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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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 No. 8

[ These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No. 8, pp. 116-140
Abbreviation: J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19
Received 30 Oct 2019 Revised 13 Nov 2019 Accepted 20 Nov 2019
DOI: https://doi.org/10.7233/jksc.2019.69.8.116

「준천계첩」에 나타난 영조대 행사복식 연구
김소현
배화여자대학교 패션산업과 교수

A Study on the Costumes of "Juncheon Gyecheop(濬川稧帖)" in Youngjo
Soh Hyeon Kim
Professor, Dept. of Fashion Industry, Baewha Women’s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Soh Hyeon Kim, e-mail: shekim1004@hanmail.net

Funding Information ▼

Abstract

This study aimed to reenact the costumes of each character in "Juncheongyechup" to understand the lives of people from the historic Seoul Cheonggyecheon Stream. References include 『Youngjo Jeongsunwanghu Garyedogamuigwe(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which recorded the royal wedding of the King Youngjo, performed in 1759, 『Gukjosogoryeui(國朝續五禮儀)』 of 1744, and 『Chungwantonggo(春官通考)』 of 1788. In order to examine the costumes of each character, they were compared with the paintings and excavations, and reviewed precedent studies. The results of the review of the characters' costumes are as follows. The king usually wore an official wear except when he went to Mohwagwan with a military outfit, yungbok. Civil officers wore greenish black dallyeongs, which were sangboks, official outfits, with hyungbaes and belts as suitable for their dignity. They also wore siboks, everyday official clothing in which colors were red and green for dangsanggwans and danghagwans, respectively. When civil officers wore sangboks and siboks, the military officers wore military garments: yungboks and gunboks. A yungbok for a dangsanggwan was composed of a blue cheollik, a purple hat, and a strap, and a yungbok for danghagwan was composed of a bluish black cheollik, a black hat, and a strap. When the king wore a yungbok, a general of training, hullyeondaejang, wore a gunbok. That was clearly distinguished from the civil officers. Military officials’ gunboks were comparable to civil officials’ sangboks and siboks. A gunbok consisted of a jeollip, a hyeopsu, a jeonbok or a kwaeja, a jeondae, and a suhwaja. From the junggun to the cadremen, the military units were set the colors of their belts and jeonbok according to their directions. The analysis for servants’ in government offices costumes in the literature is in sufficient. It is hoped that detailed consideration will be possible along with the further excavation of data.


Keywords: gunbok, Juncheongyechup, king Youngjo, sangbok, sibok, yungbok
키워드: 군복, 준천계첩, 영조, 상복, 시복, 융복

Ⅰ. 서론

서울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이 지금은 서울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비가 오면 개천이 넘쳐흘러 홍수를 일으키는 관리의 대상이기도 했다. 청계천의 범람을 막으려면 개천에 쌓인 흙을 파내고 정리하는 준천(濬川)을 해야 하는데 세종 이후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다가 17세기 후반 이래 한성부 인구가 급증하면서 천변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영조대에 1760년[경진(庚辰)], 1773년[계사(癸巳)] 두 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인 준천 사업을 실행하게 되었으며, 이후 2~3년 주기로 준천이 진행되었다. 준천이전에는 한성부(漢城府)와 공조(工曹)에서 개천을 관리했으며, 경진준천을 위하여 준천소(濬川所)를 설치하였고 후에는 준천사(濬川司)로 바뀌어 개천관리를 전담하였다(Cheonggyecheon Museum [CM], 2017). 두 차례에 걸쳐서 준천 사업을 펼쳤던 영조는 스스로 준천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중요한 치적으로 꼽았으며 준천하는 모습을 「준천계첩」에 기록화로 남겼다.

「준천계첩」은 준천공사가 한창이던 때 영조가 개천에 있는 두 개의 수문 중 하나인 흥인문(興仁門)남쪽의 오간수문에 행차하여 준천 현장을 둘러본 사실을 묘사한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준천 완료 이튿날 영조가 준천소 당상과 낭청이하 패장을 시사(試射)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영화당친림사선도(暎花堂親臨賜膳圖), 준천사업 후 영조가 수고한 군병을 위하여 열린 시방(試榜: 시험결과를 방으로 붙임)에 친림한 사실을 그린 모화관친림시재도(慕華館親臨試才圖), 교명에 의해 준천소 당상 이하 군졸(軍卒)과 이예(吏隸)에 이르기까지 연융대에 모여 영조가 내려준 음식으로 잔치를 베푸는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그림마다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묘사되어 당시의 의생활상을 알 수 있다.

영조대 준천과 관련된 행사기록화는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U. C. Berkeley, East Asian Library)의 「준천계첩(濬川稧帖)」, 부산박물관의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리움 삼성미술관의 「준천첩(御前帖)」, 경남대학교박물관의 「제신제진첩(諸臣製進帖)」, 서울역사박물관의 「어제준천제명첩(御製濬川題名帖)」, 「준천계첩(濬川稧帖)」 등이 있다. 각 첩의 형식과 구성에 차이가 있고 화제(畵題)의 유무, 또는 화제의 차이, 그림의 차이 등이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어느 한 본에 집중하지 않고 그림에 주목하여 그림에 나타난 복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다른 첩에 비하여 화질이 보다 선명한 버클리대학교 소장본을 주로 인용하였다. 준천 한해 전 1759년에 행해진 영조정순왕후가례를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1744년의 『국조속오례의』, 1788년의 『춘관통고』 등을 참고하여 왕의 거둥에 따르는 의장과 시위, 각 신분 별 복식을 검토하고, 당시의 회화자료, 출토유물 등과 비교하고 선행연구(Kang, 2001; Kim, 2005; Koh, 2001; Lee & Lee, 2016; Park, 2018; Yum, 2014)를 고찰함으로써 행사복식을 재현할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 작업을 통하여 청계천을 대하는 영조시대 인물들의 삶의 모습과 복식을 이해하고, 준천하는 행사복식을 재현하여 역사가 있는 서울의 청계천을 기억하는 기초 작업으로 삼고자 한다.


Ⅱ. 준천계첩 에 나타난 인물들의 복식

영조는 준천을 담당할 관청의 이름을 준천소로 정하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공(三公)이 준천을 관리하도록 했으며, 준천소의 하부조직으로 5개소(所)를 설치하여 각 소에는 도청1인, 낭청2인, 패장 6인을 두고, 도청은 무인 당상관이 담당하도록 했다. 후에 일이 많아져서 2명의 도청을 추가하였다. 도청은 한성판윤, 병조판서, 훈련대장, 금위영대장, 어영청대장이 맡았고 실질적인 업무관리는 3군문을 비롯한 무관의 관할 하에 진행되었다(Hong, 1760).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상번군(上番軍)을 동원하여 예비 준천작업을 실시했으며, 도성민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Yeom, 1998). 경진준천에 참가한 군민(君民)의 수는 총 215, 380명으로 도성 내 백성 49,320명, 도성 외 지원자 8,705명, 장교 및 군병 50,102명, 하급관리 23,556명, 시전상인 113,462명, 공물납품인 4,008명, 각종 기술자 2,769명, 승려 2,274명, 임금노동자 63,300명 등이다(Juncheonsojwamok [濬川所座目], n.d.). 57일간 시행된 준설공사에 한성부민 15만명과 임금을 지불한 인력 5만 여명이 동원되었다(Cho, 2005).

1.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준천 공사가 진행 중인 3월 10일에 영조가 오간수문에서 현장을 지키는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2월 18일, 도성 밖에서부터 준천공사를 시작한 이틀 후인 2월 20일에 영조가 와서 살펴보았으며(Youngjosillok [英祖實錄], Youngjo 36 Year, February 20), 4월 9일에도 종묘의 하향대제(夏享大祭)를 마치고 들렀는데 하향대제에는 원유관, 면복을 갖추었고, 준천을 살필 때에는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었다.1)

3월10일에 영조의 대가는 광통교에서 흥인문 밖으로 거둥하여 관왕묘에서 참배하고, 이어 영교[영도교: 서울 동대문(東大門) 밖 동관왕묘 남쪽에 있는 돌다리] 위에서 준천을 지켜보았으며 성 아래 길로 흥인문에 들어가 오간수문 위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준천당상 호조판서 홍봉한, 금장[禁衛大將] 김한구, 판돈녕 이창의, 판윤 홍계희, 훈장[訓鍊大將] 구선행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림에는 홍산(紅傘) 아래에 놓인 붉은색 교의(交椅)가 왕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 주변에 시위와 의장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 왕과 신하는 그림 상단 좌측에 보이는 막차에 들어가 점심을 들었고, 삯일을 하는 역군(役軍)들은 일하던 자리에서 점심을 먹었다(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 Youngjo 36 Year, March 10).

어좌 앞에 앉은 관리들은 현록색 단령에 사모를 갖춘 상복차림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서있는 사람들은 시위하는 자들이다. 산선시위를 포함하여 어좌의 좌우에 도열하여 가까이서 왕을 시위하는 이들은 사모와 단령을 갖춘 금군으로 추정된다. 시위하는 금위영대장, 훈련도감대장, 어영대장은 남필단 철릭, 입식(笠飾)호수(虎鬚), 패검(佩劍), 궁시(弓矢)한다(Eoyeongcheong-dongga-deungnok [御營廳動駕謄錄], Sukjong 17 Year, August 15)고 했으므로 남철릭에 주립을 쓴 융복차림의 관리는 금장 김한구, 훈장 구선행을 포함한 무관 도청[당상관]으로 추정된다. 전립, 전복의 군복차림으로 시위하는 자들은 낭청[당하관]일 가능성이 높다. 검 없이 혹은 검을 들고 주변을 살피는 자들은 무예별감이다. 영기를 든 자들은 전립을 쓴 군복차림, 깃발을 들고 늘어선 의장수들은 전건을 쓴 군복차림, 연배군(輦陪軍)[여군(輿軍)]은 홍건, 홍의차림이다.

<Fig. 1>의 수문상친림관역도 하단의 오간수문 아래에는 군 통수권자로서 군권을 상징하는 왕의 의장인 둑(纛)과 교룡기(交龍旗)가 보인다. 왕이 탄 가마 앞에 위치하도록 해서 왕이 전체 행렬을 총지휘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군영에서는 왕이 직접 군대를 살필 때 명령을 각 영(營)에 알리기 위해 사용하였다.


<Fig. 1> 
Sumunsangchillimgwanyeokdo [水門上親臨觀役圖](CM, 2017, pp. 64-65)

한편 소에게 써레를 지워 흙을 고르는 자, 3인 1조로 가래질을 하는 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일하는 역군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천변에는 점심상을 받은 자, 구경하는 자 등이 보인다. 준천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바지를 걷어붙이고, 짧은 소매에 옆이 트인 상의를 입었다. 『준천소좌목』에 나타나있듯이 백성, 군병, 삯군, 승군, 공인, 장인 등 다양한 인물이 준천에 참여하였는데 입고 있는 의복, 특히 쓰개에 신분이 잘 드러나 있다. 관모를 쓰지 않은 맨상투의 인물들은 백성과 역군(役軍)이며, 전건을 쓴 군인, 두건을 쓴 별감, 황초립을 쓴 견마부(牽馬夫) 등이 있으며, 구경나온 백성을 물리치지 말라는 영조의 어명 때문인지 도포에 갓을 쓴 구경군들도 많다.

2. 영화당친림사선도(暎花堂親臨賜膳圖)

경진준천은 4월15일까지 총 57일간 시행되었는데 준천을 마무리한 다음 날인 4월16일에 준천소 당상과 낭청 이하 패장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이예(吏隸)에 이르기까지 참여토록 하여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春塘臺)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활쏘기 시험인 시사(試射)를 한 후에 음식을 내리고, 도청(都廳)을 맡아 수고한 이들에게 상을 주었다. 활쏘기란 예악의 수준을 가늠하고 덕행을 살피는 기준이었기 때문에(Kang, 2001) 인재등용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신료들에게 왕이 시를 내려주었으며, 신하들은 답시를 올렸다. 「준천당랑시사연구첩」에는 호조판서로서 준천사 당상의 일을 담당한 홍봉한, 우의정 민백상, 영돈녕부사 김한구, 한성부판윤 홍계희, 부총관 채제공 등이 올린 답시와 그림을 엮어놓았다.

준천의 실질적인 업무 관리는 무관의 관할 하에 진행되었으므로 많은 무관이 묘사되어 있다. <Fig. 2>의 영화당친림사선도가 묘사된 시점이 시사를 마친 후라 융복이나 군복차림으로 화살통을 차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동다리와 전복으로 구성되는 군복은 다채로운 배색을 보인다. 춘당대 아래에 왼편으로 흑립을 쓰고 남색 철릭을 입고 늘어 선 인물들은 사령으로 파악된다. 그림 하단에 보이는 허수아비와 사각형 과녁이 시사했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Fig. 2> 
Yeonghwadangchillimsaseondo [暎花堂親臨賜膳圖](CM, 2017, p. 62)

3. 모화관친림시재도(慕華館親臨試才圖)

<Fig. 3>은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수고한 군병을 위하여 열린 시방(試放: 시험결과를 방으로 붙이는 것)에 친림(親臨)한 상황을 그린 모화관친림시재도이다. 모화관은 돈화문 밖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의 조서나 칙서를 맞이하고 사신을 영접하는 곳이지만 평시에는 열무(閱武), 관무재(觀武才), 무과 시험장으로 자주 이용되었다(Park, 2000). 모화관에 거둥할 때 임금은 융복(戎服)을 갖추고 말을 탔는데 능행(陵幸) 때의 전례를 따랐으므로(Youngjosillok, Youngjo 36 Year, April 23) 삽우를 제거한 차림으로 추정한다. 각 군문(軍門)과 준천소 군병들의 훈련모습을 시찰하고 격려하며 시방(試榜)하기를 여러 날 하여 4월 26일이 되어서야 마쳤다(Youngjosillok, Youngjo 36 Year, April 26). 다음날,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시방 입격자에게 상을 내렸으나(Youngjosillok, Youngjo 36 Year, April 27) 「준천계첩」에는 그림으로 담기지 않았다. 왕이 타고 온 어마를 다루는 견마부는 황초립, 황의 차림이다.


<Fig. 3> 
Mohwagwanchillimsijaedo [慕華館親臨試才圖](CM, 2017, p. 63)

4.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창의문 밖에 자리한 연융대의 본래 이름은 탕춘대였으나 연융대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에 위치하여 도성 방어에 중요한 지역이므로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뜻을 이름에 담은 것이다. 준천소 당상이하 군졸(軍卒)과 이예(吏隸)에 이르기까지 연융대에 모여 영조가 보내준 음식으로 잔치하는(Hong, 1760) 장면이 <Fig. 4> 의 연융대사연도에 담겼다.


<Fig. 4> 
Yeonyungdaesayeondo [鍊戎臺賜宴圖](CM, 2017, p. 63)

이 자리에 왕은 참여하지 않았고, 사모ㆍ담홍단령 차림의 당상관 시복, 사모ㆍ녹단령 차림의 당하관 시복, 남철릭ㆍ홍광다회ㆍ주립을 쓴 당상관융복, 남철릭ㆍ남광다회ㆍ흑립을 쓴 당하관 융복, 군복을 입은 군인 등이 보인다. 자리 밖의 바닥에 앉은 자들만 상모장식이 있는 전립을 쓰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문안에 서있는 인물들은 여러 가지 역할을 맡은 구실아치들로 파악된다.


Ⅲ. 복식 고증

준천계첩은 왕의 거둥에 따르는 일련의 복식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왕이 청계천, 모화관 등궐 밖으로 나갈 때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거둥에 참여하는 관원들의 복식은 왕이 착용하는 의관을 기준으로 삼았다. 한편 궐 안이지만 활쏘기 시험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의 복식과 왕의 부재 시에 관원들이 착용한 복식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1. 왕
1) 시사복

1760년 경진준천과 관련하여 영조가 오간수문에 가고, 영화당에서 잔치를 베풀 때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Fig. 5>의 영조 어진은 1900년, 선원전(璿源殿) 화재로 잃게 된 일곱 분 임금의 어진을 모사할 때 육상궁(毓祥宮) 냉천정(冷泉亭)에 모셨던 1744년(영조 20)에 그린 어진을 본떠 그린 것이므로 준천 당시의 시사복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판단한다. 『국조속오례의보서례』 殿下視事服圖說에 따르면 시사복은 翼善冠, 袞龍袍, 玉帶, 靴로 구성된다. 현재 전해지는 왕의 시사복으로는 영친왕의 것이 유일하다.


<Fig. 5> 
Portrait of King Youngjo(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PM], n.d.)

(1) 익선관(翼善冠)

관(冠)을 모라(毛羅)로 감싸고, 2개의 대각과 소각이 각각 위를 향하도록 뒤에 붙인다.2) 영친왕 익선관은 가죽과 말총에 옻칠을 하여 모체를 만든 뒤, 그 위에 진한 감색 사(紗)를 배접하여 제작하였다. 가죽에는 군데군데 통풍구가 뚫려있으나 위에 배접된 직물에 의해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익선(翼善)은 모체 뒤쪽에 달려있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小角)을 말한다. 익선은 안쪽에 높이 10cm의 날개를 붙이고 그 위에 높이 15cm의 날개를 이중으로 덧붙여 제작하였다. 모체의 중앙부에는 진한 감색 비단실[견사(絹絲)]을 굵게 꼬아 두 줄로 장식되었다. 내부 뒷면에는 보라색 견사로 꼬은 끈에 직경 약 2cm의 대모가 달려있다.(http://www.gogung.go.kr/영친왕 익선관)

영조어진에 나타난 익선관은 모체가 높고, 흑색이며. 익선관의 중심선을 장식한 꼬임은 청색으로 나타난다. 『상방정례』 준절식(准折式)에 따르면 익선관의 재료 중 모라의 소요량은 1자6치이며, 아청사 5전은 꼬임장식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접착제는 어교(魚膠)를 썼으며 동철사(銅鐵絲)로 익선의 형태를 잡았다. 영친왕 유물을 통하여 그 구체적인 제작법을 알 수 있다.

익선관 아래에는 탕건을 받쳐 쓰고, 상투를 튼 머리는 망건으로 정리하였다. 탕건은 익선관 뿐만 아니라 갓, 전립, 면류관, 원유관 등 모든 관모의 받침용으로 착용했다. 익선관(翼善冠) 안에 망건(網巾)과 함께 보존되어 있던 영친왕의 탕건은 말총으로 제작한 것이다. 영조 역시 익선관 안에 탕건을 받쳐 쓰고, 탕건 아래에는 망건으로 상투를 정리한 것으로 추정한다.

(2) 곤룡포(袞龍袍)

대홍단(大紅緞) 곤룡포에 금오조원룡보(金五爪圓龍補)를 가슴과 등에 붙였는데 좌우 어깨[左右肩]도 같다고 하였다.3) 영친왕(英親王)이 1922년 귀국하여 순종을 배알할 때 입었던 곤룡포의 제작법을 참고할 수 있다(http://www.gogung.go.kr/ 영친왕 곤룡포). 어진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영조의 곤룡포는 영친왕의 것과 유사하되 동정은 흰색이며, 이중 고름이 아닌 대홍색의 고름이 달렸다. 단령의 깃 파임은 영친왕의 것보다 얕고 직령의 너비는 넓은 것으로 추정한다. 보의 크기는 영친왕의 것보다 크고 용문은 안면보다 몸통이 큰 특징을 지닌다. 영조의 어진을 통하여 용보의 문양과 대홍단의 운문을 검토할 수 있으며, 단령의 형태적 특징은 <Fig. 6>의 이익정(1699~1782)묘출토 단령(Koh, 2001)을 참고할 수 있다.


<Fig. 6> 
Dallyeongs from the Tomb of Yi Ik Jeong(Koh, 2001, pp. 132~134)

단령의 받침옷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곤룡포, 답호, 철릭이 상복(常服) 일습이었다(Sejosillok [世宗實錄], Sejo 26 Year, March 26). 한편 영조의 습의(襲衣)를 통하여 살펴보면 곤룡포 아래에 답호를 입고, 답호 아래에는 장의(長衣), 중치막 등을 입었다(Youngjosillok, Youngjo 52 Year, March 5). 이익정묘 출토 단령이나 영친왕 곤룡포를 보면 직령이 단령의 안감처럼 징거져 있어서 받침옷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는 조선초기의 상복 일습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익정은 1759년 상의원 제조(提調)를 지낸 분이라 더욱 주목된다. 하지만 1751년에 편찬한 『상방정례』에는 철릭, 답호, 단령을 일습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영조 당시의 시류를 반영하기보다 역사적 전통을 강조하여 조선초기부터 착용하던 일습의 형식을 따르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준천이 이루어지기 10여 년 전에 그려진 영조어진에는 대홍색 곤룡포의 소매 자락 아래로 남색, 옥색 자락이 보여서 단령의 안감역할을 하는 남색직령과 옥색의 밑받침 포를 받쳐 입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검약을 실천하는 규례를 만들고자 『상방정례』를 편찬한 상황을 고려해보면 준천 당시에는 곤룡포, 답호, 철릭을 일습으로 하여 남색 답호[加文剌(더그레)], 초록 철릭[帖裏(첨니)] 또는 초록 더그레, 대홍 철릭을 입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 철릭은 후술할 <Fig. 11>의 이익정묘 출토 철릭을 참고할 수 있으며, 더그레는 의원군(1661~1722)묘 출토 전복(Kyonggi Provincial Museum[KPM], 2009)을 참고할 만하다.

(3) 玉帶

<Fig. 7>은 영친왕이 곤룡포(袞龍袍)에 띠던 옥대로 홍색 무문단(無紋緞)으로 겉을 싸고 그 위에 용문과 화염문을 투조(透彫)한 옥판(玉板)을 붙였다. 투조한 옥을 얇은 금판으로 싸서 장식한 대구(帶鉤)를 중심으로 좌우 양 옆에는 여지형태의 옥판이 3개씩 배치되고, 뒤쪽에는 좌우에 은으로 된 6엽 연판을 하나씩 배치하고 장방형 옥판 5개를 나란히 부착시켰다. 옥대의 뒤 안쪽에는 옥색 공단이 덧대어 있다(http://www.gogung.go.kr/영친왕 옥대).


<Fig. 7> 
Jade Belt of King Yeongchin(NPM, n.d.)

『국조속오례의보』에 기록하고 있듯이 대는 “대홍단(大紅緞)으로 감싸고 금선을 그린 후에 투조한 옥으로 장식한다”는 것에 부합한다. 영조의 어진에 보이는 옥대의 형태도 이와 유사하나 투조한 옥 위에 금칠을 더한 것으로 추정한다.

(4) 화(靴)

화는 흑궤자피(黑麂子皮)로 만들고 여름용은 흑서피(黑黍皮)로 만든다.4) 『국조속오례의보』의 편찬시기와 비슷한 『상방정례』에는 흑궤자피화(黑麂子皮靴)의 재료에 대하여 검은색 고라니가죽[흑궤자피(黑麂子皮)]으로 겉을 하고, 흰색 사슴가죽[백녹피(白鹿皮)]으로 안을 하며, 하부장식과 깃, 도리는 모두 검은색 노루가죽으로 하며, 내창(內昌)과 외창(外昌)이 필요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름용 신발인 흑사피화(黑斜皮靴)의 재료는 겉이 검은색 담비가죽[흑사피(黑斜皮)], 안은 흰색 사슴가죽이며, 하부장식과 깃, 도리는 모두 검은색 담비가죽으로 하며, 다른 재료는 흑궤자피화와 동일하다.

<Fig. 8>에 보이는 영친왕 화의 특성은 『상방정례』에 기록된 칙사(勅使)의 흑화자(黑靴子)에 가깝다. 흑화자는 겉은 검은색 사슴가죽[흑녹피(黑鹿皮)]로 하고, 남색 삼승(三升)으로 안을 대며 청사피(靑黍皮)로 깃을 달고, 도리는 자사피(紫黍皮)로 했다.


<Fig. 8> 
Boots of King Yeongchin(NPM, n.d.)

흑궤자피화 안에는 발이 편안하도록 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속 신발인 백양모정(白羊毛精)을 갖추고, 여름용 화 안에는 백당피양정(白唐皮凉精)을 갖추었다. 백양모정의 재료는 고운 백양모, 깃감 초록 대운문필단, 운문필단, 안감 백정주, 누빔실 백사 2전, 바느질실 백사 5분이며, 백당피양정의 재료는 고운 백당피, 깃감 초록 대운문필단, 운문필단, 안감 백저포, 회장 백구피(白狗皮), 바느질실 백사 1전5분, 초록사 3분이다. <Fig. 9>는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품으로 목화버선이라고 정리한 유물이다(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NRICH], 2017). 정(精)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로 추정한다. 무명으로 제작된 것이므로 왕의 정과 재료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Fig. 9> 
Inner boots [精](NRICH, 2017, p. 231)

2) 융복(戎服)

준천을 마무리한 후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시재(試才)하기 위하여 거둥하면서 융복을 갖추고 말을 탔는데 능행(陵幸) 때의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상방정례』에는 능행을 위하여 종립(鬃笠) 2부, 대홍운문필단 용포(龍袍), 초록운문필단 더그레, 솜을 둔 대홍색 용흉배(龍胸背) 좌우견(左右肩) 1부, 대홍 광다회(廣多繪) 1부, 남 광다회 1부, 백양모(白羊毛) 정(精)을 갖춘 검은색 고라니 가죽 화(靴) 1부, 종립에 꽂을 깃털[벌(伐)달기우(月只羽)] 5쌍, 백면포 참포(黲袍), 백저포 참포(黲袍), 모라(帽羅) 익선관 1부, 오서대(烏犀帶) 1부, 백양모(白羊毛) 정(精)을 갖춘 연녹피화(烟鹿皮靴) 1부를 준비하였다. 시사복(視事服)이기도 한 대홍색 곤룡포 속에는 바지, 저고리, 철릭, 더그레를 받쳐 입는데 바지, 저고리, 철릭은 일상적으로 갖추는 받침옷이므로 복식목록에 별도로 제시하지 않았으며, 광다회로 인하여 철릭이 착용되었음을 알려준다. 왕이 열병의례에는 융복을 입지만 이후에는 종립을 벗고, 익선관을 쓴 시사복 차림을 했으므로(Kim, 2008) 시사복과 융복이 동시에 준비되었다.

(1) 종립(騣笠)[마미두면(馬尾頭冕)]

능행, 친림열무(親臨閱武), 친행북한(親行北漢) 등 융복을 갖추어야하는 경우에 진상했다. 말총으로 만든 갓인 종립을 왕실에서는 마미두면(馬尾頭冕)이라고도 했다. 『상방정례』에는 마미두면의 재료를 대절장죽(大節長竹), 양태[凉臺] 1부, 죽(竹)모자 1부, 총(驄)모자 1부, 총결조(驄結造) 1부, 매칠(每漆)7석, 어교(魚膠)4량, 먹[墨] 1편, 탄(炭) 2말, 끈[纓子)], 모단(帽緞) 길이2자 너비2치, 층저(層底)귀영자[耳纓子], 자적사(紫的絲) 2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제시된 <Fig. 10>과 같은 형태를 참고하여 왕의 종립을 제작할 수 있다.


<Fig. 10> 
Jonglip(Muyedobotongji v.4, 1790, p. 129)

(2) 철릭[天益]

왕의 철릭은 대홍색, 초록색, 자적색 등을 썼는데 왕세자 철릭에는 대홍색이 없다. 당시의 시대적 특징을 잘 드러내는 철릭으로 이익정(1699~ 1782)묘에서 출토된 <Fig. 11>의 운보문단 철릭이 있다. 상의와 하상이 각각 39.5cm, 90cm로 1:2.3 정도의 비례를 가지며 품 54cm이다. 주름너비 1.4cm이며 허리선부터 도련까지 칼주름을 잡았다. 세자락 치마로서 앞자락 146cm(겉자락 135cm, 안자락 91cm), 뒷자락 180cm(겉 44cm, 안 136cm)이다(Koh, 2001). 이것을 참고하여 철릭을 제작할 수 있다.


<Fig. 11> 
Cheollik from the Tomb of Yi Ik Jeong(Koh, 2001, p. 138)

용보를 철릭에 달고, 광다회를 매고, 화를 신은 것으로 고증한다. 광다회와 철릭을 동일한 색으로 배색하지 않으므로 대홍색 철릭에는 남광다회 또는 자적광다회를 띠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3) 종립ㆍ곤룡포

정조 17년, 거둥할 때의 복장을 논의하면서 시위하는 자는 주립(朱笠)에 호수(虎鬚)와 작우(雀羽)를 꽂고, 철릭에 활을 메고 칼을 차는 융복을 입는데 융복에 비하여 간편한 군복으로 하자(Wonhaengeulmyojeongniuigwe [園幸乙卯整理儀軌] No.2, Uiju [儀註])는 언급이 보인다. 앞선 논의에서도 현륭원의 행차에는 여러 날이 걸리므로 정조가 온천에 행차할 때처럼 평융복이나 군복을 입겠다고 하교하였고(Jungjosillok [正祖實錄], Jungjo 17 Year, September 25), 실제로 평융복이나 군복을 착용한 사실(Jungjosillok, Jungjo 15 Year, January 14)은 주목할 만하다.

1725년 영조 책봉례에 참석했던 청나라 부사 아극돈(阿克敦)은 중국으로 돌아가서 조선사행(朝鮮使行)을 토대로 봉사도(奉使圖)를 그렸다(Hwang, 1999). 봉사도에 종립을 쓰고 단령을 입은 인물, 호수를 꽂은 종립에 단령을 입고 칼을 찬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듯이 모화관에 간 영조가 종립을 쓰고 홍색 용포를 입어서 평융복의 매무새를 완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철릭과 더그레는 용포 속에 받쳐 입고 곤룡포를 겉옷으로 삼았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Kim, 2008).

2. 준천 도청, 낭청 등 제신(諸臣)

준천 구역을 5개소로 나누어 각 개소에 도청1인, 낭청2인, 패장 6인으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도청은 당상관, 낭청은 당하관이 맡았다. 왕이 시사복 차림으로 오간수문, 영화당에 친림했을 때 문관은 상복, 무관은 융복이나 군복을 착용했으며, 왕이 융복차림으로 모화관에 친림했을 때 문관은 상복 또는 융복, 무관은 융복 또는 군복을 착용했다. 왕이 없는 잔치에 문관은 시복, 무관은 융복 또는 군복을 갖추었다. 교외 동가였다면 문관도 융복을 착용했겠으나 성내이므로 융복을 착용하지 않았고, 운검차비 등의 문관차비도 확인하기 어렵다. 성내거동에서 문관의 역할이 군사적인 일과 무관할 때는 융복을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1) 상복(常服)과 시복(時服)

문무백관의 상복과 시복은 사모(紗帽), 단령(團領), 대(帶), 화(靴)로 구성되었으나, 색상에 차이를 두어 상복은 흑단령(현록색), 시복은 담홍단령으로 구별하였다.

<Table 1> 
Hyungbaes Depicted in Portraits
Ranks regulations of sokdaejeon Portraits Wearers Dates notes
civil officer, dangsanggwan unhak hyungbae
[雲鶴胸背]

(Jo, 2009, p. 311)
Chae Jegong
(1720~1799)
around 1784 years
civil officer, danghagwan baekhan hyungbae
[雲鶴胸背]

(Jo, 2009, p. 255)
Yu Su
(1678~1756)
in 1726 years
military officer, dangsanggwan hopyo hyungbae
[雲鶴胸背]

(Deungjunsimugwadosangcheop [登俊試武科圖像帖], 1774)
Lee Gukhyeon
(1714~1780)
in 1774 years deungjunsimug
wadosangcheop
[登俊試武科圖像帖]
military officer, danghagwan ungbi hyungbae
[熊羆胸背]

(Jo, 2009, p. 252)
Lee Sam 1677~1735 in 1750 years Haechi hyungbae not in regulation
military officer, danghagwan ungbi hyungbae
[熊羆胸背]

(Daemyeonghoejeon [大明會典], 1509)
daemyeonghoejeon

상복에는 흉배를 달았는데 영조는 흉배착용의 난맥상을 거론하면서 『속대전』에서 흉배제도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속대전』에는 문관당상관은 운학흉배, 문관 당하관은 백한흉배로 정했다. 무관은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른다고 했으니 당상관은 호표(虎豹)흉배, 당하관은 웅비(熊羆) 흉배이다. 다만 준천계첩에는 문관과 무관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행사장면을 담고 있으므로 무관이 상복을 입고 있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흉배와 더불어 품계를 드러내는 구성요소가 품대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품 서대(犀帶), 정2품 삽금대(鈒金帶), 종2품 소금대(素金帶), 정3품 삽은대(鈒銀帶), 종3품~4품 소은대(素銀帶), 5품 이하 흑각대(黑角帶)이다. <Table 2>는 초상화에 나타난 품대를 정리한 것이다.

<Table 2> 
Belts Depicted in Portraits
Ranks & belts Portraits Wearers Dates
The first rank, rhinoceros horn belt
(Jo, 2009, p. 311)
Chae Jegong around 1784
The senior grade of the second rank, carved gold belt
(Jo, 2009, p. 252)
Lee Sam in 1750 years
The junior grade of the second rank, gold belt without carving
(Jae, 2010)
Nam Iung in 1627 years
The third rank, carved silver belt
(Jo, 2009, p. 255)
Yu Su in 1726 years

<Table 3>은 용례에 따라 단령을 착용한 모습을 정리한 것이다. 『속대전』에는 단령을 입었을 때의 형태를 규정하여 앞길이는 땅에서 3치 떨어지고, 뒷길이는 땅에서 2치 떨어지며, 소매길이는 손끝에서 접었을 때 팔꿈치까지 닿지 않도록 하고, 소매통은 1자, 수구는 7치로 정했다. 구체적인 형태는 이익정묘 출토 단령(Koh, 2001)을 참고할 수 있다. 준천 당시 실무자로 참여했던 채제공은 <Table 3-①>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록색 단령에 당상관의 운학흉배를 달고, 1품의 서대를 띤 상복을 착용했다. <Table 3-②>는 서대를 띠고 담홍포를 착용한 1품관의 시복 착용 모습이다. <Table 3-③>의 유수초상은 당하관의 백한흉배를 단 흑단령에 정3품의 삽은대를 띤 차림이다. 유수는 1724년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므로 초상화를 그린 1726년에는 이미 당상관이었지만 흉배는 문관 당하관의 것을 착용하고 있다. 사모의 뿔은 품계에 따라 당상관은 문사(紋紗), 당하관은 단사(單紗)로 하였다(Sokdaejeon, 1744). 그러나 초상화에는 규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사례가 많이 보인다.

<Table 3> 
Sangboks and Siboks Depicted in Portraits
civil officer, dangsanggwan Sangbok sibok
① Chae Jegong 1720~1799 around 1784 ② Chae Jegong 1720~1799 in 1782 years
Jo, 2009, p. 311 Jo, 2009, p. 308
civil officer, danghagwan ③ Yu Su 1678~1756 in 1726 years ④ Park Pilgeon, 1671~1738 in 19c
Jo, 2009, p. 255 Lee et al., 2003, p. 244

1757년(영조 33) 12월 16일 영조는 당하관의 시복은 홍포를 착용하지 말고 구제(舊制)대로 청록색(靑綠色)을 사용하도록 명하였다(Youngjosillok, Youngjo 33 Year, December 16). 준천계첩에는 이러한 상황이 반영되어 <Table 4>에서와 같이 연융대사연도에는 당상관이 홍포, 당하관이 녹포를 입은 시복차림으로 그려졌다. 따라서 준천 당시의 시복은 당상관의 경우에 <Table 3-②>의 채제공 시복 차림으로, 당하관의 경우에는 <Table 3-④>의 박필건 시복차림으로 고증할 것을 제안한다. 문관은 단령 안에 창의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Youngjosillok, Youngjo 2 Year, October 8).

<Table 4> 
Siboks Depicted in Yeonyungdaesayeondo [鍊戎臺賜宴圖]
Ranks dangsanggwan danghagwan
constituents samo, pink dallyeong, belt, hwa samo, green dallyeong, belt, hwa
depictions

2) 융복(戎服)

융복은 립자(笠子), 철릭[帖裏], 광다회(廣多繪), 화(靴)로 구성되었으며, 신분에 따라 복식의 색상과 재료에 차이를 두어 당상 3품 이상의 융복은 남색철릭, 자립(紫笠), 패영(貝纓)으로 정하고, 당하 3품이하의 융복은 청현색(靑玄色) 철릭, 흑립, 패영으로 구성하되 교외동가에는 홍색 철릭을 착용토록 하였다(Sokdaejeon, 1744). 무관 당상관은 검, 활과 화살 등의 무기를 더하여 융복 차림을 완성하였으며, 당하관은 군복을 입었다. 그러나 훈련대장만큼은 국왕이 융복으로 거둥할 때 전복과 전립을 착용하여 왕을 시위하는 자임이 확연하게 드러나도록 했다(Eoyeongcheongdonggadeungnok No.2, Youngjo 5 Year, August 12).

<Table 5>에서 『속대전』에 규정된 융복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패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당상관은 홍광다회, 당하관은 남광다회로 신분의 구별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Table 5> 
Yungboks in the Age of King Youngjo
Ranks dangsanggwan danghagwan dangsanggwan danghagwan
constituents purple hat with hosu, strap blue cheollik red gwangdahoe sword bow and arrows black hat with hosu, strap bluish black cheollik blue gwangdahoe sword bow and arrows purple hat, blue cheollik, strap, red gwangdahoe black hat, bluish black cheollik, strap, blue gwangdahoe
depictions
notes MMC, 2006, Banchado CM, 2017, p. 63, Yeonyungdaesayeondo

18세기 이후 오군영에서는 주로 대장과 중군이 자립에 남색철릭으로 구성된 당상관의 융복을 착용하였으며, 당하관 장관과 장교의 융복은 흑립에 청현색 철릭을 입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MMC, 2006)』 반차도에서 훈련대장이 착용한 융복 즉 남철릭, 입식호수, 패검, 궁시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동개(筒箇), 환도, 등채, 깍지 등의 무기는 상황에 따라 갖추었다.

영조시대의 무관이었던 전양군 이익필(李益馝 1674-1751)이 쓰던 것이라고 전해지는 <Fig. 12> 의 주립은 지름 64.59cm, 높이 19cm로 대오리와 말총으로 엮고, 주칠하였다. <Fig. 13>은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주립으로 지름 29cm, 높이 10.5cm, 호수길이 23cm이며 1900년 전후의 것이다. 준천의 시기에 부합하는 <Fig. 12>의 온양박물관 소장 주립을 기본으로 하여 <Fig. 13>의 호수입식과 영자를 더한 관모를 제작할 수 있다.


<Fig. 12> 
Purple Hat(Onyang Folk Museum, 18C)


<Fig. 13> 
Purple Hat(NRICH, 2013, p. 240)

<Fig. 14>는 궁대와 시복을 합쳐서 일습을 갖춘 동개이다. 궁대는 버선코 모양의 곡선으로 활이 반만 들어가는데 황동장식이 되어있고, 띠돈에는 허리에 묶을 수 있는 푸른색 광다회가 달려있다. 시복(矢箙)은 화살을 넣는 집인데 특히 의식 시에 사용하는 신분증명 및 의장구인 기패(旗牌)라는 화살을 펼쳐 꽂아서 궁대와 결합하여 왼쪽 겨드랑이에 찼다. 허리에 묶기 위한 광다회가 달려있다. 궁대의 전체길이는 36.2cm, 최대너비 18cm, 최저너비 12cm이며, 시복의 전체길이는 87.2cm, 최대너비 13.5cm, 통아길이 80.2cm, 활길이 52.6cm이다(NRICH, 2013). 이것을 참조하여 융복에 따르는 부속품을 제작할 수 있다.


<Fig. 14> 
A Set of Donggae(NRICH, 2013, p. 533)

3) 군복(軍服)

무관에게 있어서 군복은 상복에 버금가는 옷이었다. 종2품 훈련대장과 그 이하 장관(將官)과 장교는 전립(戰笠), 협수(狹袖)[동다리], 전복 또는 쾌자[괘자(掛子)], 대[전대(戰帶), 요대(腰帶)], 수화자(水靴子)로 구성된 군복을 입었다. 훈련도감의 장관은 종2품 중군(中軍), 정3품 별장(別將)ㆍ천총(千摠)ㆍ국별장(局別將), 종4품 파총(把摠), 종9품 초관(哨官) 등이며, 장교는 지구관(知彀官), 기패관(旗牌官), 본청군관(本廳軍官), 별군관(別軍官), 권무군관(勸武軍官), 도제조군관(都提調軍官) 등이다(Yum, 2014).

중군(中軍) 이하 제장관(諸將官)은 방색(方色)에 따라 전립, 전복을 갖추었는데(Eoyeongcheongdonggadeungnok No. 2, Sukjong 17 Year, August 15) 국왕의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군사는 왕을 상징하는 붉은 색 전복을 입었다. 영화당친림사선도 일부인 <Fig. 15>에는 남색, 녹색, 홍색, 흑색 등의 전복과 홍색, 남색, 황색, 백색, 흑색 등의 대를 띤 모습이 보인다.


<Fig. 15> 
Military Officials’ Gunboks(CM, 2017, p. 62)

<Fig. 16>은 군복을 입은 이창운(1713~1791) 초상화이다(Jo, 2009). 남색 운문단으로 안올림한 벙거지를 쓰고 모정에는 옥로 장식을 더했으며, 공작우를 달았다. 붉은색 끝동을 댄 청현색 동달이 위에 보라색 전복을 입고, 남색 전대를 멋스럽게 매고 호피가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전대에 띠돈을 걸어서 서대로 장식한 장도를 달고, 오른 손에는 등채를 쥐었다. 동다리 소매자락 아래로 한삼인 듯, 저고리 소매인 듯 부드럽고 넓은 흰 자락이 보인다. 동다리의 색은 이창훈의 흑단령본 초상에 보이는 흑단령의 소재와 색상이 유사하여 무신의 동다리가 흑단령에 버금가는 옷임을 상기시킨다.


<Fig. 16> 
Lee Changun, in 1782 years(Jo, 2009, p. 303)

이삼(1677~1735)의 초상인 <Fig. 17>(Jo, 2009)은 이창운의 초상보다 격식을 덜 갖춘 듯 한 분위기를 보인다. 짙은 자주색 연화문단으로 안올림한 벙거지를 쓰고 옥로로 모정을 장식했다. 남색 끝동을 댄 연보라색 동달이 위에 검은색 연화문단전복을 입고, 남색 전대를 맸으며, 전대에 띠돈을 걸어서 서대로 장식한 장도를 달고, 오른 손에 쥔 등채로 바위를 짚고 있다. 그가 신고 있는 초록색으로 깃을 댄 신은 여느 화와 달리 밑창이 얇고 부드러운 것이 충렬사에 소장되어 있는 19세기 동래부사의 화와 닮아서 항화일 가능성을 추정해본다. 항화(項靴)는 장복(章服)을 입을 때에 신는 신인데(Youngjosillok, Youngjo 3 Year, April 14) 무신들이 수화자를 신지 않고 직령(直領), 항화를 편복(便服)으로 삼는 일이 많았다(Seungjeongwonilgi, Youngjo 36 Year, March 4).


<Fig. 17> 
Lee Sam, in early 18th century(Jo, 2009, p. 246)

<Fig. 18>은 이익정묘 출토 소창의로서 여기에 무를 달고, 소매에 이색 끝동을 대면 동다리가 된다. 뒷 중심에는 진동 아래로 트임을 준다. 무의 크기는 박신용 장군가 쾌자(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CHA], 2006)인 <Fig. 19>의 무를 참고하여 35cm 내외로 정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동다리 위에 덧입는 쾌자를 참고할만한 자료로서 초상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금형 맞깃이 달렸다. 깃 깊이 26cm, 깃너비 4cm이다.


<Fig. 18> 
Sochangui from the Tomb of Yi Ik Jeong(Koh, 2001, p. 144)


<Fig. 19> 
Kwaeja of the General Park Sinyong’s family, 18~19th centry(CHA, 2006 p. 185)

전복 위에 두르는 전대는 대개 남색이며 앞에서 고를 매어 묶고, 남은 자락은 늘어뜨렸다. 넓은 요대 위에 전대를 놓아서 두르기도 하고, 전대만 단독으로 두르기도 하는데 준천계첩에서는 단독으로 두른 모습만 묘사되어 있다. 겹과 홑의 두가지 종류가 있으며, 홑전대는 사선으로 재단한 후 나선형으로 감아서 연결하므로 양끝이 막혀있지 않아서 물품을 담아 휴대할 수도 있다. 준천계첩에 묘사된 전대는 홍대가 주를 이루지만 다양한 색이 보인다. 20세기이전 유물로 추정되는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대(戰帶)(NRICH, 2017)를 참고하여 구성할 수 있다. <Fig. 19>의 쾌자 주인공인 박신용가에는 너비 6.5~9cm, 길이 330~236cm의 겹으로 명주 전대가 있다(CHA, 2006).

<Fig. 20>은 남색운문단으로 안올림을 한 전립이다(NRICH, 2017). 높이 14cm, 지름 33cm, 양태너비 9cm로 준천이 이루어진 18세기 중반의 전립보다 납작한 형태를 띠지만 참고할 만하다. 은정자에 공작 깃, 홍색 말총 등으로 상모를 했으며, 대우와 양태가 이어진 부분에 자색 끈으로 석웅황을 매달았다. 밀화와 산호구슬로 이루어진 끈은 은고리에 걸었다. 그러나 영조가 검약을 강조한 때문인지 준천계첩에는 전립에 상모를 단 모습이 드물게 보인다. 여름철에는 말총으로 짠 전립(戰笠)을 쓰기도 했으나 준천이 이루어진 계절은 봄이므로 돼지털로 된 펠트제를 사용하는게 옳다고 본다.


<Fig. 20> 
Military Officer’s Hat[戰笠](NRICH, 2017, p. 213.)

3 연배군(輦陪軍)

각종 행사 때 연(輦)이나 여(輿)를 매는 연배군(輦陪軍)의 소속은 조금씩 달랐다. 가례에는 용호영 소속 부대인 호련대(扈輦隊)에서 정련배(正輦陪), 부련배(副輦陪), 옥련배(玉輦陪)를 세웠으며, 별궁행차 시에는 사복시 군인이 청건(靑巾), 청의(靑衣) 차림으로 연을 맸다. 정련군(正輦軍)은 홍의, 두건, 홍색무명띠, 청색행전, 운혜, 학창을 갖추었다(Minjock-Munhwa-Chujinhoe [MMC], 2006).

<Fig. 21>에서 홍건, 홍의를 입은 연배군의 복장을 확인할 수 있다. 연을 든 자는 액정서에 속한 인물이므로 홍직령을 입은 것으로 추정한다. 홍의가 뜻하는 바는 경우에 따라 각기 달라서 별감은 홍직령, 귀유치의 시위 복색은 철릭이다. 18세기에 이르면 독립된 직령 유물을 보기 어렵지만 단령의 받침옷으로 직령을 입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익정(1699~1782)묘 출토 단령을 바탕으로 시대에 충실한 직령을 제작할 수 있다. <Fig. 22>는 대한제국기의 유물로 추정되는 건으로 청건, 황건, 홍건 등이 있지만 자건은 없다. 자색과 홍색이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홍건이 자건을 대신한 것으로 추정한다. 두 겹의 무명사이에 심(芯)을 넣어 빳빳하게 하고, 직사각형의 봉투 모양으로 접어서 만들었는데 두겹 아래쪽에는 끈을 달아 턱 아래에서 묶도록 하였다(MCPA, 1981).


<Fig. 21> 
Palanquin bearers for king(CM, 2017, p. 64)


<Fig. 22> 
Geon[巾](MCPA, 1981, p. 18)

4. 견마부(牽馬夫)

사복시에 속하여 어마의 고삐를 잡고 임금을 모시고 따라 다니는 견마부는 <Fig. 23>에서 보다시피 황초립, 황의 차림이다. 마부의 쓰개가 황초립인 것은 순조대 『만기요람』에 잘 나타나있다. “각전(各殿)ㆍ궁(宮)의 별감과 사복시(사복내시ㆍ사복외시)의 거덜(巨達), 내취(內吹) 등이 착용하는 황초립이 1년에 450부가 소용된다.” 당시 황초립은 송도(松都)의 여공(女工)이 짜는 것으로, 매부의 값이 무명 1필이었다. 5)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에 보이는 <Fig. 23>의 마부는 황초립(黃草笠)을 쓰고 청의(靑衣)를 입었는데 소창의의 특징이 드러난다. 준천계첩에 보이는 마부의 황의 역시 소창의로 추정하며 바지의 색을 황색으로 제안한다.


<Fig. 23> 
Men for leading king’s horse(CM, 2017, p. 63)

5. 의장수(儀章手)

의장의 규모는 노부의 종류에 큰 차이가 있었다. 준천과 관련한 친림은 성내에서의 거둥이므로 (청)선(扇), (교)룡기(龍旗), 둑[纛], (홍)양산(陽繖), 수정장(水晶杖), 금월부(金鉞斧) 등 최소한의 의장이 따랐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수록된 「續儀城內動駕排班之圖(『속오례의』의 성내 동가시 배반도」와 「今儀城內動駕排班圖(『춘관통고』의 성내동가 반차도)」(Ryu, 1788)를 비교해보면 준천 당시의 의장은 규모가 단촐해진 『춘관통고』의 「성내동가 반차도」에 더 가깝다. 『속오례의』가 제정된 1745년 이후 『춘관통고』가 제정된 1789년 사이에 변화된 거둥절차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Fig. 25>는 왕이 거둥할 때 세우는 둑과 교룡기가 묘사된 각 장면의 일부분이다. 둑은 대가 앞이나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는 군기로서 승리를 의미하는 치우의 머리를 형상화하여 군대를 상징하는 최고의 형명(形名)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군사 통수권을 지닌 왕을 상징하였으며, 왕의 행차인 어가행렬의 선두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Park, 2017) 교룡기는 용기, 화룡대기, 황룡대기라고도 하는데 국왕의 강력한 상징으로 국왕이 거둥할 때 둑 다음에 세웠으며, 왕이 군대 친열 때 이 기로 각 영에 명령했다. <Fig. 26>은 준천을 하기 1년 전에 있었던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중에 보이는 둑과 교룡기를 든 인물로서 『준천계첩』의 인물들과 동일한 차림을 하고 있다.


<Fig. 24> 
Men for leading king’s horse(MMC, 2006, Banchado)


<Fig. 25> 
Duk and gyoryonggi(①CM, 2017, p. 64; ②CM, 2017, p. 62; ③CM, 2017, p. 63)


<Fig. 26> 
Duk and gyoryonggi(MMC, 2006, Banchado)

1) 교룡기 기수, 보조기수

교룡기를 든 중심인물은 당하관의 융복인 흑립을 쓰고, 철릭을 입었으며, 보조기수는 홍건, 홍의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교룡기 차비는 성내 거둥에도 말을 탔으며(Seungjeongwonilgi, Youngjo 41 Year, April 9), 그 모습은 <Fig. 2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철릭은 <Fig. 11>의 이익정묘 출토 철릭을 참고하여 제작할 수 있다. 보조기수는 연배군과 동일한 소속이며 복색 역시 동일한 것으로 본다.

2) 둑 기수 - 사모ㆍ흑단령

기는 국왕의 친위군인 금군(禁軍)이 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둑을 든 인물은 <Fig. 25>에서 보듯이 사모에 흑단령을 갖추었다. <Fig. 26>의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에서도 둑을 든 인물이 사모에 흑단령을 쓰는 동일한 차림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기타 의장차비

<Fig. 28>에서 보듯이 홍개, 홍양산 차비 뿐만 아니라 금월부 차비, 수정장 차비, 청선 차비들도 사모를 쓰고 흑단령을 입었다.


<Fig. 27> 
Flag bearers(CM, 2017, p. 63)


<Fig. 28> 
Geumguns in samos and gakdaes(CM, 2017, p. 65)

6. 시위관(侍衛官), 위사(衛士)

훈련도감은 국왕의 행행시 성내와 성외를 불문하고, 국왕 주위를 호위하는 것을 전담하였다.6) 도성 안 행차일 때는 훈련도감 전체인 오천 명 가량이 행렬선두와 행렬 뒤를 호위하는 선상군과 후상군의 역할을 담당했다(Kim, 2017). 종묘제례와 같은 중요 의식이 아니면 갑주를 갖추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준천계첩에서는 갑옷을 입은 인물을 볼 수 없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준천에는 위사를 액정서에서 차출하였다(Hong, 1760).

1) 금군

금군은 왕의 친위군이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별운검(別雲劍)이 왕을 시위하지만 보통 때는 금군이 왕을 호위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를 준비하는 반차도를 검토하면서 금군을 사모와 각대차림으로 그린 것을 보고 일산사지(日傘事知) 외에는 사모와 각대를 하는 일이 없도록 명한 바 있으나(MMC, 2006) <Fig. 28>에 나타나 있듯이 준천계첩에도 금군은 사모와 각대차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금군의 차림에 변화를 주지 않고 그대로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상황 그대로 시위하는 자들의 복식을 사모와 각대차림으로 고증하고자 한다.

2) 무예별감

왕을 시위하는 무예별감은 <Fig. 29>에서 보듯이 자건, 녹의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의복의 구체적인 형태를 알기 어려우나 『속대전』에 대소 조의(朝議)에 자적두건, 녹단령을 입는다고 했으므로 두건과 단령으로 추정한다. 『속대전』은 준천이후에 편찬된 것이나 편찬 이전부터의 관행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두건의 형태는 <Fig. 30> 을 참고할 수 있다.


<Fig. 29> 
Muyebyeolgams(①CM, 2017, p. 64; ②MMC, 2006, Banchado)


<Fig. 30> 
Dugeons(①Lee, 1997, p. 31; ②MCPA, 1981, p. 28)

3) 군병

전건이나 전립, 호의, 쾌자, 협수, 전대 등을 자신의 역할에 맞게 조합하여 군복을 착용하였다(Yum, 2014). 쾌자는 전복의 다른 명칭이라고 할 수 있어서 소매가 없고, 섶이 없으며, 맞깃, 혹은 깃이 없기도 하고, 무가 있으며, 뒤트임과 옆트임이 있는 점 등 전복과 동일한 특징을 가진다. 이에 반하여 호의는 무가 없다는 점이 쾌자와 다르다.

금군 전체는 국왕의 군사임이 분명하게 구분되도록 통일된 복색을 갖추도록 했으며 거둥시 군령에 신속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방색(方色)으로 각각의 대오를 구분하도록 했다(Eoyeongcheong-Dongga-Deungnok No. 2, Sukjong 17 Year, August 15). 왕의 주변을 호위하는 군병은 붉은색 호의를 입었고, 왕과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에는 각자 방향색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Yum, 2014). 한편 가마 뒤를 따르는 금군은 방색에 따라 요대(腰帶)를 매도록 했다. 단 홍색은 방색에 따른 금군의 요대에 적합치 않으므로 군복의 수구에 붉은색을 대도록 했다(Youngjosillok, Youngjo 23 Year, April 22). 방색은 좌청(靑), 중황(黃), 전홍(紅) 등이다. 해당 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방색의 표의(表衣), 전대, 머리장식 등을 갖추어 일사 분란한 위용을 이루었다. 전사대는 남색 협수에 홍색 호의를 입고 황색대를 맸으며, 후사대는 남색 협수에 황색 호의를 입고 황색대를 맸다. 그들을 이끄는 대장은 부대원의 복장과 대의 색에 차이를 두어 홍대를 맸다. 모반의 위험을 대비하고자 대장과 병은 다른 소속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Fig. 31>에서 보듯이 지휘를 하는 장교와 시위를 하는 군병의 복식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마 뒤의 금군, 어영청별초무사, (별초)금군, 금위영별 효위(驍尉-대위와 도위), 어영청 마병, 훈련도감 마병 등의 복색은 모두 전립, 전복으로 구성했다(Eoyeongcheong-Dongga-Deungnok No. 2, Sukjong 17 Year, August 15).


<Fig. 31> 
Gunbok wearers(CM, 2017, p. 64)

(1) 전건, 전립

전건은 훈련도감 초군(哨軍)이 썼던 모자로서 전건을 쓰고 방색호의를 입고 검을 차고 총을 메었다(Park, 2018). 전건은 훈련도감 군사만이 착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던 특별한 관모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금위영, 어청청, 총융청의 군사들도 착용했다. 정조2년, 훈련도감의 군사는 전건 (戰巾)을 쓰고 어영청의 군사는 전립(氈笠)을 쓰니, 다만 군제(軍制)가 같지 않을 뿐만이 아니다. 위내(衛內)에서 가까이 모시는 군사들도 전건을 쓰거나 전립을 써서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이후로는 어영청의 군사도 아울러 전건을 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하니, 어영대장 이국현이 아뢰기를, 마땅히 신의 영(營)에서 전건을 만들어 쓰겠습니다(Ilseongnok [日省錄], Joungjo 2 Year, December 1)고 하였다. <Fig. 31>과 <Fig. 32>를 통하여 전건을 쓴 자, 전립을 쓴 자들이 섞여 있는 것은 볼 수 있는데 이는 소속부대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파악된다. <Fig. 33>에서 전건의 특색을 확인할 수 있다.


<Fig. 32> 
Soldiers(CM, 2017, p. 63)


<Fig. 33> 
Jeongeon[戰巾](NRICH, 2017, p. 228)

전건을 제작하는 방식을 유물을 통하여 살펴보면 종이에 검정색 직물을 붙인 후 앞쪽만 세로 방향으로 주름을 잡아서 좌우가 3겹으로 겹쳐지도록 맞주름을 잡고 뒷심은 맞닿도록 형태를 만든 후 위쪽에 드림을 겹치고 상단을 가로로 꿰맸다. 모체의 양쪽에는 붉은 직사각형 장식을 하고, 직사각형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모체의 가운데는 둥근비늘[札] 형태, 아래쪽에는 둥근 산 형태를 색 선으로 표하고 드림에는 색 선으로 세로선 5줄을 붙이거나 그려서 꾸며주었다(Park, 2018).

직급이 낮은 병졸이 쓰는 전립(氈笠)은 돈모(豚毛)로 만들고 장식이 없으며 ‘벙거지’ 혹은 ‘벙테기’라고 불렀다. 전(氈)이란 짐승의 털을 다져서 두껍게 만든 무늬 없는 소재를 말하는데, 한자어의 전립(氈笠)은 소재의 특성에 따라 지칭한 것이다. 전립(戰笠)은 조선 후기 무관이 전쟁시 구군복을 주로 착용했기 때문에 생겼다.

(2) 호의

호의의 가장 큰 특징은 색으로 위치를 나타내는 것인데 『만기요람』에 따르면 호의는 모두 방위의 빛깔을 따라서 전초는 적색, 좌초는 청색, 중초는 황색, 우초는 백색, 후초는 흑색으로 했다. 깃은 모두 파총(소속된 部)을 따르며, 가령(加領)은 천총(소속된 司)을 따른다고 하였다. 방위에 따른 호의는 전투와 각종 군사 훈련 시 효율적으로 소속과 위치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고, 이는 행행시 위의를 높이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Yum, 2014).

전복은 삼각형 무가 크게 달려 있어 옆트임이 짧아도 되지만, 호의는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것처럼 무가 없기 때문에 뒷중심과 옆선을 진동선까지 전부 터서 활동하기 편리하게 하였다. <Fig. 34>는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품이다(NRICH, 2017). 보고서에는 전복으로 설명하였으나 무가 없고, 옆선은 완전히 트여서 진동 아래 끈으로 연결한 특징으로 보아 호의로 판단한다. 길이 124cm, 품 47.2cm이며 무명으로 되어있다.

금위영과 어영청 보군은 표의(標衣)가 없어서 행진 시에 소속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어려웠다. 대장도 병사를 인식하지 못하고 병사도 자기 대오를 인식하지 못하니 해당 영(營)에서 표의를 만들어 갖추어 거둥이나 조련 시 나누어 입도록 하고 대오를 이루어 오방의 제도에 준하도록 청한 바(Seungjeongwonilgi, Youngjo 19 Year, August 28) 군병 등에게 호의(號衣)와 더불어 운월상모(雲月 象毛) 1030건을 만들어 주었다(Seungjeongwonilgi, Youngjo 19 Year, September 24). 호의는 표의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명칭으로 쓰였다.


<Fig. 34> 
Houi[號衣](NRICH, 2017, p. 219)

(3) 협수

‘협수’는 좁은 소매를 뜻한다. 효종 때에 군복의 소매를 좁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Jungjosillok, Jungjo 1 Year, May 16). 처음에는 진동보다 소맷부리가 좁은 사선 형태의 배래였다가 점차 직선배래로 변했다. 협수의 소매 끝에 다른 색의 천을 달아 장식한 모습은 18세기의 회화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주황색 길에 홍색 소매가 달린 동다리와는 색상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트임의 특징은 동다리와 유사하여 뒤트임은 진동선 아래부터 트였고, 옆트임이 짧다. 길이는 바닥에서 1자 정도 떨어지도록 하였으니 길이를 짧게 하여 활동성을 높인 옷임을 알 수 있다. 제작법은 앞서 서술한 도청, 낭청의 협수와 동일하다.

(4) 전대

전대는 전복이나 호의 위에 매는 허리띠이다. 가례에 가마와 물건을 들고 가는 군인용으로 홍목대(紅木帶)를 마련하였으니(MMC, 2006) 군졸의 전대는 무명대로 고증한다. 왕이 궐 밖으로 나가는 행행시 왕이나 각 상급 장관 앞에 늘어서는 군병[전배(前排)]은 영조 10년(1734)에 홍전복으로 변경하였다.7) 준천계첩에 묘사된 군졸은 홍색 호의와 홍색 대, 청색 호의와 청색 대를 띠고 있으나 방위에 따른 식별은 어렵다. 어전의 영기는 홍색 단에 청색글씨를 쓰도록 하고 전배(前排)의 복색은 협연포수(挾輦砲手)의 예로 모두 홍호의를 착용하도록 했다(Seungjeongwonilgi, Youngjo 11 Year, August 12).

(5) 신

18~19세기 의궤 반차도에 나타난 군졸의 신발은 짚신으로 추정된다. 행군할 때는 계속 갈아 신어야하기 때문에 여러 켤레를 지니고 다녔다.

7. 하급관리[원역(員役)] - 서리(書吏), 서원(書員), 고직(庫直), 사령(使令), 사환(使喚), 문서직(文書直)

관(官)에 속한 하급관리[구실아치]는 서리 12, 서원 15, 고직 6, 사령 12, 사환 37, 문서직 2인 이있으며, 군의 각사(各司)에 속한 구실아치도 있다(Juncheonsojwamok, n.d.). 서리는 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의 구실아치로 개서(改書)와 산술대전을 다룰 수 있는 자여야 했다. 서원은 서리가 없는 관아에서 세금을 받는 임무를 담당했으며, 고직은 창고의 재물을 운영하는 최하위급 관리자로 고지기라고도 하였다. 사령은 잡무를 맡아보던 하급 관원 또는 심부름꾼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떠맡았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지금 여러 고을, 여러 진에 각각 조례(皁隷)가 있어 혹 일수(日守), 혹 사령이라 일컬으며, 혹은 군뢰(軍牢), 혹 나장이라 일컬어 정원이 없고, 또 월름(月廩월급)도 없다. 이리하여 이 무리를 임시로 마을 주인삼아서 그 포악한 징렴을 방만하게 하여 하민을 괴롭게 한다”고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하는 여러 구실아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구실아치들은 대개 부정적인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준천에 대한 비용을 출납하기 위하여 서리, 서원, 고직 등이 역할을 했고, 문서수발은 문서직이 담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사령과 사환은 잡다한 업무를 담당했다.

<Fig. 35>에 보이는 사령은 흑립을 쓰고 철릭을 입었으며, 서리는 무각평정건을 쓰고, 단령을 입었다. <Fig. 36>은 문효세자보양청계병의 일부로 문효세자와 보양관과의 상견례가 이루어진 행사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구실아치들이 행사장인 창덕궁 대은원의 외부에 모여 있는 장면이다. 겨울이라 난모를 쓰고 그 위에 각자의 신분에 맞는 관모를 쓰고 있다. 왼편에 분홍빛 단령에 조대를 띠고 흑건을 쓴 인물은 서리로 추정되며 그밖에 흑립에 철릭을 입은 사령이 보인다. 혜원의 「주사거배」에 묘사된 인물들을 별감, 나장, 사령 등 구실아치로 추정하는 바 흑립, 중치막을 입는 구실아치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Fig. 35> 
Saryeongs, Seories(MMC, 2006, Banchado)


<Fig. 36> 
Servants in a Government Office(National Museum of Korea, 2011, p. 76)


Ⅳ. 결론

동시대의 비교자료를 통하여 준천계첩에 묘사된 각 인물들의 품계와 신분에 따른 복식을 고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왕은 모화관에 거둥할 때 융복을 입은 경우 외에는 대개 시사복 차림이었다. 신하는 왕의 차림에 준하여 복색을 갖추었다.

왕이 시사복 차림으로 오간수문, 영화당에 친림했을 때 문관은 상복, 무관 당상관은 융복, 무관 당하관은 군복을 착용했으며, 왕이 융복차림으로 모화관에 친림했을 때 문관은 상복 또는 융복, 무관은 융복 또는 군복을 착용했다. 왕이 없는 잔치에서 문관은 시복, 무관은 융복 또는 군복을 갖추었다.

교외 동가였다면 문관도 융복을 착용했겠으나 준천과 관련된 행사에서 문관의 역할이 군사적인 일과 무관할 때는 융복을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문관은 현록색 단령, 품계에 맞는 흉배와 대, 사모를 상복으로 착용하였고, 시복으로는 당상관이 홍포, 당하관이 녹포를 착용하였다. 문관이 상복이나 시복을 입을 때 무관 당상관은 융복, 당하관은 군복을 입었다. 국왕이 융복으로 거둥할 때 훈련대장은 전복과 전립을 착용토록 하여 문관과 확연하게 구분되도록 했다. 무관의 군복은 문관의 상복이나 시복에 견줄만한 격이 있는 옷이었다. 군복은 전립, 협수, 전복 또는 쾌자, 대[전대(戰帶), 요대(腰帶)], 수화자(水靴子)로 구성되었으며 중군(中軍) 이하 제장관(諸將官)은 방색(方色)에 따라 전립, 전복을 갖추었다.

왕의 거둥에 따르는 연배군은 홍건ㆍ홍직령 차림이고, 견마부는 황초립ㆍ황색 소창의ㆍ황색바지를 입었다. 의장수 중 교룡기수는 당하관 융복인흑립ㆍ철릭. 보조기수는 홍건ㆍ홍직령, 둑 기수를 비롯한 그 밖의 의장차비는 사모ㆍ흑단령차림이었다. 시위관 중 금군은 사모와 각대차림이고, 무예별감은 자건, 녹의를 입었으며, 군병은 전건이나 전립, 호의, 쾌자, 협수, 전대 등을 자신의 역할에 맞게 조합하여 군복을 착용하였다. 하급관리 중 사령은 흑립을 쓰고 철릭을 입었으며, 서리는 무각평정건을 쓰고, 단령을 입었다. 그러나 하급관리의 경우 다양한 직종에 따르는 의복규정이 없고 근거자료가 부족한 상황이어서 차후 자료의 발굴과 더불어 세밀한 고증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Notes
1) 承政院日記, 영조 36년(1760) 4월 9일 계미, http://sjw.history.go.kr/宗廟夏享大祭親祭入侍時...上具遠遊冠ㆍ冕服-원유관(遠遊冠)은 면류관(冕旒冠)의 오기로 판단함/庚辰四月初九日卯時, 宗廟夏享大祭親臨後還宮擧動入侍時...上具翼善冠ㆍ衮龍袍Ibid., 영조 36년 2월20일, 庚辰二月二十日卯時, 上還宮擧動。歷臨興仁門入侍時...上具翼善冠ㆍ衮龍袍
2) 國朝續五禮儀補 卷2 嘉禮(奎1270), 殿下視事服圖說 “翼善冠 冠以毛羅裹之兩大角兩小角貼後向上”
3) 國朝續五禮儀補 卷2 嘉禮(奎1270), 殿下視事服圖說 “袍以大紅緞爲之…前後貼金五爪圓龍補袍左右肩同”.
4) 國朝續五禮儀補,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嘉禮(奎1270), 殿下視事服圖說
5) 萬機要覽 財用編四, 戶曹各掌事例 別例房 年例都下
6) 萬機要覽, 軍政編2, 訓鍊都監 陪扈
7) 萬機要覽 軍政編2, 訓鍊都監 陪扈

Acknowledgments

이 연구는 2019년 배화여자대학교 연구비 지원에 의해 수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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