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巫黨來歷』의 巫堂 神格과 巫服 연구
Abstract
Mudangnaeryeok is a book describing 12 tunes of Hanyang Jaesu-Gud between 1885 and the 1920s and includes pictures and literature. This research examines shamans' costumes, which changed depending on the content of each tune of the ritual, and compares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shamans' costumes and ordinary costumes. The difference between shamans' costumes and ordinary ones is the way of Ye'mim; specifically, ordinary costumes are designed to wrap around one’s body by layering one front part onto another, while shamans' costumes are Hap'im making it easy to change during the ritual. In addition, Korean shamanism rituals and relevant costumes and tools are right-fitted for the divinity to express the figure of God possessing the Mudang and to give more visual stimulation to onlookers. For instance, sleeves that waved often were widely exaggerated and the remainder of the clothing was minimized for practical use. Chosun was a country based on the idea of the yin-yang and the Five Elements, and the colors of ordinary costumes and shamans' costumes were chosen within this context. Jangsam, meaning “the feast of the heaven,” is white (symbolizing sky), and Cheolic, a military uniform of civil and military functionaries, is blue or red depending on the divinity of the Gud-Gery‘s shamanism ritual. Other than these, lower divinities were represented using neutral tints instead of the Five Elements colors. Because Chosun used costumes to represent each social class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yin-yang and the Five Elements, the easiest way to express a specific figure was to use the costume color stipulated in the rule for Mudang. Therefore, anyone can see that shamanism costumes are still similar to, but also simultaneously different from, ordinary costumes, and they are still the kind of clothes that are liberal but systematically framed.
Keywords:
Mudangnaeryeok, shaman's costume, costume, divinity, Jaesu-Gud키워드:
무당내력, 무복, 복식, 신격, 재수굿Ⅰ. 서론
19세기 한국에 온 미국인 선교사 호머 베잘렐헐버트는 “대체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를 따르고, 철학적 생각을 할 때는 불교신자가 되며, 골칫거리가 생기면 무속을 숭배한다.”1)고 했다(Hulbert, 1969, p. 403f). 이와 같이 한국의 무속은 유ㆍ불교와 함께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중요한 민족신앙이다.
무속의 가치는 1980년대 굿이 무형문화재에 지정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는 굿이 더 이상 단순한 무속신앙의 제사가 아닌 오랜 기간 동안 우리역사를 거치며 당대의 복식ㆍ노래ㆍ음악ㆍ춤 등 다양한 예술문화들이 복합적으로 포용된 한민족(韓民族) 문화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때마다 전국 각 지방에서는 굿 행사가 개최되는데 무당은 음식[祭床]을 차려놓고 가무(歌舞)하며 굿을 진행한다. 이때 무병으로 신내림 받아 무업을 하는 강신무(降神巫)는 굿하는 동안 강신을 통해 자신의 몸에 신을 초대하므로 무당은 초청된 신의 성격에 맞는 차림으로 환복(換服)하며 굿을 거행한다. 즉, 무속제사인 굿에서 복식은 각 거리마다 적합한 신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무당에게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이러한 무복은 낡고 상해도 세탁이나 수선하지 않고 소각 후 새로 제작하므로 전대(前代)의 무복을 보기란 쉽지 않다. 『무당내력』(NanGok, n.d.)은 조선시대 한양지역 재수굿의 진행을 순차적으로 그림과 글로 기술해놓은 서적으로 무속신앙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이다(Choi, 1981). 특히 각 거리별로 변하는 무복(巫服)과 함께 무구(巫具) 및 상차림[祭床]까지 시각화 하였으며 작가의 비판적 의견도 아울러 기록해 무속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까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당내력』에 그려진 굿거리는 한양의 재수굿으로 『무당내력』은 ‘古’본과 ‘가람古’본으로 총 2권으로 정확한 제작 년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민속을 연구하는 다양한 분야의 선학들에 의하여 현재 제작시기의 범위가 좁혀지고 있다. ‘古’본의 서문에 을유중춘난곡(乙酉仲春蘭谷)이라 쓰여 있어 을유년 음력2월에 난곡이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별성거리의 설명 중 사도세자배행(思悼世子陪行)이란 글을 보아 사도세자 사망 후 을유년인 1825년 또는 1885년으로 제작범위가 좁혀진다. 또한 『무당내력』에 그려진 복식의 형태를 보았을 때 복식간소화가 시행(1884년)된 이후로 ‘古’본은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람古’본의 경우 1909년에 사용된 물품출납 기록장을 반대로 접어 이면지를 활용한 것이 밝혀지고(Seo, 2015), 현재 서울 재수굿에 있는 ‘대감거리’가 『무당내력』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카이브(archive)에서 ‘대감거리’가 검색되지 않는 1930년대 이전의 자료로 볼 수 있어(Lee, 2017) ‘가람古’본은 1910~1920년대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무당내력』관련 선행연구는 굿거리, 무속역사, 단군, 무복(巫服), 무구(巫具), 무가(巫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가 있다. 그중 『무당내력』에 나타난 복식의 선행연구는 ‘무당내력에 나타난 무복의 형태 및 색채 연구(Joe & Joe, 1997)’, ‘현대진오기굿 무복과 형태 및 종류 비교(Park, 2003)’, ‘무복의 유형별 색채 분석(Bang, 2007)’이 있다. 이외 무복 선행연구는 대부분 현지조사를 통한 무복 서술이 대부분이이며, 『무당내력』이 무복연구의 귀중한 기초자료 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무격과 복식의 심도 있는 연구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현재 무복의 기준점이 되는 『무당내력』 속 무복연구를 위하여 각 거리별 내용, 무당의 신격, 무복종류를 살펴보고, 당시 일반복식과의 조형성 및 착용방법을 비교하여 무복만의 고유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Ⅱ. 『무당내력』의 거리별 내용 및 무당의 신격
『무당내력』의 판본은 古본과 가람古본이 있으며 고본은 종이에 모시를 배접해 붓으로 그림과 글을 쓴 필사본으로, 그림을 그리고 남은 여백에 굿거리 명칭과 뜻을 기록했다(Seo, n.d.).
그림은 치마 주름과 속옷까지 자세히 그린 것을 볼 수 있는데, 무당의 모습은 <Table 1>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양팔을 벌리고 양손에 무구를 들고 있다. 이는 <Fig. 1>, <Fig. 2>와 같이 종교지도자들의 동작과 유사한 모습으로, 신의 위엄과 힘을 표현하기 위한 행위이며, 또한 이 자세는 복식을 기록ㆍ확인하기 유리한 모습이기에 양팔을 벌린 무당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무당이 착용한 포(袍)의 양옆 밑단을 삼각형으로 들어가게 그리거나, 장삼·철릭·치마와 같이 직물의 여유가 많은 옷은 하단에 대각선 주름을 그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수직ㆍ수평의 선보다는 사선이 역동적, 입체적으로 보이므로 이러한 복식모습을 통하여 굿판에서 무가(舞歌)를 하며 신의 에너지를 표출하는 무당모습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가람古본 역시 고본과 같으며 책의 크기와 종이 질에 차이가 있다.
『무당내력』의 굿거리별 거리순서는 다음과 같다. 古본은 감응청배(感應請陪), 제석거리(帝釋巨里), 별성거리(別星巨里), 대거리(大巨里), 호구거리(戶口巨里), 조상거리(祖上巨里), 만신말명[萬神萬明], 축귀(逐鬼), 창부거리(唱婦巨里), 성조거리 (成造巨里), 군웅거리(君雄巨里) 그리고 뒷젼 총 열두거리<Table 1>가 묘사돼 있다. 가람古본<Table 2>은 古본에 착용된 복식과 유사해보이나 굿의 순서가 상이하며, 성조거리는 보이지 않는다.
『무당내력』에 그려진 재수굿은 계절의 새로운 소산물을 신령에게 올리는 굿으로 가까운 사람을 초대해 잔치처럼 치르는 경사굿으로 인간과 신을 두루 대접하며 가정의 안녕과 길복의 염원이 담겨 있다. 재수굿은 한국 민속의 기본굿으로 서민층에서는 재수굿, 상류층에서는 천신굿이 불렸으며, 지역에 따라 경사굿ㆍ도신굿ㆍ성주굿ㆍ안택굿ㆍ신성굿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굿은 보통 무당 3∼4명과 악사 3∼4명이 진행하며 아침에 시작하면 이튿날 아침까지 놀았고, 저녁에 시작하면 다음날 저녁에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Lee, 2016).
이러한 굿은 지역과 무당마다 순서에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굿판을 정화하고, 여러 신을 청배후, 주요 신을 모시고, 액을 막고 복과 평안을 빌며, 끝으로 잡신을 풀어먹여 마무리’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여기서 신을 모셨다 돌려보내는 것은 유ㆍ불교의 제사와 유사해 보이나 유ㆍ불교의 경우 제사 중 주재자 복식이 교체되지 않지만 무속은 주재자인 무당의 복식이 각 거리마다 교체되므로 무속 제사에서 복식은 중대한 역할을 할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무당내력』‘古’본(NanGok, Seo, & Kyujanggak, 2005)을 중심으로 열두거리의 굿 내용을 살펴보고, 굿거리 순서에 따라 착용하고 있는 복식의 종류 및 착용요인을 알아보고자 한다.
▪ 감응청배(感應請陪, 속칭 산바라기): 감응청배는 속칭 산바라기라 하는데 ‘치성을 드릴 때 무녀는 태백산을 향해 백지를 들고 성령감응을 세번 외치는데 이를 단군 청배라 하고, 근래는 최장군 청배라 하여 본질을 크게 잃었다’2)고 쓰여 있다. 이러한 감응청배는 가망청배라고도 하는데 이 거리는 인간의 영역과는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신들을 인간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게 굿문을 여는 역할로 ‘가망’이란 무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신으로 가망이 먼저 청배되고 나서야 다른 신들이 굿판에 들어올 수 있다(Hong, 2005). 또한 속칭 산바라기라 하는 것을 보면 가망이 산신의 성격도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 제석거리(帝釋巨里): 제석거리는 ‘고구려 산상왕이 아들이 없어 단군에게 빌어 아들을 얻은 후 단군을 삼신제석이라 부르며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풍속이 생겼다’3)고 하였다. 이러한 제석거리의 제석은 굿에서 가장 먼저 모셔지는 신으로 고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것이 불교가 활발했던 통일신라를 거치며 하늘이 제석(帝釋)이란 불교명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Joe, 1998a).
▪ 별성거리(別星巨里): 별성거리는 ‘농사법을 가르쳐준 단군 신하 고시례에게 감사하여 단군을 청배하는데 이를 별성이라 하고, 최근 최장군 청배 때 사도세자를 모신다고 횡설수설 한다’4)고 쓰여 있다. 전대(前代) 서울굿의 별성거리는 『무당내력』에 적힌 글처럼 농사를 알려준 고시례에 대한 고마움으로 단군을 청배하는 거리였으나, 후대로 가면서 사도세자를 배행하는 굿거리라 하는 것을 보면 별성거리의 성격이 변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서울지역 굿에 나타난 별성은 무장(武將)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군신과 동일한 유형의 신이다(Lee, 2003).
▪ 대거리(大巨里, 속칭 최장군 거리): 대거리는 ‘단군 청배 후 소원을 비는데 예전엔 단군 복색을 입었으나 근래 최장군 복색을 한다’5)고 적혀 있다. 전대(前代) 서울굿의 대거리는 『무당내력』의 글처럼 단군을 청배하여 소원을 비는 거리였으나, 후대로 가면서 최장군 복색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면 청배하는 대상이 단군에서 최영장군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호구거리(戶口巨里): 호구거리는 ‘호구는 천연두신으로 치성드릴 때 아이에게 홍역이 순조롭게 오길 빌었으며, 최근에는 호구신이 최장군 딸 또는 첩이라는 망언이 극에 달한다’6)고 쓰여 있다. 이러한 호구거리의 호구는 마마(천연두)를 주관하는 신으로 무당은 호구신이 인간에게 탈을 부리지 못하도록 달래는 굿거리이다.
▪ 조상거리(祖上巨里): 조상거리는 ‘조상을 모셔 치성 시 뒷날을 알려주는데 이것은 무녀가 금품을 뜯기 위함이다’7)라고 쓰여 있다. 조상거리의 조상은 굿을 의뢰한 자의 조상신에게 후손들의 가정이 편안하도록 보살펴달라고 치성을 드리고 점지를 받는 굿거리이다.
▪ 만신말명[萬神萬明]: 만신말명은 ‘만신은 무녀인데 누군지는 모르며, 춤이 무녀의 근원을 말해 준다’8)고 쓰여 있다. 이러한 만신말명의 만신은 무당을, 말명은 조상을 뜻하는 말로 이는 무업(巫業)하다 죽은 무조(巫祖)신을 모시는 굿거리로 말명신은 큰 의미에서 사자(死者)를 의미한다(Lee, 2019).
▪ 축귀(逐鬼): 축귀는 ‘오색 깃발로 오방신장을 지휘해 잡귀를 퇴치하는데 최근 치병에 행해지며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른다’9)고 되어 있다. 이러한 축귀는 신장(神將)거리로도 불리는데 신장은 동ㆍ서ㆍ남ㆍ북ㆍ중앙의 다섯 방위를 수호하는 용맹한 장군의 성격으로 사람들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 입신양명을 도와주는 굿거리이다(Joe, 1998b). 축귀는 별성거리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제액(除厄)과 점복(占卜)의 기능을 담당한다(Lee, 2003).
▪ 창부거리(唱婦巨里): 창부거리는 ‘젊고 아름다운 무녀를 뽑아 한바탕 유희하며 돈을 받는 것으로 육십 년이래 차차 성행했다’10)고 쓰여 있다. 이러한 창부거리에서 무가(巫歌)인 창부타령 내용11)을 보면 여러 광대를 소개하며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일 년 열두 달 홍수[橫手]를 막아주도록 비는 굿거리이다(Kim, 1996).
▪ 성조거리(成造巨里, 속칭 셩주푸리): 성조거리는 ‘단군시절 매해 시월마다 무녀가 집지은 것을 축하했는데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하는 거리’12)라 쓰여 있다. 이러한 성조거리는 집을 수호하는 성주신에게 가족의 평안을 비는 굿거리로 가정과 그 구성원의 안녕과 생활공간을 관장한다(Lee, 2003).
▪ 구릉거리[君雄巨里]: 구릉거리는 ‘명나라 시절 사신이 출국할 때 무사히 돌아오길 빌었는데 이로 인해 치성을 드릴 때마다 거행하며, 돈을 백지에 싸 여행길 떠도는 귀신을 먹인다’13)고 쓰여 있다. 이러한 구릉거리는 군웅거리라고도 불리는데, 군웅(君雄)은 장군신 중 하나로 마을과 같은 일정 지역 또는 집단의 재앙을 막아 수호하는 역할을 하므로 마을의 액을 막는 굿거리이다(Choi, 1996).
▪ 뒷젼: 뒷젼은 ‘치성이 끝나고 잡귀를 풀어 먹여 안정시키는데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습속이다’14)고 쓰여 있다. 이러한 뒷젼은 현재 뒷전이라 하는데 앞서 열한거리의 본 과정에서 모셔진 중요신들 이외 제외됐던 여러 신들을 간략하게 불러들여 그 존재를 확인하는 거리로 모든 굿의 끝부분에 항상 존재하는 거리이다(Lee, 2003).
이상의 내용을 거리별로 청배대상과 의미를 정리한 표<Table 3>과 같다.
Ⅲ. 『무당내력』의 무당의 신격에 따른 무복종류
1. 감응청배
무당의 복식은 ‘녹색 장옷[長衣]’를 착복했는데 그 안에는 ‘주황색 저고리’와 ‘청색 치마’ 그리고 ‘백색 속옷’을 입고, 손에는 ‘백지’를 들고 춤을 추며 굿판의 부정을 없애고 신을 모신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귀신은 음이고, 신은 양이다(鬼也者陰之靈 神也者陽之靈)’이라 하여 귀신을 음양론으로 보았으며,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필원잡기』에서 ‘음양론에 의하면 귀신은 음성으로 남자보다 여자에게 잘 붙는다’하였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굿문을 열고 근원신인 가망을 굿판에 오도록 청하는 거리로 무당의 몸에 특정한 신이 강신된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당은 음성인 여자의 의복 중 당시 예복인 장옷을 저고리와 치마위에 갖춰 착복하고 근원신인 가망신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2. 제석거리
무당은 ‘백색 고깔’을 쓰고, ‘백색 장삼’을 착용하고, ‘붉은색의 대(帶)와 가사(袈裟)’를 둘렀으며, 손에는 ‘부채’와 ‘방울’이 들고 있는데 부채는 좋은 신을 불러들이기 위한 도구이며 방울은 접신을 알리는 역할로 이 두 가지는 무당의 기본 무구(National Cultural Properties Research Institute & Association for Korean Shamanistic Studies, 2005)이다. 제석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어진 하늘 임금이란 뜻으로 수명ㆍ자손ㆍ운명ㆍ농업 등을 관장하는 하늘의 성격을 갖는 신령이며, 불교에서는 도리천의 33신 중 32신을 통솔하는 왕이라 한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자손생산, 농경생산 등 생산을 관장하는 천왕(天王)의 성격을 갖는 제석신이 몸에 강신된다. 그러므로 무당은 하늘을 상징하는 백색의 불교복식인 고깔과 장삼을 착용하고 그 위에 붉은색의 대와 가사를 두른다.
3. 별성거리
무당은 ‘흑색 전립’을 쓰고, ‘동다리’를 착용하고, ‘청색 전대(戰帶)’를 띠었으며, 그 안에 ‘황색 저고리’와 ‘녹색 치마’, ‘백색 속옷’을 입었다. 양손에는 ‘월도’와 ‘삼지창’을 들고 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 제27권에 따르면 ‘현륭원 즉 사도세자는 평소 군복을 좋아한다(顯隆園平日好軍服)’고 하였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나라와 가정의 안정을 돌보는 별성신이 몸에 강신된다. 『무당내력』이 제작되던 당시에는 비운하게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신격화하였는데 별성거리에서는 사도세자가 신으로 추앙되어 무당은 평소 군복을 좋아했던 그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흑색 전립을 쓰고 동다리를 착용하며 청색 전대를 허리에 띠어 당시 군인복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4. 대거리
무당은 ‘주립’을 쓰고, ‘청색 철릭’을 착의하고, ‘붉은색 광다회’를 허리에 띠었으며, 안에는 ‘주황색 치마’와 ‘백색 속옷’을 입었다. 손에는 ‘월도’와 ‘삼지창’을 들고 있다. 1396년 10월 『태조실록』 10권에 ‘전 왕조 최영에게 시호를 주다(諡前朝侍中崔瑩)’이라 하여 최영장군에게 시호를 준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려를 수호하며 큰 공을 세운 최영(崔瑩, 1316~1388)장군에 대한 민중들의 존경심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거리의 상차림은 <Table 1>의 모습처럼 화려한 축에 속하여 중요한 신을 모시는 거리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무당은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 있던 최장군을 신격화하여 소원을 비는 대거리의 신으로 추앙했다고 생각되며, 무당은 최장군신이 몸에 강신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장군복식 중 형태와 직물이 가장 화려한 융복인 철릭에 호수(虎鬚)로 장식한 주립을 착용해 용맹하고 찬란한 최영장군의 모습을 표현했으며 복색 또한 당시 당상관 이상의 청색철릭을 착용한 것을 알 수 있다.
5. 호구거리
무당은 ‘황색 삼회장저고리’에 ‘붉은색 치마’를 착용하고 ‘붉은 면사’를 머리에서부터 덮었으며, 손에는 ‘부채’와 ‘방울’을 들고 있는데 무구에 달린황색 천은 굿을 할 때 무당의 손을 가리기 위함(National Cultural Properties Research Institute & Association for Korean Shamanistic Studies, 2005, p. 20)이다. 1668년 4월 『현종실록』 14권에 ‘팔도 전염병이 펴져 사람들이 죽는데 천연두와 홍역으로 죽은 자가 많다(道癘疫大熾 死者相繼 而以痘疫 紅疫死者尤多)’라는 기록 이외에도 천연두로 백성이 죽었다는 기록은 많다. 또한 강재항(姜再恒, 1689∼1756)은 『입재집』에서 ‘나의 군왕이 천연두를 순탄히 넘겨, 이는 억만년 무강할 좋은 징조이다(我聖上痘候順經 實萬億年無彊之休)’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조선시대의 천연두는 매우 무서운 전염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천연두를 주관하는 호구신이 몸에 강신된다. 무당은 당시 처녀를 상징하는 복장인 황색 삼회장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착용하고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다. 이는 시집도 안간 처녀가 천연두에 걸려 얼굴을 내놓고 다닐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이며, 호구거리가 끝날 때쯤 면사를 벗어 천연두가 완쾌되었음을 상징하는 행위를 한다. 조선시대에는 천연두에 걸리면 피부에 발진이 생겨 완쾌돼도 그 흔적이 남는데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예전에는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현재는 거의 시행하지 않는다.
6. 조상거리
무당의 복식은 古본은 ‘주황색 회장저고리’에 ‘녹색 치마’와 ‘백색 속옷’을 착용하였고, 가람古본의 무당은 ‘흑립’을 쓰고, ‘녹색 두루마기’를 착의했다. 손에는 무당의 기본무구인 ‘부채’와 ‘방울’이 들려 있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의뢰한 자의 조상신이 몸에 강신된다. 이때 어떤 조상이 무당의 몸에 모셔지는가에 따라 복식이 달라지는데, 古본의 경우 무당은 여자 기본복장인 치마ㆍ저고리를 착용하여 여자 조상신이 모셔진 것을 표현하였고, 가람古본은 당시 남자 기본복장인 흑립에 두루마기를 착용하여 무당의 몸에 남자 조상신이 강신되었음을 나타냈다.
7. 만신말명
무당은 ‘붉은색 잣물림 장식이 된 황색 몽두리’에 ‘적색 대’를 허리에 두르고, ‘청색 치마’와 ‘백색 속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부채’와 ‘방울’을 들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마을의 무당이 말명신을 받들어 백성들의 질병과 재앙이 있으면 빌어준다(村巫崇奉萬明神民有疾厄輒禱)’고 하여, 사람들의 안녕을 위한 굿거리임을 알수 있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여성으로 상징되는 그들의 조상인 말명신이 몸에 강신된다. 이때 무당은 평생 신을 모시며 살다간 자신의 조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당시 천민의 예복인 몽두리를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
8. 축귀
무당은 ‘흑색 전립’에 ‘동다리’를 착용하고, ‘황색 저고리’와 ‘녹색 치마’에 ‘백색 속옷’을 착용했으며, 양손에는 ‘오방신장기’를 들고 있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다섯 방위를 막아주는 수호 장군인 신장신이 몸에 강신된다. 신장신은 용감한 장군의 성격으로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청ㆍ백ㆍ적ㆍ흑ㆍ황색의 깃발을 들어 위세를 나타내며, 무당은 군복차림인 흑색 전립에 동다리를 착복하여 장군의 위엄을 표현하였다.
9. 창부거리
무당은 ‘주황색 회장저고리’에 ‘녹색 치마’와 ‘백색 속옷’을 입고, 그 위에 ‘흑색 전복’을 착의하였으며, ‘청색 전대(戰帶)’를 띠었다. 양손에는 무당의 기본무구인 ‘부채’와 ‘방울’을 각각 들고 있다. 창부(唱婦)는 『무당내력』에는 젊고 아름다운 무녀가 즐겁게 노는 거리라 하였고, 이능화(李能和, 1869∼1943)는 『朝鮮宗敎史』에서 무당이 소리나 노래를 하며 관객에게 별비(別備)를 받는 거리라 했으며, 아카마쓰지조(赤松智城, 1886~1960)와 아키바다카시(秋葉隆, 1888~1954)는 『朝鮮巫俗の硏究』에서 강신되지 않은 기예무당이 창부 한다고했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치마와 저고리 위에 전복만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습은 조선시대 검무(劍舞)를 추던 기생과 동일한 복장이며 신복(神服)으로 상징되는 포(袍)를 미착용한 것으로 창부거리에 그려진 무녀는 기예무당이므로 저고리와 치마 위에 전복만 착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10. 성조거리
무당은 ‘흑색 립’을 쓰고, ‘녹색 두루마기’를 착의했으며, ‘청색 치마’와 ‘백색 속옷’을 착용했다. 손에는 ‘부채’와 ‘방울’을 들고 있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남성으로 상징되는 집을 지켜주는 성주신이 몸에 강신된다. 집안의 평안과 안정[安]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무당[女]은 흑립[宀]을 쓰고 굿을 한바탕 놀며 이를 상징하는데 『무당내력』의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남성신인 성주를 표현하기 위해 무당은 당시 남자들의 대표적인 복장으로 이를 표시하고자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므로 그림 속 협수포(夾袖袍)는 조선말기 복식간소화가 시행(1884)되고 칩거 시에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착용한 남자들의 대표 포(袍)인두루마기를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11. 구릉거리
무당은 ‘주립’을 쓰고, ‘홍색 철릭’에 ‘청색 광다회’를 띈 모습으로, 古본은 손에 ‘부채’와 ‘동전을 싼 백색종이’를 쥐고 있으며, 가람古본의 경우 종이대신 ‘방울’을 들고 있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지역 또는 집단을 지켜주는 장군인 군웅신이 몸에 강신된다. 그러므로 무당은 장군복식 중 형태와 직물이 가장 화려한 융복인 철릭에 호수(虎鬚)로 장식한 주립을 착용하였는데, 당시 당하관의 복색인 홍색철릭을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대거리의 최영장군신과 구릉거리의 군웅신이 굿에 모셔지는 같은 신이지만 신격에 따른 높낮음이 존재하므로 복색에서 이를 달리 표현하여 착용한 것을 알 수 있다.
12. 뒷젼
무당은 ‘주황색 저고리’에 ‘녹색 치마’와 ‘백색 속옷’을 입고,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띠었으며, 양손에는 ‘북어’를 들고 있다. 이 거리에서 무당은 특정 신을 자신의 몸에 강신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당은 당시 여자의 기본복장을 하고 뒷젼을 진행하는데, 이는 앞서 언급했듯 귀신이 음성인 여자에게 잘 붙는다 하였기에 무당은 성별[巫女, 搏受]과 상관없이 귀신이 잘 붙을 수 있도록 음성인 여자를 상징하는 치마ㆍ저고리를 기본복식으로 착용한다.
위의 열두거리에 나타난 무복(巫服), 무구(巫具), 신격(神格)을 <Table 4>와 같이 정리하였다. 착용된 것에는 ●표시를 했으며, 古본에만 보이는 것은 ◖, 가람古본에 보이는 것은 ◗표시를 했으며, 보이지는 않으나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에는 ○표시를 하여 구분했다. 대거리와 뒷젼의 저고리∙치마는 古본과 가람古본의 복색이 달라 좌우로 분류하여 표시하였다.
Ⅳ. 『무당내력』의 복식 조형성 및 착장방법의 특성
본 장에서는 『무당내력』에 보이는 복식인 장삼, 철릭, 동다리, 전복, 두루마기, 장옷, 몽두리, 저고리ㆍ치마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고 당시 일반복식과 조형성 및 착장방법을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1. 장삼(長衫)
장삼은 제석거리에서 무당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그 일습은 백색 고깔, 백색 장삼, 붉은색 대(帶)와 가사(袈裟)이며 이는 승려의 복장과 같다. 장삼은 불교에서는 승려의 법복(法服)이고 궁중에서는 왕실 비ㆍ빈부터 나인까지 착용했던 예복이다. 승려의 장삼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며 개조된 옷으로, 불교사전에는 ‘소매가 매우 넓고 허리에 여분을 두고 큼직한 주름을 잡은 승복으로 윗옷인 편삼(偏衫)과 아랫도리인 군자(裙子)를 합쳐 꿰맨 옷’(Kwak, 2003)이라 쓰여 있다.
무녀 장삼에 대한 기록은 숙종 27년 역모 죄를 실토한 자근례의 기사15)에 나와 있는데 ‘큰 무수리 나인 서씨가 흰색 명주[白絹]로 만든 장삼을 갖고 와서 제석을 위해 춤을 추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제석거리에서 백색 장삼의 착용은 이미 예전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병인(1866) 2월 『온산 송악별기도(松岳別祈禱) 발기』에도 무복장삼에 대한 기록16)이 있는데 가늘게 짠 삼베 50척으로 만든 장삼과 다홍색 비단 6척반굴의 허리띠라는 기록으로 사이즈가 매우 큰 포(袍)임을 알 수 있다.
무녀 장삼<Fig. 26>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리원판목록집』에 1911년 장삼을 착용한 무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동시대 승려 장삼<Fig. 27>은 영국 외교관이었던 해밀턴(Angus Hamilton, 1874~1913)의 저서인 『Korea』라는 책에 1904년 승려의 모습이 있는데, 두 장삼 모두 철릭과 같이 상ㆍ하이부식(二部式)으로 제작된 대수포(大袖袍)임을 알 수 있다. 무녀 장삼의 경우 『무당내력』에 그려진 무녀<Fig. 4>, <Fig. 15>과 같이 장삼의 길이가 발등까지 길고, 소매길이 역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긴 것을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승려장삼은 품과 길이가 전체적으로 작은데 특히 소매길이와 폭이 무녀 장삼에 비하여 짧고 좁아 활동성을 고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사의 형태도 승려의 본래 직사각형 가사와는 달리 무녀 가사는 허리대(帶)와 같은 너비로 제작하며 이를 어깨에 대각선으로 띠어 가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무녀는 굿에 착용되는 여러 의복들을 겹쳐 착용했기 때문에 장삼의 상(裳)부분이 서양의 버슬(bustle)처럼 부피감이 있다.
착장방법은 크게 차이가 없으며, 복색은 승려장삼의 경우 흑색, 회색, 소색 등 다양한 무채색의 장삼을 볼 수 있지만 무녀 장삼은 백색만을 착용하는데 이는 제석이 천제(天祭)의 불교식 용어로 하늘 또는 단군을 상징하므로 제석거리의 장삼은 백색으로 제작하여 착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2. 철릭(帖裏)
고려 때 원나라에서 들어온 철릭은 대거리, 구릉거리에서 무당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그 일습은 호수(虎鬚)로 장식된 주립, 청색 철릭에 붉은색 광다회 또는 홍색 철릭에 청색 광다회이며 이는 군인의 융복과 같다. 이러한 철릭은 앞서보았던 장삼과 같이 상의하상(上衣下裳)을 허리에서 연결한 원피스형의 남자 포로 첩리(帖裏, 貼裏)ㆍ천익 (天翼)으로도 불린다. 철릭은 군사들에게 융복으로 착용17)18)19)20)됐으며, 초기에는 『악학궤범』에서 볼 수 있듯 소매가 좁고 상의(上衣)가 길게 제작되었으나 이후 상하비율, 하상의 폭, 소매너비가 변하여 후기21)에는 옛 제도와 달리 소매를 비단폭 그대로 사용할 정도로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말기 군인 철릭은 소매가 길고 넓어진 탓에 매듭단추를 달아 실용적으로 탈착할 수 있도록 제작했는데 서울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산 김준근(箕山金俊根, 생물년도 미상)의 융복닙은 모양이란 그림<Fig. 29> 속 녹색철릭에서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무녀 철릭<Fig. 28>은 무라야마지준(村山智順)의 사진자료로 1920년대 철릭을 착용한 무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두 철릭 모두 상ㆍ하 이부식(二部式)으로 제작된 대수포(大袖袍)이다. 특히 무녀 철릭의 경우 길이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고, 소매길이 역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긴 것을 볼 수 있는데 비해 군인 철릭은 신발인화(靴)의 목까지 다 보이는 길이로 짧아 보행에는 지장 없지만 그에 비해 소매길이와 폭은 넓어 소매에 매듭단추를 달아 실용적으로 착용하였다. 또한 호수립의 패영(貝纓)도 군인의 경우 여러 번 묶어 길이를 짧게 만들어 착용했는데, 무녀의 경우 허리선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것을 볼 수 있으며 주립에 달린 끈도 묶지 않았다. 철릭 안에도 여러 벌 겹쳐 착복했기에 상(裳)부분이 버슬(bustle)처럼 부피감이 보인다.
착장방법은 모두 여미어 입지만 무녀 철릭은 깊이 여미지 않고 허리대로 고정하며 <Fig. 6>, <Fig. 16>의 청색철릭과 같이 앞자락을 젖혀 착용하기도 한다. 복색은 군인 철릭은 거둥 시 당하관은 홍철릭 또는 홍포(袍)를 착용했는데 순조34년22) 홍색철릭을 청색[靑苧]으로 바꿔 당하관에게 홍철릭을 금했으나, 헌종8년23) 어가를 시위할 때는 당하관이 다시 홍색철릭을 착용하도록 했다. 『무당내력』이 제작되던 당시 융복의 철릭제도는 당상관은 남색, 당하관은 홍색(Im, 1996)이었는데 굿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대거리의 최영장군과 같이 높은 신격을 표현할 때는 청색철릭을 착용하고, 그보다 낮은 구릉거리의 장군신을 표현할 때는 홍색철릭을 착용해 같은 신이지만 신격과 중요도에 따라 복색을 구분해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3. 동다리(同多里)
동다리는 별성거리와 축귀에서 무당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그 일습은 전립, 동다리, 전대(戰帶)이며 이는 군인의 군복과 같다. 동다리는 조선후기 군복으로 ‘동달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동을 달이다’는 말에서 만들어진 단어로 동이란 소매의 옛말로 소매를 섶ㆍ길ㆍ무와 다른 색으로 만든 것이 특징인 옷이다. 소매는 주로 붉은색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적색이 강인한 생명력과 가장 강한 벽사의 의미(Lee, 2011, p. 62)를 갖고 있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길 염원했던 마음을 옷으로 제작할 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동다리는 소매가 좁아 협수(挾袖, 狹袖)라고도 하며, 소매를 두 겹으로 만들기 때문에 겹수(裌袖)로도 불렸다. 군인의 동다리는 당시 실용적이지 못하고 사치스러운 철릭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협수화(化), 실용성을 강조24)25)하며 착용됐음을 알 수 있다.
무녀 동다리의 기록은 『온산송악별기도(松岳別祈禱)발기』병인(1866) 2월 놉자오신 복식26)에 ‘천청망단협수’란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무복으로 착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동다리는 원래 전복(戰服) 안에 입는 중의(中衣)였으나 조선말기 갑신정변(1884)과 갑오개혁(1894)을 지내며 물자부족으로 복식이 간소화되고 동다리와 전복을 하나로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소매는 동다리의 특징그대로 두고 몸판은 전복처럼 직령의 깃이 사라지고 합임으로 제작했다.
『무당내력』의 제작시기 또한 古본은 1885년, 가람古본은 1920년대로 간소화된 동다리<Fig. 5>, <Fig. 10>, <Fig. 18>, <Fig. 24>를 착용한 무녀를 볼 수 있다. 이처럼 결합된 형태의 구군복은 경기 용인시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윤용구(尹用求, 1853∼1939)의 동다리<Fig. 20>로 확인 할 수 있는데 『무당내력』에서 무녀가 착용한 것과 색과 형태 모두 동일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의 구군복<Fig. 31>과 비교해보면 깃의 유ㆍ무로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착장방법은 군인 동다리의 경우 <Fig. 32>과 같이 앞길을 나란히 하여 전대로 고정하나 무녀는 <Fig. 5>, <Fig. 10>, <Fig. 18>, <Fig. 24>에서처럼 앞길을 젖혀 전대로 묶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굿을 하는 동안 환복(換服)을 하는 특성상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므로 의복의 착장형태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색은 군인과 무녀 동다리 모두 소매가 붉고, 몸판의 전복은 흑색으로 차이가 없다.
4. 전복(戰服)
전복은 창부거리에서 무당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그 일습은 전립, 전복, 전대(戰帶)이다. 전복은 깃이 없고 좌우대칭의 합임으로 동다리 위에 착의하던 옆과 뒤가 트인 옷으로 어깨너비가 좁은 것은 쾌자(快子)라고 한다. 고종21년27) 전복에 대한 명칭을 통일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반비의(半臂衣), 작자(綽子), 답호[搭護]같이 짧은 소매의 옷을 모두 포함한 개념으로 전복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물자료로는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의 전복<Fig. 33>이 있는데 이는 『무당내력』에서 보이는 무복 전복<Fig. 11>, <Fig. 23>과 형태와 복색에 차이점은 없다.
착장방법은 앞서 언급한 동다리와 마찬가지로 일반 전복의 경우 맞깃으로 가슴에서 여며 입었고, 무녀는 앞을 맞대지 않고 전대로 묶어 앞길을 뒤로 젖혀 착용했는데 무녀는 굿판에서 가무(歌舞)를 해야 하므로 옷자락이 행위에 방해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마무라도모(今村鞆, 1870~1943)가 촬영한 검무를 추는 기녀의 모습<Fig. 34>도 『무당내력』의 무녀와 같이 앞자락을 맞대지 않고 허리 대를 묶은 것을 볼 수 있으며, 기산 김준근의 기생검무추고라는 그림<Fig. 35>에서 기녀가 전복을 뒤로 젖혀 옷자락을 아예 묶은 것을 볼 수 있다.
5. 두루마기(周衣)
두루마기는 성조거리와 조상거리에서 무당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그 일습은 흑립, 두루마기이며 이는 조선시대 남자의 평상복과 같다. 두루마기는 포의 자락이 두루 막혔다는 뜻의 ‘두루막이’에서 나온 말로, 주의(周衣)ㆍ주막의(周莫衣)ㆍ주차의(周遮衣)라고도 하며 현재 한복의 오버코트(over coat)로 통용된다.
두루마기는 조선 사대부들이 칩거 시에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착용했던 옷으로 고종 21년(1884) 의복개혁 때 광수(廣袖)의 중치막과 도포 등이 금지되며 현재까지 한복의 대표적인 포로 남아 있다.
조선후기 남자 두루마기 형태는 이연응(金德遠, 1818∼1879)의 복식유물<Fig. 36>과 일제강점기 기록사진<Fig. 37>에서 착용모습을 볼 수 있는데 착수(窄袖)에 직령교임의 포로 『무당내력』에서 무녀가 착용한 두루마기<Fig. 12>, <Fig. 20>와 비슷한 형태이다.
착장방법은 전복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 남자의 경우 앞섶을 교차해 여미고 세조대를 허리에 띤 것을 볼 수 있는데 무녀의 경우 노래와 춤을 추기 위하여 저고리와 치마가 보일정도로 앞자락을 젖혀 착의한 것을 볼 수 있다. 복색은 무녀 두루마기의 경우 『무당내력』에는 간색인 녹색을 착용한 것으로 나타나며, 일반 남자의 경우 초상화나 풍속화에서 다양한 색상의 두루마기를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
6. 장옷(長衣)
장옷은 감응청배에서 무당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그 일습은 장옷, 저고리ㆍ치마이며 이는 조선시대 부녀자의 외출복과 같다. 장옷은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외출할 때 옷깃으로 얼굴을 감싸 가렸던 포(袍)형태의 쓰개로 깃과 고름은 주로 붉은색이며 소매 끝에는 백색 한삼을 다는 것이 특징이다.
장옷에 대한 내용은 『조선여속고』에 나와 있는데 ‘평민의 처는 장옷을 썼다. 장옷은 녹색 명주로 지은 긴 옷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는데 종아리까지 내려온다. 장옷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기록에 없어 알 수 없다’(Lee, 1988)고 쓰여 있다. 조선 초기 평민의 부녀자가 사용했던 장삼은 후기로 갈수록 양반의 부녀자도 쓰고 궁중유물로도 남아 있어 여성들에게 전반적으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무녀가 착용한 장옷<Fig. 3>, <Fig. 19>은 당시 부녀자의 장옷<Fig. 38>, <Fig. 39>, <Fig. 40>과 형태와 복색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착장방법에 있어서 일반 장옷의 경우 <Fig. 38>, <Fig. 39>과 같이 얼굴을 깃으로 감싸며 쓰개용으로 사용되었으나 무녀의 경우 쓰개가 아닌 몸에 착용했다는 것이 차이가 있는데 이는 굿 행위를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7. 몽두리(蒙頭里)
몽두리는 만신말명에서 무당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그 일습은 몽두리, 붉은 대, 저고리ㆍ치마이며 이는 신분이 낮은 천녀(賤女)가 착용한 예복을 말한다. 몽두리는 서인(庶人)부녀부터 천례(賤隷)까지 착용 가능했던 예복으로, 몽두의(蒙頭衣)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무당 또는 궁중 무희가 착용한 옷이다.
몽두리에 대한 기록은 태종12년28)에 여성복은 존비구분 없이 옷을 착용하여 사치스러우니 4품이상 정처는 노의(露衣), 오(襖), 군(裙), 입모(笠帽)를 착용하고, 5품 이하의 정처는 장삼, 오, 군, 입모를 착용하되 노의는 불가하고, 서인부녀ㆍ여종ㆍ천민ㆍ노예는 명주[紬]나 모시[紵布]로 만든 몽두의를 쓰고 나사(羅紗: 두꺼운 모직물)와 단자(段子: 두꺼운 비단), 입모(笠帽), 말군(襪裙)은 불허해 존비구분을 하도록 상소를 올린 것을 보면, 당시 여성 예복은 노의, 장삼, 몽두리 순서로 등급이 낮아짐을 알 수 있다.
여성 예복으로서의 몽두리 유물은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으며, 무복의 몽두리 유물만 남아 있어 일반 몽두리의 형태와 복색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무당은 평생 신을 모시며 살다죽은 자신의 무조신(巫祖神)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천민계급이 착용할 수 있던 최고의 예복인 몽두리를 착용함으로써 굿을 참관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조신이 추앙받길 바라며, 그들의 넋을 최선으로 모시고 싶은 무당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착용방법은 황색의 몽두리를 붉은 허리대로 고정하고 앞자락은 치마가 보이도록 벌려 착의하여 이 또한 행동에 제약을 주지 않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복색은 황색 몽두리를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방울에 달린 노란색 천과 오방신장기의 황색깃발이 조상을 상징(Joe, 1985)하므로 조상과 관련 있는 말명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8. 저고리ㆍ치마(襦ㆍ裙)
저고리ㆍ치마는 모든 굿에 기본복식으로 착용되며, 겉옷이 없는 호구거리, 조상거리, 뒷젼에서 볼 수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 여자의 기본복장이다. 저고리는 포보다는 짧은 상의로 유(襦)ㆍ의(衣)ㆍ삼(衫)ㆍ오(襖)ㆍ위해(尉解)ㆍ적고리(赤古里)ㆍ동의대(胴衣襨) 등 다양한 이름이 있으며, 하의인 치마는 상(裳)ㆍ군(裙)ㆍ적마(赤亇)로 불렸다.
조선시대 저고리 형태는 중기까지 길이가 허리까지 내려왔으나 이후 점차 짧아져 『무당내력』이 제작되던 당시에는 가슴까지 짧아졌으며, 그에 맞춰 치마 또한 말기위치가 허리에서 가슴으로 올라갔다.
조선시대에는 옷의 색깔을 정할 때는 음양오행에 맞춰 선택했는데 예를 들어 표의(表衣)와 내의(內衣)를 서로 상생되는 색을 사용한다거나 또는 옷에서의 배색을 상생 또는 상극으로 조화롭게 배치한다거나 하는 등 이러한 음양오행의 이론은 조선시대 모든 생활에 적용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복색으로 자신의 지위도 표시했는데 미혼녀의 경우 호구거리의 무녀<Fig. 7>, <Fig. 17>처럼 황색저고리에 홍색 치마를 착용했으며, 새신부는 녹색저고리에 붉은색 치마를, 부녀자는 주로 옥색 저고리를 입었다. 『무당내력』에 보이는 무녀는 호구거리를 제외한 모든 거리에서 주황색 저고리를 착용하였으며, 치마는 청색, 녹색, 홍색이 있는데 이는 재수굿을 진행하는 무당이 2명 이상이기 때문에 복색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착용방법은 제석거리, 호구거리, 구릉거리를 제외한 나머지 거리에서는 백색의 속바지가 보이도록 착장했는데, 이는 당시 기녀<Fig. 40>와 같은 착장방식으로 무녀도 기녀와 마찬가지로 천민의 지위에 있음을 알 수 있는 정보이다.
Ⅴ. 결론
본 연구는 현재 무복의 기준이 되는 『무당내력』에 그려진 무복을 고찰하기 위하여 각 거리내용 및 무당의 신격, 무복종류, 착용요인을 살펴보았다. 또한 무복으로 착용된 장삼, 철릭, 동다리, 전복, 두루마기, 장옷, 몽두리, 저고리ㆍ치마에 대한 기록과 당시 일반적으로 착용된 의복과 조형성, 착장방법을 비교하여 무복만의 고유성 및 특수성을 살펴보았다.
무속의 제사가 유ㆍ불교의 제사와 달리 환복(換服)하는 것은 유ㆍ불교의 경우 제사를 진행하는 주재자가 현실의 자신에서 변하지 않지만 무속제사의 경우 주재자인 무당 몸에 제사에 모셔지는 신이 들어오기에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옷을 갈아입었다. 또한 조선에는 계급별 복식이 정해져 있었지만 궁중연희 때는 높은 신분의 복식도 착용 가능했던 것처럼 굿판의 무당 또한 신분과 상관없이 각 거리마다 모셔지는 신격에 따라 적합한 옷을 착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복식은 신의 성격과 계급에 따라 종류와 색채를 달리함으로써 굿판의 관객에게 굿 내용을 시각적으로 알려주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제석거리에서는 승복(장삼)을 착의함으로써 ‘승려의 지위’를 받을 수 있고, 대거리, 구릉거리, 별성거리, 축귀에서는 군복(철릭, 동다리)을 착용하여 ‘군인의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성조거리, 조상거리에서는 남자 평상복(두루마기)으로 ‘남성의 권력’을 가질수 있다. 즉, 무속제사에서 무당은 자신의 신분과 관계없이 무당에게 강신된 신의 옷[巫服]과 도구[巫具]로 바꿔가며 제사를 지내며, 이때 무복은 굿의 내용과 신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로 굿판의 무당에게는 신들의 지위ㆍ힘ㆍ권력까지 생기도록 하였다.
『무당내력』의 무복은 조선시대 복식이 차용된 것으로 당시 일반복식과 비교한 결과 대수포(大袖袍)의 경우 무복으로 사용될 때 길이와 폭이 전반적으로 커진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소매는 매우 길고 넓어졌는데 이는 무구(巫具)를 들고 가무(歌舞)하는 무당의 모습을 더욱 역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움직임이 많은 소매를 확대한 것으로, 그 외는 심플하게 축소시켜 상징적으로 구색을 맞춰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무복은 일반복의 조형에서 크게 변형되지 않으나 사람들의 이목을 원하는 곳만 확대 제작하여 무당의 퍼포먼스가 보다 자극적으로 보이도록 수정했음을 알 수 있다.
착장방식은 일반복식과 달리 앞섶을 여미지 않고 저고리와 치마가 보이도록 착용하는데 이는 거리마다 신격에 맞게 환복(換服)하는 무복의 특성상 여러 벌을 겹쳐 입고 굿을 진행하므로 이때 앞자락을 계속 여미다보면 탈착하는데 오래 걸리고 무무(巫舞)는 하체의 움직임이 많기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덜 받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또한 비록 무당이 신분ㆍ성별과 상관없이 복식을 착용할 수 있었으나 기생과 같이 겉옷 밖으로 속옷이 보이도록 착장한 것은 아무리 지위가 높은 복식을 굿판에서 무당이 착용할 수는 있었어도 무당의 지위는 여전히 천민계급이라는 것을 의도적인 속옷노출로 표시하였다. 즉, 무복은 일반복식의 착장방법과 달리 앞자락을 양쪽으로 젖혀 속바지가 보이도록 대(帶)를 띠어 무당의 퍼포먼스가 구속받지 않게 실용적으로 착용하였는데 속옷노출은 무당의 천민신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복색의 경우 음양오행의 오방색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계급별 복색체계가 나눠져 있던 조선에서 제도에 정해진 의복색상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무당이 특정인을 표현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에 무복의 색상은 형태와 달리 크게 변화를 주지 않았다. 즉, 무복은 일반복식에 사용된 오방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무복은 다양한 능력을 부여해주는 상징적 표출 수단으로 일반복과 기본적 조형성은 비슷하나 부분적인 확대ㆍ축소와 착용방법의 변화를 주어, 일반복과 비슷하면서 다르고 자유로우면서도 체계적인 틀에 있는 옷임으로 알 수 있다. 또한 굿판의 무당은 신의 역할에 따라 성별ㆍ계급과 상관없이 복장을 갖춰 입을 수 있었으나 궁외(宮外)에서 착용했던 군인의 복장(융복, 군복)과 사대부의 편복만 착용했을 뿐 궁내(宮內) 백관의조복(朝服)ㆍ제복(祭服)ㆍ상복(常服)ㆍ공복(公服)은 볼 수 없는데, 이는 신을 모시는 무당이라 할지라도 지존이 생활하는 궁궐 안의 법도까지는 넘을 수 없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무복은 굿판의 무당이 궁 밖의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재창작과 착복이 가능했던 특이성을 갖고 있는 옷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무속은 종교적 측면뿐 아니라 축제와 같은 문화행사의 컨텐츠로도 주목받고 있으며, 굿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무속이 보존가치가 있는 중요 민족문화임을 국가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생각된다. 본 연구는 『무당내력』에 그려진 복식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추후 다른 무복연구를 함에 있어 비교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또한 『무당내력』과 유사한 서적으로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의 『무녀연중행사절차목록』과 일본 덕응사 소장의 『무녀의』가 있으나 굿거리의 이미지가 일부 또는 전체 확인이 불가능하여 본 연구에서 다루지 못했다. 추후 무속관련 연구를 위하여 『무당내력』과 유사한 고서들의 이미지 또한 모두 공개되어 더욱 밀도 있는 무속연구를 할 수 있길 바란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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