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 서현수묘 벽화 복식 연구
Abstract
The Mural Tomb of Xu Xianxiu(AD 571), a high ranking official in Northern Qi period, is located in Taiyuan, Shanxi province, China. Despite having been raided, it was still discovered to contain over 530 pieces, such as artifacts and murals, in excellent state of preservation. These murals are noteworthy for their high level of detail compared to other murals from the same era, and are important for understanding the historical context of active East-West and Han-Hu cultural exchange in the 6th to 7th century. The murals of Xu Xianxiu’s tomb depict round-collared and narrow-sleeved garments as well as straight collared robes typical of the Xianbei tribe’s attire. Notable are the ermine fur overcoat and a headwear with flares on the left and right thought to be unique to the Xianbei. The wife and female servants show female attire of the Xianbei at the time; this attire can be characterized by narrow-sleeved long gowns and asymmetrical flying-bird buns. Despite the anti-Han policy of Northern Qi, influences such as the right sided gathering of the robes and embellished hair styles remain. The procession also depicts the three-cornered headdress and long-tailed hood of the Xianbei men, which have been recorded in documents. The large rounded pearl pattern containing the palmette, the divine animal, and bodhisattva`s head motifs show the influence of the Western China [Xi’yu]. Considering that Northern Qi had more active interactions with the three ancient kingdoms of Korea than with the Southern Kingdoms[Nanchao], the findings of this study call for further research on the correlation between the attire of ancient Korea and Northern Qi.
Keywords:
costume in mural painting, costume made of ermine, garment with round-collar, headwear, linked pearl pattern, Xianbei tribe’s costume키워드:
벽화 복식, 초피 구의, 반령의, 관모, 연주문, 선비 복식Ⅰ. 서론
서현수(徐显秀) 벽화묘(571)는 중국 산서성 태원시(山西城太原市)에 있는 북제(北齊, 550~577) 고관의 무덤이다. 발견 당시 『제고태위공태보상서령서무안왕묘지(齊故太尉公太保尙書令徐武安王墓志)』라는 묘지명이 있어 시대 및 묘주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묘는 해발 900m에 위치하며 매우 단단한 토질로 덮여있어 매우 양호한 상태의 벽화가 발견될 수 있었다(Taiyuan Institute of Archaeology [TIA], 2005).
북제 연간이 짧은 시기이므로 서현수 벽화묘는 발견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연구 가치를 지닌다. 벽화는 묘주의 성격ㆍ장제ㆍ풍속 등이 반영되는 것으로 벽화에 나타난 인물상을 통해 복식 및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다. 서현수묘 벽화는 동시대의 다른 벽화에 비해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었고, 동서ㆍ호한 문화 교섭이 가장 활발하였던 6~7세기의 고분이라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높다.
본고에서는 서현수묘 벽화 복식을 중심으로 북제 시대 최분(崔芬, Cui Fen, 551), 루예(婁叡, Lou Rui, 570), ○도귀(道貴, Dao Gui, 571)1), 고윤(高潤, Gao Run, 576)의 벽화묘 5기, 태원과 삭주(朔州)의 묘주 미상의 벽화묘 2기, 출토 도용 등 유물 자료를 비교 분석하였다(Archaeological Society of China, 1987; Hebei Provincial Institute of Cultural Relics [HPICR], 2000; Jinan Museum, 1985; Linqu Country Museum, 2002; Shanxi Province Institute of Archaeology [SPIA] & TIA, 1983; SPIA & TIA, 1990; TIA, 2004). 이를 통해 선비족 복식의 일면을 살펴보고, 6세기 후반 우리나라 고대복식과의 상관성에 대한 기초 검토하는 데에 연구의 목적을 두고자 한다. 한편 본 연구에는 제외되었으나 선비족 복식의 고유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전연, 북위, 동위, 서위, 북주 등 선비족 왕조에 따라 선비 복식의 특성을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전통을 계승한 것인지, 새롭게 변화 또는 창조된 것인지 심층 분석을 하지 못한 연구의 한계점이 있음을 밝혀둔다.
Ⅱ. 사회문화적 배경
선비(鮮卑)족은 요령, 길림, 흑룡강성 일대의 유목민족으로, 오환(烏丸)과 함께 동호의 후예이다. 선비는 점차 발전하여 한대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1세기 중엽에는 요락수(饒樂水, 지금의 Xar Moron)에서 활동하면서 감숙(甘肅) 서부까지 차지하고, 동쪽으로는 요하, 서쪽으로는 처음에는 오환과 접했다가 뒤에 서역과 통하게 되었다. 선비 제부족이 통합(166)되면서 전 몽고를 지배하에 두었으며 후한을 침입하고, 전연, 후연을 거쳐 386년에 북위를 건설하였다. 464년 효문제에 의한 한화개혁 정책으로 북위가 망하게 되고, 동위-북제와 서위-북주로 분열된다. 북주는 한인사족과 훈귀(勳貴) 선비족 통합에 성공하였다. 반면 북제는 진양(晉陽, 지금의 太原, 북제의 副都) 훈귀 선비인과 업도(鄴都)의 한인사족이 대립하였으며 상인 출신 서역인까지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결국 북조는 서위-북주 세력이 선도하여, 이후 수당 왕조를 개창하게 되었다(Kim, 2008; Kim, 2003; Park, 1998; Park & Lee, 1999).
중국의 북제는 이른바 위진남북조 시기(220~589)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동부 유라시아 국제질서의 기본 틀이었던 한ㆍ흉노 남북대립 체제가 붕괴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치ㆍ군사적 혼란으로 인해 중국의 영향력은 주변국가에 미치지 못하였고, 오히려 중국 주변의 쿠차ㆍ신강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소제국들이 발전할 수 있었다. 소제국의 서역 문화는 중국 대륙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었고, 그 결과 중국의 장성 이남지역은 더 이상 중국적이지 않게 되었다.
서현수 벽화 묘가 위치하고 있는 태원은 바로 장성 이남지역으로, 예부터 각종 문물과 자원이 풍부하여 업(鄴)과 같은 고대도시들이 발달하였던 곳이다. 3세기 초부터는 중국 내에서 가장 활발한 문물교류의 장으로 발전하면서 이곳을 거쳐 불교나 조로아스터교가 유입되었다. 소그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으며 호상들의 기이한 상품들도 거래되었다.
선비족 중에서도 특히 북제는 효문제의 한화정책에 반대한 무장 세력이 건국한 나라였기 때문에, 정책적으로는 반한화(反漢化)를 표방하였다. 반한화는 즉 선비화로 이어졌으며(Song, 2006), 살보(薩保)라는 직책을 주어 소그드 상인들을 정치적으로 수용하면서 상류층에서 극단적으로 서역 문물을 수용하게 되었다. 남조풍 및 서역풍 등이 혼재되어 있지만 북제는 북주 등 다른 선비족 국가와 차별되는 복식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Ⅲ. 서현수묘 벽화의 고고ㆍ미술사적 특징
북조 국가의 고분들의 건축적 구조나 장제(葬制)는 낙양천도 이후 남조고분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장제풍속에 대해서 ≪삼국연의(三國演義)≫의 기록에 따르면2), 북위시대에는 조조와 조비가 도굴부대(發丘中郞將·摸金校尉)를 만들어 도굴할 정도로 후장이 성행하였으나, 이후 박장령(薄葬令)(Lee, 2002)이 내려져 후장 풍습이 금지되면서 부장품이 적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 박장의 발굴사례는 극히 드물고, 단실묘의 크기도 커졌으며 묘도는 길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분의 조영과 구조 환경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묘도에도 벽화가 그려지게 되고 상대적으로 고분 벽화의 크기가 확장되었다.
서현수 벽화 묘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묘는 묘도ㆍ통로ㆍ천정ㆍ용도ㆍ묘실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 단실묘이다. 묘의 총 길이는 30m, 깊이 8.5m이며, 땅을 파내고 만든 봉토산의 높이가 5.2m이다. 묘도와 용도의 길이는 각각 15.2m, 2.75m이다. 방형의 묘실은 동서 6.65m, 남북 6.3m, 천정높이는 8.1m인데, 2.7m의 묘 벽면에는 약 330㎡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서현수 벽화 묘의 건축적 구조는 매우 단순하며 특히 시기적ㆍ지역적으로 차이가 적은 루예(婁叡)묘와 비교할 수 있다. <Fig. 1>은 두 묘의 건축적 구조를 보여주는 평면도와 측면도이다. 두 묘의 벽화는 묘실ㆍ통로ㆍ묘도를 따라 각 장면이 하나의 서술식 구조로 배치되어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개된다. 즉 묘실 북벽에서 시작된 연회 장면은 동서벽까지 연결되고 다시 통로ㆍ묘도를 거쳐 의장행렬대로 이어진다. 사실 루예묘에 비해 서현수묘는 보다 간소화된 고분으로, 벽화 크기도 더 작다. 그렇지만 벽화 채색 기법은 루예묘 보다 훨씬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표현 기법을 사용하였다. 투시도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이 있게 표현하였다. 원색보다는 중간색을 사용하여 색조와 농담이 고상하고 조화롭다. 이러한 특징은 벽화의 복식부분에서 효과적으로 보이는데 등장인물의 복식 묘사는 물론 직물 문양이나 털의 재질감까지 표현되어 있다<Fig. 2>.
Ⅳ.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복식
1. 남자복식
시선이 가장 집중되는 곳에는 북벽의 묘실 중앙 정면에는 묘주의 부부병좌상이 그려져 있다. 북제 고관이었던 묘주 서현수는 <Fig. 2, 3>과 같이 반령의 착수장삼 위에 다홍색 직령포를 입고3) 혁대를 한 모습이다. 그 위에 은회색 초피 구의를 걸치고 있다. 이 초피의 재질감은 무려 6세기나 차이 나는 원 세조(元世祖) 출렵도(出獵圖) 의 깃과 가선에 자색 초피를 댄 대구의(大裘衣)와 유사하며, 매우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바탕의 은회색은 흰 담비의 털이며, 검은 꼬리털로 점무늬와 같은 장식을 하였다. 어깨와 목둘레의 양 끝은 회색빛이며 동물의 몸통과 꼬리부분을 활용하여 두툼하게 털을 대었다. 안감은 진한 검은색이다. 한 벌의 초피 구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 십 마리의 담비털이 필요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장면을 통해서 북제 고관의 사치스러운 복식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삭주 북제묘의 묘주상<Fig. 4>에서 보이는 흑색 털가죽 옷에 비해서도 훨씬 정교하고 세련된 형태이다.
묘주의 머리에는 매우 빳빳하고, 좌우 양끝이 펼쳐진 관을 착용하였다. 정수리 위에서 보면 흰색의 관은 상투를 가운데 두고 Ω자형으로 감쌌는데 양끝은 위쪽으로 펼쳐진 모양이다. 또 정면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부채꼴 형태이다. 이 특이한 모양의 관모는 북제 삭주의 벽화묘, 고윤묘, 도귀묘의 묘주상 모습에서도 확인된다<Fig. 3-6>. 또한 북제시대 석실묘(573)에서 출토된 석각화의 남자 주인의 관모와 흡사하다<Fig. 7>. 묘주의 신분을 고려해 볼 때, 서현수와 고윤에 비해 도귀나 삭주의 묘주는 낮은 등급이다. 따라서 특정 계급 이상의 관리 또는 상류층의 관으로 추정된다. 문헌기록에는 없으나 동시기 고분 유적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북제시대 선비족 고유의 관모로 분류할 수 있다.
서현수 벽화묘에서는 의장행렬의 길이가 짧으며, 기마병 없이 보병으로 구성된 의장행렬만 나타난다. 루예묘만 하더라도 한화된 복식 차림의 인물들도 보이는데 비해 서현수 묘에서 호족 병사들이 대부분이다. 묘도의 행렬은 북에서 남쪽 방향을 향해 이어지는데, 동벽 벽화는 우차의 앞뒤로 검인과 남자시종들, 시녀가 그려져 있다. 서벽은 동벽과 대칭구조로써 동벽의 우차 대신 말과 그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검인과 남자시종들의 행렬의 모습이다.
남자들은 반령의 착수장삼을 안에 입고 무릎길이의 직령포를 입었는데 우임이다. 허리에는 혁대를 매고 화를 신었다. 의복 차림새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신분 또는 역할에 따라 머리모양이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검을 찬 남자와 같이 무사로 보이는 사람들의 머리 형태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행렬의 선두에 있는 검인과 말을 끌고 가는 남자는 정수리 위쪽이 뾰족한 산형(山形) 두건을 썼다. 두건의 뒷자락은 등허리까지 늘어져 있다<Fig. 8, 9>. 또 나머지 무사들은 정수리 부분이 뾰족하지 않고 상투 부분이 봉긋한 흑색 장군모(長裙帽)를 썼다. 산형 두건과 마찬가지로 흑색 두건이 달려있다. 상세히 들여다보면 앞이마는 노출시키고 정수리 부근의 상투에 고정시킨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양 끝에 끈이 달려 있어 턱 아래에서 묶었다<Fig. 10>. 두건의 자락은 상투가 비칠 정도로 반투명한 직물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형 두건은 태원 일대의 북제시대 출토 도용(Taiyuan Municipal Institute of Antiquity and Archaeology, 2004) 및 벽화에서만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장군모 도루예묘ㆍ고윤묘ㆍ도귀묘, 삭주의 북제 벽화묘와 고적 업묘 출토 북제 도용에서만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형태의 두건 역시 선비족 양식으로, 반령포 및 직령포에도 함께 착용할 수 있는 관모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장군모 착용의 풍습은 선비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토곡혼(吐谷渾)의 남자들이 착용했다는 장군증모(長裙繒帽), 대두장군모(大頭長裙帽)의 문헌 기록(Kim, 2003)4)과 <Fig. 11>와 같이 양직공도 중등지국사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를 몰고 가는 이의 복장이 눈에 띄는데, 이처럼 남자 시종들은 반령의 착수장삼 위에 무릎길이의 직령포를 입고 화를 착용하였다. 화면에는 생략되었으나 안에는 바지를 착용했을 것이다. 장군모를 착용한 무사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남자들의 일상복 차림으로 생각된다. 머리에는 찰건(紮巾)을 하였는데 머리수건 안의 상투는 뒷머리 아래쪽으로 불룩하여 정수리가 불룩하게 솟은 장군모를 착용한 무사와 구별된다. 찰건의 방식은 다양하다. 둥글게 머리를 감싼 형태가 가장 많았고, 끝이 뾰족한 고깔 형태도 보인다. 우차 옆으로 큰 눈과 턱수염이 있는 서역인의 모습도 보이는데, 곱슬 거리는 단발 위로 피모(皮帽)를 썼지만 복장상의 특이사항은 없다<Fig. 12, 13>.
2. 여자복식
묘주 부인<Fig. 17>은 밀착되어 보이는 반령의를 입고 그 위로 소매와 옷자락이 풍만한 우임 형식의 붉은색 대수의를 덧입었다. 묘주의 경우 소매통이 좁은 것과 대조적이다. 대수의의 소매 중간 부분에는 가로 방향으로 점무늬가 시문된 가는 선이 있다. 붉은색 대수의의 흰색 깃에는 파선의 물결 사이에 화문이 시문된 교파(交波)형의 소화문이다. 또한 수구의 가선에는 8엽 연화문과 소연주로 장식하였고, 빈 공간에는 반팔메트 문양을 채워 넣었다. 대수 안쪽의 받쳐 입은 다른 옷의 소매 가선에서도 4변 화문의 직물 문양이 있다.
머리는 비대칭의 계를 하였다. 이 같은 머리 모양을 중국에서는 비조계(飛鳥髻)(SPIA & Shanxi Museum et al., 2010)라고 하는데, 머리를 빗어 정돈하고 작은 관(冠)을 얹은 것으로 보인다. 북제 삭주 출토 벽화의 묘주부인상<Fig. 18>과 북제 사녀도용(太原東安騎士太子樓瑞墓)<Fig. 19>에서도 볼 수 있는 선비족 여자 머리 모양이다. 붉은 색 대수의 착용이나 화려한 직물 문양 등 남조 및 서역풍이 혼재된 것이 비해 머리 모양은 장식 없이 단정한 것이 특징이다.
부부병좌상 좌우에는 서반(瑞盤)을 들고 있는 시녀가 있다<Fig. 20>. 이들은 발목길이의 장군(長裙)을 입고, 머리에는 비조계를 한 차림새이다. 관식(冠飾)의 끝이 한 개 또는 두 개로 갈라져 있다. 측면에서 보면 가는 비녀를 꽂아 관이 머리 뒷부분 위로 떠 있는 모습이다<Fig. 23, 24>.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치마의 직물문양이다. 커다란 연주문이 시문된 붉은 색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소매통이 좁고 긴 소매가 달린 대금 형식의 상의를 걸쳤다. 묘주 앞의 시녀는 마주보고 있는 신수(神獸)를 주제 문양으로 한 연주문이며, 묘주 부인 앞의 시녀는 팔메트와 꼬리를 펼친 새 문양의 연주문금을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양의 크기가 대형이다. 이처럼 복식에 표현되는 대형의 연주문은 중앙아시아 아프라시압ㆍ타지겐트ㆍ키질의 벽화 복식, 그리고 당대 보련도(步輦圖)에도 대형 연주문 단령포를 착용한 남자의 모습도 있다. 중앙아시아 벽화 복식에 나타난 대형의 연주문을 근거로 하여, 6~7세기 유행단계에 이르지 못한 소형의 연주문이 7세기부터는 대형의 크기로써 복식의 장식효과를 높이는 데에 활용된다고 하였다(Kageyama, 2003). 그러나 서현수 묘벽화의 대형 연주문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비해 반세기 이상 이른 것으로, 복식에 있어 대형 연주문의 활용은 적어도 6세기 후반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동벽 행렬도의 우차 바로 뒤에 상자를 들고 가는 기물시녀<Fig. 21>의 모습에서도 대형 연주문이 있다. 시녀는 착수장삼(窄袖長衫)을 착용하고 있는데 포의 도련과 가선, 수구에는 보살두상을 주문(主紋)으로 하는 연주문이 나타난다. 이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연주문 양식으로 당시 불교의 성행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중앙아시아 출토 및 일본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직물 중에 태양신을 주제문양으로 하는 금직물이 남아 있다. 머리모양 또한 차이가 나는데 머리를 땋아 둘러 얹은 형태로, 이는 신분이나 역할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보살두상의 연주문금은 서벽의 말 안장보(鞍袱)<Fig. 22>에도 나타나는데, 문양이 다른 두 겹의 금직물이다. 두록색의 말안장의 가장자리에 보살두상의 연주문이 있고, 그 사이 사이는 팔메트를 채워 넣었다. 다른 한 겹은 붉은색인데 인동문을 주제문양으로 한 연주문으로, 사이에는 팔메트를 시문하였다.
Ⅴ. 우리나라 고대 복식과의 상관성 검토
우리나라 고대 삼국은 남조뿐만 아니라 북조 문화도 수용하면서 발전하였다. 북제연간에 우리나라 고대 삼국과 북제간 사신이 교류 한 것은 모두 30차례5)에 이른다. 6세기 후반의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선비족의 국가였던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바쳤다. 교류의 구체적인 물목은 알 수 없으나 삼국이 북제 연간에 해당하는 기간에 양·진의 남조 국가와 대외 교류한 것이 모두 26차례6)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횟수임에 분명하다. 교류 횟수만 본다면 오히려 남조보다 더욱 활발하였다.
일례로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중앙아시아적인 화법이나 서역악기의 유입된 경로와 시기를 보더라도 북제의 고분 벽화와 유사한 부분이 발견된다(Song, 2014). 삼국 중 고구려의 대외활동은 백제나 신라보다 더 잦았고 이는 북제풍의 문화가 지역적으로 연접한 고구려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한반도로 흡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 왕흥사터, 신라 분황사터와 같은 고대 도성 내에서도 북제의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화폐가 출토되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연유에서 우리나라의 고대복식문화는 남조 문화의 영향력 못지않게 북조와의 꾸준한 교류 안에서 평행적으로 발달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대 복식에 있어서 동위-북제 선비족 문화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남녀를 막론하고 서현수 벽화묘에 등장하는 인물의 경우, 반령의를 착용하고 있다. 수당대를 거쳐 크게 동아시아에 유행한 단령이 선비족과 같은 호족의 반령의에서 발전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단령포는 관복으로 착용하게 되었다. 서현수 벽화묘의 경우에는 겉옷은 직령의로 하고, 안에 반령의를 입은 경우이다.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도 안악 3호분(357), 무용총(5C 중엽, Fig. 25), 쌍영총(5C 후반), 삼실총(5C 중엽), 통구사신총(6C)에서 당 복식 도입 이전에 단령의가 직령의 안의 내의로 착용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Kweon, 2009). 또한 반령의 착수장삼 위에 덧입은 직령포는 모두 우임 양식으로 나타나는데, 선비화를 표방한 북제의 정책과 모순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포의 우임 양식은 이미 북제 이전 시기에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 복식도 유사시기에 좌임 양식에서 우임 양식으로 변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존하는 한국 고대 복식자료가 고구려 고분벽화, 백제 및 신라의 직물 편과 도용 등 한정적이므로 북제시기 벽화 복식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유물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어 새로운 자료 확보를 통해 고대 복식과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는 꾸준하게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서현수 벽화 중 장수포를 입고 있는 기물 시녀 <Fig. 21>의 긴 소매를 앞으로 뻗고 있는 자세, 직령의 긴 상의 및 치마를 입은 차림새는 고구려 쌍영총ㆍ무용총 벽화의 무용 복식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긴 소매 끝에 무늬가 다른 직물을 사용한 점, 하의가 보이지 않게 상의를 여미고 있는 점이 유사하다. 그러나 무용총의 복식에서는 포 아래에는 치마의 주름처럼 보이는 실선 등 큰 차이도 보인다. 한편 서현수묘 벽화 복식에 나타난 직물 문양과 유사한 것으로 백제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파선이 대칭을 이루는 대파형(對波形)(Zhao, 2005)의 금직물이 있다<Fig. 26>. 통일신라 석가탑 사리장엄 직물 중에서도 불상을 주제 문양으로 하는 테두리 문양의 능직물<Fig. 27> 등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묘주 서현수가 착용하고 있는 초피 구의는 모피와 피혁 복식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 분명하다. 초피는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나오는 최고로 귀한 의복 재료인데(Jung & Park, 1999),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발해에서 초피를 생산하였다는 문헌기록이 전한다. 삼국시대에 초피구의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만주까지 세력을 뻗친 고구려에서도 초피가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까지 담비 60마리를 필요로 하는 초피 구의를 만들어 입은 기록이 남아 있으나 그 구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어 서현수 초피 구의를 참고할 만하다.
Ⅵ. 결론
중국내에서도 북제 복식에 대한 자료는 무성제 하청(武成帝河淸) 연간(562)의 문헌기록과 「북제교서도(北齊校書圖)」등 많지 않다. 이에 서현수묘 벽화 복식은 서역문화의 유입과 활발한 남북조 문화교류가 잘 반영되어, 당시의 복식문화를 재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현수묘 벽화 복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녀 모두 우임 양식이 나타났다. 묘주부인의 대수의를 제외하고 호족풍의 반령 착수장삼과 직령의를 덧입었으며, 혁대, 화를 착용한 모습이다. 머리 모양의 경우 묘주가 착용한 양 날개가 펼쳐진 관모를 비롯하여 산형두건, 장군모가 있었으며, 여자는 비조계를 하였다. 특히 머리 모양은 보수성이 강한 것으로 지역의 기후, 신분 등을 반영한 선비족 양식으로 볼 수 있다. 그 외 묘주가 착용한 은회색 초피 구의와 대형의 연주문 금직물이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본 연구는 6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의 복식문화를 동서문화 교섭과 호한문화의 융합이라는 문화적인 흐름 속에서 북제시대 선비족 복식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향후 선비족 고유복식에 대해서는 다른 선비족 국가의 복식 자료를 통찰하고 각 시대별로 정리하여 밝혀낼 필요가 있다. 특히 북제는 지리적으로도 한반도와 연접해 있어 우리나라 고대복식을 포함한 역사연구에 있어도 북조계 문화에 대한 재고되어야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내의로서 반령의 착용, 우임의 직령의, 착수장포를 입은 여인상, 백제 미륵사지 및 통일신라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직물, 초피에 대한 기록 등을 통해 북제 복식문화와의 상관성에 대해 간략하게 검토해보았다. 이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고대 복식의 원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2015 한국복식학회 추계국제학술대회의 포스터발표 내용을 수정ㆍ보완하여 작성하였다.
Notes
References
- Archaeological Society of China, (1987), Chinese Archaeology Annual [中國考古學年鑑], Beijing, China, Cultural Relics Press.
- Chang, S., (2004), Corpus of Chinese fabric, embroidery and finery [Li-dai fu-shi juan (shang)], 3, Tianjin, China, Tianjin People Fine Arts Publishing House.
- Hebei Provincial Institute of Cultural Relics, (2000), The wall paintings in the ancient tombs in Hebei province, Beijing, China, Cultural Relics Press.
- Jeon, H. T., (2005), The world of Koguryo mural painting, Seoul, Republic of Korea, Seoul National University Press.
- Jinan Museum, (1985), The Northern Qi tomb at Majiazhuang, Jinan [濟南市馬家庄北齊墓], Wenwu [Cultural Relics], 353(10), p42-48.
- Jiu Tangshu [舊唐書] (1060).
-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 Cultural Buddhist Museum, (2010), Sarira case from Bulguksa temple's Sakyamuni stupa, Seoul, Republic of Korea, Cultural Buddhist Museum.
- Jung, B. H., & Park, C. S., (1999), A study on Cho-pi,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42, p25-25.
- Kageyama, E., (2015, September, 22), Use and production of silks in Sogdiana, Retrieved from http://www.cais-soas.com/CAIS/Costume_and_Textile/Sogdian_Silk.htm.
- Kim, S. H., (2003), Hobok(Hufu)-Dress of the silkroad [호복-실크르드의 복식], Seoul, Republic of Korea, Minsokwon.
- Kim, S. S., (2008), Research into the national relationships among Shanrong, Donghu and the early Xianbei, GoJoseonDangunhak, 18, p347-347.
- Kweon, J. H., (2009), The upper garment with round neckline in ancient Korea before bringing in Dang’s dress, Korean Culture, 46, p3-3.
- Lee, N. S., (2002), The culture of the ancient tombs in Baekje dynasty period [百濟의 古墳文化], Seoul, Republic of Korea, Seokyung.
- Liangzhu [梁書] (629).
- Linqu Country Museum, (2002), The Cui Fen tomb with murals of Northern Qi dynasty, Beijing, China, Cultural Relics Press.
- Park, H. J., (1998), The study on the Hu-Han system in Estern Wei and Northern Qi period[東魏ㆍ北齊時代의 胡漢體制의 展開-胡漢葛藤과 二重構造], The Division and Unification:The Variety of Chinese Middle Age [分裂과 統合-中國中世의 諸相-], Seoul, Republic of Korea, Jisik Sanup Publication co., Ltd.
- Park, H. J., & Lee, S. W., (1999), A study on the costume reformation of Bei-Wei Xiao-wen-di,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43, p283-283.
- Samguksagi [三國史記] (1145).
- Sanguoyanyi [三國演義] (1522).
- Seoul Museum of History, (2007), Treasures from a golden age of China, BC206~AD960, Seoul, Republic of Korea, Soldae.
- Shanxi Province Institute of Archaeology & Shanxi Museum & Shuozhou Municipal Deparment of Cultural Heritage & Chongfu Temple Cultural Relics Administration, (2010), A mural-painted tomb of the Northern Qi in Shuiquanliang, Shanxi[山西朔州水泉梁北齐壁画墓发掘简报], Wenwu, 655(12), p26-42.
- Shanxi Province Institute of Archaeology & Taiyuan Municipal Institute of Antiquity and Archaeology, (1983), Excavation report of the Northern Qi tomb of Lou Rui from Taiyuan[太原市北齊婁叡墓發掘簡報], Wenwu, 329(10), p1-23.
- Shanxi Province Institute of Archaeology & Taiyuan Minicipal Institute of Antiquity and Archaeology, (1990), A mural-painted tomb of the Northern Qi in Nanjiao, Taiyaun[太原南郊北齊壁畵墓], Wenwu, 415(12), p1-10.
- Song, J., (2006), The background of passion for Xihu culture in the Beiqi period[北齊‘西胡化’의 背景과 그 性格], Historical Studies of Ancient and Medieval China, 15, p197-197.
- Song, J. H., (2014), Eastern Wei-Northern Qi period Bingzhou area tomb murals: relations with Goguryeo murals, Sogang journal of early Korean history, 18, p207-207.
- Taiyuan Institute of Archaeology, (2004), Lou Rui tomb Northern Qi period, Beijing, China, Cultural Relics Press.
- Taiyuan Institute of Archaeology, (2005), Xu Xianxiu tomb in Northern Qi period, Beijing, China, Cultural Relics Press.
- Taiyuan Municipal Institute of Antiquity and Archaeology, (2004), Northern Qi tomb of Ku Di Ye at Taiyuan, Chinese Archaeology, 4, p123-123.
- Yidu Museum in Shandong Province, (1985), Line paintings of the Northern Qi period stone chambered tombs at Yidu[益都北齊石室墓线刻畵像], Wenwu, 353(10), p49-54.
- Zhao, F., (2005), History of Chinese Silk Art, Beijing, China, Cultural Relics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