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4, No. 2, pp.64-80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Apr 2024
Received 09 Jan 2024 Revised 11 Mar 2024 Accepted 19 Mar 2024
DOI: https://doi.org/10.7233/jksc.2024.74.2.064

잡지 『풍화』의 베트남 여성 복식 개혁 논의에 나타난 민족주의와 여성 신체 담론

연혜기
고려대학교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박사과정 재학
Nationalism and Female Body Discourse in the Discussion of Vietnamese Women's Dress Reform in the Phong Hoa Magazine
HUI QI LIAN
Ph. D. Candidate, Dept. of Comparative Literature & Comparative Culture, Korea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HUI QI LIAN, e-mail: hyeki77@naver.com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discourse on the revolution in modern Vietnamese women‘s dress in the Vietnamese magazine Phong Hóa, founded in the 1930s. The dress revolution movement, which emerged in Vietnam during the 1930s, centered on women's clothing. However, it was not a grassroots movement initiated by women, but rather a top-down process led by male elites. Nguyen Cat Tuong, the leader of this dress revolution, redesigned the traditional Vietnamese ao dai garment to emphasize curves, according to the dominant Western aesthetic standards of the time. This new style of ao dai is considered one of the earliest examples of Vietnamese women's national dress. The transition of the ao dai from a traditional women's dress to a national costume reflects the cultural shift in Vietnam during the 1930s, which emphasized the interests of the nation and ethnicity. The three-dimensional tailoring technique aimed to showcase curvilinear beauty, but it did so by negating the inherent physical characteristics of Vietnamese women and emphasizing female characteristics under the male gaze. Therefore, the gaze of women was inevitably influenced by the male gaze and national consciousness.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the body of a Vietnamese woman wearing a dress was used as a powerful tool for constructing a national identity. It represented the national costume and the body of the state in the political sense, rather than the body of the female subject.

Keywords:

national consciousness, Phong Hóa, the body of Vietnamese women, Vietnamese women's dress revolution, Vietnamese women's national costume

키워드:

민족의식, 잡지 풍화/風化, 베트남 여성 신체, 베트남 여성 복식 개혁, 베트남 여성 민족 복식

Ⅰ. 서론

프랑스 식민 지배 시기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프랑스 식민정부는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베트남에 문화적 침투를 시도했다. 프랑스 문화로 대표되는 서양 문화가 이 시기 베트남으로 대거 유입되었고, 베트남은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접어들었다. 베트남의 복식도 바로 이때부터 개혁의 길에 들어서야 했다.

베트남 전통복식 중 하나인 아오자이1)의 근대화 또한 이러한 사회문화 개혁의 일부로서 이 시기에 시도되었다. 1930년대 파리 패션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 예술가이자 저명한 패션디자이너 응우옌 깟 뜨엉(Nguyen Cát Tường/阮吉祥, 1912-1946)은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아오자이를 재해석했다. 응우옌 깟 뜨엉은 1933년에 프랑스가 하노이에 세운 동양미술대학2)을 졸업했고 당시 사회개혁 성격을 띤 지식인 단체 ‘자력문단(tự lực văn đoàn/自力文團)3)’의 일원이었다. 또한 화가로서 당시 자력문단이 창간한 간행물- 『풍화(Phong Hóa)』에 삽화 그리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Choi, 2021).

자력문단의 구성원들이 주필로 있었던 잡지 『풍화(Phong Hóa, 1932-1936)』4)는 베트남 구습의 개혁을 목표로 삼았고 전통적 윤리와 기성 제도를 비판하고자 했다(Nguyen, 1934l). 이 때문에 『풍화』의 글은 주로 사회 비판이나 서구 문학, 예술, 문화 소개에 대한 것이었고, 계몽적, 개혁적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풍화』는 프랑스 식민 통치자의 주의를 끌어, 1936년 프랑스 당국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 단명한 잡지는 베트남 여성 복식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해주었다. 복식 혁신이 여타 사회 개혁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응우옌 깟 뜨엉은 『풍화(Phong Hóa)』 잡지를 본무대로 하여 아오자이 개혁을 논의하였다(Nguyen, 1934b). 응우옌 깟 뜨엉이 『풍화(Phong Hóa)』에 재해석한 아오자이를 소개한 후, 당시 ‘자력문단’이 지닌 막강한 영향력에 힘입어 신식 아오자이는 베트남의 국복(國服)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응우옌 깟 뜨엉이 프랑스 학교에서 디자인을 배울 때 자신의 이름을 르 뮈르(Le mur)5)로 개명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디자인한 아오자이를 '르뮈르'라고 불렀다.

1930년대 하노이에는 이미 각양각색의 아오자이 전문점이 존재했는데, 르 뮈르 아오자이는 독특하고 서구화된 실루엣과 파격적인 옆트임으로 단연 대중들의 시각을 끌었고 1930년대 베트남의 문화적 상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응우옌 깟 뜨엉은 1935년부터 베트남의 마지막 황후인 남프엉 황후(Nam Phương Hoàng Hậu/南芳皇后, 1914~1963)의 아오자이를 다수 디자인하게 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르 뮈르 아오자이는 일국의 황후가 입는 복식으로서 명실상부한 국복(國服)이 된 것이다. 1930년대 탄생한 이 신식 아오자이는 1940년대에 들어 인기를 잃었지만6), 현대 아오자이의 초기 형태로서 기본적인 실루엣은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

본고는 베트남 전통 여성 복식인 아오자이를 혁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잡지 『풍화』 속 아오자이 개혁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풍화』는 잡지라는 대중 매체의 특성, 즉 문자와 이미지를 구사하는 특성을 통해 대중들에게 여성의 신체를 부각하는 새로운 여성 복식을 더욱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풍화』의 여성 복식 논의는 정치적 성격과 함께 사회적 영향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논의를 검토함으로써 베트남 여성 복식의 형태 변화를 파악하는데서 더 나아가 변혁 이면에 존재하는 복잡한 사회ㆍ문화적 요인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아오자이 개혁에 대한 기존 연구를 살펴보자면, 우선 Nguyen(2020)의 논의의 경우, 아오자이의 역사적 변화를 서구 문화의 영향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아오자이의 발전된 역사를 통해 베트남 문화생활에서 아오자이의 위상과 역할을 보여주고, 나아가 아오자이에 담은 문화적 정신과 가치를 보호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했다. Choi(2021)은 자력문단의 발전사와 응우옌 깟 뜨엉의 생애를 소개하고 아오자이의 개혁 과정을 복식사적인 시각으로 그려냈다. 최귀묵이 응우옌 깟 뜨엉의 주장과 복식 개혁 방향을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그의 논의는 『풍화』에 실린 여성 복식 관련 논의를 직접 분석하지는 않았다는 한계를 갖는다. Pham(2019)는 『Phong Hóa(풍화)』와 『Ngày Nay(투데이)』라는 두 잡지를 통해 1930-1945년 아오자이의 변화를 소개했다. 팜 타오 응우옌의 저서는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선 응우옌 깟 뜨엉을 비롯한 아오자이 디자이너의 생애를 소개하고 두 잡지의 글과 그림을 통해 르 뮈르 아오자이의 양식을 소개했다.

이상 기존 논의는 아오자이의 변화과정에 주목해왔는데, 아오자이라는 복식에 대한 분석은 디자인의 변화 측면에만 머물렀다. 『풍화』의 복식 개혁 담론 또한 제대로 분석되지 않았다. 물론 복식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복식 구조, 색채, 디자인의 변화를 밝히는 기초 연구는 대단히 중요하고 유익하지만, 복식 자체의 물질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오자이 혁신을 추동한 사회ㆍ문화적 배경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따라서 본 연구는 아오자이 개혁 과정과 그 역사적 배경을 밝힘에 있어 사회ㆍ문화적 연구방법론을 활용하고자 한다.

최근의 복식 연구는 디자인 미학을 기반으로 하여 문화적ㆍ신체사회학적 분석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성 복식을 신체와 관련지어 분석하는 연구는 이미 동아시아 여성 복식 연구에서 다수 발견 된다(Zhang & Yang, 2021). 또한 젠더적 시각으로 근대 복식을 분석한 연구도 존재한다(Lee, 2009). Entwistle(2000)은 신체사회학적으로 접근하여 근대 이후 패션문화의 발달과 사회변화의 관계를 분석했다. 엔트위슬에 따르면 복식은 신체에 사회적 신분과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다. Wang(2013)는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복식은 개인과 집단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신체 확장이며, 이런 확장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이 강조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복식은 하나의 문화적인 ‘신체 구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Foucault(1977)의 근대 권력론(Power Theory)과 Shilling(2004)의 몸과 사회이론(The Body and Social Theory)은 여성의 신체와 복식을 근대 국가 권력의 일부로 분석할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대표적 여성 복식 중 하나인 아오자이에 관한 연구는 아직 문화적ㆍ신체사회학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상의 선행 연구를 토대로 본고는 잡지 『풍화』의 1930년대 여성 복식 논의가 ‘개혁'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문화적ㆍ신체사회학적 시각에서 아오자이에 접근한다. 복식사는 일종의 문화사이자 사회사이다. 개혁 담론 속에 내포된 민족주의 사조는 여성의 신체를 일정하게 규율하였고 그것은 여성 복식 개혁에서도 드러난다. 복식을 통해 여성의 신체는 확장되고, 또한 복식을 통해 여성성의 이미지와 위치가 가시화되고 고착된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성은 베트남의 근대 개혁 담론 속에서 (피)식민주의 남성성의 타자로 배치됨으로써 개혁 내부의 젠더 구도를 고착화하였다. 복식 개혁 담론을 분석을 통해 본고는 베트남의 근대 개혁론 속 민족주의 사조와 젠더적 단층을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본론의 2장은 서구적인 여성 심미 관념과 전통적인 베트남 여성미가 대립하는 가운데, 복식개혁을 주도한 응우옌 깟 뜨엉이 제시한 서구화된 미적 기준과 아오자이의 근대화 개혁 방향을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여성의 복식이 민족 국가표상과 결부되는 한편, 민족주의 담론이 여성 신체의 미적 기준을 재구축하는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4장은 여성 복식 개혁 논의에서 곡선이 있는 여성의 신체가 근대 여성성의 가시적인 은유가 됨으로써 여성의 신체가 도구화되고 있음을 밝혀보고자 한다.


Ⅱ. 『풍화』에 제시된 새로운 미적 기준

위에서 언급했듯이 『풍화』는 자력문단이 1932년부터 창립한 간행물로 이 간행물 창간의 주요한 목표는 바로 민중을 계몽하고, 베트남 근대화의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것이었다(Choi, 2010, p. 606). ‘자력문단'의 창립 멤버들 대부분이 소설가였으며, 당시 『풍화』에 발표된 글 또한 진보적이고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옹호하는 지식인들의 글이 중심을 이루었었다. 화가였던 응우옌 깟 뜨엉은 구성원 대부분이 문인인 이 단체에서 독특한 존재였다. 그는 다른 멤버들이 선택한 문학 개혁의 길과는 다른 방향인 복식 혁신의 길을 걸어갔다.

1934년 2월 11일 『풍화』 85호, “여성을 위한 유니크한 아름다움(Vẻ đẹp riêng tặng các bà các cô)”이라는 새로운 칼럼이 등장했다. 그 이후 1년 동안 응우옌 깟 뜨엉이 주필로 이 칼럼은 모두 16편의 글을 실었다<Table 1>7). <Table 1>에서 정리한 글의 제목을 살펴보면 여성 복식 개혁을 중심으로 새로운 여성미의 기준, 재해석한 아오자이에 대한 소개, 신식 아오자이 입기에 권장, 여성에 알맞은 운동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이 하나 있는데, 제9편 「여성복의 개혁에 대해서 (Về VIỆC SỬA LẠI Y PHỤC CÚA PHỤ NỮ)」을 제외하고 남은 15편 모두 다 응우옌 깟 뜨엉이 ‘Lemur Cát Tường’이라는 필명으로 썼고, 본문에 본인이 그렸던 여성복 설계도도 넣었다는 것이다. 「여성복의 개혁에 대해서」는 응우옌 깟 뜨엉이 본격적으로 신식 아오자이를 소개한 뒤에 발표된 글이었다. 저자인 응우옌 지아 찌(Nguyễn Gia Trí/阮家智, 1908-1993)8)도 자력문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베트남 젊은 여성들에게 사회에서 나타난 보수적인 목소리를 곧이곧대로 듣지 말고, 아름답지 않으며 비위생적인 전통적인 아오자이를 벗어 응우옌 깟 뜨엉이 재해석한 신식 아오자이를 입으라고 호소했다(Nguyen, 1934i). 이를 통해 당시 『풍화』를 본무대로 이루어진 복식 개혁에 응우옌 깟 뜨엉은 홀로 싸운 것이 아니라, 자력문단 전체가 뒷받침하고 지원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Unique Beauty for Women(Vẻ đẹp riêng tặng các bà các cô)’ Column in the Phong Hoa Magazine

다시 <Table 1>을 돌아보면, 이 새로운 복식 칼럼과 함께 출발한 첫 글인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여성)의 특성과 일상적 외모 꾸미기(TÍNH ƯA ĐẸP VÀ HAY TRANG ĐIỀM)」는 마치 개막사처럼 이 칼럼의 기조를 세웠다. 즉 새로운 시대를 맞아 베트남 여성은 전과 달리 당시의 시대적 추세에 맞춘 새로운 미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미적 기준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전에 이 칼럼이 왜 당시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베트남의 시대적 상황을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1. 복식 개혁론의 제기

19세기 후반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프랑스 식민지 '코친차이나(Cochin China)'의 일부로 전락하였다.9) 당시 프랑스의 식민방침은 문화적으로 동화 정책을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1920년대까지 프랑스 식민 정부는 베트남에서 교육제도의 개혁을 실행했다. 식민 정부는 프랑스어를 보급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베트남의 전통 교육을 폐지했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한자 문화권에서 프랑스 문화 체제로 진입하게 되었고, 서구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통 교육의 폐지와 함께 전통적인 인재 선발 방식인 과거시험은 사라지게 됐다. 또한 베트남 전통문화와 한(漢)문화의 연결을 끊고, 문화 동화 정책을 더욱 잘 실시하기 위하여 프랑스 식민 정부는 국어(Chữ Quốc Ngữ/𡨸國語)10)의 보급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국어의 보급과 함께 신식 교육을 받은 서구화된 지식인들은 유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빼앗아 새로운 엘리트 계층으로 부상되었다(Le, 2018, p. 42).

베트남 여성을 위해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한 응우옌 깟 뜨엉(Nguyen Cát Tường/阮吉祥, 1912~1946)이 바로 이 새로운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었다. 당시 프랑스 교육개혁에 의해 양성된 지식인들은 베트남 근대화 개혁을 이끈 주역이었다. 그들은 베트남의 근대화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같이 모여서 여러 사회단체를 구성하였다. 동아시아 식민지로 전락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서양’, ‘계몽’, ‘민족주의’는 20세기 초 베트남의 시대적 기조에 빠질 수 없는 화두였다. 당시 사회단체들은 각종 신문ㆍ잡지 등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과 의견을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을 매개로 베트남 문화에 사상과 지식의 새로운 공간11)을 열었다(Dao, 2023, p. 238-239). 자력문단이라는 사회단체는 베트남 근대화 개혁의 길, 또한 베트남 문화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잡지 『풍화』를 창립된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전에 베트남 사람들에게 익숙한 한자, 유가사상은 이때부터 서구의 반대편으로서 타자로 변모하였고, 교육으로 배웠던 서구의 언어,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서구식 생활방식, 음식, 복식이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복식의 경우, 당시 베트남 남성들은 이미 서양식 착장에 익숙했지만, 여성의 복식은 아직 큰 변화가 없이 옛날식에 머물렀다(Tran, 2013, p. 224). 이 사실은 『풍화』 잡지의 복식 담론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성의 옷은 대부분 구미의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의 옷은 불편한 점이 많고 디자인에 예술적 아름다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여성복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다만, 색상을 더욱 밝고 풍부하게 하고, 외국의 새로운 복장을 조금 도입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사실 의미가 크지 않았다. 여성들은 옛날 검고 넓은 바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흰색바지를 즐겨 입은 젊은 여자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많지 않다. 또한 하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여성을 보자 행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Nguyen, 1934c).

위의 인용은 『풍화』 86호에 등재된 「여성 착장(Y PHỤC CỦA PHỤ-NỮ)」이라는 글의 일부이다. 첫 문장으로 우리는 1930년대 베트남 남성복이 대부분은 서구식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성복의 경우, 서구의 영향을 받아서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큰 변화가 없었다. 이에 대해 응우옌 깟 뜨엉은 ‘작은 변화가 의미가 없고, 디자인에 예술적 아름다움이 부족하다’라고 자기의 불만을 표시했다, 또한 마지막 문장을 통해 당시 여성복에 대하여 대부분 사람이 아직 보수적인 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으로 엿볼 수 있다.12)

바로 이런 여성복 근대화 발전이 미진한 상태에서 응우옌 깟 뜨엉은 여성 복식 개혁의 길을 선택했다. 『풍화』에 새로운 패션 칼럼이 나타남과 함께 이 칼럼을 맡은 응우옌 깟 뜨엉이 본격적으로 그의 복식 개혁 계획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여성복식의 근대화는 뚜렷한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개혁은 거의 응우옌 깟 뜨엉 한 사람에 의해 추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의 목표는 분명하고 발상도 뚜렷했다. 즉, 복식의 개혁은 베트남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LIAN, 2023).

2. 서구화된 미적 기준

이어서 응우옌 깟 뜨엉이 제시한 시대의 추세에 부합하는 베트남 여성의 새로운 미적 기준을 살펴보고자. 우선 앞서 언급했던 『풍화』 85호에 게재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여성)의 특성과 일상적 외모 꾸미기」라는 글은 베트남 여성에게 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제목처럼 이 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전반부 내용은 여성들이 꾸미는 걸 좋아하는 품성에 대해 저자의 긍정적인 태도를 표하는 것이고, 후반부는 여성들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의 필요성을 밝히는 내용이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남녀 불문하고 누가 아름다움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며, 나쁜 습관이 아니다...화장이 여자들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화장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자신을 아끼는 것을 보여준 것이며, 자연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 하느님은 여자아이에게 독특한 선물을 준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 선연함, 순수하며 부드러운 성격이다. 하늘이 여자에게 아름다운 외모와 부드러운 성격을 선물하지 않으면 그들은 바라던 일리 뜻대로 이룰 수 없다. 하느님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여성은 이런 특별한 은총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그 은사를 더 잘 발휘하고 오래 보존해야 한다. 따라서 여성은 몸치장을 해야 하고, 몸치장을 통해 자신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집에 있는 한 소녀가 조금만 더 치장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를 보면 누구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될 것이다. 반면, 여자는 아내로서 하루 종일 부엌에만 있으며 자기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남편 앞에 늘 매우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남자는 이런 아내에게 쉽게 흥미를 잃고 다른 여자를 찾아 나갈 것이다....내 말을 믿어라. 여성의 가치와 행복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치장에 달려 있다(Nguyen, 1934b).

우선 이 글의 전반부 내용을 살펴보면, 응우옌 깟 뜨엉은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은 보편적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여성에게 꾸미기를 권장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타인을 존중하는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의 전통 관념으로 여성의 독특한 특질, 혹은 여성의 필수 덕목인 ‘아름다움’, ‘순수함’, ‘부드러운 성격’에 대하여 응우옌 깟 뜨엉은 이런 특질이 ‘하늘이 여자에게 준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응우옌 깟 뜨엉은 성적인 차이와 젠더적인 차이를 동일시했다. 응우옌 깟 뜨엉의 서술로 여성이 예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당연지사이기에 이는 여성의 권력이 아니라 의무적인 요구에 더 맞을 것 같았다. 즉 여성은 몸치장, 옷차림에 많이 신경 써서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여성의 타고난 특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의 후반부에 응우옌 깟 뜨엉은 두 개 구체적인 사례, 즉 ‘사람에게 즐거움을 만들어 주는 치장한 소녀’와 ‘미움을 받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은 주부’의 대조를 통해 새로운 시대 베트남 여성의 가치를 제시했다. 응우옌 깟 뜨엉에 따르면 여성의 존재 가치는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치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응우옌 깟 뜨엉의 기준에 따르면 여성은 집에서 집안일을 잘하고 아이를 잘키우는 능력으로만 부족한데, 예쁘게 꾸며야 남편의 마음을 잡고 여자로서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응우옌 깟 뜨엉은 여성의 미를 추구하는 마음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여성의 존재 가치를 거의 모두 꾸미는 것과 외모의 아름다움으로 돌렸다. 이 칼럼의 첫번째 글만으로도 여성의 미적 기준에 대해 응우옌 깟 뜨엉, 혹은 당시 베트남 남성 지식인들의 모순적인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응우옌 깟 뜨엉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유식한 복식개혁자로서 베트남 여성들이 전통적인 집안에 숨겼던 봉건사회의 여성과 달리 더 모던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다른 한편, 응우옌 깟 뜨엉이 주장했던 여성의 자유와 꾸미는 범위에는 제한이 있었다. 여성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조건 예뻐야 하고, 남성들의 칭찬하는 시선과 긍정적인 평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지금 보기엔 납득이 어려운 주장이지만, 사실 베트남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지역이 근대에 들어갔을 때 대부분의 남성 지식인들이 여성에게 응우옌 깟 뜨엉의 생각과 비슷한 ‘신식 현모양처’의 요구를 제시했다. 여성은 동아시아 근대화 개혁의 과정에서 바로 이러한 남성성의 타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다시 『풍화』 의 복식 칼럼으로 돌아가서 살펴보겠다. 응우옌 깟 뜨엉은 이 첫 번째 글을 통해서 여성미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미적 기준의 필요성을 내세웠다. 이어 두 번째 글인 「여성 착장(Y PHỤC CỦA PHỤ-NỮ)」에서 그는 당시 베트남 전통적인 여성복의 단점을 지적하며, 여성의 아름다움을 위해 복식 개혁을 주장했다. 이런 여성이 더 예쁘고 시대에 맞은 복식을 필요하다는 구호에서 출발했던 응우옌 깟 뜨엉은 『풍화』 90호에서 새로운 아오자이를 대중들에게 공식적으로 소개했다.

20세기 초에 베트남 대부분 여성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오신 아오자이(Áo ngũ thân )13)를 입었다. <Fig. 1>을 살펴보면, 오신 아오자이는 평면적인 커팅 방식으로 비교적 헐렁하여 몸의 곡선을 드러내지 않았다. 상의인 두루마기는 거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기장으로 번거로운 장식이 없는 소박한 흑색 원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신식 아오자이<Fig. 2>는 전통 오신 아오자이의 앞쪽의 옷섶 세 개를 꿰매고, 앞과 뒤쪽의 옷자락도 함께 봉합함으로써 아오자이를 더 깔끔하게 개량했다. 옛날 베트남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습관을 이어받아 아오자이도 바지를 매치하여 입는다. 소매와 옷깃도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전통적인 스탠딩 칼라 대신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한 브이넥을 아오자이에 사용하고 소매도 더 넓고 끝부분에 프릴로 장식했다. 전통 아오자이에 비해 새로운 아오자이의 가장 뚜렷한 변화가 바로 실루엣의 변화이었다. 옷의 오른쪽 부분이 허리까지 터지게 되어 여성의 바디 라인이 돋보이는 실루엣을 이루었다. 그러면 왜 응우옌 깟 뜨엉은 이런 여성의 몸매를 돋보이는 실루엣을 택했을까? 『풍화』 91호에 발표된 글의 내용은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해 준다.

<Fig. 1>

Áo ngu than (Áo ngũ thân)(Morice, 1872)

<Fig. 2>

Lemur áo dài(Nguyen, 1934f)

여성의 몸매는 건강해야 아름답다...몸매가 적당하고 손발과 근육에 윤기가 나며 가슴이 우뚝하고, 키가 훤칠한 게 진정한 아름다움이었다(Nguyen, 1934g).

위의 내용으로 응우옌 깟 뜨엉에 의해 정해졌던 새로운 모던한 미적 기준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예쁜 여성은 키가 크고 가슴이 큰 몸매를 가져야 한다. 바로 이런 생각부터 출발하여 응우옌 깟 뜨엉이 좁아진 실루엣과 허리까지 터지게 된 옆트임으로 여성의 바디 라인이 잘 돋보이는 새로운 아오자이를 만들었다.

또한 응우옌 깟 뜨엉은 여성의 큰 가슴이 신체 건강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고 여겨 베트남 여성들이 유럽과 미국 여성들처럼 가슴이 풍만하게 되도록 단련해야 한다고 권했다. 응우옌 깟 뜨엉에 따르면 베트남 여성은 키가 난쟁이처럼 작아서 아무리 귀하고 예쁜 옷을 입어도 아름다움을 뽐내기 어려웠다(Nguyen, 1934g). 따라서 그는 베트남 여성에게 가슴을 압박하는 전통적인 배두렁이(Yếm)14)를 입지 말고 자신이 재해석한 가슴을 돋보이게 하는 프랑스식 브래지어를 착용해야 한다고 권장했다.

여기까지 살펴봤듯이 근대화 과정에서 베트남 미인에 대한 새로운 기준에 따라 허약하고 가냘픈 신체, 집안일만 하고 사교성이 부족한 성격 등이다 개조의 대상이 되었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받은 규수나 귀족 아가씨들은 더 이상 미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20세기 초에 베트남 여성의 얼굴이나 신체는 모두 새로운 미적 기준에 의해 개조되어야 했다.

또한 이런 볼륨 있는 여성 몸매에 대한 선호에 서양의 심미적 경향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응우옌 깟 뜨엉이 주장했던 이 새로운 여성 미적 기준은 어떤 점에서 단순히 서양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서양식 미를 선호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베트남 전통적 심미의 전복을 통해 서구화된 신식 지식인들의 문화적 우월성과 그들의 엘리트 지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베트남 여성복의 근대적 개혁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프랑스 식민 정부는 베트남에서 교육제도의 서구화 개혁을 실행했다. 당시 프랑스 학교를 나온 신식 지식인 응우옌 깟 뜨엉은 베트남 여성복의 근대화 발전이 미진한 상태에서 아오자이의 서구화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아오자이를 서구적인 미를 표방하는 방식으로 개혁하는 한편 이를 통해 신지식인들에 대한 인정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복식 개혁은 단지 한 사람, 혹은 한 단체에 의해 제기한 새로운 미적 기준을 토대로 개혁의 명분을 얻기 어려웠다. 이어서 다음 장에서 이 개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응우옌 깟 뜨엉이 어떻게 언론을 이용해서 여성복식을 국가의 표상으로 만들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Ⅲ. 불완전한 민족의식 속에서 탄생한 여성 민족 복식

앞 장에서 『풍화』에 개제된 글로 20세기 초 베트남 새로운 미적 기준의 제시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풍화』에서 나타난 복식 개혁에 관한 논의로 여성 복식이 어떻게 민족 국가와 연결되어서 ‘민족 복식’이라는 칭호를 받았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밝혔던 것처럼, 응우옌 깟 뜨엉은 『풍화』 86호에 개제한 「여성 착장(Y PHỤC CỦA PHỤ-NỮ)」이라는 글에서 베트남 여성 복식에 대한 자기의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다들, 제목을 보고 이 글은 물질적인 것만 집중해서 큰 다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사실 물질은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인간과 사물을 구별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인간은 지혜와 옷차림으로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옷은 몸을 가리는데 쓰이지만, 그것은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비추는 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가 진보하는지, 문명화되는지 알고 싶으면 그 나라 인민들의 옷차림만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구미국가의 의복은 화려하여 현지의 기후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스타일도 풍부하고 다양하다. 이는 유럽과 미국의 문화 수준이 매우 높고 문명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최근 몇 년 동안, 여성복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다만, 색상을 더욱 밝고 풍부하게 하고, 외국의 새로운 복장을 조금 도입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작은변화는 사실 의미가 크지 않았다.
앞으로 여성의 복식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나는 우선 현지의 기후에 적응하고, 우리가 하는 일에 부합하고, 우리의 몸매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에는 상큼하고 깔끔하며 예술적 아름다움과 개인 기질이 돋보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베트남만의 특색이 있어야 한다... 복식 개혁도 정수를 취하여 찌꺼기를 제거해야 하며, 중요한 것은 그 척도를 잘 파악하는 점이다. 극단적 방식은 사람들의 행복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명예까지 훼손한다(Nguyen, 1934c).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응우옌 깟 뜨엉의 주장이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옷은 몸을 가리는 데 쓰이지만, 그것은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비추는 거울일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즉 복식이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반영하고 있으니, 여성은 옛날 봉건 시기와 같은 양식의 옷을 입으면 이 나라도 후진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베트남 여성 복식 개혁의 의미는 상기 문장을 통하여 이미 여성 개인의 가치 측면에서 국가적인 차원까지 확장되었다. 따라서 응우옌 깟 뜨엉의 복식 개혁의 목표는 새로운 복식 디자인뿐만 아니라 근대 베트남을 대표할 수 있는 여성 민족 복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트남의 여성복이기 때문에 외국 여성처럼 여겨지지 않도록 ‘베트남만의 특색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20세기 초 베트남의 시대 배경을 돌이켜보면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개혁의 구호와 남성 엘리트 지식계급의 호소로 처음부터 국민 계몽, 민족 부흥의 시도와 하나로 잇닿아 있었으며,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전체 이익을 중시했다. 여성도 이때 명목상의 사회 구성원으로 민족국가라는 집단에 포함돼 있었다15)(Marr, 1976). 민족 정체성은 아직 완전히 규정되지 않았고 응우옌 깟 뜨엉의 복식 개혁은 여성복의 민족적 특색을 창조함으로써 이 나라 민족정체성의 징표를 만드는 시도였다.

그러나 왜 국기나 국장 말고 하필 여성복을 택해서 이를 국가의 상징으로 만들었을까? 응우옌 깟 뜨엉의 말대로 예전에 베트남은 중국의 종속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의 복식이 중국의 복식과 다른 것 없었다. 안남(安南)16)인은 안남말을 했지만, 자기가 안남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Nguyen, 1934d). 즉 응우옌 깟 뜨엉을 비롯한 이런 서구화된 지식인들이 보기엔 당시의 베트남 사람들이 아직 자기가 중국과 달리 베트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베트남에는 자기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복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민족 복식에 대한 개념도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를 통해 당시 베트남의 민족 정체성이 불완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불안정한 민족 정체성에 대한 풍자는 『풍화』 104호에도 실렸다. 이 글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트남 사람의 특성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나에게는 묻지 마라. 하늘은 베트남 사람을 퍼즐처럼 조합했다. 서양인의 것을 조금 빌리고, 중국의 것을 조금 빌리고, 일본의 것을 조금 빌리고, 검은 이빨만이 베트남 자기의 것이다(Tran, 1934).

이 글은 베트남 사람은 서양인, 중국인, 일본인으로 맞춘 퍼즐과 같고, 검은 이빨만 베트남 사람으로서의 민족 특징이라고 풍자했다. 아직 민족의식은 완전히 형성되지 못한 당시 베트남의 사회현황의 일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복식으로 출발한 응우옌 깟 뜨엉의 복식 개혁은 베트남 일반 민중의 민족의식을 환기시키는데 정치적 발언이나 문학적 교화보다 거리감 없이 더 친근한 방식인 것 같았다. 당시 한문이나 라틴어화 된 베트남어나 일반 민중에게 다 친절하지 않았던 것이고, 문학이란 상층계급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식은 누구든지 매일 접해야 하는 것이며 계층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두의 생활필수품이다.

한편, 비록 응우옌 깟 뜨엉의 많은 주장에는 여성에 대한 편파적인 시선이 배어 있었지만, 20세기 초 베트남 사람이 겪었던 사회문화적 혼란과 불완전한 민족의식 속에서 그가 ‘민족 복식’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베트남에서 제기하는 것은 그의 주장에 시대를 앞서간 부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응우옌 깟 뜨엉의 사상적 포부는 개혁 과정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그가 디자인한 신식 아오자이는 너무 서구화된 형태였기 때문에 과연 베트남을 대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사회적 논란이 발생했다.

응우옌 깟 뜨엉의 주장에는 서구를 본위로 무조건 서구의 것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런 까닭으로 그가 디자인한 신식 아오자이도 서구화될 수밖에 없었다. 소매, 옷깃, 실루엣, 심지어 원단까지 다 서구화되었다. 따라서 응우옌 깟 뜨엉이 디자인한 아오자이는 명색이 신시대 베트남의 민족복식이지만, 결국 베트남 아닌 서구 복식처럼 만든 것일 뿐이었다. 응우옌 깟 뜨엉에 의해서 중국과 비슷한 전통적인 복식이 베트남을 대표할 수 없으며, 유가 문화의 상징인 그 스탠딩 옷깃은 베트남의 습하고 더운 날씨에 입기 불편한 쓸모없는 디자인이었다(Nguyen, 1934b). 그러나 결과로 보면 응우옌 깟 뜨엉의 개혁은 디자인상의 중국요소를 프랑스 요소로 대체했을 뿐이었고, 베트남 요소는 여전히 부재의 상태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당시 이런 신식 아오자이는 디자인과 옷차림 방식이 모두 서구 복식과 비슷해서 프랑스와 서양의 혼합체일 뿐이고 순수한 베트남을 대표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Pham, 2019). 이런 비판에 대해서 응우옌 깟 뜨엉은 새로운 아오자이의 서구 색채를 인정하고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상투 머리(búi tóc) 대신 짧은 머리를 하고, 양복을 입고 만났을 때 악수 한다. 그래서 나는 서양 여성의 옷의 아름다움과 편리함을 가져와 베트남 사람들의 옷의 불편함을 대신했다(Nguyen, 1934d).

응우옌 깟 뜨엉의 주장대로 베트남 사람의 일상은 이미 서구식 스타일로 전환해 왔는데, 남자들은 다 ‘단발머리’로 자르고, 양장을 입는데, 여성복식도 서구적인 디자인을 채택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반박이 당시 다른 지식인들이 보기엔 설득력이 떨어져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신식 아오자이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은 이 복식에 나타난 서구요소를 반대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문화 동화정책으로 서구화된 베트남이라도 진정한 서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구문화도 베트남 문화가 아니라서 당연히 베트남을 대표할 수 없다.

이런 복식 개혁을 둘러싼 논란은 겉으로 보면 여성 민족 복식에 대한 논의지만, 본질적으로 베트남의 민족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여기서 여성 복식에 대한 논의는 전적으로 국가와 민족의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복식 개혁 논의를 통해 베트남 여성 복식은 20세기 초에 새로운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즉 ‘민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복식의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베트남 ‘여성 민족 복식’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여성 복식이 민족국가의 은유가 되도록 강요당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왜 여성복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앞서 살펴본 응우옌 깟 뜨엉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베트남의 남성복은 여성복보다 더 빨리 서구화되어서 19세기 말부터 현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의 서구화된 남성복에 대해 지식인들이 큰 이의가 없고 익숙해 갔다. 반면, 아직 서구화 되지 않은 여성복, 남성 지식인들이 보기에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여성복은 낙후한 나라의 징표가 되었고, 복식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남성 지식인들은 여성복에 대한 개혁을 통하여 진보적, 서구적, 민족적 베트남을 구축하려고 했다. 즉 나라의 새로운 이미지를 새로운 여성 복식으로 가시화되도록 이 개혁을 제기하고 시행했다.

한편, 지금까지 살펴본 자료 중에도 베트남 남성 민족 복식을 만들자는 제안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처럼 이 개혁 대상인 여성 복식의 주체, 즉 여성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남성 지식인들이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옷을 입는 것이 여성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의무라고 생각하였으며, 언론에서는 복식 개혁에 대해 여성 개인의 의견도 거의 담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런 논의를 통해 베트남의 여성복이 본격적으로 국가의 표상으로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는 민족 국가와 연결된 신식 아오자이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가시화하는 방편 도구가 되었다. 이런 복식 논의를 통해 여성신체에 개입한 성적 응시와 국가적 메시지에 대하여 다음 부분에서 분석할 것이다.


Ⅳ. 복식 개혁 논의 아래 도구화된 여성의 몸

신체 사회학의 시각으로 보면 '사회적인 몸'은 '생물학적인 몸(natural body)'의 체감 방식을 제한한다. 그러나 몸의 생리적ㆍ신체적 경험은 사회적 범주에 의해 항상 수정되고, 바로 사회적 범주를 통해서만 몸을 더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Douglas, 2003). 따라서 생리적인 몸에는 사회의 특정한 관념이 항상 담겨 있다. 즉, 여성의 몸의 역사는 결코 그 생리적인 의의에 국한되지 않고 신체의 변화는 사회 발전 상황의 특징뿐만 아니라 문화, 정치, 이데올로기 등의 많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20세기 초 베트남 엘리트의 사회에 대한 근대적인 상상과 기대 아래 복식 개혁에 대한 남성 지식인들의 논의가 여성복에 집중됐다. 응우옌 깟 뜨엉이 재해석한 신식 아오자이는 몸에 맞는 라인과 몸이 과감하게 드러나는 트임으로 베트남 여성을 전통적인 심미 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당시 『풍화』 에 일련의 복식 개혁 논의와 운동에 대한 권장은 바로 여성의 몸을 이용해 작동하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진 개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이 장에서 복식 개혁 논의에서 나타난 여성 신체에 대한 담론을 살펴보도록 하고자 한다.

응우옌 깟 뜨엉은 『풍화』 90호에서 자기가 디자인했던 신식 아오자이를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이런 당시 보기엔 파격적인 복식을 처음 소개하는데 받아들기 쉽게 해주기 위해서 그는 복식의 디자인이념도 글로 설명해주었다. 바로 허리선을 잘록하게 처리한 디자인에 대한 설명에서 여성 신체미의 새로운 기준이 제시되었다.

제가 허리선을 잘록하게 잡아주는 이유는 여성의 복부와 가슴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일부 베트남 윤리학자들의 견해와 배치되는 것은 서양인들이 일반적으로 여성 가슴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 마치 '가슴이 없다'는 것처럼, 즉 가슴은 움직이는 오메가(Omega) 시계처럼 평평하다면 결코 미녀라고 할 수 없다(Nguyen, 1934f).

여기서 응우옌 깟 뜨엉은 여성의 몸매 미추를 판단하는 관건 부위를 제시했는데, 바로 가슴이었다. 가슴의 크기는 응우옌 깟 뜨엉의 서술로 여성 몸매의 미의 척도가 되었다. 이런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이 당시 보기에는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유가 사상에서 여성의 큰 가슴은 실덕(失德)ㆍ음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17) 따라서 베트남 여성의 가슴은 오랫동안 옷으로 가려져 있었다. 심지어 여성들은 자신의 가슴에 대해 혐오하는 마음까지 가졌었다(Nguyen, 1934m). 그러나 응우옌 깟 뜨엉은 여성의 큰 가슴이 신체 미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할 때 당시 이런 파격적인 신체 관념에 대해 여성들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복식 개혁가로서의 응우옌 깟 뜨엉은 그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바로 다음 글에서 응우옌 깟 뜨엉은 베트남 여성의 몸매, 특히 구미 여성보다 작은 가슴에 대한 강렬한 불만을 표했다. 응우옌 깟 뜨엉에 의하면 베트남 여성은 구미 여성에 비해 키가 난쟁이처럼 작아서 아무리 귀하고 예쁜 옷을 입어도 아름다움을 뽐내기 어렵다. ‘난쟁이’는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응우옌 깟 뜨엉는 베트남 여성의 몸매는 담뱃대(Cái xe điếu)처럼 뼈만 남거나 절임 오징어(Cá mắm mực)처럼 말라서 결함 있는 몸매였다고 비판했다(Nguyen, 1934g). 이런 극단적이고 풍자적인 말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베트남 여성 신체의 미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다음, 응우옌 깟 뜨엉은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여성의 몸매는 어떻게 하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여성의 신체는 건강해야 아름답다. 여성의 건강한 몸은 어떤 모습일까? 몸매가 적당하고 손발과 근육에 윤기가 나며 가슴이 우뚝하고, 키가 훤칠한게 진정한 아름다움이었다(Nguyen, 1934g).

앞의 응우옌 깟 뜨엉의 말에 따르면 아름다운 몸매는 키가 크고 가슴이 큰 몸매였다. 또한 신체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는 베트남 여성들이 유럽과 미국 여성들처럼 가슴이 우뚝하게 되도록 단련해야 한다고 권했다. 실제로 『풍화』에 스포츠를 소개하는 기사가 여러 편 실렸다. 응우옌 깟 뜨엉에 의해서 여성에게 스포츠는 밥처럼 꼭 필요한 것이었다(Nguyen, 1934g). <Fig. 3>는 바로 응우옌 깟 뜨엉이 그렸던 단련법 설명도이다. 지금 우리가 익숙한 팔굽혀펴기와 비슷하다. 또한 이 글의 제목인 「Một môn thề thao」는 바로 ‘체조 하나’의 뜻이다. 즉 복식을 예쁘게 디자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옷을 입는 여성의 신체까지도 아름다운 상태에 처해야 한다. 물론 이런 아름다움은 응우옌 깟 뜨엉이 서구 당시의 주류적 심미관념에 따라서 정한 것이었다.

<Fig. 3>

Chest Training(Nguyen, 1934g)

한편, 운동 권장뿐만 아니라 여성의 가슴 윤곽을 드러내기 위해 응우옌 깟 뜨엉은 베트남 여성에게 가슴을 압박하는 베트남식 배두렁이(Yếm)를 입지 말고 자신이 디자인한 가슴을 돋보이게하는 신식 브래지어를 착용해야 한다고 권장했다<Fig. 4>. 이로 응우옌 깟 뜨엉이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베트남 여성 신체에 대한 ‘개조’는 옷부터 몸까지 이루어진 것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발언권을 가진 베트남 지식인들은 아시아 여성의 몸매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는 추동력은 바로 그들의 서구화된 심미 관념이었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그들이 부정한 것은 베트남 여성의 신체뿐만 아니라, 베트남 여성의 신체적 특징으로 드러난 취약하고 낙후한 식민지로 전락된 베트남이었다.

<Fig. 4>

Bra(Nguyen, 1934n)

그렇다면 응우옌 깟 뜨엉이 주도한 이 복식 개혁은 당시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당시 사이공의 첫 번째로 르 뮈르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은 인터뷰에서 이런 신식 아오자이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름답고 올바른 것을 볼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용감하게 추구해야 합니다. 어느 날엔가 여자라면 누구나 예쁘며 색깔이 독특하고 잘 어울린 옷을 한 벌씩 갖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Phan, 1935).

비록 전술한 바와 같이 응우옌 깟 뜨엉 본인의 주장에서 여성에 대한 무리한 요구(키, 가슴, 볼륨이 있는 몸매에 대한 요구)와 서양인들에 비해 작은 몸집에 대한 풍자가 있었지만, 위에 내용대로 오히려 이런 신식 아오자이를 입은 것은 여성이 용감하게 미를 추구하는 선택이 되었다. ‘누구나 예쁘며 색깔이 독특하고 잘 어울린 옷을 한 벌씩 갖고 있다’는 소망으로 응우옌 깟 뜨엉이 추진한이 복식 개혁은 베트남 중산층 여성 사이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보면 황후까지 입은이 새로운 아오자이는 여성복으로서 1930년대의 베트남의 한 단면, 즉 복식문화를 구현하는 징표라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여성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응우옌 깟 뜨엉을 비롯한 베트남의 여러 개혁자들에 의해 제창되고 정의된 것이었다. 다시 처음에 응우옌 깟 뜨엉의 말을 돌이켜보면, 여성은 여성답게 착장해야하고, 즉 여성성에 부합해야 했다. 사실 아오자이는 물질적인 복식으로서 ‘여성스러움’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이런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미학 관념(당시 서구의 미학 사상)이 곡선이 돋보이는 실루엣으로 가시화됨으로써 신식 아오자이는 여성성의 복식적, 혹은 신체적인 기호로 탈바꿈 되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복식 개혁논의는 모두 언론매체, 즉 잡지 『풍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성성’은 치파오와 아오자이의 포장과 매체의 작용을 통하여 문화적인 의미가 희석되었다. 원래 사람이 여성성을 문화적으로 부여받았다고 인지할 수 있었는데, 이제 여성성의 문화적 의미가 가려져서 여성은 여자답게 입어야 하며 이런 여성스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원래있었던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또한 이런 여성성의 핵심인 곡선이 있는 몸매는 당시의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았고, 심지어 도발적인 특징을 가지고 되었다. 이러한 도발적인 특성은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서 원래 봉건 사회에서 숨겼던 여성의 신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직접적으로 증폭되었다. 잡지와 신문의 대중성을 이용하여 남성은 여성에 대한 신체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신체 곡선을 돋보이게 하는 아오자이의 디자인은 문자와 그림을 통해 베트남 여성의 현대적인 신체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부정을 당한 베트남 전통적인 여성의 신체 특질은 식민국가라는 비참한 현실의 가시적인 은유가 되었고, 개혁 담론은 새로운 ‘서구화된 여성 신체’를 남성 엘리트의 기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진보적 이미지로 바꿔 놓았다. 이러한 감쪽같은 개념적 치환의 작용 아래 신식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 풍만한 가슴을 위해 단련한 여성은 머릿속에 깊이 새겼던 기존의 심미 관념을 뒤집고, 자기의 신체를 부정하며 남성적 시선에 의해 만든 여성성을 돋보이는 방식으로 이 나라의 새로운 모습을 만드는 데 자기의 한몫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들의 기여는 남성 엘리트가 추진한 개혁의 성과로 여겨지기 때문에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아오자이에 대한 개혁 논의 아래 여성의 ‘몸’은 단순한 육체적인 존재를 넘어 식민주의 남성성의 타자로서, 국가의 부강과 근대화를 실현하는 도구 중의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Ⅴ. 결론

20세기 초반 베트남의 거의 모든 지식인 계층은 어떻게 민족문화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지식인층은 잇달아 계몽 및 개혁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그들 중 응우옌 깟 뜨엉은 복식 개혁의 길을 선택했다. 『풍화』 잡지는 이러한 복식 개혁의 결과물인 신식 아오자이의 산실이자 베트남 근대 개혁의 증인이었다. 본고가 『풍화』 잡지 속 복식 개혁 담론에 대해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1930년대 베트남의 복식 개혁은 여성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여성의 자발적인 움직임의 결과가 아니라 남성 지식인들의 제창과 매체의 힘을 통해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베트남 근대 여성 복식의 탄생은 남성 엘리트가 주도하여 아래로 전달되는 변혁 과정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베트남 사회, 그리고 요동치는 민족의식 속에서 응우옌 깟 뜨엉은 서구 심미에 부합하는 곡선이 돋보이는 실루엣으로 아오자이를 재해석했다. 아오자이 개혁에는 ‘진보적 서양’, ‘민족 부흥’에 대한 동경이 상징적인 디자인을 통해 녹아들어 있던 것이다. 신식 아오자이의 탄생은 서구의 식민통치 아래 형성된 베트남의 근대성이 투사된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오자이가 여성 복식에서 여성 민족복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국가와 민족의 공동의 이익을 지향하는 문화적 이행기에 처한 베트남의 시대적 목표를 보여주었다. 아오자이는 응우옌 깟 뜨엉의 개조를 통하여 진보하는 베트남 여성을 상징화함과 동시에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는 유용한 도구로 재탄생했다. 서양의 지배로 인해 국가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베트남은 새로운 이미지 변환이 필요했다. 아오자이 개혁안은 심미 관념의 변천을 반영하는 한편, ‘베트남을 대표하는 여성’으로 여성의 신체를 주조한 민족주의 담론의 폭력성이 디자인을 통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아오자이 개혁안은 여성의 신체 곡선을 부각하였는데 베트남 여성의 신체는 봉건 사회와 달리 입체적인 커팅을 통해 곡선미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성’을 ‘볼륨 있는 몸’으로 치환하는 심미 관념은 남성 지식인에 의해 부여된 것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여성들의 심미관에는 남성적 가치관과 국가관이 침투될 수밖에 없었다. 복식 개혁 담론은 신식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의 신체적 이미지와 국가의 이미지를 동일시하였고, 20세기 초 베트남 여성의 신체는 여성 개인이 주체가 되는 몸이 아닌, 정치적 의미에서의 몸, 민족 복식을 통해 규제되는 몸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본고는 베트남 잡지 『풍화』 속 여성 복식에 대한 개혁논의를 살펴보았다. 그동안 복식사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베트남의 복식 근대화 과정은 베트남 복식문화와 여성 신체 관념의 전환, 오랫동안 고착된 베트남(동아시아) 사회 내부의 성 역할 개혁이라는 점에서 혁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본고는 베트남의 복식사를 근대이행기의 사회문화 및 젠더 개념 변화와 관련지어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아오자이를 통해 형성된 근대 베트남의 새로운 여성 이미지에는 국가, 사회, 민족이 상호작용하고 있었고, 근대화된 여성 복식과 젠더 역할은 남성성의 타자로 배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의 연구 대상은 『풍화』 잡지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베트남 여성들의 생각을 드러나는 자료를 폭넓게 다루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추후 연구는 보다 넓은 범위(문학작품, 신문, 영상 등)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한편, 동아사아 다른 나라의 복식사와 더불어 비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석사학위논문과 겹친 부분이 있음.

Notes
1) 아오자이는 베트남의 전통 여성복이다. 베트남어로 아오자이란 '긴 옷'을 뜻하며, 현대에는 주로 여성이 입는 옷을 한정하여 가리킨다. 아오자이는 18세기 순화(順化) 광남국(廣南國)에서 만들어진 궁중의상으로 시작하여 19세기와 20세기 초 오신(五身) 귀족두루마기로 탈바꿈했다. 응우옌 깟 뜨엉은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1930년대에 아오자이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하여 디자인했다. 그리고 1940년대 사이공 디자이너가 이 옷을 조여 지금 베트남 여성이 입는 아오자이에서 볼 수 있는 스텐딩 칼라와 래글런 소매의 디자인을 만들었다.
2) 1924년에 설립된 동양미술대학은 오늘날 베트남 미술대학의 전신이다.
3) 1930년대 베트남 통킹(Tonkin)의 좌파 문학 단체였고, 서구화의 길을 택해서 앞 시대의 문학과는 다른 신문학을 창조하고자 하는 자각적인 창작 활동을 한 문인 그룹이었다.
4) 『Phong Hóa』(1932-1936)는 베트남 하노이시가 발행하였던 주간 신문이다. 『풍화』는 신문학, 회화, 음악, 현대 패션 스타일을 소개하는 예술적인 주간지였다. 베트남의 첫 현대식 아오자이는 1934년 『풍화』 신문에 처음 등장했다.
5) 프랑스어로 ‘벽’의 뜻이다.
6) 당시 베트남 사람들의 사상은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신식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을 '탕부(蕩婦)'라고 불렀다. 1940년대에 들어 아오자이는 기존의 차이나 칼라와 심플(simple)한 스타일을 되찾았다.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응우옌 깟 뜨엉을 말할 때 그의 아오자이가 아니라 영광만을 이야기한다(제시한 내용은 Phạm Thảo Nguyên의 저서인 『Áo Dài Lemur và bối cảnh Phong Hóa & Ngày Nay』 참조).
7) 인터넷에서 공개된 『풍화』 원본 자료로 1934년부터 1936년 폐간된 까지 이 칼럼은 1934년만 존재했고, 총 16편 글을 실었다. 인터넷 주소: http://baochi123.info/forums/tuan-bao-phong-hoa-1932-1936.26/
8) 응우옌 지아 찌는 『풍화』에서 사용했던 필명이 여러 개 있지만, 팜 테 응으(Phạm Thế Ngũ)의 저서 『베트남의 역사 문학 신편(Việt Nam văn học sử giản ước tân biên)』에 따르면 ‘지아 찌’의 발음이 베트남어 ‘가치(Có)’와 같아서 ‘Có’가 나타난 필명은 응우옌 지아 찌의 쓴 글이라고 볼 수 있다.
9) 1858년에서 1884년까지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식민 노역을 위해 3차례의 침략 전쟁을 벌였다. 이전에 몽골제국까지 이긴 전투의 민족인 비엣족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결국 베트남은 굴욕적인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1884년에서 1885년까지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宗主權)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청불전쟁(清法戰爭)은 청나라의 실패로 끝났다. 코친치이나는 프랑스의 동남아시아에 있는 식민지 연방으로 베트남(코친차이나ㆍ통킹ㆍ안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10) 베트남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는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법이다.
11) 베트남 삼기(三圻, 지역 구분 용어)에는 모두 대표적인 저널이 있었다. 삼기는 남기(南圻), 복기(北圻), 중기(中圻),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남기는 서구의 영향을 제일 깊은 받아서 최초의 국어 신문 『가정보(Gia Định báo)』 가 남기에서 탄생했다. 1920년대 이후 여성을 위하여 설립한 『여성 신문(Phụ Nữ Tân Văn)』 도 나타났다. 북기에는 『남풍 잡지(Nam Phong Tạp Chí)』가 있다.
12) 근대까지 베트남 여성의 전통적인 착장 습관에 따라 성년 여성은 검은 색 바지를 입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13) 1744년 응우옌 푹 코앗(Nguyễn Phúc Khoát/阮福闊)은 등급 제도를 강화하고 귀족의 지위를 부각하기 위해 베트남 소수민족과 당시 청나라 한족들의 복식을 결합하여 오신(五身) 아오자이(오신 두루마기)를 만들었다. 오신 두루마기는 이전에 있었던 사신 두루마기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지만, 앞쪽에는 세 개의 천이 꿰매 이어져 있고 그중 왼쪽의 옷섶은 두 개의 천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오신’이라고 부른다.
14) 여성복으로 상반신 가슴 부분만 가리는 얇고 작은 상의다.
15) 1930년 10월 20일 베트남 부녀반제회(越南婦女反帝會, 今베트남여성연맹)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는 베트남 여성도 국가의 일원으로서 공식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의 소리를 내는 시사점이라고 할 수 있다.
16) 베트남의 고명이다.
17) 베트남 민요에서 여성의 큰 가슴을 조롱하는 가사가 있다. 'Con gái chơi với con trai, về sau đôi vù bằng hai quả(여자가 남자랑 같이 놀고 유방 두 개가 파파야 같다).' 제시한 내용은 Nguyễn Bích Hằng의 저서 『Ca Dao Việt Nam』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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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Fig. 1>
Áo ngu than (Áo ngũ thân)(Morice, 1872)

<Fig. 2>

<Fig. 2>
Lemur áo dài(Nguyen, 1934f)

<Fig. 3>

<Fig. 3>
Chest Training(Nguyen, 1934g)

<Fig. 4>

<Fig. 4>
Bra(Nguyen, 1934n)

<Table 1>

‘Unique Beauty for Women(Vẻ đẹp riêng tặng các bà các cô)’ Column in the Phong Hoa Magazine

Published Title Author
1934-02-11. No. 85 「The love of beauty and dress up (TÍNH ƯA ĐẸP VÀ HAY TRANG ĐIỀM)」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a)
1934-02-23. No. 86 「Costume of women (Y PHỤC CỦA PHỤ-NỮ)」 Introduction of new sleeve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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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03-23. No. 90 「Costume of women(Y PHỤC CỦA PHỤ-NỮ)」 Introduction of new ao dai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f)
1934-03-30. No. 91 「A kind of gymnastics (MỘT MÔN THỂ THAO)」 The necessity of keeping exercising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g)
1934-04-06. No. 92 「A kind of gymnastics (MỘT MÔN THỂ THAO)」 Introduction of gymnastics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h)
1934-04-13. No. 93 「About the reform of women's dress (Về VIỆC SỬA LẠI Y PHỤC CÚA PHỤ NỮ)」 Co H. T. C
1934-05-04. No. 96 「New Style of Pants (MẤY MẪU QUẦN MỚI)」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j)
1934-06-01. No. 100 「Dress for Country Women (MỘT KIỂU Y-PHỤC NHÀ QUÊ)」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k)
1934-06-08. No. 101 「House wear (ÁO CÁNH MẶC TRONG NHÀ)」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l)
1934-06-15. No. 102 「A kind of gymnastics (MỘT MÔN THỂ THAO)」 Introduction of chest exercises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m)
1934-06-22. No. 103 「Bra (CÁI YẾM)」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n)
1934-07-06. No. 105 「New bras (MẤY KIỀU YẾM MỚI)」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o)
1934-07-13. No. 106 「A kind of bra (MỘT KIỀU ÁO MẶC MÙA NỰC)」 Lemur Cát Tường(Nguyen, 19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