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이후 풀솜 제작 및 주사 방적에 관한 연구
Abstract
Silk floss is a type of thread made from cocoons that cannot be spun into filament yarn, made by loosening the cocoon’s fiber in warm water. Floss yarn is thread made by spinning silk floss, and the fabric woven from floss yarn is called Tojoo or Myeonjoo. The traditional techniques of spinning silk floss and floss yarn is lost; thus, Tojoo is no longer woven today. Silk floss can be made by twisting the fiber by hand, but it was made using wooden frames, bamboo frames, and traditional roof tiles in the Joseon Dynasty. The fabric was degummed using lye and perfumed oil. After seaports were opened to Western civilization and imports, wooden frames became the tool of choice. Fabric degumming was performed through a mix of lye and sodium bicarbonate— or, more accurately, only sodium bicarbonate during this time. Once synthetic detergent entered the market, a mix of synthetic detergent and sodium bicarbonate was used for this purpose. Floss silk was made to produce floss yarn or used as material for vests, military coats, and as a substitute for cotton batting in blankets.
Keywords:
degumming, floss yarn, Joseon dynasty, silk floss, spun yarn키워드:
정련, 주사, 조선시대, 풀솜, 방적사Ⅰ. 머리말
풀솜[眞綿, 繭綿]은 쌍고치나 구멍이 뚫려있고 오염되어 있는 등 필라멘트사로 방적하기 어려운 파고치를 따뜻한 물에서 늘여 만드는 것으로 설면자(雪綿子), 명주솜, 고치솜, 진면(眞綿) 등으로 불린다. 풀솜은 의복이나 침구류 등의 충진재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토주(吐紬, 土紬) 혹은 면주(綿紬)를 직조하는 실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실은 주사(紬絲) 혹은 면사(綿絲)라고도 하는데 풀솜으로 자은 견방적사(絹紡績絲)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견방적사로 제직한 직물은 토주, 면주, 방사주(方紗紬) 등으로 불리었는데 본 연구에서는 ‘토주’로 명시하도록 한다. 토주는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사용되던 전통직물 가운데 하나였으나 현재는 전승이 단절되어 일부 문헌기록과 유물을 통해서만 토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토주는 명주에 비해 표면에 잔털이 많고 톡톡한데, 이것은 풀솜으로 만든 주사로 직조했기 때문이며 보온성이 좋고 내구성도 우수한 직물이다. 또한 토주는 고위층부터 서민층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의복뿐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현전하는 토주 유물은 대부분 조선시대 것으로 당시 주요 직물 중 하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면 일본에서는 토주를 츠무기(紬)라고 하며 오지야츠무기(小天谷紬), 오오시마츠무기(大道紬) 등 10여 곳에서 지역 특산 전통직물로 전승되고 있다. 이 가운데 유키츠무기(結城紬)는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중국은 토주의 직조기술은 단절되었으나 풀솜의 제작기술은 전승되고 있으며 풀솜을 넣은 침구류 등은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으며 수출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풀솜이 한두 곳에서 생산되기는 하나 고치의 정련에 여러 화학제품을 첨가하여 제작하고 있으며, 시판되는 풀솜은 주로 이불용으로 중국산이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주사용 풀솜을 생산하는 곳은 전무하다. 근간 전 세계적으로 문화유산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고 있으며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목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의 자긍심은 대단히 높다. 토주는 소재의 구입이 어렵지 않으며 친환경소재로서의 가치도 크므로 전통 토주의 직조기술력을 복원하여 전통직물문화의 확산과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본 연구는 먼저 토주의 원료가 되는 전승이 단절된 전통 풀솜의 제작과 주사의 방적에 관해 조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고문헌과 선행연구, 그리고 각종 신문기사 등에서 관련 자료를 발췌하였으며, 제작 경험자와의 면담을 통한 구술 내용을 채록하고 분석하였다. 면담자 선정은 한산, 나주, 경주, 상주 등 전국의 전통직물과 누에고치 생산지를 직접 방문하여 직접 혹은 간접 경험자를 물색하여 선정하였으며, 면담자와는 대면하여 관련 내용을 채록하고 정리하였다. 연구 내용은 조선시대 후기와 개항기 이후로 시기룰 구분하여 풀솜과 주사의 제작 방법과 도구 등의 특징과 변화를 서술하되 개항기 이후는 문헌 자료와 구술 자료로 좀 더 세분화 하여 설명하도록 한다.
전통 풀솜과 주사에 대한 문헌기록은 많지 않으며 이미 전승이 단절되어 경험자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지만 본 연구가 추후 토주 복원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전통 풀솜 제작법
1. 조선후기의 풀솜 제작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풀솜이 사용되었는데 무령왕릉(Jo, Kim, Lee & Jeon, 2005)과 임당고분(Park, Y. M. 2008) 등에서 출토된 바가 있으며, 현재도 주로 충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제작법에 관한 기록은 극히 드문데 특히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풀솜 제작법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의 기록부터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Seo, Y. G.(1764~1845)는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전공지(展功志) 』에서 『 왕씨농서(王氏農書)』를 인용하여 풀솜의 제작도구인 면구(綿矩)와 첨가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면구(綿矩)는 사방 1척 가량의 나무 문틀[木框]로 풀솜[繭綿]을 늘이는데 사용하며 이것을 면구(綿矩)라고 한다. 또 대나무를 부드럽게 하여 구부린 것이 있는데 남쪽 지역에서 많이 사용한다. 그 면(綿)은 밖은 둥글고 안은 비어서 저두면(猪肚綿)이라고 한다. 또 대죽통(大竹筒)을 사용한 것이 있는데 통자면(筒子綿)이라고 한다. 대면(大綿)으로 고쳐 만들 수도 있지만 꾸밀 때 끌어당겨【물건을 꺾는 것이다】찢어지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북쪽 지방에서는 크건 작건 기와[瓦]를 사용하는데 대개 그 편안함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목구(木矩)를 사용하는 경우가 가장 올바른 것이다. 『수경주(水經注)』에서 “방자성(房子城) 서쪽에 백토(白土)가 있는데, 기름처럼 미세하고 부드러워 면(綿)을 씻는데 사용할 수 있으며 서리처럼 곱고 눈처럼 희어서 보통의 면(綿)과 다르다. 세속에서는 ‘방자(房子)의 솜[纊]이다’라고 한다.” 지금 사람들은 면(綿)을 늘이는데 약(藥)을 사용하여 기름지고 희게[膩白] 하니 또한 그 이치이다. 다만 이익을 쫓는 자는 이를 이유로 위품(僞品)을 만들어 반대로 그 진품(眞品)에 해가 되게 하니,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낫다(Imwong- yeongjeji[임원경제지]1)).
위의 설명과 제시된 도설<Fig. 1>을 보면 면구는 풀솜을 만들기 위한 도구이며 풀솜은 형태에 따라 저두면과 통자면 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면구는 사방 1척 크기의 나무를 재료로 하여 사각틀로 만들거나 대나무의 구부러지는 탄성을 이용하여 반원형으로 만들기도 했다. 대나무틀에서 만든 저두면(猪肚綿)은 틀을 완전히 덮어 씌우면서 풀솜을 늘이게 되므로 마치 주머니와 같이 안이 비어있는 형태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중국의 사천지역에서는 <Fig. 2>와 같이 대나무를 구부려서 만든 반원형의 틀에서 풀솜을 제작하고 있으며(KBS, 2011) 이것이 저두면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통자면은 원통형태의 풀솜으로 역시 가운데가 비어있는 구조였을 것이다. 이 외에도 풀솜제작의 도구로 기와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특별히 도구를 제작하지 않고 주변의 기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정확한 품명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면을 늘이기 위해 약을 사용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풀솜을 좀 더 하얗고 윤기 나게 만들기 위하여 약재를 첨가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원경제지』에는 풀솜의 재료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아구 → 황견 → 견의의 순서로 재료의 등급을 설명해 놓았다:
풀솜[綿]을 만드는 데는 아구(蛾口)가 제일 좋고, 상안(上岸)이 다음이고 황견(黃繭)이 또 그 다음이고 견의(繭衣)가 가장 나쁘다. 아구는 나방이 나온 고치이고, 상안은 실을 켜는 뜨거운 물에서 실마리가 엉킨 채로 건져낸 것이며, 견의는 고치의 바깥에 보풀이 있는 것으로 누에가 고치를 처음에 만들 때 생긴다(Imwongyeongjeji[임원경제지]2)).
『잠상촬요(蠶桑撮要)』는 고종21년에 Kim, S. C.(1884)이 누에치기와 뽕나무 기르는 법에 관해 지은 책이다. 풀솜의 제작에 잿물과 향유가 사용된다고 기록하였는데, 풀솜제작에 향유를 첨가물로 쓰는 것은 드문 예이다. 그리고 삶은 풀솜은 두들겨서 손바닥을 싸서 ‘수수(手綉)’를 만든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별다른 도구 없이 손 위에 씌워서 만드는 방법으로 임원경제지의 면구에서 제작한 것보다는 크기가 작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만든 풀솜을 찾아볼 수 없으나 일본 군마현(群馬縣)의 아카이와(赤岩) 지역에서 60년대에 만든 풀솜 가운데 이와 유사한 것으로 짐작되는 풀솜<Fig. 3>을 발견하였다. 고치를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펴서 6개 정도를 겹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수수’의 형태가 이와 비슷할 것으로 유추된다. Kim, S. C. 의 풀솜제작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고치로서 실만들기에 적당하지 않은 것은 곧 이것을 두들겨 솜으로 한다. 삶는 법은 짚을 태운 잿물을 뿌려 극히 정결하게 삶는다. 물이 끓으면 고치를 넣고 장차 연함을 기다려 큰 주발에 향유(香油) 한잔을 담고 잿물을 넣어 가득하게 채운 다음 절반의 물을 나누어 가마 속에 고루 뿌린다.
여러 번 끓인 뒤에 고치를 뒤집고 남은 기름 잿물을 다 넣어 다시 끓여 익힌다. 익은 뒤에 체로 꺼내어 개울 속에 두고 체로 일어서 깨끗하게 한 뒤에 두들겨 수수(手綉)로 한다 [솜으로 손바닥을 싸서 덮는 것을 수수(手綉)라고 이른다.](Jamsangchwalyo[잠상촬요]3)).
2. 개항기 이후의 풀솜 제작
개항기는 병자수호조약 이후 종래의 봉건적인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를 지향해가던 시기이다. 병자수호조약은 고종 13년(1876)에 일본과 맺은 조약으로 부산ㆍ인천ㆍ원산 등 3항을 개항하도록 규정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외국의 선진문명에 접촉하게 되었다. 이 시기 풀솜 제작에 관한 문헌 기록에 의하면 주로 일본의 방식을 따라 제작했던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하에서 일어났던 불가피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누에고치의 증산과 견사방적의 생산량 확대를 전국적으로 장려하였는데 각 교육기관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전습생을 모집하여 기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발간된 잠업에 관한 교과서에는 누에치기를 비롯하여 풀솜제조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Tsuchiya T.(1913)는 풀솜의 원료를 옥견(玉繭)ㆍ오염견(汚染繭)ㆍ수견(銹繭)ㆍ출각견(出殼繭)ㆍ저찬견(蛆鑽繭)ㆍ양견(揚繭)으로 구분하여 정련시간에 따른 중조(重曹)와 잿물의 양을 기록하고 있다. 중조는 탄산수소나트륨의 속칭으로 현재는 ‘베이킹 파우더’로 더 알려져 있는 제품이다. 각 원료견 1升(약 1.8ℓ)에 대한 약품의 분량과 정련시간을 제시하였는데<Table 1>, 원료의 단위 가운데 ‘刄’은 척관법에 의한 무게의 일본식 단위로 ‘もんめ’라고 하며 당시에는 ‘몬메’, ‘몸메’ 등으로 읽었다. 1몬메(刄)는 3.75g이며 1승(升)은 1.8ℓ, 1합(合)은 0.18ℓ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g, ℓ로 표기하므로 <Table 1>에는 g, ℓ로 환산한 양을 함께 병기하였다. Tsuchiya T.(1913)는 또한 풀솜과 주사의 제조를 구분하였는데 주사는 풀솜에 비해 약품의 분량을 줄이거나 끓이는 시간을 단축하여 정련을 조금 덜 한다고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사(紬絲)는 주사기계에 의해, 풀솜과 동일한 원료를 이용해서 방조(紡繰)하는 것. 그리고 원료견의 정련법은 풀솜에 비해서 조금 누이는 것(若練りにする)도 가능하다. 즉 약품의 분량을 약간 감소하거나 혹은 끓이는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Textbook on women's silk-reeling industry [女子養蠶敎科書]4)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JGGK](1931)에서 발행한 『농업교과서 양잠편(農業敎科書養蠶篇)』에도 <Table 2>와 같이 누에고치를 6종류로 구분하였으며, 정련의 원료로 중조와 잿물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원료견 1.8리터에 대한 정련 약품과 시간을 『여자양잠교과서』와 비교해보면 정련시간은 거의 비슷하나 『농업교과서 양잠편』이 『여자양잠교과서』에 비해 중조를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Nakajima Z.(1914)는 동교견(同巧繭), 출각견(出殼繭), 수견(銹繭) 등을 이용하여 풀솜을 만드는데, 풀솜의 정련에는 중조와 잿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풀솜을 형태에 따라 사각형의 각진면(角眞綿)과 주머니형태의 대진면(袋眞綿)으로 구분하였다. 책에 수록되어 있는 사진<Fig. 4>은 남성들이 각진면을 만들고 있는 장면으로 나무로 만든 사각형의 틀[眞綿掛]을 대야에 세워놓고 윗부분은 가로로 설치된 봉에 걸쳐놓아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켰으며 삶은 누에고치를 늘리면서 틀에 씌우고 있는데 풀솜을 마치 손수건과 같은 형태로 만들고 있다.
Dong-A Ilbo(1923, October 19)에는 나쁜 고치를 이용한 생사 방적법과 풀솜 만드는 법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면서 부업으로 권고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풀솜은 한말의 고치를 물 한말에 중조 25몸메를 풀은 물에 약 1시간가량 담갔다 사방 약8치의 나무테에 손수건의 형태로 만든다고 하였다. 비용적인 측면에서는 기본적인 설비와 재료인 나쁜 고치를 구매하는 데에 대해 “전”단위까지 비용을 산출하였으며, 모든 설비의 판매처까지 설명하며 생사와 풀솜을 만드는 부업이 수익성이 좋고, 비교적 쉬운 부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함께 실려 있는 사진<Fig. 5>을 살펴보면 왼쪽의 여성은 사각형의 틀에서 풀솜을 만들고 있는데 틀의 뒤편에는 받침대가 달려있어 대야나 봉에 기대지 않고도 바닥에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의 오른편의 여성은 신문기사에 적혀있는 ‘족답긔(足踏機)’에서 생사를 제사하고 있다. 신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래로 부녀자의 부업은 질삼과 양잠이 가장 보통이거니와 누에 중에는 생사를 켜내이지 못할만치 아조 낫분것도 잇다. 가령 나뷔가 나온것이라던지 잘못 지은 가튼 것은 실을 켜느니보다 풀솜을 만드는 것이 유리한대 이것도 수십인이 긔관을 만들어가지고 경영하면 상당한 부업이 될 수가 잇다. 이제 풀솜 만드는 방법부터 설명하면 한말의 를 물한말 가량에 담그고 중조(重曹)이십오 『몸메』를 풀은 후 약 한시간동안 살머시 퍼내어 가지고 가만-히 펴내어서 사방 약 여덜치 가량의 나무테에다가 손수건과가치 네모가 번듯하게 반지어서 말니면 훌륭한 풀솜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폐물을 리용하야 귀중한 물건을 만들어 내이는 것인대 이것도 이삼일만 련습하면 누구든지 할 수가 잇고 매일 수입은 약 일원 이십전이라는데 자세한 계산은 한말에 삼원 오십전 불 나무 이십오전 중조(重曹) 이십오 『몸메』사전 합계 삼원 칠십사전의 밋천을 들이면 풀솜 열한량중을 만들어내이는데 그갑은 사원 구십오전임으로 결국 리익은 일원 이십일전이라 한다. 이와 가튼 예산은 물품을 만히 만들어서 바로 파는 사람의 예산이라 시골 농가에서는 고대로 마즐수가 업지만은 아모리하야도 이 두가지 부업은 매일 일원버리는 될것이라 하겟스며 실켜는데 사용하는 족답긔(足踏機)와 기타 모든 제구는 경성 남대문통 호뎐농구뎜(戶田農具店)에서 판다한다.(Dong-A Ilbo, 1923 October 19.)
풀솜은 투자비용이 크지 않으면서도 가내에서도 쉽게 작업할 수 있는 과정으로 1900년대 초에는 부업으로 소개하는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Dong-A Ilbo(1928, September 07)에는 고성군 농회에서 한달간 설면자제조전습회를 개최하는 것에 대해 알리고 있고, Dong-A Ilbo(1932. July 20)는 포천금융조합에서 부녀자들을 상대로 ‘진면전습회’를 5일간 개최하였는데 30여명의 부녀자가 참가하여 양호한 성적을 냈다는 내용의 기사를 경제 뉴스에서 다루고 있으며 전습회의 광경 사진<Fig. 6>도 함께 실려 있다. 이 외에도 각 신문사에서는 경기도 장연군, 전북 군산, 강화군, 춘천, 경기도 시흥군 등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풀솜제조 강습에 대한 기사를 다루고 있다.
풀솜은 여러 용도로 쓰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Dong-A Ilbo (1925년 July 11)에 의하면 11일부터 일주일간 김제군 잠업조합에서 열린 ‘설견(屑繭)정리강습’은 제사법(製絲法), 진면제조법(眞綿製造法), 眞綿족기製造法의 3과목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眞綿족기製造法’은 풀솜을 이용하여 조끼를 제작하는 과목으로 짐작되는데 제작방법에 관한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풀솜을 이용하여 조끼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의 3가지 방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 풀솜으로 자은 실(주사)를 사용해서 뜨개질로 조끼를 만드는 방법과 둘째, 풀솜을 펠트처럼 두껍게 만들어 조끼로 제작하는 방법, 그리고 셋째, 풀솜으로 자은 주사로 옷감을 짠 후 재단하여 조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나 교육기간이 1주일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옷감으로 짜서 조끼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Maeilsinbo (1937. September 26)에는 춘천에서도 ‘족기’ 제작에 대한 진면강습회가 개최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풀솜이 군용(軍用) 외투의 제작에도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Maeilsinbo (1938. November 07)에 의하면 평안북도의 6만여 양잠가(養蠶家)에서 진면을 헌출(獻出)하여 의주군 농회(農會)에서 진면을 제조한 후 다시 조선잠사회(朝鮮蠶絲會) 평우회(平友會)에서 이를 외투용으로 가공하고 군용 외투 70벌로 제작하여 군부에 헌납하였다고 한다. 또한 Maeilsinbo (1939. January 26)에는 군용 외투 외에도 군용 조끼의 제작에도 풀솜이 사용되었다고 하여 당시 풀솜이 군용 의복의 방한소재로도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풀솜 제작에 사용된 나무틀 가운데 <Fig. 4>와 같이 받침대가 없는 사각형의 틀을 ‘평면형 틀’로, <Fig. 5>와 <Fig. 6>처럼 받침대가 달린 틀을 ‘입체형 틀’로 구분하여 명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직물산업이 빠른 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전통직물 생산자는 극히 드물며 경험자들도 고령으로 점차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수많은 지역을 탐방하였으나 가내 수공업을 목적으로 한 풀솜 제작에 대해서는 주온선(1925~2009) 한 사람의 내용만 확보할 수 있었다. 현재 청주에 거주하는 정란(1961년생)은 2011년 행정안전부에서 주관한 녹색성장 누에산업의 일환인 “명주살리기” 사업에 참여하여 풀솜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시어머니인 주온선으로부터 풀솜을 만들때에 정련제로 ‘하이타이’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하이타이’란 국내에서 최초로 시판되었던 합성세제의 상품명으로 1966년에 출시되었으므로 그 이후에 합성세제가 고치의 정련에도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손명주를 생산하고 있는 경주 두산마을에서는 지금도 생명주의 정련에 하이타이를 사용하고 있다. 주온선은 풀솜을 이불솜의 용도로만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풀솜제작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온선은 이북 출생으로 어렸을 때에 집에서 풀솜을 많이 보았는데 풀솜을 나무작대기로 두들겨서 이불솜으로 만들어 썼다. 그리고 후에 본인도 풀솜을 만들었는데 누에를 하이타이에 삶아서 꺼내 물에 헹궈 말린 후 자루에 넣거나 또는 펴서 나무작대기로 두들겼다. 자루는 삼베로 크게 만들었으며, 솜을 펼 때에는 잡아당기거나 손으로 펴기도 했다.
경남 거창에서 ‘효성실크’라는 명주솜 제작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손경식(1940년생)은 밀양 산외면 남기리 출생으로 농잠학교의 잠업과를 졸업하고 잠종회사인 유남제사에서 사원으로 50대 초반까지 근무하였다. 유남제사에는 30~50명 정도가 근무했는데 그가 근무할 당시 풀솜을 만들고 주사를 방적한 경험이 있다고 했으며 고치의 정련 방법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주사용과 이불솜과 같은 충진용 풀솜의 정련 방법은 달랐는데 주사용을 100℃에서 약 한 시간 정도 삶는다면 솜용은 2~3시간 정도 삶고 대신 잿물과 표백제인 과산화수소를 넣었다고 한다. 정확한 양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삶는 용기가 있었고 거기에 물과 고치, 약품을 맞춰 넣었다고 한다.
Ⅲ. 주사 방적 기법
1. 조선후기의 주사 방적
풀솜을 방적하여 만드는 견방적사 용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먼저 『상방정례(尙方定例)』에서는 ‘탄일진상’으로 대전에 올리는 의복 제작의 소요물품 가운데 주사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주사를 설면자로 만든다.’5)는 기록으로 이를 통해 주사는 풀솜으로 만든 실을 의미하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임원경제지』에는 ‘풀솜을 손으로 꼬아 면사를 만들면서…….’6)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내용을 통해 누에고치를 늘여 만든 풀솜을 방적해 만드는 방적견사의 의미로 면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목화솜의 방적사인 면사(棉絲)와 혼동이 있을 수 있으므로 풀솜의 방적사를 ‘주사’로 명시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주사의 방적기법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지만 조선후기의 학자인 Park, S. D.(1629~1703)은 그의 저서인 『색경(穡經)』에서 풀솜의 종류에 따른 주사의 품질을 아구 → 황견 → 견의의 순서로 등급을 나누었는데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전공지』의 내용과 유사하다. 단지 『전공지』는 풀솜의 품질을 구분한 것이고 『색경』은 각 등급의 풀솜에서 뽑은 실도 같은 명칭으로 구별한 것이다. 즉, 온전하지 못한 누에고치나 고치의 보풀로 풀솜으로 만들고 그 풀솜으로 실[綿絲]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개 풀솜으로 뽑는 실로는 아구(蛾口)가 제일 좋고, 상안(上岸)이 다음이며 황견(黃繭)이 또 그 다음이고, 견의(繭衣)가 가장 나쁘다. 아구는 나방이 나온 고치이고, 상안은 실을 켜는 뜨거운 물에서 실이 엉키어 풀리지 않아 건져낸 것이며, 견의는 고치층의 바깥을 감싸고 있는 고치보풀이다(Saeggyeong[색경])7).
Seo, Y. G.(1764~1845)는 풀솜에서 만든 실로 토주를 직조한다고 하며 토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누에 농가에서 고치를 풀어 물에 헹궈 풀솜[絮]을 만드는 것을 세속에서는 설면자라고 한다. 꼬임을 주는 물레[燃綿軸]를 사용해 솜을 당겨 실[縷]을 만들고 날실과 씨실 위에 일반적인 방법으로 짜는데 이를 토주라고 한다. 튼튼하고(질기고) 따뜻하여 값이 일반 주보다 2배이다(Imwongyeongjeji[임원경제지]8).
위의 설명과 같이 주사를 만들 때에 꼬임을 주는 물레인 연면축(燃綿軸)을 사용하여 실에 꼬임을 주는 것은 솜과 같은 상태에서 실을 만들기 때문이며, 그는 『전공지(展功志)』에서 『왕씨농서(王氏農書)』를 인용하여 연면축의 그림<Fig. 7>과 함께 사용법을 소개하고 있다.
연면축(撚綿軸)은 나무나 돌로 작은 추를 제작하고, 위에 길이가 1척 정도 되는 가는 축대를 꼽는다. 먼저 갈래의 머리부분[叉頭]을 사용해 면(綿)을 걸고 왼손으로는 갈래[叉]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면(綿)을 당겨 상축(上軸)에 매단다. 면사(綿絲)를 비틀어 만들며 축대 위에 동이면 곧 주루(紬縷)가 되니 규방 아녀자들이 이 방법을 이용하여 방적(紡績)의 공을 대신할 수 있다(Imwongyeongjeji[임원경제지]9).
이 글에서 ‘綿’은 설면자인 풀솜을 뜻하는 것으로 풀솜을 축대위의 고리와 같은 것에 매달고 비틀면서 실을 뽑는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이 감기는 부분에는 마치 가락바퀴와 같은 형태의 도구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가락바퀴는 둥근 형태의 바퀴 중심에 가락을 끼워 회전을 시키며 실을 잣는 기구로 방추차라고도 한다.
가락바퀴는 주요 방적도구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고분과 생활주거지 등에서 수도 없이 많이 발굴되었으나 철기시대 이후에는 거의 발굴되는 예가 없는데 그 이유는 더 성능이 우수한 방적기의 등장으로 쇠퇴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한산, 경주 등의 전통직물 생산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방적도구이다. 그런데 JGGK의 사진기록물 가운데 ‘노녀’로 기록된 사진<Fig. 8>에는 한 여성이 길에서 가락바퀴를 사용하여 실 방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왼손에는 막대기에 솜과 같은 것이 씌워져 있고 오른손으로는 실을 돌리면서 꼬임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재료로 방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락바퀴를 사용하여 주사를 방적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2. 개항기 이후의 주사 방적
Tsuchiya T.(1913)는 앞서 언급한 풀솜 제작법 이외에도 ‘주사제조(紬絲製造’)와 ‘주사원료견(紬絲原料繭)의 정련하는 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주사를 기계로 만들었으며, 충진용으로 사용할 풀솜과 실로 방적할 풀솜의 누이는(정련) 과정이 조금 달라서 주사용 풀솜은 정련시간을 짧게 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사(紬絲)는 주사 기계에 의해 풀솜과 동일한 원료를 이용해서 방조(紡繰)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료견의 정련법은 풀솜에 비해서 조금 누이는 것[若練りにする]도 가능하다. 즉 약품의 분량을 약간 감소하거나 혹은 끓이는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Nakajima Z.(1914)도 주사 만드는 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였는데 제사(製絲)할 때 생기는 부스러기들, 또는 동교견, 오견 등을 정련한 후에 실로 잣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사는 직물원료로서 사용되는데 주로 견방공장에 보내져 대량으로 소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이나 신문기사 외에 면담을 통하여 주사방적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충남 신탄진에서 솜틀집을 운영했던 심귀설(1926~2013)은 앞서 언급한 정란 선생이 “명주살리기” 사업으로 명주솜을 틀기 위해 만났던 분으로 당시 풀솜과 주사방적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심귀설의 증언에 의하면 명주솜을 수건과 같이 만든 후 여러 장 겹쳐놓고 방안에 꽂아놓은 막대에 걸고 무언가를 돌리면서 한쪽 끝에서부터 실을 뽑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젖은 상태에서 뽑으면 잘 뽑혔다고 한다. 그런데 ‘무언가’가 명확히 어떤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수건 형태의 풀솜에서 주사를 방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경남 함양군에 거주하고 있는 박홍기(1938년생)는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생으로 부친인 박이승(1901~1946)이 제사공장과 양잠을 했고, 본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안의로 돌아와서 32세에 삼경물산의 협조로 ‘안의견직’을 설립했다. 안의견직에서는 일본 츠무기 직조를 하였는데 1979년도에 석유파동 이후 파산하였다. 그는 어릴적 쌍고치를 따뜻한 물에 불려 솜처럼 만들고 거기서 실을 굵게 뺏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명주실의 방적에는 쌍고치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골라내었는데 이웃사람들이 그것을 얻어가서 실을 굵게 빼고, 이 실로 뜨개질을 하여 스웨터 같은 것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지역주민들에게는 이렇게 만든 옷이 최고급 방한복이어서 한 벌해 입으면 굉장한 옷을 입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누에고치를 정련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따뜻한 물에 불렸다고만 기억하고 있다.
경남 거창의 ‘효성실크’ 대표 손경식(1940년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남제사에서 풀솜제작을 하였는데 주사용 풀솜은 누에고치를 넓혀 손수건 크기 정도의 사각형의 솜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사각형의 판자 같은 것에 못을 박아 고치를 걸고 넓히면서 계속 겹치며 솜을 만들었고, 솜을 쓸 때는 한 겹씩 떼어내서 사용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사각형의 풀솜을 그 당시에는 ‘마와타’라고 지칭하였다고 하는데 마와타는 일본에서 풀솜을 일컫는 일본어인 ‘まわた’를 뜻한다. 이 사각형의 풀솜으로 만든 실을 당시 ‘수방사’ 라고 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수방사를 많이 제작했으며 제작된 수방사는 우리나라의 견방회사로 가거나 일본으로 수출을 했었다고 한다. 주사 방적에는 기계방적기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아 기계방적기의 구조나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런데 Maeil Business Newspaper [MBN](1969, September 23)의 ‘외화가득에 큰 변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앙고라와 페니를 섞은 수방사를 뽑고 있는 사진<Fig. 9>이 함께 실려 있다. 페니는 생사를 뽑을 수 없는 하견(下繭)ㆍ부천(副蚕)을 가공하여 만든 솜을 일컫는데, 사진에는 많은 여성들이 기계방적사 앞에서 방적을 하고 있다. 사진이 선명하지는 않으나 방적기의 기본적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데, 방적기의 아래에는 모터가 달려있고 위에는 방적한 실을 감을 수 있는 실패가 달려있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실을 자을 때 사용하는 방적기는 자새, 혹은 물레인데 주사의 방적에 자새를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다.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NFM], 2012)에 의하면 경북 성주에 거주했던 조옥이(1920~2007) 전 명주짜기 보유자는 파고치나 쌍고치를 적당히 삶아 자새에 걸거나 손으로 잡아 늘이면서 꼬임을 주어가며 실을 만드는데 이와 같이 만든 실은 면사와 같아 직물을 짜 놓으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어 목도리 등으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상의 자료를 정리해보면 주사 방적은 풀솜의 끝을 잡고 손으로 잡아 늘이면서 만드는 방법, 막대에 풀솜을 걸고 잡아 늘리는 방법, 가락바퀴에서 잣는 방법, 자새에 걸고 만드는 방법 그리고 수건형태로 풀솜을 만든 후 기계방적기에서 방적하는 등 5종류의 방법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사로 베틀에서 직조하여 옷감으로 만들거나 뜨개질로 옷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일본에 주사 상태로 수출하거나 수출용 츠무기의 재료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Ⅳ. 맺음말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풀솜을 사용하고 있으나 전통 제작법에 대해서는 연구된바가 없으며 토주의 제직 또한 전승이 단절되어 더 이상 주사를 방적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풀솜과 주사 제작에 관한 문헌 자료도 많지 않은데 특히 조선시대 이전의 것은 극히 드물며 개화기 이후의 각종 교과서나 신문기사가 일부 남아있다.
본 연구에서는 전통 풀솜 제작과 주사 방적 기법에 대해 조선후기 이후를 중점적으로 조사를 하였으며, 먼저 풀솜에 관해 조사한 결과 다음의 사실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풀솜 제작에 나무로 만든 면구나 대나무틀, 혹은 기와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였으며, 또한 별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바닥에 펴서 만들기도 하였다. 정련을 위해서는 잿물과 향유를 첨가하기도 하고 풀솜을 좀 더 하얗고 윤기 나게 만들기 위해 약품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개항기 이후에는 풀솜의 제작에 사각형의 나무틀을 주로 사용했는데 받침대가 없는 평면형과 받침대가 달린 입체형의 두 종류이다. 정련에는 중조와 잿물, 혹은 중조만 사용되기도 하였고 합성세제가 시판되면서부터는 합성세제도 사용되었으며 또한 표백제를 첨가하기도 했다. 풀솜의 쓰임새로는 주사제작의 원료로 사용하거나 조끼와 군용 외투 제작 그리고 이불솜으로도 사용했다. 주사용과 충진용 풀솜은 정련방법을 달리하기도 하였는데 대체로 주사용은 충진용에 비해 정련시간을 짧게 하였다.
주사 방적기법에 관해서 확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임원경제지』에서 주사 방적기법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중국의 『왕씨농서』를 인용한 내용에 의하면 연면축을 이용하여 실을 자았는데 기구의 아래 부분에는 가락바퀴와 같은 도구가 설치되어 있다. 개항기 이후에는 풀솜을 손으로 잡아 늘이면서 만드는 방법, 막대에 풀솜을 걸고 잡아 늘리는 방법, 가락바퀴에서 잣는 방법, 자새에 걸고 만드는 방법 그리고 수건형태로 풀솜을 만든 후 기계방적기에서 방적하는 등 5종류의 방법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사로 베틀에서 직조하여 옷감으로 만들거나 뜨개질로 옷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일본에 주사 상태로 수출하거나 국내에서 수출용 츠무기의 재료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나라는 사회의 빠른 산업화로 근대 이후로 수작업에 의한 전통직물 제직은 급속히 감소하여 직조 경험자는 주로 고령자들로 그나마도 찾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풀솜과 주사의 경험자는 극히 드물어 구술내용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좀 더 많은 자료를 비교 검토하지 못하였다. 추후 전통직물에 관한 연구가 다방면으로 진행되어 보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2016년도 국립문화재연구소 용역연구개발과제로 수행되었음(과제번호 25163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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