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이후 선교사들의 한복 착장 사례 연구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written records and photographs of missionaries who adopted Hanbok attire after the opening of Korea’s trade ports. After the opening of the Joseon dynasty, Catholicism and Protestantism were influential religions. The missionaries came to Korea for missionary work, but did not change their lifestyle to Korean style. They lived in Western clothes every day, and Hanbok was only worn when there was special occasion. Missionaries and their families wore Hanbok for religious purposes. Catholic missionaries wore Hanbok to hide their identities when missionary work was illegal. Missionaries sometimes wore Hanbok to promote Joseon's missionary work and raise funds. The missionary's children wore Saekdong Jogori worn by Korean children. Missionaries wore Hanbok at official events such as graduation ceremonies, Christmas and church events. Male missionaries sometimes wore Hanbok worn by Korean officials as court robes. Female missionaries usually wore Jeogori and Chima that Korean women wore in everyday wear. The missionaries even took pictures wearing Hanbok to record their life in Korea.
Keywords:
catholicism, Hanbok, missionary, opening of trade ports, protestantism키워드:
카톨릭교, 한복, 선교사, 개항기, 개신교Ⅰ. 서론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대중문화를 해외로 수출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한류’는 현재 세계적인 문화현상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한류’는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시작되었고 최근에는 K-POP의 영향으로 전 세계에서 한국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외국인들의 한국의 문화의 체험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현재 유행하고 있는 대중문화를 즐기는 것 뿐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를 경험하고자 하는 현상이 많아지면서 외국인이 한복을 입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을 찾는 관광객의 문화체험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 현지에 살면서 한복에 관심을 갖고 직접 제작해서 착장하는 경우로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의 이러한 문화적 현상은 19세기 후반 서양문화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이후 처음 있는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항이후 우리나라는 새롭게 유입되는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 전반의 제도는 물론 문화도 급변하게 되었다. 전통복식에 있어서는 여성의 치마에 조끼허리를 달고 서양복의 영향으로 한복의 구조나 소재 등이 일부 변화되거나 서양복의 착장빈도가 높아지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당시에 한국에 주둔했던 서양인의 영향이 있었고, 한복을 변화시켜야하는 대상으로 바라본 서양인의 시각이 주요하게 작용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상의 문화가 만나서 생기는 변화가 일방적으로만 작용하지 않음을 생각해볼 때 이 변화의 과정 속에 당시에 한복을 착용했던 외국인에 대한 연구가 간과되어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외국인이 한복을 입었던 최초의 기록을 찾을 수는 없으나 개항이후의 사진이나 기록을 통해 외국인들이 한복을 착용했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개항이후 한국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은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다양한 분야에서 이 자료들을 연구해왔다. 복식분야에서도 당시의 자료들을 연구해왔는데, 주로 서양인의 시각으로 조선의 이미지와 조선복식을 관찰한 내용을 정리하거나(Lee, 2000; Lee, 2005; Cho, 2008; Lee, 2008; Choi, 2011; Jung, 2013), 이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분석한 연구(Hwang, 2020)가 대부분이며 외국인이 한복을 착용한 사례에 관하여 따로 정리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당시의 외국인들에게 조선은 서양문화권에 비해 발달하지 못한 국가라는 인식이 있어 복식을 비롯한 사회문화 전반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았으므로 외국인이 한복을 착용했던 자료의 양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개항이후 한국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이 한복을 착용했던 사례는 현대의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는 것과 동등한 경험이 아닐 수 있지만 이를 연구하는 것은 현재 다양하게 변용되어 확산하고 있는 외국인의 한복 착용의 원류를 찾는다는 점에 있어 의의가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개항이후 한국에서 주둔했던 선교사들의 기록과 사진자료를 토대로 당시에 선교사들이 착용했던 한복과 착용의 목적을 파악하는데 있다. 개항이후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들의 대부분이 선교를 목적으로 들어온 경우가 많아 연구대상을 선교사와 그의 가족으로 한정하였다. 연구범위는 선교사들의 입국이 많아지는 1876년 개항이후부터 광복이전까지로 한정하였다. 이 시기는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입국과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시대의 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1940년대에 접어들면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해면서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예가 많아진다. 이 시기에 주한 선교사들의 한복 착장 사례를 연구하기 위하여 45권의 자료를 정리하였다. 본 연구를 위하 살펴 본 1차 자료의 목록 중 <Table 1>은 당시 주한 했던 선교사들의 기록물과 외교관, 기자 등이 저술한 저작물이며 <Table 2>는 개항이후 선교사들의 평전 및 교회사, 사진자료집의 목록으로 저자를 알파벳순으로 정리하였다.
대부분은 선교사의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나 동시대의 서양인의 기록물과 유물 일부, 미국 장로교 디지털 사진자료를 보조자료로 활용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전통복식인 한복이 타민족에 의하여 착장되었던 개항이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현대의 외국인들이 주체적으로 한복을 착용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연구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개항이후 주한 선교사의 한국에 대한 인식
1876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이후 문호가 개방되면서 외교적 목적에 의해 한국을 방문했던 사신 이외에도 민간 자격의 외국인들이 한국에 상주하게 되었다. 문호개방 이후에 한국에 상주하게 된 최초의 외국인은 묄렌도르프(P.G. von Mollendorff, 1848-1901)이며, 이후 민간인으로 한국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주로 선교사들이었다(Oho, 2004).
개항이전에는 정식 수교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주로 천주교도들이 입국하여 신분을 숨기고 선교활동을 했다. 개항이후에는 천주교 뿐 아니라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이 선교를 위하여 개인 또는 가족단위로 한국에 거주하게 되었다. 개항초기 고종은 서구 열강들과 수교를 진행하면서도 선교사들의 한국 내에서 포교활동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Ryu(2000)에 의하면 고종은 교육과 의료사업에서만 공식적으로 미국의 선교사업을 인정하였고, 이는 고종이 배제학당이나 제중원의 설립을 인정하는 것으로도 드러나고 있다. Oho(2004)에 의하면 1885년에서 1886년 사이에 입국한 서양인들의 대부분은 선교사들이었지만 공식적인 선교는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의료와 교육활동을 선교의 간접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선교사로는 제중원을 설립한 호러스 알렌(Allen, H. N.; 한국이름: 안련, 1858-1932),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Appenzeller, H. G.; 한국이름: 아편설라, 1858-1902)와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호러스 언더우드(Underwood, H. G.; 한국이름: 원두우, 1859-1916),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Scranton, M. F. B., 1832-1909) 등이 있으며 이들이 당시 설립했던 병원과 교육기관은 우리나라 근대문화시설의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다양한 교파의 선교사들이 차례로 입국하였는데 Cho(2008)에 따르면 미국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은 고학력자들이 많아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거나, 한국어 문법책, 영한사전 등의 전문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Fig. 1>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들로 1892년 전라도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원 안의 인물은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 R.; 한국 이름: 이눌서, 1867-1951)로 한글성경번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 선교사들은 새롭게 접하는 한국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인 칼 귀츨라프로 1832년 중국 선교 여행 중 조선에 들렀다(H. Oh, 2014). 그는 조선에 머물렀던 20일 간의 기록을 남겼는데 H. Oh(2014)에 따르면 당시 서양이나 중국의 의복과는 다른 조선인의 옷차림을 묘사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이후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0년 대 이후로 Cho(2008)에 따르면 조선에서 1884년부터 1910년 사이에 활동했던 개신교 선교사들은 약 499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미국 개신교 선교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이 조선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남긴 기록들인 <Table 1>의 내용들을 정리하면 한국의 전통복식을 포함한 당시의 사회문화상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데 당시 조선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조선이 서구사회에 비해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인식이다. 당시 서양인들의 인식에는 제국주의 세계관과 오리엔탈리즘이 자리 잡고 있어 동양문화를 서양문화와 대치하여 근대화되지 않고 야만적이며 불합리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는데 선교사들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조선의 문화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데 Cho(2008)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조선이 문명에 뒤처지게 된 것이 기독교가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하여 선교를 통하여 문명화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조선이 불결하다는 인식으로 주로 가난과 더러움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Cho(2008)에 따르면 당시 선교사들 중에 조선이 가난한 나라라는 첫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생활환경의 불결함과 질병으로 연결되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살아왔던 환경과 다른 조선의 도로 및 주거환경, 의료 등이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복식에 있어서는 이중적인 시각이 있었다. Gilmore(1999)는 조선인의 청결 상태에 대해 “한 영국인은 조선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그가 본 가장 더러운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p. 74)고 언급하면서도 이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른 차이라고 지적하였는데, 다만 머리에 검은 착색료가 들어 있는 기름을 발라 상의가 쉽게 더러워진다고 하였다. Hall(2005)은 흰색의 옷을 입고 있는 조선인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생각하고 조선의 옷이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가슴과 허리를 졸라매는 여성의 옷은 위생적이지 않다고 보기도 했다. 당시 조선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이 조선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로 볼 수 있다.
셋째, 조선은 불평등한 사회라는 인식이다. 조선의 사회구조에 따른 양반과 서민 사이의 계급차이 뿐 아니라 선교사들은 여성-남성, 성인-아동 사이의 차별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여성들이 외출하면서 얼굴을 가리는 차림새를 하거나 세탁에 관련된 과도한 노동을 하는 것 등을 차별의 하나로 보았으며, 성인에 비해 대우를 받지 못하고 노동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아동들도 불평등의 대상으로 보았다. 여성이나 아동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을 교육에 의해 개선할 수 있다고 보고 선교사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교육을 진행하게 된다.
선교사들의 조선에 관한 이미지는 시대나 종교의 성격에 따라서도 다르게 묘사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조선을 선교하여 계몽해야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다소 부정적인 시각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개항이후 한국에 오래 머무는 선교사들이 많아짐에 따라 조선의 생활을 체험하고 조선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나타나게 된다. 여행을 통해 조선의 자연이 아름답다고 느끼고(Gifford, 1995; Underwood, 1904; Boulesteix, 2001; Hall, 2005) 조선인들이 친절하고 온순하며 외국인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대한다고 기록하기도 했다(Gifford, 1995; Noble, 2010). Hall(2005)은 조선에서 출생한 선교사 2세로 한국인의 느긋한 성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동양의 실크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조선인의 흰옷이 회색이나 파란색의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보다 훨씬 호감을 준다고 하거나(Grebst, 2005) 서양에서 보지 못했던 다듬이질로 만든 옷감을 훌륭하게 평가하고(Jacob, 2008) 다양한 모자나 알록달록한 색으로 만든 아동한복을 흥미롭게 묘사하기도 했다(Gilmore, 1999; Underwood, 1904; Jacob, 2008; Noble, 2010). 이러한 생각들이 조선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바탕이 되고 한복을 착용하는 경험으로 이어지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Ⅲ. 개항이후 주한 선교사의 한복 착용 사례
개항이후 한국에 주둔했던 선교사들은 조선의 전통복식인 한복에 관해 적지 않은 기록을 남겼으나 그들이 실제로 착용했던 사례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일부의 사진자료와 단편적인 기록들로 그들이 한복을 착장했던 증거를 수집할 수 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천주교와 개신교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부분 장기간 한국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알렌,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은 모두 10년 이상을 주한 했고, 로제타 셔우드 홀(Hall, R. S., 1865-1951), 매티 노블(Noble, M. W., 1872-1956) 등은 30년 이상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본국으로부터 가져온 옷을 입고 새 옷이 필요한 경우 본국에서 가져온 옷감으로 만들어 입거나 본국에 옷을 주문해서 구입하기도 했다. Ahn(2012)에 따르면 여성선교사들은 미국의 대형백화점에서 옷을 주문해서 입었고, 휴가 기간에 옷을 비롯한 물품 2-3년치를 주문해서 미국으로부터 가져왔다. 여성 선교사들은 자신과 가족의 옷을 직접 만들기도 했고, 한국인에게 옷을 주문해서 만들기도 했다. Noble(2010)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어 한국인에게 옷을 만들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에스티양은 장식이 없는 무명치마를 조선인 일하는 부인에게 주며 이 치마를 본 따 새 치마를 만들라고 했다. 낡은 치마 앞자락엔 기운 조각이 한 군데 있었다. 에스티는 부인에게 일감을 맡기고 일하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새 치마가 거의 완성되었는데 앞자락에 낡은 치마와 똑같은 스타일과 사이즈의 기운 조각이 있었다(p.171).
Noble(2010)에 따르면 신학생 이봉갑은 신학교 3학년 재학 시 학비 마련을 위해 매티 노블의 재봉틀 일을 했다고 하며, Hall(2005)은 일본에서 산 실크를 조선인 재단사에게 맡겨서 자신의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을 드레스를 만들도록 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생활하지만 한국에서 조달할 수 있는 한국 옷을 입지 않고 서양옷을 입었는데, 이는 평생 입고 살아왔던 자국의 옷이 편하게 느껴지고 타민족의 옷은 익숙하지 않아 생활에 불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서양인의 시각으로 조선의 옷은 비위생적이고 불편하며 특히 가슴과 허리를 조르는 여성의 옷은 건강에 좋지 않다(Hall, 2005)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한복을 입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다음의 몇 가지 경우에 한복을 착용했다.
1. 선교를 위해 한복을 착용한 경우
Cho(2008)에 의하면 1876년 이후 조선이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외국인의 조선거주가 합법화 되자 많은 서양인들이 입국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선교사들이었다. 당시 입국한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개신교 선교사들이었지만 개항이전에 선교를 위해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천주교도들이었다. 개항이전의 선교는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되어 많은 박해를 받았는데 Kim(2005)에 의하면 천주교도들은 180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유로운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포교가 정식으로 승인되기 전에 천주교 선교사들이 어떤 복식을 착용했는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정부의 눈을 피해서 한국에 주둔하기 위해서는 한복을 착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천주교 선교 초기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은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선교사들은 서양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얼굴과 몸을 가리는 상복(喪服)을 입고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Boulesteix(2001)의 책에 언급된 뤼크 마르탱 위앵(Luc-Martin Huin, 1836-1866)의 편지 내용을 보면 상복을 입은 선교사의 모습이 그들의 시각에서 굉장히 낯선 모습임을 서술하고 있다.
선교사가 외출할 때에는 짙은 색의 길다란 겉옷을 입는데 이것은 우리의 보자기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비둘기 집 지붕같이 생긴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쓰는데 50센티미터 높이에 지름이 1미터 50센티미터는 됩니다. 이 이상한 모자의 테두리가 팔꿈치까지 내려옵니다. 이것은 한국인이 초상 때 입는 옷이라고 하는데 선교사들은 이 옷을 입기로 했습니다. 이 옷은 부모를 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려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외국인의 이목구비, 특히 유럽인 특유의 큰 코를 가리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옷입니다(p. 105).
Varat & Long(2001)에 따르면 이 당시 가톨릭 선교사들은 삿갓과 옷으로 얼굴과 몸을 모두 가리는 상복의 특수한 특징으로 그 옷을 입고 조선에서 다년간 무사히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Fig. 2>는 상복차림을 한 선교사 모습으로 삿갓을 쓰고 얼굴까지 가린 모습이다. 상복차림의 선교사는 천주교에 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Kim(2014)에 따르면 상복차림으로 포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입국이 허락되지 않은 천주교 선교사들이며 개신교 선교사들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이후 입국하여 이러한 차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의 선교를 위해 한국의 복식을 착용할 필요성이 없었음을 알 수 있고 천주교 선교사들은 개항 초기까지도 상복을 입고 포교활동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복을 착용한 예도 있다. Yang(2015)에 따르면 당시의 선교사들은 결혼을 한 부부들의 경우에는 7년에 한번, 독신은 5년에 한 번씩 안식년을 갖게 되는데 선교사들은 대개 안식년에 본국으로 귀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교활동의 많은 부분은 선교를 지원하는 기금에 의해 충당되는 부분이 많은데, Clark(2008)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안식년 기간 동안 한국 활동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본국에서 여러 교회를 방문했다. 이때 선교사와 가족들은 선교지역인 한국을 알리기 위해서 한국 전통의상인 한복을 입기도 했는데 선교사들의 기록에 언급된 부분이 있다.
그 다음 날에는 선교사 회의가 있었다. 셔우드와 에디스는 한복을 입고 참석했고, 엄마는 한국에서 했던 사역에 대해 잠깐 동안 가벼운 연설을 했다(Hall, 2017c, p. 327).
오늘 위치토의 퍼스트 교회 주일학교에서 메시지를 전했다. 쌍둥이들은 조선의상을 입고 갔다. …(중략)… 한 여성은 돈을 충분히 모으면 전도부인을 위한 헌금을 보내겠다고 했다(Noble, 2010, p. 366).
<Fig. 3>의 아동들은 로제타 홀의 자녀들인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과 에디스 홀(Hall, Edith., 1895-1900)이다. 셔우드 홀은 한국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이어 2대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크리스마스 실을 한국에 도입한 업적이 있다. 로제타 홀은 남편이 사망한 후 1895년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진은 189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준비하던 중 선교회의에 참석했을 때 찍었던 자녀들 모습으로 아동 모두 색동저고리를 입고 있다.
<Fig. 4>는 오웬 선교사(Owen, C. C., 1867-1909)의 아내와 딸의 사진이다. 오웬 선교사는 1898년 미국 남장로교회로부터 조선으로 파견되어 왔고 1909년 사망했으며 그의 가족들은 이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웬 선교사의 부인과 자녀들은 1913년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되는데 <Fig. 4>는 조선으로 돌아오던 중 메사추세추주 케이프 코드에서 찍은 사진(Yang, 2012)으로 여아들 모두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다.
<Fig. 5>는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선교사(Underwood, H. H.; 한국이름: 원한경, 1890-1951)의 가족사진이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 원두우 선교사의 뒤를 이어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Fig. 5>는 1923년 매사추세추주 피츠필드(Pittsfield)에서 찍은 사진으로 가족 모두 한복 차림을 하고 있다.
<Fig. 6>은 독일 출신의 미국 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Shepping, E. J.; 한국이름: 서서평, 1880-1934) 의 모습이다. 그녀는 1912년 한국으로 파송되어 사망할 때까지 한국에서 의료 선교를 행했다. <Fig. 6>는 1930년 서서평 선교사가 뉴욕에서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으로 태극무늬가 있는 부채를 들고 있다.
선교사의 어린 자녀들은 한복으로 색동저고리를 입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색동옷은 대표적인 아동한복으로 선교사들은 색동저고리에 성경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Jacob(2008)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색동저고리를 ‘요셉의 저고리’라고 불렀는데, 이는 창세기 37장 3절의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ornate robe]을 지었더니”와 관련된 생각이다.
<Fig. 7>과 <Fig. 8>은 한남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엘라 레이놀즈(Reynolds, Ella, 1902-?)의 한복이다. 엘라 레이놀즈는 <Fig. 1>에서 언급한 레이놀즈 선교사의 딸로 1902년 한국에서 태어나 5년 간 한국에서 살았는데 이 한복은 그 기간에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Fig. 7>은 색색의 고운 명주를 이어 만든 색동저고리이며 <Fig. 8>은 다듬은 모시로 만든 치마로 착창 모습은 <Fig. 3>의 여아와 비슷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관복으로 한복을 착용한 경우
관복은 문무백관의 정복(正服)으로 개항이후 한국에 주둔했던 외국인들 중 관직에 종사하거나 공적인 목적으로 입궁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경우 관복을 착용했다. 개항이후 정부에 고용되었던 서양인 고문관들은 자국에서 가지고 온 서양복을 착용하고 있는 사진들이 남아있는데 묄렌도르프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3)는 단령을 관복으로 착용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 묄렌도르프는 독일 출신의 외교관으로 1882년 청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된 초대 고문관이었으며 <Fig. 9>는 그가 조선의 관복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부에 고용되어 공적인 일을 했던 고문관들과는 달리 선교사들은 궁의 요청에 의해 특별히 입궁하는 경우가 있었다. 19세기 말 개신교 선교사들은 입국초기 의료나 교육활동가의 형태로 조선에 들어오기도 했었는데 국내에서 활동을 하면서 비정기적으로 입궁하기도 했다. 이때 선교사들은 본국에서 준비해온 예복을 입었는데 일부 선교사는 조선의 관복을 예복으로 입은 예를 확인 할 수 있다. Underwood(1904)에 따르면 “왕궁으로부터 왕비를 알현하라는 요청이 있어 준비해온 입궐용 예복을 입고 가고자 했으나 바다를 건너오던 중 훼손되어 몸에 맞지 않는 예복을 입고 가야한다”는 기록이 있다(p. 18). 이때의 예복은 ‘court dress’로 기록되어 있어 언더우드의 본국인 미국으로부터 가져온 예복임을 짐작할 수 있다. <Fig. 10>은 고종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예복을 갖추어 입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모습으로 조선후기 문관 당상관의 예복인 쌍학흉배를 부착한 단령을 입고 있다.
3. 행사에 한복을 착용한 경우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을 하면서 많은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선교지인 한국의 교회나 성당에서 세례식이나 성탄절 행사, 성경학교 등을 주최하기도 하고 주거지 근처에서 벌어지는 전통혼례나 장례식 등에 참석하거나 조선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선교단체에서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의 졸업식과 같은 공식행사 등에 한복을 입고 참여했던 선교사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Fig. 11>은 1925년의 사진으로 1895년 북쪽 지방의 여성으로 처음 세례를 받았던 전삼덕의 세례 3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사진에서 원안의 여성이 로제타 셔우드 홀(Hall, R. S., 1865-1951)로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Park, 2015). 로제타 셔우드 홀은 남편인 윌리엄 제임스 홀(Hall, W. J., 1860-1894)과 함께 미국 감리교 해외 선교회의 소속인 의료선교단의 일원으로 조선으로 왔다. 그녀는 1890년 10월에 조선으로 온 후 1935년에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의료 선교활동을 하였다.
<Fig. 12>는 로제타 홀의 회갑날에 찍은 사진으로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는 원 안의 인물이 로제타 홀이다. Hall(2005)에 의하면 로제타 홀이 입고 있는 한복은 맹인 부인이 만들어 선물한 것이라고 하는데, 선교사들은 조선인들로부터 버선이나 주머니, 한복과 같은 전통복식을 선물 받기도 했다.
<Fig. 13>은 빅터 웰링턴 피터스(Peters, V. W.; 한국이름: 피도수, 1902-2012) 선교사가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1928년 미국 남감리교회로 부터 조선으로 파송되어 1941년 귀국할 때까지 14년간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Fig. 13>의 촬영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그가 조선에서 선교활동 중 촬영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교회 창문에 붙어있는 ‘祝賀救主聖誕’ 이라는 현수막으로 보아 성탄절을 기념한 사진임을 짐작할 수 있다.
<Fig. 14>는 1927년 사진으로 태화여학교(泰和女學校, 1922년 설립)의 성경과 제 1회 졸업생들의 사진이다. 원안의 한복을 착용한 인물은 킨슬러(Kinsler, M.; 한국이름: 권신라, 1904-?) 선교사로 1922년 내한한 이후 1936년까지 태화여자관에서 일했다(Lee, 1993). 그녀는 태화여학교 성경과 졸업생들과 똑같은 형태의 저고리와 치마를 착용하고 있다.
<Fig. 15>는 1930년대 태화여자관에서 개최된 제 1회 여자관 연합수련회의 사진으로 원안의 인물이 한복을 착용하고 있다. 사진에는 모두 6명의 외국인이 있으나 원 안의 여성만이 유일하게 한복을 착용하고 있어 1930년대 태화여자관의 관장을 맡고 있었던 마가레트 빌링슬리(Billingsley, M.; 한국이름: 필연사, 변연사, 1903-2003) 선교사로 추정된다. 그녀는 1933년부터 태화여자관의 4대 관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Lee, 1993).
<Fig. 16>은 1928년 평양에 있던 성경학교 졸업생의 사진으로 네 명의 조선 여학생과 두 명의 선교사는 모두 흰색의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다. 두 명의 선교사는 사진의 기록으로 장로교 소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외의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Fig. 17>은 1933년 대구의 성경학교 학생들 사진으로 원안의 외국인 여성의 상체에 ‘Lilian Ross’라고 적혀있어 릴리안 로스 (Ross, L.; 한국이름: 노일연, 1900-1993)선교사임을 알 수 있다. 릴리안 로스 선교사는 1900년 부산에서 출생했고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성경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Fig. 17>에서 보이는 외국여성이 서양복을 입고 있는 것과 달리 그녀는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으며, 학생들이 대부분 유색의 한복을 입고 있는 것과도 구별되어 보인다.
4. 평상복으로 한복을 착용한 경우
선교사들은 대부분 장기 사역을 생각하고 한국에 들어오지만 한국의 문화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성 선교사들은 선교활동 외에 가사 생활을 전담했는데 Ahn(2012)에 따르면 집이나 식료품, 가구 등에 비해 옷은 심각하게 고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신유행에 약간 뒤처지지만 옷은 본국으로부터 충분히 조달 가능하여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의 옷인 한복을 입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부의 선교사들은 한복을 즐겨 입으며 한국 문화에 동화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했다. Yang(2012)은 서서평 선교사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서양 선교사라기보다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자 했다. 고무신에 한복을 즐겨 입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그는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를 입고, 맞는 신발이 없어 남자용 검정고무신을 신었다(p. 107).
한복을 일상복으로 즐겨 입는 모습은 주로 여성 선교사들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926년부터 광주의 수피아 학교에서 사역을 시작했던 플로렌스 룻(Root, F.; 한국이름: 유화례, 1893-1995)나 로제타 홀 등의 여성 선교사의 사진이 다수 남아있다. <Fig. 18>은 서서평 선교사가 양자 요셉을 업고 있는 모습으로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 차림인 것을 볼 수 있어 평소에 그녀가 입었던 한복 차림임을 짐작할 수 있다. <Fig. 19>는 유화례 선교사가 광주 수피아여중ㆍ고 본관 신축 공사장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담색의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모습이다.
<Fig. 20>은 메리 테일러(Taylor, M. L., 1889-1982)가 착용했던 한복이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상황을 해외에 알린 사업가이자 특파원인 앨버트 테일러(Taylo, A. W., 1875-1948)의 부인으로 부부는 주한 기간 동안 많은 선교사들과 교류하였다. <Fig. 20>은 연극배우였던 그녀가 연기지도를 할 때 입었던 한복으로 활동에 편하도록 길이가 긴 남편의 저고리를 입었다고 한다.
<Fig. 21>과 <Fig. 22>는 피도수 선교사가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피도수 선교사는 한흥복(1912-1999)이라는 한국여성과 결혼하였는데 당시의 다른 남성 선교사들에 비해 한복을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 한복을 착용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경우
사진은 장면을 찍어 기록으로 남긴다는 점에 있어서 위에 언급한 사례 모두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일정부분 기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기념사진은 중요한 행사의 장면을 기록하기 위해 찍어서 남기게 되므로 행사가 주체가 되며 그때 착용한 복식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언급하는 자료들은 외국인이 한복을 입고 기록을 남긴 행위에 주목적이 있는 것으로 한복 착용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진들이다.
선교사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낯선 조선의 문화를 체험했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예가 많다. 대부분은 한국의 전통생활 또는 행사를 지켜보는 타자의 입장이지만 일부의 선교사들은 한복을 입고 한국생활의 일부를 체험하기도 했다. 요즘을 예로 들면 외국인 관광객이 한복을 착용하고 문화체험을 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Fig. 23>과 <Fig. 24>는 1905년의 사진으로 한국인 신자의 집을 방문한 로베르 신부와 르 장드르 신부의 사진이다. 이 사진이 실린 자료집의 다른 사진을 살펴보면 두 신부는 대부분 사제복을 입고 있어 <Fig. 23>과 <Fig. 24>가 특별한 연출사진임을 추측할 수 있다. <Fig. 23>에서 두 신부는 쌍학흉배가 달려있는 관복을 입고 있으며, 담뱃대와 부채를 들고 있다. <Fig. 24>에서는 두 사람 모두 담색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며 한 사람은 탕건을 쓰고 한 사람은 백립을 쓰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전통복식에서 관복과 백립은 명확한 용도가 있는 복식이나 본 사진에서는 본래의 용도와는 관계없이 외국인 신부들이 한국 문화의 일면을 체험하는 것으로 보인다.
<Fig. 25>는 선교사들이 한복을 입고 모임을 열고 있는 기념사진이다. 사진에 참석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사람부터, 두루마기, 원삼, 조복 등 모두 제각각의 한복을 입고 있다. 각각의 한복 역시 용도와는 별개로 착용하고 있어 한복을 입고 모임을 행하는 것에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Fig. 26>은 제임스 아담스(Adams, J. E.; 한국 이름: 안의와, 1867-1929) 선교사와 가족이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다. 제임스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1895년 내한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선교사로 계성중학교를 설립하고 대구에 사과를 보급한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사진 속에서 그는 한국남성들과 유사한 흰색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나 색안경을 쓰고 양태가 좁은 갓을 쓴 독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의 부인인 넬리 아담스(Adams, N. D., 1866-1909) 선교사는 한국여성들과 같은 흰색의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으나 머리에는 민간 혼례에서 사용했던 족두리를 쓰고 있다. 담색의 한복을 입고 있는 어린이는 그들의 아들인 에드워드 아담스(Adams, E. A.; 한국이름: 안두화, 1895-1965)로 대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선교사들이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 중에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연출사진이 있다. 개항이후 조선에 사진기술이 도입되면서 전문적인 사진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Y. Oh(2014)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촬영된 사진들은 대부분 한국에 진출했던 일본인의 사진관에서 촬영된 것이 많다. 당시에 조선을 여행하거나 일로 방문했던 외국인들이 조선의 이미지가 담긴 사진을 구입하는 경우가 있어 스튜디오에서 연출된 사진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는 스튜디오에 한국적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는 배경이 준비 되어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선교사들의 사진 중에 이러한 배경에서 연출된 사진이 있다.
<Fig. 27>은 1930년대에 촬영된 로제타 홀과 그의 아들인 셔우드 홀의 사진이다. 로제타 홀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머리 수건을 두르고 있는데 그녀가 주로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어 북쪽 지방 여성의 한복 차림새를 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셔우드 홀은 바지, 저고리, 조끼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있는데 행전, 주머니, 안경집, 부채 등의 장신구도 갖추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체크무늬 옷감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실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앞 쪽에 신발이 놓여 있어 연출된 사진임을 짐작할 수 있다. <Fig. 28>은 셔우드 홀과 그의 친구인 프레드 브랜튼이 한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다. 셔우드 홀은 바지, 저고리, 조끼를 입고 탕건을 쓴 모습이며 프레드 브랜튼은 <Fig. 27>의 셔우드 홀과 흡사한 모습이다. 이 사진을 찍은 장소가 명확하게 나온 것은 아니지만 프레드 브랜튼은 셔우드 홀이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서 만난 친구임을 고려해볼 때 미국에서 찍은 사진일 가능성이 있다.
<Fig. 29>와 <Fig. 30>은 말콤 펜윅(Fenwick, M. C., 1863-1935) 선교사의 사진이다. 1889년에 독립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서 1935년 임종까지 선교활동을 하였다. <Fig. 29>에서는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는데 저고리 안쪽으로는 토수가 보이며 종아리에는 행전을 차고 있다. 탕건을 쓰고 부채를 들고 있으며 <Fig. 27>과 유사하게 방석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Fig. 30>의 말콤 선교사는 소매가 넓은 포를 입고 있는데 소매 안쪽으로 토수가 보인다. 갓을 쓰고 있는 인물 뒤편으로 <Fig. 29>와 비슷한 배경이 있어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임을 짐작할 수 있다.
<Fig. 31>은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 한국이름: 민덕효, 1854-1933) 선교사의 사진으로 그는 1881년과 1890년에 한국에 와서 명동성당 건립 등에 참여하였다. <Fig. 31>에서는 흰색의 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는데 가슴에 두른 술띠가 짧은 것이 어색하다. 소매 안쪽으로 토수가 보이며 부채를 들고 있어 <Fig. 30>과 유사한 모습으로 보인다. Hall(2005)에 의하면 조선에 대하여 “여자들은 지팡이를, 남자들은 부채를 가지고 다니는 나라”(p.90)라는 표현을 보았다고 하는 것으로 부채가 한복과 더불어 연상되는 조선의 이미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Fig. 32>는 요셉 벤노 그라하머(Grahamer, J. B.; 한국이름: 함요섭, 1888-1950) 수사의 사진으로 1911년 한국으로 파견되어 의료봉사 등의 선교활동을 행했다. <Fig. 32>에서는 두루마기 소매 안쪽으로 토수가 보이며 갓을 쓰고 있다. 두루마기 안쪽에 안경집과 손에 들고 있는 색안경과 담뱃대가 보인다.
<Fig. 33>, <Fig. 34>, <Fig. 35>는 한복을 입고 있는 선교사들의 상반신 사진이다. <Fig. 33>는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피도수 선교사의 사진이며 <Fig. 34>는 흰색 저고리를 입고 있는 로제타 홀의 1938년 사진이다. <Fig. 35>는 로라 애드워즈(Edwards, L. E.; 한국이름: 애도시, 1886-?) 선교사의 사진으로 1923년부터 태화여자관의 2대 관장으로 부임하였는데 이 사진은 관장시절의 사진으로 보인다.
<Fig. 36>은 피도수 선교사 부부의 사진으로 두 사람 모두 한복을 입고 있다. 피도수 선교사가 버선을 신고 있고 아내가 입고 있는 한복의 치마단 모습으로 실내에서 찍은 연출된 사진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십자가가 보이는 것으로 교회 혹은 교회와 관련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Fig. 37>은 1914년의 사진으로 서서평 선교사가 여성 성경공부 반의 남흥 부인과 함께 직은 사진이다(Yang, 2012). 서서평 선교사는 머리를 올리고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Fig. 18>의 평상시 착용했던 한복과는 구별되는 차림으로 보인다.
<Fig. 38>은 스테이시 로버츠(Roberts, S, L.; 한국이름: 라부열, 1881-1946) 선교사의 자녀들 중 한국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유제니아, 루시의 사진으로 모두 한복을 입고 있다(Clark, 2008). 로버츠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1907년부터 1939년까지 평안북도 선천(宣川)과 평양에서 복무했다. 당시 선교사의 자녀들은 대부분 평양에 있는 외국인 학교를 다녔는데 <Fig. 38>의 가운데 여아의 머리수건이 <Fig. 27>의 로제타 홀의 모습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왼쪽의 아동은 바지와 돌띠가 있는 저고리를 입고 있고, 오른쪽의 여아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볼끼가 있는 남바위를 쓰고 있는데 명확하지는 않으나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여아의 한복은 비치는 소재의 한복이며 저고리를 입은 모습과 치마끈의 두께 등으로 아동의 체격에 비하여 옷이 많이 큰 것으로 보이고 전통 신발을 신고 있다. 세 명의 아동이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에서 계절성이 일치하지 않고 실외임에도 신을 신고 있지 않은 모습 등으로 미루어 한복을 입은 기념사진임을 추측할 수 있다.
Ⅳ. 개항이후 주한 선교사들이 착용한 한복의 특징
지금까지 개항이후 선교사들이 한복을 착용했던 사례를 사진자료와 기록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 연구에서 분석한 선교사의 한복착용사례는 인물별로 정리하면 모두 59건이고 이중에 성별이 불분명한 2명과 동일인을 제외하면 성인 남성 17명, 성인 여성 16명, 남아 4명, 여아 7명으로 나타난다. 본 연구에서 언급한 선교사들이 착용했던 한복의 특징을 당시 외국인이 착용한 한복의 특징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전술했던 내용들을 정리하면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다.
첫째, 선교사들의 한복 착용의 가장 큰 목적은 선교활동에 있다. 개항이후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오게 된 목적이 선교에 있고, 선교사들은 이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 과정 중에 한국에서는 자국민과 동화되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하여 한복을 착용했고, 본국으로 돌아가서는 선교지인 한국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한복을 착용했다.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한복을 입고 선교활동을 했던 사진은 4건으로 모두 10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이중 7명이 아동으로 아동에게 한복을 입히는 것이 선교활동에 주요하게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선교활동을 하면서 각종 행사에서 한국인과 동일한 한복을 착용했던 것 역시 한국인과 동화되는 모습을 연출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본 연구에서 한복을 착용했던 선교사들의 전체적인 성비는 비슷하나 한복을 착용했던 목적에 따라 성비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의 경우 관복착용 외의 모든 경우에서 고르게 한복을 착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남성은 한복을 착용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경우를 제외하면 한복 착용의 예를 거의 볼 수 없다. 행사나 일상복으로 한복을 착용한 선교사가 한국여성과 결혼했던 피도수 선교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남성 선교사들은 특별한 목적으로 한복을 착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관복으로 한복을 착용하거나 기념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한복을 착용했고 일상복으로 착용했던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비해 여성 선교사들은 다양한 사례에서 한복을 착용했던 것으로 나타났고 서서평, 유화례 선교사와 같이 결혼을 하지 않고 한국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경우에 일상복으로 한복을 자주 착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Table 3>은 목적별로 한복을 착용했던 선교사들의 성비를 정리한 표이다.
셋째, 선교사들이 착용했던 한복의 종류는 여성의 경우 대부분 저고리와 치마를 착용했고, 남성의 경우 저고리와 바지 위에 조끼를 입은 간편한 차림이나 두루마기와 같은 포를 착용한 모습이 나타났다. 남성 선교사의 경우는 궁에 출입할 때 관복을 입기도 했는데, 여성 선교사의 경우는 민속복 착용의 경험으로 원삼을 착용한 1건을 제외하면 예복이나 두루마기와 같은 외투를 입은 자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주머니, 토수 등의 소품을 착용하기도 했는데 성별과 무관하게 부채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어 부채 역시 한국적인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밖에 남성은 갓, 탕건 등의 쓰개를 착용한 모습이 많았고 여성은 조바위나 머리수건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선교사의 자녀들이 착용한 한복은 당시 한국의 아동이 착용했던 한복과 동일한 것으로 색동저고리와 치마, 바지 등을 착용했다. <Table 4>는 선교사 및 자녀들이 성별에 따라 착용했던 한복의 종류와 해당 건수를 정리한 표이다.
넷째, 종교의 성격에 따라 한복 착용의 예나 사진에서의 연출 모습에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당시에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종교는 크게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의 종교가 한국에서 포교활동을 한 시기와 교리 등이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천주교는 개항이 전부터 한국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여 선교사라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상복을 착용하기도 하였지만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개항 이후 주한했던 선교사들의 수가 많아지고 정식으로 수교가 체결된 이후에 포교활동을 했던 천주교의 선교사들은 점차 상복을 입지 않게 되었다. 그 밖에 민속복으로 한복을 착용했던 선교사들의 사진에서 담뱃대를 사용하고 있는 3건은 모두 주로 천주교 선교사들이며 이는 술과 담배를 금지하는 개신교의 교리로 인해 나타나는 차이점이라고 생각된다. <Table 5>는 본 연구에서 분석한 사진자료들을 분류한 것으로 선교사들이 한복을 착용한 목적에 따른 세부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Ⅴ. 결론
본 연구는 개항이후 주한 선교사의 기록과 사진자료를 분석하여 선교사들의 한복 착장을 사례별로 분석한 것이다. 사회ㆍ문화적으로 변화가 많았던 개항기에는 다양한 국가의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활동했다. 개항기에 선교를 통해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던 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각각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활동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했지만 생활방식을 한국 스타일로 바꾸지는 않았다. 따라서 입국할 당시 착용했던 자국의 복식을 입고 생활했으며 한복은 특수한 목적으로 착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교사들이 한복을 입었던 사례들을 분석하면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를 목적으로 한복을 착용했던 것으로 개항 전후의 선교 초기와 1900년대 이후 선교사들의 주한이 많아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선교가 직업이므로 한복을 선교에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종교별로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개항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왔던 천주교는 선교사라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한복을 착용하기도 하였지만 개신교의 경우 한복을 착용함으로 한국인에게 동화되는 모습을 보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물론 개항이후 주한하는 선교사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천주교의 선교사들도 다른 목적으로 한복을 착용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밖에 외국에서 선교지인 한국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한복을 착용하기도 했다.
둘째, 선교사들은 개항이후 외국인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면서 특별한 경우에 궁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이때 관복으로 한복을 착용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이 관복으로 입었던 옷은 대부분 자국에서 가지고 왔던 예복이었으나 몇몇 사진에서 한국 관리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관복을 입고 있는 선교사는 남성으로 관복의 형태는 쌍학흉배가 부착된 조선후기 문관의 단령이다
셋째, 선교활동을 하면서 진행했던 행사에서 한복을 착용했던 경우에는 대부분 행사의 참석자와 동일한 형태의 한복을 착용한 경우가 많았다. 선교사들은 공적으로 진행하는 행사에 많이 참여했는데 행사 또는 일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찍은 기념사진의 참석자는 대부분 비슷한 한복을 착용하고 있어 일종의 유니폼과 같은 효과를 연출한다. 여성 선교사의 경우 저고리와 치마가 모두 흰색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한복 착용 사례는 남성 선교사의 사진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넷째, 평상복으로 한복을 착용한 경우는 여성 선교사의 경우에서 많이 나타났다.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매일 착용하는 복식의 경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다른 문화권의 옷으로 바꾸어 입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평상복으로 한복을 착용하는 것은 한국문화에 적극 동화하려는 모습의 표현으로 볼 수 있고 이는 선교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낸 선교사들은 일상복으로서 한복을 자연스럽게 착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미혼으로 생을 마감한 여성선교사들에게서 많이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선교사들이 한복을 착용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경우는 민속복 착용의 경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궁에 출입할 때 입는 관복이나 상을 당했을 때 쓰는 백립과 같이 특수한 복식을 상황과 상관없이 착용하거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드레스 코드처럼 착용한 예를 볼 수 있다. 주머니, 토수 등의 소품을 착용하기도 했는데 성별과 무관하게 부채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어 부채 역시 한국적인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담뱃대의 경우는 주로 천주교 선교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개신교와 다른 교리로 인해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선교를 목적으로 주한 했지만 이국적인 한국의 생활을 기록하려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본 논문은 개항이후 선교사들이 외국인의 시선에서 한복을 바라보는 타자 입장이 아닌 직접 착용한 주체로서 분석했다는데 의의가 있지만 실물 자료가 충분히 뒷받침 되지 못한 한계가 있다. 당시에 한국에 주둔했던 선교사들의 수를 생각할 때 연구에서 분석한 기록이나 사진자료가 방대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경향성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개항이후 한국에 가장 많이 주둔했던 외국인인 선교사가 한복을 착용했던 예시를 사례별로 분석하고 특징을 유추했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 연구과정에서 정리한 자료 중의 일부는 촬영연대와 착장자가 불분명하여 사용하지 못한 것이 있어 향후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며 실물자료를 기반으로 한 보완 연구가 후속으로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0년도 한남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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