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남자 복식의 일러스트 제안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present men's costumes from Geumgwan Gaya according to the status and wearing occasions as illustrations. First, Geumgwan Gaya's status is classified into four classes: king, nobleman, chamberlain, and commoner. According to the occasion, clothes are classified as either ceremonial and casual. Ceremonial clothes include official uniforms and are worn when a person is required to be courtesy, such as when performing a ritual. Casual clothes are meant for activities such as horseback riding and hunting. King's ceremonial clothes are composed of the daegwan(帶輪式立飾冠), po(袍), pants(袴), Jin-style belt, and lacquer shoes with a heel. Nobleman's ceremonial clothes are composed of a conical hat(弁形帽), jangyu(長襦), pants(袴), and leather shoes. Chamberlain's ceremonial clothes are composed of the gun(巾), yu(襦), pants(袴), and leather shoes. Commoner's ceremonial clothes featured a tied-back hairstyle without hat, yu(襦), pants(袴), and straw shoes. Casual clothes for king and nobleman include the lip(笠). yu(襦), pants(袴), and boots. For each piece of clothing, the tops and bottoms are presented with dimensions and textile patterns created through weaving, dyeing, embroidery, etc. Additionally, the clothing items are presented through illustrations, which are expected to increase public understandings of Geumgwan Gaya costumes and reduce errors such as form distortion in production.
Keywords:
Geumgwan Gaya, illustration, men's costume, pants, Po, Yu키워드:
금관가야, 일러스트, 남자복식, 바지, 포: 袍, 유: 襦Ⅰ. 서론
고대복식 연구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사료의 부족이라 할 수 있다. 한정된 자료에 근거하다보니 일정 정도 추론에 의지하며 연구의 결과는 다양한 가능성 중에 하나를 제시한다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다양한 형태의 지역 축제 및 행사에서는 지역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가치 부여와 복원을 꿈꾸며 고대 복식 재현에의 현실적인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각 지역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고대복식의 재현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고대복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적 고증이 밑받침되지 않은 고대복식의 재현은 창의적 디자인이 가미되며 시대복식의 원형조차 알아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 연구는 2018년 4월에서 2019년 4월까지 김해시에서 추진한 ‘가야복식복원사업 연구용역’의 일환으로 금관가야의 신분별, 상황별 남자복식 재현안을 일러스트 형태로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복식사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대 복식의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를 채택해서 재현했을 때 한 가지 경우만으로 확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금관가야는 삼국시대 초기 가야연맹의 장(將)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대등한 관계로 성장했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가야본기가 없고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설화적 성격의 기원전후 수로왕 관련 기록만을 전하며 4세기 이후 기록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해 대성동 고분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진다고는 하나 복식자료는 유기물인 소재 특성상 원형 그대로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데 올해 43회를 맞이하는 김해시의 ‘가야문화축제’에서 매년 행해지는 수로왕행차 퍼레이드 및 체험 복식 등을 보면 부족한 복식 자료에 제대로 된 재현이 아닐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연구를 회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한정된 문헌 및 유물 자료지만 그 안에서 금관가야복식의 원형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최선의 복식을 제시하는 것도 현재의 고대 복식사학에 요구되는 바이다.
현재의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는 변한의 일국(一國)인 가락국(구야국)에서 출발했지만 3세기 후반-4세기 초 낙동강 하류역의 주변 소국을 정치, 문화적으로 아우르며 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로 성장하였고, 400년 고구려의 남정(南征) 이후 쇠퇴하기 시작해 532년 신라에 통합되었다. 따라서 금관가야는 3세기 후반 이후 4세기대 최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3세기 후반 대성동 29호분을 시작으로 집중적으로 조영되었던 김해의 대형 목곽묘가 5세기 전반 이후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다는 고고학적 사실(Ju et al., 2014)에서도 알 수 있다. 이에 금관가야 남자 복식의 재현안은 금관가야가 가장 세력을 확장시켰던 3세기 후반-4세기에 집중해서 진행하고자 한다.
그런데 금관가야의 복식 연구는 일차적으로는 문헌자료와 김해 및 주변 지역의 고고 유물에 근거하나 언급하였듯이 금관가야 자체의 자료만으로 입체적 복원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복식자료가 없는 시기의 복식 형태나 착용 대상에 대한 부분은 주변국가 복식 자료를 바탕으로 시대적 공통성, 혹은 지역적 공통성으로 복식 요소를 추출하여 금관가야 복식에 적용하고자 한다. 연구의 순서는 먼저 문헌 및 유물자료에 근거하여 금관가야인들의 신분과 복식 착용 상황을 구분하고자 한다. 다음은 선행연구(Kweon, 2019a; Kweon, 2019b)를 바탕으로 의복, 관모, 허리띠, 신발 등 각각의 품목별로 신분에 따라 또 착용 상황에 따라 어떻게 착용하였는지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분, 상황에 따른 복식 일습(一襲)을 제시한 후 이를 일러스트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금관가야 남자복식 재현안에 대한 일러스트의 제시는 연구 성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금관가야 복식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며 실물제작 시 형태 왜곡과 같은 오류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Ⅱ. 신분 및 착용 상황의 구분과 의복
1. 신분의 구분
복식의 신분별 구성을 위해서는 금관가야인들의 신분 계층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문헌사료에서는 삼한시기 이미 금관가야에서 왕 및 관인(官人) 계층의 존재가 확인된다. 『후한서(後漢書)』1)에는 “별읍에는 각기 ‘거수(渠帥)’가 있는데, 가장 큰 자를 ‘신지(臣智)’라 이름하고 그 다음으로 ‘험측(險側), 그 다음으로 ‘번지(樊秖)’가 있으며 그 다음으로 ‘살해(殺奚)’, 그 다음으로 ‘읍차(邑借)’가 있다”라고 하였고, 『삼국지(三國志)』2)에는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貴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등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가락국기에도 수로왕과 9간(干)[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도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오천간(五天干)ㆍ신귀간(神鬼干)]의 기록이 전한다. 각각의 서열과 관직에 대한 자세한 바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지배층 안에서도 최상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왕 및 왕족과 최상위층 바로 아래 관인 계층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가야에서 왕의 존재는 이른 시기 기록에서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치적 권한을 지닌 절대 권력의 소유자로 왕이 등장하는 것은 5세기 중엽~6세기 중엽의 가야 후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고, 삼한(三韓)시기(B.C. 3세기~A.D. 3세기)의 왕은 왕권이 성립되지 않은 명목상의 왕이었을 뿐이며, 3세기 중엽~5세기 초에는 연맹체의 수장으로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왕이었다고 인식된다(Beack, 2017). 일반적으로 고대사회에서는 신분간 장벽이 견고하였고 또 이것이 복식을 통해 표현되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금관가야에서 의 왕이 결코 절대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고, 백제나 신라와 같은 신분별 복식제도가 성립되기 이전의 금관가야에서라면 최상위 계층의 왕 및 왕족과 상위 계층인 관인 사이에 존재했을 복식 장벽은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에서는 무덤의 규모나 구조와 함께 부장품의 내용적인 측면을 조합한 분석을 토대로 고분 중심의 계층화를 시도하거나(Choi, 2012; Kim, 2016; Yun, 2011) 고분출토 장신구나 갑옷, 마구 등의 출토 양상을 토대로 지배집단의 성격과 수준을 가늠(Gimhae-si, 2009)한다. 그러나 실제 분묘의 규모와 부장품의 양을 기준으로 설정한 등급을 통해 사회적 위계를 진단할 경우 세분된 등급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고분의 세분된 등급을 그대로 사회적 계층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지적(Lee, 2016)이 제기된다. 복식사학의 입장에서도 모든 분묘에서 고르게 복식자료가 출토되는 것이 아닌 한, 모든 세분된 분묘의 등급을 차별화된 신분별 복식으로 직접 연결시키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만 금관가야의 신분별 복식을 고찰함에 있어 고고자료 중 주목되는 것은 특히 차별적 신분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형 고분의 순장이다. 일반적으로 순장자는 죽음에 대한 강제성에 근거하여 차별적 신분제도 내에서 가장 낮은 집단에 속하는 노예나 전쟁포로 등으로 거론되어 왔다. 그런데 가야 및 신라 지역 분묘의 예를 보면 순장자들이 철제 무기 혹은 금속 장신구를 패용한 경우들이 있어 노예라기보다는 호위무사나 시종, 비첩과 같은 주피장자 가까이에서 주인의 생활 각 방면에서 봉사하는 성격의 근신자들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Kim, 2014).
김해 대성동 고분의 순장은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반까지 존속하였는데 1-6 명(名) 정도의 순장 규모를 보이고 순장묘 16기의 총 순장자 52명중 유물을 소유한 순장자는 20명으로 56%정도에 이른다(Kim, 2005). 그런데 금관가야보다 후대이기는 하나 좀 더 뚜렷한 계층성을 보이고 있는 대가야의 순장에 대한 연구(Kim, 2003)에서 대가야의 순장묘를 순장자수와 위세품의 등급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순장자들의 부장유물에서 질적 차이가 드러나 이들의 사회적 계층과 성격을 이해하는데 단서를 제공한다. 이에 의하면 1등급 묘의 주인공에 따르는 순장자가 금제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3등급 분묘의 주인공이 착용한 장신구와 같은 수준을 보인다고 하였다. Kim(2003)은 1등급묘 순장자의 신분은 비록 낮지만 최상위층 옆에서 시종하는 근신(近臣)이기에 화려한 몸치장을 한 것으로 보았다. 대가야의 순장 사례를 금관가야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김해 대성동 고분의 순장묘에서 도 순장자의 장신구 착용이 확인되므로 금관가야도 지배계층 아래 이들을 모시는 시종 계층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고 일반민들과 달리 예를 갖춘 차림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금관가야의 신분은 지배계층은 최상위층과 상위층 2개 계층으로 나눌 수 있고 피지배계층도 시종 계층과 일반민의 2개 계층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상징적인 명칭으로 제1계층은 왕, 제2계층은 귀족, 제3계층은 시종, 제4계층은 서민으로 명명하고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2. 복식 착용 상황의 구분
고려시대 이후 복식사의 서술에서 남자 복식은 일반적으로 관복(官服)과 편복(便服)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관복은 관직에 있는 자의 공적(公的)인 복식이라면 편복은 평상시에 입는 옷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함께 사적(私的)인 자리에서 착용하는 복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금관가야는 관인(官人) 계층의 존재는 추정되지만 공적 복식으로서의 관복과 사적 복식으로서의 편복이 얼마나 명확하게 구분되었을지 단언하기 어렵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관복과 편복이 아닌 예복(禮服)과 편복으로 나누고자 하며, 여기에서 예복은 문자 그대로 예(禮)를 갖추기 위한 복식으로 관복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편복은 사적 복식이라는 의미보다는 수렵이나 기마 혹은 갑옷착용과 같은 활동성을 요하는 경우 착용하는 복식의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3. 신분별 상황별 의복 구성
금관가야의 의복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같은 상의(上衣)하고(下袴) 양식인데 금관가야는 상의로 포(袍), 장유(長襦), 유(襦)의 세 가지 유형이 모두 착용되었다(Kweon, 2019a). 이는 3세기 『삼국지(三國志)』의 포 착용 기록과 4세기 이후 토우 및 토기 인물 복식, 그리고 고고자료에서 금관가야와의 영향관계가 확인되는 삼국 및 삼연[前燕, 後燕, 北燕] 그리고 부여(夫餘) 복식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에서 포는 발등에 이르는 긴 길이, 유는 엉덩이를 덮는 길이이며 장유란 포보다는 짧고 유보다는 긴 길이인데 대개 종아리 정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복식에서 신분이 높을수록 의복 제작에 필요한 옷감의 소요량이 많은 즉, 여유 있으며 길이가 긴 의복을 착용했을 것이라는 일반론에서 보자면 신분에 따라 길이를 달리하여 포, 장유, 유의 착용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활동성을 요하는 편복으로는 상하 신분에서 모두 유고(襦袴) 착용이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중국과 고구려 고분벽화는 물론 금관가야의 토기에 묘사된 기마 인물들이 대부분 유고 착용을 하고 있다는 점과도 상통한다.
바지는 삼국에서 남녀 모두 착용한 복식이고, 그 형태는 <Fig. 1>과 같이 당(襠)을 부착한 궁고(窮袴) 형식이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삼국에서의 바지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하면 바지부리를 오므려 입는 방식과 부리를 오므리지 않고 그대로 입는 방식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부리를 오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오므리지 않고 그대로 입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통이 좁은 바지에서 보이며 사례수도 많지 않은 편이다. 평양지역 벽화에서도 긴 포를 착용하여 바지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 주인공으로 보이는 인물의 통 넓은 바지는 부리를 오므린 형식이다.
한편, 중국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이 호족의 바지를 받아들여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진(晉) 태흥(太興)연간(318-321) 바지 부리를 좁히지 않고 폭을 그대로 사용하여 넓었다는 기록3)에서 알 수 있듯 바지부리를 그대로 착용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통 넓은 바지를 그대로 착용한 모습은 마치 한족 고유의 상의하상(上衣下裳) 복식에서 하상을 연상케 하는데, 남북조 시대에는 그런 통 넓은 바지에 활동성을 가하기 위해 무릎 아래를 끈으로 묶고 이를 박고(縛袴)<Fig. 2>라 하였다.
금관가야의 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마인물토기<Fig. 3>, <Fig. 4>에서는 간략한 표현이지만 바지부리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느낌이 있어 부리를 오므린 바지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기마를 위해 활동성을 가미한 경우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떤 바지를 착용했는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금관가야와의 친연성이 확인되는 선비(鮮卑)족 전연(前燕)의 원대자(袁台子)묘 벽화 인물에서 부리를 오므린 바지<Fig. 5>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또 다른 선비계의 전산(前山)묘에서 출토된 도용은 통이 넓은 바지의 부리를 오므리지 않고 그대로 내려 착용한 모습<Fig. 6>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는 선비족의 좁고 밀착된 형태의 고유 복식 양식이 아닌 한화(漢化)된 바지 양식으로 인식된다. 실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시각자료에서 바지통이 크면서 바지부리를 오므리지 않은 경우는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이의 모본인 왕회도(王會圖)<Fig. 7> 및 번객입조도(番客入朝圖)가 거의 유일하다. 양직공도는 제작 시 어느 정도의 사실성에 근거하였는지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은데 부리를 오므리지 않은 바지 착용은 중국식 개념이 투영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금관가야에서 길이가 긴 포의 착용은 낙랑과의 교류, 그리고 이후 선비족의 삼연 및 부여를 통해서 받아들인 한화된 복식 양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의로서의 바지 착용은 삼국 공통이었고 바지부리는 오므리거나 그대로 내려 입는 형식이 모두 가능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의 바지 표현을 보면 바지부리를 오므린 형식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묶지 않아도 될 만큼 바지부리 부분이 좁아 활동에 무리가 없거나, 바지통이 넓더라도 상의로 중국식의 포와 함께 착용할 경우 바지부리는 오므리지 않고 그대로 입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 귀족, 시종, 서민으로 대표되는 4개 신분 계층의 예복과 편복에서 상의와 하의의 조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복은 실제 예를 갖춰야하는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계층 간 복식에서의 신분 구별 정도에 따라 착용 복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금관가야의 의례에 대해서는 명확한 바가 없으며 언급하였듯이 절대적 권력을 지닌 왕이 아니라 연맹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왕이었다면 엄격하게 특정 의복은 특정 계층에서만 착용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실제 상대적으로 시각자료가 많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면 덕흥리고분(408)의 주인공 진(鎭)과 13군 태수 <Fig. 8>는 위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발등까지 이르는 긴 길이의 포를 착용하고 있으며, 무용총이나 각저총 등 집안 지역 고분의 묘주는 옆에서 보좌하는 인물과 동일한 유고를 착용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묘주의 포, 유 착용은 외래복식을 착용한 평양지역과 고유복식을 착용한 집안지역에 따른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Jung, 2003) 이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당시 최상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묘주와 상위 계층이지만 묘주 보다는 아래에 위치하는 기타 관인이 동일한 의복을 착용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서로 다른 계층의 동일 의복 착용뿐만 아니라 안악 3호분 의장기수들의 복식<Fig. 9>에서 포와 유고 착용을 동시에 볼 수 있듯이 동일 계층에서 서로 다른 의복을 착용한 것을 알 수 있어 특정 계층에서의 예복을 어느 한 가지 의복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금관가야에서의 계층별 예복은 <Table 1>과 같이 서로 다른 계층이지만 동일 의복을 착용할 수 있고, 동일 계층에서도 다른 종류의 의복을 착용할 수 있는 즉, 일정 정도의 범위 안에서 선택적 의복 착용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본 연구에서는 논의의 편의상 예복에서는 왕의 포고, 귀족의 장유고, 시종의 유고를 대표적으로 서술하고자 하며, 서민복은 일상복의 의미가 커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예복보다는 편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4개 신분을 함께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예복의 범주 안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편복은 언급하였듯이 활동성을 요하는 복식으로 모든 신분에서 유고착용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안악3호분 행렬도 중 책을 쓴 관인이 장유를 착용하고 말을 타고 있는 모습 <Fig. 10>에서 기마 시 복식으로 유고 착용이 일반적이었다 하더라도 장유도 착용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금관가야 왕과 귀족의 편복으로도 유고 이외에 장유고도 착용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다만 본 연구에서 편복은 지배계층의 유고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의복의 색상은 가장 즉각적이며 효과적으로 신분을 구별할 수 있는 요소이다. 삼국시대 복색제도는 제정 시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기는 하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고이왕(古爾王) 27년(260)4)에 자(紫), 비(緋), 청(靑),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7년(520)5)에 자, 비, 청, 황으로 신분에 따라 복색을 달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당서(唐書)』6)에 따르면 라관(羅冠)의 색상을 백(白), 청(靑), 비(緋) 혹은 강(絳)으로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는데, 왕의 오채복 기록으로부터 의복은 특정 색상에 의한 신분 표시가 아닌 사용 색상의 다소에 의해 신분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비색과 강색은 모두 붉은 적색을 의미하고, 자색은 적색과 흑색의 간색(間色)으로 흑색을 띤 적색(赤色帶黑)으로 볼 수 있다.
금관가야의 복색제도는 문헌에 기록된 바가 없으나 『삼국유사』가락국기7)에 ‘자색 줄(紫䋲)’, ‘붉은 보자기(紅幅)’, ‘붉은 돛(緋㠶)’, ‘붉은 기(茜旗)’ 등의 언급으로부터 금관가야에서도 자색과 붉은 색을 귀하고 상서로움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일러스트를 통한 금관가야 남자복식의 재현안에서는 자색과 비색을 왕과 귀족의 색상으로 사용하고, 시종과 서민은 자, 비 이외의 색을 사용하는데, 편복과 함께 청색계, 황색계 색상을 추가하여 다양한 색상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Ⅲ. 의복의 문양
복식 재현시의 문양은 직물 유물에서 찾을 수 있으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금관가야의 직물편은 크기가 매우 작고 대부분 금속제 유물에 수착(收着)된 채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문양 확인은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재현안에서는 금관가야 토기에 선각된 문양이나 장신구 및 옻칠된 갑옷이나 무기류 등 고고유물에 표현된 문양 중 직물 문양으로 표현 가능한 것을 채택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1. 용 문양
김해 대성동 88호분 출토 금동제 진식(晉式) 대금구<Fig. 11>의 대단금구(帶端金具)와 91호분 출토 말띠꾸미개인 운주(雲珠)<Fig. 12> 등 금속 유물에서는 용문양이 확인된다. 용은 고대 신화나 역사, 종교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도상 중 하나로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하늘에서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북부여를 건국했다는 신화를 전하고 있으며, 414년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왕이 죽자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보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유물에 표현된 용문양은 3세기 후반-4세기 금관가야 유물과 더불어 5세기 백제의 나주 출토 금동신발, 신라의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동 허리띠 및 관모, 천마총 출토 금제 변형모(弁形帽) 등에서 보이며 6-7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사신도의 하나인 청룡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금관가야에서 용문양이 표현된 유물의 존재는 우리나라에서 용문양이 지배층의 주요 상징문양으로 수용, 정립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Korea National Maritime Museum, 2018).
금관가야 복식의 재현안에서는 대성동 88호분 출토 금동 허리띠 대단금구의 용문양을 응용하여 <Fig. 13>과 같은 쌍용문을 완성하였는데, 문양의 표현은 연금사를 사용한 징금수 기법이나 사슬수로 수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자수는 고대부터 애용된 것으로 부여의 기록8)에도 증(繒), 금(錦), 계(罽)와 함께 견직물에 자수장식을 한 수(繡)직물을 즐겨 사용했다고 하였는데, 자수 기법은 백제와 신라의 것을 참고할 수 있다. 백제 무령왕릉 출토 직물에서 사슬수를 확인할 수 있으며, 황오동 1호분에서 출토된 백화수피제 관모 유물<Fig. 14>은 얇은 평견직물 위에 연금사를 사용하여 수를 놓고 이것을 백화수피 위에 배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Park, 2016).
2. 기하학 문양
금관가야 대부분의 토기 및 칠제품(漆製品)에 표현된 문양으로 단순한 횡선과 종선, 사선에서 이들이 어울려 이루는 격자문, 집선문(集線文), 능형문(菱形文), 산형문(山形文), 삼각거치문(三角鋸齒文)을 포함하며 여기에 곡선의 파상문(波狀文), 타래문, 원문(圓文) 등이 있다. 기하학적 문양이 표현된 유물의 예를 보면, <Fig. 15>는 김해 가야의 숲 3호분에서 출토된 칠초(漆鞘)인데 다양한 형태의 집선문을 볼 수 있고, <Fig. 16-18>은 토기에 표현된 것으로 <Fig. 16>은 삼각거치문, 능형문, 타래문, <Fig. 17>은 파상문, <Fig. 18>은 뚜껑에 표현된 원문이 확인된다. 그리고 <Fig. 19>는 대성동 70호분과 88호분에서 출토된 가죽제 방패를 복원한 것으로 칠흔으로부터 산형문, 삼각거치문, 집선문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 문양은 한 가지 유물에 단독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으나 하나의 유물에서 다수의 문양들이 조합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본 연구에서는 일러스트만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실제 옷감이라면 평직에서 경위사의 색상을 분할한다거나, 능직물의 능선을 변화시켜 문양을 나타내는 직조 방법과 함께 금박이나 염색에 의해서도 문양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금관가야 남자복식의 재현안에서는 기하학적 문양 중 특히 집선문, 능형문, 산형문, 파상문, 원문을 사용하고자 하며, <Fig. 20>은 직조에 의한 방법으로, <Fig. 21>의 원문은 교힐(絞纈) 기법(홀치기법)을 사용하여 옷감에 문양을 표현한 것이다.
3. 기타 문양
금관가야 유물에 보이는 다른 문양으로는 삼엽문(三葉文)과 함께 명확하게 하나의 단위문양으로 명명하기 힘든 다양한 곡선 문양들이다.
먼저 삼엽문(三葉文)은 3개의 잎이 모여 있는 모양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서도 공통적으로 사용된 문양이다. 금관가야에서는 대성동 88호분 출토 금동허리띠의 대단금구<Fig. 11>와 한 셋트인 과판<Fig. 22>을 포함하여 환두대도(環頭大刀)의 둥근 고리 장식<Fig. 23>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곡선 문양들은 단독 사용보다는 다른 문양과 어울려 복합문의 형태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 <Fig. 24>의 김해 양동리 195호묘 출투 항아리에는 기마인물문 및 집선문과 함께 사용되었고, 김해 대성동 85호분 출토 도자(刀子)의 녹각제(鹿角製) 손잡이에는 직선과 곡선이 함께 어우러진 문양<Fig. 25>으로 직호문(直弧文)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Fig. 22>의 대성동 88호분 출토 허리띠장식에서 과판은 삼엽문이지만 과판 수하부에는 연속된 곡선[連弧文]과 작은 원형의 어자문(魚子文)이 시문되어 있다. 금관가야 남자복식의 재현안에서는 과판 수하부의 곡선문을 <Fig. 26>과 같이 자수문양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Ⅳ. 의복 치수
1, 금관가야인의 신체 치수
의복 구성을 위한 치수 산정을 위해서는 의복을 착용하는 신체 치수가 필요하다. 그런데 김해고분군의 인골조사에서 드러난 남성의 평균 신장추정치는 예안리 고분군은 164.7cm, 대성동 고분군은 155.7cm로 서로 차이가 있다(Daeseong-dong Tombs Museum, 2017). 본 연구에서는 인골 측정사례가 더 많은 예안리 고분군의 신장 추정치에 따라 남자의 신장을 165cm로 하고, 신장에 따른 부위별 신체치수는 국가기술표준원의 사이즈코리아에 게시된 치수를 참고하였는데 이를 제시하면 <Table 2>와 같다.
2. 상의 치수
금관가야 남자복식의 상의에서 예복은 왕의 포, 귀족의 장유, 시종과 서민의 유, 그리고 편복은 왕과 귀족의 유를 대표복식으로 하여, 신체 치수에 따른 상의의 세부 치수는 <Table 3>과 같다. 의복의 상의 치수에서 포, 장유, 유의 구분이 될 수 있는 항목은 뒷길이이다. 포는 발등까지 이르는 긴 길이지만 바닥에 끌리지는 않도록 하기 위해 총길이 142.6cm보다 조금 짧게 140cm으로 하였고, 장유는 바닥과 무릎높이의 중간정도에 올 수 있도록 ‘총길이-무릎높이+20cm’로 하여 120cm, 유는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길이의 75~80cm로 설정하였다. 다만 동일하게 유를 착용하지만 활동의 편리함을 요하는 편복과 서민의 유는 시종의 유보다 조금 짧게 하였다.
그리고 신분이 높을수록 여유 있는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상의에서는 길이와 더불어 화장과 품, 진동과 수구에서 각각 치수 차이를 두었다. 화장은 신체치수에서 ‘어깨사이길이/2+팔길이≒77cm’로 산정되었지만 고대의 회화자료를 보면 공수자세에서 손을 완전히 가리며 팔부분에 주름이 풍성하게 표현된다는 점에 근거하여 포와 장유는 실제 화장치수보다 훨씬 크게 하였고, 유는 실제 치수에 근접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모든 유의 화장을 동일하게 한 것은 아니어서 활동성을 요하는 서민과 편복의 유보다 시종의 유는 화장을 좀 더 길게 하였다.
진동과 수구는 활동의 편의를 위해 서민의 유에서 진동보다 수구를 작게 한 것을 제외하고 다른 상의들은 모두 진동과 수구의 너비를 동일하게 하였다. 예복에서 신분별 상의의 도식화는 <Fig. 27>과 같다.
3. 하의 치수
바지는 당을 부착한 궁고형식인데, 상의와 마찬가지로 신분이 높을수록 바지통이 넓고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신분별 예복, 편복의 바지 치수는 아래 <Table 4>와 같이 구성하였다.
그런데 <Table 4>에 의하면 왕의 바지보다 귀족, 시종의 예복 바지, 그리고 편복 바지의 길이가 더 긴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바지통이 좁아 활동에 무리가 없거나, 바지통이 넓더라도 상의로 중국식의 포와 함께 착용할 경우 바지부리는 오므리지 않고 그대로 입는 방식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에 근거한 것이다. 즉 바지통이 좁고 부리를 작게 처리한 서민의 바지와 포와 함께 착용하는 왕의 바지는 부리를 오므리지 않았고, 예복에서 귀족, 시종의 바지와 편복 바지는 부리를 오므리는 방식을 취했다. 이에 부리를 오므리는 경우 부리쪽에서 주름이 잡히며 발목에 모아지는 분량이 있으므로 보통의 바지보다 5cm 더 길게 치수를 산정하였다. 바지 도식화는 <Fig. 28>과 같다. 그리고 바지부리를 오므리는 방식은 몽고 노인우라 6호분 출토 바지<Fig. 1>와 같이 부리에 주름을 잡고 별도의 가는 천을 둘러 마감한 것으로 보았다.
Ⅴ. 장신구 및 기타
1. 관모, 허리띠, 신발
고대의 신분별 복식은 의복뿐만이 아니라 관모, 허리띠, 신발 등과 함께 완성된다. Kweon(2019b)9)은 금관가야의 관모로 대관[帶輪式立飾冠]과 변형(弁形) 관모, 건(巾), 그리고 립(笠)이 있이 있으며, 허리띠는 기본적인 포백대(布帛帶), 혁대(革帶)와 더불어 동물형 대구와 진식(晉式)대금구의 금속 장식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에 각각을 신분별로 대응해보면 먼저 대관과 동물형 대구 그리고 진식 대금구가 지배층의 장신구로 연결시킬 수 있다. 이들 금속장신구는 사회 지배층이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위세품(威勢品)으로 볼 수 있는데, 대관이 출토된 대성동 29호분, 진식대금구가 출토된 88호분은 다량의 수입품과 토기류가 부장되어 있는 초대형 분묘이기에 당시 최상위층의 묘로 인식된다(Kim, 2016). 이에 대관과 진식대금구는 예복 중왕의 관모와 허리띠로 재현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다만 동물형 대구는 금관가야의 경우 일반적으로 3세기 전후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4세기 후반의 대성동 11호분에서도 호형(虎形)대구가 출토됨으로써 이전 시기의 대구가 전세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Daeseong-dong Tombs Museum, 2013) 이에 3세기 후반-4세기 중심의 금관가야 복식 재현에서는 지배층의 편복 허리띠로 제안하고자 한다.
다음 변형 관모와 건은 금관가야의 직접적인 자료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체 내 다른 지역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및 선비족 삼연의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와 문헌자료에 의하면 변형모인 절풍은 조우 장식과 함께 유관자(有官者)의 관모로 착용되었고, 건은 다양한 신분층에서 착용되기는 하였으나 피지배층이 주류를 이룬다. 금관가야에서는 변형모의 존재는 추정되나 금속제 변형모의 출토예가 없으므로, 백화수피 위에 비단을 씌운 것과 같이 유기질 모체에 천연조우를 장식한 변형 관모를 귀족의 관모로, 건을 시종의 관모로 제안하고자 한다. 그리고 립은 <Fig. 3>, <Fig. 29>와 같이 기마인물의 관모에서 보이는 것으로 예복관모라기보다는 편복 관모로 인식된다.
신발은 이(履)와 화(靴)가 있는데, 이(履)는 가죽신, 옻칠신, 짚신이며 이외에 판자형 나막신도 확인된다(Kweon, 2019b). 이 중 옻칠신은 창원 다호리와 낙랑 출토 유물로부터 굽이 있는 신발로 추정되고, 굽이 있는 신발의 착용은 한대(漢代) 화상석의 포를 착용한 인물들<Fig. 30>과 같이 길이가 긴 상의를 착용하였기 때문에 신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신분별 예복과 편복의 신발에서 포를 착용하는 왕의 예복에 굽 있는 옻칠신, 귀족과 시종의 예복에 가죽신, 서민복에 짚신으로, 그리고 활동성을 요하는 편복에 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2. 지물(持物)
창원 다호리 1호분과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 내 3호 목관묘에서는 부채의 손잡이로 추정되는 나무 손잡이가 출토되었고, 현재 김해박물관과 대성동고분박물관<Fig. 31>에는 이를 복원 전시하고 있다. 이러한 부채는 고구려의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 태성리1호분 주인공이 들고 있는 것과 유사한 형식인데, 부채라고 칭한 이 지물은 원래 큰사슴의 꼬리를 매달아 만든 총채 모양의 도구로 주미(麈尾)라고 하여 스님이나 청담가(淸談家)들이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Jumi, 2012).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세속을 피해 은거하던 사대부들의 청담(淸談)지물로 통용된 것으로 이를 사용하는 인물은 존귀한 자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청담이 유행하였던 중국 남방지역 고분의 묘주도에는 주미가 등장하지 않는 반면, 북방지역에서는 세속의 권력자인 묘주도에서 주미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북방지역에서는 주미가 정치가의 위세품으로 사용되어 용도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Lee, 2005). 금관가야 남자복식의 재현에서는 왕의 지물(持物)로 부채를 사용하고자 한다.
3. 그 외 장식
복식의 장식은 『삼국지』에 ‘영주를 보배로 삼아 옷에 매달아 장식했다[以瓔珠爲財寶或以綴衣爲飾]’는 기록과 같이 의복에 구슬을 달아 장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금관가야 고분의 경우 매장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보존된 사례가 극히 적어 출토된 구슬의 수량은 많으나, 명확하게 목걸이나 귀걸이 등과 같은 장신구용인지 의복 장식용인지 분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편 대성동 91호분에서는 운모(雲母)편(잔존고 4.2cm)<Fig. 32>이 출토되었는데 끈을 연결하기 위한 2개의 구멍이 1.2-1.7cm 간격으로 뚫려있어 보고서(Song et al., 2015)에서는 주장자의 수의에 매달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김해 대성동 23호분과 예안리 77호분에서는 조개 제품<Fig. 33>이 출토되었는데 역시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장식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인가를 의복에 매달아 꾸민다는 개념이 존재했던 당시라면 그 장식물은 구슬이 아닌 다른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나 신라에서 운모편의 경우 금・은제 장신구를 대용하는 장신구의 가능성도 제기(Kim, 2010)되고 있어 91호분 출토 운모의 용도는 단언하기 어렵고 본 연구에서는 가능성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Ⅵ. 신분별 예복과 편복의 일러스트 제안
왕, 귀족, 시종, 서민의 4개 계층별 예복과 왕과 귀족의 지배층 편복 일습(一襲)을 일러스트로 제시하면 <Fig. 34>에서 <Fig. 39>와 같다.
관모가 없는 서민의 머리모양은 뒤통수 아래에서 하나로 묶은 속발(束髮)로 표현하였고, 지배층 편복에서 <Fig. 39>는 갑옷의 받침옷으로 착용하는 경우의 예시인데 머리모양을 상투로 표현하였다. 머리모양에 대한 문헌기록을 보면 『삼국지』변진(弁辰)조에는 장발(長髮), 『후한서』변진조에는 미발(美髮), 한(韓)조에는 괴두노계(魁頭露紒)라하였는데, 장발은 긴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린 모양 그리고 괴두노계는 상투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 고분벽화를 참고하면 삼국시대 긴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린 머리모양은 남녀 모두 찾아볼 수 없고, 장발이라면 뒤통수 아래 하나로 묶거나, 여자의 북계(北髻), 남자의 상투처럼 정수리 위에 얹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일러스트에서 관모없이 머리모양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 속발과 상투로 표현하였고, 일러스트에서는 한 가지 머리모양만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서민의 경우 속발과 상투 모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러스트에서 왕과 귀족은 귀걸이와 목걸이, 시종은 목걸이만을 착용하고 있다.10) 금관가야 고분은 명확하게 피장자의 성별을 확인할 수 없으나, 신라와 백제의 경우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의 착장 및 부장 양상을 보면 남녀 모두 착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근거하여 금관가야남성도 장신구를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시종은 대성동 91호분 순장자의 장신구 착용에 근거하여 목걸이만으로 표현하였다.
Ⅶ. 결론
본 연구는 금관가야의 착용 상황에 따른 신분별 남자복식에 대한 재현안을 일러스트 형태로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먼저 금관가야의 신분은 4개 계층으로 나누어 왕, 귀족, 시종, 서민으로 하였다. 지배계층은 문헌기록에서 최상위층의 왕과 그 아래 관인층의 존재에 근거하였고 피지배계층은 고분의 순장자 유물을 통해 일반 서민과 다른 근시자 계층의 확인으로 시종과 서민으로 구분한 것이다. 착용상황에 따른 복식은 예복과 편복으로 나누었는데 예복은 관복을 포함하여 예를 갖추고자 하는 경우의 복식이고, 편복은 기마, 수렵과 같은 활동성을 요하는 경우의 복식이다.
신분별 착용상황에 따른 복식의 일습은 아래와 같다.
왕의 예복은 대관을 쓰고 포, 고를 착용하였으며 진식대금구를 허리에 두르고 굽이 있는 옻칠신을 신었다. 이때 포는 쌍용문 자수 장식을 하고 고는 바지부리를 오므리지 않은 대구고인데 능형문을 직조하였으며, 손에는 부채를 들었다.
귀족의 예복은 천연조우장식이 있는 변형관모를 쓰고 장유, 고를 착용하였으며 가죽신을 신었다. 장유는 삼각거치문을 응용한 집선문이 직조된 바탕에 곡선문과 원문의 복합문을 선장식으로 하였고, 고는 왕과 동일한 대구고지만 바지부리를 오므린 형식이다.
시종의 예복은 건을 쓰고 산형문이 직조된 유와 고를 착용하며 가죽신을 신었다.
서민의 예복은 속발에 민무늬의 유와 고를 착용하며 짚신을 신었다.
다음 편복은 왕과 귀족의 지배계층 편복으로, 두 가지 스타일을 제안하였다. 하나는 토기에 표현된 기마인물의 립에 근거하여 뾰족하며 약간 뒤로 기울어진 모체에 챙이 있는 립을 쓰고 유와 고를 착용하며 화를 신고 있는 모습니다. 이때 유에는 원문을 염색으로 표현하였고 허리에는 호형 대구의 가죽 허리띠를 둘렀는데, 고에는 파상문을 직조로 표현하였다. 편복의 다른 하나는 갑옷 착용시의 받침옷으로 제안하였는데, 상투머리에 집선문이 표현된 유고를 착용하고 화를 신은 모습이다.
이상에서 제시된 금관가야의 남자복식 재현안은 가야복식에 대한 현실적 요구에 부흥하여, 문헌자료 및 현재까지 발표된 고분의 발굴 자료에 근거해 추정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자료의 한계로 제한점이 있을 수밖에 없으나 김해지역은 가야권 내에서도 가장 활발하고 지속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발굴 성과를 주시하며 계속적인 보완을 통해 금관가야의 복식 원형에 좀 더 근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금관가야 복식의 일러스트는 시각적인 제시에 불과하나 연구 과정에서 밝힌 의복 문양의 표현방법과 도식화, 개별 복식에 대한 착용관점에서의 접근 등은 실물 제작을 위한 기초 연구로서 의미를 지닌다. 고대 복식의 재현에서 고증이 뒷받침된 실물 제작은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예산을 필요로 한다. 실물 유물이 없는 시기의 복식 제작을 위한 제사(製絲)에서 직조(織造), 염색(染色), 바느질의 모든 공정에 대한 체계적인 후속 연구와 더불어 지자체 및 관계 기관의 지원을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2018.4~2019.4 김해시 ‘가야복식 복원사업 연구용역’ 과제 성과의 일부임.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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