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체산자(砌山子)에 대한 연구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not only to trace the examples of ‘Chesanja’ from the texts and artifacts, but also to restore the terminology of the lost traditional Joseon embroidery technique. ‘Chesanja’ came on Mongolia and Yuan period affected embroidery techniques of the neighboring countries. Therefore, this study will focus on investigate the process of changing ‘Chesanja’ into Guya(Goya) through ≪Barktonsa≫ the foreign language transcriptions of the Chosun dynasty, and examine the generation, fashion, and destruction of this technique with the social technical usage. Around the 16th century of the Joseon Dynasty, ‘Chesanja’ had been actively used as a decorative techniques to dairy products as well as a Buddhist memorial goods embroidered. Accor- dingly, in the 『Beonnyeok-Baktongsa』(1515) appeared together written records with ‘Chesanja’ 'Gwiyeo [귀여 ]' the Eonhae(Korean annotation) only had emerged in the Joseon Dynasty. It was still a technique to decorate the edges of royal pillow in the mid-17th century. And we have checked from the text 『Baktongsaeonhae』(1677) also. Despite this by the mid-18th century, the term in 『Baktongsa-sinseok』(1765) and 『Baktongsa-sinseok-eonhae』(1765) had disappeared. This phenomenon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the production and utilization of ‘Chesanja’ required the sophisticated process for the ruling class had been declined with the custom of embroidery based on the gradation by colorful threads as the preferred technique. Therefore, ‘Chesanja’ and ‘Gwiyeo ’[귀여 ] disappeared from the records but they can be found in the artifacts of the royal family of 19th century. So Chesanja is calls Guya(Goya) and exists as unique technic only in the royal family.
Keywords:
16th Century, Barktongsa, buddhism, Chesanja, embroidery, the Needle-Looping Stitch키워드:
16세기, 박통사, 불교, Qìshānzǐ, 체산자, 자수, 편수Ⅰ. 서론
우리나라 전통 자수 기법 중에서 가장 독특한 기법은 편수(編繡)의 일종인 ‘구야(고야)’(Kim, 1970)일 것이다. 현재 전하는 이 기법의 베개는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지만 유물수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 기법은 원명대(元明代) 자수사에서 불교용품과 일상용품에도 사용된 용례가 있는 만큼 훨씬 다양한 계급에서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특정 계층의 특권적인 기법으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이 기법은 중국에서는 배편수(环編繡) 혹은 배침수(环針繡) 그리고 Needle-looping(Zhao, 1999)이라고 칭하며 한국에서는 삼각형 고리엮음수(Sudeok Temple Museum [STM], 2006), 그물수(망수)(Song, 2007), 편직(Inchon Metropolitan City Museum [IMCM], 2011), 고리감기수(Kim, 2013) 등 다양한 용어가 제시되고 있다. 이처럼 이 기법은 조선의 자수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법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다양한 용어의 사용으로 인해 체계적인 연구가 시도될 수 없었다. 따라서 원전(原典)에서 정확한 용어를 찾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박통사(朴通事)』에서 등장하는 「체산자(砌山子)」라는 용어를 통해서 ‘구야’에 대한 한어(韓語)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사용된 용례를 당시 문헌 기록에서 살펴보고 조선후기까지 유전되던 체산자의 실제를 추정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자수기법의 전통용어의 발굴에 대한 타당성과 전승적 의의를 재고하고자 한다.
Ⅱ. 유물로 본 체산자의 용례
체산자는 조선 시대의 자수기법 중 고식(古式)의 한 형태이다. 문양적 특징을 보면 연결된 山모양의 장식수를 칭한다. Zhao(1999)에 따르면 이 기법의 제작은 평직의 조형으로서 삼각형의 문양을 만들 때 수실을 걸어 섞어 짜는 고리 개수에 따라 1.괘배(挂环), 2.투배(套环)(①단일투배(單一套环), ②중배(重环)), 3.결배(結环)로 구분할 만큼 다양한 형식의 제작기법을 제시하였다. Kim(2013)도 제작방법에 따라 한올고리감기수, 두올고리감기수로 명칭한 바 있다. 이처럼 걸어서 섞어 짜는 고리의 다양한 결구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편수의 발전된 양상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삼각형 산 모양 장식은 자수용품의 문양을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의 장식문양으로도 상당히 오랜 시기부터 사용되어왔다. <Table 1>에서 볼 수 있듯이 ①국보 제89호인 <금제띠고리>(원삼국시대 낙랑 1세기, 평양 석암리출토)의 내부 가장자리를 둘러싼 문양에서부터 ②<만지교금하피추(滿池嬌金霞帔墜)>(元代14세기, 南京博物院)과 ③<금사자수베개모>(이란, 19세기)에서도 재료를 불문하고 지배층의 장식문양의 한 유형으로 계속 애용되어 왔다.
자수로 표현된 이 문양은 중국의 경우 편수(編繡)의 일종으로 구분하였고 연결된 산 모양의 형상 때문에 편환수(編環繡)라고도 칭하고 있다. 더욱이 이 기법은 몽원대(蒙元代) 출현하여 명대에 가장 유행하였다고 연구되었지만(Zhao, 1999) 정확한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조선의 경우도, 근대에서 구전된 ‘구야’라는 명칭 이외에 중세 이래 계속 구사되었을 정확한 이름 또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근세까지 전해지는 유물을 통해서 주로 왕실과 같은 특정층의 생활용품에 사용된 용례가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유물에 있어 원대(元代)의 경우 불구용(佛具用)인 <남색능융수법기친점(藍色綾絨繡法器襯墊)>(內蒙古阿拉善盟出土)(<Table 3>-①), <백납법기친점(百衲法器襯墊)>(內蒙古阿拉善盟出土) 등을 통해서 산모양의 편수(이하 체산자)가 공양용을 위한 장엄장식수로서 적극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구용품에 사용된 체산자는 이외 개방사슬수, 2~3중의 단추구멍수, 마름꼴, 지그재그문, 회문(回紋) 등 다양한 모양의 기하문 편수 형태로 발전되어 명대에도 그 영향을 이어져 왔다.(STM, 2006) 또한 조선의 경우도 파평윤씨(?~1566) <바늘집(추정)>의 겉 주체 가장자리의 체산자 이외에 가운데 부분에 별도의 편수가 있어 두 타입의 편수를 살필 수 있어 당시 다양한 타입의 장식기법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 역관(譯官)의 역서(譯書) 『박통사(朴通事)』중 호슬(護膝) 제작(上23)에 관한 기록에서 일상용품의 용례와 원말(元末) 유물로서 합정동 출토품(隆化鴿子洞元國窖藏)인 <명황릉채수지매호호형침찰(明黃綾彩繡枝梅葫芦形針扎)><Fig. 6>과 <백릉지수타화원형괘식(白綾地綉朵花圓形挂飾)>, <자수화훼호접호슬(刺繡花卉蝴蝶護膝)>처럼 일상용품에 사용된 용례가 있는 만큼 조선 16세기에 이르러서도 주머니, 베개, 바늘집과 같은 일상용품에 두루 사용되던 양상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체산자 유물은 다음 <Table 2>을 참고할 수 있다.
조선시대 체산자 유물은 ①인천 석남동 회곽묘출토의 <두루주머니>, ②파평윤씨묘(?~1566) 출토의 <바늘집>, ③남양 홍몽남(洪夢男, 1534~1574)의 부인 연안김씨(?~?)의 <베개>로 16세기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남아 있으며 ④와 ⑤로서19세기 민씨 가문 전세품과 왕실 전세품인 <구봉침(九鳳枕)> 등까지 살필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면 왕실의 베개에 집중된 양상이다. 이를 통해 체산자는 지배층의 특권에 따라 다양한 공예품의 격식있는 장식기법으로 오랫동안 선호되었다는 것이 짐작된다. 게다가 16세기의 파평윤씨가 문정대비의 오빠인 윤원량(尹元亮, 1495~1569)의 손녀로서 왕실과 관련이 있었다면(Cho, 2006) 동시대의 연안김씨는 왕실과 관련이 먼 가문이라는 점에서 체산자의 사용 계층이 왕실 중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체산자는 왕실 위주로 사용된 장식수라기 보다는 이 시기 권문가와 같은 특정 계층의 일상용품에도 활용되었다고 판단된다. 이외에도 군례(軍禮) 의장기(儀仗旗)였던 <장기(將旗)>(1592)(일본 금광원 소장)에도 사용되었다(Kim, 2013)고 조사되고 있어 16세기 무렵의 다양한 활용 또한 살필 수 있다.
이 중 파평윤씨의 <바늘집(추정)>(<Fig 1>)을 살펴보자면 이 유물은 총 3점으로 겉 주체는 모두 호로형(葫蘆形)이며 겉 주체를 위로 올렸을 때 속 주체로 방형(方形)의 별도 형상물이 나타난다. 호로의 문양은 원대 이래 신선의 지물과도 관련 있어 신선사상과도 연결된 만큼 도상적 표의가 가지는 의미 또한 광의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호로형 주머니는 신선도의 유행과 함께 벽사와 신선사상에 의해 조선 후기에서 풍속화(風俗化)되어 애용된 지물문양이기도 하다.(Yu, 2011) 그러나 16세기 중반의 호로 문양은 문정대비(文定大妃, 1501~1565)의 불교 중흥기에 제작된 만큼 불교적 상관이 높은 문양일 것이며 이런 의미를 담은 문양이 바늘집(추정)의 장식문양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Yeom(2012)에 따르면 고대부터 인식된 수미산은 모래시계형(이하 호로형)이 보편적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조선도 초기부터 후기 정조연간까지 여러 판본으로 전하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수미산 대부분이 호로형으로 이것은 상징적인 묘사를 復刻한 것에 따라 정형화된 것이었다. (Choi, 2014) 따라서 파평윤씨 <바늘집(추정)>과 同시기에 간행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1545, 地藏庵本)(<Fig. 2>)에 등장하는 수미단의 형상도 호로형인 것을 살필 수 있다. 또한 Yeom(2012)은 『화엄경(華嚴經)』에서 수미산을 감싸고 있는 8공덕수(功德水)인 향수해(香水海)가 파도가 없는 바다로서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고 투명한 수미단의 성역(聖域)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파평윤씨의 <바늘집(추정)>은 겉 주체인 호로형과 속 주체인 방형(方形)으로 구성되어 겉 호로형은 수미산을 의미하며 속 방형은 무문(無紋)의 누비[納紗繡]로 제작되어 성역적 상징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파평윤씨의 <바늘집(추정)>은 호로형과 방형, 무문으로 제작된 불교의 기호학적 상징물로 시대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후대 <불화복장낭(佛畵服裝囊)>(<Fig. 3>) 이 상단에는 연화좌가, 하단 방형에는 연지(蓮池)로 꾸며지면서 좀더 표징(標徵)적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유물은 체산자를 공양장식수로 사용한 15~16세기 동아시아의 불교장엄구의 제작방식과 일맥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파평윤씨의 바늘집(추정)은 도판판독 상 정확한 도상은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연화만초보문(蓮花蔓草寶紋)바늘집(No.74) 이외에 편금사(바늘뜨기)(Cho, 2003)나 니금으로 그린 문양 흔적의 바늘집(No.72)으로 보아 이러한 장식은 당시 왕실 중심으로 사용되던 금의 권위적 활용으로 판단된다.(Oh, 2009; Park, 1998)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조선의 경우 불교는 배불(排佛)정책에 의해 명맥만이 유지되었지만 문정대비(文定大妃, 1501~1565)와 보우(普雨, 1509~1565)에 의해 행해진 20년 동안의 불교부흥운동은 이 시기에 가장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이 시기에 체산자가 활발히 제작되었고 이러한 불교적 용례가 적용된 생활용품이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게다가 조선 후기와는 달리 15~16세기 수불공양과 수불치성에 관한 여러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면(Yang, 2016) 불교신봉 지배층에게 자수는 또 다른 공양의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Table 2> 중 남양 홍몽남(洪夢男, 1534~1574)의 부인 연안김씨(?~?)의 <베개>(③)에 구사된 자수기법은 체산자와 개방사슬수이다. 이들 기법은 임란이후 본격적으로 만력연간(萬曆年間, 1573~1619)의 풍습이 유입되는 17세기 자수 성향과는 양식적으로 구별되는 고식(古式)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베개의 문양은 상당히 도식화된 도안으로 불경덮개 중 <화조문자수보>(1415, 현재 불교중앙박물관 소장)(<Fig. 4>)의 회화적 화풍과는 달리 좀더 문양에 집중된 화풍이다. 즉 사실적 재현에 충실한 회화적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회화풍 도안과는 또 다른 화풍이 직물의 기복문양(Cho, 2003; Cho, 2005; Cho, 2006)의 유행과 관련되어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중국으로부터 사여받던 흉배를 16세기에 들어 자체 제작(Shinjeungdonggukyeojiseung-ram)하면서 왕실 이하 권문가의 위세물이던 자수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문양은 『대명회전(大明會典)』의흉배문이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16세기 『악학궤범(樂學軌範)』, 『미암일기(眉巖日記)』, 『번역노박(飜譯老朴)』등 각종 문헌에서 보이는 기복용 직문(織文)의 도안(Cho, 2005)이 활발히 성행, 발전하면서 점차 표의문으로 양식화되었던 분위기와 동조된 양상이다. 이 베개문양 역시 좌우로 배치된 연꽃과 줄기는 하나의 연뿌리에서 돋아난 두잎과 두 송이 꽃을 그린 ‘병체동심(竝蒂同心)’의 부처화목(夫妻和睦)(Nozaki, 1992)에 대한 표의문양으로서 재해석된 도해이다. 더욱이 같이 발굴된 원앙문양의 금침을 살펴보면(Bae, 2005) 이러한 문양의 제작과 소유는 결혼생활을 얼마하지 않았던 김씨의 상황과 아울러 혼례 문양과의 관련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베개를 수놓는 풍습이 조선 사가에 만연되지 않는 시기라는 점에서 이러한 문양은 원명(元明) 자수유물의 도해의 활용상 혼례용으로 유입된 만지교문양과도 연관(Yang, 2016)되지만 기법 상 불교 공양자수(<Table 3>)와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Yang(2010)은 <Table 3-①>의 <남색능융수법기친점(藍色綾絨繡法器襯墊)>의 경우, 가장자리에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 (上, 1677)의 체산자가 사용된 것을 거론한 바 있는데 용도가 정확하지 않으나 법기 받침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 유물은 체산자로 구획된 내부에 연화와 연잎, 매화와 한 쌍의 오리 그리고 나비가 있는 만지교문을 시수하고 있다. 이는 당시 제작되던 도자기나 베개의 문양과도 유사한 자유로운 배치이며 <백릉지채수원앙호접목단침정(白綾地彩繡鴛鴦胡蝶牧丹枕頂)>(隆化鴿子洞元國窖藏)처럼 화면 가득 문양을 도안하였다. 또한 <Table 3-②>인 원대 <법라문원식(法螺紋圓飾)>과 15세기 <선정인여래(禪定印如來)-자수편(刺繡片)>(국적 불명, 홍콩 크리스 홀소장) 그리고 <Table 3-③과 ④>인 원대 15세기 <금강교저문원식(金剛交杵紋圓飾)>와 15~16세기 <25조(條) 천불가사(千佛袈裟)> 등은 원ㆍ명으로 이어져 편수인 체산자와 개방사슬수(Open-Buttonhole)가 구사된 불교 공양자수이다. 즉 공덕신앙이 만연된 북방 민족신앙에서는 발원과 공덕의 측면에서 망수(網繡), 편수라든가 납사수와 같은 기법을 선호하였을 것이며 각별히 장식수로서 피금(皮金)을 사용하는 체산자와 개방사슬수를 함께 꾸며졌던 것 같다. 이처럼 체산자와 개방사슬수는 몽원(蒙元)시기에 출현한 기법(STM, 2006; Zhao, 1999)으로 16세기 이전의 원명대(元明代)의 불교 공양구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역시 공양자수기법으로 왕실 뿐만 아니라 사가에서도 인식,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앞서 연안김씨(?~?)의 <베개> 자수기법은 <Table 3-②>인 <법라문원식>의 기법과 일치한다. 방형의 가장자리에 체산자로 사방을 둘러 시수한 것과 선과 면에 재현된 개방사슬수 그리고 꼰사2올을 반대로 배치 후 징거(Song & Park, 2005) 장식하는 등 두드러진 특징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Table 3-④> <25조 천불가사>의 천불상 광배에는 피금이 깔린 개방사슬수가 화려한 장식성을 드러내고 있어 당시 불교공양구에 널리 선호되던 기법 중의 하나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연안김씨의 베개에 구사되던 자수는 원래 불교용품에 주로 사용되던 특별한 기법이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실용품에 활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체산자와 개방사슬수는 장식장엄수로 지배층의 선호문양이었으며 15~16세기 명대(明代)의 불교유물<Table 3>로 보아 조선 사가에서도 불교공양자수기법으로 유지, 전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8~19세기 불교자수유물에는 단색(單色)의 섬침(纖針, 現在자련수)이라든가 장단(長短)의 침땀으로 규칙적인 배열이 특징인 투침(套針, 現在자리수)이 구사되어 이들 기법들은 살펴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리고 이 시기 불교자수유물에는 단색의 섬침과 투침의 정연한 단조로움을 깬 정금수(釘金繡, 伏繡)나 금문수(錦紋繡)와 같은 장식수가 시수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당시 발원자나 지배층이 구사하기 어려웠던 체산자의 희귀성보다는 화려한 고급취향으로 금을 선호했던 상황으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부합되어 체산자의 효용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의견은 다음 장에서 다룰 18세기 중기 출전(出典)에서 체산자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반면 체산자의 특징인 피금의 활용은 이어졌다는 상황과 부합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와 같은 기법의 생성과 소멸은 명청대 자수기법의 유행과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며 만력연간의 민간자수가 조선에 활발히 유입되면서 발생한 사조(思潮)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연안김씨(?~?) <베개>의 개방사슬수가 선과 면의 재현에 충분히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사대부가(이하 사가)에 불교공양구를 시수하던 고식(古式)의 기법이 존속하고 있었고 또한 원명대(14~15세기)의 불교장엄자수와 연관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체산자는 원명대(元明代)의 유물로 보아 생활용품에서 불교용품까지 특정 장식기법으로 선호되었으며 고려에 이어 조선의 왕실과 사가에까지 전수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의 경우 발굴 수로 따지자면 비록 소수이지만 15~16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활용되었으며 차차 주머니와 베개 같은 생활용품의 장식기법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Ⅲ. 기록으로 본 체산자
조선시대까지 유지된 체산자는 원대의 여러 유물과 당시 역서(譯書)인 『박통사(朴通事)』를 통해 동시대인 14세기 고려에서도 사용하던 기법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통상(通商)을 나서는 고려 역관을 통해 고려와 대도(大都)에서 벌어졌던 상세하고 다양한 실정묘사 속에서 원과 고려의 실생활용례가 조선 17세기까지 전래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역서는 (원간(原刊) 『박통사』(不傳, 1347) 이래 조선에서도 줄곧 역관의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한아본(漢兒本)과 한어본(漢語本)으로 편찬되었으며 산개(刪改), 번역(飜譯), 언해(諺解) 등 별도의 참고본이 연신 제작되었다. 그리고 시대적 변화에 따라 특정 용어라든가 용례가 변화하기도 하였지만 체산자에 관한 용어가 꾸준히 출전한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 유래와 유행을 짐작케 한다.
특히 현재 전하고 있는 1483년 경 간행된 『산개(刪改) 박통사(朴通事)』(이하 산개본)에서 ‘砌山子’라는 용어의 출전을 시작으로 1677년에 간행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서 체산자에 대한 협주(夾註)가 재차 제시되는 것으로 통해 유행에 관한 상세한 실정을 추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려 후반기에서 조선 1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가장 주목된 장식 기법으로 지명(指名)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따라서 조선의 경우 언문의 ‘구야’로 부르기 이전에는 원래 ‘체산자’였으며 언해로는 ‘귀여 ’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Table 4>에서 보듯이 15세기 후반에 간행된 ① 『산개본(刪改本)』은 원말명초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는 상황 下에서 ‘砌山子’는 정음(正音)으로 ‘치산 ’로 기록하였다. 이 시기 ‘砌山子’는 발음 상 Qìshānzǐ로 읽혀지기에 ‘치산 ’라는 정음을 그대로 언해음으로 옮겨 발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시기 이 기법은 ‘치산 ’로 불렀을 것이다. 이후 ② 1515년 간행된 『박통사(朴通事) 상(上)』(일명 『(飜譯)朴通事』칭함, 국회도서관 소장, 이하 『번역박통사』)에서는 정음인 ‘치산 ’와 속음(俗音)인 ‘귀여 ’으로 기록하였다. 즉 『산개본』은 한자의 독음(讀音)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고 『번역박통사』는 정음과 언해로 새로 명명된 대역서(對譯語)를 함께 기록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음과 대역어가 함께 기록한 산개본의 등장은 명(明)조정과의 원활한 통역을 위해서 간행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 초기 조정은 기존 역서의 기본어였던 원대(元代) 대도(大都)를 중심으로 사용되던 북방한어(北方漢語) 한아언어(漢兒言語)를 사용하였는데 명대(明代) 초(初)의 중국말(官話)과 매우 달라 조정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성종(成宗, r.1469~1494)의 命에 의해 당시 명대의 말인 관화로 바꾸어 고쳐 해독한 것을 편찬하면서 정음과 대역어를 함께 쓴 특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Jung, 2000; The Annals of King Seongjong, 1480, 1483) 이처럼 속음인 ‘귀여 ’이라는 대역어로 언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 『번역박통사』(1515년 무렵)를 비롯하여 ‘노박(老朴)’의 최초 언해자인 최세진(崔世珍, 1473~1542)의 ③ 『노박집람(老朴集覽)』(1517년 무렵)(Yang, 2008)에서부터이고 『음의(音義)』와 금안(今按) 을 통해 체산자의 구체적인 설명이 부연되었다. ④ 『박통사언해』(1677)(Choi, Yoo & Wang, Trans. 2012)에서는 『노박집람』(1517)의 해석 내용과 체산자의 대역어인 ‘귀여 ’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노박집람』과 『박통사언해』협주(夾註)인 『음의(音義)』(③′, ④′)에서 말하길 砌山子은 ‘귀여 ’이며 『박통사언해』의 금안(今按)에 의하면 ‘지금 보는데 산 모양’이며 ‘귀여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체산자의 ‘체’는 묶어서 이룬다는 뜻이고 세속에서는 축성(성을 쌓는다는 것)하는 것을 체성이라고 하는데 돌을 중첩시켜서 쌓아서 만드는 것을 의미하였다고 적고 있다. 스스로 경험한 것을 기록하는 금안의 특성 상 저자는 당시 17세기 중반 제작되던 체산자의 모양을 직접 보고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앞서 최세진의 『노박집람』중 금안 내용이 이어져 오면서 유독 16세기를 중심으로 체산자 유물이 여러 점 전해 오고, 17세기 중반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용어이므로 이 시기에도 여전히 유행하던 기법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체산자는 궁중 베개 유물(<Table 2> ④, ⑤)을 통해 19세기 말에 집중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물 상으로는 조선 전기부터 왕실이하 지배층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도리어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 기법이 왕실 이외에는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Table 5>를 보면 앞서 ① 『박통사언해』(1677)의 대화에서 보인 ‘귀여 ’이라든가 ‘砌山子’라는 기록이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② 『박통사신역(朴通事新譯)』(1765)의 ‘諸般絨線麁白珠兒線’(Snu Kyujanggak, 2004(b))과 ③ 『박통사신역언해(朴通事新譯諺解)』(1765)의 ‘네여러가지보 라온실과굵고흰구슬 실을사고’(Snu Kyujanggak, 2004(b))에서 이들 ‘귀여 ’과 ‘砌山子’라는 용어가 부재(不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이 시기에 이르면 체산자의 활용이 줄어든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박통사언해』(1677)에서 보인 체산자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동시대의 다른 기록을 통해서 17세기 중반에 사용되던 용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다음 <Table 6>는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언간(諺簡)(1659)의 내용이다. 이 글에서는 당시 체산자를 재현하던 궁 안의 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이 장면은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1696)가 1653년 12세에 하가하여 첫 출산(1659년 쯤) 후 아기 베개에 수를 놓으면서 부산을 떠는 모습을 인선왕후가 생생히 기록한 것이다. 공주가 시수하던 베개의 문양과 기법은 사방의 가장자리를 따라 기고 서고하는 산 모양의 체산자이며 이를 재현하고 있는 정경으로 보인다. 어서의 내용에서 왕후는 언해로 ‘귀여 (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Table 6>의 세부(Detail)를 보면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의 본문에서는 ‘귀여 ’ 부분을 ‘귀여 ’로 적고 있는 듯하여 실제 ㅿ과 ㅇ의 분간이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박통사언해』(1677)에서처럼 공식적으로는 귀여 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을 로 모호하게 판단케 하는 것은 인선왕후의 오기(誤記)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17세기 중반 궁중 여인들은 ㅿ를 ㅇ으로 언해의 변화를 인식하여 산 모양의 체산자를 ‘귀여 ’로 이미 기록하였으며 발음상으로는 차차 ‘구야, 혹은 고야’로 부르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은 『박통사언해』가 편집되던 시기와 맞물리는 행적으로 한문으로는 砌山子, 당시 언문으로는 귀여 ( )으로 기록하고 발음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체산자는 현존하는 유물로 보아도 15~17세기 당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던 자수기법으로 18세기 중반에서는 활용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조선 왕실을 비롯하여 지배층의 장식수를 담당하였으며 고려에 이어 조선의 全시기에 지속적으로 사용된 기법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기록을 통해서 살펴 본 체산자는 중국 정음인 砌山子의 Qìshānzǐ을 그대로 음역한 『산개본』(15세기 후반경)의 ‘치산 ’로 고려에 이어 조선에 정착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16세기 초반의 『번역박통사』와 『노박집람』을 통해서는 실을 엮어 山을 이루는 모양을 일컬어 ‘砌山子’라고 전해온 내력을 기록하였으며 이 역시 고려에서부터 활용된 용어가 유지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시기의 기록을 통해서 조선에 이어온 체산자는 『산개본』의 ‘치산 ’와 대역어로 언해(諺解)인 ‘귀여 ’이 등장하여 함께 부르기 시작하였다. 『박통사언해』를 통해서 17세기 중반까지는 ‘치산 ’가 사라지고 대신 ‘귀여 ’으로 쓰고 불렀으며 『숙명신한첩』에서는 ‘귀여 ’이 ‘귀여 ’으로도 기록되는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 알려진 ‘구야, 고야’는 이러한 시대적인 음성학적 변화와 고착현상이 이어져 변화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베개에 사용된 체산자의 유행 정도는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 희소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되듯이 시수(施繡)된 베개를 사용한다는 일은 통상적인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베갯모를 자수한다는 자체가 그리 흔하지 않은 만큼 체산자와 함께 구사된 수침의 등장은 특정 시기와 특정 계층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17세기 이전 기록에서는 수침 제작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수침(繡枕)이 도사 여옹(呂翁)의 한단몽(邯鄲夢)과 연관되거나 호접(胡蝶) 문양이 사용되기도 한 것(HakGokjip; Limdangyugoha)1)은 인생이 꿈과 같다는 『枕中記』(Kim, 2014)라는 관념이 베개의 제작에 저변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당시 베개는 목침(木枕), 포침(布枕), 자침(瓷枕), 수침(繡枕) 등을 제작하는 것인데 그 중 수침은 가장 호화로운 장식 기법이라고 할 수 있기에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임벽당(金林碧堂, 1492~1549)의 침각수가 보장(寶藏)된 것을 보기 드문 천하의 기이한 일로 평가한 송치은(宋徵殷, 1652~1720)의 글이 남아 있는 점(Yakheonjip)2), 16세기 말기 제작인 남양 홍몽남(洪夢男, 1534~1574)의 부인 연안김씨의 <베개> 외에는 자수로 남아 있는 수침 유물은 없다는 사실들은 수침의 제작이 통상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17세기 중기 이후 기록에서 보이는 ‘수침(繡枕)’은 인선왕후의 어간을 통해서 체산자가 함께 구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대체적으로 왕실에서 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Baekheonseonsaengjip; Geumongseonsaengjip)3) 그것은 베개가 소모품인지라 베갯모에 소용(所用)되는 자수기법과 값비싼 채사 등으로 인해 수침은 대중화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47년 효명옹주가 혼례 때 받았던 수침이 지배층에서조차 쉽게 가질 수 없었던 것(Sin, 2009; Yeonryeosilgisul-Byeoljip)4)처럼 수침도 왕실과 권문세가를 중심으로 제작되는 호사물을 위한 것이지 결코 대중화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수침의 일상적 사용을 습속이 경박해진 현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Jonjaejip)5)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수침이 유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Table 2>의 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 <두루주머니>(①)도 자수기법과 문양에 있어서 조선 중기의 문예적 기호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유물이다. 가장자리가 체산자로 장식되었으며 운간이 잘 묘사된 매화꽃과 넝쿨형의 줄기는 원대 <백릉지채수대묘비조국화침(白綾地彩繡對猫飛鳥菊花枕頂)>(융화합자동(隆化鴿子洞) 출토)<Fig. 5>의 화풍과 연관되며 고려를 거쳐 지배층에 오랫동안 이어져 왔음을 짐작케 한다. 더욱이 이러한 주머니는 조선 초기 실록에서 명 황실의 주문에 의해서 여러 종류의 주머니가 수차례 진상되는 사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The Annals of King Seongjong, 1478, 1479)6) 이렇게 제작된 주머니의 다양한 도상들(靑介ㆍ鴛鴦ㆍ靑鳩ㆍ綠鴨ㆍ菱角ㆍ蓮花ㆍ鼓)은 특별히 요구됐던 공교(工巧)하고 정교한 장식성을 함께 갖춘 것들로 살아 있듯이 회화성이 잘 표현된 운간이 짙고 격식있는 묘사를 구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호는 명 황실의 자수양상으로 보이는데 선덕 연간(宣德年間, 1426~1453)이래 예술 가치가 높은 감상용 격사(緙絲)그림이 畵軸처럼 제작 발전하고 있었던 전례(Dan, 2005 ; Seo, 2008)가 자수 제작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성종연간명 황실의 주문에 의해 함께 제작된 호리병 바늘겨레(葫蘆針家兒)도 원대에 유행한 <명황릉채수지매호호형침찰(明黃綾彩繡枝梅葫芦形針扎)>(융화합자동(隆化鴿子洞) 출토)<Fig. 6>의 바늘겨레(針扎)처럼 체산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 양식은 고려에 이어 조선에 유래된 것으로 기본적으로 호리병 모양을 따라서 가장자리를 체산자로 두르고 문양을 시수한 원대 양식을 전승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주머니가 정월의 풍습으로 궁에서 반하(頒下)하던 물건으로서 비단에 자수나 보석을 단 장식성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인정(仁政)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점(Kim, 2010)과 벽사의 의미(Jegyeongsesigiseung; Sinyeokdongguksesigi ; Yu, 2011)로 왕실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풍습으로서 조선 뿐만 아니라 명청(明淸)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1480년과 이후 사은사편으로 명 황태자전(皇太子殿)과 후궁 한씨에게 보내졌던 수낭아(繡囊兒)와 금선낭아(錦線囊兒)(The Annals of King Seongjong, 1480, 1483)7) 중 금선낭의 금선(錦線)도 어떤 기법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비단 위에 그림을 선으로 묘사할 수 있는 압금채수(壓金彩繡)의 정금수(釘金繡, 伏繡)기법이나 자련수로 운간이 잘 묘사된 회화성 짙은 만지교에 피금의 체산자가 장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비단 바탕에 체산자를 장식하고 자수를 한다는 자체가 장식성과 고급화라는 특정한 계급적 기호가 반영되는 장식기법이기에 명대 황실이 선호하였다고 판단된다. 원대에 유행한 체산자는 불교용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에 적용되었지만 명대에 이르면 불교 공양수의 일부에서나 보일 뿐명 황실에서 조차 조선에 제작을 의뢰할 정도로 그 명맥을 찾아보기 어려운 기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 전반기 주머니의 명성은 바로 이 체산자로 수놓은 독특한 장식수에 의한 것이며 그 명성이 명나라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체산자는 17세기에 이르러서도 왕가(王家)를 비롯한 사가(史家)에서도 여전히 존속한 기법이었다. 한 예로 충익공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의 윤씨 부인(1581~1627)은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造錦緣方席)을 제작하였는데 이에 크게 놀란 이시백은 사치적 행위로 치부하였고 이에 부인이 이를 뜯어 버렸다는 유명한 고사(故事)(Dongpyeongwigongsagyeonmunrok; Yeonryeosilgisul)를 통해서 그 활용을 알 수 있다. 아마 윤씨부인이 뜯어 버린 방석의 가장자리는 체산자로 보는데 윤씨 부인이 포의(布衣)의 유생(儒生)시절의 이시백이 1623년 벼슬에 오르고 이후 4년 뒤에 죽은 것으로 보아 이 일화는 벼슬길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긴 일로 당시 자수의 사용이 사회적으로 통상적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17세기 초반 자수의 양상은 임란 이후의 사회적 안정기에 들어 간 이후로 1630년대의 수의수상(繡衣繡裳)이 사치로 지적되기 시작하는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Seungjeongwon-ilgi, 1631)8) 복식에 자수를 시수하는 풍습은 명 역시 만력연간(萬曆年間, 1573~1619)에 이르러서야 민가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도 임란 후 1593년 중강 개시를 통해 수입된 중국의 사라능단을 포함한 비단과 함께 이러한 明末의 풍습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Lee(2004)에 의하면, 당시 조선에는 국산 방직품(鄕職)보다 중국 비단을 구하기 더 쉬웠다고할 정도였고 광해군 5년(1613)까지 존속했던 중강 개시를 통한 양국 상인의 자유무역은 더욱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1622년 중강무역의 폐지 이후에는 공무역보다 밀무역이 더욱 극성을 이루면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라능단의 사용에 있어 제한이 무의미했었다고 한다. 결국 1625년에 이르면 수입된 중국산 비단의 양이 광해군 시기보다 훨씬 증가함에 따라서 수의수상이라는 새로운 복식 유행이 발생하였다고 판단된다. 1623년 정명공주(貞明公主)의 가례준비의 경우 공주방(公主房)에는 비단 수진(繡陳)을 깔아 진열하였는데(Seungjeongwon-Ilgi, 1623)9)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자수로 꾸며진 화려한 혼례물건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서 윤씨의 비단방석의 형식은 이러한 사라능단이 수입되고 수의수상이 권문세가에서 주로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지만 이런 세태를 따랐을 정도의 세도가는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당시 자수라 함은 앞서 16세기 중후반의 유물인 베개와 주머니를 비롯하여 17세기초반의 『전가진완(傳家珍玩)』(1605)과 인목대비의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622)에서 보이는 흉배나 표갑 정도의 스케일이었으며 고려로부터 이어져 왔을 고식(古式)의 자수기법 정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방석은 그 가장자리를 장식수로 처리하는 정도의 수준일 것이며 기법은 오래전부터 전해오던 쇄수변자고수법(鎖繡辮子股繡法, 이하 변침(辮針))이나 체산자의 편수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호사조차 부담스러워했던 이시백처럼 이 시기에는 지배층에서의 자수로 장식된 용품의 경우에는 상당한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변침은 17세기 중반이 되면 점차 사라지는 기법이 되지만 체산자는 근대까지 이어져 왔으며 왕실가를 중심으로 유전되었다. 19세기 민씨 가문에 하사된 <구봉침(九鳳枕)>이 전세되듯이 왕실에서는 체산자로 가장자리가 장식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화려한 자수베개가 신하들에게 종종 하사되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
자수의 위상과 의미는 시대적으로 17세기 중엽 이후가 가장 높고 귀하게 여겨졌으며 18세기 중엽 이후에서야 사회 여러 계층에 유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18세기는 자수가 소유와 관상(觀賞)의 대상으로 여긴 유행의 한 흐름이 주도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Yang, 2016) 특히 정조연간(正祖年間, 1776~1800)이래 왕실에서 신하에게 하사된 자수품으로 수침이 여러 차례 있었다.10) 물론 이들은 민씨가문 전세품인 베개의 경우로 볼 때 가장자리는 체산자로 장식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체산자가 18세기에 들어서면 사가(史家)에서는 차차 그 활용이 줄어든 반면 왕실에서는 존속하던 기법이었으며 수침을 하사받은 신하들은 실용하기보다는 감상과 보장용(寶藏用)으로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앞서 『박통사신역』(1765)과 『박통사신역언해』(1765)에서 체산자의 기록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이미 청과 조선의 문물 유행에서 체산자의 활용이 줄어든 세태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어문의 ‘高麗’가 『신역』에서 모두 ‘朝鮮’으로 바뀌는 것처럼(Yang, 2008) 그 역사적 배경에 따른 세태의 변화도 담고 있는 역서의 특징과 아울러 선호되는 자수기법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체산자는 원대의 경우에는 주머니와 바늘집, 호슬(슬갑)과 같은 일상용품 및 불구용품에 두루 사용되었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베개에까지 활용이 확장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베개로 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18세기에 들어서는 15~16세기 특정 계층이 체산자와 같은 편수(編繡)를 사용하던 불교용품에 정금수(釘金繡, 伏繡)나 금문수(錦紋繡)와 같은 장식수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되었다. 따라서 왕과 왕족들의 선택적 기복신앙에 의해서 체산자는 베개에만 존속하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기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일부로 제한되고 희소화됨에 따라서 소멸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14세기 이래 체산자를 구사하는데 하나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체산자의 아래에 피금(皮金)이나 지금(紙金)을 깐다는 점이다. 다음은 『박통사언해』(上, 1677)의 기록이다.
諸般絨線砌山子吊珠兒的麁白線不要紙金要五錢皮金...
여러가지보 라온실과귀여 무오고진쥬 굴근흰실과紙金으란말고닷돈皮金을 고...
이 기록을 보면 ‘여러 가지 융실과 산자를 덧대고 진주를 달 굵은 흰 실이 필요하오, 금박은 얇은 紙金말고 닷 돈짜리 두꺼운 皮金으로 사다줘요’(Choi, Yoo & Wang, Trans, 2012)라는 것을 통해 채산자 아래에는 금박을 깔아 화려한 장식성을 나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원대의 장식 기법으로 가장 선호된 체산자는 시수할 때 이 밑바탕에 구사되는 바탕 金地에 따라 더욱 고급물건을 나타냈으며 지금(紙金)과 같은 얇은 것보다는 피금(皮金)과 같은 두꺼운 금지를 선호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러한 제작은 실용성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자의 신분의 고상함을 더욱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선호된 피금은 신분자의 기호와 재력의 차이에 따라서 구입할 수 있었으며 활용에 따른 다양한 종류가 시장에 갖추어진 실정 또한 살필 수 있다.
조선도 일찍이 피금에 대해서는 <Table 7>의 ① 『노박집람』(1517)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주석(夾註)에 의하면 편집자는 조선의 피금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문어휘사전인 『질문(質問)』(Lee, 2012)을 인용하여 16세기 이래 중국에서 사용되던 용례를 밝히고 있다. 즉 당시에는 지금과 피금의 구별이 없이 모두 피금이며 두꺼운 종이위에 금을 입힌 피금을 단추의 장식으로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1574년 사행한 조헌(趙憲, 1544~1592) 등의 연행록(燕行錄)에는피금의 다른 용례를 알려준다. 당시 중국 남쪽의 귀한 여성들은 쪽진머리 장신구인 붕계(鬅髻)를 두른 역자(鈠子)를 사용하였는데 여기에 비단이나 피금이 장식되었다고 한다.(Donghwanbongsa) 그리고 이때 사행단에게 두율초(杜律抄)와 함께 피금이 예물로도 증여되었는데(Hagokseonsaeng-Cho-Cheongi) 이 시기 피금에 대한 귀한 인식을 살필 수 있다.
17세기 중반 ② 『박통사언해』(1677)가 편집되던 시기에 이르러서도 편집자는 여전히 조선에서는 피금을 알 수 없다고 하였지만 『질문』의 주석을 통해 중국에서는 수를 놓는데 사용한다는 용례를 밝히고 있다. 이들 두 기록을 통해 중국과 조선의 피금 사용을 살필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피금의 사용이 보편적이지 않은 상황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16세기에는 피금의 사용 자체가 여전히 재력이 뒷받침되는 특정한 신분층에서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세기에는 두꺼운 종이 위에 금박을 더욱 얇게 붙여 만든 것도 피금이라고 부르면서 자수를 더욱 가치있게 제작하여 격식을 높이는 장식 도구로 변화한 용례 또한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16세기 파평윤씨 <바늘집>(No.72)(<Table 2>-②)의 체산자 바탕을 보면 불확실하지만 피금의 금박은 분산되어 두꺼운 종이의 흔적만이 추정되며 성산이씨 <베개>(<Table 2>-③)의 체산자 경우에는 두꺼운 피금이 깔려 있어 기록에서 보이는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양피에 금을 입힌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기록된 두꺼운 종이에 금을 입힌 것을 피금으로 칭하던 시기이므로 이런 양상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를 통해 원말이래 체산자 바탕에 피금이 사용되는 용례가 16세기 중반에도 자수의 장식부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천 석남동 회곽묘 출토 <두루주머니>(<Table 2>-①)경우에는 피금이 깔려 있지 않았는데 입구의 개폐에 따른 기능적인 면이 고려된 사례로 추정된다. 또한 『전가진완』<세화십장생도>(1605)의 경우를 통해서는 다른 용례를 살필 수 있다. 즉 개방사슬수가 구사된 해와 달의 바탕에 솜이 사용된 예(<Fig. 7>)로 보아 체산자의 장식적 용례가 파생된 사례로 판단된다. 이런 파생적 활용은 전신사임당 <자수초충도병풍>(보물 제595호, 동아대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개방사슬수를 시수 후 다른 채사(彩絲)를 그 사이에 사용한 용례(<Fig. 8>)이다.
이처럼 묘사에 있어서 피금의 사용은 계급과 부의 활용에 따라 선택의 차이가 존재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러고 『박통사언해』(1677)를 통해서도 자수에 사용된 피금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도 보편적인 장식 활용으로 추정되며 이런 피금에 대한 기록은 체산자에 대한 부분이 사라진 『박통사신역』(1765)과 『박통사신역언해』(1765)에서도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18세기 중반의 기록에서는 체산자 대신 피금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식적 자수기법으로 금사기법이 선호된 용례와 함께 피금의 유행이 이어졌다고 판단된다. Lee & Sim(2013)에 의하면 금을 입힌 양가죽인 피금의 제작은 『박통사』와 『천공개물(天工開物)』(1637) 그리고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9세기 전반)를 통해 조선의 자체 제작보다는 산시성(陝西省, 秦)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근접지역에서 생산된 피금을 구입하여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기록 상 『육전조례(六典條例)』(1866)에서는 1년 중 10월에 한번 판별방(版別房)이 부연사행(赴燕使行) 중 피금 60장을 구입하였는데 피금 한 장에 은 3전(每張價銀三錢)을 지불하였다고 한다.(Ministry of Government Legislation (ed), 1973, p. 203)
또한 앞서 『천공개물』과 『임원경제지』에서는“복식에 사용한다”고 (Lee & Sim, 2013, p. 93) 하였지만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1834)에는 “물건을 장식하는데 사용되었다”(Lee, 1834, p. 36)고 하여 폭넓은 소용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실제 당시 왕실 당비파(唐琵琶)와 향비파(鄕琵琶)11)의 장식에서 그 용례를 살필 수 있으므로 앞서 역자(鈠子)의 피금 장식과 더불어 피금은 옷과 고급 물건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2) 따라서 『박통사』에서 본 양피금은 특정 계층의 수요를 위해 꾸준히 제작되어 왔으며 조선은 수입에 대부분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9~20세기에 이르면 왕실본의 장식수로는 피금과 체산자가 고수되지만 사가에서는 체산자를 한 베개는 사라지고 다만 피금을 징거 장식하는 유행은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Ⅳ. 결론
‘체산자’는 실을 엮어서 山모양을 만드는 장식 기법으로 고려후기에 등장하여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수용품에 적용된 기법이다. 13~14세기 중세 북방민족의 자수 기법으로서 새로운 유행을 선도했던 체산자는 조선에 들어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했으며 특히 15~16세기의 특징적인 장식 기법으로 자리잡았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자수기법이나 문양의 선호가 고대부터 북방민족인 요, 금, 원과 유사한 기호를 가진 만큼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판단된다.
체산자는 원명시대에서 실용품과 불교용품에 널리 활용되어 왔는데 조선의 경우에는 왕실과 지배층의 숭불과 배불의 사이에서 효용(效用)되다가 16~17세기에 이르면 베개와 같은 일상용품에까지 활발히 적용되었다. 체산자는 15세기에 이르면 ‘砌山子’를 ‘치산 ’로 부르고 16세기에는 ‘치산 ’를 ‘귀여 ’으로도 함께 칭하기 시작했으며 17세기에는 ‘귀여 ’이라 쓰고 ‘귀여 ’로 칭한 듯하며 18세기 중반에는 ‘砌山子’와 ‘귀여 ’이라는 용어가 역 서본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그 활용이 차차 소멸되고 있던 세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17세기 중반 『박통사언해』에서 체산자의 언해인 ‘귀여 ’이라는 정확한 용어가 이어지고 자수에 활용된다는 용례의 제시와 더불어 인선왕후의 어서(1656년 무렵)에서 ‘귀여 ’의 등장은 이후 이 기법이 어떻게 사용되어 가는지를 보여줌으로서 자수사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20세기 이르면 ‘구야(고야)’라는 이름으로 구전되며 왕실의 기법으로 존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체산자의 희소성은 특징있는 장식성으로 인해 권문가의 기복문양기법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 왔으며 조선 자수기법의 특색 중 하나로 손꼽아 지게 되었다. 근대 유물인 수침(<Fig. 9>)에서 보이는 체산자는 평수, 이음수 등으로 피금을 고정한 톱니나 잣 모양으로 징거 고정한 것으로 응용되었는데(SMM, 2011) 이러한 베개문양은 지배층의 기복적 기호를 충족하기 위해 그 흔적만으로 존속, 유지해 온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수사적으로 자수기법이 생성과 소멸의 순환 속에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면 본 연구를 통해 살펴 본 체산자 역시 이러한 전례를 밟아온 기법이었다. 이 연구는 현재 자수사를 연구하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보다도 유물에 대한 정확한 자수 기법의 용어 정리와 통합이 우선이라는 문제인식에서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자수 용어로는 고ㆍ중ㆍ근세의 자수유물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된 근저였다. 따라서 기록을 통한 체산자의 발굴은 조선의 자수사를 좀 더 가치 있는 학문으로서 연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전통 자수기법의 용어가 희소한 현 시점에서 이러한 자수에 대한 기록의 발굴은 시급한 일이라고 판단되며 이를 토대로 추후 더욱 다양한 용어의 발굴과 연구가 뒤따르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박사학위 청구논문의 일부를 보완하여 요약한 것이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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