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휴의 『백호전서(白湖全書)』에 나타난 심의제도 연구
Abstract
This research aims to study Yun Hyu's Simui system as described in the Simuijego(深衣制考) within Dokseogi(讀書記) Doksangbokjeon(讀喪服傳) of Japjeo(雜著), Book 42 of Baeghojeonseo(白湖全書). Rather than follow Zhu Xi's Simui system, which was perceived as a canon, Yun Hyu criticised the theoretical and practical problems in Zhu Xi's Simui and presented his own Simui system based on the evidence of traditional practices and his own interpretation to solve them. Yun Hyu's Simui system is characterised by the following features. Yun Hyu's Simui featured an overlap-style Jikryeong Simui with a Seop attached at the top, providing substantial coverage to the upper body. The front bodice and back bodice each measured 2cheok and 4chon in waist width, and the width of the bodice and Seop was 1cheok and 2chon. The garment included two skirts attached to the outer, inner and back bodices of the front bodice, as well as to the Seop. Notably, Yun Hyu's design incorporated overlapping elements in both the bodice and skirts, creating a deeply wrapped lower body. Detailed measurements included a bodice length of 2cheok and 2chon, an armhole width of 1cheok and 4chon, a sleeve width of 2cheok and 2chon, and a sleeve wrist circumference of 1cheok and 2chon, accommodating the comfortable placement of Daedae accessories beneath an armhole. Moreover, Yun Hyu's introduction of round sleeves, which tapered toward an armhole and wrist, marked a significant departure from the traditional garment construction. This study highlights Yun Hyu's Simui as pivotal in the evolution of this traditional Korean garment during the Joseon Dynasty for several reasons. First, it represented a variation on Zhu Xi's Simui, challenging established norms and proposing new interpretations within Joseon Confucianism. Second, Yun Hyu's structural innovations, such as the overlapping bodice and skirt pieces and the introduction of round sleeves, contributed significantly to the development of other traditional attire. Finally, Yun Hyu's Simui exerted a lasting influence on subsequent scholars, notably impacting Lee Ik's (1681-1673) Simui system and facilitating the division of Joseon Simui into Jikryeong Simui and Bangryeong Simui. This study underscores the significance of Yun Hyu's Simui system during the Joseon Dynasty, offering a comprehensive analysis of its historical importance.
Keywords:
Baeghojeonseo, Jikryeong Simui, Seop, Simui, Yun Hyu키워드:
백호전서, 직령심의, 섶, 심의, 윤휴Ⅰ. 서론
윤휴(尹鑴, 1617∼1680)는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백호(白湖)로 1617년에 경주 부윤(府尹)이었던 부친 윤효전(尹孝全, 1563∼1619)의 임소(任所)에서 태어났으며, 모친은 경주 김씨이다. 두 돌이 못 되어 아버지를 여읜 뒤 외조부 김덕민(金德民, 1570∼1651)에게 글을 배웠고, 이후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 1589∼1670)와 선친의 교우인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터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윤휴의 나이 19세인 1635년에 당대의 석학이자 10년 연장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3일동안 열띤 토론을 하였는데 송시열이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라며 윤휴의 높은 학문 수준을 칭찬하였다. 윤휴를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김석주(金錫冑, 1634∼1684)도 그의 문장이 아깝다고 했을 정도로 윤휴의 학문적 경지는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윤휴는 주자 성리학이 교조적 권위를 누리던 당대에 주자의 학설을 추종하여 이를 묵수(墨守)하려는 태도를 배격하고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년) 때 복제 문제에 있어 송시열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가장 먼저 지적하고,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년) 때에도 서인 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기호학파 노론과 극한의 당파적 대립을 겪으며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되어 1680년에 64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09).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 신원(伸冤)과 추증(追贈)이 행해지면서 아들 윤하제(尹夏濟, 1645∼?)와 윤경제(尹景濟)가 유고를 정리하여 24책 분량의 『하헌집고본(夏軒集稿本)』을 남겼으나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1910년 이후에서야 윤휴에 대한 재조명이 이어지면서 1927년에 8대손 윤신환(尹臣煥)이 영남 유림의 협조를 얻어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처음으로 『백호문집(白湖文集)』을 석판본(石版本)으로 간행하였다. 1935년에는 윤신환이 다시 백호독서기(白湖讀書記)를 정리해서 독서기(讀書記)가 10권 3책으로 편차되어 유인본(油印本)으로 간행되었다. 1974년에는 직계손 윤용진(尹容鎭)이 비밀리에 비전(祕傳)되던 윤휴의 원고들을 망라하여 그의 문집을 집대성한 『백호전서(白湖全書)』를 전서본(全書本)으로 출판하였다. 『국역 백호전서』는 1974년에 간행된 원집 46권, 부록 5권의 전서본을 대본으로 하여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1집의 완역본(完譯本)으로 출간하였다(Yun, 1974/2004).
『백호전서』에 나타난 윤휴의 주요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원시 유학 중심의 경학(經學) 사상이고, 둘째는 이를 현실에 구현하는 예론이며, 셋째는 북벌로 대표되는 각종 시무책에서 드러나는 삼대(三代) 이상 정치로의 복귀 사상이다(Yun, 1974/2004). 윤휴는 하(夏), 은(殷), 주(周) 중국 삼대의 전통적인 예법을 준수하는 것을 유가(儒家)의 근원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사례(四禮)의 예복(禮服)이며 유가의 법복(法服)이자 유학자의 평상복인 심의(深衣) 역시 고례(古禮)에 부합한 심의제도를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것을 이상적인 의관 제도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백호전서』 제42권 잡저(雜著)의 독서기(讀書記) 독상복전(讀喪服傳)의 심의제고(深衣制考)에 나타난 윤휴의 심의제도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윤휴의 심의제도는 지금까지 심의에 관한 선행 연구에서 전문적인 단독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윤휴의 심의제도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의 심의제도가 조선시대 심의의 변천사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Ⅱ. 『백호전서』에 나타난 윤휴의 심의제도 고찰
『백호전서』 제42권 잡저 독서기 독상복전 심의제고에 나타난 윤휴의 심의제도는 한국고전종합 DB[Korean Classic Comprehensive DB, KCC DB]와 Yun(2008)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1. 심의의 옷감과 척도
재단하기는 백포(白布)로 하고 척도는 지척(指尺)을 쓰고 폭광(幅廣)은 2척(尺) 2촌(寸)이다. 모두 예가(禮家)의 구설에 보인다. 사람 신장의 척도는 8분(分)이 1촌이 되고, 8촌이 1척이 되고, 8척이 1장(丈)이 된다. 이로써 포백의 의(衣)와 상(裳)의 척도를 삼는데, 지척(指尺)은 중지(中指)의 가운데 마디 안에 지문을 8분으로 삼고 2분을 더하여 1촌을 만드니 10촌이 1척이 된다. 지척으로 계산하면 2척 4촌이 된다. 포폭(布幅)이 2척 4촌인 것은 『회남자(淮南子)』에 보인다(Yun, 1974/2008).1)
2. 의(衣)
의는 2폭으로 만드는데 길이는 2척 2촌이고 섶[袵]의 너비는 1척 2촌이다. 포(布)의 종폭(終幅)을 쓰는데 4척 4촌 길이의 포 가운데를 접어 아래로 드리워 전후 4폭이 되게 한다. 길이와 너비를 가지런히 하고 너비 1척 2촌의 섶을 안길과 겉길에 달아주니 이른바 임(袵)이다. 『예기(禮記)』에서 이르는 ‘속임왈임(續袵曰袵)’, ‘당방(當旁)’이 모두 이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속(續)’은 섶을 몸판에 잇는 것을 말하고, ‘당방(當旁)’은 섶을 이어서 그 끝이 몸의 옆구리에 닿는 것을 말한다. 대개 임(袵)이라는 말은 ‘여민다[歛]’는 뜻이니, 앞을 여미어서 옷깃[襟]을 이루는 것이다. 『이아(爾雅)』에서 “상의는 모두 옷깃[襟]을 만드는데 금(衿)은 교령(交領)이다.” 금(衿)은 금(襟)과 같다는 말과 『설문(說文)』에서 “교임(交袵)을 금(襟)이라고 하니 임(袵)은 옷깃이다.”라는 말은 모두 섶인 임을 이르는 것이다. 『정의(正義)』에 “심의 외금(外衿)의 가장자리에 테를 두름이 있다.” 하고, 왕씨(王氏)는 “옷깃[袷] 아래 금(衿)을 베푼다.” 하고, 조씨(趙氏)는 “상의는 6폭이다.”라고하였다. 상의는 몸판 2폭, 소매 2폭, 섶 내외 2폭으로 되어 있다(Yun, 1974/2008).2)
3. 소매(袂)
허리너비는 2척 4촌이고, 진동[袼]은 1척 4촌이 다. 상의의 몸판 좌우 양방(兩旁)으로부터 각기 1척씩 재단하여 들어와 원형으로 줄이는데 어깨선에서 1척 4촌을 남겨서 소매의 바탕[袖本]을 삼는데 이것이 진동이다. 진동 아래로부터 깎인 6촌으로 요신(要身)을 삼으니 대대(大帶)를 받기 때문이다. 허리는 대략 2척 4촌으로 총 내외 3겹(겉길, 안길, 뒷길)을 합하면 7척 2촌이 된다. 그 길이 8촌을 대하【8촌이 1척이니 곧 1척이다.】척(허리 아래 1척)이라 한다. 이렇게 해야 진동의 길이는 팔꿈치를 움직일 수 있을 만하고, 소매의 길이는 소매를 끝에서 접으면 팔꿈치에 닿으며, 허리에 대대를 묶고, 상의와 하상(下裳), 허리, 소매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袂之體而深邃’에 응하는 것이다. 『예기』에 “속임구변(續袵鉤邊)하고 허리는 치마 아랫단의 반이며, 진동의 길이는 팔꿈치를 돌릴 수 있을 만큼이고, 소매의 길이는 소매를 접으면 팔꿈치에 이르도록 한다. 대대는 아래로 넓적다리를 가리지 않고 위로 갈비뼈를 누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몸판에 2척 2촌 길이의 소매 1폭을 연결하고 끝에 다시 반 폭을 이어준다. 소매 끝으로 가면서 원형으로 줄여서 소맷부리의 길이는 1척 2촌이 되며 소매 끝을 접으면 팔꿈치에 이른다. 『예기』에 “소매를 원형으로 하니 소맷부리의 길이는 1척 2촌이다.”라고 하였다(Yun, 1974/2008).3)
4. 치마(裳)
하상은 6폭을 비스듬하게 재단하여 12조각으로 만드는데 윗너비는 6촌, 아래 너비는 1척 2촌이며 상의에 연결하는데 몸판과 섶에 각각 치마 2조각씩을 연결한다. 치마 아랫단의 둘레는 1장 4척 4촌으로 허리둘레의 두 배이며 소맷부리의 세 배이다. 섶을 재단하고 남은 1척의 포로 깃을 만들고 치마를 재단하고 남은 4촌의 포로 가선을 만들 수 있다(Yun, 1974/2008).4)
5. 깃(領)
깃의 너비는 4촌이고, 깃 길이는 진동에 이르게 한다. 섶을 재단하고 남은 포로 안깃과 겉깃을 만들고 길이는 진동까지 이르게 하며 겉섶과 안섶 위에 둘러주어 서로 중첩하여 고름으로 여미어 주면 그 형체가 방정하게 되니 곧 방령(方領)이다. 『한사(漢史)』에서 “목 아래 금령(衿領)을 베풀어 학자의 복식을 바르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방령을 이르는 것이다. 깃의 제도는 경(經)에는 나와 있지 않고 다만 상복(喪服)의 깃이 4촌이니 길흉(吉凶)의 제도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Yun, 1974/2008).5)
6. 가선(袷, 緣)
깃 위에 둘러주는 가선[袷]의 너비는 2촌이고, 소맷부리와 치마의 가장자리를 둘러주는 가선[緣]의 너비는 1.5촌이다. 『예기』에 “곡겁(曲袷)은 겁(袷)이 2촌이고, 소맷부리의 가선의 너비는 1.5촌이다.”라고 하였으며 주(註)에 이르기를, “겁(袷)은 깃의 가장자리를 싸서 돌리는 가선[領緣]이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심의에는 영겁(領袷)이 없다’라고 하는데, 주에 영연(領緣)이 나와 있으므로 심의에는 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섶이 있고 깃이 있는 것은 의복의 상제(常制)이기 때문에 섶으로 여미고, 깃으로 거느리는데, 의복에 깃이 없다면 어찌 의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가선에 채색을 하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제도는 『예기』에 나와 있다(Yun, 1974/2008).6)
7. 소대(小帶)
소대는 조(組)로 하는데 너비는 3촌이고 길이는 대대와 가지런하며 가장자리를 꿰맨다. 『운서(韻書)』에 “조(組)가 박직(薄織)이면서 견치(堅緻)한 것은 항상 맺힌 것을 풀기 때문에 이것을 쓴다.”라고 하였다. 길이는 대대에 미치도록 하여 양 진동 아래와 겉섶과 안섶의 끝에 이으니 이른바 구변(鉤邊)이라고 하는 것인데, 옷깃을 여미어 창피(昌被)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옷에 띠를 매지 않은 것을 창피(昌被)라고 하는데 『초사(楚辭)』주에 보인다. 『예기』의 ‘사속(肆束)’, ‘결(結)’, ‘뉴약(紐約)’ 모두 소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구변(鉤邊)이라고 하는 것은 섶의 가장자리에 뉴(紐)를 매는 것으로 『예기』 「심의(深衣)」편의 ‘속임구변(續袵鉤邊)’ 역시 이를 뜻하는 것이다. 『이아』에서 “섶을 묶어 맺는 것을 결(結)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운서』에서는 “결(結)은 결(袺)과 통하니 이른바 뉴(紐)이다.” 하였고, 또 “금(衿)은 옷의 소대(小帶)이다.” 하였으며, 서씨(徐氏)는 “결(袺)은 옷깃의 일각(一角)을 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기』에 “모두 너비 3촌의 끈목[組]을 사용한다. 늘어뜨려진 부분[紳], 폐슬[鞸], 인끈의 늘어뜨려진 부분[袺]의 3가지는 가지런하다.”라고 하였다. ‘모두’라고 말한 것은 천자로부터 아래의 서민까지를 이르는 것이다. ‘뉴약’이라는 것은 일변(一邊)을 굽혀 맺은 후 당겨서 풀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3촌의 조(組)를 쓴다’는 것은 포재(布材)가 3촌인 것을 써서 가장자리를 꿰매는 것으로 대대의 너비가 4촌인 것과는 같지 않다. 혹자는 “3촌의 조를 쓰는 것은 협봉(夾縫)하는 것이 옳다.”라고도 한다(Yun, 1974/2008).7)
8. 대대(大帶)
대대는 4촌, 신(紳)은 3촌, 벽(辟)은 2촌이다. 대부(大夫)는 대대의 양쪽 가장자리와 늘어뜨려진 띠에 가선을 두르고, 사(士)는 대대의 양쪽 가장자리를 꿰매고 그 늘어뜨려진 띠에만 가선을 두른다. 대대의 너비는 4촌인데 가장자리를 싸서 돌리는 가선의 너비는 1촌이며 거듭 둘러서 양비(兩紕)를 만들어 드리우는데 너비는 4촌, 아래로 드리우는 것은 3척이 되게 한다. 가선의 색, 내외, 장단, 존비 등은 『예경(禮經)』에 상세하게 보인다. ‘대대는 4촌’이라는 것은 대대의 안과 밖의 너비가 4촌인 제도가 천자로부터 대부에까지 이른다는 말이다. ‘벽은 2촌’이라는 것은 가장자리를 싸서 돌리는 가선이 2촌인즉 천자로부터 사(士)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 ‘거듭 두르는 것이 4촌’이라는 것은 벽대(辟帶)의 제도가 이와 같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구설에 “대대는 2촌, 소대는 3촌으로 하여 묶는다.” 하였고, 또 “2촌의 대에서 거듭 허리에 두르면 4촌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중복이 심하고 대소 또한 같지 않으니, ‘거듭 두른다[再繚]’라는 글은 잘못된 말이다(Yun, 1974/2008).8)
Ⅲ. 윤휴의 심의제도의 특징
본 장에서는 『백호전서』에 나타난 윤휴의 심의제도가 이전의 심의제도와 차별화되는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섶이 있는 교임형 직령심의로의 변화
윤휴의 심의가 이전의 직령심의(直領深衣)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특징은 허리너비를 2척 4촌으로 하는데 몸판의 너비가 1척 2촌이고, 몸판에 너비 1척 2촌의 섶을 부착한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심의제도에 관한 다양한 논쟁이 있었던 원인은 절대 준칙으로 여겨지던 주자의 심의제도에 따라 심의를 제작했을 때 심의를 통해 표상하고자 한유교 철학의 상징성 구현에 모순이 생길 뿐 아니라 실제 착용 시 느끼는 불편함과 형태의 불완전함 때문이었다.
영남학파의 영수(領袖)인 이황(李滉, 1501∼1570)이 주자의 심의를 『예기』의 심의제도와 비교하여 고찰하고 형태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탈주자학적 심의제도의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황은 주자가 곡겁을 방(方)으로 해석하였으나 형태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의신 4폭에 치마를 각각 3폭씩 연결한 주자의 심의를 대금(對襟)으로 착용하면 입기에도 편안하고 구성상으로도 큰 문제가 없는데, 양 옷깃을 여미면 두 옷깃이 만나는 곳이 저절로 네모지게 된다는 주자의 곡겁설에 응하기 위해 직령심의를 교임(交衽)으로 착용하면서 심의의 모양이 어그러지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Lee, 1600).10)
정구(鄭逑, 1543∼1620)도 주자의 심의제도대로 직령심의를 만들어서 교임으로 착용하면 왼쪽 앞길이 오른쪽으로 당겨지면서 깃의 아래가 울게 되고 착용감이 불편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이렇게 형태가 어그러진 심의를 입은 모습을 보는 사람마다 이는 올바른 심의제도가 아니라고 지적했다면서 주자의 직령심의를 교임으로 입을 때 나타나는 형태상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Jeong, 1636/2001).11)
이병휴(李秉休, 1710∼1776)도 본래 대금으로 착용해야 하는 직령심의를 교임으로 착용하면서 두 옷깃을 억지로 끌어 당겨 의신은 비스듬해지고 치마는 끌려 올라가며 소매가 줄어들어 진동이 어긋나게 된다고 하였다(Lee, 1774/2016b).12) 또한 직령심의를 교임으로 착용하게 되면 왼쪽 앞길이 오른쪽 앞길을 덮으면서 앞쪽은 치마 3조각이 연결된 상태인데 뒤쪽은 뒷길에 치마 6조각이 연결되어 있어 구성상으로도 맞지 않게 되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Lee, 1774/2016b).13)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대금형 직령심의 가 당시의 시복(時服)과 비교했을 때 평균방정(平均方正)하지 못하다며 허리둘레로 구성상의 문제점을 설명하였다. 시복이란 당시의 조복(朝服), 단령(團領), 도포(道袍), 철릭(天翼) 등으로 시복은 한쪽 겨드랑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상의의 둘레 치수를 계산하고 그 치수를 삼등분하면 3분의 1은 뒷길에, 3분의 1은 오른쪽 앞길에, 3분의 1은 왼쪽 앞길에 두기 때문에 교임으로 입으면 앞과 뒤의 둘레가 서로 반이 되어 평정(平正)하다고 하였다(Lee, 2009). 그러나 대금형 직령심의는 뒷길의 허리너비가 총 허리둘레의 2분의 1인 반면 앞길의 오른쪽 길과 왼쪽 길은 허리둘레의 4분의 1을 두기 때문에 교임으로 입게 되면 평정을 잃게 된다며 의복 구성면에서 교임형 직령심의의 문제점을 자세히 설명하였다(Hong, 1939/1974).14)
<Fig. 3> ∼ <Fig. 6>의 심의 유물을 통해 대금형 직령심의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주자의 직령심의를 대금이 아닌 교임으로 착용했을 때 발생하는 구성적인 문제점과 방형의 곡겁을 이루지 못하는 상징적인 문제점 등은 여러 학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에따라 심의 형태 자체가 대금이면서 방령 깃을 단 새로운 심의제도가 16세기 말에 한백겸(韓百謙, 1552∼1615)에 의해 제시되었다. 영남학파 남인이자 초기 실학파인 한백겸은 직령심의를 교임으로 착용하면 양 옷깃이 만나는 곳에서 형성되는 ◇형의 깃을 방령으로 인식한 주자의 심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그는 별도의 원단으로 섶을 만들어 붙이지 않은 상태에서 양 옷깃을 끌어당겨 겨드랑이 아래에 이르도록 착용하면 매우 답답하고 불편할 뿐 아니라 이렇게 교임으로 착용한다해도 곡겁의 모난 모양은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그는 섶이 없는 상태에서 양쪽의 옷깃이 나란히 맞닿아 앞이 여며지지 않는 대금형에, 옷깃은 ◇형이 아닌 정방형인 □형의 방령을 이루는 구성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대금으로 만나는 양 옷깃이 벌어지지 않도록 2쌍의 ᄃᆞᆯ마기 (結紐, 매듭단추)를 달아주는 섶이 없는 대금형 방령심의 제도를 제시하였다. 한백겸은 상의와 하상이 연결되어 나란히 맞닿는 것을 속임으로, 양 옷깃이 벌어지지 않도록 ᄃᆞᆯ마기 를 다는 것을 구변으로 해석하였다(Han, 1640/2016). 이는 심의를 대금으로 착용하면서 정방형의 방령 깃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구성법이다. 한백겸의 심의는 □형의 깃을 한 방령심의로 이전까지 중국에는 없는 심의제도였으며, 조선에서도 역시 주자의 직령심의의 깃을 ◇형에서 □형의 방령으로 변형을 가한 최초의 심의제도였다(Lee, 2023a). 한백겸의 대금형 방령 심의도는 <Fig. 7>과 같다.
‘深衣’는 그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몸을 깊숙하게 가려주는 의복이다. 전상(前裳)과 후상(後裳)의 구분 없이 치마 12폭을 모두 연결하여 하체를 노출하지 않거나, 의신에 섶을 달아주어 상체를 노출하지 않는 등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신체를 완전하고도 깊숙하게 감싸주는 의복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따라서 심의를 한백겸의 대금형 방령심의와 같이 겹침이 없는 대금으로 입게되면 심의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성을 구현하지 못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에 따라 직령심의의 상의와 하상에 연결되는 긴 섶을 달아주어 직령심의의 형태 자체가 교임이면서 방형의 곡겁을 유지할 수 있는 구성 방법으로의 변화를 적용한 새로운 심의제도가 정구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의 심의제도는 1610년에 편찬된 『한강집(寒岡集)』에 제시되어 있는데 그는 자신의 이러한 심의제도를 30여 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심의제도는 약 1580년경에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Jeong, 1636/2001).15) 『한강집』 제9권의 잡저(雜著) 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에 나타난 정구의 심의제도를 기반으로 본 연구자가 제작한 정구의 심의 도식화는 <Fig. 8>과 같다(Lee, 2024).
주자의 직령심의의 상의에 섶을 연결하는 구성방법의 변화를 준 또 다른 새로운 심의제도로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의 심의제도가 있다. 조호익의 심의는 주자의 직령심의 상의에 섶을 부착하여 심의 형태 자체가 직령교임(直領交衽)이 되는 구조이다. 조호익의 심의제도는 조호익 사후인 1646년에 제자들에 의해 편찬된 『가례고증(家禮考證)』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산선생문집부록(芝山先生文集附錄)』에 조호익의 나이 34세인 1578년에 『예기』 「옥조」를 바탕으로 명나라 학자인 경산(瓊山) 구준(丘濬)의 설을 참고하여 심의와 치포관(緇布冠)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Jo, 1779/2002).16) 이로 미루어 보아 그의 심의제도는 1578년경에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호익의 심의는 직령심의의 상의에만 섶을 달아주고 섶에 치마 2조각, 몸판에 치마 2조각씩 연결한다. 치마한 조각의 윗너비가 6촌이고 아래 너비가 1척 2촌이므로 허리둘레는 7척 2촌, 치마 아랫단 둘레는 1장 4척 4촌이다(Jo, 1646/2002).17) 조호익의 심의도는 <Fig. 9>와 같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저서인 『성호전집(星湖全集)』에 정여일(鄭汝逸, 1678∼1752)과 심의제도에 관해 논의하는 내용이 있는데 정여일은 한백겸과 같은 대금형 방령심의에 3개의 매듭단추를 부착한 심의제도가 고례에 부합한 올바른 심의제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금형 직령심의와 대금형 방령심의는 모두 허리너비가 3척 6촌으로 이러한 구성의 심의를 착용하게 되면 허리 부분이 너무 넓어서 옷을 입기에 불편함이 있다고 토로하였다. 이에 이익도 허리너비 3척 6촌의 심의는 너무 펑퍼짐하여 심의를 착용하였을 때 모양새가 나지 않으므로 허리둘레 7척 2촌을 삼등분한 2척 4촌을 허리너비가 되게 하되 앞길 두 폭과 뒷길 한폭이 완전히 겹치는 구조로 심의를 제작하는 구성방법을 제언하였다(Lee, 1774/2016a).18)
윤휴의 심의 역시 1척 2촌 너비의 몸판에 1척 2촌 너비의 섶을 달아 상의의 허리너비가 2척 4촌이 된다. 이에 따라 앞길의 겉길과 안길, 뒷길이 모두 2척 4촌 너비로 동일하며 앞길과 뒷길이 완전히 중첩되는 상엄(相掩)의 구조가 된다. 이는 3척 6촌의 허리너비보다 1척 2촌이나 작아서 심의를 실제로 착용하게 되면 상체를 완전하고도 깊게 감싸주어 착용자 역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으며 외관상으로도 옷매무새가 훨씬 심미적인 형태가 된다. 치마 역시 4조각씩 완전히 겹치면서 하체를 깊숙이 감싸준다. 따라서 윤휴의 심의제도는 상의에 섶을 달아주어 형태 자체가 교임형 직령심의가 되도록 구성 방법에 변화를 준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파액(破腋)을 하는 구성 방법으로의 변화
주자의 심의제도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심의제도(深衣制度)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의신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베 두 폭을 써서 가운데를 접고 아래로 드리우면 앞뒤가 모두 네 폭이 되니 지금의 직령삼과 같다. 다만 겨드랑이 아래를 잘라 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Zhu, 1999).19) 또한 둥근 소매(圓袂)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베두 폭을 각각 가운데를 접어 의신의 길이와 같게하여 의신의 좌우에 잇고 그 아래를 봉합하여 소매를 만든다. 진동은 의신의 길이와 같고 점점 둥글게 줄여 소맷부리에 이르면 그 너비는 1척 2촌이 된다.”라고 하였다(Zhu, 1999).20) 즉, 주자의 심의는 파액을 하지 않아 몸판의 길이와 진동의 길이가 같음을 알 수 있다. 『주자가례』를 절대적 가치로 여긴 후대의 유학자들 역시 주자의 심의제도를 따라 파액을 하지 않은 심의를 원칙으로 여겼다. 주자의 심의도는 <Fig. 10>과 같다.
소매를 파액하지 않은 구성 방법에 관한 문제점을 분석하고 그 해결 방안을 논의한 내용을 『성호전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여일은 이익에게 소개한 자신의 대금형 방령심의는 의신의 길이=진동=소매의 너비 모두 2척 2촌으로 동일한데 이러한 구조의 심의로는 소매의 모양을 둥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경문을 따를 수 없고, 허리에 대대를 두르기에도 불편하다며 이익에게 조언을 구하였다(Lee, 1774/2016a).21) 이에 대해 이익은 파액을 하는 구성 방법을 소개하며 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반달 모양의 둥근 소매 모양을 만들기 위해 파액을 한 구성 방법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정현(鄭玄)이 “소매는 둥글게 하여 아래로 늘어뜨린다(袂圓爲胡下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반달 모양의 둥근 소매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진동과 소맷부리의 길이를 의신의 길이와 소매의 너비보다 짧게 하여 소매의 양 끝으로 가면서 점점 둥글게 줄여 나가면 소매의 모양이 반달 모양이 된다. 그래서 이익은 의신의 길이 2척 4촌으로, 진동은 1척 2촌으로, 소매의 너비는 2척 4촌으로, 소맷부리는 1척 2촌으로 각각의 치수를 달리하면 소매 양쪽으로 둥글게 줄여 나가는 형태를 구현하여 반달 모양의 소매가 만들어진다고 하였다(Lee, 1774/2015).22)
둘째, 대대의 안정적인 착용을 위하여 파액을 한 구성 방법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예기』 「심의」에 “대대는 아래로 넓적다리를 가리지 않고 위로 갈비뼈를 누르지 않으며 뼈가 없는 곳에 있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의신의 길이와 진동의 길이가 같으면 대대를 골반뼈와 갈비뼈 사이인 허리에 두를 수 없다. 따라서 진동을 의신의 길이보다 짧게 하면 진동 아래로 동아래가 생기므로 그 부위에 대대를 안정적으로 두를 수 있게 된다(Lee, 1774/2015).23)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심의를 입고 대대를 두르는 부위를 인신(人身)의 중심인 배꼽 위치라고 하였다. 그는 대대를 배꼽 위치에 두르는 이유를 제일(齊一)의 뜻을 취하여 인신의 상하를 경계 짓기 위함이라고 하였으며 그 역시 『예기』 「심의」의 ‘帶下毋厭髀上毋厭脅當無骨者’의 경문으로 대대의 착용 위치를 설명하였다(Lee, 1795/1978).24)
윤휴의 심의는 대금형 직령심의의 허리너비가 3척 6촌인 것에서 2척 4촌으로 허리너비가 줄어드는 대신에 소매의 길이가 길어지는 변화를 함께 보인다. 심의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베의 한 폭이 2척 2촌인데 몸판의 너비 1척 2촌을 제외한 1척을 소매로 내어주고 여기에 2척 2촌의 베 한 폭을 소매로 이어준 후 다시 반 폭인 1척 1촌의 소매를 이어주어 소매의 길이는 4척 3촌, 화장은 5척 5촌이 된다. 윤휴의 심의는 의신의 길이가 2척 2촌이고 진동이 1척 4촌이어서 진동 아래로 8촌의 동아래가 생기기 때문에, 허리에 대대를 안정적으로 두를 수 있다. 그리고 소매의 너비는 2척 2촌, 소맷부리는 1척 2촌이어서 진동과 소맷부리 양쪽으로 가면서 점점 줄여 나가는 둥근 형태의 소매를 잘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윤휴의 심의제도가 지니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Ⅳ. 조선시대 심의의 변천사에서 윤휴의 심의가 차지하는 위상
지금까지 살펴본 윤휴의 심의제도가 조선시대 심의의 변천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윤휴의 심의제도는 주자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심의의 구성 방법에 변화를 주었기에 이는 조선 유학사적으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심의에 관한 최고(最古) 기록은 주대(周代) 저서인 『예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기』 「내칙(乃則)」편과 「단궁(檀弓)」편에서는 심의 착용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옥조」편에서는 심의의 색상과 대략적인 치수를 확인할 수 있다. 「심의」편에서는 「옥조」편을 보완하여 심의의 형태가 지니는 유교 철학의 의미와 상징성에 대한 설명을 부가하였다. 윤휴는 사상의 근간을 하, 은, 주 삼대 왕조의 유가에 두고 이를 현실에서 재현하려고 하였다. 윤휴는 주자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는 하되 주자학에 대한 맹종을 배격하였다. 따라서 그는 주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학(大學)』, 『중용(中庸)』, 『효경(孝經)』 등의 독자적 해석을 통해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그는 주자가 일생을 바쳐 성리학을 집대성했듯이 경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 후학들의 역할이라고 주장하였다. 윤휴의 이러한 학문 자세는 처음에는 당색을 초월해 칭송받았으나, 나중에는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사문난적으로 규탄받기에 이른다(Yun Hyu, n.d.). 따라서 윤휴는 심의제도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예기』를 근간으로 하되, 『이아』, 『정의』, 『한사』, 『운서』, 『예경』, 『설문』, 『초사』 등 선유들의 다양한 문헌들을 상고하였다. 그 결과 주자의 심의와는 확연히 다른 심의제도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둘째, 직령심의의 상의에 섶을 부착하여 앞길과 뒷길 3폭이 상엄하며 치마도 4조각씩 완전히 겹치는 구조가 되도록 하고, 대대를 편안하게 두를 수 있는 파액을 하는 형태로 구성 방법에 변화를 준 윤휴의 심의제도는 복식 구성학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한복에서 섶은 앞여밈의 기능뿐 아니라 의상 전체의 디자인이나 구성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섶이 없던 의복에 섶을 부착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기호학파 서인들은 주자의 심의제도를 변함없이 사용하며 자신의 학파와 당을 상징하였다. 반면 영남학파 남인들은 심의제도에 관한 고례의 고증을 통한 이론적인 연구와 심의를 실제 제작하는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심의의 구성 방법에 변화를 주었다. 따라서 윤휴의 심의는 너비 1척 2촌의 몸판에 너비 1척 2촌의 섶을 달고 몸판과 섶에 각각 치마 2조각씩을 연결하여 앞길과 뒷길이 완전히 중첩되며 치마 역시 4조각씩 완전히 겹치는 상엄의 구조를 이룬다. 또한 파액을 하여 소매 모양을 둥글게 구현할 수 있고 대대도 안정적으로 두를 수 있도록함으로써 주자의 심의 구성 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셋째, 윤휴의 심의제도는 이후의 영남학파 남인과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조선시대의 심의가 직령심의와 방령심의로 분화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기에 한국 복식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익의 심의제도는 『성호전집』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윤판(尹判)이 논한 심의제도를 상고해 보았다.”, “윤판의 심의제도가 나의 주장과 거의 합치한다.”라고 하여 윤판이라는 인물의 심의제도를 거론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성호전집』 국역본에서는 윤판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주(註)를 달아 놓았다. 그런데 본 연구자는 윤판이 바로 윤휴를 가리킨다고 판단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익이 윤판의 심의제도를 설명하면서 앞길의 겉길과 안길에 별도의 섶을 연결하고 좌우의 진동 아래에 옷고름을 달아 옷을 여며 입는 제도라고 하였는데(Lee, 1774/2016a)25) 이는 윤휴의 심의제도와 일치한다. 또한 이익은 심의의 옷고름에 대해 논함에 있어서도 “윤판(尹判)이 이르기를 ‘조그만 띠를 양쪽 각(袼)의 아래와 안팎의 옷깃[袵] 끝에 다니, 이는 옷깃을 여며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니 이 말이 이치에 맞습니다(Lee, 1774/2016a).”26)라고 하여 윤판의 심의제도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이익의 심의는 파액을 한 소매로 이 역시 윤휴의 심의제도와 일치한다. 이익의 심의 소매 연결 방법은 먼저 2척 2촌인 의신의 너비에서 몸판을 1척 2촌으로 하고 나머지 1척을 소매로 내어준다. 여기에 2척 2촌 길이의 소매 1폭을 연결한 후 그 끝에 다시 1척 길이의 소매를 연결해주어 화장은 5척 4촌, 소매의 길이는 4척 2촌이 된다. 윤휴의 심의 소매 연결 방식도 이와 동일한데 가장 끝에 이어주는 소매의 길이가 1척 1촌이어서 윤휴의 심의는 화장이 5척 5촌, 소매의 길이는 4척 3촌이 된다. 소매의 형태 역시 진동과 소맷부리의 양 끝으로 가면서 점점 둥글게 줄어 나가는 반달 모양이 되어 윤휴의 심의제도와 이익의 심의제도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Fig. 11>은 『성호전집』에 나타난 이익의 심의제도를 기반으로 본 연구자가 제작한 이익의 심의도식화이다(Lee, 2023b). 이를 통해 이익의 심의가 방령 깃을 단 것 외에는 윤휴의 심의제도와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기호학파 서인은 주자의 『주자가례』를 그대로 답습한 직령심의로 자신의 학파와 당을 상징하였다. 반면 영남학파 남인은 『주자가례』 외에도 『예기』 본래의 심의제도를 탐구하고 더 나아가 훈고와 고증을 통해 고례와 제유(諸儒)의 예설(禮說)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주자의 심의에 다양한 변화를 주면서 네모반듯한 □형의 방령 깃을 달고 몸을 깊게 감싸며 여미어지는 형태의 방령심의 구성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다. <Fig. 12>와 <Fig. 13>은 현존하는 방령심의 유물로 <Fig. 12>는 국가 등록 문화 유산 제661호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심의이며, <Fig. 13>은 부산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노상익(盧相翼, 1849∼1941) 심의이다.
두 유물 모두 섶이 있는 교임형 방령심의인데 이러한 구성 방법으로 방령심의의 형태가 안착되고 계승되기까지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된 심의제도가 바로 이익의 심의제도이다. 이익의 심의제도는 방령심의 최초로 몸판의 너비를 2척 2촌에서 1척 2촌으로 줄이고 너비 1척 2촌의 섶을 달아준다. 몸판과 섶에 각각 치마 2조각씩 연결하고 앞길과 뒷길 세 폭이 완전히 중첩되는 것 역시 방령 심의 중 최초이며, 소매 또한 방령심의 최초로 파액을 한 소매 형태이다(Lee, 2023b). 이익의 교임형 방령심의 제도는 그의 증손인 이삼환(李森煥, 1729∼1813)의 초상화 <Fig. 14>를 통해 실제로 전승되어 착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익의 심의제도는 그의 제자인 허전(許傳, 1797~1886)에게 영향을 주어 허전은 <Fig. 15>의 심의제도를 『사의(士儀)』에 제시하였다. 부산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노상익 심의 유물은 허전의 문인으로 이익의 성호학파를 계승한 노상익이 자신의 스승인 허전의 심의제도를 따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Lee, 2023c). 허전과 동시대 인물인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이익의 심의제도 뿐 아니라 허전의 심의제도에도 영향을 받아 <Fig. 16>의 심의제도를 『화서집(華西集)』에 제시하였다(Kim, 2019). 국가 등록 문화 유산 제661호 의병장 유인석 심의는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한 화서학파의 문인인 유인석이 이항로의 심의제도를 따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Lee, 2023c). 따라서 조선시대 심의의 변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익의 심의제도가 수립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윤휴의 심의제도는 한국 복식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Ⅴ. 결론
윤휴는 젊은 시절부터 과거(科擧)보다는 독서에 전념하며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당대의 명유들과 당색을 초월하여 교유한 17세기의 천재적인 산림학자(山林學者)요,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였다. 특히 그는 공자와 맹자의 원전을 근간으로 한 고대(古代) 유학 정신을 추구하였기에 지나친 벽이단적 주자주의를 경계하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독창적인 학문을 모색하였다. 기호학파 노론의 영수(領袖)인 송시열과 예송논쟁을 계기로 극한으로 대립하며 영남학파 남인으로 활약한 윤휴는 1680년에 사사된 이후 1927년 『백호문집』이 발간되기까지 철저한 금기의 대상이었다(Yun, 1974/2004).
본 연구는 『백호전서』 제42권 잡저 독서기 독상복전의 심의제고에 나타난 윤휴의 심의제도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윤휴는 전범(典範)으로 인식되던 주자의 심의제도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주자의 심의에서 드러나는 이론적, 실질적인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고례의 고증과 독자적인 해석으로 자신의 심의제도를 제시하였다. 윤휴의 심의제도가 지니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섶이 있는 교임형 직령심의로의 변화이다. 윤휴의 심의는 너비 1척 2촌의 몸판에 1척 2촌 너비의 섶을 달고 몸판과 섶에 각각 치마 2조각씩을 연결하여 앞길과 뒷길 세 폭이 완전히 중첩되며 치마 역시 4조각씩 완전히 겹치는 상엄의 구조를 이룬다.
둘째, 파액을 한 소매로의 변화이다. 윤휴의 심의는 파액을 한 형태로 소매 모양을 둥글게 구현할 수 있으며 대대도 안정적으로 착용할 수 있는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윤휴의 심의제도가 조선시대 심의의 변천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윤휴의 심의제도는 주자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심의의 구성 방법에 변화를 주었기에 이는 조선 유학사적으로 그 의미가 깊다.
둘째, 윤휴의 심의는 상의에 섶을 부착한 직령심의로 앞길과 뒷길 3폭이 완전히 중첩된다. 치마도 4조각씩 완전히 겹치는 구조이다. 또한 대대를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도록 파액을 한 형태로 소매의 모양 역시 둥글게 구현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 방법의 변화는 복식 구성학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셋째, 윤휴의 심의제도는 이후로 영남학파 남인과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조선시대의 심의가 직령심의와 방령심의로 분화되어 계승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기에 한국 복식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금까지 전문적인 단독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던 윤휴의 심의제도를 살펴보고 그의 심의제도가 조선시대 심의의 변천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찰한 것에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 후속 과제로 본 연구의 고찰 결과를 토대로 윤휴의 직령심의를 실제로 제작하는 실증적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윤휴의 심의제도에 관한 연구 결과가 조선시대의 심의제도에 관한 이해와 고증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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