 관례에 건이 없으면 정자관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하였고22), 김장생(金長生, 1548-1631)도 관례(冠禮)의 초가관(初加冠)으로 복건이 없으면 정자관을 쓴다고 하였다.23) 성혼(成渾, 1535-1598)은 자신의 사후의 일을 사위 윤황(尹煌)과 아들에게 편지로 남겼는데, 염습에 쓰는 관으로 삼베에 먹물을 들여 만든 정자관을 쓰도록 하였다.24)
이상으로 정자관은 조선후기(16~19세기 전반)에 사대부들이 연거시에는 물론 외출시에도 착용한 관모였음을 알 수 있다. 정자관은 이황을 존모하였던 남인계열의 유생들이 많이 착용하였고, 정조 때에는 규장각 각신의 관모로도 사용되었으며, 그 외에 관례의 초가관, 상례의 습의로도 사용되었다.
2. 정자도상을 모방한 정자관 제작 기록
조선후기 정자관의 형태를 살펴보기 위하여 조선에서 착용된 정자관이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헌기록 중에는 도상(圖像)을 모방하여 정자관을 제작하였다는 내용이 다수 보인다.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군신도상(君臣圖像)에 의거하여 정자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 선생님께서 군신도상에 의거해 백숙의 정자관을 만드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시며 “어떤 것이 더 나으냐?” 하시기에 “두 가지 다 좋습니다” 하였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아버님께서 평소 잘 만든 관을 가지고 싶어 하셨는데 끝내 그러질 못하셨으니, 내가 이 관을 묘소 앞에다 묻어드려야겠다” 하셨다. 이에 더더욱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분 섬기기를 살아계신 분과 같이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25)
만년에 양 정관제도를 얻었다. 장인을 불러 만드는 법을 알려 주어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선명하다. 절기마다 바꾸어 쓰시고 관 속에 넣어달라고 유언하셨다”26)
이만부(李萬敷, 1664-1732)도 정자관과 동파관은 그림을 참고하여 제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옛 관건제도는 지금 대부분 전해지지 않습니다. 정자관, 동파관과 같은 것은 그림을 참고하여 만들 수 있지만, 회암관이나 기타의 관은 고찰할 문헌이 없어서 그림을 모방하여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곳에서 서로 헤아려 만들고 있다고 들었으나, 지역이 멀어 여쭙지 못하니 한스럽습니다. 다행히 아랫사람에게 명하여 종이로 주관과 첩산건의 모양을 만들어 보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에 이를 모방하여 만들 수 있었습니다.27)
이만부는 송(宋)의 주돈이ㆍ정호ㆍ정이ㆍ장재ㆍ주희 등을 한 폭에 그린 오현도(五賢圖)를 보고 쓴 글에서 “나는 어렸을 때 군신도상을 구하여 본 뒤 열 분의 성현 진영을 모사하고 바라보며 공경하였다28)”고 하였으니, 이만부가 참고한 그림은 군신도상이나 오현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Lee(2017)는 1748년 통신사 사행록과 필담창화집에 기록된 정자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748년 사행시 자제군관 홍경해는 강호의 처소에서 일본 문사 조집(趙緝)과 필담을 나눌 때 정자관을 썼다. 홍경해는 ‘두 정부자(程夫子)가 쓰신 관입니다. 남아 있는 초상화를 고찰하여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하였다. 강호 본원사(本願寺)에서 일본 의관 아여실부(野呂實夫)와 필담을 나눌 때 김계승(金啓升)이 정자건(程子巾)을 썼다. 통신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은 야여실부에게 ‘저 건은 정자가 일찍이 썼던 것으로 세상 사람들은 정자건이라 일컫는데 『삼재도회』에 남겨진 모양도 있다’고 말하였다(p. 15).
유희문(柳徽文, 1773-1827)도 정자관은 도상(圖像)으로 미루어 그 모양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 모방하고 있다고 하였다.
정자 화상의 관은 비록 제도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도상으로 미루어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즈음 많이 모방하고 있다.29)
이상으로 조선후기에는 군신도상, 성현도, 삼재도회 등에 그려진 정자가 쓰고 있는 관모를 모방하여 정자관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정자관 형태에 대한 논의
조선에서 통용되던 정자관이 『삼재도회』에 동파건(東坡巾)으로 기록된 관모와 그 형태가 유사하였기 때문에 서로 비교되었는데,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동파건. 네 개의 담이 있다. 담 밖에 또 담이 겹쳐있는데, 내담에 비해 조금 작다. 전후좌우를 없애고 각각이 각으로 서로 마주본다. 쓸 때는 각의 경계를 양미간에 둔다. 이것은 소동파가 썼다고 하여 이름을 붙였는데, 일찍이 화상에서 볼 수 있고 지금까지 그대로 쓴다. 【살피건대, 우리나라에서는 이 관을 정자관이라고 부르고, 하나의 양식을 새롭게 만들었는데 바깥과 안의 담이 그 끝은 가지런하지 않으나 그 위는 가지런하다. 네 개의 짧은 담을 안쪽 네 개의 담 윗머리에 이었는데 서로 연결되지 않고 각자 늘어진다. 구부리고 우러르는 행동을 하면 네 개의 짧은 담은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춤을 추듯 움직인다. 이것을 일컬어 동파관이라 한다…】30)
조선에서 통용되던 정자관에 대해서는 그 형태가 『이정전서』ㆍ『명신록』 등의 문헌에 기록된 정자의 관모와 상이하였기 때문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는데, 권택모(權宅模, 1774-1829)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천은 고모를 썼는데 통이 8촌이고, 첨이 반촌 적었다【혹은 첨이 반촌이라고 한다】이천이 쓴 사건은 뒤에서 보면 종 모양과 같아서 지금의 도사가 쓰는 소위 선도건과 같았다고 하니, 그 제도는 지금의 소위 정자관과 같지 않다. 지금의 정관 또한 근거가 없는데, 사계가 이를 시가관으로 삼았으니 그 제도는 어떠한 것인가, 선도건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31)
그러나 유희문(柳徽文, 1773-1827)은 조선에서 정자도상을 모방하여 정자관을 만들고 있는데, 전해지는 이름은 정자관이지만 이는 송나라 때의 야복건(野服巾)으로서 정자가 평상시에 쓴 관은 아니지만, 이를 정자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정자 화상의 관은 비록 제도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도상으로 미루어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즈음 많이 모방하고 있다. 그러나 전해지는 이름은 정자관이지만, 지금 이것을 고찰하면, 송나라 때의 야복의 건이지, 정자의 상복은 아니다 … 송나라 이래로 이를 가리켜 정자관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이르러 이를 가리켜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 만약 화상을 근거로 이름을 지어도 상관이 없다면 소자관ㆍ장자관이라고 불러도 역시 될 것이다. 『삼재도회』에는 소위 동파관이 있는데, 이 건과 더불어 정확히 같다. 그 형상은 없지만 일찍이 소공이 한거시에 그것을 즐겨 썼다고 하여 뒤에 소공을 숭모하는 이들이 이것을 가리켜 동파관이라고 한 것이다. 이전 사람들이 억지로 동파관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처럼 지금 사람들은 이를 억지로 정자관이라고 부르더라도 혹 불가할 것은 없다.32)
한편, 허전(許傳, 1797-1886)은 정자의 관모는 구경산(丘瓊山)이 말한 소모(小帽)로서 조선의 정자관은 정자도상을 잘못 이해하여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Fig. 1>의 <정자고모도(程子高帽圖)>33)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혹 정자관을 쓰는 자도 있는데, 그 제도를 완전히 잃어 버려 모를 중첩시키고 첨이 없는데, 이는 그림을 잘못 이해하여 첨을 모 바깥에 더한 모로 이해한 것이다. 이정전서에는 모는 통이 8촌이고 첨이 7분이며 4직이라고 하였고, 명신록에는 이천이 견포를 입고 고모를 쓰는데 첨이 반촌이라 하였다. 이는 구경산이 말한 이른바 소모이다.34)
이상으로 정자도상을 모방하여 만든 조선의 정자관에 대해서는 그 형태와 명칭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조선후기에 널리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Ⅲ장에서는 조선후기 정자관 제작의 본(本)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정자도상을 검토하여 조선후기 정자관의 형태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Ⅲ. 조선후기 정자관 제작에 사용된 정자도상
1. 군신도상의 정자도상
중국의 군신도상은 다양한 판본이 있다. Moon(2013)에 따르면, 원대(元代) 판본으로는 1327년 왕종선(汪從善)의 서문이 적힌 나우(懶牛)의 『역대군신도상(歷代君臣圖像)』<Fig. 2>, 지원(至元) 연간에 옥림사(玉林師)가 편집하였다는 『고금인물도상(古今人物圖像)』, 1438년에 왕필(王弼)이 번각한 『역대군신도상(歷代君臣圖像)』등이 있고, 명대 판본으로는 1438년 장홍(張洪)의 제문이 달린 고종철(高宗哲)의 『성현상(聖賢像)』, 1486년 주진륭(周進隆)이 번각한 『속간성현도(續刊聖賢圖)』, 1498년 주천연(朱天然)이 중각(重刻)한 『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贊)』, 1584년 익왕명편(益王命編) 『고선군신도감(古先君臣圖鑑)』 등이 있다(pp. 383-384).
조선에서는 1525년(중종 20) 왕명에 따라 『역대군신도상(歷代君臣圖像)』<Fig. 3>을 판각할 당시 참조한 문헌으로 나우의 『역대군신도상』, 고종철의 『성현상』, 주진륭의 『속간성현도』가 있었다. <Fig. 4>는 경북 경주시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의 『역대군신도상(歷代君臣圖像)』이고, <Fig. 5>는 상주 진주정씨 우복종택 소장의 『고선군신도상(古先君臣圖像)』이다. 앞에서 정시한은 군신도상(君臣圖像)에 의거하여 백숙정자관(伯叔程子冠)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정시한이 모방한 군신도상은 위군신도상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한편, 1748년 통신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저 건은 정자가 일찍이 썼던 것으로 세상 사람들은 정자건이라 부르는데 삼재도회에 남겨진 모양도 있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삼재도회(三才圖會)』도 정자관 제작을 위한 본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ee(2017)에 따르면, 『삼재도회』에는 정자관이나 정자건 도상은 없으므로 ‘삼재도회에 남겨진 모양’이란 『삼재도회』인물 7권에 있는 정호와 정이 도상<Fig. 6>의 관모를 가리키는 것이다(p. 31).
2. 이정전서의 정자도상
『이정전서(二程全書)』에도 정자도상이 수록되어 있다. Choi(2015)에 따르면, 훈감자본에는 <명도순공상(明道純公像)>, <이천정공상(伊川正公像)> <Fig. 7>이 수록되어 있고, 조선후기 목판본(서필달본) 『이정전서』에도 <명도선생>, <이천선생> <Fig. 8>이라는 이름으로 정자도상이 수록되어 있다(p. 262). 따라서 『이정전서』에 수록된 정호와 정이의 도상 역시 정자관 제작을 위한 본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성현도의 정자도상
각종 성현도<Fig. 9>에 그려진 정자의 관모 역시 정자관 제작을 위한 본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Fig. 9>는 이자화(?-1520)가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만부의 『식산집』에 따르면, 송나라의 오현(五賢)의 모습을 한 폭에 모사해 놓은 오현도가 있는데, 명나라 때 중국에 전해진 것을 노수신이 얻었다고 하였다.35) 노수신은 이자화의 외손자였으므로 이만부가 보았다는 오현도는 바로 <Fig. 9>일 것이다. 노수신은 정자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노수신이 만든 정자관은 위 오현도를 모방하여 만든 정자관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이만부 역시 위 오현도를 모방하여 정자관을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상으로 조선에 전래된 각종 정자도상을 정리해 보았다. 조선에서는 이들 정자도상을 모방하여 정자관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각 정자도상에 묘사되어 있는 관모는 높은 내관과 낮은 외관을 가진 이중관의 형태로서 직선적인 외관을 띠고 있다. 정자도상 중에는 조선말기의 초상화나 정자관 유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내관과 외관의 윗부분이 산봉우리나 구름 모양으로 기복이 있는 형태의 관모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정자도상을 모방하여 제작한 조선후기의 정자관은 조선말기의 정자관과는 다른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Ⅳ. 조선후기 회화자료를 통해 본 정자관
1. 초상화에 묘사된 정자관
조선후기 야복본 초상화의 관모는 주로 복건을 착용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나 복건 이외의 다른 관모를 착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Fig. 10-①~④>의 초상화이다. <Fig. 10-①~④>의 관모들은 동파관ㆍ정자관ㆍ사방관ㆍ충정관ㆍ절첩관 등 다양하게 설명되어 왔는데, 위각 관모를 조선시대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Fig. 10-①>은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초상이다. 박세채의 외손자 신경(申暻, 1696-1766)은 ‘외조고현석박선생유사(外祖考玄石朴先生遺事)’라는 글에서 박세채의 화상(畵像)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생의 화상은 여러 개의 본이 있다. 하나는 가묘에 봉안되어 있고 하나는 나주 반남 여천 이선생 서원에 있는데, 선생도 입향되었기 때문에 봉안된 것이다. 선생의 서원도 여러 곳에 있어서 이모되어 여러 개의 본이 또한 각처에 봉안되었다. 가묘봉안본은 정관도포로 그렸고, 나주봉안본은 공복으로 그렸다. 공복은 본색이 아니므로 만약 이모하는 일이 있으면 가묘본을 따라야 할 것이다.36)
박세채의 초상화는 사모단령 차림의 초상화와 <Fig. 10-①>과 같은 야복본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Fig. 10-①>이 신경이 말한 가묘봉안본 초상화로 생각된다. 따라서 위 초상화 속의 관모가 18세기 초 정자관의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Fig. 10-②>는 윤봉구(尹鳳九, 1681-1767)의 초상이다. 윤봉구는 사우(士友)들과 함께 개최한 향사례 때 정자관을 쓰고 난삼을 입고 참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우들이 와서 여럿이 모여 향사례에 관해 의논하였다. 나는 일찍이 해보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기뻐서 허락하였다. 조촐하게나마 의구를 갖추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우들을 초청하여 회합하였다. 나는 늙어 감당할 수 없어서 정관을 쓰고 난삼을 입고 곁에 앉아 구경을 하였다…37)
또한 윤봉구의 제자 최남두(崔南斗, 1720-1777)는 스승으로부터 정자관과 격몽요결을 받았다고 하고, 최남두의 편지 중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른 정자관의 제도를 알려 주는 내용도 있다.38) 이러한 기록들에 비추어 볼 때 <그림 10-②> 초상화 속의 관모는 18세기 중기 정자관의 형태로 볼 수 있다.
<Fig. 10-③>은 이채(李采, 1745-1820) 초상으로서 1802년에 그린 것이다. 초상화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이한진(李漢鎭, 1732-1815)이 전서로 쓴 이채의 자제문(自題文)이 있는데, 동일한 내용이 『화천집(華泉集)』에 ‘제진상(題眞像)’이라는 제목으로도 실려 있다. 그 자제문에서 이채는 초상화 속의 관모를 정자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Fig. 10-③>의 관모는 19세기 초 정자관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자관을 머리에 쓰고 주자가 말씀하신 심의를 입고 꼿꼿하면서 단정하게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짙은 눈썹에 하얀 수염, 귀는 높이 솟았고 눈빛은 빛난다. 그대가 참으로 계량 이채라는 사람인가39)
<Fig. 10-④>는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초상이다. 이 초상화의 관모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헌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홍직필이 평소 정자관을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선생님은 연거에 늘 정자관을 쓰셨다.40)
근세의 선비들은 이정의 책을 버려두고 주자의 책만을 읽는다. 이것은 자양의 도리가 말미암아 나온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현명한 사람이라면 능히 근원을 거슬러 좇아갈 수 있어야 힘쓸 바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41)
정자관제도는 여러 정서를 고찰하면 이천이 쓴 모는 통이 8촌이고, 첨이 7분이며 네 모서리가 있다고 되어 있고, 전서와 더불어 두 정자의 초상이 실려 있는데, 그 제도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일찍이 초상화를 모방하여 만들었지만 그 척도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오른 쪽에 본을 보내니 그 모양에 따라 만들어 쓰면 될 것이다. 정관은 포백을 사용한 것 같지만, 말총이나 대나무로 만들어도 모두 불가할 것이 없다.42)
즉 홍직필이 연거시에 늘 정자관을 썼고 이정(二程)의 글을 읽으라고 강조하였던 점, 사위에게 정자관의 본을 만들어 보내 주기도 하였던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그림 10-④>의 관모 역시 19세기 초 정자관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이상으로 <Fig. 10-①~④>의 야복본 초상화의 관모는 조선후기 당시 사람들이 정자관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관모를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다.
2. 문집에 묘사된 정자관
유치명(柳致明, 1777-1861)은 1833년에 지은 ‘정자관제(程子冠制)’라는 글에서 정자관에 관하여 서술하고, 스스로 제작한 정자관 도상과 상징성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정전서에 따르면, 이천이 쓴 모는 통이 8촌, 첨이 7분 【첨이 반촌 작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7촌 5분일 것이다】이고, 네 모서리가 직선이다. 명신록에 따르면, 이천선생은 늘 견포를 입고, 고모를 썼다. 첨이 반 촌 작고, 끈을 늘어뜨렸는데, 이를 가리켜 야인의 옷이라고 하였다. 송나라 때의 야복으로 선생은 시속을 따라 그렇게 한 것이고 그 제도는 상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문득 감히 그 대체를 따라 법상으로 삼아 나 자신의 관모로 쓰고자 한다. 통은 사폭으로서【사각형이고, 광협은 임의로 정한다】사시를 상징한다. 높이는 12촌으로서【신촌을 사용한다. 이하 같다】12월을 상징한다. 첨은 4폭이고【위는 가로를 좌우 각 2촌 5분 나오게 한다. 아래는 통과 같다】높이는 10촌으로서【통보다 2촌 작다】십간을 상징한다 … 퇴계의 문인이 있어 심의와 복건을 바쳤다. 선생은 심의를 입고 정자관을 썼다. 복건을 숭상하는 생각은 주자의 구례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관의 척도는 보이지 않는다. 이정전서와 명신록을 보아도 역시 정해진 제도가 없다. 그러므로 후일 이를 받아들여 사용하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었다. 세상에서는 심의 제도에 대해서는 열심히 토론하고 연구하지만, 관은 한쪽에 치우쳐 따라가기만 한다. 현관을 사용하고 싶지만 드물고 오래되었음이 염려된다. 삼가 퇴계 문하에서 받아들여 사용해 온 뜻을 모방하여 정관을 취하여 법상으로 삼고자 한다. 비록 심오한 고제는 아니지만, 그것은 정자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옛날의 뜻을 간직하고 있고, 심오하고 절실한 바가 있다. 이 옷을 입고 이 관을 쓴다면, 조금이라도 비슷할 터이니 마음에 흡족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우선 기록해 둔다.43)
또한 유치명은 <Fig. 11>과 같이 스스로 제작한 정자관 도상과 함께 제작방법과 치수를 밝혀 두었는데, 이를 통해 19세기 전기의 정자관의 형태를 추론할 수 있다.
통은 4폭으로 네 모서리를 모두 연철하고 연철 부위를 봉합하는데 그 부위가 전후좌우에 해당하니 좌우가 모두 전후 2폭이 된다. 첨은 각 2폭인데 위가 넓고 아래는 좁다. 그 경사진 부분을 연철하여 통의 좌우를 둘러싼 다음 그 아래쪽 가장자리 경사진 부분을 봉합하고 나머지는 곧게 둔다. 가운데로 양쪽이 모이도록 쓴다. 단, 그 부분은 연철하지 않는다.44)
Ⅴ. 결론
이상으로 문헌기록을 통하여 조선후기(16세기~19세기 전반) 정자관(程子冠)의 용도ㆍ제작방법ㆍ형태 등에 관하여 살펴보고, 정자관 제작에 사용된 정자도상을 검토한 다음 조선후기의 초상화ㆍ문집 삽화ㆍ통신사 관련 일본 자료에 묘사된 정자관의 형태를 정리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자(程子)는 북송(北宋)의 유학자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키는데, 정자관이라는 관모명은 정자가 쓴 관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정자관은 조선후기에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쓰던 관모로서 연거 시에는 물론 외출시에도 착용되었다. 정자관은 이황을 존모하였던 남인계열의 유생들이 많이 착용하였고, 정조 때에는 규장각 각신의 관모로도 사용되었다. 그 외에 관례의 초가관, 상례의 습의로도 사용되었다.
둘째, 조선후기에 착용된 정자관은 그 명칭은 정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형태는 정자도상에 묘사된 관모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서는 각종 군신도상, 『삼재도회』, 『이정전서』, 성현도 등에 남아 있는 정자도상을 보고 정자가 쓰고 있는 관모를 모방하여 정자관을 제작하였다. 정자도상에 묘사된 관모는 대체로 높은 내관과 낮은 외관으로 구성된 이중관 형태로서 그 외형이 직선적이다. 따라서 정자도상을 모방하여 제작된 정자관 역시 그 외형이 직선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17~19세기 전반에 제작된 박세채ㆍ윤봉구ㆍ이채ㆍ홍직필의 야복본 초상화에 묘사된 관모는 정자관으로 명명되기도 하고 동파관으로 명명되기도 하여 혼란이 있어 왔다. 그런데 이채 초상화의 자제문과 각 초상화 주인공들의 옷차림과 관련된 문헌기록을 통해 살펴본 결과 당시의 사람들은 위 4점의 초상화에 묘사된 관모를 정자관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 초상화 4점의 관모는 모두 이중관 형태로서 직선적인 외형을 보이는데, 이는 정자도상에 묘사된 정자관의 모습과 일치한다. 따라서 박세채ㆍ윤봉구ㆍ이채ㆍ홍직필의 야복본 초상화에 묘사된 관모를 정자관으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19세기 전반 정자관의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적 근거가 되는 유희문의 ‘정자관제’에 묘사된 정자관의 모습 역시 이중관 형태로서 직선적인 외형을 보이며, 1811년 통신사 관련 일본 자료에 묘사된 정자관의 모습도 동일한 형태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정자관은 직선적인 외형으로서 곡선적인 외형을 가진 조선말기의 정자관과 그 형태가 상이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정자관에 관한 연구로서, 형태면에서 정자관과 유사한 동파관과의 관계에 관한 고찰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한계가 있다. 본 연구 결과를 기초로 조선후기 정자관과 동파관의 상관성, 조선말기 곡선적인 외형과 삼층관 형태의 정자관이 출현하게 된 경위 등에 관해서는 추후에 연구하고자 한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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