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매일신보≫에 실린 의생활 관련 사설의 내용 분석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udden shift in the direction of consciousness and the change in worldview after the Japan’s annexation of Korea in the 1910s through an analysis of editorials related to clothing culture in the 1910s. This time period experienced a restructuring of the industrial structure, economic modernization, changes in customs, demanding of the self-discipline, and the promotion of hygiene, which was upheld as an aspect of modernization. Collectively, these measures were a device to transform Korea into a Japanese colonial society favoring Japan’s economic dominance. This study newly recognizes two fundamental aspects of colonial modernism and the imperialist exploitation of the 1910s. During this time period, out of 4275 editorials, 138 editorials (3.2%) were found to be related with clothing culture, and the most editorials on clothing culture were found in 1911 and 1913, 27 and 26 editorials respectively. The number of editorials on clothing culture dropped sharply in 1915 and 1917. As a result of the classification of editorials by subject, 94 out of 138 (68.1%) editorials were related to industrial development, 14.5% of these focused on the changing customs, 13.5% focused on warnings to refrain from purchasing luxury goods, and 5.7% focused on hygiene promotion. Further research must analyze the editorials belonging to each subject in detail to reveal a nuanced picture of the 1910s.
Keywords:
1910s, clothing culture, editorial, Maeil Shinbo키워드:
1910년대, 의생활, 사설, 매일신보Ⅰ. 서론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한국의 1910년대는 ‘무단통치의 시대’ 또는 ‘암흑기’로 알려져 정체된 국면으로 인식되어 왔다(Kwon, 2008). 그러나 1910년대는 식민 권력에 의한 근대라는 거대한 변화를 맞이한 한국인이 급격한 의식과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던 시기였다. 본 연구에서는 1910년대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한국과 한국인이 맞이한 새로운 국면을 살펴보기 위한 매개체로 의(衣) 생활에 주목하였다. 옷은 그 옷이 대응하는 물질적 차이의 체계를 형성하며 개념적 차이의 체계를 전달하기 때문에(McCracken, 1988) 의식과 세계관이 전환되고 새로운 질서의 물질문명 사회로 변화되는 새로운 국면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1910년대 의생활의 실상을 살펴보기 위해 ≪每日申報≫(이하 매일신보) 사설을 선정하였다. 매일신보의 전신은 ≪대한매일신보≫이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전 외국인의 발행이라는 조건 아래 가장 격렬한 논조로 일제 침략에 항거하던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하여 관제 언론으로 만들었다. 국한문 혼용 또는 한글판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로서 일제 강점기 내내 유일하게 정간되지 않고 간행되었다. 특히 1910년대 “무단정치기” 동안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어판 일간지였다(Jang, 1992).
또한 사설은 그날에 게재된 여러 기사 중에서 그 신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하나 또는 두 개 골라서 신문사의 입장을 바탕으로 논평한 것이다(Kim, 1995). 사설에서 각 신문사의 주필이나 주간, 논설주간은 공직자나 공공기관의 활동을 논평하고 지지하거나 비판한다. 또한 사회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장려하고, 정치적 입장을 강하게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의생활 관련 사설은 옷과 관련된 현상에 대해 각 신문사의 주장을 논하여 설명한 글이라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매일신보 의생활 관련 사설을 분류하고 내용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1910년대 의생활에 나타난 가장 중대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매일신보는 언론사(言論史)를 연구한 Jeong(1982; 1988)의 연구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부터 매일신보에서 식민주의 논리와 함께 사회진화론1)적 성격을 밝히는 연구가 시작되었다(Jang, 1992; Kim, 1995). 1999년 봄부터 수요역사연구회(이하 수요회)에서는 매일신보 강독반을 구성하였고, 2003년과 2005년에 각각 『식민지 조선과 매일신보: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매일신보: 1910년대』를 출간하였다. 각 책에는 연구자들의 세부 주제에 대한 연구가 6~7편 정도씩 실려 있다. 수요역사연구회는 2007년에 1920-30년대 매일신보를 강독한 결과물을 내놓기도 하였다. Kwon(2008)은 매일신보를 넘기면서 눈에 띄는 기사를 목록화하고, 입력하여 유목화된 키워드에 관련한 총평을 적어 자료집 형식의 책을 만들었다.
복식사ㆍ의류학 분야에서도 Kim, J. G. & Kim, A. R(1999)에 의해 매일신보 광고를 통해 한국복식의 변천을 살펴보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신보에 실린 복식 관련제품의 광고를 모두 살펴보면서 복식제품을 유형화하고 광고 빈도를 조사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산업 구조의 변화로 인해 국민의 의생활이 급속히 변화되는 모습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후 Kim(2007)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매일신보에 실린 복색 관련 사설과 기사를 발췌하여 분석하였다. 이 논문은 1920년대부터 해방전까지 일제가 백의(白衣)를 폐지하려는 운동을 벌이게 되면서 한국인들의 옷 색상이 백의에서 색의로 변화하게 된 양상에 초점을 맞춘 연구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매일신보 사설을 통해 1910년대 일제강점기 의생활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한 연구는 없다. Kim, J. G. & Kim, A. R(1999)의 연구는 광고 이미지 분석 연구로 주로 광고의 개수와 빈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Suyo Yeoksa Yeonguhui[수요역사연구회, SYY](2003; 2005)나 Kwon(2008)의 연구는 사회 전반을 다루고 있어 1910년대의 옷 관련 생활ㆍ문화ㆍ제도사를 심도 있게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사설에 등장하는 복식 관련 정책들과 논조를 시기별, 주제별로 체계적인 분석을 실시한다면 한국에 대한 일제 지배 정책의 특징과 사회 진화론적 관점의 논리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Ⅱ. 연구방법
1910년대 매일신보 사설은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라이브러리 데이터베이스(BIGKINDS)를 통해 표집하였다.2) 1910년 8월 30일부터 1919년 12월 30일까지의 사설 4046개가 표집되었다. 매일신보가 8월 30일부터 검색되는 이유는 매일신보가 한일병합조약이 발효된 1910년 8월 29일 다음 날부터 대한매일신보의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신문의 지령(紙齡)은 대한매일신보의 것을 그대로 이어 국한문판은 제1642호, 한글판은 제939호로 시작하였다(Jang, 1992).
BIGKINDS 데이터베이스에는 1910년 12월 1일부터 1911년 9월 19일까지의 사설이 누락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사설은『식민지 조선과 ≪매일신보≫: 1910년대』(SYY, 2003)의 부록편에 수록되어 있는 사설 목록을 참고하여,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추가하였다. 사설을 표집하는 과정에서 일부 연재 사설이 사설로 분류되어 있지 않고 기사로 분류되어 데이터베이스 사설 분류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기사로 분류된 사설도 사설 목록에 추가하였다. 예를 들어, 1915년 9월 7일 사설 <시정 5년간의 조선발전, 2. 화근의 영색>의 경우 한국언론진흥재단 데이터베이스에서 기사로 분류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표집된 사설의 총 개수는 4275개이다.
위의 4275개의 모집단에서 복식 관련사설의 표집은 판단표집 방법을 이용하였다. 판단표집이란 전문가의 입장에서 전집에 대한 대표적 표집을 얻기 위해서 편의상 임의적으로 행하는 표집방법을 말한다(Lavrakas, 2008). 근대 복식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이상 복식사 연구자 3명이 복식 관련 사설을 표집 하는데 참여하였다. 사설 제목을 검토하여 의생활 관련 키워드가 사설 제목에 포함되어 있거나 “의생활을 주제로 하여 의도성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 사설을 1차로 표집 하였다. 1차 표집에서 선택된 사설은 총 353개로, 전체 사설의 8%에 해당하였다. 1차 표집된 사설 제목에서 다시 연구자 3명의 논의와 합의를 통해 복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사설을 다시 추려내어 203개의 사설(전체 사설의 5%)을 표집 하였다. 3차 표집에서는 2차로 표집 된 사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서 실제로 복식이 사설에서 언급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복식 관련 키워드가 들어있다고 해서 모두 복식 관련 사설이 아닌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유의유식(遊衣遊食)의 폐(弊)> (1912년 3월 5일 사설)는 제목에는 복식 관련 한자가 포함되어 있으나 사설 내용에는 복식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유의유식’은 놀고 호화롭게 생활하는 것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사설 내용은 부지런하고 성실함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德服과 力服>(1915년 4월 22일 사설)도 처음에는 ‘服’ 자가 포함되어 있어 1차 분류에서 복식 관련 사설로 분류되었으나, 덕복과 역복은 『맹자』에 나오는 구절로 확인되었다.
以力服人者 非心服也 力不贍也 以德服人者 中心悅以誠服也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힘이 부족해서일 뿐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서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Park, 2015, p. 64)
사설 내용은 “德으로써 人을 服하는 자는 王道요, 力으로써 人을 服하는 자는 覇道요”라 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군을 힘으로써 굴복시키는 자, 연합군을 덕으로써 굴복시키는 자에 비유하고 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중국 내 독일 영토였던 청도(靑島)를 함락시켜 조차지로 만들었다. 또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기지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사설은 분석에서 제외하였다.
본 연구에서 최종 표집 된 사설은 총 138개(3.2%)이다. <Table 1>은 표집 차수별, 연도별 복식 관련 사설 개수를 표로 만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최종 표집된 138개의 사설에 대한 내용분석을 실시하여, 주제 유형별로 분류하였다. 사설의 시기별 분포를 살펴보고, 다시 내용을 분석하면서 1910년대 한국에서 의생활 관련 사안들이 어떻게 달리 비중을 두고 총독부에 의해 강조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Ⅲ. 연구결과
1. 1910년대 복식 관련 사설의 연도별 빈도수 분석
다음 <Table 2>와 <Fig. 1>은 1910년 8월 30일부터 1919년 12월 31일까지 10년 동안의 138개의 사설을 내용 분류하여 연도별, 주제부문별 분포상황을 살펴본 것이다. 1910년대 매일신보의 의생활 관련 사설의 주요 내용은 산업을 일으키고, 풍속을 개량하며, 사치를 경계하고, 위생을 증진시키는 주제로 크게 요약되었다. <Fig. 1>에 보이는 실선은 복식 관련 사설의 총수를 표시한 것이다. 실선은 붉은 선인 산업진작의 그래프와 그 흐름을 대부분 같이 하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을 성사시킨 3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같은 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재임기간: 1910.10.1.~1916.10.9.)(Lee, 2010). 데라우치는 식민지 조선 통치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물산공진회(이하 조선공진회)를 성공시켰다. 조선공진회 기간에 대만, 조선, 만주를 잇는 철도 개통을 기념하며 기차 경주가 개최되기도 하였다(‘The Great Race Railway Show: Celebrating the building of the 4000km railway’, 1915). 데라우치는 조선 식민 통치의 초석을 쌓은 공로를 인정받아 1916년 일본 내각 총리로 부임하면서 조선을 떠났다.
표집된 138개의 사설 중 94개(68.1%)가 산업진작에 관련되어 있었고, 1915년까지 산업진작 사설이 63개에 달했다. 1913년에는 산업진작 관련 사설 수가 22회로 1910년대를 통틀어 산업 진작 관련 사설 수가 가장 높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데라우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의 경제구조를 식민지 체제로 재편하는데 주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제병합의 해인 1910년에는 풍속개량 관련 사설이 4회, 산업진작이 1회, 위생증진이 1회 실려 조선민족의 의생활 풍속을 개량시키려는 움직임이 먼저 보였다. 1911년에는 풍속개량 관련 사설도 7회로 증가했지만 산업진작 관련 사설이 16회로 증가하여 조선총독부가 의생활과 관련한 산업을 진작시키는 것에 힘을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4년과 1915년, 1917년과 1918년 사이에 복식 관련 사설 개수가 급감하는 것이 눈에 띈다. 1914년에서 1918년은 다른 해에 비해 사설의 총수도 현저히 적은 해이다. 1914년 7월 말부터 시작되어 1918년 11월까지 지속된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국제문제에 대한 사설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데라우치 총독 후임으로 온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재임기간(1916.10.16.~1919.8.12.)과 겹친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연합군 전선에서 전쟁에 참전하였다. 유럽에서의 전쟁을 틈타 일제의 만주 침략전쟁이 구체화되었다. 전쟁 중인 식민지 조선에서는 쌀값 폭등 및 물가 폭등현상이 일어났다. <Table 2>를 살펴보면 1917년에는 산업진작 관련 사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사치경계와 위생증진 관련 사설 각 1건씩만 보인다. 1917년 10월 9일부터 1918년 4월 26일까지 매일신보에서는 사설 대신에 <지나만유(支那漫遊)>를 86회에 걸쳐 연재했다(Jang, 1992, p. 427). 중국 전지역에 대한 인문 지리적 성격을 띤 연재물이었다. 1914년 8월부터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같은 해 11월 중국내 독일령이었던 청도(靑島)를 함락시키고 중국에서의 이권을 확고히 하였으며, 유럽전선에 전력을 쏟았던 유럽 열강이 아시아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틈을 타 중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시 상황은 일본에 중국 진출의 호기가 되었고, 일제는 중국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1917년 매일신보는 <明治大祭와 大陸統治政策>(1917년 7월 30일 사설)이라는 사설을 통해 중국침략전쟁이 국시임을 천명하였다. 매일신보 지면을 이용한 내면적 식민화가 추진되고 있었다. 한편, 1916년에는 갑자기 복식 관련 사설 개수가 급증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1916년 <농가의 보고(寶庫)>, <조선의 면화(棉花)와 마류(麻類)>, <조선의 기직업(機織業)>과 같은 복식 관련 연재사설이 1월부터 9월까지 실렸기 때문이다. 1916년 복식 관련 사설은 16개가 산업진작에 관련된 것이었고, 1건만이 사치경계와 관련된 사설이었다. 이전의 산업진작 사설과 다른 점은 1911년부터 1913년까지의 산업진작 사설이 주로 양잠에 관련된 것이었던 반면, 1916년의 사설부터는 면직, 마직에 관련된 사설이 등장하였다.
1918년 겨울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휩쓴 독감이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쳐 민심을 동요시켰다. 전국적으로 14만 명의 목숨을 앗은 후에야 주춤해졌다. 독감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은 1919년 2월이었다(Kim, 2009). 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19년 6월에 조선총독부 관제개정안이 일본내각을 통과했고, 8월 12일에 예비역 해군대장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재임기간: 1919.8.12.~1927.12.10.)가 조선총독에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2월 31일까지 의생활 관련 사설은 산업진작 관련 사설 15건, 사치경계 관련 사설 4건이었다. 산업진작 관련 사설은 <대정 칠년(大正七年)의 조선(朝鮮)>이라는 연재사설 중 산업과 무역에 대한 부분에서 조선의 직물산업에 대해서 언급되었다. 3.1운동과 관련된 의생활 관련 사설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3.1 운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4월부터는 다시 잠사업(蠶絲業)에 관련된 사설이 주를 이루다 7월, 8월에는 방적업에 관련된 사설이 실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1910년대 복식 관련 사설의 주제 유형별 분석
1910년대 복식 관련 사설 141개 중 산업진작 관련 사설은 94개(68.1%), 풍속개량 관련 사설은 20개(14.5%), 사치경계 관련 사설은 17개(12.3%), 그리고 위생증진 관련 사설은 7개(5.1%)로 분류되었다. 분류기준은 다음과 같다. 산업진작 관련 사설은 복식의 원료가 되는 섬유, 직물 산업화에 관한 사설, 풍속 개량 사설은 기존 조선의 풍습을 좋지 않은 악습으로 인식하고 개량하기를 유도하는 사설, 사치 경계 사설은 새로이 들어온 외래품, 신문물 상품 소비와 관련한 사치를 경계하기를 요구하는 사설, 위생증진 관련 사설은 조선민족을 불결한 미개의 대상으로 규정짓고, 근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복식부분에서 위생, 청결을 강조하는 사설이다.
1910년대 전반의 산업진작 관련 사설은 크게 잠사업, 면작으로 나눌 수 있다. 1910년 10월 4일 사설인 <목화(木花)와 잠업(蠶業)>에는 목화와 잠업이 식민지 조선에서 1910년대 이루어질 기초 산업임을 서술하고 있다.
“조선의 풍토와 기후는 남방은 기후가 온화하여 목화 재배에 적합하며, 북방은 기후가 서늘하여 잠업에 적합하다... 삼남(三南: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총칭)에는 목화의 산출지라 하여 목화재배협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일천오백 정보(町步) 1정보(町步)는 약 삼천 평에 시험적으로 파종하여 성적이 양호하였다... 서북지방에는 작잠(柞蠶)이 적합하나 지금까지 흥왕치 못한 것이 유감이다... 최근 물은 즉 동양척식회사에서 역묘(櫟苗:상수리 나무)를 재배한다니 희망컨대 가급적으로 허다한 묘목을 재배하여 경기 이북 각지에 분배하여 작잠업을 권유하기로 용력(用力:마음이나 힘을 쓸)할 지어다... 작잠은 단순히 견사의 이익 뿐 아니라 매년 그 가지를 잘라 자초(紫草)로 이용하면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혹자는 작잠을 양성할 때에 충해(蟲害)와 조해(鳥害)를 많이 받아 조선지방에서는 쉽게 성적을 득하지 못했다 하나 이는 무식자의 말이 아니면 무경력자의 말이다... 특히, 동만주는 작잠의 소산지라 작잠에 용력할지어다.”
(‘Cotton and sericulture' [목화와 잠업], 1910)
그 밖의 복식 재료로는 마(麻)와 가죽이 보인다. 191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방적/방직/기업 관련 사설이 등장한다. 사설을 통해 조선의 기초 산업구조가 재편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 잠사업(蠶絲業)
잠사업은 양잠(養蠶), 잠종(蠶種) 제조, 제사(製絲) 등을 경영하는 기업의 총칭을 말한다. 1910년대 매일신보에 실린 잠사업과 관련된 사설은 <Table 3>과 같다. 산업진작 관련 사설 총 94개 중 잠사업과 관련된 사설이 총 51개로 전체 산업진작 사설 중 반 이상인 54%에 해당한다. 연도별 분포 <Fig. 2>를 살펴보면 1911년도가 16개로 가장 많고, 1913년까지 잠사업 사설의 개수가 9개, 10개로 유지되다가 1914년에 3개로 떨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주춤하다가 다시 1919년 9개로 늘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사설 제목에서 잠사업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1916년까지 사설에는 잠업(蠶業), 양잠(養蠶), 치잠(稚蠶), 춘잠(春蠶), 작잠(柞蠶) 사업과 같이 누에를 치고 생사를 생산하는 단계까지의 사설만 보였다. 1911년 10월 연재된 <조선의 제사(製絲)와 직물(織物)>사설에서 “조선에서 생사(生絲)만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 과정까지 진행하기를 희망”한다는 고지(兒島) 촉탁의 염원은 1919년 4월에 4차례 연재된 <잠사업(蠶絲業)의 장래> 사설에서 확인되듯이 1910년대 말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강제병합 직후 양잠업은 조선 귀족들과 관련이 있다. 강점 이후 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해 조선인 들에게 부업의 활성화를 통한 수입 증대와 노동천시 풍습 제거를 주장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가내 양잠업 경영을 제시하였다. 그러고 여기에 조선 귀족들이 솔선하여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하였다. 조선 귀족들은 일제가 지향하는 바대로 조선의 산업을 진흥시키는 동시에 일반 조선인들에게 노동의식 및 부업을 제공하기 위해 양잠에 대한 관심과 경영을 기울였다. 이용직을 비롯한 몇몇 귀족은 이곳에서 잠아(蠶兒)를 배포 받고 기구를 차용하여 사육을 개시하였다. 조선 귀족들은 양잠 기술을 일반에 전파하여 부업을 꾀하게 하는 잠업 전습소도 설치하였다. 이는 송병준의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본금 4만원을 모아 경성에 1911년 4월 최상돈을 소장으로 일본인 요시다를 감독으로 하여 양잠과에서 수업한 사람들을 직원으로 꾸린 한성잠업전습소를 설치하였다. 한편 양잠기술을 보급을 위하여 일본 군마현의 농민 10여명을 경기도 고양군 하도면 난지도에 이주시켜 잠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1911년 3월에는 야마구치현의 2개 가정을 경성 북부 연희방 휴암리에 이주시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직접 경영 외에 송병준은 지방에서의 양잠 확대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11년 12월 개성에서 잠업협회가 설립되어 양잠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것에도 일정한 지원을 하였다. 이와 같은 양잠을 위한 전습소 설치는 송병준의 활동에 그치지 않았고 이용직과 조중응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귀족이 직접 양잠을 하는 것은 인민에게 노동과 식산을 직접 행하는 모범을 보이는 효과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 도모라는 측면도 분명 존재했다(SYY, 2005, p. 43).
1912년 10월 12일 사설인 <상묘잠종의 개량>에서는 뽕나무 묘목을 일본에서 들여와 조선의 뽕나무를 개량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김구(1876~1949)가 쓴 『백범일지』에서도 대한제국 시기부터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일본에서 뽕나무 묘목을 들여온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번은 군수 윤구영(尹龜榮)이 나를 불러 해주에 가서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보내는 뽕나무 묘목을 찾아오는 일을 맡겼다. 수리(首吏) 정창극(鄭昌極)이 나를 군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이백량 노자를 타 가지고 걸어서 해주로 갔다. 말이나 교군을 타라는 것이지 마는 아니 탔다.
해주에는 농상공부 주사(主事)가 특파되어 와서 묘목을 각 군에 배부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노라고 일본으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실어 들여온 것이다. 묘목은 다 마른 것이었다. 나는 마른 묘목은 무엇하느냐고 아니 받는다고 하였더니 농상공부 주사는 대노하여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나도 마조 대노하야 나라에서 보내시는 묘목을 마르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한다고 하고 관찰부에 이 사유를 보고한다고 하였더니, 주사는 겁이 나는 모양이어서 날 더러 생생한 것으로 마음대로 골라가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산 묘목 수천 그루를 골라서 말께 싣고 돌아왔다. 노자는 모도 일흔 량을 쓰고 일백 설흔량을 정창극에게 돌렸다. 나는 집[짚]세기 한 켜레[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이 모양으로 돈 쓴 데를 자세히 적어서 남은 돈과 함께 주었다. 정창극은 그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야, “사람들이 다 선생 같으면 나라 일이 걱정이 없겠소. 다른 사람이 갔더라면 적어도 이백량은 더 청구했을 것이오” 하였다.3)
(Kim, 2016[1947], pp. 175-176)
1919년 5월 1일에는 조선에서 잠업령이 시행되었다. 잠업령은 조선총독부제령 제10호로, 1919년 4월 24일에 제정되었고, 1961년 12월 27일에 대한민국 법률 제883호로 폐지되었다가 다시 1971년 제정된다.4) 잠업령의 기본 골자는 견사의 생산증가, 품질 개선을 통해 부유해지기 위해 누에의 종류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2) 면작(棉作)
면작은 목화 농사를 의미한다. 강제병합 이전부터 삼남(三南: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총칭)에는 목화의 산출지라 하여 목화재배협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일천오백 정보(町步)에 목화가 시험적으로 파종되어 조선 남부지방이 목화 농사에 적합한 지역임이 입증되기도 하였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면이 있었다. 문익점이 원으로부터 가지고 들어와 조선시대 내내 백성들을 따뜻하게 입혔던 면 종자였다. 일제는 그 아시아 면 종자를 재래면으로 규정하고 육지면 종자를 들여왔다. 1905년 일본영사 다카마쓰(高松)는 육지면을 전라남도 고하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경기도 이북에서는 주로 아시아면이 재배되었고, 경기도 이남에서는 육지면이 재배되었다. 특히 전라남도, 경상북도, 평안남도, 황해도가 주산지였다.
1912년 9월 20일 사설인 <조선의 면작(棉作)>에는 황해도 해도청에서 실시한 면화 시험 수확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장래 수확량을 파악하기 위해 2,332,048 관내(貫內)에 재래면을 12,840 정보, 육지면이 6,228정보, 합계 19,070정보에 심었다고 하였다. 지난해에 비해 육지면을 재배하는 면적이 2,246.5 정보 늘었다고 한다. 사설에는 조선 전도의 면을 육지면으로 개량할 때에는 면의 산출량은 가히 볼만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특히 전남을 면산지로 만들면 일본 본토에서 인도면과 아메리카 면을 수입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설 이후 1913년까지 조선에서 면 종자의 개량이 이루어져 육지면으로 대부분 개량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916년에 연재된 <조선(朝鮮)의 면화(棉花)와 급(及) 마류(麻類)>와 <조선의 기직업(機織業)> 사설을 통해 조선에서 산출한 면화로 면직물까지 생산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Table 4>.
(3) 마(麻)
마 관련 사설에는 대마[삼]와 저마[모시] 상품의 개량 및 청마(靑麻)의 이용 내용이 포함되었다<Table 5>. 이 모두는 외지에 수출을 하기 위함이었다. 1913년 2월 2일 사설인 <마포제법(麻布製法)의 개량(改良)>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조선 각지에 다양한 종자의 마(麻)가 많아 매년 다량을 산출하나 마포제법이 불완전하여 외국에 수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마포의 제법에 이름이 알려진 곳은 함경도다. 수만리에서 서로 떨어진 거리의 외국 수공예자도 그것을 배우려고 하거든, 반도 내에서 한 가지 마포의 제법을 동일하게 못하니 어찌 크게 부끄럽지 아니하리오. 일반 종 마업(麻業)을 경영하는 자는 마포제법을 개량하여 상당한 수출품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Improvement of the making of hemp fabric' [마포제법의 개량], 1913)
마포 외에도 모시풀도 직물로 만드는 제작 방법을 개량할 것을 촉구하였다. 1912년 12월 15일 사설인 <저포(苧布) 개량의 성적>에 의하면 모시는 조선의 특산이라 하여 조선 의복 중 귀중한 것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근래에 들어 개량이 거의 없어 점점 그 진가가 묻히고 있다고 하였다.
(4) 가죽
1910년대 가죽 제조 관련 사설 제목과 게재일은 <Table 6>과 같다. 소가죽이 개량의 대상이 되었다. 1913년 5월 27일 사설인 <우피(牛皮) 개량(改良)의 급무(急務)>에 따르면 당시 소가죽의 수요가 매년 늘어나고 있지만, 가죽을 벗기는 방법이 불완전하여 곳곳에 파손된 흔적이 있고, 또 살점이 붙어있어 가죽처리가 온전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게다가 가죽에 습기를 차게 하여 중량의 증가를 꾀하는 나쁜 관습까지 있어 당국에서 이점에 유의하여 소가죽의 개량을 도모한다고 하였다. 또한 지방마다 가격이 일정하지 않은 점도 소가죽 개량 요건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소가죽은 러시아로 수출되는 효자 상품이었다. 소가죽의 수출로 인하여 소고기 값이 싸져 조선인들이 소고기를 싸게 사 먹을 수 있었다.
자랑할 만큼 외국에 수출하는 물품이 없는 조선에서는 다만 아라사[러시아]로 나가는 소가죽이 세나는[잘 팔리는] 까닭에 우육이나 싸게 얻어먹은 이외에는......
('Soaring price of the general goods' [폭등하는 일용품목], 1916)
(5) 직물업
1910년대 직물업 관련 사설 제목과 게재일은 <Table 7>과 같다. 이 중 1913년 4월 24일 사설인 <조선의 직물>에서 ‘유행’이라는 단어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일본이 자본을 투자하고 조선인이 경영하는 조선 직물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앞으로는 조선 직물로 만든 옷을 입기를 권유하는 사설이다.
(6) 공예, 가정수예, 조선 부인의 부업
공예, 가정 수예를 포함하여 조선 부인의 부업을 내용으로 하는 사설의 제목과 게재일은 다음 <Table 8>과 같다. 이 주제의 사설을 모아 본 결과, 모두 1913년에 실린 것을 알 수 있었다.
1913년 5월 9일 사설인 <조선부인(朝鮮婦人)의 부업(副業)>에 따르면, 당시 조선부인들의 ‘영업사상(營業思想)’이 발전하고 점차 변하고 있었다. 경성(京城) 사대문 바깥의 중류이상의 부녀(婦女) 중 직조(織造), 조화(造花), 자수(刺繡) 등을 견습(見習)하고, 또 잠업강습소에 들어가서 강습 받는 숫자가 약 60여명에 달하였고, 이들은 꽤 높은 수입을 올려 가계에 보탬이 되거나 “남자(男子)의 보조(輔助)”가 되고 있었다. 1913년 8월 14일 사설인 <조선부인의 근로>에서는 “양수건(洋手巾)”의 수입이 급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건 제작 직기를 마련할 것이며, 조선 부인들이 이 사업에 동참해주기를 독려하고 있다.
(7) 표백업
표백업과 관련된 사설은 1건으로, 제목과 게재일은 다음 <Table 9>과 같다.
1914년 5월 10자 사설인 <표백업의 주의>에서는 양회(洋灰: 수산화나트륨)를 사용하는 표백업자가 광택을 쉽게 내기 위해 표백 후 양잿물을 물에 충분히 헹구어 내지 않고 직물을 바로 세척, 건조하고 있어 직물에 손상을 주고 그 직물로 옷을 지어 입는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입힌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조선의 명산인 모시같은 귀중한 직물을 양회로 표백했을 때 양잿물 안에서 소융(消融: 사라져 녹아버림)이 큰 것은 과연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다.
직물을 전통 잿물에 삶고, 물속에서 헹구어내며 햇빛을 쐬어주는 과정은 직물을 알칼리성을 띄게 만들어 섬유의 손상을 적게 한다. 그러나 양회의 수용액인 양잿물은 일시적인 광택을 좋게 만들지만, 직물을 산성을 띠게 만들고 표백과정 중에 섬유조직을 상하게 만든다. 1910년대 양회가 들어와 전통 잿물 표백업자와 양잿물 표백업자가 대결하던 구도를 반영한 사설이라 하겠다.
풍속 개량 관련 사설의 제목과 게재일은 <Table 10>과 같다. 풍속개량 관련 사설은 1910년 4회, 1911년 7회, 1912년 4회로 꾸준히 실려오다 1915년 이후 사라졌다가 1918년에 다시 4회가 발견되는데, 1918년의 사설은 모두 춘원 이광수의 <신생활론> 연재 사설에서 발견하였다.
풍속 개량과 관련된 복식사설에서는 외관의 허식에 치중하는 조선인들의 유교적 사상을 비판하며, 자신의 생활의 정도에 맞는 복식을 착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허식의 악습 타파 (<허식의 악습을 타파할지어다>, 1910년 10월 23일 사설), 착용하기에 불편한 장의 폐지(<부녀의 장의>, 1911년 1월 24일 사설, <부인의 의제>, 1911년 6월 4일 사설), 남성의 머리 단발과 의제 개량(<단발과 의제(衣制) 개량에 취(就)하여>, 1910년 9월 8일 사설), 환고(紈袴) 착용에 대한 경고(<警告紈袴子>, 1911년 1월 28일 사설) 등 조선인들이 이전부터 착용해왔던 복식을 문명생활에 맞도록 개량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춘원 이광수가 1918년 연재한 사설인 <신생활론>에서는 당시 착용했던 개량된 복식이나 조선시대 복식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치 경계를 내용으로 하는 사설의 제목과 게재일은 <Table 11>과 같다. 귀족, 조선의 양반계층, 학생, 부녀자를 대상으로 사치 경계를 유도하였다. 1919년 12월 4일 사설에 농부의 사치를 경계하는 사설이 등장하였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5년부터 쌀값 인상이 본격화되어 농민들이 부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Fig. 3>. 사치 경계를 다루는 사설에서 언급된 사치품으로는 능라, 견직물, 모융과 같은 직물로 만든 옷과 금시계, 양복모자 등의 악세사리류였다. 사설의 어조는 “사치의 폐해를 논하여 사회의 각성을 촉구”와 같은 슬로건류의 서술이 주를 이루었다.
위생증진을 내용으로 하는 사설의 제목과 게재일은 <Table 12>와 같다. 식민지 조선에서 1910년대 위생 정책은 보건 의료의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풍속 개량이나 도덕적 교화의 측면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불결하고 미개한 조선인에게 위생은 위생 관념을 돈독히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 의무사항이었다. 1910년대 위생문제의 실천항목은 청결(의식주 청결, 우물정비, 도로청결), 청소, 쓰레기 처리, 공동변소 설치 및 운영, 방역, 수도 개설, 운동 및 규칙적인 생활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개인이 지켜야 할 위생의 내용. 청결.이 가운데 당국이 일찍부터 강조하고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것은 청결이었다.
위생으로 분류되는 기사에서는 “의식(衣食)의 위생이 중요하다”는 슬로건 아래, 위생에 대한 범위를 개인에서 국가, 인류로 확대하는 면모를 보였다(<위생강화 4: 개인의 위생 5>, 1918. 2. 20.) 위생에 관한 기사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7월 정도의 여름에 특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과 옷의 청결과 함께 의식주 모두의 청결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식(衣食)의 위생이 중요하다” 는 식으로 위생과 관련하여 복식을 따로 다룬 사설은 없었다.
Ⅳ. 결론
본 연구에서는 1910년대 매일신보 의생활 관련 사설의 내용 분석을 통해 1910년대 강제 병합 이후에 이루어진 급격한 의식과 세계관의 전환이 의생활과 관련하여 어떤 방향성을 띄면서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 1. 1910년 8월 30일부터 1919년 12월 31일까지 10년 동안 매일신보에 게재된 4275개의 사설 중 3인의 연구자에 의하여 판단표집된 복식 관련 사설은 138개였다.
- 2. 1910년대 사설 중 복식 관련 사설은 1911년과 1913년에 각각 27, 26개로 가장 많았으며, 1914년 1915년, 1917년과 1918년 사이에 사설 개수가 급감하였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복식 관련 정책 보다는 국제정세에 대해 사설에서 더 많이 다루어 졌기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 3. 사설을 내용 분류하여 주제별로 유목화한 결과, 138개의 사설 중 68.1%인 94개가 산업진작에 관련된 것이었고, 풍속개량은 14.5%(20개), 사치경계 12.3%(17개), 위생증진 5.1%(7개)로 분류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910년대 매일신보의 의생활 관련 사설 내용은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식민주의적 관점을 관철하고 있었다. 주요내용들은 산업을 일으키고, 풍속을 개량하며, 사치를 경계하고, 위생을 증진시키는 내용으로 크게 요약되었다. 산업진작 관련 사설은 크게 양잠, 면, 삼베, 방적/방직업 관련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조선의 기초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풍속과 관련된 복식은 외관의 허식에 치중하는 조선인들의 유교적 사상을 비판하며, 자신의 생활의 정도에 맞는 복식을 착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착용하기에 불편한 장의 폐지, 남성의 단발과 의제 개량, 환고 착용에 대한 경고 등 조선인들이 이전부터 착용해왔던 복식을 문명생활에 맞도록 개량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사치로 분류되는 기사에서는 학생, 부녀, 농부 등의 사치를 경계하는 기사들과 능라와 견직물, 모융과 같은 직물로 만든 옷, 금시계 같은 사치품을 착용하지 말자는 슬로건 식의 서술이 주를 이루었다. 위생으로 분류되는 기사에서는 “의식(衣食)의 위생이 중요하다”라는 슬로건 아래, 위생에 대한 범위를 개인에서 국가, 인류로 확대하는 면모를 보였다.
- 4.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진행된 1910년대 산업구조의 재편과 풍속 개량, 사치 경계, 위생 증진 등의 일련의 정책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경제 구조를 일본에게 유리하도록 재편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본 연구가 지닌 한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는 3명의 합의에 의해 복식 관련 사설이 판단표집 되었고 유목별로 분류되었다. 다른 연구자들이 이 연구를 수행했을 때 같은 사설이 선택되는지의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둘째, 사설의 질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하나의 사설에 복식이 얼마나 언급되었는지, 얼마나 가치있고 중요한 사설인지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사설의 개수보다는 하나의 사설에 복식이 얼마나 깊이 있게 언급되었는지가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사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1910년대를 바라보는 두 관점인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의 양가적 관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추후 연구를 통해 각 유목 분류에 속한 사설들을 심도 있게 분석하여 1910년대의 자세한 의생활 실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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