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면갑(綿甲) 유물 분석 :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유물을 중심으로
Abstract
In the late 19th century, a specific type of cotton armor was developed in order to protect from bullets of Western arms. Only one cotton armor exists in the collections of Korean museum. Therefore, comparative study of the artifacts in the museums overseas was critical. A set of the cotton armor was examined at The Met in New York and later studied in comparison with a cotton armor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in Seoul. While the cotton armor is so rare to find in Korea, the author was able to locate several artifacts in the museum collections of other countries including the USA, France, Japan, and the UK. The examples abroad even include helmets, belts, and chest pads. The set of cotton armor of The Met has three components: a helmet, an armor, and a wide belt. The helmet and the armor were constructed with scores layers of cotton fabric overlay. There are a few amulet patterns including Om Mani Padme Hum and pomegranate, stamped on the fabric in black ink. Although Confucianism was the main philosophy of the Joseon Dynasty, the amulet patterns reflect people’s reliance on Buddhism and Taoism. They needed psychological protection for their life in addition to the physical protection. The name of the wearer was written in black ink inside of the helmet and the armor. The cotton armors in the collections of The Met and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showed great similarities with few minor differences. In conclusion, it is likely that the cotton armors were made by following an instruction regulated by authorities with the same specifications, such as structure, material, color and amulet patterns. They were possibly produced in large quantity for training soldiers under the initiative of the national authority or the military camp.
Keywords:
cotton armor, Korean armor, layered fabric armor, military costume, the late Joseon dynasty키워드:
면갑, 한국 갑주, 면갑, 군사복식, 조선후기Ⅰ. 서론
조선시대 군영자료와 실록, 『만기요람』 등 기록으로 남겨진 갑주는 종류와 수량이 풍부한 반면 실제로 전해지는 유물은 많지 않다. 게다가 국내보다 해외에 보다 많은 유물이 소장되어 있고 보존 상태 또한 나은 실정이다. 따라서 해외 소장갑주 유물에 대한 조사는 국내 소장품만으로는 풀지 못하는 부분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특히 무명 30겹을 겹쳐서 배자(褙子) 형태로 만든 면갑(綿甲) 유물은 국내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유일한데다가 투구나 다른 부속품 없이 갑옷 1점만 전해지고 있어 착용방식이나 제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 이 유물을 중심으로 면갑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CHA], 1987; Park, 2003; Park & Song, 2013), 2008년 국립고궁박물관의 ≪수자기: 136년 만의 귀환≫ 특별전에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당시 면갑을 착용한 채 전사한 조선병사의 사진과 함께 면갑이 전시되어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NPMK], 2008). 그러나 절대적인 유물 부족으로 인해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기 곤란하였다. 이에 해외소재 관련 유물에 대한 검색과 연구가 절실하다.
본 연구의 목적은 해외박물관에 소장된 면갑 관련 유물들을 찾아서 갑옷과 함께 착용한 품목, 제작과 착용방식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발견된 면갑 유물이 하나 뿐이고 국외에 같은 종류의 갑옷이 전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기에는 너무 두껍고 무거워서 실전용인지 성능실험용인지 판단이 어려웠다(CHA, 1987). 이후 연구를 통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의 기록과 사진 자료를 통해 실제 전투에서 착용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되었으나 정해진 형식과 제도의 존재 여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여러 유물을 조사하고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부분을 밝히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실물, 사진, 문헌자료를 조사하여 종합 분석하였다. 먼저 외국에 소장되어 있는 면갑 유물의 현황을 조사한다. 온라인 검색, 박물관에 자료 요청, 실측 조사 등을 통하여 가능한 많은 정보들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다음으로는 가장 파급력이 높은 박물관의 면갑 일습 유물을 실측 조사 후 정리 분석한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이며 특히 군사유물 전시관을 11개나 운영할 만큼 군사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박물관으로서 이곳에 소장된 면갑 유물 일습인 3점의 구조, 치수, 재료 등을 실측 조사한다. 마지막으로는 국내 유일의 면갑 유물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점을 해결하고 면갑의 특징을 밝혀낸다.
해외박물관에서는 조선후기 면갑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재료나 착용방법에 대한 오류가 적지 않다. 면갑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종합 분석을 통해서 국내 유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 해외에 소장된 유물까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Ⅱ. 해외박물관 소장 면갑 유물 현황
국립중앙박물관은 갑옷만 소장한 반면, 해외박물관은 투구와 여러 부속품들도 함께 갖춘 경우가 있다. <Table 1>은 현재까지 알려진 해외박물관 소장 면갑 유물을 정리한 표로서 이외에도 더 많은 박물관이 면갑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리라 예상된다. 미국의 경우 여러 박물관에서 면갑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뉴욕의 자연사박물관(AMNH: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에는 투구만 소장되어 있으나, 메트로폴리탄박물관(MMA: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에는 투구, 갑옷, 허리띠가 있고,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NMNH:the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에는 투구, 갑옷, 허리띠, 가슴가리개까지 갖추고 있다. 프랑스 앵발리드군사박물관(Musée de l'Armée)에는 갑옷만 소장되어 있으나, 일본 도쿄국립박물관(Tokyo National Museum)에는 투구와 갑옷이 소장되어 있다. 영국 피트리버스박물관(PRM: Pitt Rivers Museum)에는 투구, 갑옷, 허리띠, 가슴가리개의 갑주 뿐 아니라 무기와 가방까지 갖추고 있어 당시 군사를 보다 완성된 모습으로 재현할 수 있다.
<Fig. 1>의 뉴욕 자연사박물관(AMNH)의 투구(Catalog No. 70.0/ 3544)는 1927~1932년 경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에서 기증받은 것으로 <Fig. 2>의 유물카드와 목록에는 “이치가와(Ichikawa)에 따르면 티벳의 유물(Thibetan)”이라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박물관 홈페이지에서도 중국 국적의 티벳 문화 유물로 소개하고 있다(‘Helmet’, 2018). <Fig. 3>과 <Fig. 4>에서 투구, 갑옷, 허리띠로 구성되어 있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MMA)의 면갑 일습(No. 36.25.10a–c)은 무기수집가인 George Cameron Stone(1859-1935)이 경매로 구입한 유물로 전해지며, 1935년 11월 그가 타계하면서 박물관에 유증하였다(‘Fabric Armor and Helmet’, 2018; Stone, 1999). 1996년 12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린 ≪The Gods of War≫ 전시 도록 표지 뒷면을 장식하였으며, 도록에는 면직물을 30겹 겹쳐 만든갑주, 사용자로 추정되는 인물 이름의 묵서, 정신적 신체 보호의 의미를 가진 불교와 도교의 상징적 문양 등 면갑 유물의 설명이 상세히 적혀 있다(LaRocca, 1996). <Fig. 5>의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NMNH)의 유물(Catalog No. E128344-0)은 투구, 갑옷, 허리띠, 가슴가리개까지 갖추고 있다. 1887년 5월 3일 Dr. George Brown Goode(1851-1896)가 기증한 한국의 갑주로서 각 품목마다 세 글자의 성명이 쓰여 있고, 마(hemp)로 만든 갑옷과 투구에 산스크리트어 다라니경과 종이 부적에 사용되는 문양이 검정색 먹물로 찍혀져 있다(‘Ancient Korean Armor’, 2018). 앵발리드(Les Invalides)라고도 불리는 프랑스의 군사박물관에는 면갑의 갑옷만 소장하고 있고, 일본 도쿄국립박물관(Tokyo National Museum)에도 투구와 갑옷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박물관 소장품 검색으로는 유물 사진과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발간한 해외소장 한국 문화재 도록의 사진 <Fig. 6>을 보면 전형적인 면갑 투구와 갑옷으로서(The Korea Foundation Global Center, 1995), 다만 면갑의 착용법을 알지 못하여 투구는 뒤로 씌우고 갑옷은 앞으로 입힌 모습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박물관인 피트리버스박물관(PRM)에 소장된 면갑 일습은 <Fig. 7>과 같이 투구(No.1884.31.33.1), 갑옷(1884.31.33.5), 넓은 허리띠(1884.31.33.6), 가슴가리개(1884.31.33.7), 검(1884.31.33.2), 검집(1884.31.33.3), 매듭가방(1884.31.33.4)까지 총7점의 유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76년에 수집되었고 1884년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Fig. 7>은 옥스퍼드대학교의 보들리도서관(the Bodleian Libraries)에서 열린 ≪Korean Treasures:Rare Books, Manuscripts and Artefacts≫ 전시 때 전시판넬에 포함되었던 사진이며, “한국의 갑옷. 갑주는 마직물(hemp)을 두껍게 겹친 후긴 철조각을 덧대어 투구감투를 보강하였고 가슴과 이마에는 불교 만트라(mantra)인 옴마니반메훔이 있다.”고 해설하였다(‘1884.31.33 Suit of armour’, 2018).
해외박물관에 소장된 면갑 유물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 경매ㆍ구입ㆍ기증의 경로로 미국, 프랑스, 일본, 영국 등 여러 국가의 박물관에 입수된 면갑 유물은 6건 15점이었고, 각 박물관에서는 불교의 부적을 갑주의 문양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다만 외국의 갑옷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조사 정리과정에서 국적을 티벳으로 표기하거나, 재료를 마로 설명하거나, 갑옷이나 허리띠의 앞과 뒤를 잘못 착용시키는 등 오류가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나라마다 직물 태(態)가 다르기 때문인지 갑주의 재료를 면(cotton)이 아닌 마(hemp)라고 생각하는 박물관이 여럿 있었다.
Ⅲ.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면갑의 구성과 특징
1. 구성품목별 구조
투구, 갑옷, 허리띠(Fabric Armor and Helmet with Buddhist and Taoist symbols, 36.25.10a–c. Bequest of George C. Stone, 1935.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3가지 품목을 갖춘 유물로서 면직물을 여러 겹 겹친 후 누비지 않고 가장자리에 같은 천으로 선을 둘러 마무리하였다.
<Table 2>를 보면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투구는 조선후기 투구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투구감투, 차양, 뒷드림과 옆드림, 정수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투구감투와 차양은 가죽에 옻칠을 하거나 금속성의 강도 높은 재질이 아니라 무명을 여러 겹 겹쳐서 투구의 드림, 갑옷과 동일한 재질로 만들었다. 투구감투는 전ㆍ후ㆍ좌ㆍ우에 세로로 긴 4개의 금속 근철을 고정하여 전체적인 형태를 유지하였고, 위쪽 정수리장식은 간주 없이 반구형(半球形) 뚜껑인 개철과 그 위에 작은 구형(球形)의 장식 2개를 쌓아 올렸으며, 앞쪽 아래에는 작은 철제 차양과 무명 차양이 달려 있다. <Fig. 8>에서와 같이 4개의 근철 중 앞쪽 1개는 윗부분 중앙의 일부를 고리처럼 구부려서 개철의 하단의 직사각형 구멍에 걸어 고정하였고, 아래로 더 길게 만들어서 차양부분까지 연장하여 무명 차양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차양의 각도를 조절하였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투구 유물은 앞중심의 근철이 차양의 중간까지만 내려오지만, <Fig. 9>의 뉴욕 자연사박물관 투구나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 투구 등 다른 유물들을 보면 근철이 무명 차양의 끝부분까지 연장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세부치수를 살펴보면 투구감투는 높이 24.5cm, 하단둘레 62cm, 정수리장식은 높이 2.5cm, 직경 1.0cm와 2.1cm이다. 철제 차양은 너비 14.5cm, 깊이 3cm이며, 무명 차양은 너비 19.5cm, 길이 10.5cm이다. 드림은 옆드림 2장을 먼저 좌우대칭으로 고정하고 그 위에 뒷드림을 덮어 고정하였으며, 이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투구 드림의 구조와 일치한다. 그러나 뒷드림 길이 16cm, 최대너비 32cm, 옆드림 길이 14~15cm, 최대너비 26cm로서 일반적인 드림의 길이보다 짧고 넓은 특징을 보인다.
투구감투의 하단 둘레에는 차양과 드림이 두정으로 고정되어 있다. 앞쪽에 달린 무명 차양은 투구감투의 바깥쪽에 대고 두정으로 고정했고, 옆드림과 뒷드림은 투구감투의 안쪽에 대고 일정한 간격으로 두정을 박아서 고정했다. 두정과 근철 아래에는 가죽을 받쳐서 금속과의 마찰로 인한 무명의 손상을 방지하였다. 턱에 묶는 끈은 손상되어 결실되었으나 투구감투의 오른쪽 안감에 바느질로 연결한 부분이 남아 있다. 이를 볼 때 좌우 한 쌍의 끈을 턱 아래에서 묶어 착용하였다.
무명 여러 겹을 겹쳐서 제작한 투구의 중량은 1.87kg이며, 부위별로 두께 차이를 보인다. 차양은 2.3~2.6cm 내외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나, 드림부분 두께는 뒷드림 위쪽 1.4cm과 아래쪽 4.8cm, 옆드림 위쪽 2cm와 아래쪽 3.85cm으로 아래가 2~3배 더 두껍다. 이는 오랜 시간 경과하면서 중력에 의해 직물이 아래로 내려왔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원래 무명이 밀려 내려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드림 전체에 상하, 좌우 각 4~5cm 간격을 두고 바늘땀으로 고정했으나, 가장 안쪽까지 바늘땀이 미치지는 못하여 점점 밀려 내려온 것이다. <Fig. 10>은 두정 대신 실을 여러 겹 꿰어서 바늘땀 길이 0.6~1.3cm로 X자로 꿰매어 고정한 모습이다.
<Fig. 11>은 소매없이 앞길과 뒷길만으로 구성된 배자 형태의 갑옷으로서, 둥근 목둘레에 왼쪽 어깨만 트여 있어서 끈으로 여몄다. 진동 아래로 좌우 모두 끈이 두 쌍씩 달려 있어 스스로 입고 벗을 수 있는 구조이다. <Fig. 12>에서 세부치수를 보면 앞길이 96cm, 뒷길이 85cm로 앞이 뒤보다 11cm 가량 길며, 앞은 무가 없으나 뒤만 사다리꼴 무가 달려 있다. 트임이 없는 오른쪽 어깨는 솔기 없이 한 장의 옷감을 그대로 길게 사용하였다. 식서 방향의 직물 2장이 앞중심선과 뒷중심선에서 연결되었으며 품은 약 56cm이다.
목둘레선은 직경 약 13cm로서 착용하면 여유분 없이 목에 밀착될 만큼 밭게 파였다. 왼쪽 어깨의 트임 부분은 앞과 뒤가 17cm 가량 겹쳐져 있으며 앞길 왼쪽 어깨 중앙에 긴 끈이 1개 달렸다. 뒷길왼쪽 어깨부분에 사각형의 변색된 자국과 바늘땀 흔적으로 보아 끈이나 고리가 떨어져나갔으리라 추측된다. 진동선은 직선으로 어깨선에서 32cm 내려오는 지점에서 5cm 가량 안쪽으로 트임이 있다. 진동 아래로 앞길은 수직으로 길게 내려가고 뒷길은 아랫너비 8~13cm의 사다리꼴 무가 달려 있다. 길이 약 30cm, 너비 2.5~3cm의 끈 4쌍이 있는데, 좌우 모두 진동 바로 아래에 1쌍, 12~14cm 내려온 지점에 다른 1쌍이 있다. 다만 뒷길 왼쪽의 경우 윗끈은 중간에 끊어져 있고 아랫끈은 결락되고 바느질 자국만 남아 있다. 이상 갑옷의 구조를 종합해 보았을 때 왼쪽 어깨 트임을 벌려 오른쪽 어깨 위에 갑옷을 걸치고 왼쪽 어깨끈을 묶은 다음, 넓은 뒷길로 좌우를 덮고 그 위에 앞길을 덮은 후에 양쪽 옆선의 끈 4쌍을 차례로 묶어 입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확한 중첩 매수를 알 수는 없으나 손상된 부분을 통해서 안쪽에 무명 여러 겹을 겹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뒷도련에서 측정한 결과 두께는 2.34cm, 등솔기 시접이 겹쳐진 부분의 두께는 3.05cm, 중량은 6.2kg이다.
<Fig. 13>의 넓고 긴 허리띠는 아래는 직선으로, 위는 앞중심과 뒷중심 부분이 둥글게 올라오도록 완만한 곡선으로 제작하였으며 오른쪽 옆에서 두 쌍의 끈으로 묶었다. <Fig. 14>의 도식화를 보면, 길이 144.5cm, 너비 20~21cm이며 옴마니반메훔 육자대명왕진언이 찍혀 있는 앞부분 너비는 28.5cm, 문자 부적이 찍혀 있는 뒷부분 너비는 26.2cm이다. 길이 약 30cm, 너비 3cm의 끈이 양쪽으로 위, 아래에 달려 있으며, 겉에서 보았을 때 한 쌍은 왼쪽 끝에, 다른 한 쌍은 오른쪽에서 24cm 떨어진 부분에 달렸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오른쪽 앞부분에서 20cm 가량 겹치도록 두른 후 끈을 묶어서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허리띠 역시 투구, 갑옷과 마찬가지로 여러 겹의 무명을 겹치고 가장자리에 같은 천을 둘러 만들었으며 중량은 0.5kg이다.
2. 재료와 염색
투구, 갑옷, 허리띠는 모두 무명을 겹쳐서 만들었다. 겉감과 안감의 밀도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단 안감은 모두 동일한 옷감을 사용하지 않고 밀도가 다른 무명을 섞어서 사용하였다. <Table 3>의 ①에서와 같이 3회 측정하여 평균한 결과, 겉감의 경사밀도는 12.7올/cm이고 위사밀도는 14.3올/cm, 안감의 경사밀도는 12.3올/cm이고 위사밀도는 10.0올/cm이었다. 다른 부위의 안감 밀도를 측정한 결과 안감의 경사밀도는 13.3올/cm, 위사밀도는 11.3올/cm이었다. 갑옷을 400배율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겉감과 안감 모두 면섬유이고 바느질에 사용된 실은 마섬유였다. <Table 3>에서 섬유의 측면을 확인해 보면 ②겉감과 ③안감은 납작한 리본 모양에 천연 꼬임이 있는 면(綿)이고, ④봉제사는 마디가 있는 마(麻)이다. 즉 면갑 일습은 무명 겉감과 안감 등 여러 겹의 무명을 겹친 후 베실[麻絲]로 바느질하여 만들었다. 현미경 관찰 결과를 보았을 때, 현재 유물의 재료를 마(hemp)라고 설명하고 있는 미국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NMNH), 영국 피트리버스박물관(PRM) 등의 박물관의 면갑 유물 역시 면(cotton)일 가능성이 높다.
겉감, 가장자리를 두른 선단, 끈은 모두 붉은 갈색이 감도는 반면, 안감과 사이에 겹친 직물은 겉감보다 밝은 색이다. 겉감쪽에서 찍은 <Fig. 15>를 보면 찢어진 겉감 사이로 소색의 무명이 보이고, 안감쪽에서 찍은 <Fig. 16>과 <Fig. 17>에서는 안감에 비해 가장자리 천이 진한 색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Fig 18>은 ≪KOSCO Costume Exhibition≫에 전시했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면갑의 고증 재현품으로서 무명 30겹을 겹치되 겉감과 가장자리 선단을 소목(蘇木)으로 염색한 후 먹[墨]으로 인문(印紋)을 찍었다. 실제로 면갑 재현품을 제작해 본 결과, 소목의 염액은 선명한 붉은 색이지만 무명 등 면직물에는 염색이 진하게 되지 않아서 연한 붉은 빛을 띠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붉은 색이 갈변하여 현재 유물의 색상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3. 인문(印紋)
면갑 일습은 갈색 기운이 감도는 겉감 위에 검정색으로 여러 가지 독특한 문양을 날인하였다. “옴마니반메훔”의 산스크리트어 육자대명왕진언을 비롯하여 석류, 문자 등 원형의 부적(符籍)을 먹으로 찍었다. 조선시대 군영에서 갑의문판(甲衣紋板), 즉 갑옷에 문양을 찍기 위한 판을 새로 만들거나 보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Muwiso[武衛所], 1882). 평직 면직물인 무명에는 직조로 문양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대신 목판 도장을 새긴 후 먹물로 문양을 찍어서 표현하는 것이 상례였다(Park, 2003). 유교의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도교의 주술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부적을 문양으로 사용한 것은(LaRocca, 1996) 직물을 수십겹 겹치고 성능실험을 거쳐 방호력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방호력이 부족하여 심리적인 보호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Fig. 19>의 투구에 있는 문양을 위치에 따라 <Table 4>의 표로 정리하였다. 투구감투에는 4면 모두 똑같은 옴마니반메훔(唵麽抳鉢銘吽) 문양을 날인하였다.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혹은 육자대명주(六字大明呪)라고도 부르는 옴마니반메훔은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주문으로, 이 주문을 암송하면 모든 번뇌와 죄악이 사라지고 지혜와 공덕이 생겨난다고 한다(‘Yukjadaemyeongju’, 2018). 뒷드림에는 물로 인한 재난을 면하고[免水災] 복되고 영화로운 삶에 나아감[進福祿]을 의미하는 북악어부(北嶽御符) 문양을 찍고, 옆드림에는 아들을 바라고 자녀를 순산하기를 기원하는 [求子安産] 석류부적을 찍었다(Kim, 1987). 오른쪽과 왼쪽 옆드림은 같은 문양이지만 방향만 좌우대칭으로 바꿨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된 다른 투구 유물의 드림에도 동일한 갑의문판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주목해볼만하다. <Table 5>에서 유물번호 36.25.78 투구를 보면 드림에 날인된 문양은 <Table 4>의 유물번호 36.25.10a 투구의 드림 문양과 똑같다. 다만 드림의 형태가 좁고 길기 때문에 가로로 긴 문양을 90도 돌려서 세로로 길게 찍었을 뿐이다. 이 투구 역시 옆드림 2장의 문양이 좌우대칭이다.
갑옷에 날인한 문양은 도교에서의 삼황문(三皇文), 오악진형도(五嶽眞形圖)에 나오는 부적으로 각 위치별 부적 문양의 종류를 <Fig 20>과 <Table 6>에 정리하였다. 동악ㆍ서악ㆍ중악ㆍ남악ㆍ북악의 어부(御符) 5종이 있는데, 예를 들어 앞길 왼쪽 아래의 문양은 중악(中嶽) 어부로서 엄청난 재화를 부르는 [巨萬財貨] 부적이고, 앞길 오른쪽 아래의 문양은 남악(南嶽) 어부로서 다치거나 불로 인한 재난을 피하는 [免傷害火災] 부적이다(Kim, 1987). 뒷길 왼쪽 아래의 문양은 하늘의 복숭아, 천도(天桃) 혹은 반도(蟠桃) 문양으로 불로장수(不老長壽)를 의미한다. 뒷길 오른쪽 아래의 문양은 석류부적으로 아들을 바라고 자녀를 순산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Kim, 1987). 뒷길 왼쪽 아래의 문양은 투구의 뒷드림에, 뒷길 오른쪽 아래의 문양은 투구의 옆드림에서 반복된다.
<Table 7>에서 허리띠의 앞쪽 인문은 투구감투에서 사용되었던 육자대명왕진언, 즉 옴마니반메훔 부적이다. 글자의 순서나 위치도 일치하지만 문양을 찍을 공간을 고려하여 투구감투는 세로로 길고 가로로 좁게, 허리띠는 세로로 배열된 글자 4개의 간격을 좁게 하고 가로로 넓게 배치한 후 가장자리에 넝쿨문과 같은 테두리를 둘러주었다. 뒤쪽 인문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소원을 이루기를 소원하는 만사대길소원성취(萬事大吉所願成就) 부적이다(Kim, 1987).
<Fig. 3>과 <Fig. 4>의 사진을 보면 허리띠의 앞과 뒤 방향이 잘못 바뀌어 있다. 이는 면갑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에 촬영된 사진으로서 선행연구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면피갑(木綿皮甲)의 인문 위치와의 비교를 통해 이미 지적된 바가 있다(Park & Song, 2013). 여러 목면피갑유물을 보면 모두 앞쪽에 옴마니반메훔을, 뒤쪽에 만사대길소원성취 부적을 찍었으므로 면갑 역시 같은 위치에 같은 문양을 날인했으리라 추정된다. <Fig. 7>의 가슴가리개에서도 앞쪽에 옴마니반메훔 문양이 있다. 이로부터 군영에서 갑의문판을 보관하고 있다가 배자 형태의 면갑 일습은 허리띠에, 포 형태의 목면피갑은 앞길 좌우와 뒷길에, 직사각형의 가슴가리개는 가운데에 동일한 문양을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 묵서(墨書)
투구와 갑옷에 착용자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묵서가 남아 있다. <Fig. 21>을 보면 투구의 뒷드림 안감 오른쪽 아래에 “金仁祿”의 세 글자가 쓰여 있고, <Fig. 22>을 보면 갑옷의 뒷길 오른쪽 무 안감(뒷길 안감을 보았을 때 왼쪽 아래)에 “金齊○”의 세 글자가 흐릿하게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지워져서 육안으로 글자를 정확하게 판독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나 갑옷과 투구의 묵서를 보았을 때 다른 인물의 이름임은 확실히 구별된다. 즉 현재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된 면갑유물은 동일인의 일습 유물이 아니다.
허리띠에도 묵서가 있었으리라 예상되어 안과 겉을 면밀히 조사하였으나 묵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해외박물관 소장 유물 중에도 허리띠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 허리띠에도 착용자의 성명이 적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에는 갑옷이나 보관용품에 착용자나 소속기관을 표시하는 예가 종종 발견된다. <Fig. 23>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피갑(皮甲, 소장품번호 증 3570)은 갑옷의 뒷길 안감에 “金致衡(김치형)”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남아 있고 갑옷의 안감위에 부착된 가죽미늘[皮札]에는 “權命賢(권명현)”과 “朴宗後(박종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갑옷을 착용하거나 제작한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된다(‘Gabju’, 2018). <Fig. 24>의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갑옷(유물번호 OAs 7758d)은 오른쪽 길 안쪽에 붉은색 실로 “禁營(금영)”이라 수를 놓아서 금위영 소속 장수의 갑옷임을 밝혔고(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NRICH], 2013), <Fig. 25>의 갑주를 보관하는 상자[甲冑函]는 오른쪽 아래에 “訓左別(훈좌별)”이라는 명문을 새기고 붉은 주칠(朱漆)로 채워서(NRICH, 2013) 훈련도감 좌별초 소속 장수의 갑주를 담아서 보관했던 유물임을 명시했다.
Ⅳ. 국내 박물관 소장품과의 비교
<Fig. 26>, <Fig. 27>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면갑 유물과 비교해보면 대체로 비슷하나 몇 가지 차이점이 발견된다.
1. 유사점
첫째, 의복구성적인 구조와 형태, 크기가 거의 일치한다. 둥글고 밭게 파인 목둘레에 한쪽 어깨만 트여 있는 배자 형태의 갑옷으로, 앞길이보다 뒷길이가 더 길고 앞길에는 무가 없고 뒷길에만 무가 달려 있으며, 진동선 아래로 짧은 수평트임이 있고 양 옆으로 두 쌍의 끈이 있어서 묶어 입는 구조이다. 각 부위의 치수 역시 동일하거나 1cm 정도만 차이가 나며, 이는 제작과정에서의 개인차로 여겨질 수 있는 분량이다.
둘째, 제작방식과 재료, 색상이 유사하다. 세계갑주를 보았을 때 일반적인 직물 갑옷은 직물이나 솜 등을 겹친 후 누벼서 만든 누비갑옷이다. 그런데 본 면갑은 전혀 누비지 않고 <Fig. 28>처럼 여러 겹의 직물을 겹치기만 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수십 매를 누비는 공정에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소요되고, 누비지 않고 가장자리만 감싸서 둘러주어도 고정될 만한 면적과 구조이기 때문에 가능한 제작방식이었다. 무명을 수십 겹 겹치되 겉감과 가장자리를 감싼 옷감만 붉은 색 계통으로 염색하고 안감과 사이에 겹친 옷감은 소색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도 동일하다.
셋째, 인문의 문양, 위치, 크기 역시 거의 일치한다. 제직특성상 무늬가 없는 평직의 면직물인 무명 위에 먹으로 부적문양을 찍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유물은 갑옷만 전해지고 있어 다른 품목은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Table 8>을 보면 갑옷의 문양별 위치도 동일할 뿐 아니라 크기 역시 0~0.5cm만 차이가 난다. 이는 측정 시 오차, 직물의 손상, 날인용 목판 조각과정에서 생긴 차이이다.
넷째, 갑옷이나 투구 안쪽에 착용자 이름으로 추정되는 묵서가 남겨진 점도 공통된 부분이다. 비록 글자의 내용이나 위치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두 사람 이름으로 추정되는 세 글자가 쓰여 있다. 이는 면갑의 제작방식은 물론이고 관리의 제도가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2. 차이점
첫째, 가장 큰 차이점은 여밈의 방향과 수단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면갑은 오른쪽 어깨에서 매듭단추로 여미도록 제작된 반면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면갑은 왼쪽 어깨에서 끈으로 여미도록 만들어졌다. 뒷길에는 끈이 없지만 끈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직사각형의 얼룩과 바늘땀 흔적이 남아 있어 한 쌍의 끈으로 묶어 입었으리라 여겨진다. 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갑옷은 앞길 오른쪽 가슴 위쪽으로 고리가 있어 직사각형의 가슴가리개를 탈부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갑옷은 앞길 가슴 주변에 끈ㆍ고리ㆍ매듭단추 등이 남아 있지 않다. 미국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 유물, 영국 피트리버스박물관 유물 역시 오른쪽 어깨가 트여 매듭단추로 여미고 가슴 위쪽에는 엄심을 매달기 위한 매듭단추와 고리가 2~3쌍 달려 있다. 여러 유물들을 종합해보았을 때 국립중앙박물관 면갑은 보다 보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면갑이 어깨 트임 방향, 여밈수단에 있어서 구별되는 차이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묵서의 위치와 내용에 있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갑옷이나 투구의 안감에 세로로 쓰여진 세 글자의 묵서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Fig. 29>와 같이 국립중앙박물관 갑옷은 앞길 안감 진동 아래쪽 중앙 부분에 “孔君玉”이, <Fig. 22>와 같이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갑옷은 뒷길 안감 오른쪽 무 부분에 “金齊○”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투구는 <Fig. 21>처럼 뒷드림 안감 오른쪽 아래에 “金仁祿”의 세 글자가 쓰여 있다. <Fig. 30>을 보면 뉴욕 자연사박물관 투구는 머리가 들어가는 투구감투의 안쪽, 왼쪽 이마가 닿는 부분에 “崔○○”가 쓰여 있다. 즉, 당시에는 갑주의 안쪽에 착용자의 성명을 묵서로 쓰고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특정한 위치로 규정되지는 않았다. 이외에도 <Fig. 31>, <Fig. 32>의 미국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 면갑 유물(Catalog No. E128344-0) 카드를 보면 투구에 “金碩(頂?)文(Kim Sōk-mun)”, 갑옷에 “趙重琳(Cho Chung-nim)”, 허리띠에 “李益壽(Yi Ik-su)”와 “金致敏(Kim Chi-min)”의 성명이 검정색으로 쓰여져 있다고 하였다(‘Ancient Korean Armor’, 2018). 해당 면갑 일습은 투구ㆍ갑옷ㆍ가슴가리개ㆍ허리띠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허리띠에 2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허리띠 1점, 가슴가리개 1점에 각각 주인의 이름이 적혀졌을 것이라 판단된다.
셋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갑옷 안쪽에 보이는 일정한 간격의 녹슨 자국이 메트로폴리탄박물관소장 갑옷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갑옷 안쪽에 착용했던 옷은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Fig. 33>을 보면 뒷길 안감의 등 부분에 금속 녹으로 추정되는 얼룩이 규칙적으로 남아 있다. 갈색 얼룩의 배열은 갑옷의 두정(頭釘)의 배열 양상과 흡사하다. 아무리 충분한 매수를 겹친다 해도 면갑 만으로는 신체를 충분히 보호할 수 없어서 안에 두정이 박힌 다른 갑옷 혹은 내갑의(內甲衣)를 겹쳐 입었을 수 있다.
Ⅴ. 결론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등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고 총탄을 막기 위해 19세기 후반에 개발된 면갑은 국내에 갑옷 1점만이 전해지고 있어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부족하였다. 이에 연구자료 부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해외박물관에 소장된 면갑 유물을 찾아 현황과 입수경위를 파악하고 구성품목을 비교하였다. 여러 박물관 중에서도 군사유물이 풍부하고 세계적 파급력이 강한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면갑 일습을 실측 조사한 후, 국내 유물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면갑과 비교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확인하였다.
연구결과, 미국ㆍ프랑스ㆍ일본ㆍ영국 등 여러국가의 박물관에서 조선후기 면갑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무명을 수십 겹 겹쳐서 제작한 갑옷 뿐 아니라 동일한 방식으로 제작된 투구ㆍ허리띠ㆍ가슴가리개와 함께 착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대부분 19세기 말에 수집, 구입하여 이후 박물관에 기증 혹은 판매하였고, 간혹 전시를 통해 공개되었다. 소장박물관에서는 갑주를 착용한 병사들이 신체 보호와 각종 염원을 담아 불교ㆍ도교의 부적 문양을 겉감에 먹물로 찍었다는 해설과 안쪽에 착용자 혹은 제작자의 이름을 썼다는 설명도 제공하였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외국의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적, 재료, 착용방식을 잘못 이해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오류들은 앞으로 해당박물관과의 지속적 교류를 통해 조금씩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은 투구ㆍ갑옷ㆍ허리띠의 3가지 품목을 갖춘 유물로서 평직의 면직물인 무명을 여러 겹 겹친 후 누비지 않고 가장자리에 선을 둘러 마무리하였다. 갈색 기운이 감도는 겉감에는 옴마니반메훔의 산스크리트어 육자대명왕진언과 석류, 문자 등 원형의 부적을 먹[墨]으로 찍었다. 겉감과 가장자리를 두른 옷감은 붉은색 계통으로 염색하였으나 안감과 사이에 겹친 옷감은 소색 그대로 사용하였고, 베실[麻絲]로 바느질하였다.
투구(감투높이24.5cm, 둘레62cm, 중량1.87kg)는 투구감투, 차양, 뒷드림과 옆드림, 정개장식 등 조선후기 투구의 전형적인 구조를 갖추었으나, 부위별 재료나 형태의 차이로 인해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투구감투와 차양은 무명을 여러 겹 겹친 후 전후좌우에 금속 근철로 형태를 유지하여 딱딱하지 않고, 일반적인 투구의 드림에 비해 넓고 짧은 드림에는 두정 대신 여러 겹의 실을 X자로 징거서 고정시켰다. 정개장식은 간주 없이 반구형 뚜껑과 구형의 장식 2개만 쌓아올려서 전체적으로 짧고 간단하였다. 투구감투에는 4면 모두 옴마니반메훔을, 드림에는 북악어부와 석류 부적을 찍었다. 투구의 뒷드림 안쪽에 “金仁祿”이라는 인명의 묵서가 남아 있다.
갑옷(앞길이96cm, 뒷길이85cm, 품56cm, 중량 6.2kg)은 소매가 없는 배자 형태로서, 앞길은 길고 무가 없는 반면 뒷길은 조금 짧고 무가 달려 있으며, 둥근 목둘레선은 목에 꼭 맞도록 밭게 올라오고 왼쪽 어깨에만 트임이 있다. 앞길 어깨트임 중앙에 끈을 달아 여몄고, 겨드랑이 아래 양쪽으로 두 쌍의 끈을 묶어 착용했다. 앞길은 아래쪽 좌우, 뒷길은 위쪽과 아래쪽 모두 좌우에 오악(五嶽)과 석류 부적을 날인하였다. 갑옷의 무 안쪽에 “金齊○”라는 묵서가 흐릿하게 남아 있다.
허리띠(길이144cm, 너비21~28.5cm, 중량0.5kg)는 굉장히 넓고 길며 아래는 직선이지만 위는 앞중심과 뒷중심이 둥글게 올라오도록 곡선으로 만들었다. 오른쪽 앞부분에서 겹치도록 허리를 한바퀴 둘러 감싸고 오른쪽 옆선에서 위와 아래에 달린 두 쌍의 끈으로 묶었다. 허리띠의 앞쪽에는 투구감투에서도 사용되었던 옴마니반메훔을, 뒤쪽에는 문자로 이루어진 만사대길소원성취 부적을 먹으로 찍었다. 해외박물관의 면갑 일습 사진 중에서는 갑옷이나 허리띠의 방향을 거꾸로 착용한 경우가 있다. 목면피갑이나 면갑의 가슴가리개에 의거하여 위치별 문양의 규칙과 기준을 해당박물관에 알려야한다.
국내 유물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면갑과 비교해보면 거의 동일하나 몇 가지 세부적인 차이점이 있다. 유사점으로는 의복구성적인 형태ㆍ구조ㆍ크기, 제작방식ㆍ재료ㆍ색상, 인문의 문양ㆍ위치ㆍ크기, 갑옷이나 투구 안쪽에 착용자 이름으로 추정되는 묵서가 남겨진 점을 들 수 있다. 둥근 목둘레선에 한쪽 어깨만 트인 배자 형태, 뒤보다 앞이 더 길고 뒷길에만 무가 달린 구조, 진동선 아래의 수평트임, 좌우로 달린 두 쌍의 끈, 각 부위의 치수까지도 거의 일치한다. 수십 겹의 무명을 겹친 후 가장자리에 선을 감싸 둘러서 만든 방식, 겉감과 가장자리 옷감만 붉은색 계통으로 염색한 점도 비슷하다. 갑의문판, 즉 갑주에 사용되는 문양을 목판으로 새겨서 군영에 보관하였다가 위치별로 정해진 문양을 먹으로 찍었기 때문에 문양의 크기가 동일하고 위치도 일치한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당시 면갑의 제작과 관리방식에 일정한 제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차이점으로는 여밈의 방향과 수단, 묵서의 위치와 내용, 내부에 착용한 복식의 종류 등을 들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갑옷은 오른쪽 어깨에서 매듭단추와 고리로 여며 입었으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갑옷은 왼쪽 어깨에서 한 쌍의 끈으로 여몄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갑옷은 앞길오른쪽 가슴 위쪽으로 고리가 있어 가슴가리개를 탈부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갑옷은 앞길 가슴 주변에 끈ㆍ고리ㆍ매듭단추 등 아무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묵서를 보면, 갑주 안쪽에 이름을 쓰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 위치까지 정해져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명묵서는 지금까지 보고사례가 적지 않으나 한 번도 일치하는 이름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제작자이기보다는 착용자의 이름일 확률이 높다. 또한 일습유물이라해도 이름이 다른 것으로 보아 수집하는 과정에서 여러 착용자의 갑옷이 서로 섞였으리라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안쪽에 보이는 일정한 간격의 녹슨 자국이 메트로폴리탄박물관소장 갑옷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므로, 안쪽에 착용했던 옷은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연구를 통해 당시 면갑은 재료, 구조, 색상, 문양 등 일정한 제도가 정해져 있어서 규정에 맞추어 제작되었고, 국가 혹은 기관의 주도 하에 다량으로 제작되어 실전에 착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총탄을 막을 수 있도록 성능실험을 거쳐서 수십 겹의 직물을 겹치는 갑옷을 개발하였으나, 여전히 물리적 방호력이 떨어져서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주술적 힘으로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고 싶은 심리적 욕구가 부적 문양으로 표현되었다.
현재 면갑 외에도 여러 종류의 갑주와 군사복식 유물이 해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내 소장 문화재보다 수량과 보존상태가 좋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해당박물관에서는 전시기획이나 보존처리 순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국 유물에 대한 연구 결과를 해외박물관에 지속적으로 공유하여 크고 작은 오류들을 시정해나가야 하겠다. 나아가 현재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 등 해외박물관 소장품이 많기 때문에 면갑의 의미와 가치, 중요성이 밝혀지면 차후 전시품으로 기획되어 세계에 한국 갑주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I would like to express my great appreciation to Donald J. LaRocca and Kisook Suh of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Dr. Laurel Kendall and Katherine Skaggs of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for their generous support for my examination on the valuable artifacts in the museum col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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