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 복원에 관한 연구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tore the Hang-ra loom of late Joseon Dynasty that had appared in the painting “A weaving Hang-ra(亢羅: leno weave type)”, painted by Gisan Kim Jun-geun. The intention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a traditional Hang-ra loom within the history of Hang-ra in 1888, when the genre painting was purchased. The methods of this study are threefold, consisting of a historical investigation of Hang-ra and Hang-ra looms through the literature, a comparative analysis of the loom and its parts done by pictures and artifact materials, and test weaving of the restored Hang-ra loom. Gisan’s Hang-ra loom has a “separated front leg” structure and highly sloped poles as the traditional looms in Gisan’s other genre painting. Therefore, it is assumed that the Hang-ra loom is the traditional Korean Hang-ra loom with local characteristics of Wonsan. However, the prototype of the restored Hang-ra loom, which was built based on the Gisan's Hang-ra loom, was unsuccessful in weaving Hang-ra. It is assumed that the Gisan had misdescribed or omitted several details, because of their insufficient understanding of its weaving mechanism, as many other painters of genre painting. In the following process of correcting the restored Hang-ra loom, the position of the “Nullimdae” which had interfered with the movement of warp thread has been changed. Also, to recover the insufficient movement of heddle, a traditional tool called “Bigeomi” has been added, opening the warp upward. This study restores the traditional backstrap treadle Hang-ra loom that had disappeared from the folklore history, finds several complementary points, and demonstrates that the restored Hang-ra loom has succeeded in weaving Hang-ra. It is meaningful that the range of traditional fabrics could be expanded, as Hang-ra has been examined.
Keywords:
Beteul, Gisan, Hang-ra, loom, restoration키워드:
베틀, 기산, 항라, 직기, 복원Ⅰ. 서론
항라는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주요 전통직물로서 지금은 사라진 라직물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항라의 제직기술은 전승이 단절되었고 현재는 삼베와 모시, 무명, 명주 등 불과 몇 종류의 제직 기술만이 전승되고 있다. 항라가 문헌에 기록된 것은 조선중기 이후부터 이며 19세기 들어 ‘안항라’, ‘덕천항라’와 같이 국내 생산지가 표시되어 항라의 품질을 구분하였다. 항라의 종류는 소재에 따라 저항라, 마항라, 주항라, 숙항라, 생산지에 따라 왜항라, 서양항라, 안항라 또는 안주항라, 덕천항라 등이 있다.
19세기 말 평안남도 안주와 덕천에서 생산된 항라는 ‘안항라’, ‘덕천항라’라 부르며 초기에는 농가 부업으로 생산되었고 점차 수요가 늘어나자 전문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24년 “평안남도 내의 직물은 대부분 농가의 부업으로 생산되고 항라의 주요산지는 그 제조능력이 빈약하다(Silk factories, 1924).”1) 등의 자료를 통해 20세기 초반까지도 항라 생산에 재래직기가 사용되었고 항라의 품질과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개량직기를 도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은 프랑스 민속학자 바라(C. L. Varat)가 1888년 한 달간 조선을 여행하며 구매한 것으로(Cho, 2010) 풍속화에 그려진 항라직기는 민가에서 항라를 제직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항라 제직에 관한 연구는 사(紗)와 라(羅)의 제직기술에 관한 연구에서 익직의 한 종류로 논하거나(Sim, 2001) 전통직기에 관한 연구에서 기산 풍속화 에 나타나는 항라직기의 구조와 작동원리를 설명하며 항라 제직이 가능하다고 언급되었다(Sim & Park, 2003). Huh(2020)의 조복용 삼족항라를 재현하기 위한 연구에서 항라 제직에 필요한 익종광의 시험으로 항라 제직기술에 관한 연구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가 그려진 19세기 말 조선의 항라직기와 항라제직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는 부족한 상태이다.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19세기에 사용되었으나 전승이 단절된 전통베틀형 항라직기를 복원하여 항라의 직조 기술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현재 유일한 자료인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를 표본으로 하여 수행하도록 한다. 또한 19세기 항라의 유래와 항라의 생산 배경 등 항라직기가 가졌던 사회적 배경을 조사하여 전통직물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문헌조사와 현지조사, 그리고 직기의 제작을 병행하였다. 항라에 관한 선행연구, 신문기사, 회화 자료등을 중심으로 항라의 역사와 생산지, 직기 등에 관해 고찰하였다. 또한 기산 항라직기의 작동원리와 구조를 분석하여 항라의 제직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며, 현전하는 지역별 전통베틀의 구조와 비교분석하여 전통 직기로서의 전통성을 확인하도록 한다. 그리고 항라직기를 복원하여 제직을 한 후에 드러난 문제점을 수정, 보완하여 전통 항라직기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한다.
Ⅱ. 19세기 말 항라의 유래와 생산 배경
항라의 문헌기록은 조선중기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문헌 가운데 『영접도감응판색의궤(1634)』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준비하는 각양예단질, 송례물건질에 항라예단의 색과 수량, 가격이 기록되어 있다(Yeongjeobdogam [迎接都監篇], 1634). 19세기 항라는 『뎡미가례시일긔(1847)』와 궁중발기에서 의복에 다양한 종류의 항라가 사용된 것이 확인된다. 특히 ‘왜항나’, ‘셔양항나’는 일본과 영국에서 수입된 항라(Yoshinaga, 1915)로서 궁중 의복에도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외진연등록(1901)』에 기록된 “書題服色安亢羅黑團領平頂巾木靴色絲帶”는 서제복 흑단령 의복차로 ‘안항라’가 사용되어 평안남도 안주에서 생산된 항라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Naeoejinyeondeunglog [內外進宴謄錄], 1901).
19세기까지 항라의 생산지에 관한 문헌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1920년 항라를 주요상품으로 생산하는 덕천군의 시장에 관한 관습조사 기록을 보면 청일전쟁(1894~1895)이 양국 물자수입의 발단이 되어 이로 인하여 문물공예가 진보하고 시장거래도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Jungchuwon, 1920). 명치39년(1906) 우편국이 신설되어 금전수송과 소하물 운반이 용이해져 상품거래가 편리해지고 양잠과 기타 산업이 발전하여 시장거래의 규모가 커졌고 특히 대정5년(1916) 안주와 덕천 사이에 2등도로가 개통되어 물자의 운수가 한결 편리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Jungchuwon, 1920). 이는 19세기 항라의 사회적 배경으로 농가에서 부업으로 생산된 항라가 구축된 근대적 사회기반시설에 의해 상업화가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항라가 국내에서 생산된 유래에 대해서는 20세기 초의 신문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항라하면 ‘안주항라’라며 안주가 항라 생산지로 유명하지만 실제 생산은 덕천에서 하며, 안주상인이 전국으로 유통시켜 ‘안주항라’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하여(Deokchen hang-ra, 1938)2) 덕천이 실제 생산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4년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100여년 전에 덕천(德川)에 살던 안기보(安基輔)가 20대에 처가 오촌(吳村)에 다니러 갔다가 항라조직을 배워 귀향한 후 항라 제직 기술을 가문에서만 공유하다 90년 전에야 덕천사회에 공개되었다고 한다(Deokcheon hang-ra, 1934)3). 같은 해의 조선일보에는 또 다른 유래에 대한 기사가 있다. 약 70년전에 덕천군에 거주하던 장쌍동(張双童)씨가 중국에서 수입한 당항라를 풀어 잉아를 연구하여 항라와 갑사를 발명하였고 후에 갑사는 사라지고 항라만 생산 했다는 내용이다(Origin, 1934)4). 1936년의 신문기사에는 80년 전에 왕모씨가 당항라의 조직구성을 연구하여 익종광 하나로 처음에 1족항라 직물인 린소(鱗素)를 제직하였고 점차 발달하여 항라를 제직했다고 한다(Joseon’s specialties, 1936)5).
항라를 제직하는 직기의 변화를 살펴보면 1934년 조선일보에서는 대정4, 5년(1915, 16년)경에는 수직기를 개량해 기직(機織)을 했다 하였고(Origin, 1934), 1934년 동아일보에는 구식 수직기에서 10일 내외 걸려 겨우 한필 나오던 것이 20년 전부터 개량직기가 보급되어 이틀 만에 한필씩 직출하게 되었다고 하였다(Deokcheon hang-ra, 1934). 이는 대략 1915년부터 개량직기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기존의 재래직기보다 생산량이 약 5배나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22년 동아일보에는 덕천군내 기업가들은 품질개량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개량직기의 구매를 늘린다고 기록되어 있지만(Weaving internship, 1922)6), 1924년에는 평안남도 내 직물은 대부분 농가의 부업으로 생산되어 공장설비를 갖춘 곳은 평양의 몇 개소뿐이고 항라 주요산지는 덕천, 맹산, 개천, 안주 등지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그 제조능력이 빈약하다는 내용이 있다(Silk factories, 1924). 이 내용들로 보아 항라는 1800년대 중반에 민가에서 구식 수직기 즉 재래직기에서 항라를 제직하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1개의 익종광으로 사직물을 제직하다 그 기술이 발전되었고, 점차 개량직기에서 직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가 부업으로 항라가 생산되는 과정을 1934년 동아일보에서 부업으로 유망한 가정수공업으로 그 생산과 판매 등을 소개하였다. 항라가 생산되는 순천기업과 덕천기업은 생산에 필요한 원료는 자품, 자가 생산으로 각 농가에서 해결해야 하고 순천기업은 작업기간을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덕천기업은 전문적으로 한다면 하기(夏期)부터 추말(秋末)까지 약 100일 간으로 기록되어 있다(Side business, 1934)7). 이는 순천기업은 작업기간이 농가의 부업으로 농한기(農閑期)인 반면, 덕천기업은 농번기(農繁期) 약 100일로 농업보다 우선되는 전문업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항라생산에 필수적인 잠사(蠶絲)는 각 농가에서 생산하지만 모두 항라생산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1934년 동아일보에는 금년은 잠가(蠶價) 하락으로 공동판매에 응하는 이가 없기 때문에 항라의 산액(産額)이 약 3, 4할 이상 증가할 현상인데 이는 농가 자신이그 판매하지 않는 잠사(蠶絲)로써 항라직조에 전력할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Deokcheon hang-ra, 1934). 이는 농가에서 누에를 쳐서 제사(製絲)하고 그 시세가 좋으면 판매하고, 낮으면 판매하지 않았으며, 그 잠사(蠶絲)로 직접 항라를 직조하여 항라 필(疋)로 판매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잠가(蠶價)에 따라 농가에서 항라 생산량을 조절하고 항라생산에 있어 ‘부업’이라는 유동적 생산방식이 유지되는 배경으로 볼 수 있다. 각 농가에서 생산된 항라는 그 품질을 통일하기가 어려워 품질개량에 노력을 기울였다. 1936년 동아일보에는 소화2년(1927) 덕천산업조합을 설치하여 항라의 품질개선을 위해 직물 폭을 완전히 일치하게 하며 색은 희고 깨끗하게 하고 동시에 직조검사규칙을 발포, 시행하여 조합을 통해 제품의 좋고 나쁨을 가려 가격을 통일하여 판매하였다(Joseon’s specialties, 1936). 1938년에는 항라의 유사품에 대항하여 덕천항라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항라의 경위사 밀도를 통일하고 내구력을 향상시키는 개량바디를 보급하고자 했다. 이는 덕천의 견포가 경위(經緯)의 밀도가 불일치하고 구구하여 직물의 생명인 규격이 통일되지 않고 취인(取引) 또는 내구력을 보장하는 바디의 다종(多種)은 그 폐해가 커서 개량바디의 보급을 단행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Imitation, 1938)8). 이러한 내용들은 각 농가의 재래직기에서 사용되는 죽(竹)바디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개량바디를 보급하는 것으로 20세기 초반까지도 재래 항라직기로 항라를 생산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리고 당시 덕천항라의 유사품이 등장할 정도로 항라의 사용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항라의 직물 폭을 확인하고자 현존 항라 유물 중 직물의 폭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을 <Table 1>에 정리하였다. 폭은 17세기 54~62.5㎝의 범위에서 19세기 들어 34~39.5㎝, 46~55㎝ 범위로 소폭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이전에 항라를 생산한 직기와 19세기 항라를 생산하는 직기가 다르거나 소비자의 직물 폭 선호도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된다.
Ⅲ.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 분석
1. 지역적 배경과 시기
기산 풍속화 은 프랑스 민속학자 바라(C. L. Varat)가 1888년 원산 또는 부산에서 구매한 것으로(Cho, 2010) 19세기 말 조선의 항라직기가 그려져 있다. 이 항라직기<Fig. 1>는 원산에서 구매된 기산의 풍속화 ‘織機’<Fig. 2>, <Fig. 3>에 나타나는 전통베틀과 그 기대구조가 동일하며 지면과 누운다리가 이루는 경사의 각도가 크고, 앞다리와 용두머리를 받치는 기둥이 나누어져 있다. 1925년 노르베르트 베버총아빠스가 함경도와 북간도를 여행하며 촬영한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에 등장하는 전통베틀<Fig. 5>은 기산의 풍속화에 나타나는 전통베틀과 그 기대구조가 비슷해 이는 원산의 지역적 특색임을 확인시켜 준다.
2. 기대 구조
요직기인 전통베틀의 기대구조는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Fig. 4>를 보면 앞다리가 곧게 올라가 누운다리를 뚫고 용두머리를 받치는 ‘일체형 앞다리’구조와 앞다리가 누운다리를 받치고 누운다리 위에 다시 용두머리를 받치는 기둥을 세우는 ‘분리형 앞다리’구조이다. ‘분리형 앞다리’구조의 전통 베틀은 원산<Fig. 5>, 평양<Fig. 6>에서 사용된 것이 사진자료를 통해 확인되며 이는 북한지역 전통 베틀의 특징으로 보인다. 남한의 주된 전통베틀을 보면 ‘일체형 앞다리’의 기대구조가 많다. 그러나 현재 삼베를 집중적으로 제직하는 남한의 몇몇 지역에서는 ‘일체형 앞다리’구조와 ‘분리형 앞다리’ 구조의 전통베틀이 혼용되는 곳이 있다. 또한 같은 ‘분리형 앞다리’구조의 전통베틀이라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충청남도는 기대가 낮은 경사도 <Fig. 7>를 보이는 반면, 강원도는 높은 경사도 <Fig. 10>를 보여준다. 조선총독부 조사사업으로 기록된 1932년 『생활상태조사 평양부(生活狀態調査 其四 平壤府)』에서는 낮은 경사의 전통베틀 <Fig. 9>이 보이며 1931년 『생활상태조사 강릉부(生活狀態調査 其三 江陵郡)』에서는 높은 경사의 전통베틀<Fig. 8>이 보인다. 이는 1909년 평양에서 촬영된 전통베틀<Fig. 6>은 낮은 경사도를, 1925년 원산에서 촬영된 전통베틀<Fig. 5>은 높은 경사도를 따른 것으로 서쪽과 동쪽의 지역적 차이를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충청남도와 강원도 남부지역은 ‘물산(物産)’과 ‘토산(土産)’으로 저(苧)가 기록된 곳으로(Yeojidoseo [輿地圖書], 1759)9) 지금의 삼베짜기는 조선후기 이후에 발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서해를 통해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사용되는 낮은 경사의 ‘분리형 앞다리’구조가 유입되고 강원도는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에서 사용되는 높은 경사의 ‘분리형 앞다리’구조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작동원리와 부속 기구
기산의 항라직기는 원산의 전통베틀과 기대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개구방식은 용두머리에 연결된 신나무를 당겨 잉아를 위로 올리는 천칭사괘(天秤仕掛)에 해당한다. 다만 항라직기는 전통베틀에 익직을 위해 익잉아를 추가하고 개구하기 위한 용두머리, 눈썹대, 신나무, 끌신 등이 각각 추가 설치되었다. 기산 풍속화에 보이는 항라직기<Fig. 11>의 구조를 통하여 작동원리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통베틀에서 직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기에 경사가 감긴 도투마리를 설치한다. 그리고 평직을 위해 경사를 잉아실로 ‘8자’고리를 만들어 잉앗대에 걸고 그 잉앗대를 중간 용두머리의 눈썹대에 매단다. 익직을 위해 경사를 잉아실로 걸어 옆의 경사 밑으로 감아올려 ‘8자’고리로 잉앗대에 걸어 그 잉앗대를 맨 위 용두머리의 눈썹대에 매단다. 중간 용두머리는 신나무를 따라 왼쪽 끌신에 연결되고 맨 위 용두머리는 오른쪽 끌신에 연결되어 잉아와 익잉아가 각각 따로 움직인다. 이같이 경사를 걸고 잉아를 설치한 후에 직조를 시작한다.
항라조직은 평직과 익직으로 이루어져 평직을 위해 경사1과 경사2가 교대로 개구해야 한다. 그러나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는 왼쪽 끌신을 당겨 잉아를 들어, 경사 하나는 개구할 수 있지만 나머지 경사는 개구할 부속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전통베틀에는 분경구(分經具)인 비거미가 장착되어 있어 경사1이 자연 개구되고 북을 통과시켜 위사를 넣는다. 그리고 경사2는 잉아를 올려 개구하고 북을 통과시켜 평직을 제직한다. 이에 기산의 항라직기는 풍속화를 그린 화가가 직조의 전문지식이 없어 비거미를 생략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익직은 오른쪽 끌신을 당겨 맨 위 용두머리를 움직여 익잉아를 들어 올리고 북을 통과시킨다. 항라직기의 잉아와 익잉아의 개구작동은 <Fig. 14>와 같고 항라는 홀수로 북을 통과시켜 위사의 숫자에 따라 3족, 5족, 7족 등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에는 현전하는 전통 항라직기가 없으므로 중국과 일본의 항라직기를 구조와 작동원리에 따라 검토해보고자 한다. 중국의 비물질문화유산(非物質文化遺産) 항라직조기예(亢羅織造技藝) 전승자 소관흥(邵官興)은 150여년 전의 항라직기<Fig. 12>를 소유하고 있다. 기대의 구조는 고기(高機)로, 지면과 수평을 이루지만 경권축을 위로 올려놓아 기대보다 높게 위치한다. 개구방식은 천칭사괘로 익종광(搦綜絖)의 백답장자와 2개의 지종광(地綜絖)이 직인의 뒤로 길게 뻗은 지렛대에 연결되고 밑으로 답목에 연결되어 3개의 종광은 각각의 답목을 밟아서 개구된다.
일본의 민족학박물관(国立民族学博物館)에 소장된 여(絽)직기<Fig. 13>는 에치코(越後)의 방적기구와 함께 기증된 것으로 저마(苧麻)의 여직으로 반금(半襟)과 같은 장식깃을 직조하기 위해 사용되던 직기이다(Nagano, 1999). 여(絽)는 항라와 직물조직이 동일하다. 이 직기는 지기(地機)또는 ‘이자리바타(イザリバタ)’로 불리는 천칭요기(天秤腰機)와 기대구조가 같아, 기대는 지면과 수평을 이루고 경권구(經卷具)는 기대보다 높게 놓아 경사(經絲)가 사선(斜線)을 이룬다. 종광은 반종광으로 1개의 익잉아와 1개의 잉아가 각각의 용두머리에 꽂힌 눈썹대에 연결되고 용두머리에 꽂힌 신나무의 끈을 양 발에 걸고 당겨서 위로 각각 개구한다. 삼각형 분경구를 넣어 평직을 제직하기 위한 나머지 경사를 자연개구 한다. 작동원리가 우리나라의 전통베틀과 가장 유사하나 다른 점은 직인이 발을 뻗고 앉아야 한다는 것과 특히 잉아의 실고리를 단위별로 묶어 고정한 것이 다르다.
전래되는 전통베틀의 잉아는 대부분 풀 먹인 면사로 ‘8자’고리의 실잉아를 사용한다. 그러나 익잉아는 보고된 예가 없다. 『직물제조법(織物製造法)』에서는 여(絽)와 사(紗) 같은 익직물에 사용되는 반종광은 견사를 사용한다 하였고(Yagi, 1922), 『조선향직물시험성적 2』에서 마항라를 제직하기 위한 익종광에 8번 또는 10번 코튼사(カタン絲)를 사용한 것으로(Murota, 1930) 보아 익잉아는 익직의 꼬임으로 인한 실잉아의 엉킴과 마찰을 최소화할 수 있는 매끄러운 소재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잉아에 견사를 사용한 문헌기록으로 조선의 상의원에서는 잉아를 만드는데 견사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Park & Kim, 2017). 1651년 『인선왕후책례도감의궤』에서 교명제직을 위해 상의원에 ‘잉아 백사 두 근’이 소입된 기록이 있고(Inseonwanghuchaeglyedogam-uigwe [仁宣王后冊禮都監儀軌], 1651)10), 1800년 『순조관례책저도감의궤』에서 교명직조를 위해 ‘잉아차 백사 열 량’이 소입된 기록이 있다(Sunjogwanlyechaegjeodogam-uigwe [純祖冠禮冊儲都監儀軌], 1800)11). 이는 전통직기에서 잉아를 만드는 실의 종류가 제직하는 직물과 직기에 따라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
『천공개물』의 ‘화기식(花機式)’에서 바디가 달린 첩조(疊助)에 대해서 설명하길 사와 라를 직조할 때는 능과 견을 직조할 때 보다 바디치는 힘을 경감하는 것이 비법이라 했다(Cheongong-gaemul [天工開物], n.d.)12). 백답장자가 설치되어 익직을 제직하는 제화기<Fig. 15, 16>에서 바디의 힘을 경감하기 위해 누운다리를 평행으로 하여 바디가 평행으로 움직여 치는 힘이 경감되도록 하였다.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는 기대의 경사도가 높지만 사용하는 바디집은 손잡이 부분인 세로 너비가 매우 좁다. 이는 바디집의 중량을 가볍게 하여 항라직기의 경사도가 높아도 바디치는 힘이 항라를 제직하는데 무리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에 나타나는 북은 국내박물관에 소장된 북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다. 중국 남송대 <경직도><Fig. 15>와 원대 <경직도><Fig. 16>에는 백답장자(白踏樁子)가 설치된 제화기가 그려져 있다. 이는 익직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문위사(紋緯絲)가 따로 사용되지 않고 지위사(地緯絲)의 북 하나로 제직된다고 추정된다. 두 <경직도>에 나타난 북의 형태는 가운데가 불룩하며 양끝이 뾰족하다. 그리고 직인은 북의 일부를 잡고 있다. 기산의 항라직기에서 보이는 북은 비교적 크기가 크고 직인이 북의 끝을 잡고 있어 백답장자가 설치된 제화기에서 보이는 그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나 기산 항라직기의 북은 중국의 경직도에 표현된 북보다도 가운데 부분이 더 볼록하고 가장자리가 뾰족한 매우 독특한 형태를 지닌 북이다.
Ⅳ.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 복원
1. 복원 항라직기의 표본 선정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전통베틀은 ‘일체형 앞다리’ 구조의 베틀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기산의 항라직기와 유사한 ‘분리형 앞다리’구조의 전통베틀은 불과 몇 점만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민가에 남아있는 것은 드물다.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대의 표준을 정하여야만 하는데 이를 위하여 국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분리형 앞다리’구조의 전통베틀을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Table 2>는 각 박물관 소장 베틀의 특징을 정리한 것으로 기대의 길이는 215~217㎝로 비슷한 길이지만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의 전통베틀은 231㎝로 가장 길다. 그러나 210㎝에 사모턱이음으로 누운다리의 길이가 연장되어 있어 이는 오랜 세월 습기에 삭아 뒷다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기대가 연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대의 높이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전통베틀이 126㎝, 춘천박물관과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의 전통베틀이 각 134㎝, 135㎝로, 높은 경사도는강원도의 지역적 특색임을 보여준다. 또한 ‘분리형 앞다리’ 구조이며 높은 경사도를 보이는 원산의 전통베틀과 그 지역적 특색이 비슷하다. 따라서 기대가 높고 앞다리에서 뒷다리로 가면서 기대가 모이는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의 전통베틀을 항라직기의 표본으로 선정하였다.
2. 목재 선정과 기대 제작
복원하는 항라직기는 선정된 전통베틀을 기대의 표준으로 하고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와 같이 부분적으로 변경하여 설정하게 된다. 첫째로 익잉아를 설치하기 위해 용두머리 받침기둥의 높이 설정이다. 풍속화에 나타나는 항라직기는 용두머리 받침기둥의 높이가 <Fig. 1>과 같이 세워진 도투마리의 높이를 기준으로 2배가 약간 넘는다. 이는 1925년 원산에서 촬영된 전통베틀<Fig. 5>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비해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전통베틀은 용두머리 받침 기둥의 길이가 2배가 되지 않는다. 둘째로 앞다리의 고정위치 설정이다. 전래되는 전통베틀은 가로대에 앞다리가 고정되어 있으나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는 앞다리가 누운 다리에 고정되어있다. 따라서 복원하는 항라직기는 용두머리 받침 기둥은 세워진 도투마리의 높이를 기준으로 풍속화와 같이 2배 이상으로 높이를 설정하고 앞다리는 누운다리에 고정하여 <Fig. 17>과 같이 설계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베틀민요에서는 목수를 불러와 산에서 나무를 베어 베틀을 만드는 대목이 있다. 특히 지역별로 자생하는 나무를 이용하여 베틀과 그 부속의 목재로 사용한다(The Society of Korean Folk Songs [SKFS], 2012). 그러나 민요는 시기가 불분명하여 전통베틀의 시기적 목재 변화를 확인하기 힘들다. 현재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윤주열 베틀장은 전통베틀의 기대에 소나무를 사용하고 바디집은 참죽나무를 사용한다(Yeso Archive, 2020). 선정된 표본 직기는 1997년 강원도에서 구매된 베틀로 기대에 거칠게 손질한 소나무를 사용하였고 바디는 소실되었다. 따라서 복원하는 항라직기는 기대는 소나무를 사용하고 바디집과 말코는 조직이 단단하고 치밀한 참죽나무를 사용하였다. <Fig. 18>와 같이 기대의 각 부분을 재단하여 전통방식의 짜맞춤 조립으로 완성하였다.
3. 부재별 제작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에서 사용되는 부속품은 전래되는 유물에서 그 형태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에 앞서 제작한 기대와 풍속화에서 보이는 형태와 크기를 비율에 맞춰 <Fig. 19>과 같이 각각 제작하였다.
기산의 항라직기에서 사용하는 바디집은 세로의 높이가 매우 작아 직인의 손 안에 다 쥐어진다. 그리고 1925년 촬영된 원산의 전통베틀<Fig. 5>의 바디집도 손으로 잡았을 때 손 안에 여유가 있는 크기이다. 표본으로 택한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의 직기 바디집은 소실되어 그 크기를 알 수 없지만 현전하는 바디집은 대부분 폭 56~57.5㎝, 높이 5.6~6.2㎝ 정도로 현재 전통 바디집에서는 기산 풍속화에 보이는 그 크기의 바디집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손으로 잡았을 때 손 안에 여유가 있는 크기로 폭 56.5 ㎝, 높이 4㎝로 산정하여 제작하였다.
전래되는 북 중에 기산의 항라직기에서 사용된 북과 동일한 형태가 없어 풍속화에 나타나는 북의 비율에 맞춰 크기와 형태를 산정하여 제작하였다. 직인이 들고 있는 상태와 여성의 손의 크기를 감안하여 길이 27.7㎝, 너비 6.8㎝, 높이 3.4㎝로 제작하였다.
전통베틀에서는 면사에 풀을 먹여 잉아실로 사용하지만 항라직기에서 사용되는 익잉아는 매번 꼬였다 풀리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마찰에 의한 매듭과 보풀이 생기지 않게 매끄러운 견사를 사용한다. 잉아는 표본으로 택한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전통베틀과 같이 12㎝, 익잉아는 경사를 걸어 꼬아 올리는 것을 감안하여 15㎝ 길이로 산정했고 두 잉아 모두 ‘8자’ 고리의 실잉아를 만들었다.
4. 부속 기구의 수정과 보완
복원된 항라직기는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와 같이 각 부속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풍속화와 같은 부속기구의 설치로는 항라제직이 불가능했다. 이에 항라제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점을 수정해야만 했다.
첫째, 경사를 누르고 있는 눌림대의 위치를 변경해야 한다. 눌림대는 잉아가 아래에 위치한 경사를 들어 올릴 때 위에 위치한 경사가 따라 올라가지 않도록 눌러서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풍속화 에 나타나는 항라직기에서는 <Fig. 20>과 같이 익잉아 밑으로 눌림대가 들어가 고정되어 아래 경사를 들어 올릴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기산의 다른 풍속화<Fig. 21>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경사의 맨 위로 눌림대를 옮겨 <Fig. 22>와 같이 고정했다.
둘째, 앉을개가 고정되도록 보완이 필요하다. 기산의 항라직기는 <Fig. 23>과 같이 앉을개 고정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기산의 다른 풍속화에도 앉을개가 고정된 것이 보이지 않는다. 풍속화대로 복원된 항라직기는 기대의 경사가 높아 직조할 때 앉을개가 미끄러져 불편한 구조이다. 항라직기와 같이 ‘분리형 앞다리’구조이며 경사가 높게 기울어진 전통베틀인 원산의 베틀<Fig. 24>은 뒷다리의 촉이 누운다리를 뚫고 올라와 앉을개를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복원직기에서도 <Fig. 25>와 같이 촉을 붙여 앉을개가 고정되도록 하였다.
셋째, 경사의 개구를 충분하기 위한 비거미의 설치가 필요하다. 항라의 조직은 경사1과 경사2를 교대로 개구하는 평직과 경사2가 경사1을 감아서 올라가는 익직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전통방식으로 비거미를 설치하여 <Fig. 26>과 같이 경사1의 자연개구, 경사2의 잉아상구(上口), 경사2의 익잉아상구(上口)로 항라제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5. 시직
복원된 항라직기는 몇 가지 수정을 거쳐 <Fig. 27>과 같이 항라가 제직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익잉아의 개구운동으로 잉아의 실고리가 늘어지거나 줄어들어 북길이 명확하지 않게 된다. 이는 익잉아는 일반잉아의 상하운동보다 움직임과 마찰이 크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은 ‘8자’고리 실잉아는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움직임이 있다.
일본 에치코지역의 여직기는 반종광으로 실고리를 만들고 위에서 단위별로 묶어 고정했다. 이는 에치코지역의 방식으로 평직과 여직에서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에 사용된 실잉아는 묶음이 없고 여느 전통베틀의 ‘8 자’고리로 감겨진 잉앗대와 같은 구조로 보인다. 따라서 익잉아의 경우 ‘8자’고리로 실잉아를 만들고 잉앗대에 한 번 더 고리를 감아 각 고리마다 고정해 주었다. <Table 3>은 익잉아를 고정하기 전과 이후를 관찰한 것으로 익잉아의 고정 후, 어느 정도 제직 후 실고리를 확인했을 때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 없이 동일한 길이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V. 결론
항라는 현재까지 사용되는 주요 전통직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인 제직방법과 항라직기는 소멸되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통 항라직기의 모습은 1888년 구매된 기산 풍속화 에 나타나는 항라직기이다. 19세기 항라의 유래에 따르면 민가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까지도 주로 농가의 부업으로 재래 항라직기를 사용하여 생산되었다. 기산의 항라직기는 원산에서 구매된 기산의 다른 풍속화에 나타나는 전통베틀과 기대구조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원산지역의 전통 항라직기로 추측된다. 앞다리가 누운다리 안으로 들어가 기대의 경사도를 높이고 누운다리 끝에 용두머리를 받치는 기둥을 따로 세운 ‘분리형 앞다리’ 구조는 평양과 원산에서 사용되었으며 특히 원산에서 촬영된 1925년 전통베틀은 기산 풍속화에 나타나는 전통베틀과 항라직기와도 기대구조가 비슷하여 원산의 지역적 특징임을 확인시켜 준다.
기산 풍속화 에 나타나는 항라직기는 복원을 위해 남한에서 기대가 높은 경사도를 가진 ‘분리형 앞다리’구조의 강원도 전통베틀을 기대 표본으로 하였고 항라직기에 맞게 용두머리 받침기둥의 길이와 앞다리 고정위치를 변경하여 전통 짜맞춤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전래되는 유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바디집과 북은 풍속화에 나타나는 모양과 크기를 산정하여 제작하였다. 하지만 풍속화 에 나타나는 항라직기 모습 그대로 복원된 항라직기는 항라를 제직할 수 없었다. 눌림대가 잘못 놓여 경사개구를 방해하고 앉을개가 고정되지 않아 기대에서 미끄러진다. 그리고 항라제직에 필요한 경사개구가 부족하다. 이는 다른 풍속화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화가가 직기의 작동원리를 이해하지 못해 부속의 위치가 잘못되거나 생략된 경우라 생각된다. 눌림대의 위치를 수정하고 뒷다리 촉을 올려 앉을개를 고정했다. 그리고 부족한 경사개구는 우리나라 전통베틀에서 사용하는 비거미를 장착하여 자연개구로 충족하여 항라를 제직했다. 복원된 항라직기는 항라를 제직하는 중에 익잉아의 실고리가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되었다. 이에 익잉아의 꼬임과 당김을 견디며 형태상 ‘8자’고리와 같게 ‘8자’고리를 두 번 감아 익잉아의 실고리가 고정되도록 개선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전승이 단절된 전통 항라직기를 복원했다는 것과 기산 풍속화의 항라직기는 복원을 통해 항라제직이 가능하며, 그 형태와 작동원리가 조선의 전통베틀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형태의 수직용 항라직기는 전 세계적으로 현재까지 보고된 바가 없는 ‘조선의 항라직기’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석사학위 청구논문의 일부임.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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