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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ses ] |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No. 3, pp. 77-95 | |
Abbreviation: JKSC | |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 |
Print publication date 30 Apr 2019 | |
Received 07 Feb 2019 Revised 11 Mar 2019 Accepted 11 Mar 2019 | |
DOI: https://doi.org/10.7233/jksc.2019.69.3.077 | |
조선 후기 왕실 군복용 용보 연구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흉배본과 어진을 중심으로 | |
송수진 ; 홍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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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의류산업학과 박사수료 | |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산업학과 교수 | |
A study of Dragon Insignia for Royal Military Uniform in the Late Joseon Dynasty : Based on the Pattern of Insignia Badge and King’s Portrait Housed in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 |
Song, Su-Jin ; Hong, Na-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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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D Candidate, Dept. of Fashion Industry, Ewha Womans University | |
⁺Professor, Dept. of Fashion Industry, Ewha Womans University | |
Correspondence to : Hong Na-Young, e-mail: nyhong@ewha.ac.kr | |
The insignia badge(胸背) was a marker that indicated rank. The king’s badge had a dragon motif on it, and was called the dragon insignia(龍補). This insignia was attached on the king‘s military uniform as well as the royal robe(袞龍袍). In Joseon Dynasty, the military uniform of the king could be categorized into two, yungbok(戎服) and gunbok(軍服). It can be presumed that the king’s yungbok was a red cheollik with a dragon insignia. Examining King Choeljong’s portrait shows that gunbok consisted of dongdari and jeonbok with dragon insignias on its chest, back and the shoulders. The National Palace Museum houses a large number of the paper patterns and wood stamps used making the dragon insignias. Among these, 7 sets were used for gunbok. Most of the patterns have inscriptions that record the year within a sexagenary cycle, users, and uses. This study attempted to identify the exact production date and wearer of dragon insignias by analyzing the patterns used for gunbok as well as the dragon insignia embroidery artifacts and portraits of kings. The oldest insignia was from the year of gapja(1744), and it belonged to King Yeongjo. The dragon on the chest pattern is that of a rising dragon(昇龍), while the rest of the patterns showed a coiled dragon(盤龍) with clouds filling the background. King Heonjong’s year of musul pattern(1838) had dragon patterns that followed the year of gapja patterns, however, additional symbols of world mountain with triple peaks(三山) rising from the waves and precious treaures(寶紋) appeared in the bottom of the badges, with a circular border that marked the boundaries of the insignias. The dragons on the insignia worn by King Gojong in the year of gimyo(1879) were all changed into rising dragons, and the border was made of 24 curvilinear lines. The background followed the year of musul pattern characteristics.
Keywords: dragon insignia, insignia badge, jeonbok, military uniform, pattern of insignia badge 키워드: 용보, 흉배, 전복, 군복, 흉배본 |
흉배(胸背)는 계급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상복(常服)의 가슴[胸]과 등[背]에 부착하여 흉배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관리들이 사용한 네모난 것을 ‘흉배’라 하고, 왕과 왕세자, 그리고 그 배우자가 사용한 둥근 것을 ‘보(補)’라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왕의 상복인 곤룡포(衮龍袍)에 부착한 것을 용흉배(龍胸背)라 표현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어 왕이 사용했던 것도 흉배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용을 수놓은 용흉배는 가슴과 등, 양어깨에 부착하였는데, 어깨에 부착하는 것은 견화(肩花)라고도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특정 위치의 본을 지칭할 때는 묵서에 따라 ‘흉배’와 ‘견화’로 나누어 쓰고, 일반적인 왕의 흉배를 의미할 때는 관용적으로 사용했던 ‘용보(龍補)’로 표현하였다.
흉배에 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지속해서 이루어져 문양의 종류와 조형성을 다루거나(Cho, 1977; Cho, 1982; Choi, 1968; Ha, 2004; Kim, 1979; Kim, 1985; Kim, 1986; Kwon, 2012; Lee, 1994; Paik, 1994) 시대에 따른 제도의 변화를 고찰한 연구(Kim, 1969; Kim, 2017; Lee, 2008; Lee & Ha, 2007; Oh, 1999; Oh & Chun, 2000)가 많으며, 흉배 제도가 중국에서 유래하여 중국과 비교한 연구(Bae, 1989; Jung, 2001; Kim, 2000; Song, 2013; Won, 1980)도 있다. 또한, 흉배에 사용된 자수 기법에 대한 분석(Kim, 2000; Kim, 2011)과 출토 흉배의 보존처리에 관한 연구(Noh, 2007; Ryu, 2008)도 있다. 용보에 대한 연구(Lee, 1974)도 있는데, 대한제국 시기의 황족용보에 대해 다루고 있어 시대에 따른 변화를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010년부터 다양한 소장품을 분야별로 소개하는 소장품 도록을 발간하면서 왕실에서 복식에 문양을 직조하거나 수를 놓기 위해 사용한 복식본을 한데 모아 정리하였다. 여기에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흉배본도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지금까지 복식 분야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군복용 흉배본도 여러 점 있다. 흉배본에는 육십갑자로 기록한 연대와 함께 사용 대상과 용도가 적혀있는데, 대부분 19세기 말 유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도안의 조형적 특성과 흉배의 크기 등을 검토해 보면 그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에 본 연구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군복용 흉배본과 함께 용보 유물과 어진(御眞)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조선 시대 군복용 용보의 시대에 따른 변화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정확한 제작 연대와 사용자를 추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의 대상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군복용 흉배본과 어진에 그려진 흉배로, 용의 형태와 세부묘사, 크기의 변화 등을 서로 비교 분석하여 시대를 구분하였다. 더불어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日省錄)』, 『상방정례(尙方定例)』 등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왕의 군사(軍事) 복식인 융복(戎服)과 군복(軍服)에 대해 정리하였으며, 용보의 사용 여부를 확인하였다.
조선 후기 군사복식(軍事服飾)은 융복(戎服)과 군복(軍服), 갑주(甲冑)로 나눌 수 있다(Park & Lee, 2004). 융복은 왕의 행차를 수행하거나 외국에 사신으로 나갈 때, 국난을 당하였을 때 착용하였던 군사복식으로 (You, 1975), 조선 초1)부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한다. 그러나 법전에 융복이 명시된 것은 18세기 편찬된 『속대전(續大典)』부터로, 당상관은 남색 철릭과 영자를 갖춘 자립[藍色帖裏, 紫笠具纓], 당하관은 청현색 철릭과 흑립[靑玄色帖裏 郊外動駕 紅色帖裏, 黑笠晶纓]으로 구성되었다.
철릭[帖裏, 貼裏, 天益, 天翼]은 원(元)에서 유래한 포(袍)로 고려 말에 들어와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여러 계층에서 착용하였다(Lee, 1988). 저고리 부분과 치마 부분을 따로 재단한 후, 치마의 허리 부분에 주름을 잡아 저고리와 연결한 철릭은 몽골족 고유의 상의하상(上衣下裳) 형식의 의복이다(Hong, Shin & Lee, 2011). 치마폭이 넓어 활동적이면서 간편한 옷으로 몸을 민첩하게 움직여야 할 때 융복으로 조선에서도 널리 착용되었다. 그러나 양난(兩亂) 이후 다른 포류(袍類)와 마찬가지로 넓어진 소매는 말을 타고 달리기에 불편하며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과 함께 융복을 폐지하고 군복으로 군의 복장을 통일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2)
임진왜란 이전까지 대규모의 전란이 없었던 까닭에 융복은 군복보다는 어가(御駕)를 수행할 때 입는 활동복의 개념이 더 컸다. 다시 말해 융복은 전란을 대비한 옷이 아닌 시위(侍衛)를 위한 복식으로 검소함을 숭상하며 사라능단(紗羅綾緞)을 금하면서도 융복만큼은 왕실의 체모(體貌)를 위해 이를 허용하기도 하였다.3) 이후 전란 중에 군복의 기능도 겸하게 되지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넓은 소매 등을 이유로 17세기 이후 협수(夾袖ㆍ狹袖)와 전복(戰服)으로 구성된 군복이 등장하면서 주립(朱笠)과 철릭으로 구성된 융복과 전립(戰笠)과 협수로 구성된 군복의 이중 구조가 한동안 이어지게 되었다.
백관이 융복을 입고 어가를 시위할 때, 왕 역시 융복을 착용하였다. 왕의 융복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는데, 거둥할 때 융복을 갖추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4) 그렇지만 왕이 융복으로 무엇을 입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정확한 기록은 없고, 세자의 융복 색에 대한 논의가 있어 제도가 정착되기 전까지 여러 색을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5)
왕의 융복은 영조 때 증보(增補)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궁중에서 소용되는 물품에 대해 상의원에서 정리한 『상방정례(尙方定例)』를 비교해 좀 더 구체화 할 수 있다. 『국조속오례의』 에는 왕이 능에 행행(行幸)할 때 능행길에는 융복을 입고, 능이나 원(園)을 배알할 때는 익선관에 참포(黲袍), 오서대(烏犀帶)로 갈아입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6) 하지만 성종 때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능행 시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여(輿)를 타는 것7)으로 규정하고 있어 세월이 흐르면서 상복(常服)에서 융복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744년 편찬된 『국조속오례의』에 이어 1752년 편찬된 『상방정례』에는 왕의 행능의(幸陵儀) 복식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미두면(馬尾頭冕), 대홍운문필단(大紅雲紋匹緞)용포, 초록운문필단(草綠雲紋匹緞) 가문라(加文剌), 대홍유흉배좌우견용(大紅襦胸背左右肩龍), 대홍광다회(大紅廣多繪), 남광다회(藍廣多繪), 자적광다회(紫的廣多繪), 흑궤자피화(黑麂子皮靴) 등으로 구성된 이 옷이 『국조속오례의』에서 융복이라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방정례』의 ‘용포’에 대한 해석은 이를 ‘곤룡포’로 보는 것과 ‘철릭’으로 보는 것,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곤룡포로 보는 의견은 상복 안에 받쳐 입은 철릭과 광다회를 융복으로 보고 있다. 그 근거로 공복(公服) 속에 입은 철릭[貼裡]과 광다회[廣帶]를 고도첩리(固道貼裡)라 하고 이를 융복이라 칭한 『반계수록(磻溪隨錄)』의 기록8)을 들고 있다. 하지만 『상방정례』에는 용포와 함께 더그레[加文剌], 광다회까지만 나열되어 있고 철릭은 빠져 있는데, 바지ㆍ저고리ㆍ철릭은 곤룡포 속에 일상적으로 갖추었던 받침옷이라 별도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철릭에는 광다회를 띠었는데 의대 목록에 광다회가 있음을 근거로 목록에는 빠져있지만 철릭을 입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Kim, 2008). 즉, 왕의 융복을 용포가 아닌 그 안에 입은 철릭으로 보았다.
반면, 두 번째 견해로 용포를 철릭으로 해석한 것이 있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보면 왕은 창덕궁을 출발할 때 곤룡철릭(袞龍帖裏)을 입었는데, 이것을 용보(龍補)를 단 철릭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상방정례』의 대홍운문필단용포가 곤룡철릭과 같은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Lee, 2012). 즉, 왕의 융복은 흉배를 단 철릭으로 보는 것이다.
왕의 융복에는 평융복(平戎服)도 있는데, 정조 연간 『일성록(日省錄)』에 많이 등장한다. 1725년 영조의 책봉례에 참석했던 청나라 부사 아극돈(阿克敦)은 중국에 돌아가 조선사행(朝鮮使行)을 토대로 봉사도(奉使圖)를 (Jeong, 2005) 그렸는데 거기에는 종립(鬃笠)을 쓰고 단령을 입은 무관이 묘사되어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이 같은 차림을 일종의 평융복으로 보고, 왕 역시 용포, 즉 곤룡포를 입고 종립을 써 평융복의 매무새를 완성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Kim, 2008). 다시 말해, 융복인 철릭과 더그레를 홍색 용포 속에 입고 머리에는 종립을 쓴 차림새를 평융복으로 본 것이다.
‘용포’에 대한 해석은 다르지만, 두 견해 모두 왕의 융복을 ‘철릭’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용포를 곤룡포로 본다면, 철릭에는 별도의 용보를 달지 않고 입은 것이 된다. 즉, 융복에는 용보를 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곤룡철릭으로 본다면 대홍운문필단으로 만든 철릭에 대홍 바탕의 용보를 달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조의 소렴의대(小殮衣襨)와 재궁의대(梓宮衣襨)에는 다홍운문필단철릭[多紅雲紋大緞帖裏]9)과 진홍용문단철릭[眞紅龍紋緞帖裏]10)이 보이는데, 둘 다 흉배[金胷褙具]를 달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용보를 달은 철릭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정조 이전 기록은 찾지 못하였으나, 적어도 정조대에는 왕의 융복으로 홍색 철릭에 용보를 달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상방정례』에 나열된 융복의 구성을 보면 초록운문필단으로 만든 더그레가 용포 뒤에 나오는데, 당시 착장 순서로 보면 철릭 위에 더그레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융복과 달리 왕의 군복은 그 구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어진이 남아 있다. 철종 12년인 1861년 그려진 철종(1831-1863) 어진은 조선 시대 어진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군복본으로 비록 삼 분의 일이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9세기 왕의 군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어진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머리에는 전립(戰笠)을 쓰고 협수 위에 전복(戰服)을 덧입고 그 위에 요대(腰帶)와 전대(戰帶)를 두른 모습이다. 왕의 전립은 옥판, 옥로, 공작우, 영자로 장식하였다. 협수, 즉 동다리는 황갈색의 길에 소매 중간까지 홍색 소매를 덧대고 흰색 한삼을 그 아래 대었다. 동다리 위에 입은 전복은 검은빛을 띠고 있다(Park, 2016). 군복에는 가슴과 양어깨에 금색으로 칠한 용보를 그렸는데, 전복 위에 그린 것은 전대로 많이 가려졌지만 정원(正圓)을 반으로 갈라 양쪽에 부착한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는 왕의 융복에 대한 기록이 조선 초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에 비해 군복에 대한 기록은 정조 때 처음 나타난다.11) 정조는 군복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특히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에 갈 때 군복을 즐겨 입었는데, 이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 때문이었다.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사도세자가 생전에 군복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12) 사도세자를 그리는 마음에 정조는 현륭원에 갈 때 본인은 물론, 신하들도 군복을 입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Lee, 2012).
왕의 군복 착용에 대한 기록이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정조 연간이지만, 군복으로 착용된 협수와 전복에 대한 기록은 영조의 염습의대(斂襲衣襨)와 재궁의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렴의(小殮衣)13)와 재궁에 채워 넣는 보공14)으로 협수와 협수의(狹袖衣), 그리고 전복이 포함되어 있다. 협수의 색으로는 연록, 연두, 남, 보라, 초록 등 다양한 색상이 사용되어 철종 어진의 동다리와는 차이를 보인다. 전복은 재궁의대에만 보이는데 침향(沈香)색을 사용하였다. 정조의 염습의대와 재궁의대에도 협수가 보이는데, 전복 대신 쾌자(快子)와 함께 사용되었다. 소렴에는 유록색 협수와 아청색 쾌자, 토색 협수와 아청쾌자15)를, 대렴에는 회색협수에 아청쾌자16)를 사용하였다. 보공으로는 유록색 협수와 아청쾌자17)를 넣었는데, 특이한 점은 대렴과 보공으로 사용된 쾌자에는 금용흉배(金龍胸褙)를 갖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쾌자는 전복과 형태가 거의 같은데 깃이 달린 점에서 차이가 있다(Kang et al., 2015). 조선 후기 무관은 군복으로 협수 위에 쾌자를 입었는데, 왕 이하 사대부의 평상복으로 입혀지기도 하였다. 정조의 염습 및 재궁의대에 보이는 쾌자 중 흉배를 갖춘 것은 정조실록에서 확인한 왕의 군복으로 생각되며, 철종 어진과 달리 전복이 아닌 깃이 있는 쾌자를 군복으로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왕실에서 문양을 직조하거나 수놓는데 사용한 종이본과 목판본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흉배를 만들 때 사용한 흉배본도 여러 점 보관하고 있다. 대부분 국말 유물로 알려진 흉배본은 문양에 따라 사용자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고, 육십갑자로 표기된 연대와 용도에 대한 묵서를 통해 어디에 사용한 흉배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 문양을 그린 흉배본은 종이본이 17건 66점, 목판본이 6건 10점이 있다. 그중 ‘군복’이라고 묵서가 있는 것이 6건이며 도안의 구성으로 볼 때 군복용으로 추정되는 것이 1건 있어, 총 7건 30점이 군복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군복용 흉배본의 조형성 분석을 통해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여 구체적인 사용자를 확인하고 시대에 따른 문양의 변화를 정리하였다.
<Fig. 1>은 갑자년 음력 8월[仲秋]에 제작한 것으로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을 그려 왕을 위한 흉배본임을 알 수 있다. 총 3장이 한 벌을 이루고 있는데, 각각 ‘갑듕츄군복압면두초’, ‘갑듕츄군복흉초’, ‘갑듕츄군복견화초’ 라고 쓰여 있어 군복의 가슴과 등, 어깨에 달기 위해 만든 흉배본으로 보인다. 가슴본에는 ‘압면두초’라고 쓰여 있어 한 장에 그렸지만 두 개로 분리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군복으로 입었던 전복이 앞 중심에 트임이 있는 대금(對衿)형이었기 때문으로, 가슴에 다는 흉배는 세로로 반을 갈라 반원형 2개로 나누어 제작했다. 등본은 거의 정원을 이루며 지름은 27.8cm로 가장 크고, 가슴본은 세로 지름이 25.0cm, 어깨본은 세로 24.2cm, 가로 25.6cm 이다.
도안의 구성을 보면 가슴본은 <Fig. 1>처럼 서로 마주보는 승룡(昇龍)을 좌우 대칭이 되도록 배치하고 주위를 여의형 운두(雲頭)에 꼬리가 있는 구름으로 채웠다. 용의 얼굴 옆에 위치한 화주(火珠)는 세로로 반을 갈라 중앙에 배치하였다. 등본과 어깨본은 도안의 구성이 거의 동일한데, <Fig. 2>와 같이 승천하기 전에 서려 있는 반룡(盤龍)을 화면에 가득 차게 배치하였다. 용의 주위는 구름으로 채우고 중앙에는 화주를 두었다.
이 흉배본의 정확한 사용자를 추정하기 위해 갑자년이 언제를 의미하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뒤에서 분석할 다른 흉배본과 비교를 통해 갑자년의 후보를 압축하면 1744년, 1804년, 1864년을 뽑을 수 있다. 1744년은 영조(1694-1776) 20년, 1804년은 순조(1790-1834) 4년, 1864년은 고종(1852-1919) 원년이다. 그 중 이 흉배를 1744년 50세의 영조를 위한 흉배본으로 추정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흉배의 크기는 연대 추정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갑자년 흉배본은 지름이 25-28cm에 육박하는데, 이는 순종황제의 황색 곤룡포에 부착하였던 용보가 19cm인 것과 비교하면 매우 큰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흉배가 가슴을 다 덮을 만큼 컸지만 국말로 갈수록 작아지며, 고궁박물관 소장 다른 흉배본의 지름이 20cm 전후인 것과 비교하면 갑자년 본은 시대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갑자년의 상한선을 정하기 위해 남아있는 흉배 유물의 크기를 확인해본 결과 의원군 이혁(義原君 李爀, 1661-1722)의 단학흉배가 30.8×34cm로 비교적 근접한 크기였다. 왕의 흉배가 종친인 의원군의 것보다 작지 않으리라 생각되며, 따라서 숙종 10년인 1684년 갑자년까지 올라가기는 어렵다고 판단되고, 1744년을 상한선으로 정하였다.
갑자년 후보 중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기 위해 흉배본을 어진 및 유물과 비교하여 조형적 특징을 분석하였다. <Fig. 3>은 1900년에 채용신이 모사한 영조의 어진(御眞)으로 1744년에 그려진 어진을 본 떠 그린 것이다(Portrait of king Yeongjo, n.b.-b). 상복차림으로 가슴과 양어깨에 금색으로 채색한 흉배가 선명하게 보인다. 먼저 용의 얼굴을 살펴보면 <Fig. 4> 어진의 경우 입꼬리와 볼에 뾰족뾰족한 수염을 그리고 있고, 뒷머리의 갈기가 위를 향해 날리고 있는 것이 <Fig. 5> 흉배본과 매우 흡사하다. 이는 조선 말기 도안과는 구분되는 특징이다. <Fig. 6>은 순종 황제의 황색 곤룡포에 부착된 것이고, <Fig. 7>은 ‘임오 동궁마마 흉’라는 묵서가 있는 상복용 흉배본으로 둘 다 순종이 사용한 것이다. 용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입꼬리와 볼의 수염은 사라졌고, 뒷머리 갈기는 일자로 표현하고 있어 <Fig. 4> 어진이나 <Fig. 5> 흉배본에 비해 도안이 정형화되었다.
다리에 표현한 주모(肘毛)를 보면 영조 어진<Fig. 8>과 갑자년 어깨본 <Fig. 9>는 긴 것과 짧은 것 이중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또한 <Fig. 10> 임오년 동궁마마 흉배본의 견화 도안에서는 긴 것만 그리고 있어 차이가 있다. 구름은 <Fig. 11>, <Fig. 12> 모두 여의형 운두에 꼬리가 있는 형태로, 꼬리가 개수는 정해진 것은 아니고 구름의 위치에 따라 남는 공간을 향해 2개에서 5개까지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흉배의 테두리 역시 연대 추정의 단서가 된다. 일반적으로 용을 수놓은 흉배는 왕의 것은 24개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원형으로, 왕비의 것은 정원형으로 윤곽선을 처리하여 테두리의 모양으로도 남성용과 여성용을 구분하였다(Surimwon & Han, 1979). 수본에서는 테두리를 두 줄의 선으로 그렸고, 실제로 <Fig. 13> 영친왕과 <Fig. 14> 영친왕비 유물을 보면 굵은 금사 두 줄을 사용하여 테두리를 수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년 흉배본을 살펴보면 가슴본은 물론, 등본, 어깨본 모두 별도의 테두리를 그리지 않았다. 이는 영조어진과도 일치하는 모습으로 별도의 테두리를 그리지 않고, 다만 원형의 경계를 표시하여 별도의 옷감에 흉배를 제작하여 곤룡포에 부착하였음을 암시한다.
(NPMK, 2014, p. 113)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임오년 흉배본에 비해 정형화되지 않은 용의 표현 방법과 별도의 테두리를 그리지 않은 점, 그리고 28cm에 이르는 크기가 갑자년을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이와 함께 뒤에서 살펴볼 흉배본의 특징과 비교해 보면 갑자년은 1744년으로 추정된다.
<Fig. 15>는 무술년에 제작한 왕의 군복용 흉배본으로 목판에 문양을 양각하였다. 반원형 목판 2개와 원형 1개가 한 벌로, 각각 ‘무슐군복 흉판’, ‘무슐신조군복 흉견화판’이라는 묵서가 손잡이에 있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흉견화판’이라는 묵서로 볼 때 등과 어깨는 하나의 본을 같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흉판’이라 쓰인 둘로 나뉜 것이 가슴본이다. 크기는 등과 어깨본의 지름이 18.6-18.9cm, 가슴본은 20cm로 차이가 조금 있다.
(NPMK, 2013, p. 25)
도안의 형태를 보면 가슴본은 <Fig. 16>처럼 서로 마주보는 승룡을 좌우 대칭이 되도록 배치하였고 주위를 구름으로 채웠으며, 하단에는 삼산과 파도, 물결, 보문(寶紋)을 넣었다. 화주는 온전한 형태로 오른쪽에 위치하는데, 중앙에 반을 갈라 배치했던 갑자년 흉배본과는 차이를 보인다. 등과 어깨본은 반룡을 화면에 가득 차게 두고, 하단에는 가슴본과 마찬가지로 삼산과 파도, 물결, 보문을 넣었다.
(NPMK, 2013, p. 24)
무술년 흉배본의 가장 큰 특징은 하단에 삼산과 파도, 물결, 보문을 배치한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왕비와 세자빈의 흉배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원형의 용보는 여성의 것으로 구분되었다. 만일 묵서로 ‘군복’용 본임을 명시하지 않았다면 ‘흉견화판’은 왕비를 위한 것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도안의 구성만 놓고 보면 원삼이나 적의ㆍ당의용 흉배본과 차이가 없다.
연대 추정을 위해 다른 흉배본과 비교해 보면 무술년의 후보는 1778년, 1838년, 1898년으로 압축할 수 있다. 1778년은 정조(1752-1800) 2년, 1838년은 헌종(1827-1849) 4년, 1898년은 고종(1852-1919) 35년으로, 이 중 무술년의 흉배본은 1838년 11세의 헌종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Fig. 17> 용의 얼굴을 <Fig. 5> 갑자년 흉배와 비교하면 입꼬리와 볼에 뾰족뾰족한 수염이 아직 남아있고, 뒷머리 갈기 역시 수평이 아닌 위를 향해 사선으로 뻗어있다. <Fig. 18>은 흉배견화판을 건탁(乾拓)한 것의 부분으로 용의 주위를 채운 구름이 갑자년 흉배본과 유사하게 여의형 운두에 2-4개의 꼬리가 달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갑자년 흉배에서 변화된 점도 찾을 수 있는데, <Fig. 18>에 보이는 것처럼 두 줄의 원형 테두리가 생겼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원형의 두 줄로 된 테두리를 갖는 것은 국말 여성의 용보에 나타난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Fig. 19> 철종(1831-1863) 어진을 살펴보면 어깨에 부착한 용보에 정원의 테두리 두 줄을 금색으로 그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18세기 중반까지는 왕의 흉배에 테두리가 없었는데, 19세기가 되면서 원의 경계를 두 줄로 표시하여 테두리가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크기를 통해 연대의 단서를 한 걸음 더 추적해 보면 등본을 기준으로 지름이 약 19cm 정도 되는데, 이는 앞에서 살펴본 갑자년 흉배가 28cm에 육박하는 것에 비해 매우 작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778년의 것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갑자기 너무 작아져 무리가 있다. 19cm는 순종의 흉배와 같은 크기로, 이것만 놓고 보면 1898년 고종의 흉배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크기만 놓고 고종의 것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문양의 조형적 특징을 뒤에서 살펴볼 국말 군복용 흉배본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볼 기묘년 흉배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를 1838년 헌종의 것으로 본다면 11세의 소년이 사용한 것으로, 같은 크기라도 시대가 올라갈 수 있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또한, 뒤에서 살펴볼 흉배본을 통해 사용자가 성장함에 따라 흉배의 크기도 점점 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 중반 성인이 사용한 용보는 이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Fig. 20>은 기묘년에 제작한 군복용 흉배본으로 오조룡을 그려 왕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반원형 가슴본 2장과 등본 1장, 좌우 어깨본 2장으로 총 5장이 한 벌을 이룬다. 가슴본의 앞면과 등본의 뒷면에는 ‘긔묘신조 군복 룡흉’, 오른쪽 어깨본 뒷면과 왼쪽 어깨본 앞면에는 ‘긔묘신조군복 룡흉 견화’라는 묵서가 있다. 보관용 종이도 함께 전해지는데 ‘직금룡흉 상이원의온견양’라고 쓰여 있다(NPMK, 2014). 원형으로 자른본은 지름이 22-23cm 정도 되는데 갑자년 본과는 달리 흉배에 테두리가 생기면서 종이본에 여백을 두고 제작 시기와 용도를 적었다. 여백을 제외한 실제 도안의 크기를 Adobe Illustrator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측정해 보면 등본의 지름이 약 19.4cm 정도 된다18).
도안의 형태를 보면 앞에서 살펴본 두 흉배와는 큰 차이가 나타난다. <Fig. 21>처럼 등본은 물론 좌우 어깨본도 모두 가슴본과 마찬가지로 용의 자세가 승룡으로 변화한 것이다. 가슴본은 무술년 본과 도안의 구성이 거의 일치한다. 두 마리의 용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마주보고 있다. 그 사이를 채운 구름과 하단의 문양도 모두 무술년 본과 유사한 배치를 보인다. 반면 등본과 어깨본은 반룡 대신 승룡을 중앙에 가득 차도록 그렸는데, 등본은 용이 왼쪽을 보도록, 어깨본은 옷에 부착했을 때 용이 앞을 보도록 방향을 배치하였다. 용의 주위에는 구름을 두고, 하단에는 삼산과 파도, 물결, 보문을 그렸다.
이 흉배본이 제작된 기묘년의 후보로는 1759년, 1819년, 1879년이 있다. 1759년은 영조(1694-1776) 35년, 1819년은 순조(1790-1834) 19년, 1879년은 고종(1852-1919) 16년으로 이 중 기묘년의 흉배본은 1879년 27세의 고종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용의 얼굴을 <Fig. 22> 무술년 본과 비교하면 <Fig. 23>은 입꼬리와 볼의 뾰족한 수염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빈 곳을 채운 구름은 여의형 운두에 꼬리가 있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무술년 흉배에서 나타난 두 줄의 테두리는 다시 변화하여 국말 왕의 용보에서 볼 수 있는 24개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원형이 되었다. 흉배의 지름 역시 19.4cm로 순종의 것과 비슷한 크기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볼 때 1759년이나 1819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Fig. 24>는 임오년에 제작한 군복용 흉배본으로 발톱이 4개인 사조룡을 그렸다. 둘로 나눠진 반원형의 가슴본 2장과 등본 1장, 어깨본 2장으로 총 5장이 한 벌을 구성한다. 가슴본과 등본, 왼쪽 어깨본의 뒷면에는 ‘임오 동궁마마 군복 흉’, 오른쪽 어깨본 뒷면에는 ‘임오 동궁마마 군복 흉견화’, 양쪽 어깨본의 앞면에는 ‘견화’, 보관용 종이에는 ‘직금룡흉견화상의원의온견양’이라는 묵서가 있다(NPMK, 2014). 본의 크기는 지름이 약 21cm 정도 되고, 여백을 제외한 도안의 지름은 등본에서 측정했을 때 약 17.2cm 정도 된다.
다섯 장 모두 승룡을 그렸으며 구름의 형태나 화주의 모양, 하단에 삼산과 파도, 물결, 보문을 배치한 것 역시 기묘년 본과 매우 흡사하다. 등본과 어깨본에 그린 용의 방향 역시 같다. <Fig. 25>는 기묘년 등본의 얼굴 부분으로 가슴본과 마찬가지로 입꼬리와 볼의 수염이 사라졌는데 이는 <Fig. 26> 임오년 본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 단서였던 테두리 역시 기묘년 본과 같이 24개의 곡선으로 된 두 줄로 원형을 그렸다.
임오년 흉배본의 제작 연대로는 1762년, 1822년, 1882년을 가정할 수 있다. 1762년은 영조 38년으로 당시 세손만 있었을 뿐 사조룡을 쓸 수 있는 세자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1822년은 순조 22년으로 1812년에 책봉된 효명세자(1809-1830)가 13세였다. 앞에서 살펴본 무술년 문양판을 1838년 11세의 헌종이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이보다 앞선 1822년 13세의 효명세자를 위한 흉배본은 도안의 크기가 헌종의 것보다 커야 한다. 그러나 임오년 본은 도안의 지름이 17.2cm로 19cm인 무술년 문양판보다 작아 효명세자의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임오년은 1882년으로, 1875년 세자로 책봉된 순종이 8세 때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1882년은 순종이 첫 번째 가례를 올린 해로 당시 발기 목록을 보면 군복도 여러 차례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왕세자를 위한 사조룡 군복용 흉배본은 임오년 본 말고도 3벌이 더 전해진다. 도안의 세세한 부분까지 매우 유사한 이 본들은 모두 순종의 세자시절 군복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정해년 흉배본은 총 5장이 한 벌로 가슴과 등본에는 ‘뎡신조 동궁마마 군복흉’, 어깨본에는 ‘뎡신조 동궁마마 군복흉 견화’라는 묵서가 있다(NPMK, 2014). 정해년은 1887년으로 13세의 순종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자년 흉배본 역시 5장이 한 벌로, 가슴본과 등본에는 ‘무신조 동궁마마 군복흉’, 어깨본에는 ‘무신조 동궁마마 군복 흉견화’라는 묵서가 있다(NPMK, 2014). 무자년은 1888년으로 14세의 순종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깨본에 ‘견화’라고만 쓰여 있는 본이 한 벌 더 있다. 다른 본이 모두 원형으로 잘라 놓은 것과 달리 네모난 종이에 도안을 그렸다. 가슴본을 한 장에 그려 총 4장이 한 벌을 이룬다.
연대가 정확한 본들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마지막 본의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 있다. 8세 때 사용한 임오년 본은 17.2cm, 13세였던 정해년 본은 19.5cm, 이듬해인 무자년 본은 20.5cm로 나이를 먹을수록 본이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견화’라고만 쓰여 있는 본은 등본의 지름이 약 18.8cm로 8세와 13세 사이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1883년 계미년부터 1886년 병술년 사이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군복용 흉배본은 총 7건 30점으로 조형성 분석을 통해 연대를 추정해본 결과 가장 오래된 것은 1744년 갑자년 영조의 것으로 생각되며, 1888년 무자년 세자시절 순종의 것이 가장 근래의 것이었다. 시대에 따른 크기, 용의 자세, 배경 문양, 테두리의 변화를 추정연대순으로 정리하면 <Table 1>과 같다.
Record | Gapja | Musul | Gimyo | Imo | - | Jeonghae | Muja | |
---|---|---|---|---|---|---|---|---|
Year | 1744 | 1838 | 1879 | 1882 | 1883 ~ 1886 | 1887 | 1888 | |
User | King Yeongjo | King Heonjong | King Gojong | Crown Prince Sunjong | ||||
Size(back) | 27.8 | 18.9 | 19.4 | 17.2 | 18.8 | 19.5 | 20.5 | |
Dragon design | Chest | rising dragon(昇龍) | ||||||
Back | coiled dragon(盤龍) | rising dragon(昇龍) | ||||||
Shoulder | coiled dragon(盤龍) | rising dragon(昇龍) | ||||||
Background design | cloud | cloud, triple-peak mountain, waves, precious treasures | ||||||
Border | - | circle | circle with 24 curvilinear lines |
흉배의 크기 변화는 그동안 선행연구를 통해 잘 알려진 부분으로 연대가 올라갈수록 크기가 크다. 용보의 크기 역시 관리들의 흉배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거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에는 28cm 정도였던 것이 19세기 말이 되면 19cm로 작아지는데, 약 한 세기 반 동안 지름이 30% 이상 줄어든 것으로 볼 수 있다. 크기는 연대를 측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이지만, 같은 크기라도 사용자의 나이에 따라 연대를 달리 생각해야 한다. 아직 성장기의 10대 왕과 왕세자가 사용한 것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크기가 커졌음을 순종의 세자시절 흉배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무술년 흉배의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흉배에 그린 용의 자세는 부착 위치에 따라 시대별로 변화가 생겼다. 가슴본은 원형을 세로로 반을 갈라 좌우 대칭이 되도록 승용을 배치한 특징이 공통으로 나타났다. 이는 군복의 가장 겉에 입었던 옷이 대금형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철종 어진에 보이는 전복 또는 쾌자를 적어도 18세기 중반부터는 왕의 군복으로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조실록에서 왕의 군복을 명확하기 지칭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나, 『임하필기』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군복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철릭인 융복과 구별되는 왕의 군복이 존재하였음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등본과 어깨본에 그린 용은 자세에 변화가 생겼다. 무술년 흉배까지는 정면을 바라보는 반룡을 그렸지만, 기묘년 흉배부터는 승룡으로 바뀌었다. 또한, 같은 자세를 취하는 용의 모습에도 시대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 <Table 2>는 반룡의 얼굴을 시대별로 정리한 것으로, 임오년 도안은 순종이 왕세자 시절 사용한 곤룡포용 흉배본이다. 반룡은 무술년 본 이후 군복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곤룡포에는 계속 사용되었기에 변화의 흐름을 확인하기 위해 참고 도안으로 넣었다. 무술년 흉배까지 위로 휘날리던 머리 갈기는 19세기 중반 이후 일자로 곧게 뻗어 나가는 모습으로 정형화되었고, 볼과 입꼬리에 뾰족하게 그렸던 수염은 사라졌다.
Gapja year(1744) | Musul year(1838) | Imo year(1882) |
---|---|---|
<Table 3>은 승룡의 형태 변화를 정리한 것으로 촉수처럼 길게 뻗은 수염은 갑자년에는 없었지만 무술년부터 나타나 계속 이어졌다. 입꼬리와 볼에 뾰족하게 그렸던 수염은 무술년까지 이어지지만, 기묘년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갑자년 흉배본을 보면 등본과 어깨본의 반룡에는 입꼬리에도 뾰족한 수염을 그렸는데, 가슴본의 승룡에는 볼에만 수염을 그려 무술년 본과 차이가 있다.
Gapja year(1744) | Musul year(1838) | Gimyo year(1879) |
---|---|---|
배경문양에도 변화가 생겨 갑자년 흉배본에서는 용의 주위를 구름으로 채웠지만, 1838년 무술년부터는 하단에 삼산과 물결, 보문이 나타났다. 그러나 <Fig. 27> 철종(1831-1863) 어진의 견화를 보면 용의 주위를 오색구름으로 채우고 있어 무술년 흉배본과는 차이가 있다. 철종의 어진은 표제를 통해 31세인 1861년에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무술년 이후 제작된 군복용 흉배본에는 모두 하단에 삼산과 파도, 보문이 나타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맞춰 생각해보면 철종의 어진에도 삼산과 파도 등이 그려졌어야 될 것 같으나 빠져있어 의문을 남긴다.
흉배의 테두리 역시 큰 변화가 있었던 부분 중 하나로 초기에는 별도의 테두리 없이 원형을 이루도록 그렸으나, 무술년 흉배판에서 부터 정원의 테두리 두 줄이 나타난다. 이후 19세기 말엽이 되면 다시 변화가 생겨 24개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두 줄의 원형 테두리가 완성된다. 이러한 테두리의 변화는 지금까지 왕과 왕비의 용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알려졌던 구별법에 반하는 것으로, 연대가 올라갈수록 테두리가 절대적인 사용자의 성별을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융복과 군복은 군사(軍事)가 있을 때 입었던 옷이다. 왕의 융복은 다른 예복들에 비해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구성을 확인하기 쉽지 않으나, 여러 문헌을 종합해본 결과 용보가 있는 홍색 철릭을 융복으로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함께 기록된 더그레의 착장 순서 때문에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한편, 왕의 군복은 철종 어진이 남아 있어 구성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동다리 위에 전복을 입고 허리에 요대와 전대를 둘렀으며, 가슴과 등, 양어깨에 용보를 달았다.
왕이 거둥 시 융복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조선 전기부터 실록에 꾸준히 나오는 것과 달리 군복을 입었다는 기록은 정조 때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군복을 즐겨 입었다는 『임하필기』의 기록을 통해 적어도 영조 때부터는 왕이 융복과 구분되는 군복을 입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군복에 달았던 용보는 2개로 나누어진 가슴본, 등본 1개, 양어깨에 다는 견화본 2개로 총 5개가 한 벌을 이룬다. 군복용 용보를 위한 밑그림은 18세기에는 좌우 어깨본을 하나로 그려 가슴, 등, 어깨로 나누어 그리거나, 등과 어깨도 하나로 사용하여 가슴과 등본만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9세기 말이 되면 5장을 모두 따로 그려 사용하였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철종 어진까지는 견화에 정면을 바라보는 반룡을 그렸다면, 기묘년(1879) 본에서는 어깨와 등에 모두 측면을 향하는 승룡으로 대체되었다. 좌우 어깨에 다는 견화는 용의 얼굴이 앞쪽을 향하게 부착하였기 때문에 어깨본을 한 장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용의 얼굴 묘사에도 시대에 따른 변화가 있어 갑자년(1744) 본에서는 용의 갈기는 위를 향해 날리고 있고 입과 볼에는 뾰족한 수염을 그렸다면, 19세기 말 기묘년 본에서는 갈기는 일자로, 수염은 생략하는 등 도안이 금사로 수를 놓기 좋게 정형화되었다. 용 주위를 채운 배경문양에도 큰 변화가 생겨 19세기 초 무술년(1838) 본을 보면 하단에 삼산과 파도, 보문을 그려 적의나 원삼, 당의에 사용한 여성용 용보와 차이가 없어졌다.
용보의 테두리는 사용자의 성별을 구분하는 단서로 사용되어 남자는 24개의 곡선으로 하고, 여자는 정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과 갑자년 본을 통해 18세기 중반까지도 왕의 용보에는 별도의 테두리가 없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무술년 본과 철종 어진을 통해 19세기 초에는 두 줄로 그린 원형의 테두리가 생겼으며, 19세기 말이 되면 24개의 곡선으로 변화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흉배의 크기는 시대를 판별하는 중요한 단서로 조선 전기에는 30cm가 넘는 크기였으며, 18세기 중반까지도 28cm에 육박하는 크기였으나 국말이 되면 20cm 전후로 작아졌다. 또한, 순종이 왕세자 시절 사용한 여러 점의 흉배본을 통해 사용자가 성장하면서 흉배의 크기도 커졌음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흉배의 연대를 감정할 때 크기는 중요한 단서가 되지만 절대적인 판단의 근거는 될 수 없으며 사용자의 나이도 함께 고려해야 정확한 연대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펴본 흉배 본 중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1774년 갑자년 본으로 가슴본이 두 개로 나누어진 형태로 미루어 영조 연간에도 군복으로 전복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용의 형태는 반원형의 가슴본만 공간에 맞춰 승룡을 그렸고, 나머지는 반룡을 그리고 주위를 구름으로 채웠다. 1838년 무술년 본까지 용의 특징은 그대로 이어지나, 배경에 구름 말고도 삼산과 파도, 물결, 보문이 추가되며 경계를 표시한 정원형의 테두리가 생겨났다. 이후 1879년 기묘년 본에서는 용의 형태에 변화가 생겨 등과 어깨까지 모두 승룡으로 바뀌었고, 테두리는 24개의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배경은 무술년 양식을 그대로 이어갔다.
근래 들어 사도세자나 철종의 군복을 재현하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군복용 용보에 대한 연구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왕의 군복에도 곤룡포용 용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 결과 군복용 흉배는 용의 자세, 배경 문양의 구성 등에 있어 곤룡포용 흉배와는 명확한 차이를 보이며 세분화되었다. 이 연구의 결과가 군복용 흉배 재현 및 유물의 시대 감정에 활용되길 기대한다.
中宗實錄, 中宗 31年 11月 18日.
中宗實錄, 中宗 32年 1月 19日.
中宗實錄, 中宗 33年 5月 7日.
中宗實錄, 中宗 33年 5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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